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이실라
꿀맛과도 같았던 일주일의 휴식이 끝나자 지오는 일행을 독려하며 다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신기록이었다. 이번에 이아타를 넘는다면 올해만 네 번을 넘는 셈이다. 지겹도록 대륙을 떠돌았던 지오조차도 이렇게 자주 이아타를 넘은 기억은 없었다. 1년이 되기도 전에 대륙의 반을 횡단한 것이다. 사실 지금 가장 이아타를 넘기 싫은 사람은 지오였다. 강행군을 한 것도 있지만 보름마다 찾아오는 생생한 고통이 요즘처럼 힘든 때도 없었다. 예전처럼 정신이라도 잃었으면 좋으련만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이유도 모르고, 물어볼 사람도 없기에 그저 빨리 병이 낫기를 바랄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아직도 완전히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지오는 맨 먼저 여관을 나왔다.
“젠장, 여전히 사람들이 많군. 게다가 대부분 잘난 척 잘하는 마법사라니!”
마법사 협회의 회의가 끝난 지도 며칠이 지났지만 마법의 도시라 불리는 엘디아는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대륙 곳곳에서 마법사 회의를 핑계로 따라온 마법사들이 아직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어느 곳보다 마법사가 많은 곳이다 보니 볼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았다. 마법사에게 있어 엘디아는 성지나 같은 곳이었다. 어차피 마법사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수석 마법사를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관광이나 공부를 위해 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정이 바쁜 수석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간 뒤에도 엘디아를 떠나지 않은 마법사는 많았다. 그래도 많이 한가해진 편이었다. 수석 마법사를 수행하고자 왔던 수많은 기사와 궁수가 사라진 탓이다. 예전 같으면 간단히 워프를 이용하여 회의에 참석하고 다시 돌아갔겠지만 워프가 불가능해진 지금은 오로지 육로나 해로를 통해 움직여야 했고, 호위병사가 잔뜩 따라다녀야 했다. 지오로서는 크로티스의 수석마법사와 호위병사들이 가버린 것이 가장 기뻤다. 벨쿤과 관련한 사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장 최근에 벌였고, 가장 크게 벌렸던 일 중 하나인지라 내심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지오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크로티스에서 온 이들 중 일부가 아직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지오를 목표로….
“로빌? 로빌 벨런?”
골렘보관소에서 로나가 로바를 데리고 나오길 기다리던 지오는 친근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빌 벨런은 자신의 본명이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이름이라 그저 자신이 쓰던 여러 가짜 이름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의 본명을 아는 사람이라면 껄끄러운 일이었다. 불렀던 남자는 지오가 돌아보자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로빌이 맞군. 정말 오랜만이야. 내게 빌려간 금화 두 개는 잘 보관하고 있어?”
지오는 가까스로 그를 기억해냈다. 도반에 있을 무렵 큰 돈을 벌게 해준다는 것을 미끼로 돈을 뜯어냈던 남자였다. 아주 오래된 일이라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일단 자신에게 이로운 만남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지오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일부러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내 이름은 로빌이 아니야. 당신은 누구지?”
그러나 남자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하, 벌써 내 이름을 잊었군. 나라고! 네가 멋지게 사기를 쳐서 빈털터리가 되었던 빈스라고. 내가 설마 너를 잊어버릴 줄 알았어? 내가 지난 시절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 7년 동안 죽어라 모았던 2골드를 날름 훔쳐간 너 때문에 말이야.”
지오는 그가 자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덩치와 팔뚝에 있는 커다란 흉터가 새삼 위압감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그의 뒤쪽에는 동료로 보이는 이들이 셋이나 있었다. 모두 싸움 깨나 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지오는 이 위기를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했다. 이곳은 고위마법사가 많았다. 빈스라는 이 남자가 지오를 죄인으로 취급하고 고위 마법사에게 데려가면 곤란한 일이 많이 생길 수 있었다. 지오는 레미를 데려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다른 동료 역시 도시 외곽에서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고 2골드를 순순히 준다는 것은 사기꾼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지오는 그제야 생각이 난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헤헤, 난 또 누구라고. 빈스였군. 잘 지냈어? 도반에서 지내는 줄 알았는데 여기에는 무슨 일이야?”
빈스는 그제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 녀석이 날 빈털터리로 만든 덕에 여기저기 많이 떠돌아다녔지. 요즘은 이곳에서 고위 마법사 한 분을 수행하는 일을 하는데, 그분이 꽤 유명한 분이라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게다가 오늘은 뜻밖의 수입을 5골드쯤 올릴 것 같군.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이자로 3골드는 받아야겠지?”
빈스의 말에 뒤에 있던 남자들이 맞장구를 친다. 슬쩍 단검을 꺼내 보이는 녀석도 있었다. 고위 마법사를 모시는 사람이라면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5골드나 준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지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결론은 하나였다.
“헤헤, 당연하지. 그 돈으로 내가 돈을 좀 벌었거든. 이번에 그래서… 앗! 이 자식 잘 만났다!”
지오는 말하다 말고 옆을 지나가는 멀쩡한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눈 깜빡할 사이의 일인지라 멱살을 잡힌 남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말문이 막혔고, 그러는 사이에 지오는 화가 난 표정으로 마구 말을 해댔다.
“네가 여기 있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았지? 내 아내를 어떻게 했어? 대체 내 아내를 어떻게 한 거야?”
“뭐…뭐야? 무슨 아내?”
남자는 놀라 말을 더듬거렸고, 지오의 그럴싸한 연기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분노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지오는 일부러 멱살을 쥔 손에 힘을 풀었고, 남자가 제풀에 나가떨어지자 소리쳤다.
“도망가려고? 그냥 보낼 수는 없다! 당장 치안대를 부르겠어!”
사람들이 더 모여들자 빈스와 지오의 사이는 좀 더 벌어졌고, 기회를 노린 지오는 넘어지는 척하면서 모여든 군중 사이로 몸을 뺐다. 사람들은 지오가 치안대를 부르러 간 줄 알았지만 빈스는 아니었다. 재빨리 사람들을 헤치고 지오를 따랐다. 그러나 재빠른 지오의 몸은 이내 다른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고, 느닷없이 죄인으로 몰린 남자는 넘어진 상태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헤헤, 감히 나를 상대로 돈을 뜯어낼 생각을 하다니! 고위 마법사 밑에 들어갔으면 그럭저럭 잘 풀린 거구만 왜 불쌍한 나를 털려고 하는 거야?”
지오는 중얼거리며 재빨리 어느 여관 뒷문을 거쳐 작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아직 완벽히 따돌린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부터 변장을 해야 했다. 일단 머리에 두건을 썼고, 아깝긴 했지만 녹색 눈이 갈색으로 바뀌는 약도 먹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잘 접어둔 망토를 꺼내 둘렀다. 마법사처럼 보이는 이 망토는 지오의 모습을 잘 감춰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동료만 만난다면 빈스 일당 정도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만족한 표정으로 안대를 벗으며 골목을 다시 나오려던 지오는 배에 강한 충격을 받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낄낄낄!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이곳 지리는 내 손바닥 안이거든!”
빈스는 지오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렸다. 지오의 발이 공중에서 흔들린다.
“마음이 바뀌었다. 너 같은 비열한 사기꾼에게 돈을 뜯어내기보다는 그냥 감옥에 집어넣는 것이 낫겠어.”
지오는 멱살이 잡혀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사정하며 말했다.
“제…발 목 좀 놔줘. 내가 줄게. 주면 되잖아. 5골드 다 줄게. 아니 10골드 줄게.”
빈스는 잠시 눈빛이 흔들렸지만 이내 지오의 멱살을 더욱 그러쥐었다.
“웃기지 마! 네가 그만큼 돈이 있을 리가 없잖아! 옷차림을 봐도 그렇고, 아직도 여전히 코 묻은 돈 사기나 치면서 사는 인생이겠지. 지금 내가 놔주면 또 달아나려고?”
지오는 달아날 생각이 없었다. 다급하다 보니 정말 5골드를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괜히 이곳에서 감옥에 가게 된다면 정말 곤란한 일이었다. 골렘보관소에서 나온 로나가 자신이 없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리사나 루크에게 연락을 하길 기도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치안대로 끌려갈 것 같았다.
“루시카! 헤나!”
지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청껏 둘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루시카는 펠나 신전에 있을 것이고, 헤나는 사막지대에 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빈스는 지오의 멱살을 쥔 채로 동료에게 신호를 했다. 치안대를 부르라는 말이었다. 한 사내가 치안대를 부르러 달려가려 한다. 지오는 정말 다급해졌다.
“빈스! 이러지 마.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정말 내가 돈을 줄게. 나 돈 많아! 내 주머니를 뒤져보면 알 것 아냐!”
그러나 빈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냥 살려달라고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어보지 그래?”
지오는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어차피 자존심이라는 것은 지오에게 사치였다. 지금 당장 빈스가 속옷까지 모두 벗고 춤을 추라고 해도 할 마음이 있는 지오였다.
“지오님!”
가녀린 여성의 목소리다. 그러나 지오로서는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와 너무나 닮아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지오는 최대한 표정을 굳히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멱살이 잡힌 채였다.
‘이실라 크로티스!’
지오는 속으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실라였다. 별로 변하지 않은 빈약한 몸매에 주근깨 가득한 소녀가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놀란 것은 빈스 패거리도 마찬가지였다. 왕족이나 걸칠법한 옷의 소녀가 자신들을 보고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빈스는 일단 지오의 멱살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소녀 옆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기사 셋과 마법사 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녀는 꽤 화가 나 있었다.
“감히 지오님에게 무례를 범하다니! 너희는 누구냐?”
빈스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오만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빈스는 인사를 하고는 공손히 대답했다.
“지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단지 이 사기꾼에게 떼인 돈을 받기 위해서 여기 있었던 것일 뿐입니다.”
“사기꾼? 감히 지오님을 말하는 것인가?”
“저… 여기 있는 로빌 말씀이십니까?”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저분은 로빌님이 아니고 위대한 드래곤슬레이어 지오 블래키님이다.”
빈스는 무심코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혀를 절반 가까이 깨물어야 했다. 아무래도 판타지 서적을 많이 본 철부지 아가씨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뒤에서 노려보는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은 그런 아가씨의 판타지를 실제로 만들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건 전 저자에게서 2골드를 사기 당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넣을 생각입니다. 어떻게 아시는 사이인줄은 모르겠지만….”
“돈을 줘요!”
이실라의 말에 옆에 있던 마법사는 3골드를 빈스 앞에 던졌다.
“당장 지오님의 멱살을 놓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렇지 않는다면 볼턴의 국왕님께 말씀드려서 너희를 죽이겠다!”
이실라는 자칫 외교적 마찰이 생길 수 있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냈다. 아무리 왕족이라도 남의 나라 영토에서 그 나라의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다. 어리니까 가능한 이야기였다. 옆에 있던 기사와 마법사들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이실라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 소리를 들은 빈스로서는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빈스는 떨리는 손으로 금화를 줍고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하며 재빨리 사라졌다. 이제부터는 지오의 연극이 필요할 때였다. 지오는 의연한 표정으로 이실라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위기에서 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들은 이곳에서 유명한 불량배인데 제 돈을 빼앗으려 했죠. 돈까지 주실 필요는 없었는데 큰 손해를 보게 해드렸군요.”
정중한 지오의 인사였다. 목소리도 조금은 굵게 말하려 노력했다. 만약 이실라 뒤에 있는 기사나 마법사들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챈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을 텐데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이실라는 눈치도 없이 지오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옆에 있던 기사가 말릴 틈도 없었다.
“지오님,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지오는 당황한 듯 큰소리로 말했다.
“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네오라고 합니다. 혹시 비슷한 사람과 착각을 하신 것인가요?”
이실라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오를 다시 바라보고는 더 힘껏 매달렸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렇게 똑같은 사람이 있을 수는 없어요. 당신이 손에 든 안대도 똑같잖아요!”
“이거요? 이건 눈병이 나서 가지고 다녔던 것일 뿐입니다.”
지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안대를 버렸다. 이실라나 크로티스 왕실에서 아는 지오는 애꾸였다. 그러나 지오는 지금 두 눈이 모두 멀쩡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난 알 수 있어요! 지오님이 분명해요!”
그러나 뒤쪽에 있던 기사와 마법사들은 천천히 다가와 이실라를 떼어놓았다.
“실례했습니다. 공주님이 잠시 착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지오는 일부러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공주님이셨군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런데 정말 저는 지오라는 사람을 모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반항하는 이실라를 데리고 사라졌다. 지오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혹시 지켜보는 눈이 없나 살펴보았다. 그리고 안대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휘파람을 불며 거리로 나왔다. 빈스 패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서둘러 골렘보관소에 가보니 로나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지오가 보이지 않자 약속장소로 미리 간 모양이었다.
“뭐하고 이제 와? 게다가 그 혼잡한 곳에 로나 혼자 두다니!”
약속장소에 가니 리사의 잔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지오는 항상 그렇듯이 귓등으로 모두 흘리고 위크 위에 올라탔다. 하루라도 빨리 루바나로 가기 위해서였다. 슬슬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는 마법사들이 많아서 길은 복잡했다. 지오는 좀 더 빠르고 조용한 길을 골라서 가기로 했다. 또 자신을 아는 사람을 만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적한 길로 접어들어서야 리사는 자신들을 따라오는 무리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이상해. 계속 따라오는 녀석들이 있어. 다섯은 되어 보이는데 마법사도 있는 것 같아. 내 생각에는 우리가 출발하던 때부터 따라오는 것 같은데?”
지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법사가 약탈을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을 노리는 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루바나의 파바티가 몰래 감시를 붙였을 수도 있었다.
“헤헤, 상대가 마법사라면 우리 팀의 절벽 마법사보다는 훨씬 셀 텐데 걱정이군. 그래도 루크와 로나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지오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벨쿤의 이빨을 손에 들었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이빨인지라 정말 위험할 때 외에는 쓰고 싶지 않았기에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골렘 위에 있던 로나는 상대가 다섯이라고 했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숲이었다. 따라오는 이들은 이런 장소를 원했을 지도 몰랐다. 지오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두고 이곳으로 온 것을 후회했다.
“로나, 인상착의를 알려줄 수 있어?”
“마법사가 둘인 것 같고, 기사가 셋이에요.”
지오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이실라 뒤쪽의 기사와 마법사가 생각난 것이다. 숫자도 똑같았다. 그들은 이제 몸을 숨기거나 멀리서 쫓아오지 않고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며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벨쿤의 등장으로 지오는 사기꾼임이 드러났다. 엄청난 능력을 가진 드래곤슬레이어가 아님을 알기에 이제 잡아 죽여서 공을 세우려 할 것이다. 지오는 동료에게 조금 전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리사의 욕이 한껏 날아왔지만 일단 살고 봐야 했다. 지오와 함께 있으니 모두 죽이려 할 것이다. 전투 준비를 하는 사이에 그들은 다가왔고, 예상대로 이실라를 호위하던 기사와 마법사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오는 정중하게 물었지만 마법사는 인사 대신 마법을 날렸다. 리사가 나설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루크가 맨 앞에 섰다. 현명한 처사였다. 리사의 실드는 그리 강하지 않았고, 지금 공격은 그 실드를 아주 간단히 날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화르륵!
날아오던 공격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루크의 갑옷 덕분이었다. 놀란 마법사 둘이 다시 화염과 번개를 동시에 날렸지만 루크의 바로 앞에서 또 사라진다. 6서클 마스터 두 명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뒤에 있던 기사 셋이 달려왔다. 로나의 화살이 날아왔지만 숲의 활은 마법의 실드는 뚫어도 강철의 갑옷은 쉽게 뚫지 못했다.
“로나! 갑옷 사이의 틈을 노려!”
지오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틈이라는 것이 기사들의 옷에는 정말 미세한 부분이었고,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로나의 실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루크는 달려오는 셋을 향해 대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까강!
맨 앞에서 달려왔던 기사는 서둘러 검으로 막았지만 무지막지한 힘에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러나 옆에 있던 두 명의 기사는 루크가 다시 대검을 회수하기도 전에 달려들고 있었다.
“루크에게서 떨어져!”
리나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번개의 구가 썬더스태프에서 뛰쳐나와 루크에게 달려들던 한 명의 기사를 덮쳤다.
빠지직!
“크악!”
무려 5서클에 해당한 라이트닝이었고, 루크와 달리 그 기사의 갑옷은 어떤 마법적 방어력도 없었기에 머리칼 타는 냄새와 함께 뒤로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마지막 한 명의 기사는 루크를 넘어뜨리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상태였다. 로나가 만약 그 기사의 얼굴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면 상황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을 쏠 로나가 아니었다. 화살은 기사의 팔 틈새를 노리고 달려들었다가 허무하게 튕겨나갔고, 이제 기사의 검이 루크의 얼굴을 찍어 내릴 일만 남아있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지오는 이빨을 뿌릴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이빨을 뿌린다고 해도 마법사가 둘이나 있었기에 소용이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애초에 왕실의 기사와 마법사를 다섯이나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루크!”
안타까운 리사의 비명과 함께 루크의 배에 올라탄 기사는 달려드는 레미의 공격을 간단히 뿌리치며 힘차게 자신의 검을 루크의 얼굴에 꽂았다.
“크아악!”
눈을 가렸던 리사는 루크의 것이 아닌 비명이 들려오자 놀라 눈을 떴다. 루크를 내리찍으려던 기사의 목이 잘려 있다. 그리고 루크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리사가 루크의 눈길을 따라가자 그곳에는 마법사 두 명이 경악한 얼굴로 검은 옷의 검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당신이 왜?”
검은 옷의 검사는 두 자루의 검을 두 명의 마법사의 심장에 사이좋게 박아 넣은 상태였다. 상황은 역전이 되었다. 루크는 자신의 공격으로 넘어졌던 기사를 재차 공격했고, 지오는 끝이 부러진 블러드 네일로 머리가 까맣게 타서 정신을 잃은 기사의 심장을 헤집었다. 갑옷을 입었지만 블러드 네일 앞에서는 종잇장일 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기사는 사력을 다해 루크에게 덤벼들었지만 처음 공격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마침내 쓰러졌고, 분노한 리사의 공격에 마지막 숨을 거둬야 했다.
“론체?”
지오는 검은 옷의 검사를 알아볼 수 있었다. 기억력만큼은 누구보다 좋다고 자부하는 지오였다. 론체는 쓰러진 마법사와 기사들이 완전히 숨을 거뒀는지 재차 확인한 후에야 지오 앞에 섰다.
“헤헤, 이실라가 구해주라고 보냈군!”
지오의 질문에 론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날 구해준 거지? 어차피 내가 사기를 쳤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 어쩌면 여기 누워있는 녀석들처럼 날 공격했어야 맞지 않아?”
론체는 말이 없었다. 지오는 혼자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이내 웃음을 지었다.
“너 이실라를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이실라가 슬퍼할까 봐 날 구해준 거지? 멋지군. 공주와 호위검사의 사랑이야기라니.”
그러자 론체는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관절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그것만으로도 지오는 위축이 되었다. 조금 전 론체의 검술실력을 본다면 루크라도 자신을 보호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공주님을 좋아해. 그러나 동성애자는 아니다. 그저 공주님이 행복하시길 바랄 뿐이야. 지금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 계시니까.”
뜻밖에도 론체의 입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지금까지 호위검사라고 해서 당연히 남자일 줄 알았는데, 여자였던 것이다. 지오는 론체의 얼굴을 가린 두건을 벗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정말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대체 무슨 말이야? 크로티스의 하나뿐인 공주님이 왜 어려움에 처해 있어?”
론체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드가스 국왕님의 일곱 번째 왕비께서 공주님을 생산하셨다. 그리고 이실라 공주님은 네 녀석과의 관계를 고백하며 결혼을 시켜달라고 했지.”
지오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외동딸이 더는 외동딸이 되지 않는다면, 거기에 사기꾼과 정을 통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왕의 사랑은 멀어질 것이다. 아마도 공주가 멋대로 이곳까지 온 것조차 신경을 쓰지 않고 내버려뒀을 지도 몰랐다. 지오는 공주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더는 얽히기 싫었기에 론체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정말 뭐라 할 말이 없군. 구해줘서 고마워. 이제 난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말이야.”
지오가 막 위크의 등에 올라타려는 순간 론체의 검이 목에 닿았다. 눈 깜짝할 사이였기에 루크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로나의 활과 리사가 썬더스태프가 겨눠졌지만 함부로 공격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레미도 옆에서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조금 전 기사에게 주먹을 맞아 파랗게 멍든 눈이 애처롭게 지오의 목에 겨눠진 검을 바라보고 있다. 론체가 조금만 힘을 줘도 지오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지오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대…대체 뭐야? 이실라는 내가 죽길 바라지 않을 걸?”
“알아, 그냥 부탁을 들어줬으면 해서다. 만약 들어주지 않는다면 당장 널 죽일 수밖에. 그리고 여기 크로티스의 기사와 마법사를 죽인 죄로 네 동료들도 모두 죽게 될 거야.”
지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동료들이 죽거나 하는 것은 상관이 없겠지만 당장 자신이 죽게 된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지오는 최대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부탁이야? 다 들어줄게.”
한 시간 뒤에 지오는 이실라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 이실라는 눈물을 떨어트렸다.
“죄송해요. 그랬었군요. 전 반가운 마음에 그만…. 지오님은 정령술사시니까 이번 마법사 회의에 오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이들은 지오님이 죽었다고 그랬지만 전 믿지 않았어요.”
지오는 일부러 고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실라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당겼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공주님의 호위기사와 마법사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희생을 막기 위해 숨겼던 것인데….”
“그따위 기사나 마법사들이야 죽어도 상관없어요. 감히 지오님을 죽이려 하다니! 론체가 있었다면 지오님이 힘을 쓸 필요도 없이 그들을 다 죽였을 거예요.”
지오는 감동한 듯 이실라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벨쿤은 사실 죽었습니다. 드가스 국왕님이 저를 죽이려 하기에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서 가짜 벨쿤을 만들어 겁을 주었을 뿐이죠. 드가스 국왕님이 이제는 포기하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절 죽이려 하시는군요.”
“역시 그랬군요. 제가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다시는 지오님을 쫓지 못하게 할게요!”
지오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제가 더 위험해집니다. 그냥 제가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편이 편합니다. 아무래도 당신을 위해 전 오래도록 숨어 지내야겠군요. 당신의 나라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실라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자신 때문에 지오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지오는 이 연극을 완성해야 했다. 어디선가 론체가 자신의 목을 노리며 지켜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약속하죠. 10년 뒤에 공주님 앞에 다시 나타나겠습니다. 그때까지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드가스 국왕님께 저와의 관계도 거짓말이라고 말씀드리세요. 공주님을 위해 하려는 세력이 모함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론체가 부탁한 부분이었다. 누구보다 냉정한 드가스였다. 계속 이실라가 튀는 행동을 한다면 결국 좋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이실라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완벽한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었다는 만족감도 있을지 모른다. 어쨌건 10년이 지난 뒤라면 아마 지금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거나 기억하더라도 한 때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라며 잊으려 노력할 것이다. 일단은 론체가 원하는 결말은 난 것 같았다. 지오는 다시 한 번 이실라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는 말에 올랐다.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지오님!”
이실라는 쓰러져 울었지만 지오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론체가 나타나 이실라를 부축하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루크가 죽으면 가슴 빵빵한 여자 검사를 물색해봐야겠군. 은근히 멋질 것 같아!”
이실라의 시야에서 멀어지기도 전에 지오는 그런 생각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