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 - 금수현 곡, 김말봉 시 / 송광선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 번 구르니 나무 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하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장모(김말봉)-사위(금수현) 작사/작곡한 국민애창가곡 ‘그네’
1948년 한국가곡발표회에 처음 소개, 음악교과서 실려···부산시 강서구 대저1동에 ‘노래비’, ‘금수현 음악거리’도 생겨
[여성소비자신문]
부산에 ‘그네 노래비’(‘금수현 노래비’)가 있다. 음악인 금수현(金水賢)을 기리고 향토애를 높이면서 문화명소로 꾸미기 위해 부산시 강서구청이 1992년 2월 세운 것이다. 부산 강서구 대저1동 사덕 상리마을 앞 낙동강 제방에 세워진 노래비는 높이 4m, 지름 2m 크기다.
반원형 검은색 대리석판에 가곡 ‘그네’ 악보가 작곡가의 친필로 새겨져 있다. 옆엔 금수현 동상도 있다. 곡선원통은 ‘그네’의 율동과 낙동강 흐름을 나타냈다. 악보 아래쪽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버튼이 있다.
제작은 금수현의 둘째 아들(조각가 금누리)이 맡았다. 강둑 아래 길 건너엔 금수현의 생가 터가 있다. 그가 어릴 때 낙동강을 벗하며 음악적 감각을 키운 곳이다. 노래비는 강서구청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대저1동 옛 구포다리 입구에서 대상초등학교 입구까지 도로(길이 570m, 너비 15m)엔 ‘금수현 음악거리’도 있다. 강서구청 뒷길 쪽으로 2014년 5월 지정됐다. 도로 양쪽엔 음표, 바이올린 등의 조형물들이 세워졌다. ‘그네’ 노랫말, 금수현 선생 관련기록들도 새겨져 있다.
토속적 맛 나는 두 절의 짧은 노래
김말봉 작시(作詩), 금수현 작곡의 ‘그네’는 우리나라 토속풍속의 맛이 나면서도 낭만적 모습이 떠오르는 가곡이다. 멜로디가 단순하고 온음계만 썼지만 서정성이 넘친다. 두 절의 짧은 노래지만 5월 단옷날 처녀가 그네를 타는 모습이 그려진다.
결이 고운 모시한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그네 타는 풍경이다. 노래는 8분의 9박자의 변화된 5음계를 썼다. 우리 민요가 가진 3박자의 변용을 느끼게 해줘 시의 내용이 잘 녹아있다.
단순한 반주부에 오밀조밀하고 부드러운 멜로디에다 감각적인 면까지 갖췄다. 이 노래가 실린 음반만도 20여 종에 이를 만큼 국민애창가곡으로 유명하다. 금수현의 대표곡으로 1948년 한국가곡발표회 때 처음 공식 발표됐고, 이후 중·고생 음악교과서에까지 실려 널리 알려졌다.
노래에 얽힌 사연들이 있다. 장모와 사위가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였다는 점이 이채롭다. 작사가 김말봉(장모)과 작곡가 금수현(사위)의 합작품인 셈이다. 특히 원래 이름이 김수현인데 금수현으로 바꾼 작곡자가 민족주의사상을 바로 세우는 과정에서 만든 곡이어서 의미가 깊다.
노래가 태어난 건 1946년. 그해 금수현은 경남여고 교감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날 장모 김말봉이 교감사택으로 찾아왔다. “금 서방, 내가 쓴 좋은 시가 하나 있는데 작곡해 보려나?”라며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로 나가는 시를 보여줬다.
금수현은 “아, 그네 뛰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좋은 시네요. 악상이 떠오르는데 당장 곡을 붙여 보겠습니다”라며 오선지에 곡을 쓰기 시작했다. 작곡은 15분만에 이뤄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네’는 ‘음악주보’에 악보가 실려 서울에까지 알려졌다. 노래는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국민애창곡이 됐다.
국내 최초 ‘월간음악’ 잡지 창간
이후 금수현의 음악활동은 활발했다. 우리 음악사에 남는 아리아 ‘심봉사의 슬픔’, 기악곡 ‘새벽의 바다’, 오페라 ‘장보고’를 작곡했다. 문교부 편수관 땐 음악용어를 만들고 표준음악교과서도 펴냈다. 초창기 부산 서양음악 문화개척자로 우리나라 서양 음악계 디딤돌을 놨다.
금수현은 1919년 7월 22일 김해(부산시 강서구 대저1동 전금마을)에서 태어났다. 호적상 한문표기는 金守賢(본관 김녕). 정미업과 땅콩재배를 하던 김득천 씨의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란 금수현은 초등학교 학예회 때 담임선생님 칭찬에 힘입어 한평생 음악 삶을 살았다.
“금융가나 사업가가 돼라”는 아버지 뜻에 따라 부산제2공립상고(현 개성고)에 입학했으나 졸업 후 일본 동양음악학교 본과에서 성악(바리톤)을 전공했다. 1941년 5월 귀국해선 부산좌(현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갖고 벗들과 김해, 마산, 삼천포, 통영 등지로 순회공연도 다녔다.
1942년 4월 동래고등여학교 음악교사가 돼 소설가 김말봉의 딸 전혜금을 만나 1943년 10월 27일 결혼, 금난새를 낳았다. 전혜금은 금수현의 제자로 동래고등여학교를 나와 인천지역 교단에 섰다. 김말봉은 전혜금의 의붓어머니다.
금수현은 1946년 경남음악협회를 결성, 초대회장이 돼 경남음악콩쿠르를 열었다. 1947년 경남도립극장장이 되고선 매달 쟁쟁한 음악가들을 초청, ‘희망음악회’를 열었다. 1949년엔 음악인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노래하자회를 만들었다. 쉬운 노래를 만들어 매달 미국공보원에서 청중들과 부르는 개창운동을 펼친 것이다.
경남여고 교감, 부산사범학교 교감을 거친 그는 1952년 34살에 경남여중 교장이 됐다. 이어 △1956년 2월 통영고 교장 △1957년 문교부 편수관(6년 근무) △1963~65년 국제신보 고문(칼럼집필) △1965년 ‘영 필하모니관현악단’ 이사장 △1968년 금잔디유치원 설립 △1970년 ‘월간 음악’ 창간 등 활동은 이어졌다. 1972년 음악저작권협회장, 1982년 한국작곡가협회장, 한성로타리클럽회장도 지냈다. 그는 당뇨합병증으로 1992년 8월 31일 별세했다. 향년 73세.
김(金)씨→금씨로 바꿔 사용
금수현은 성이 김(金)씨임에도 금씨로 바꿔 눈길을 끈다. 그는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말을 아끼자며 자녀들 성까지도 바꿨다. 한글사용 선구자 역할을 한 점을 인정받아 제10회 외솔상(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을 기리는 상)을 받았다.
그의 아들 금난새는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이름이 ‘하늘을 나는 새’란 뜻이다. 우리나라 최초 순한글이름”이라고 말했다. 그는 1992년 아버지, 2017년 어머니가 별세하자 2018년 상속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담당 공무원이 “상속신청서상과 가족관계증명서상 성이 달라 상속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을 올릴 때 금씨 성을 김으로 표기했던 것이다. 이에 금씨는 “가족관계등록부상 성을 금으로 바꿔 달라”며 소송을 냈다. 1심, 2심은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성은 바꿀 수 없다며 금씨에게 패소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2020년 1월 대법원은 이를 뒤집었다. 금씨 집안이 순우리말을 쓰려는 생각으로 광복 후 성을 ‘금’으로 썼고, 금씨도 출생 후 각종 사회적 활동에서 ‘금’으로 썼다며 금난새 씨 손을 들어줬다.
노랫말 쓴 김말봉은 소설가
‘그네’ 노랫말을 쓴 김말봉은 1930~50년대 소설가다. 1901년 4월 3일 밀양서 태어난 그녀는 서울 정신여학교를 거쳐 일본 다카네 여숙(高根女塾),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2년 보옥(步玉)이란 필명으로 중외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망명녀’가 당선, 소설가로 활동했다.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해 통속소설작가로 각광받았다. 사람들의 애욕문제를 많이 다뤘다. 1945년 광복 후엔 사회성을 띤 소설을 쓰기도 했다. 대표작은 1956~57년 조선일보 연재소설 ‘생명’. 그는 1961년 2월 9일 세상을 떠났다.
금수현의 아들 금난새도 음악계 큰 인물이다. 1947년 9월 25일생인 그는 지휘자로 유명하다. 그는 서울예술고,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한 뒤 1967년 클래식 음악편곡가로 데뷔했다. 우리나라에서 지휘를 배울 수 없던 시절 그는 독일 베를린국립음악대의 Hans-Martin Rabenstein 교수를 찾아가 지휘를 공부했다.
1977년 4년 만에 베를린 음대를 졸업, 카라얀 국제지휘콩쿠르에서 4위로 입상해 지휘자로 정식데뷔했다. 이후 KBS교향악단을 12년간 이끌었고 1992년엔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가 됐다.
한해 10회의 연주에 머물던 수원시향을 60여회 이상 연주하는 악단으로 키웠다. 예술의전당 기획프로그램(‘해설이 있는 청소년음악회’)을 기획, 6년간 전회·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1998년엔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현재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로비음악회’, ‘도서관음악회’, ‘갤러리음악회’, ‘울릉도음악회’ 등 방방곡곡을 다니며 클래식대중화에 앞장섰다.
2006~2010년 경기필하모닉, 2010~2014년 인천시립교향악단을 이끌었고 2015년부터는 성남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및 예술총감독을 맡았다. 한국경제신문사가 창단한 한경필하모닉 초대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도 위촉(2015년 9월부터 3년간), 기업의 문화예술참여의 새 모델을 보여줬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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