오늘은 가야 할 곳이 엄청 많은 날이다.
동창회, 테니스, 그림 전시 모임, 전원주택 모임에 결혼식.
대부분이 송년 모임이다.
한 해를 마감하는 모임들이다 보니 다 나름의 중요도가 있고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그냥 접기가 곤란한 모임들이다.
나는 그중에서 어찌 보면 제일 중요하지 않을 법한 테니스 단식 송년 대회를 택했다.
매달 있는 모임인데 나는 올 해 딱 한번 가본데다 그 모임에 관련해서 외국 여행을 가야 할 일정도 있고 해서 아무래도 얼굴을 비추고 또 아는 사람들 만나서 테니스 이야기도 나누고 게임도 하면서 그 잘난 공 실력도 견줄 겸 그렇게 결정을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침부터 비가 온다.
비가 이상한 병 걸린 바람둥이 놈이 볼일 보듯이 찔끔 거리는 폼이 쉽게 그칠 것 같지도 않고 또 초겨울 비니 쉽게 마를 리도 없는 터라 아마 저녁 테니스모임은 싹이 노랗다 못 해 그냥 일거에 짓뭉개 질 판이다.
머리를 이리 저리 굴려보니 ‘최 길찬의 전원주택 이야기’이다.
가입한 지가 2년이나 되고 고정 칼럼까지 있건만 늘 주말에 모임이 있는 통에 다른 모임들과 겹쳐서 한 번도 모임에 나간 적이 없다.
미안한 마음도 덜 겸 또 집들도 구경할 겸 펜션의 낭만적인 밤도 즐겨 볼 겸 나는 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를 두고 갈까 가지고 갈까 하다 일요일에 서울서 다시 안성으로 내려가는 일이 만만치 않아서 그냥 차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집을 나서서 고속도로에 접어드니 시내방향이 비가 부슬거려서 인지 막힌다.
나는 출발지에서 같이 떠나기로 한 계획을 포기하고 중간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하남을 지나 팔당댐 바로 코앞 교각 밑에 차를 대고 어젯밤의 여행 모임으로 인해 모자란 잠을 보충하기로 하고 음악에 맞추어 눈을 부치니 금방 잠이 왔다.
뒤척이다 전화를 받으니 우리의 호프 젊은 대장이다.
점심을 같이 먹잔다.
아마 멀리서 별도로 혼자 오는 모양이다.
우리는 교각 밑에서 차로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양수리 입구에서 소머리국밥을 같이 먹었다.
우연찮게 들린 식당치고는 국밥 맛이 절묘하게 맛있는 것을 보니 이번 여행의 예감이 아주 좋다.
본 팀과 청평댐 근처에서 합류하기로 하고는 차를 한 대로 합쳐 비 내리는 양수리 길을 미끄러지듯 서서히 차를 몰아갔다.
추억어린 연탄난로가 천연덕스럽게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어느 휴게실에서 본팀과 만나 커피 한잔을 나누면서 서로 인사들을 나누었다.
언제나처럼 처음 인사는 부담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상하게 자기 이름은 우물우물 발음을 하는 통에 잘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알아듣는다 해도 내 경우에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외우기가 이름이다 보니 늘 건성일 수밖에 없다.
우
우중의 양수리.
학생들 이름도 한 학기가 다 지나가도 댓 명 외우기가 힘드니 참으로 이름 외우기는 난제다. 심지어 성도 다른 우리 집 애들 이름도 가끔씩 바꿔서 부르니 이것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고 의학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둘 있는 처남 이름도 언뜻 잊고 선친 존함 둘 중에 어느 것이 호적 이름인지 아직도 헛갈린다.
이런 한심함이 단박 치매로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때론 두렵기 까지 하다.
내가 토론토에서 만난 어는 70대 노인은 아직도 이름을 듣고 다시 확인하면 잊지를 않는다니 참으로 나와는 그 분야에서는 세상에서 극과 극인 분이다.
인사동에서 나가서도 늘 부딪히는 문제가 얼굴은 아는데 이름을 몰라서 쩔쩔매는 것이다.
나가기만 하면 그런 사람을 한 둘은 만나는 통에 아는 사람 만나기가 겁이 날 정도다.
이제부터는 조금 큰 메모장을 갖고 다니면서 이름 밑에 얼굴의 특징을 간략하게 그려 넣는 습관을 갖기라도 해야 그나마 남은 나머지 인생이 조금은 편하지 않을까 싶다.
나 같은 놈은 코밑 좌우로 작대기 선 하나씩 긋기만 하면 아주 간단해서 좋지만 얼굴이 좀 ‘밴밴한’ 사람들은 특징이 없어서 그것도 쉬운 노릇이 아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핸드폰을 이처럼 이름과 조그만 얼굴 사진을 같이 입력하게 만든다면 그 회사는 떼돈을 벌 것 같은데 아직 그렇게 까지는 개발이 안 된 모양이다.
사실 나는 비교적 전화번호는 잘 외우는 편이라 이름 잊는 것을 그것으로 조금 ‘카바’하곤 했는데 요즈음은 그놈의 핸드폰의 ‘이름 찾기’ 때문에 그도 다 꽝이 되 버렸다.
뺏어 간 것이 있으니 줄 것도 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빨리 그런 핸드폰이 나와야 할 것이다.
대충 수인사 행사를 끝내고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북한강변을 주름세우며 달려 이름도 희한한 ‘이니스프리’ 펜션이란 곳에 도착했다.
수더분한 주인 양반이 나오는데 외국의 유명산 등정대원으로 활약한 산악인이시란다.
겉으로만 본다면 나도 그럴 수 있을 듯하다.
뭐 다리통이 두껍게 보인다던지 얼굴에 근육 그림이 그려져 있다든지 손이 크다든지 하다 못 해 날렵하게라도 보인다든지 뭔가 시각적인 표시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평범 그 자체다. 산도 우리 ‘환쟁이’들처럼 정신력으로만 가는 길인가?
이니스프리 펜션에서 내려다 본 강.
이니스프리의 새집.
이니스프리의 거실에서.
그래서 인지 펜션의 위치가 유명산 등산로의 코앞이란다.
비안개에 서린 뒷산의 모습이 에베레스트 준봉의 어느 한 부분처럼 어슴푸레하기만 하고 앞 부분의 나뭇가지들 사이로 몽실몽실한 비구름과 안개들이 흩뿌려져 있는 강도 어느 깊은 산속의 호수 같게만 보인다.
사선을 넘다들던 등정의 추억을 이런 곳에 옮겨놓아 남은 인생을 아로새기고 싶은 주인의 바람이 오롯이 서려 있는 것만 같아서 질척이는 비와 함께 괜 실히 숙연해진다.
뭐든지 사선을 넘어서 이루어지는 일은 그처럼 남을 감동시키게 마련이다.
일자 형태로 산을 등에 지고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펜션의 모습이 특이하고 뒤로 해서 직접 방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구조나 ‘팬티 바람’으로 강을 내려다보라고(?) 만들어진 각 방의 방부 목 베란다 구조도 재미있다.
내부의 시설들도 새집이라서인지 나의 창고 형 작업실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다 고급이다.
사각거리는 소리로 잠이 올까 싶을 만큼 신품이다.
내가 초등학교 6년 소품 때 맨 날 형들의 헌 옷만 물려받아 입고 다니는 순대기 셋째 아들이 안 돼 보였던지 부모님이 처음으로 반팔 반바지 “때때 옷‘을 큰맘으로 사 주셨는데 꼭 그 때의 그 기분이다.
결국 부모님은 그 옷을 물리시고 나는 그냥 입던 검정 긴 바지에 회색 긴 팔 잠바로 땀을 뻘뻘 흘리며 소풍을 갔던 미련한 기억이 마침 여기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멋있는 ‘페치카’ 앞 탁자에 안주인께서 내놓은 고구마와 대추가 맛있었다.
특히 대추가 어찌나 맛나던지 여러 개를 거푸 집어 먹고도 또 주머니에 ‘꼬불치고’ 그것도 모자라서 대장이 가지고 온 대추도 차 속에서 내가 다 오물거려 씨만 뱉어 버렸다.
대추의 그 쪼글쪼글한 모습과 그 색 속에서 풍겨 나오는 정감어린 모습이 그 두 부부의 모습인 것 같아 더 맛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차를 얻어 마시고 우리는 또 머리로 비를 맞으며 차에 올라 강을 따라 어디론가 달려갔다. 사방은 비로 질척이고 시야는 넓지 않고 앞차 꽁무니만 따라 가는 관계로 동서남북의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이리 저리 따라 가다 보니 대명콘도가 나타나고 그것을 관통해서 다다른 곳은 ‘알투스’
알투스!
펜션이란 곳이 다 별천지이고 주인 들도 유별나듯이 이름들도 다 ‘희한 뻑적 지근’하다.
이곳이 좋아서 나중에 다시 오려고 마음을 먹었다 손 치더라도 난 또 이름을 기억해 낼 수가 없어서 그저 “뭐지? 뭐지?” 하다 찜질방 행을 결정하지 않을까 싶다.
애매모호한 시간의 알투서 앞 전경.
암튼 거긴 이름만큼 역시 유별난 곳이었다.
우선 따끈따끈한 황토방이 있어서 좋았다.
배를 바닥에 대니 배꼽으로부터 스몰 스몰 어릴 적 예날 이야기가 피어 오는 것만 같아서 여간 정감 어린 것이 아니었다.
죽은 큰 형수가 시집온 날도 아래 못은 이보다 더 뜨거웠기만 했는데 저승에도 이런 아랫목이 있는지 물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나 다 부질 없는 노릇이다.
역시 커다란 ‘페치카’가 있는 거실은 주인어른의 구수한 ‘갱생도’사투리처럼 넉넉해 보이고 여유로워만 보여서 보기가 좋았다.
겨울에 보드 타러 올 때는 꼭 한번 이용해 보고 싶은 그런 공간이란 생각이 간절했다.
이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종목적지의 바로 코앞 식당을 향했다.
홍천 외곽도로를 타고 가다 꼭 외계에서 지구를 정복 나온 우주인이 타고 있을 것 같기만 한 이상하게 요란하고 ‘뻑적지근한’ 교회를 지나 바로 들어선 곳은 ‘동해 동태 찜’ 식당.
이리 저리 자리를 배치해서 앉으니 음식이 금방 나왔다.
동해 동태 찜.
건배!
그 붉으죽죽한 색깔이 우선 내 맘에 쏙 들었다.
냄새에 약한 나는 남들처럼 처음에 냄새로 음식 맛을 감별하는 대신 색깔로 먼저 판단을 한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것은 내 입에서 뱉으리라!” 가 아니고
“애매모호한 색은 내 입 근처에도 못 오게 하리라!”가 나의 평소 신조 아닌 신조다 보니 특히 처음 대하는 음식은 그 색에서 잘못하면 초를 치기 일쑤다.
한 10년도 더 전에 일본에 처음 갔을 때가 그랬다.
우리나라 된장 비슷한 음식인데 그 색이나 모양이 어찌나 싫던지 날 초대한 일본인 내외가 죽기로 권하는 것을 결국 못 먹어 주고 말았는데 지금도 미안하다.
그 부부 화가가 그 뒤로 갈라졌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지금도 나의 어줍잖은 음식 감별법때문에 생긴 옹졸함을 자주 되씹곤 한다.
그렇지만 오늘의 동태 찜은 전혀 그렇지가 안았다.
색도 좋았지만 걸쭉한 모양태가 좋았다.
우선 젓가락을 가져가 그 속에 짱 박혀 있는 떡 볶기를 헤집어 들고 입에 넣으니 간사하고 얄팍한 내 입이 척 알아봤다.
내가 재수 할 때 종로 2가 와이골목에서 인사동 쪽으로 나오는 골목 중에 떡 볶기 포장마차집이 있었는데 그 맛이 절묘했다.
일반 가래떡을 사선으로 짤막히 잘라서 고추장에 버무린 그 절묘한 맛이란!
나는 학교에 들어 와서도 그 근처만 가면 배가 불러도 꼭 그 골목에 들려서 그 맛을 음미하곤 했는데 결국 나중 언젠가 그 곳이 없어져 지금도 그 앞을 지날 때면 언뜻 회상에 잠기곤 한다.
비록 그 때 그 떡 모양은 아니지만 그 때의 그 고춧가루 맛이나 그 절절히 양념이 배어진 떡 맛의 절묘함을 강원도 이 촌구석에 와서 다시 만나다니 저승에 가서 선친을 만나 뵌 만큼이나 반가운 노릇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어서 동태의 살을 젓가락으로 콕 짚어 입에 가지고 가니 그 맛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언젠가 설날 명절 때 성묘를 가는 중에 그 밑 동네 친척 형제들이 옹기종기 개천가에 모여서 불을 피워놓고 뭔가를 오무락거리기에 가보니 경칩개구리를 짚불에 구워먹는 것이 아닌가?
그냥 눈도 안 뜬 놈들을 불에 던져 넣고는 딴전 팔다 뒤적여 커내면 조그만 감자처럼 새카만 덩어리로 변한 형태가 나오는데 그것을 입에 넣으니 생긴 모습과는 달리 참으로 기막힌 맛이 아닌가?
그 때의 그 맛이 오늘 이 맛이다.
인생에 참으로 희한하게도 한 날 한 장소에서 이렇게 동시에 과거의 짝과 지금의 짝이 딱 맞아 떨어지다니 신의 조화라도 절묘하기만 하다.
적당히 매워서 입술이 조금은 얼얼한 양념의 맛도 또한 어릴 적 먹던 그 매콤한 그 맛인지라 그저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거기에 밥을 돌돌 말아서 먹는 맛이란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를 만큼이었다.
적당히 배가 차 와서 앞을 보니 오늘의 모임 대장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먹는다.
운동이 부족한 건지 일이 많은 건지 어제 밤을 설쳤는지 아니면 고춧가루만 봐도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이가 텔레비전이 나왔다고 하더니 그런 비슷한 체질인지 궁금하였지만 묻지는 못했다.
좀 있으니 우리가 갈 펜션의 주인내외가 왔는데 참으로 기가 막힐 정도로 ‘새파아랬다.’
아니 펜션 주인에 무슨 나이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렇게 젊어도 된단 말인가?
신세대인 그들 표정이나 모습들이나 어투가 사뭇 색달라서 나는 이래저래 놀라움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우리는 아쉽지만 그 자리를 털고 오늘밤 묵을 그 젊은 내외의 펜션을 향했다.
식당이 콧구멍이면 거기는 바로 콧잔등이었다.
우리는 적당히 어두운 시골길을 꼬불꼬불 가위질해서 가다 주변의 농토와는 전혀 안 어울리게 덩그런 하고 훤한 펜션에 도착을 했다.
역시 이름도 희한한 '오랜지 팩'인지 하는 펜션 전경.
공교롭게도 나는 정화조 위에 차를 대서 그 젊은 주인의 안내로 차를 빼니 이상한 소리가 바퀴에서 들렸다.
아뿔싸! 펑크다!
아무튼 올 해 내 차는 하찮은 일에도 조심을 해야 한다.
아마 차 살 때 제사를 안지내서 그 ‘해꼬지’가 올 해 다 몰려 오나보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 모두가 다 미련한 주인 탓이지 차가 잘 못 한 것은 하나도 없다.
스페어타이어도 못이 박혀 있던 것이니 난감한 노릇이다.
일단 다른 분의 도움으로 그것으로 바꿔 놓고 더 이상 바람이 빠지지 말라고 나무토막을 받쳐 두었다.
세미나를 한단다.
나누어 주는 선물과 함께 까치집이 원조라는 스틸하우스의 설명과 방 7개 이하여하고 수시로 법령이 바뀐다는 펜션에 관한 법규나 때로는 이윤 없이 지어준 시공 사례 등의 설명과 간단한 질문과 함께 세미나를 끝냈다.
이어서 시내 모임같으면 상례적으로 하는 행사가 노래방 행사이듯이 이런 곳에서 늘 하는 행사 바비큐 차례!
하지만 좀 다른 것이 이번에는 주로 하는 돼지 살 굽기가 아니고 석굴 바비큐다.
유별나게 ‘짭잘’해서 어린 시절 빈한함으로 절여진 내 입맛에는 딱 맞는다.
대충 난로나 숯불에 올려놔서 그 놈들 입의 힘이 조금이라도 빠지면 그냥 칼을 집어넣어 벌리면 그냥 내입으로 직행이다.
욕심 많은 나는 단 한 개도 남을 까 준 적이 없이 열심히 후다닥 먹었다.
하지만 이미 내 곱창은 동태로 꽉 채워진 상태로 수북한 석굴에 눈길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석굴더미.
나는 다른 모임에서처럼 오늘도 일착으로 이층 숙소로 발을 옮겼다.
방안은 역시 나 같은 놈이 비비작대기에는 호화롭고 깔끔하고 정갈하고 예뻤다.
새 옷도 입어 본 놈이 입는 것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나는 이를 닦고 얼굴 닦고 발 닦고 나의 애장품 귀마개를 꺼내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하고는 잠을 청했다.
어제의 부족한 잠이 밀려와 금방 침대를 동화속의 양탄자 삼아 기억 없는 꿈나라를 헤맸다.
일어나니 아침이다.
두 분이 바닥에 주무시는데 나의 귀마개의 위력으로 전혀 낌새를 몰랐으니 그 효염이 역시 기대 이상이다.
대충 세수를 하고 나오니 비온 날 다음날이라 그런지 날씨가 꽤 쌀쌀 했다.
밝은 날에 보는 집은 꼭 위치가 나의 작업실 위치다.
몇 채 안 되는 마을을 밑으로 하고 논 밭 들을 내려 굽어보면서 바로 뒤로 다른 집 한 채를 지고 있는 모습이 꼭 그렇다.
전체 풍광으로도 그저 깊은 산속도 호수도 냇물가도 아니고 커다란 마을도 아니고 주변의 농사 채가 조금 흩어져 있는 모습 등이 영락없는 내 작업실 주변의 재탕이다.
하지만 펜션의 모습은 정 반대다.
창고와 궁궐의 차이라고나 할까?
주인이 직접 깔았다는 ‘데크’도 좋았고 전문 설계사나 시공사가 대들어서 주물러 댄 집의 모양이나 실내 장식이 장난이 아닐 정도이다.
거기에 젊은 주인 내외의 정성이 첨가된 집안의 분위기는 우리같이 털털한 한 놈들이 드나들긴 사뭇 미안한 느낌이 드는 그런 곳이다.
졸졸 흐르는 개울을 따라가니 약수터 비슷한 공간이 있다.
플라스틱 바가지의 유혹에 못 이겨 한 모금 마시니 빗물인지 개울물인지 약수인지 도저히 구별이 안가는 애매모호한 물맛이었다.
내쳐 산을 오르니 낙엽들이 수북하고 산은 완만해서 그냥 구둣발이지만 오르기로 작심을 하고 발을 디뎌 본다.
추워서인지 산이 그리 깊지를 않아서인지 다들 아직 잠을 자는지 새소리도 조용하고 사방의 공기의 흐름만 서늘함으로 감지 될 뿐이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만들어낸 흐릿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서 능선에 올라 다시 주산봉우리 인 듯 한 능선에 잡아드니 미끄러운 구둣발로 오르기에는 제법 가파르다.
낙엽의 물기가 미끄러움을 가중시키지만 길을 벗어나기도 하고 낙엽을 치우기도 하고 손을 짚어 네발을 만들기도 하면서 '어거지'로 기어오르니 가파름은 끝나고 그냥 저냥 오를 만한 능선이다.
좀 더 올라가니 예비군 훈련용 긴 진지가 꼬불꼬불 길을 가로막고 있다.
간첩들이 주로 7부 능선을 탄다니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겠구나 하면서 오르니 이번에는 콘크리트 벙커가 나온다.
여기가 전방도 아닌데 이런 조그만 야산에 벙커를 지어 놓다니 희한한 느낌이 들었다.
꼭 벙커 구멍에서 기관총 구가 나올 것 같기도 하였다.
아니면 족제비라도 놀래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좀 더 오르니 잔디 대신 솔잎을 잔뜩 이고 있는 거의 허물어져 가는 무덤이 있다.
이렇게 높은 곳에 산소를 쓰다니 풍수라는 것이 여러 후손을 괴롭히다 결국 본인도 이렇게 초토화되고 마는 구나 싶었다. 그 풍수의 덕을 본 후손이 있다면 이렇게 버려진 묘로 남아 있겠는가?
하긴 나도 아버지의 묘를 버리다 시피 한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 풍수를 신봉한 선친의 효염이 언제나 나타날 지 성묘는 잘 안가도 일견 바라는 보지만 아마 괘씸해서라도 그런 효염이 작동될까 싶다.
조금 더 올라가니 드디어 산 정상이다.
정상이라고 해봐야 아무것도 없고 그저 조그마한 꼬챙이 나무에 꼭 거시기한 여자 치마 끝단이나 옷고름처럼 바람에 휘날리면서 그 붉은 색의 갈기를 휘날리고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더군다나 이런 나무들이 많은 산이 그렇듯이 정상에도 나무들만 무성해서 조망마저도 마땅치가 않으니 도데체가 정상에 선 아무런 감흥이 없다.
'개갈' 안 나는 산 정상.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서도 이런 감흥이라면 사람들이 그렇게 아까운 생명을 버리지는 않을 텐데 싶었다.
마치 군대 식사처럼 맛없는 식사가 오히려 위장을 보호하는 이치와 비슷하리라.
입맛만 쩝 다시고는 다시 온 걸음을 밟으니 언뜻 길을 놓쳤지만 아까의 그 벙커가 길안내를 한다.
마침 그 옆의 향나무를 잡고 미끄러운 길을 달래는데 이 나무가 어이없게 뿌리 채 뽑힌다.
모습은 멀쩡한데 죽은 나무다.
그런데 그 뿌리의 모습이 절묘하게 지팡이 하면 딱 맞겠다 싶어서 나는 노모를 생각하며 ,을 미끄럽고 여기저기 걸 지락거리는 중에도 그것을 꼭 부둥켜안고 내려 왔다.
아까의 그 가파른 낙엽이 수북한 곳에서는 가지 랑이가 몇 번이나 찢어질 뻔 했지만 용케 잘 내려 올 수가 있었다.
펜션 윗집의 사내가 내가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캐오는 줄 알고 째려보는 모습이지만
“안녕하세요?” 하니 표정의 변화가 없다.
우리나라 사람은 그저 무표정이 그래도 남는 장사다.
그나마 알량한 땀도 식으니 역시 몸이 으스스하다.
주인 큰 마님이 나오시면서 아침이 준비 되어 있다고 하신다.
어제의 그 세미나 실은 작은 식당공간이었다.
정갈한 반찬에 걸쭉한 누룽지 죽이 나오는데 사람의 정이 서려 있어서 그런지 맛이 좋았다.
나는 반 그릇을 더 시켜 먹었다.
이 정결함이라니!
조금 있으니 젊은 안주인이 한 살이나 되었을 법한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애를 안고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회사의 제일 잘 나가는 자회사의 연구원으로 내외가 있다가 어찌어찌해서 결혼하고 이집을 설계하고 시공한 대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지어서 살고 있다니 참으로 이해가 안갈 뿐이다 못해 걱정이 앞을 가렸다.
시골로 오게 만든 장본인!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대추 놔라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이 런 곳의 수입이란 것이 빤한 것 일 텐데 그 좋다는 직장을 쌍으로 때려 쳤단다. 그리고 오로지 사랑하는 애를 아스팔트 위에서 키울 수 없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이런 시골에 젊은 몸으로 내려와 자리를 틀었단다.
나는 그 어린아이의 걸음걸이처럼 그것이 사뭇 위태롭게만 보여서 난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 내외의 모습은 나의 우려어린 눈빛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세상의 거친 물살에 당당히 서려는 듯 자신만만했다.
오랜지 펜션 식당 실내.
이제는 이 젊은 내외의 인생이 달린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
한 사람이 자취를 감춰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나는 펑크 난 김에 아예 타이어를 갈을 심산으로 아까 안주인이 컴퓨터에서 찾아준 타이어 할인 가게로 향했다.
타이어를 갈고 있는데 대장한테 전화가 왔다.
사실 나올 때 나는 다시 돌아가던가 중간에 만나 남은 일정을 마무리 하려고 했는데
일정이 다 끝났단다.
어차피 나는 갈 방향이 다른 고로 그냥 전화로만 인사를 대신했다.
다른 회원들과 인사를 못 나누고 특히 그 젊은 내외에게 작별을 고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어차피 마음에 찍힌 집이고 사람들이니 오늘만 날이랴!
그저 그들 두 부부의 바람대로 길게 남은 인생이 날개 달린 듯 했으면 하는 마음 새 타이어에 붙여서 매달고 테니스 친구가 있는 원주로 향했다.
원주에서 친구를 만나 언젠가도 그 친구랑 먹던 국물의 우러남이 기가 막히게 감칠 맛이 나는 순댓국으로 점심을 ‘땡기고’ 서너 게임을 거푸 치루고 나서 좀 이른 저녁을 조금은 희한한 ‘염소 탕’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나서 안성 작업실로 차의 방향을 트니 역시 이번 여행도 나에게는 단 한 순간도 모자라거나 후회됨이 없이 꽉 찬 그런 시간들이었다.
아쉬운 것은 대부분이 여행길에는 뒤범벅이 돼서 어우러지는 늦은 밤시간을 이번에도 나는 그저 미련하게 잠으로만 때웠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 사이의 정은 그런 시간에 만들어 지는 것이건만 난 늘 언제나 정작 중요한 그런 시간을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 돌아와 이렇게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들만 주절거리니 조금은 한심스럽다 하겠다.
그래도 내가 그 분들께 주는 정은 짧은 술과 달리 길고, 길게 자는 잠버릇과 달리 선명하고 깊게 느껴 지기를 바래본다.
첫댓글 우리나라도 에전과 달리 예쁘고 멋진 전원 주택들이 많이 생겼지요.저도 꼭 저에 손으로 짓는것이 꿈입니다^^그때는 오셔서 재미있는 추억과 정있는 소주한잔^^잠만 자는 이유는 옆에 누군가 없어서 그런듯..좋은 사람있음 팍팍 밀어드리죠^^*
흐르는 강물처럼이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눈으로 보이는 것을 마음에 담아서 글이라는 막을 씌워..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여행담............잘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