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사람들의 생애 이야기와 어민들의 삶
나승만(민속학, 목포대학교 어문학부 국문학전공 교수)
작성시기 :2001년 ~ 2002년으로 추정됨
뱃사람들의 생활과 생애 이야기 는 바다와 바람과 배와 그물과 고기와 동료들과 선주들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어부들의 경험과 생각, 기술, 관계망, 의례와 관행, 소망과 좌절, 고난과 도전의 경험들이 중심을 이룬다. 뱃사람들이 평생을 살면서 대면했던 자연환경에 대한 인식은 무엇이고, 습득한 지식이 무엇이고, 가장 열심히 노력한 점들과 그 결과들이 무엇이고 그들이 어디에 가장 깊은 가치를 두고 살았는지, 무엇을 이루고 싶었는지, 어디서 그들의 삶이 깨어졌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들의 삶이 다시 회복되는지에 관한 내용들이다. 그래서 서남해 뱃사람들의 생애담을 통해 뱃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지혜, 어획을 위한 노력들, 그리고 삶이 패배하거나 좌절하는지, 가치와 믿음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획득되고 모양을 갖추고, 유지되고, 경험되는지에 대해 주목하면서 사례들을 소개하겠다.
1. 바다의 개척자들, 성공하고 실패한 선주들의 생애 이야기
1) 흥하고 망한 선주 허효석
?조사지역 : 전남 진도군 조도면 상조도 여미리
?조사일시 : 2001. 3. 16.
?구 술 자 : 허효석(남, 81세)
?면 담 자 : 나승만, 이윤선
허효석에게 옛날 풍선달고 다니던 닻배에 대하여 질문하자 배공부밖에 한 것이 없다고 대답한다. 허효석은 조부도 어장을 운영한 대대로 어업 가족이다.
허효석의 조부는 칠산 어장으로 조기잡이 닻배를 끌고 가서 조업했던 닻배 선주였다. 그의 부친도 역시 칠산바다에서 조기잡이를 한 조기잡이 닻배 선주다.
허효석은 부친의 닻배에서 어로기술을 익히고, 그의 대에는 닻배를 청산하고 유자망과 투망배로 바꿔 어업을 이어갔다. 허효석의 말에 다르면 닻배는 조도면에서 제일 많이 부렸다. 그리고 영광 법성포위 진장불에도 있었지만 극히 소수여서 닻배는 진도 조도를 상징하는 배였다.
조도 닻배가 한창 번성할 때는 마을마다 몇 척씩 있어서 총 100여 척이었다고 한다. 특히 관매도에서 많은 닻배를 부렸다. 그리고 라배도와 진목도, 우륵도와 외병 내병에서 많이 했다.
허효석의 생각에 닻배 조업은 한일합방 전부터 있었으며, 닻배 생긴 지 몇백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조부가 만들었던 닻배는 앞과 뒤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모양이 비슷했다. 즉 앞 전면이 절판지를 댄 비우배 형식이다. 그리고 세 가락의 노를 채웠는데, 양쪽 멍에에 두짝, 그리고 고물에 있는 노는 사공이 젓는다.
닻배란 닻을 단 그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 3> 허효석
그물이 백통이면 닻이 약 50개 들어간다. 배의 모양은 비우배 형식이다. 지붕이 없어서 두덕옷을 입고 어장일을 보았다. 배의 갑판에 너장을 깔아서 방침을 한다. 그러나 배 밑은 구분되어 있다. 안에는 자리를 깔아 놓았다. 배를 옆면으로 보면 그물 싣는 칸, 사람 자는 칸, 술과 음식을 쟁이고 조리하는 칸, 사람이 자는 칸이 있다. 그물 싣는 곳 위에 널을 깔아서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게 했다. 그라고 배 위에 하라지라는 것을 양쪽에 높이 만들어 그물 당기기 좋게 했다.
닻배는 못을 전혀 쓰지 않고 만드는데, 못을 쓰면 빨리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허효석은 위도를 큰집이라고 말한다. 허효석은 젊은 황금같은 시절에 육년 정도 닻배를 탔다.
조기를 잡으러 간 배는 위도가 큰집이라고 한다. 거기서 조업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거나 먹거리를 조달하였다. 음력 2월에 출어한다. 조도를 출발해 올라 간 배들은 가사도 안쪽으로 해서 올라가다 목포 바깥쪽을 타고 항진한다. 올라가서는 목을 잡고 있다 안마도나 위도 근해로 들어가 조업한다. 처음 어장에 그물 놓을 때 고사를 모신다. 안마도 근해에서 조기잡이를 시작하여 조기를 따라 연안으로 들어와 조업한다. 이월 초 칠산에 도달한 배들은 법성포 앞, 또는 위도 근해에서 사공의 판단에 따라 조기잡이를 시작하여 조기떼를 따라 다니며 조업한다.
그러나 파시마다 머무는 주인집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 같은 집을 찾아가서 신세도 지고 도움도 받는다. 상회의 주인은 뱃동무들의 친구다. 식고미4)를 대주고 조업 도구도 대준 뒤 조기를 잡아서 청산한다. 안마도에서는 한 사리 반을 보낸다. 사리 반 조업하면 조기들이 연안으로 들어간다. 그물을 놔서 당겨 올리기 까지는 대여섯 시간 걸린다. 안마도에서 잡은 조기가 더 비싸다. 그 이유는 안마도서 잡은 고기는 시기적으로 볼 때 귀하기 때문이고 위도에서 잡는 시기가 되면 조기가 흔하기 때문에 가격이 싸다. 그리고 조기는 특별히 처음 잡히는 시기에 비싸다. 귀해서 비싸고 처음 잡히는 햇조기는 육지에서 수요자가 많기 때문이다. 황해도 연평바다로 들어오는 조기는 조금 늦게 들어오고 칠산바다에 들어오는 조기는 조금 일찍 들어오며 조기가 각기 다르다.
칠산 조기잡이가 위도에서 끝나면 연평도까지 올라간다. 연평도에서 잡히는 조기는 조구가 굵어진다. 그러나 굵은 대신 야위어 있다.
조도사람들이 기곗배를 시작한지는 얼마 안되었다. 조도에서 처음기계배 발동선을 띄운 것은 거차도에서였다. 꼴끼미라고 창리 넘어 김기주라는 사람이 처음 기계배를 띄웠고 그때부터 발동선이 대거 생겨나게 되었다. 허효석이 처음 발동선을 구입한 것은 6?25 후인 1954∼1955년경이다. 삼천포에 가서 5톤짜리 발동선을 샀다.
당시 가격은 백오 만원 들었다. 허효석은 모아두었던 돈과 당시 키우던 소를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였는데, 당시 어미소를 5만원 받고 팔았으니까 어미소 20마리 값에 해당된다.
<사진 4> 조도 사람들의 이상향 황금어장 칠산
배 이름은 동양호였다. 배를 산 다음 굿을 크게 하고 때때로 고사를 지내 정성을 많이 들였다. 동양호를 5∼6년 부린 다음 팔고 부산 내려가서 새 배를 샀다. 그다음에는 톤수를 좀 늘려서 부산에서 150만원을 주고 기계 성능이 향상된 큰 배 일청호를 샀다.
동양호를 타고는 황해도 연평 바다를 많이 다녔다. 연평바다에서는 조기철에 한달 조금 일하고 내려왔다.
풍선배 시절 조도 사람들은 한발 하면 경상도 사람들은 천발을 했다. 왜냐면 배도 크고 좋을뿐만 아니라 기계배를 해서 어장을 많이 차렸다. 그래서 조도 사람들은 기곗배가 없어서 경쟁을 할 수가 없었다. 닻배가 없어져 버린 뒤에는 투망배를 많이 했다. 닻배를 중단하고 투망배를 시작한 것은 55년 전이다. 일제 시대부터 투망을 많이 했다. 해방될 때 투망배를 많이 했다.
투망배가 나타나면서 닻배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조도 밑으로는 유자망 하면서 동지나까지 다녔다. 그리고 홍도, 대흑산도, 소흑산도 바깥까지 귀신같이 많이 다녔다. 거기서는 투망배로 조기를 잡았다. 기계배를 타고는 동지나해를 예사롭게 다녔다. 배사업을 해서 소득을 많이 올릴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장이란 농사하고 달라서 허망하다고 술회한다. 더 많이 벌려고 큰 어장을 시작해결국은 망하게 되었다. 허효석뿐만 아니라 조도의 많은 사람들이 허효석과 같은 길을 걸었다.
※4) 선상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의 식품들.
2) 마지막 닻배 선주 박계용과 그 아들 박복동
?조사지역 : 전남 진도군 조도면 상조도 여미리
?조사일시 : 2001. 3. 16.
?구 술 자 : 박계용(남, 91세), 박복동(남, 61세, 박계용의 아들)
?면 담 자 : 나승만, 이윤선
박계용은 91세의 고령의 퇴역 선주다. 그는 스스로 조도에서 최후까지 닻배를 했던 선주라고 말한다. 그의 조상들은 여미리에 살면서 대대로 닻배를 탔다. 그의 부친은 선원으로 배를 탔으며 박계용 대에 이르러 선주로 활동하게 된다. 그가 닻배 선주를 처음 시작한 것은 서른 일곱 야달적이었으며, 팔년을 계속했다. 그가 닻배 선주를 할 때 위도에 가면 위도 사람들 인성이 좋아서 닻배의 객주상회 주인이 되려고 반찬을 담아 주고 외상 쌀, 외상 술도 주었다고 한다.
또 닻배할 때 뱃노래도 많이 했다. 박옹은 당시를 술회하면서 닻배의 풍장은 거룩했다고 말한다. 칠산바다에는 뱃노래들이 많았는데, 뱃동무들이 술잔이나 먹고 뱃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남의 배에지지 않으려고 술 걸러서 놓고 배를 바다에 나란히 띄워 놓고 풍장을 시작하면 경쟁적으로 뱃노래를 겨뤘다고 한다.
닻배 선주들은 대부분 돈이 없어서 목포나 인근, 또는 멀리는 마산까지 가서 객주들에게 돈을 빌어서 닻배를 차렸다. 당시는 돈이 없어서 목포 객주에서 이찌바리 고부 또는 이찌바리 삼부 선이자를 띠어 주고 돈을 빌렸다. 그가 어장을 할 때는 80만원, 90만원을 갖고 돌아오면 잘했다고 한다.
130만원에 차대하여 이십 몇 만 원을 갖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래서 빚을 갚기 위해 논밭을 팔았다. 조도에서는 박계용 옹이 제일 늦게까지 닻배 사업을 했다. 박계용의 아들 박복동은 젊은 시절 부친의 닻배를 탔다. 그 이유는 노인들만 보내서는 안되겠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다 사람들은 점차 닻배에 타기를 꺼렸다. 그 이유는 무명베 두덕지 옷을 입고 비 맞아 가며, 이슬 맞아 가며 일했기 때문이다.
박계용옹 37세(1947년)에 조도면에는 팔십 팔척의 닻배가 있었다. 닻배를 가장 많이 부린 섬은 관매도였는데, 당시 관매도에는 십여 척의 닻배가 있었다. 그 다음에는 라배도의 4척, 꼴끼미 5척, 육동 2척 등이었으며 차대한 배들이 많았다. 배 차대는 목포에서 했다. 배를 차대해 오거나 중고배를 사면 전 선주가 모시던 서낭은 갱변 위 나무나 산에 달아 메 놓는다.
닻배 사업에 필요한 돈은 마산에서도 빌어다 섰다. 그것은 오직 신용을 믿고 이루어진다. 당시에는 서로 상대방을 신뢰하였으며, 상대방에 대한 신용으로 돈을 빌려주고 빌려 썼다. 그래서 못 벌면 못 번대로, 잘 벌면 잘 번대로 정산을 했다. 못 번 경우에는 가용 쓸 돈을 받아 오기도 했다.
서른 일곱에 처음 닻배를 시작했을 때 배를 하의도에서 차대했다. 그 뒤에는 임자도, 재원도, 안좌도, 지도 등지에서 차대하여 닻배 사업을 했으며, 조기가 귀해지자 닻배 사업을 중단했다. 차대해 오면 배를 닻배로 고친다. 사람 머리가 닿지 않게 중장을 매고 그 속에 나무와 술독을 보관한다.
박계용옹의 말에 따르면 닻배는 칠산까지만 조업할 수 있고 중선배는 황해도까지 가서 조업한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닻배를 타고 칠산까지 출어했다. 그러나 박옹은 중선배를 타고 황해도 연평 근방까지 출어했다. 중선배를 타고 투망하러 황해도까지 갔는데, 연평도와 강화까지 출어했다. 그런데 중선배로 황해도에 출어하면 미국잠수함에 사격 당하는 사례가 있어 피해가 컸다고 한다. 당시는 미국과 일본간에 전투 중이어서 미국 잠수함이 나타나 사격했는데, 그 이유는 중선배를 일본배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도 중선 배 중 미국 잠수함에 격침 당해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율목에서도 한사람이 사격으로 죽었다. 그래서 조도의 중선배들이 황해도로 출어하지 못하고 ?i겨 들어왔다.
당시 중선배들은 모두 돛단 풍선이었다.
닻배는 칠산 조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닻배는 오직 칠산에서만 조기를 잡는데, 칠산에서 조기가 안나자 선주들이 빚지고 해서 닻배가 없어졌다. 닻배 선주들이 칠산에서 조기가 잡히지 않자 빚에 망해서 강쳐버렸다. 5) 조기가 흔할 때는 조도 앞바다에서도 잡혔지만 닻배로는 잡을수 없고 주낙으로 잡았다. 박옹의 부인은 ‘옛날에사 여그도 조구 낚어서 한짐 지고 들어왔제. 옛날에는 여그서도 조구 내끼질 해갖고 두뭇 서뭇썩 해갖고 들어왓제, 내끼질 해갖고 그랬제’라고 술회한다.
박옹의 선친이 닻배를 타던 당시에도 선주들이 빚을 내서 배를 꾸렸기 때문에 빚을
못 갚고 고생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5) ‘강치다’라는 말은 중단하다. 폐지하다라는 뜻이다.
<사진 5> 박계용 부자
여미리의 닻배가 없어진 후 사람들은 도시로 이주했다. 여미리는 조기가 없어진 후 쇠퇴하여 마을 규모가 절반으로 줄었다. 조기가 잘 잡히던 시절에는 64호였는데 현재는 도시로 이사간 사람들이 절반 이상이 되어서 24호만이 남아 살고 있다. 그 중 혼자 사는 집이 7∼8호 된다.
혼자 살다 죽으면 자식들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집이 비어서 몇 년 안되면 마을도 텅텅 빌 것으로 예측한다. 현재 목포에서 선구업을 하고 있는 아들 박복동은 ‘먼 자식들이 도시에 가 사는 사람들이 여그를 들올라 하겄소, 안들올락하제. 나 역시도 나가서 살락하제 들어 와서 살라고 안하겄소, 벌이가 안?縕꼬?. 멋이 벌어먹고 살 것이 있어야제. 그라믄 저 도시 같으믄 어떤 사람들이고 전부 합동해서 벌어먹고 산데 여그는 머 자기가 하기전에는 소용없제, 아, 지금 우리 아부지 구십 세 살잡쉈제만은 머를할 것이냐 말이여’ 라고 말한다.
그 전에 보리 갈아먹던 땅도 지금은 전부 묵히고 있다. 닻배를 강친 다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전답 팔아서 먹고 지낸다.
선주 2대(二代) 박복동의 생애 이야기
박복동은 예순 한 살이다. 박복동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닻배를 탔다. 그때 닻배 뱃동무들 중에는 박복동이 제일 어렸다. 그가 닻배를 탄 이유는 닻배 사업을 하는 부친 때문이었는데, 닻배 사업을 하기 위해 애쓰는 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하도 안쓰러워서 같이 갑시다 하고 닻배를 타게 되었다.
박복동은 닻배를 타고 고기 구덕인 칠산, 위도를 돌아다녔다. 당시 뱃동무는 14명이었다. 당시에는 조기도 잡고 빡대를 많이 잡았다. 칠산으로 간 이유는 그곳 수심이?A기 때문이다. 거가서 빡대와 햇병대 새끼들을 많이 잡았다. 당시에는 이 고기들이 흔해서 막긁어 잡었다고 한다.
박복동은 닻배를 탄 뒤 많은 배를 타다 서른 다섯에 배사업을 시작했다. 배구입 자금은 수협에서 담보 대출을 받아 처리했다. 처음 구입한 배는 보강호라는 팔톤 기계배였다. 목포를 중심으로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했다. 그는 기계배를 구입하여 손수 선장을 하면서 선주를 겸했다. 그가 배사업을 할 때는 이미 모든 배들이 기계배로 바뀐 뒤었다. 부친이 닻배 사업을 하여 강친 뒤 독자였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고 부친과 상의 없이 배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장 면허도 없이 보강호를 몰고 다니며 인근 어장에서 유자망 흘림그물로 꽃게잡이를 했다.
<사진 6>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
조도 인근 소개?맙【? 꽃게가 많이 났다. 당시에는 꽃게가 많이 났는데, 하도 많이 나서 소비할 곳이 마땅치 않았을 정도였다. 잡은 꽃게와 고기를 상고선에 팔았다. 당시 상고선들은 주로 경상도 삼천포 일대에서 대여섯척 와가지고 시세대로 사갔다. 그 다음에는 통발로 꽃게잡이를 했다. 박복동은 꽃게잡이 어업으로 재미를 봤다. 그래서 목포에 전셋집을 얻어서 살게 되었다. 그런 다음 집을 하나사서 신축했다. 요즈음은 게를 볼 수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보강호로 꽃게잡이 하다 와야줄 감어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구입한 보강호는 남이 부리던 중고배였으며, 배를 사서 수리해 사용했다. 이 배를 6년 부렸다. 그런 다음 43세 되던 때 모아진 돈을 가지고 배사업을 중단하고 목포 서산동에서 중선배 와이어 장사를 시작했다. 와이어를 도매로 사서 배가 요구하는 형태로 변형시켜 판매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와이어 가공을 할수 있도록 작업장도 차렸다. 이 사업을 60세 되던 작년까지 했다.
벌이가 괜찮아서 큰 돈을 벌지는 않았지만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노년을 보낼 수 있는 돈을 모았다. 공장은 줄을 자유롭게 감을 수 있는 집 한 채 정도면 되었다. 박복동은 와이어 사업으로 전문가가 되어 딸 여섯과 아들 하나를 모두 대학교까지 보냈다. 그리고 목포에 오층짜리 집을 하나 구입했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시름을 잊고 지낸다.
2. 바다에 혼을 묻고 사는 선원들의 생애 이야기
진줄6)같은 삶, 실낱같은 희망1)
닻배 선원부터 시작한 어부 배성진의 생애 이야기
?조사지역 : 전남 목포시 서산동
?조사일시 : 1995. 6. 15
?구 술 자 : 배성진(남, 55)
?면 담 자 : 나승만
배성진은 조도면 관청도 출신이다. 2002년 현재 목포시 서산동에서 고기배 선장에서은퇴하여 살고 있다. 그가 조도를 떠나 목포로 이사온 것은 육지 쪽에 붙어야 먹고 살 것 같고, 자신도 공부를 하고 싶고, 자식들 공부도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닻배는 20살 한 해 타고 그 다음해에는 워낙 일이 고되니까 아버지가 그만 타라고 해서 그 뒤로는 칠산 바다에서 투망배, 지금 하고 있는 유자망 배를 타고 조기를 잡았다.
그가 태어난 관청도는 고기를 잡지 않으면 살6) 바다밑에 서식하는 해초로 벼잎처럼 생겼다. 옛날 진줄이 흔하던 시절에는 걷어다 두엄으로 발효시켜 논밭의 거름으로 사용했다. 갯가 사람들은 진줄이 서식하는 바다를 오염이 안된 살아있는 바다로 여긴다. 그래서 마을 개에 진줄이 살아있으면 생태환경이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하여 자랑거리로 여긴다.
<사진 7> 배성진
길이 없는 곳이다. 그의 고향 조도면 관청도는 하조도에서도 노젖는 배로 두 시간을 가야 된다.
지금처럼 기게배로 가면 이십분에서 사십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관매도보다 더 위 북쪽에 있다. 그가 목포로 떠나온 것은 1964년도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95년 당시를 기준으로 31년 됐다고 한다. 본래 조도에는 섬이 많았다. 옛날에는 이장이 마흔 둘이었는데, 두 가구 산 데도 이장, 세 가구 산 데도 이장이 있어서 그렇게 이장이 마흔 둘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도는 상조도와 하조도를 제하고는 섬에 농토가 없었다. 농토가 없어서 먹고 살라면 바다로 나가 뭣이든 던져야, 그물을 던지든지 낚시줄을 던지든지 던져야 먹고 살수 있다고 한다.
배성진이 목포 이주를 결심한 것은 선배들이 목포로 가면 더 낫다는 말도 듣고, 또 그 자신도 육지쪽에 붙어야 먹고 살 것도, 또 하나 자식들 공부도 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관청도에서는 공부를 할 수 없었다. 하조도 국민학교에 분교를 만들어 놓고, 그나마도 공부를 하는데, 집에서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다. 50호 정도 사는 동네였는데, 한쪽에 학교가 있었다. 선생님이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라고 해서 집에 가면 어머니들이 일을 시켜버렸다.
오전에 학교갔으니까 오후에는 가지말고 소를 보라든지, 어디 가라고 심부름을 시켜버린다. 그래서 학교를 가지 못해버린다. 그 때는 부모님 말씀 떨어지면 꼼짝없이 들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꾸중듣고 회초리 맞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는 배고픔과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일제 때 조도에 학교가 세 개밖에 없었다. 조도국민학교, 관매도국민학교, 거차도국민학교, 그 학교들이 일제 때 관립학교였다.
그러니까 겨우 초등학교를 나와서 써먹을 것이 없다. 거기를 졸업하면 배라고 타고 고기를 잡아서 나물국이라도 맛있게 먹는 방법밖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너무도 비참하게 살았다.
관청도에서는 고기 잡아 팔아서 식량을 사다 먹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 길이 없다. 임자도 지도 쪽 사람들은 어장에 어둡고 관심도 없는데, 그쪽 사람들은 농사짓고 소금 구워서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도나 이쪽 사람들은 소금 굽고 농사지을 터가 없기 때문에 해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터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는 먹고사는 문제와 교육문제를 제일 크게 생각했다. 그래서 도시로 나오면 먹고 살 것이 해결될 것 같았고, 또나는 못 배웠지만 자식들이라도 가르쳐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목포로 이주하게 되었다. 20살에 결혼하고 결혼한 지 삼 년 되어서 목포로 나왔다. 당시 동네 사람들 중에는 집은 조도에 두고 목포에 와서 배 타다 겨울에 바람불 시기가 되면 고향에 들리고, 또 배타고 지나가다 들리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어린 시절 보면서 이들이 고기도 많이 가져오고, 말린 건조한 고기 그런 것도 가져오고, 또 돈을 그렇게 벌어 오고 쌀도 가마니째 사 갖고 오는 것을 보고 욕심이 생겼다. 나도 저렇게 해야 쓰것다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서산동으로 이사 나왔다. 서산동 바로 수협이 있는 장소로 나왔는데, 수협 어판장이 가깝고, 또 그 옆에는 집안 형이 살았기 때문에 그 형의 안내로 이사하게 되었다. 서산동에는 조도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서산동 주민의 과반수는 진도 조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그 이웃인 온금동도 마찬가지다. 조도에서 온 사람들은 시내 쪽으로는 돈이 없으니까 방을 얻기도 곤란하고 또 배 왔다갔다하는 길도 가까워서 조도에서 온 사람들은 주로 온금동과 서산동에 집단 이주했다. 그리고 방값도 쌌다. 서산동에 처음 정착할 때 돈이 없어서 셋집을 얻었다. 나온다고 할 때 아버지가 돈이 없어 보태주지 못해 만이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서럽게 컸다. 장인 영감에게 가서 “목포 이사가려고 ‘아버님 나 이왕 배를 탈라먼 도시에 가서 배를 탈랍니다’
그랑께 ‘그래라 너 잘 생각했다. 이왕이먼 도시로 나가라’ 그러면서 돈 오천원을 줍디다.” 장인영감이 목포 왕래를 잘 했다. 해초같은 것 사갖고 와서 팔고 또 동네 사람들이 쌀 부탁하면 쌀 사다주고 바늘 실같은 것 사다주고 장사를 했다.
장인에게 5천원을 받아서 집사람과 아들을 데리고 나오니까 삼천오백원이 남았다. 집을 들어가는데 열 달 월세가 만원이었다. 돈이 없어서 형한테 꾼 돈을 합쳐 5천원을 주인에게 주니까 한꺼번에 주라고 받지 않았다. 안 받으니까 형이 “그냥 버터라, 즈그가 나가라고는 못헌께. 요번나가먼 벌어갖고 주게. 좌우간 누가 뭐라도 눈 찔끈 감고 나가지 말고 꽉 있어라”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했다. 다행히 첫 출어에서 집세를 줄 정도는 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그때 선장이 좀 아는 사람이었다. 선배 형이 선장에게 그런 말을 했다. “배씨가 집세를 오천원 중께 한꺼번에 주라 해서 못 주고 나왔소” 그랬다. 들어오니까 선주가 선장이 말했다면서 우선 돈을 주어서 집세를 해결했다. 그 뒤 서산동의 여러 군데를 옮겨 다니면서 살다 현재의 지금 집을 구입했다.
배성진은 선원이 되면 처음에는 화장부터 시작하제라고 말한다. 배성진에게 선원이 되는 단계부터 선원의 생활사를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선원 생활사는 다음과 같다. 선원이 되면 처음에는 화장7)부터 시작한다. 배성진은 흑산도배에서 화장 일부터 시작했다. 제일 말단 선원이 화장이다. 돈도 제일 적게 받는다. 닻배와 유자망 배에서는 화장이 권위가 있지만 중선배인 안강망에서는 형편없었다. 심지어는 선장 팬티까지도 빨아야된다. 안 빨먼 쳐박힌다. 그런데 지금은 형편이 바뀌어서 화장을 하면 고생한다고 한번 출어할 때 다른 선원들보다 십만원을 더 준다.
그래도 서로 안할라고 한다. 똑같이 일하먼서 아침에 밥하고 반찬 만들고 그러기 때문이다. 선장은 서른 일곱에 되었다. 둘째아들을 낳던 그 해인데, 해기사 육급 면허증이 있어야 선장이 된다. 그 전에는 없이도 했지만 지금은 해기사 육급 면허가 있어야 된다. 그래서 면허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했다. 해도를 펴면 지명이 영어나 한문으로 나온다. 배성진은 한글은 초등학교 분교를 6학년 졸업을 했으니까 아는데 영어는 개판이고 한문도 잘 몰랐다. 그러니까 선장 시험을 보기 위해 해도를 펴놓고 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한글로 전부 다 쓰라고 했다. 그래야 알아먹을 수 있었다. 그 공부도 순전히 기억력으로 해냈다. 시험공부는 해난심판원에 계시다가 나와서 다
7) 배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말단 선원.
<사진 8> 배성진이 살고 있는 목포시 서산동
른 사업하시는 한영운 씨한테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지금은 필기를 보는데 그 전에는 구두로 물어만 보니까, 6명씩 앉혀 놓고 물어본다. 선장 되어서 처음에는 동환호를 타고 동지나해에 다니면서 주로 갈치를 잡았다. 가면 갈치 한배씩 싣고 왔다. 음력 7월부터 시작해서 7∼10월까지 갈치를 잡았다. 그 다음 11월부터 익년도 2월까지 소흑산도에서 조기를 잡았다. 그 이후부터 조구는 빠지고 갈치는 아직 안 들어오고. 7월까지는 상당히 곤궁한 철이다. 그때는 선주들이 상당히 궁색해져서 병어와 같은 잡어를 잡는다.
배성진은 조도 시절부터 배를 탔다. 그 당시는 주낙질하는 배였는데, 돛달고 노 젖고 다녔다. 4명이 탔는데 1, 2톤 정도 되는 것이었다. 규모가 작은 것이었는데, 힘으로 노 저어서 가는 배니까 조도에서 세시간 노 저어 가서 고기 잡아 왔다. 지금 보면 그때가 고기가 많았던 시절이다.
지금 그 정도로 잡으면 상당한 돈이 되는 벌이다. 조기를 많이 잡았는데, 경상도 쪽에서 기계배를 갖고 사로 왔다. 사로 오면 크기를 자기들 규정된 규격 이상만 사고 작은 것은 안 사줬다. 그러면 분통이 터진다. “작은놈은 작은놈 산을 주고 큰놈은 큰놈 산을 주고 당신들 일정한 척수만 할 것이 아니라 … 당신들 큰놈은 어째 큰값을 안주냐” 그라고 그런 말 하면 장형이 “야 너 그래갖고 그래도 고기 안사부먼 성가신데이 너 왜 쓸데없는 말 하냐, 적자를 보먼 너만 적자를 보는것이 아니라 우리 동네 사람들이 다같이 적자를 보는데 니가 나서서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그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음은 배성진이 구술한 닻배 이야기다. 조도 시절에 그는 닻배도 탔다. 닻배는 규모가 큰 배다. 지금 실 톤수로 하면 12톤 정도 되는 배를 탔다. 닻을 많이 만들기 때문에 닻배라고 하는데, 멀리까지 출어했다. 배에다 술과 식량 일체를 갖고 다녔다. 음력 이월 절기로 말하면 한식 청명에서 출발한다. 청명에서 절기에 바람이 부니까 청명을 지나고 출발한다. 그러면 전라북도 위도에 가서 청명에서 곡우, 입하, 소만, 망종까지, 그러니까 78일간을 조기잡이 조업을 한다. 그때가 조기잡이 철이다. 칠산바다에 조기가 알을 낳는 산란철이다.
닻배에는 14명이 탄다. 제일 어른이 선주다. 선주가 따라 간다. 왜냐하면 그때는 상고배들이 고기와 현찰을 맞바꾸기 때문이다. 지금은 판매장에서 어획하면 계산 딱 나오는데, 그 때는 돈하고 고기하고 맞바꾸니까 선주가 간다. 그래야 돈 간수한다. 선주 다음에 사공, 그리고 앞동(앞잽이), 앞동은 제일 앞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사람이 횡대로 서서 일하니까 사람이 14명이면 사공은 키를 잡고, 선주는 앉아서 고기 올라오는 것을 관찰한다. 그리고 뱃동무들이 두 줄로 서는데 두줄 앞에 선 사람이 앞동으로 양쪽 각각 한 명씩이다. 앞동은 돈 벌면 더 준다.
앞에서 하면서 뒤에 사람을 시키고. 그러니까 선장 밑에서 하나의 팀을 이끌고 일하는 사람이다. 일을 해도 이 쪽에 있는 사람은 이 쪽 일만 하고 저쪽에 있는 사람은 저 쪽 일만 한다. 딱 자기 자리가 정해졌다.
나머지는 그물에 고기가 꽂혀서 올라오니까 자기편의 줄을 잡아당긴다.
닻배의 선원들은 각각 직분이 있다. 그 직분은 다음과 같다.
선주가 있고 사공이 있고 앞동이 있고, 앞동 밑에서 일하는 뱃사람이 있고, 밥하고 음식하는 화장이 한 사람 있다. 선주는 대개 쉰 살 이상인 경우가 많다. 사공도 그 정도 되는데, 뱃일에 약 한 10년 내지 20년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을 쓴다. 앞동은 힘이 좋은 젊은 사람을 쓴다. 왜냐면 닻배 그물의 닻을 넣고 또 그 닻이 안 끌리게 큰돌을 채우는데 굉장히 무겁다. 그러니까 사공이 봐서 힘 좋고 신체 좋은 사람에게 “너 앞동” 그렇게 지명한다. 앞동이 그물을 들어 올려 줘야 뱃동무들이 받는다. 배성진은 앞동을 못하고 중간에서 일했다. 화장은 그때도 중년쯤 되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했다. 왜냐면 그런 사람이 농땡이를 안치고 잘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은 배에서도 화장칸은 별도로 두고 누구든지 출입을 금지시켰다. 옛날에는 음식이 없어 배고픈 세상이었는데, 젊은 사람인 경우 배가 고파 먹어버릴 염려가 있고, 그렇게 되면 질서가 없어져 조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장칸에는 화장 이외에는 못 들어간다. 화장칸에는 75일 동안 먹을 막걸리가 저장되어 있다. 그러다가 14명이 75일을 못 넘기고 술이 떨어지면 선원들은 술을 안주고 선주와 사공 둘만 먹는다.
닻배에서는 조업의 진행단계에 따라 뱃고사를 지내는데, 그 주제는 ‘금년에는 칠산 도장원 한번 해주이쇼’이다. 닻배 조기를 잡으러 떠날 때는 고사를 지낸다. 닻배는 소를 잡는다. 그래갖고 머리를 제물로 쓰는데, 생기복덕을 짚어 갖고 안 좋은 사람은 고사 지내는데 가지 못한다. 14명중에 제일 좋은 사람만 골라서 삼분의 이 정도가 가서 고사를 지낸다. 고사는 물이 들 때 지낸다.
썰물에는 고사를 지내지 않는다. 선원들 집에서는 배가 나갈 때 쌀밥 해갖고 밥그릇에다 화장이 손에 물을 묻혀 갖고 더 싸 올릴 수 없이 싸 올린다. 그래서 14명이 가면 선주는 빼고 13명, 13그릇 담어 갖고 한 집씩 준다. 그런 다음 출어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의례다. 그리고 애들이 오면 손으로 주먹밥을 만들어서 집어 준다. 고사는 허리돛 앞에서 지낸다. 돛이 두 개-앞돛이 야가리, 뒷돛이 허리돛-인데, 허리돛 앞에서 지낸다. 고사를 지낼 때는 선장이 돛대에 북을 걸어 매놓고 무릎 꿇고 앉아 채 두개로 양북을 친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좀 늦게 ‘덩 덩 덩 덩’ 치다가
한참 친 후에는 자진 가락으로 막 내 친다. 그런 다음 배가 출어하면 떠난 날로부터 1주일, 어린애 낳으면 옛날에 이레 지내는 식으로 배 나간 이레마다 선주 마누라가 모욕하고 보리밥이라도 차려놓고 배 돌아올 때까지 비손한다.
그리고 안마도에 도달하면 또 고사를 지낸다.
지키는 사람들은 배가 여러 척 밀집되어 있으면 음식을 가져 올 때도 다른 배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가져온다. 칠산에 들어서면 고사를 지내는데, 제물은 술과 소고기를 쓰는데, 소잡을 때 미리 마련해 놓는다. 소를 잡을 때 고사 지낼 고기를 미리 잘라 보관한다. 그래서 출어할 때 마을에서 쓸 것, 칠산에 왔을 때, 또 첫 그물 놓을 때, 그리고 조기가 올라오면 잡은 첫 조기를 제찬으로 해서 고사를 지낸다. 제 지낼 때는 선장이 지낸다.
화장이 밥을 만들면 선장이 받아다 놓고 지낸다. 선장이 밥을 차려놓고 “어짜든지
고기 잘 잡게해주쇼”라고 빈다. 상은 허리돛 바로 앞에다 밥을 세그릇 차린다.
<사진 9> 조기어장 칠산
그리고 선원실인 본당에 있는배서낭에 빈다. 거기에는 파란 헝겁, 노란 헝겁, 빨간 헝겁, 실도 파란 실, 노란 실, 빨강 실, 그리고 바늘 몇 개, 또 심지어는 머리빗는 빗을 모시고 거기서 빈다, “선왕님네 어째든지 금년에는 아조 칠산 도장원 한번 해주이쇼” 그렇게 비손한다. 그리고 매일 아침이면 화장이 배서낭에 고기 반찬에 밥을 해 올린다. 그러면 바람이 가뿐하게 분다.
조도에서 출발해 바람을 잘 만나며 이틀 걸려 칠산에 도착하고 그렇지 못하면 삼일도 좋고 사일도 좋다. 바람을 못 만나면 사일 걸린다. 그때는 노를 저야 한다. 노를 젓다 바람이 오먼 바람으로 가고,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저어 간다. 이십사 절기 절기마다 바람이 분다. 절기와 바람이 옛날에는 딱딱 맞았다. 그러니까 옛날 배탄 사람들은 그 절기에 맞춰 바람이 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다. 곡우날 열두시가 넘으면 대를 바다 물 속에 넣어서 고기 울음소리를 듣는다. 딱 그 날부터 조기가 운다. 곡우날 오후 1시부터 고기우는 소리가 난다는 거다.
출어하면 75일 동안 바다에서 지내는데, 배를 대고 그물 수리도 하고 바람 불면 피항하기도한다. 그물 수리는 위도 정금에서 하고 또 위도 위 식도와 비안도, 그리고 식고미 같은 것 하려면 위도 파장기미로 간다. 식고미란 김치, 된장같은 것이다. 떨어지면 사야 되는데, 위도 파장기미, 영광 법성 사람들이 그것을 팔라고 배에 쓰는 부식을 갖다가 천막식으로 쳐놓고 줄줄이 해놓고 장사를 한다.
위도는 배를 댈 만한 곳은 전부 그런 집이다. 줄지어 있다. 그리고 청명 곡우가 되면 고기가 잡힐 것이라고 예상하고 갔는데 고기가 좀 늦게 들어 오면 선주가 객주집을 한나 딱 정해준다. 쌀도 갖다 주고 돈도 빌려다 쓰고 고기 나면 벌어서 갚아 준다. 고기는 바다에서 팔아버린다. 상고선들이 굉장히 많이 온다. 그러니가 상고선에다 팔고 집으로 가져올 것만 배를 갈라서 선상에서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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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배의 어로 수입에도 분배의 규칙이 있다. 배가 출어하기 전에 얼마씩의 선금을 주는데, 이를 선용이라 했다. 그때 당시 시세로 보면 보리 3가마니 값인 천원이나 천백원이었다. 이 돈을 쓰고 나중에 배일로 갚는데, 만일 못 벌어 오먼, 그 돈을 선주에게 반환시켜야 한다. 그러나 배성진은 반환할 길이 없었다.
독한 선주들은 전답을 차압해버린다. 그리고 이를 미끼로 종처럼 부려먹었다. 약한 사람들은 꼼짝없이 당한다. 그러나 좀 드세고 돌아다녀서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들은“내가 칠십 오일동안 그런 고생하고 그랬는디 내가 돈을 갚어줘야” 그러면서 싸움을 벌인다. 그러면 좀 면해준다. 그래도 칠십푸로는 해초라도 뜯어서 갚아야 된다. 그러니까 가서 농땡이를 칠수가 없다.
농땡이를 치다 걸리면 선장이 임금을 계산할 때 깎인다. 분배할 때 들어간 비용을 빼고 남은 금액에서 선주가 6짓을 갖고 나머지 4짓으로 선장과 선원들이 나눈다.
지금도 안강망 다닌 사람들 손을 잡으면 돌인지 나무인지 모를 정도다. 그때는 장갑도 없었다.
손이 정말 아팠다. 돛을 올리기 위해 줄을 잡아 당길라먼 어떻게 손이 아픈가 선장이 이 줄 잡아 당기라고 깨면 얼른 가서 소변을 보면서 손에다 묻힌다. 그래야 손에 물이 묻어서 부드러워 졌다. 고기 까시는 찌르지 정말 힘들었다. 지금은 화학약이 좋아서 그런데 이가 정말 많았다. 옷속에서 막 물고 이가 꾸들꾸들 해갖고 옷 벗어 놓으면 옷에서 막 기어다닌다.
소만살 되어서 날이 따뜻해지면 옷을 벗어 널어놓는다. 그러면 이가 기어다닌다. 그래도 일이 힘드니까 이가 문지도 몰랐다. 장갑도 없고 배옷도 없는 시절이었다. 갔다 오면 손이 물에 불고 옹이가 박혀서 거친돌에다 막 문지른다. 빨래하는 잿물을 타서 문질러도 돌처럼 굳어져서 손바닥이 풀리지 않는다.
귀향하면 어르신들 중에는 우는 사람도 있다. 집에 돌아와 할머니에게 “아무개네 아빠는 낼온디 울어싸라우” 하고 물어보면 할머니 말씀이 “즈그 식구가 굶어서 죽었는가 살았는가 몰라서 울제 먼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할 때는 정신없이 일하고 피곤해서 일손만 놓으면 잠잔다. 정신없이 일에 시달리다 고향에 돌아오면 그때사 집 생각이 난다. 75만에 집에 오면 참 기분이 좋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디 귀양갔다가 풀려 돌아온 기분이었다.
당시에도 해적이 있었다. 해적들이 창 갖고 올라와 돈을 털어간다. 닻배로 돈을 벌면 현찰로 갖고 온다. 갖고 오다 도독섬 근처를 지난다. 그 구녁으로 들어가먼 목포도 나오고 칠산으로도 가고 밖으로도 간다. 주로 거차도 닻배들이 이 안으로 내려와서 그 도독섬 쪽으로 간다. 배들은 도독섬 밖으로 나가서 내려 오고 무안 청계, 진도 쪽에 있는 사람들은 도독섬 안으로 오는데 거기를 도둑놈들이 지킨다. 해적들이다. 어부들은 뒤가 물러서 대항을 못한다.
그 당시는 총이 없었다. 대나무 창을 한발이나 반발 되게 만들어서 갖고 와 들어 댄다. 끄떡하면 찔러버린다. 그때는 딸싹 못한다. 거기를 지날 때 물이 내래갈 때는 노를 저으면 가는데, 물이 올라 올 때는 저어봤자 전혀 안가니까 정박해 있다. 도둑들이 그 때 덮친다. 그 때는 뱃사람들이 일에 시달려 피곤할 때고, 또 거의 일이 마무리 되어서 돌아오는 길이라 객주점에서 매상을 올린 대가로 술을 갖다 줘 마시고 좀 취한 상태다. 술김에 노질을 하다 정박해 있으면 모두 눠서 코골며 잠잔다.
그때 당해버린다. 도독놈은 창들고 세 사람만 올라와도 꼼짝 못한다. 보통 세 사람이 다닌다. 그래서 거기가 도독섬이다. 도둑배는 노를 세가락 달고 다닌다. 각각 하나씩을 젓는다.
도독섬은 지금 기계배로 2시간 간다. 거기를 통과하기 전에 칠산을 거쳐 내려 오면 큰각시, 작은각시 섬이 있다. 옛날에 큰마누라는 여기에다 얻어 놓고 작은 각시 둘째 마누라는 저기 섬에다 얹어놨다. 그래서 큰각시 작은각시라고 했다. 큰각시 작은각시를 지나면 탑쟁이 섬이 있다.
그 도에서 빠져나간 곳이 바로 도독섬이다. ‘창을 들고 와서 돈 내놔’라고 한다. 그러면 뺏긴 사
람들도 있다. 닻배는 통상 노를 두개 젓는데, 14명 중 선주는 빠지고 13명이 모두 노를 젓는다.
화장도 밥할 때나 빠지고 노를 젓는다. 13명이 노를 저으니까 무지하게 잘 나간다. 도독놈이 돈을 갖고 도망가니까 쫓았다. 요새끼들을 잡자고 하고. 사람들 숫자도 많고 그러니 잡자고. 쫓으니까 도둑놈들이 배 잘 나가게 노를 만들었는데 노가 부러져부렸다. 그러니까 그놈들이 큰 통에 돈을 담아서 물에 띄워 놓고 도망가니까 돈만 찾아 갖고 왔다. 그때는 잡아도 어디 호소할 수도없고, 내 돈 찾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기가 도독섬이라고 한다.
배성진은 뱃사람들이 추리한 신안 유물선의 침몰 과정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옛날에는 바람이 많아서 샛바람 태풍이 불면 문화재(신안 해저유물) 그것을 싣고 온 배가 바람이 불면 거기밖에 정박할 곳이 없다. 바람이 불자 배가 거기 정박했다 침몰했지 않느냐 그렇게 본다. 그랬으니까 거기에 밀집되어 있다. 지금이 기상예보가 말을 해주는데, 그전에 배 타신 분들은 아침에 해 뜰 때 일기를 보고 내일 아니면 모래 바람이 분다고 그러면 백푸로 맞춘다. 아침에 해뜰 때 아침 날씨 딱 보면 비가 온다 안온다는 것을 백푸로는 못되도 팔십푸로는 맞췄다.
그러니까 “아 바람이 큰 바람이 불것구나” 그렇게 판단하고 그런 곳에 정박을 해놓는다. 정박을 해놓고 거기서 그 배가 침몰된 것이라고 본다. 내가 전문가들한테는 안들었는데 우리 어르신들이 거가 그런것이 있다고 그랬다.
돌아 온 다음에는 망종철이니까 보리 가을을 하고 젓알 팔려고 또 나간다. 그 다음에는 고구마를 심기 위해 남자들은 쟁기질을 하고 여자들이 고구마 순을 놓는다. 다음에는 차대한 배를 놀릴 수 없기 때문에 선주가 전장포로 가서 젖을 사서 선원들에게 나누어 준다. 젖은 오십말 들이, 칠십말 들이 독아지에 젖을 사서 나누어 준다. 선원들은 선주가 얼마 산 줄도 정확히 모른다.
젖잡은 사람들하고 계약해서 사고 소금 사갖고 온다. 젖을 지지금 독에다 하나씩 간해갖고 육지로 가서 보리와 바꿔 온다. 젖장사를 떠나는 사람들은 대개 오십, 육십되는 사람들이다. 지게에지고 팔러 다닌다. “젖사이쇼!” 그러고 외치며 다닌다. 영산강을 타고 올라가서 고막원으로 들어간다. 작은 배는 고막원으로 가고, 좀 큰 배는 함평으로 가서 고창, 무장 그쪽으로 간다. 그래갖고 거그서부터 지게에 지고 가서 판다. 다 팔고 오면 선주가 내라고 허는 대로 낸다.
그리고 나머지를 선원들이 차지한다. 그러니까 육지 농사가 흐려지면 젖장사도 못하고 옛날에는 굶어서 죽기도 했다. 배성진은 굶어서 죽은 사람을 딱 두 사람 봤다고 한다.
2) 혹독하게 고생한 풍선배 선원 김종수의 생애 이야기
?조사지역 : 전남 목포시 서산동
?조사일시 : 1995. 6. 19.
?구 술 자 : 김종수(남, 68, 1998년 사망)
?면 담 자 : 나승만
김종수는 자기가 겪었던 선상에서의 차별대우, 그리고 선주 독단의 배운영과 배고픔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종수는 젊어서 닻배를 탔다. 그는 혹독하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 닻배를 탔는데,
김종수가 배를 타던 시절에는 선원들이 혹독하게 고생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특히 선원들의 매고픔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배 선원들은 늘 배가 고팠다. 화장이 쌀을 아끼기 위해밥을 얼마나 털어서 담아 주든지 파리가 밥 사이를 여기서 저기로 끼어 다닌다고 한다. 밥에 수저를 지르면 수저가 자빠진다. 그래도 선주는 많이 담아서 먹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조도서 유자망, 투망, 닻배 하는 놈들은 결과적으로는 못살 것이다고 말할 정도였다.
선주들은 밥을 배부르게 먹었지만 선원들은 배를 골았기 때문이다. 술 마시기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졌다. 닻배에 서는 식당을 하나 만들어 놓고 물도 화장이 떠줘야 먹었다. 절대 물 떠먹으러 식당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것이 닻배의 규칙이었다.
김종수는 십일월 폭풍을 만나 일본까지 표류한 경험을 구술했다. 김종수가 19살 해방되던 이듬해에 안강망 풍선배를 타고 병풍도 맹골과 만재도 사이에서 바람을 만나 표류했다. 십일월 폭풍이었다. 눈보라치는 폭풍속에 두척의 풍선이 조업 나갔다 한 척은 그날 밤 파선되어 침몰하고 김종수 배는 더 단단해서 폭풍 속에서도 일본까지 밀려갔다. 출어한 이유는 간단했다. 조금이라고 더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거기 가서 조금이라도 고기를 잡아 식량을 팔아먹자고 그랬다.
그런데 풍선은 날씨가 좋아야 노도 젓고 항해가 되는데, 바람이 불어버리면 항해를 할 수가 없다. 겨우 양망만 하는 정도다. 어렵게 마게8)를 돌려서 양망을 했다. 그리고는 15일간 표류를 했다.
식량이 떨어지니까 곡식을 넣고 물을 부어 끓여서 물만 따라 먹고 다시 물을 부어 끓여서 물만 떠먹고 그 곡식 건지는 놔두는 방식으로 연명했다.
목선이라 배에 물이 많이 찼다. 그런데 김종수를 포함해서 선원 세 사람이 아니었으면 물에 미어져서 침몰했을 것이라고 한다. 하룻밤 그 눈보라 속에서 옷을 벋어 부치고 세 사람이 물칸에 들어가 물을 걷어 내기를 하룻밤에 3∼4번씩 그렇게 했다. 그러다 화물선을 만났는데, 큰 혼선(외국 다니는 화물선)이 멈춰서 머물렀다. 큰 배가 딱 막아놓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손짓을 해서 구조를 받아 무사히 왔을 것인데 “자 우리가 살라먼 저 배에 오르자”고 그러니까 선주가 거절했다. 만약에 선주가 살아 돌아오면 그 사람들은 시골에서 자기 성씨들이 주먹을 펴고 사는 사람들이라서 만약에 그 사람이 살아오면 자기들 살아가면서도 늘 안 좋은 눈초리를 받을성 싶어 그 배에 오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 한참 있다가 아무런 신호가 없자 그 배는 가고 일본까지 표류했다.
그래서 십오일을 떠갔는데 섬이 하나 보였다. 그래도 운이 좋아서 제주도에 부쳐버리지 않고 제주도 바짝 밑으로 하룻밤을 꼬박 떠갔다. 표류 보름만에 일본 오도 열도로 들어갔다. 이 때에는 배고픈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오도열도로 들어갔는데 파도가 어떻게 무섭든가 여기까지 와서 이제 가에 다 와서 죽을랑갑다 그랬다. 그래도 안죽을라고 하니까 살아났다. 그래갖고 축항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그곳이 일본인지 조선인지 몰랐다. 그런데 갯다를 신고 하오리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야 일본인지 알았다. 그랬는데 일본배가 한 척 와서 예인해버렸다. 그때가 십일월인데 배추가 파랗고 고구마 밭에가 보면 추수한 나머지가 꽉 찼었다. 그래서 그것을 주워다 구워 먹으면서 이제 죽어도 마른 땅에서 죽겠다고 하면서 웃었다.
그런 다음에는 몇일 후 수용소에 수용되어버렸다. 거그서는 고생을 많이 했다. 거기서는 소금국에 빵 하나씩 주고 저녁에만 밥을 한숫가락 주었는데 배가 고파 솜뱅이를 생으로 뜯어 먹어도 다 먹었다. 제일 억센 가시 그것만 못씹어서 남겼다. 그렇게 먹으니까 십오일만에 똥 한번 쌌다고 한다. 그때는 미군정 시절이어서 천명이 차야 배가 한척 떴는데, 그때 크리스마스 특별편으로 칠백명이 되어서 배를 한척 냈다.
목포에 도착했는데, 그때 모두 죽었다고 넋을 건지는 굿을 하고 장례를 치르면서 넋을 사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살아 왔다. 김종수 집에서는 혼건질라고 고구마술 해놓고 종이 사고 광목사고 상주 옷해 입을라고 마포사고 그랬다.
첫댓글 우리 고 허효석 반장님 새마을 우리 여미 마을 공로자입니다 출력도구 모래운반 그릇 세수 대화 가지고 나오면 빼서가지고 발 로밟아 버린 작업 반장님 고인의 명복 을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