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끊어지면 인간은 시공간의 한계를 뚫고 전체를 본다-김홍근교수의 마음치유2 8회(약44분)
네, 안녕하세요?
우리가 지금 마음치유 시즌2
현대 서구 영성가 6인의 사상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입니다.
보르헤스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가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거든요.
"선생님의 문학 주제가 무엇입니까?"이렇게 질문을 받았어요.
그랬더니 보르헤스가 스스럼없이
"저는 언제나 시간과 무한을 천착합니다." 이렇게 답변을 했어요.
보르헤스가 항상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시간과 무한이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이것을 새겨보면 시간과 무한은 둘이 아닙니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 현재라고 할 수 있고,무한은 영원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원과 지금 이 순간 둘이 아닌 거지요.
이것이 합쳐져서 영원한 현재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그 영원한 현재가 어디 있는가?
항상 우리 발밑에 있어요.
이 발밑을 다리 각자의 아래 하자를 써서 각하(脚下).
그래서 절에 가면 우리 신발 신는데
조고각하(照顧脚下) 이런 말이 써 붙여져 있지요.
신발 신을 때 발밑을 살피라는 뜻인데
이 말은 한 가지 뜻이 더 있지요. 발아래를 살펴라.
항상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영원한 현재라는 겁니다.
이것을 각하라고도 하고 더 많은 선사들은 목전, 눈앞 이라고도 했어요.
눈앞 발밑 이것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할 때
지금 우리가 깨달음과 마음치유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관심이 어디에 가 있느냐? 할 때
이것이 무엇인가? 할 때 ‘이것‘이거든요.
지금 다리 아래 혹은 눈앞 각하 혹은 목전 이 가리키는 말은 뭐냐 하면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의식에서
생각이 끊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질문이에요.
우리가 항상 생각해 볼 것이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생각을 일으키면 이 세계가 분별이 되요.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고,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동서남북이 이렇게 있죠. 너와 나가 있고
그런데 생각이 딱 끊어지면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생각만 없으면 과거 현재 미래 없습니다.
놀랍게도 동서남북도 없습니다. 그리고 너와 나도 없습니다.
모든 분별이 사라지거든요.
생각으로 인해서 분별이 일어나는 건데
생각이 사라지면 모든 분별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눈앞에 바로 이 자리에
우리 바로 발아래에 무엇이 있는가?
이렇게 텅 빈 채로 깨어 있는 우리들의 본래 성품이 이렇게 있는 거 에요.
이것을 체험하게 되면 깜짝 놀라는 것이
과거 현재 미래가 사라지고 동서남북이 사라지고
너와 나도 사라지고 나아가 생과 사도 여기서는 없거든요.
생사도 생각일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한번 이렇게 생각이 딱 끊어져서
이 눈앞의 이 자리가 한번 이렇게 드러나면
아~! 정말 인간은 절대를 체험한다는 말을
우리가 실감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이것을 선사들은 마음자리라고 마음자리(心地) 이렇게 불렀거든요.
여기서 우리가 처음부터 여기서 살고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여기서 사는 거야. 여기 있는 거지요.
모든 존재가 여기에 있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과거 현재 미래가 모이는 지금.
보르헤스의 표현에 의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모이는 수학적인 한 지점.
이것이 바로 눈앞에‘여기’거든요.
이것이 인간이 인생에서 체험 할 수 있는 신비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이 끊어지고
기존에 알고 있던 나는 그런 나는 없는 거지요.
그래서 이제 보르헤스의 설명에 의하면
보르헤스는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하죠.
만약에 우리가 영원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보면 어떨까?
시간 이라는 게 존재할까?
영원의 입장에서는 시간이라는 건 환영이죠.
그러면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여러분 인간의 본질은 보르헤스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시간이라.
시간이 우리가 모르는 어느 저 하늘에서
시간이 지나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시간이 흐르는 것은 바로 모든 삼라만상 자체가 시간이라는 거죠.
삼라만상의 변화 자체가 시간이라는 거죠.
시간이라는 것은 나와 관계없는 어디서 밖에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 바로 시간이라는 거죠.
그러면 영원의 입장에서는 시간은 환영이거든요. 꿈과 같거든요.
그럼 그 시간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아~! 인간은 환영인 거죠.
그래서 그런 통찰을 이제 우리가 문제는 이제 이것을
그냥 얘기하면 너무나 좀 선문답 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데
이걸 문학으로 표현을 하면 작품으로 표현하게 되면
우리가 훨씬 더 그렇게 깊은 감동 속에서
그런 세계를 접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그래서 지금 뜬금없이 저도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여러분 지금 마음 추이를 쭉 이야기해 오다가
지금 명상가를 소개 하는 것만 해도 좋은데
뜬금없이 지금 한 문학 작가를 소개하고 있는 시간이에요.
아마도 여러분들은 좀 굉장히 좀 뜬금없는 느낌이 드실지 몰라도
그러나 이런 보르헤스 같은 스스로 이런 체험을 하고
작품을 쓴 그리고 그 작품이 이 세계 문명사를 바꿀 정도로
서양사상사를 바꿔 놨거든요. 실제로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같이 한번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 제가 지금 가지고 나왔습니다.
사실은 보르헤스한테는 당신 주제가 무엇이오? 하니까
시간과 무한이라는 거죠.
시간과 무한을 만난 그 그런 주제의 글을 쓰게 되는 것은
보르헤스가 시간 체험을 했다는 겁니다.
보르헤스의 시간 체험에 대해서 잠깐 소개를 해 드리겠습니다.
보르헤스가 아르헨티나 태어나서 집안에서 주로 공부를 하다가
청소년기의 유럽 스위스를 넘어가서
스위스에서 유럽의 본래 모국어처럼 잘하던 스페인어와 영어
그리고 스위스 시절에는 독어, 불어, 라틴어 배웠거든요.
그래서 덕분에 많은 문학작품을 원서를 읽었어요.
그런 세월을 공부를 하고 20대 중반에
고향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29살이면 돌아 온지 몇 년 된 거지요.
그때 마침 보르헤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외곽에
한적한 좀 시골 같은 곳을 이렇게 산책을 했다는 거예요.
산책하다가 석양이 이렇게 지고 있어서
그 석양빛이 시골에 토담을 비추고 있는데 그걸 보니까
그 토담의 색깔이 분홍색이라서 뭔가 좀 크게
형이상학적인 좀 어떤 특별한 장면이 느껴졌대요.
근데 그 순간에 그 장면이 자기한테 말을 걸어오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면...
여러분 재밌는게요 보르헤스가 1899년생입니다.
1899년 그러니까 스물 아홉 살이에요.
그런데 그 장면이 자기한테
"지금 우리는 19세기에 있어."그러는 거예요.
(10분)
"19세기에 있어" 이 말은
1899년생 29살 된 보르헤스한테는
자기가 태어나기 전으로 시간이 거꾸로 갔다는 얘기죠.
그런데 보르헤스한테는 너무나 그것이 사실로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딱 끊어져 버리고
소위 말하는 의식의 흐름이 생각의 흐름이 끊어지는 거거든요.
시간이 끊어진다 이렇게 편할 수도 있어요.
탁 이게 끊어지면서 자기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간 거예요.
그래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또 다른 표현으로는
이 세계를 지켜보는 완전히 객관적인 초월자 입장에서
초월의 주시자가 되어 이런 표현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선에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이런 화두가 있는데 지금 보르헤스는 자기 체험이 그 순간
자기가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거지요.
그리고 찰나적으로 이것이 영원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거예요.
‘아~ 이게 영원이구나!’하는 것을 느꼈다.
영원이란 것은 따로 어떤 영원이 있다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우리의 생각이 끊어지면
계속 생각의 흐름이 지금 이어지고 있거든요.
생각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딱 끊어지면 과거 현재 미래가 사라지고
동서남북도 사라지고 너와 나도 사라지고,
온전한 한 덩어리의 이 세계가 딱 드러나는데
그걸 할 수 없이 말을 하자면 나중에 의식이 돌아오고 난 뒤에
영원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혹은 피안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제 그런 것을 이제 보르헤스도 체험을 했어요.
이것을 보르헤스가 쓰는 표현 중에 직역을 하면
완전히 겁외라는 말을 씁니다. 겁외(劫外) 영원의 밖이다.그러니까요
우리 저 지금 산청에 가면 겁외사(劫外寺)가 있지요.
성철스님 생가가 지금 절이 되어서 겁외사이지 않습니까.
겁외라는 말은 겁이라고 하는 무한한 시간이잖아요.
그 밖이라는 거잖아요. 시간 밖이 겁 외죠.
또 흔히 쓰는 말에 방외(方外,공간 밖)라는 말도 있죠.
방은 이렇게 공간을 이야기 하거든요. 사방할 때.방외는 공간의 밖이죠.
그리고 격외(格外)라는 말도 씁니다.격은 틀에 박힌 격이죠.
격이란 말은 주로 인격으로 많이 쓰니까 인간 밖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시간 공간 인간을 넘어선 그것이 우리들의 본질이라는 거죠.
그 본질을 우리가 잃어 먹고 이 분별의 세계에 떨어져서
지금 우리가 여기 이 홍수에 휩쓸려가는
우리 불교에서 지금 우리의 무명이 어둠, 무지를 설명할 때
미혹되었다 이런 말을 쓰거든요.
그러니까 미혹이라는 말은 미(迷)자가 고아, 미아 길을 잃을 미고,
그리고 혹(惑)이라는 말은 홀린다는 홀릴 혹자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생각이 딱 끊어진 이 상태
지금 정말 격외 방외 그리고 겁외의 이것인데 이것이 우리의 본래 면목인데,
우리가 여기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지금 사물들에 우리가 홀려 가지고
집을 나와서 홀려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있는 상황.
그것이 지금 인간의 지금 실질적인,어떤 실존적인 모습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존재의 고향인 바로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한번 체험하고 또 이것이 확보된 사람한테는
지금 모든 시간 속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은 환영인 거예요.
이것이 그대로 꿈인 거예요.
정말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체 인연 따라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유위법은 여기에서 유위법이라는 말은 인연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 뜻 자체가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몽환포영(夢幻泡影) 꿈같고 환상 같고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바로 그 시선이 영원의 자리에서 보면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 보르헤스의 작품은
영원의 입장에서 시간 속에서 있는 이것을 묘사하는 작품을 썼다.
그러니까 문학적으로도 굉장히 의미 있는
그런 완전히 새로운 문학을 구축 했어요.
그래서 세계 문학사에서는 지금 보르헤시안 (Borgesian)문학.
보르헤스적인 문학하면 영원에서 보는 시간 속의 세계를 묘사하는
그런 주제와 장르를 보르헤시안 문학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문학 장르를 개척했는데,
예를 들어서 보르헤스가 이렇게 한번 깨닫는 사람은
결국 불교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불교를 너무 좋아하고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불교에서 보르헤스가 굉장히 충격을 받은 그런 장면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업(業)사상 이에요.
불교를 보니까 업이라는 게 있는 거예요.
업이라는 것은 그리고 업을 설명한 대목에 업이 무엇인가 할 때
인연이 직조가 되어서 날줄과 씨줄로
인연이 직조가 되어서 짜여진 인연의 미로
인연이 천처럼 짜여져 가지고 만들어진 시간의 미로가 업이다.
이런 대목을 보고 보르헤스가 깜짝 놀란 거야.
왜냐하면 보르헤스는 영원에서 보면 이 세계는 미로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은 이 미혹되어서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게
보통 사람들의 인생인 거예요.
그게 이제 업에 지배받는 사람들의 모습이죠.
근데 바로 업이라는 것이 보르헤스가 시간의 미로라는 말을 딱 듣고
‘아~!’ 보르헤스가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걸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대표작 중에 하나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
제목이 단편소설이에요.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은 시간 다시 말하면 인연이에요.
우리가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순간순간 새로운 인연을 만나잖아요.
그런데 그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는 거 에요.
예를 들어서 제가 지금 녹화 끝나면 계획이 없거든요.
그러면 지금 나서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예요.
보세요. 지금 저하고 여러분 이렇게 만나고 있잖아요.
지금 이 장면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제가 수없이 많이 갈라지는 수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에서
이 길을 선택하고 이 길 선택하고 오다가 여기까지 왔고,
여러분들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오솔길 같은 인연에서
한 길을 택하고, 택하고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만났잖아요.
그리고 또 자기 갈 길을 가잖아요.
사람 사람마다 수없이 새롭게 열리는 인연의 오솔길을 걸어가는데
그 오솔길이 담겨있는 정원이 바로 인생이라는 거죠.
인생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업이
수없이 많은 갈래 길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하나씩 선택하면서
수없이 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나씩 선택하면서 걸어가는 그런 미로 속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업이라고 하는
이 미로 속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소설화 하는 거예요. 그 제목이 참 재밌지요.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
근데 이게 이제 원문은 스페인어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국에서 번역할 때
미국에서 번역한 제목은 뭐냐 하면 <미로 정원> 이예요.
재미있는 것은 미로는 저기 크레타 섬에 가면
가장 오래된 미로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로죠.
이런 여러 가지 형태의 미로가 있어요.
보르헤스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모든 미로는 공간적인 미로에요.
근데 업이라고 하는 이것은 시간적인 미로라는 거예요.
참 신비로워요. 여러분 참 인생은 참 신비로운 겁니다.
우리가 지금 미로 속에 살고 있는데
이 미로가 시간 공간 인간 온갖 인연으로 짜여 진 미로라는 거죠.
이 미로 속에서 우리가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기는 쉽지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를 하고 깨달음과 마음치유라고 하는
이걸 통해서 우리가 올바른 인생을 살아 갈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구조 자체가 하나의 시간의 미로가 되어서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드러난다.참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미로를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한 사람이
이제 소설에는 중국 운남 성의 성주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시간의 미로를 만들려고
공간의 미로는 공간에다 만들면 되잖아요.
그런데 시간의 미로는 어떻게 만들까요?
그래서 이 중국인 운남 성의 성주가 시간의 미로를 만들기 위해서
결국에는 책으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한권의 책이 있는데 그 책은 시간의 미로라서
펼칠수록 계속 새로운 인연들이 벌어지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독자가 그 스토리가 전개가 한 줄로만 된 게 아니라
항상 중간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독자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거예요.
수많은 케이스가 이루어지겠죠.
이런 것이 책으로써 쓰여 졌다.하고
보르헤스가 자기 소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책을 실제로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단편소설에서 그런 책에 대해서 묘사를 하는 거예요.
보르헤스는 그런 식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보르헤스를 소개하면서 제가 어떻게 소개할까를 생각 좀 했었거든요.
근데 뭐 문학사상이 어떻고 하는 것 보다
그냥 보르헤스의 작품을 있는 그대로 소개해 드리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조금 전에 말씀드린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
시간의 미로를 작품화한 이런 이야기가 있는 반면에
또 다른 작품을 하나 소개를 하겠습니다.
이것은 수필이에요. 보르헤스가 쓴 수필인데 에세이입니다.
에세이에 '콜리지의 꿈'이라는 그런 수필이 있어요.
이것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콜리지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에요.
콜리지의 실제 작품에 쿠빌라이 칸
쿠빌라이 칸은 몽골을 세운 징기스칸의 손자예요.
이 징기스칸의 손자가 중국을 다 지배하고 원나라를 세웠죠.
그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 칸 들어보셨죠?
쿠빌라이 칸이라고 하는 시가 있어요. 이 콜리지의.
근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재밌습니다.
보르헤스가 지금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가 이 세계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쩌면 이 세계는 누군가의 꿈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정말로 이 세계에서 이것을 사실로 알고 지지고 볶고 사는데
조금만 우리가 시야를 넓혀 보면 이 세계는 하나의 환상일 수가 있다.
그리고 실제 세계가 역력하게 더 있다는 그런 암시를
계속 지금 작품에서 소개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꿈과 현실 사이에 경계가 모호하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런 대목에 콜리지가 영국을 대표하는
낭만주의 시인 중에 한 분이에요.
그런데 이 분이 어느 날 자기 책상에서
자기 집에서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 13세기의 세계를 정복했던
쿠빌라이 칸이라고 하는 몽고 출신의 중국 원나라 황제가
어느 날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누각을 본 거에요.
그러니까 그 누각을 우리로 치면 아방궁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막강한 천하를 지배하는 황제가 꿈속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궁전을 보고 그 궁전을 자기 고향에다 지은 거예요.
그 고향이 지금도 중국 내몽고에 상도(上都)라고 하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가 쿠빌라이 칸의 고향이에요.
거기 동쪽에 상도의 동쪽에 아름다운 누각을 세워서
모든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는 거예요. 그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런 이야기를 읽다가 콜리지가 읽다가 잠이 들었어요.
근데 콜리지 꿈에서 그 궁전이 보이는 거예요.
그 궁전이 콜리지에게 시인이니까 뭐라고 하느냐면
“내가 노래를 불러 줄 테니까 받아 적어라.”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꿈에서 이 아름다운 제너두 궁전이
콜리지 시인에게 시를 읊어 주는 거예요.
그리고 잠이 깼어요. 그런데 콜리지가 너무 생생한 거예요.
그래서 펜을 들고 받아 적기 시작하는데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시를 반쯤 적었는데
누군가가 똑똑 하고 들어와서 뭘 물어 보는데
대답해주고 딱 돌아서니까 나머지가 싹 달아나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이게 지금 사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중에 하나예요.
이 콜리지라고 하는 시인의 콜리지 시 제목은 '쿠빌라이 칸'이에요.
그러면 이 대목을 보르헤스가 보고 새롭게 해석을 하는 거예요.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을 하는 거예요.
혹시 그 누가 알랴?
황제가 쿠빌라이 칸 황제가 자기가 꿈에서 본 그 아름다운 궁전을
자기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지었다.
근데 죽고 나서 세월이 흐르고 보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도 세월이 흐르면 무너지죠.
그 궁전이 무너진 걸 안타까워해서 이 황제의 영원이
무너지지 않는 궁전을 지어야 겠다. 라고 생각을 하고
시인 콜리지의 꿈에 나타나서 이 시구를 불러 줘 가지고
그래서 무너지지 않는 건축 재료가 언어라는 거요.
이 언어로 다시 이 아름다운 누각을 지어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래서 보르헤스가 말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만약에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한다면
지금 황제 영원히 자기보다 어떤 절대자가 있고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자기의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서
막강한 권력자인 황제의 꿈에 나타나서
이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했고 그러나 그것이 무너지니까
이번에는 500년 뒤에 한 시인의 꿈에 나타나서
언어로서 이 궁을 다시 이 아름다움을 짓게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콜리지의 이 시가 미완성이라서
혹시 다시 500년이 흘러서 그때는 무너지지 않는 음악이나
아니면 대리석 조각이나 했던 그 다른 형태로
다시 이 절대가 자기 이 아름다움을 이 세계에 드러내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이런 내용의 에세이를 쓴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전체 내용이 우리가 사는 이 인생에는 틈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만이 다가 아니라 거죠.
그리고 그 틈새로 그 틈이 어디냐 하면 그 틈이 인간의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인간 의식의 절대가 상대로 드러나는 통로가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 통로로 '절대'가 이 세계로 이렇게 침투해 들어오는 이야기.
따라서 이성주의 인간은 그것을 환상이라고 말을 하겠지만
이것을 체험한 사람들한테는 이것이 환상이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그것을 곧이곧대 로의 말은 이성주의 언어기 때문에
이성주의 언어를 넘어서는 문학으로 어떤 초월의 세계가 이 세계로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금 보르헤스가 이제 그런 입장에서 많은 작품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0분 13초)
한 가지 더 말씀드릴까요?
지금 뭐 다른 거창한 문학사상 보다는 이렇게 작품을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훨씬 더 재밌을 것 같아요
또 보르헤스의 시 중에 '골렘'이라는 시가 있어요.
'골렘'이라는 시도 한번 들어 보세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프라하에 체코 프라하 있죠. 유태인이 모여 살던 게토에
유대인 랍비가 있었어요. 이름이 '유다 레온'이라고 그렇게 불린 답니다.
'유다 레온'이라고 하는 유대인 랍비가 아주 머리가 명석했대요.
그래서 이 분이 기도 중에 인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 거예요.
수많은 인간의 기억을 기도 중에 거슬러 올라가서
첫 인간에까지 다다른 거예요.
그래서 어떤 소리를 들었어요.
그 소리가 뭐냐면 조물주가 지금 유대교 랍비니까 유대교를 믿겠죠.
구약이 바로 유대교의 성경이잖습니까?
그러니까 유대인 랍비의 귀에
기도 중에 인간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니까 제일 첫 인간이 아담이죠.
그 귀에 뭐라고 들리느냐 하면 조물주가 신이 진흙을 빚어가지고
빚어서 입김을 후 불어 넣으면서 뭐라고 말을 한 거예요.
그리고 인간이 되어라 해서 아담이 탄생했다는 거예요.
그때 조물주가 아담을 창조할 때 한 비밀스런 암호,
그 암호를 들은 거예요.
그래서 그 랍비가 그 암호를 말할 기억이 나서
자기도 진흙을 빚어 가지고 그 암호를 말하고
턱턱 이제 입김을 후 부니까 꿈틀꿈틀 살아난 거예요.
이게 이름을 이제 '골렘'이라고 붙였어요.
시 제목이 '골렘'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인간도 하나님이 쓰던 그 암호를 알아 내 가지고 흙을 빚어가지고
그 암호를 가지고 인간이 또 하나 만든 거예요.
이것을 여러분 지금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인도 아리안족 까지도
이런 식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것을 전변설(轉變設)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은 오늘 시간이 없어서 자세한 설명을 못 드리겠지만
우리 불교는 이 세계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에요.
우리 불교는 연기설(緣起說)이에요.
모든 것이 연기되었다고 하는 연기설이고. 세계의 창조가.
그리고 아리안 족을 비롯해서 유대교 모든 유럽인들은
전변설을 믿어요.
전변설은 뭐냐 하면 절대자가 이런 거예요.
순수한 영혼이 인간 영혼을 만들었다.
인간 영혼은 다시 이것을 전변설을 한마디로 말하면 카피설이라고 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도 이거 여기에 속해요.
이데야가 있는 거야. 순수영혼.
이데야의 카피가 인간영혼이래요.
여러분~ 카피하면 원본보다도 질이 떨어지는 거 아시죠?
순수 영혼을 카피 했더니 인간영혼.
인간영혼을 카피했더니 인간의 몸.
인간의 몸을 카피했더니 동물.
동물을 카피했더니 식물.
식물을 카피 했더니 광물.
점점 점점 질이 떨어지는 거 이해하시겠어요?
이렇게 이 존재를 카피로써 설명하는 거. 이것을 전변설이라고 그래요.
부처님 당시에 그 때 인도는 전변설이 지배하고 있었어요.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를 깨달은 거죠. 전변설과 연기설이 달라요.
아무튼 이것은 각설하고 골렘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데
그 비밀을 알아챈 인간이 다시 흙을 가지고 골렘을 창조했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재밌는 것이 그 시에 어느 날 골렘이 보니까
자기의 창조주인 그 랍비가 항상 신에 대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이 랍비가 그거를 배워 가지고 이 골렘은 인간의 피조물인 골렘은
인간에다가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골렘이 랍비를 보고 신이시여~! 하고 기도 하는 거예요.
그거를 랍비가 보고 소름이 돋았다는 거야.
어떤 형이상학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렇게 표현을 해요.
그래서 그냥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골렘의 이마에다가 모르트(Mort)라고 하는 죽음이라고 하는 걸 써서
골렘을 죽겠 했대요. 일종의 신화지요. 전설입니다.
전설이 내려오는 건데 보르헤스가 이걸 가지고 시를 썼어요.
근데 보르헤스의 해석은 뭐냐 면요. 마지막에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자기를 숭배 하는 걸 보고
너무나 열악하고 그 피조물이 너무나 열악하고
또 맹목적인 이런 신앙을 해서 두려워서 인간이 자기의 피조물을 없앴다면
이 장면을 본 인간을 만든 신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피조물이 겁이 나서 없앤 것처럼
인간이란 것이 얼마나 또 이게 약점이 많고 온갖 결함이 많은 존재잖아요.
인간이 피조물이 그런 존재라고 해서 없앤 것처럼
혹시라도 신이 인간을 자기가 만든 인간이 하도 해악을 많이 끼치니까
자연에~ 이 지구의 암이 되어버렸으니까
혹시라도 신이 인간을 다시 모르트라고 써서
창조를 물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튼 그런 내용이에요. 시가.
사실 보르헤스가 이런 식의 많은 소설과 시와 에세이를 쓰거든요.
근데 이것을 읽으면 많은 서구 지성인들은 전율이 오는 거예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이 세계라는 것은
정말로 차라리 이게 더 허구일 수 있다는 거죠.
지금 우리가 아는 꿈과 현실 사이에 경계를 치우고
상상과 현실 이런 것을 묘하게 이렇게 비틂으로써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주의적인 이 분별심.
사실 이게 불교에서 볼 때는 무명이거든요.
무명을 신봉하고 있는 이성주의 인간들에게
그게 바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마음병의 주범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이걸 직설적으로 말을 하면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문학에서 이렇게 수많은 암시를 담아 가지고
문학을 만들어냄으로써 읽는 사람이 미셸 푸코처럼 이걸 알아채고
기존의 사고방식이 깨지고 새로운 안목이 열리는 그런 작품을 썼다는 거지요.
그래서 보르헤스는 서구에서는 전설적인 굉장히 많은 사람들한테
이런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주가 아무리 바뀌어도 보르헤스의 작품은
영원히 보르헤시안 문학.
우리가 카프카하면 실존주의적으로 카프카 문학이란 게 있거든요.
카프카 장르가 있거든요.
그것처럼 지금 세계 문학사에는 보르헤시안 장르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현실이라는 것이 사실은 꿈의 세계’
라고 하는 그런 암시를 심어주는 그런 문학 장르를 창조를 한 것입니다.
사실 굉장히 많아서 어떻게 다 소개를 할까?!하는데
마지막으로 역시 이 말씀을 드려야 되겠네요.
대표작이 보르헤스의 대표작은 알레프(Aleph)라고 하는 작품이에요.
알레프는 뭐냐 하면 내용은 간단합니다.
보르헤스가 어느 곳 오래된 집에 지하실에 들어갔더니
모든 불이 꺼지고 불이 꺼진 상태에서
동전크기 만한 발광체를 봤다는 이야기예요.
소설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생략하면
보르헤스가 지하실에서 동전크기 만한 발광체를 봤는데
깜짝 놀란 것이 그 작은 어두운 어둠 속에서 본
그 동전크기 만한 발광체가 알레프인데 알레프는 알파란 소리입니다.
서구문명의 기원 알파라는 건데 그 알레프라고 하는 것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어난 모든 일을 보는 거예요.
보르헤스 말이 이제 자기가 기가 막히다는 거예요.
자기는 그 작은 공간 속에서 지구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크기를 축소되지 않고 동시에 봤는데
아~!이거를 글로 표현하자니까 표현할 수가 없구나! 글은 나열해야 되니까.
그런데 자기는 지하실에서 동전크기 만한 발광체 속에서
모든 존재와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동시에
크기가 축소되지 않고 겹치지도 않고 봤다는 거예요.
이게 뭘까요? 여러분.
바로 보르헤스가 29살에 처음 봤다고 하는
생각이 끊어지면 시공간도 끊어지고, 인간도 끊어지고,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모르는 것이 없어지는.
사실은 전 알레프를 볼 때 이 작품 속에는
부처님의 보리수 아래 부처님의 깨달음이 생각이 나요.
부처님께서 깨달은 장면을 잠깐만 생각해보면
한 인간이 시공간의 한계를 뚫고 완전히 이 존재의 전무를 보신 거잖아요.
이런 일이 인간한테는 일어난다는 거죠.
그래서 그 보르헤스가 알레프를 묘사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화엄법계(華嚴法界)를 얘기하는 겁니다.
보르헤스가 대놓고 화엄이라는 말을 안 쓰지만
그 묘사 전체가 화엄법계를 말하는 거예요.
그것을 알레프라고 하는 상징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엄경의 화엄법계를 상징하는 것을
우리가 인드라망의 구슬이라고 그러잖아요?
인드라망의 구슬은 인드라라고 하는 이 천신이 지배하고 있는
그 천계는 모든 존재가 이 구슬이 되어 가지고
이것이 그물처럼 엮여 있다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구슬 하나만 보면 구슬 하나 속에
나머지 전체 구슬이 다 비춰들어 보인다는 거 아니예요.
인드라망의 그 그물코 구슬 하나만 보면 나머지 전체가 다 보인다.
바로 그 인드라망의 그물코에 해당하는 구슬.
이것을 알레프라고 하는 이런 상징을 통해서 묘사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보르헤스는 굉장히 불교적입니다.
그리고 불교적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가 시간이 끊어지는 이런 존재체험을 했고,
그것을 또 문학으로 표현을 했기 때문에
굉장히 불교적으로 또 선불교도 좋아했어요.
그래서 선불교의 시라고 할 수 있는 하이쿠를 직접 많이 썼어요.
하여튼 여러 가지 소개할 것은 많지만 이걸로 줄이고
서구 영성가 중에는 이렇게 문학으로 영성의 세계를 소개를 한 사람도 있다.
이 정도로 소개하면서 오늘은 마쳐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여기서 우리가 처음부터 여기서 살고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여기서 사는 거야. 여기 있는 거지요.
모든 존재가 여기에 있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과거 현재 미래가 모이는 지금.
보르헤스의 표현에 의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모이는 수학적인 한 지점.
이것이 바로 눈앞에 ‘여기’거든요. >
<시간이라는 것은 나와 관계없는 어디서 밖에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 바로 시간이라는 거죠.
그러면 영원의 입장에서는 시간은 환영이거든요. 꿈과 같거든요.
그럼 그 시간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아~! 인간은 환영인 거죠.>
무화 19.06.06 10:43
[< 후속 > 17. 누가 지금 제게 물으신다면? ■ 내맡김 영성 ■ 2010.04.14
다음은 보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은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시간을 넘보는 것은 큰 실례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오늘도 아닌 "지금"뿐입니다.
그것도 "여기의 지금"일 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시간의 주인은 거룩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지금, 여기"에서만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무화 첫댓글 20.01.07 01:18
<★창 화살★ 제3부 허무맹랑한 내맡김의 영성
14 바빠야 산다?
2010. 06. 16.
하느님께 내맡기는 삶은 느림도 바쁨도 아닌,
하느님 맘대로, 곧 엿장수 맘대로의 삶이다.
하느님께 내맡겨진 이는
하느님께 당신 맘대로 하시라고 자신을 내드렸고,
엿은 엿장수 맘대로 하라고 엿판 위에 놓여진 셈이다.
내맡긴 이들은
바쁨 속에서도 바쁨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바쁨을 즐기며,
느림 속에서도 게으름 없이 느리지 않는 느림을 누리게 된다.
흐르는 물처럼 부는 바람처럼, 바람을 타고 물을 타고
그리고 하느님 뜻 속에서 그 뜻을 타고 살아가는 영혼이 된다.
사랑하는 그대여!
이 바쁘다는 세상에서 남들이 바쁘다 해서 덩달아 바쁘지 말자.
바쁨은 모든 것을 잃게 한다.
인생에서도 과속은 위험하다.
앞만 보고 내달리는 고독한 인생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이다, 하느님께 말이다.
그러면 도로 주변의 생명들에게로 눈이 돌려진다.
생명 안에 살며시 숨어 계신 하느님,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그분,
생명들의 주인이신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무화 19.12.26 02:49
[ moowee 11.03.28. 17:32
"시간은 하느님이다."입니다.
왜? 시간의 주인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 하느님"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공간"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하느님"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뒤집어 입고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공간(영과 육)을 "하느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
<moowee 11.03.09. 12.44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하느님의 것입니다
다만, '현재'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 주셨을 뿐입니다.
과거도 하느님의 것이요, 미래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매달리거나 "미래"에 집착하는 사람은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을 넘보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하도록 자구 유혹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유혹에 떨어집니다.>
<moowee 11.04.03. 09:14
그동안 쌓여온 수많은 지식과 경험과 생각들 속에 숨어 있는 "마귀"가
그것을 못하게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버려야 합니다,
"경험"을 버려야 합니다,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이 바로 "쟁기"입니다!
지식과 경험과 생각 속에 숨어 있는 "마귀"를 쳐부수어야 합니다.
마귀를 쳐이길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편에 서 있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내맡기면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느님의 소유가 되므로
늘 마귀를 쳐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직접 그렇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 ^>
아멘,아멘!!!
사랑하는 신부님,
올려주신 동영상 감사히 시청했습니다.
참으로 거내영의 놀라운 가치를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기쁨이 너무나 기쁘기만 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아버지께 내맡겨 무한을 입고,
환영같은 인간이 영원이신 아버지께 내맡겨 영원이 되고,
지식경험생각을 버린 무뇌인간이 아버지께 내맡겨 참지혜를 얻고,
모든 것에서 죽음으로 모든 것을 얻는 참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니
오! 지극히 흠숭하올 하느님의 뜻이여~!
사랑하는 아빠, 아버지,
부족한 저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대로
그 품에 풍덩 빠집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거내영과 끊임없는 화살기도를 통하여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거룩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지혜.보조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아버지께 내맡겨 무한을 입고,
환영같은 인간이 영원이신 아버지께 내맡겨 영원이 되고,
지식경험생각을 버린 무뇌인간이 아버지께 내맡겨 참지혜를 얻고,
모든 것에서 죽음으로 모든 것을 얻는 참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니
오! 지극히 흠숭하올 하느님의 뜻이여~!
사랑하는 아빠, 아버지,
부족한 저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대로
그 품에 풍덩 빠집니다.]
아멘아멘아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지혜님!
녹취의 수고에 감사히 잘 감상하였고 댓글의 신부님 말씀을 통해
더더욱 깨닫고 다지는 시간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지혜 보조교사와 부족한 저희를 통하여 무한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시간이라는 것은 나와 관계없는 어디서 밖에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 바로 시간이라는 거죠.
그러면 영원의 입장에서는 시간은 환영이거든요. 꿈과 같거든요.
그럼 그 시간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아~! 인간은 환영인 거죠.>
아멘 아멘!!!
사랑하는 신부님
올려주신 동영상 잘 시청하였습니다.
부족하고 미소한 저를 거내영으로 불러 주신 아버지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언제나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저는 아버지께 온전히 내맡겨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으니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보세요. 지금 저하고 여러분 이렇게 만나고 있잖아요.
지금 이 장면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제가 수없이 많이 갈라지는 수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에서
이 길을 선택하고 이 길 선택하고 오다가 여기까지 왔고,
여러분들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오솔길 같은 인연에서
한 길을 택하고, 택하고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만났잖아요.>
[■ 내맡김 영성 ■
< 斷想 > 1. 인연(因緣)
moowee 추천 0 조회 1,546 10.05.04 07:49
사람의 "인연(因緣)"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흔히들 표현하는,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처럼,
바닷가의 수많은 모래알처럼,
파도 위의 수많은 물거품처럼---",
짧은 인생 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스쳐가게 된다.
인생 40년을 살아오면서, 혹은 5,60년을, 혹은 7,80년을 살아오면서,
그동안 내가 만나고 헤어지고 스쳐갔던 사람들이 과연 얼마였던가?
저의 신분상 제가 만나게 되었던 수많은 "인연들"---
신앙적인 인연은, 아무리 개인적인 대화 한마디 못하고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 하여도
사회학자가 말하는 "사회적인 거리"를 넘어서는 특별한 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30년 가까운 사제생활 동안,
여러 본당과 특수 분야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저와 비록 개인적인 대화 한마디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간 듯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저의 강론 한마디에, 저의 쓴소리 한마디에 마음 쓰임을 쓰여 지나갔을 것이고,
제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를 통한 고해성사로 영혼의 가벼움을 느껴 지나갔을 것이 아니겠는가?
수많은 분들이 저의 작은 말 한마디에, 저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좋든 싫든, 위로든 상처든, 선이든 악이든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 작은 흔들림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신분이었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깊은 회한이 몰려오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불교의 연기론에서는 사람의 인연을 매우 중요시한다.
제가 혼인미사를 주례할 때에 불교의 연기론을 자주 들먹여 왔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은 우리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의 섭리"로 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참으로, 사람의 인연은 소중한 것이며
거기에는 분명,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앗숨.보조
"인연"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뜻"을 소홀히 했고,
때로는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고 져버렸던 모든 인연에 깊은 용서를 청해본다.
창조의 교리가 없는 불교에서의 인연에 의한 모든 결과들인 인연들,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창조에 의해 생겨난 모든 사람들,
하느님께서 나에게 섭리해 주셨던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
그 사람들을 위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잠시가 아니라, 일시가 아니라, 영원히 아주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분들의 "영원한 행복"을 빌어 드리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일 것이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나신 분들 중에,
하느님 나라에 계시는 분들께서는 오히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혹시, 아직도 연옥 단련 중에 계신 분들을 위해서는 "위령미사를 봉헌"해 드릴 것이며,
아직 세상살이 중에 계신 분들을 위해서는 그분들을 위해,
그분들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화살기도를 계속 봉헌"해 드릴 것이다.
@앗숨.보조
지금 저는, 저의 마음 중에 가장 큰 바람은
제가 이 세상에 생기어 저와의 인연을 맺었던 모든 분들이
정말로 정말로 "참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부터 말이다.
분명, "죽은 다음"이 아니다!
저는 "그 방법"을 알고 있다.
저도 전에는 그 방법을 몰랐었다.
영육이 거의 무너지게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저는 정말로 저와 인연이 닿았던 그 모든 분들께
지금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알게 된 "가장 소중한 것",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참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
그렇게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저를 통해 저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모든 인연에 대한 보답이며,
동시에, 저와 맺었던 모든 인연들께 제가 은혜갚는 최선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철부지 어린이"처럼 단순하고 순수하게 저의 "그 방법"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이 세상에서부터 실제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그분들께 직접 여쭈어 보시라)
참으로 진실이다.
@앗숨.보조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그 "불화살"을 받으시라.
그 불화살은 "내맡김"이라,
"하느님께 내맡김"이라,
내맡김은 "사랑"이라,
하느님을 사랑하라!
뜨겁게 사랑하시라!
아주 뜨겁게!
뜨겁게!
사랑!
"사랑만이" 하느님을 알게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는 것이라.
그분께 모든 것 내맡기면, 그분의 모든 것 얻게 되고,
그분으로 살게 되고, 그분과 함께 있게 된다.
그분만이 나의 전부가 된다.
나의 전부가 그분 것이다.
나는 원래 그분의 것!
태초의 참자유인!
원래의 인간!
참인간!
인간!
나! ]
아멘 아멘~!!!
사랑하는 신부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지혜님, 감사합니다.
수고해주신 녹취록 덕분에 좀 더 쉽게 공부했습니다.
긴 강의 중에 유독 <오솔길 같은 인연>이란 말과 글이 들리고 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은 우리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가르쳐 주신 신부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저는 위무위 신부님을 만났고
신부님을 통해 <거내영>을 알게 되었으며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아버지만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앗숨.보조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맡겨드려 언제나 현재, 즉 지금 여기(시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찬미영광흠숭 드립니다.
<거내영>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그런데 생각이 딱 끊어지면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생각만 없으면 과거 현재 미래 없습니다.
놀랍게도 동서남북도 없습니다. 그리고 너와 나도 없습니다.
모든 분별이 사라지거든요.
생각으로 인해서 분별이 일어나는 건데
생각이 사라지면 모든 분별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눈앞에 바로 이 자리에
우리 바로 발아래에 무엇이 있는가?
이렇게 텅 빈 채로 깨어 있는 우리들의 본래 성품이 이렇게 있는 거에요."
<■ 내맡김 영성 ■
< 斷想 > 18.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다?
mooweeㅣ추천 0ㅣ조회 1,551ㅣ10.06.18 09:20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주어지는 것"이며, 주어지는 대로 "갖는 것"이다.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라 "갖는 것"이다.
누가 생각을 주는가?
생각도 주인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다 주인이 있는 것이다.
생각의 주인은,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시고,
오묘하시고, 위대하시고, 놀라우신 하느님!(아직까지 제가 알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그 하느님이 생각의 주인이시고
주인께서 주시는 생각을 우리는 그저 "갖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고, 또 다른 생각은....
마침내 "마귀"를 낳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마귀를 창조하고 자신이 창조한 마귀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종교를 초월하여 소위 道 닦는다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功을 들여 방구석에 틀어 앉아 하는 일이 고작 "無念無想"이 아니던가?
@무심.보조
아! 이거 한 방이면 끝인데....
그 한 방이 바로 "내맡김"인 것이다.
생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 생각까지도 다 내맡기면,
그때야 비로소 내 생각이 없어지게 되고(무념무상),
그때부터의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내맡김의 영성(7. 내맡김의 영적 수준은?)에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이다.
어떻게? 공부하신다고 생각하시고 다시 한 번 찾아 읽어 보시길 바란다.
하느님이 당신의 생각을 주시면 우리는 그냥 갖기만(받기만) 하면 된다.
하느님보다 더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상숭배"인 것이다.
내맡김을 그토록 강조해도 좋은 줄 알면서도 내맡기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자신이 "우상숭배" 중이라서 그런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느님보다 지 생각을 더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곧 변하고 사라질 생각을 부둥켜 안고 부르스 중인 것이다.
안고 있던 손을 풀어야 한다.
그리고 생각이라는 우상, 그 넘을 내던져 완죤 박살을 내야 한다.
생각의 노예 상태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기를
여러분 자신보다 더 원하고 바라시는 분이
여러분의 진짜 주인이신 하느님이시다.>
@무심.보조
{무화 20.01.09 00:58
천상의 책 3-87
4 "딸아,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너를 너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 안에 있는 너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너 자신을 기억하지 말고 인정하지도 말아라.
그 대신 나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너 자신을 무시하노라면 홀로 나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5 이를 실천하다 보면,
네가 너의 정신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의 정신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7 이것이야말로 영혼이 자기의 기원으로 돌아가서
홀로 하느님 안에 있는 자신만을 인정하고
스스로 창조된 목적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 본연의 꾸밈없는 방법이다."}
@무심.보조
아멘, 아멘!!!
"생각이 끊어지면 인간은 시공간의 한계를 뚫고 전체를 본다."는
강의 제목이 한 눈에 들어오네요~.
<하느님이 생각의 주인이시고 주인께서 주시는 생각을
우리는 그저 "갖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는 '내맡김 영성'글은
부족하고 부족한 저의 정수리를 쪼개는
너무나도 놀랍고 위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맡겨드린 영혼의 머리에 아버지의 생각을
떨어뜨려주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놀랍고 신비합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찬미합니다!
지혜와 부족한 저희 모든 내맡긴 영혼들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지금 이 장면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제가 수없이 많이 갈라지는 수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에서 이 길을 선택하고 이 길 선택하고 오다가 여기까지 왔고, 여러분들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오솔길 같은 인연에서 한 길을 택하고, 택하고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만났잖아요.>
사랑하는 하느님아버지,
저는 이 거내영에 오기까지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여기다 했다가 아니네, 이러기를 여러번 했습니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제 스스로 변덕스런 몹쓸 인격이라고 자책도 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이 무형의 성전에서 비로소 참 내자리를 찾은 듯 합니다.
아버지께서 창조 때부터 작정하신 제 자리인 듯 퍼즐의 마지막 한조각을 꼬옥 끼워 넣은 듯 안정되고 편안합니다.
이제는 거울 앞에 돌아온 누이의 국화꽃처럼 이 자리에서 영원을,
지금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하오니,
아빠, 아버지!
부족한 저의 모든 것을 다 맡으셔서 거룩하신 뜻대로 이끌어주소서.
제가 지금 현재 아무것도 그 무엇도 원하거나 구하는 마음이 없사오니
오직 아버지만을 오롯이 사랑하게 이끌어주소서.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
<그런데 생각이 딱 끊어지면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생각만 없으면 과거 현재 미래 없습니다.
놀랍게도 동서남북도 없습니다. 그리고 너와 나도 없습니다.
모든 분별이 사라지거든요.
생각으로 인해서 분별이 일어나는 건데
생각이 사라지면 모든 분별이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올려주신 동영상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지혜님 녹취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생각이란 것 만큼 무거운게 없어서 이것이 한번 자리를 잡으면 또 다른 생각을 불러 들여 지나간 일도 끌어 드리고 오지 않을 일도 만들어 내어 감정까지 휘젓고 말아 휘둘리고 살아 왔었습니다.
생각을 끊어버리는 '에포케'로 얼마나 단순해 질 수 있으며 모든 것을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 갈 수 있는지 거내영을 통해 알게 되어 저는 많은 은총을 받은 행운아 입니다.
내맡김을 살 때 '지금 여기' 살 수 있으며
생각이란 놈 한테 잡아 먹히지 않고 아버지 뜻의 큰 형상 속에서 떨어뜨려 주시는 느낌으로 매 순간 살아가며 영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거내영을 통하여 무한 찬미와 영광 영원히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이것을 새겨보면 시간과 무한은 둘이 아닙니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 현재라고 할 수 있고,무한은 영원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원과 지금 이 순간 둘이 아닌 거지요.
이것이 합쳐져서 영원한 현재라고 하는 거죠.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생각을 일으키면 이 세계가 분별이 되요.
그런데 생각이 딱 끊어지면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생각만 없으면 과거 현재 미래 없습니다.
놀랍게도 동서남북도 없습니다. 그리고 너와 나도 없습니다.
모든 분별이 사라지거든요.
생각으로 인해서 분별이 일어나는 건데
생각이 사라지면 모든 분별이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무형의 성전을 통해 이처럼 골고루 영적 양식을 먹여주시니
제 영혼이 더욱 풍요로워짐을 느낍니다.
진심으로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저의 온 마음과 의식을 하느님 아버지께 집중하니,
시간이 끊어진 자리에서
제 영혼이 절대자 하느님을 알아뵙게 되었습니다.
이런 체험이 있기에,
아버지와 내가 원래 하나였다는 사실을
자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저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생명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제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이 바로,
영원하신 하느님의 현존임을 알았습니다.
시간은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신 위무위신부님의 말씀이
이제는 그냥 알아들어집니다.
거내영의 초견신 체험이 저의 의식수준을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제 영혼이, 눈에 보이는 세상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이 이끄시는 세상을 동시에 느끼니,
위무위 신부님의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 글들이 진실임을
하나하나 체험하고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정배.보조
허상과 허무인 세상의 실체를 알았다하더라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은 그 무엇하나 버릴 것이 없고
오히려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질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저 같이 무지한 자도 아버지가 이끌어주시니,
이 세상의 실체와 저의 본 모습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를 아름답게 꾸미시려 영원으로부터 저를 지으셨으니,
제 목숨 다하도록 아버지만을 뜨겁게 사랑하며
아버지의 이끄심에 온전히 따르게 하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그래서 구슬 하나만 보면 구슬 하나 속에
나머지 전체 구슬이 다 비춰들어 보인다는 거 아니예요.]
아멘 아멘^^
한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것은
모든것을 받아들이는것이고
모든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한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아빠아버지,
<거내영>이라는
아버지의 사랑의 미로속에서
자꾸만 보여지는 저의 들보가
크게 보이는것이
어쩌면 그 들보자리에
주인이신 아버지가 계실 자리인것을.
보게해주시고
깨닿게 해주시고
느끼게 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기쁜마음에
저희집앞 이동식 감시 카메라가 등잔하면서
온갖쓰레기가 사라졌읍니다.
그 자리가 깨끗해서 저도 모르게 이동식 감시 카메라물건과 인사를 하는 제 자신이
어느것이 허구이고
어느것이 현실인지
반대처럼 느껴질때
순간이 전부처럼 느껴져서
행복한 마음이 영원이네요.
사랑하는 신부님~
올려주신 동영상
또 녹취해 주신 지혜보조교사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제가 아버지만을 죽도록 죽기까지
더 더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시간이 흐르는 것은 바로 모든 삼라만상 자체가 시간이라는 거죠.
삼라만상의 변화 자체가 시간이라는 거죠. >
< 생각이 딱 끊어지면 과거 현재 미래가 사라지고
동서남북도 사라지고 너와 나도 사라지고,
온전한 한 덩어리의 이 세계가 딱 드러나는데
그걸 할 수 없이 말을 하자면 나중에 의식이 돌아오고 난 뒤에
영원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혹은 피안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제 그런 것을 이제 보르헤스도 체험을 했어요. >
< 보르헤스의 대표작은 알레프(Aleph)라고 하는 작품이에요.
지하실에서 동전크기 만한 발광체 속에서
모든 존재와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동시에
크기가 축소되지 않고 겹치지도 않고 봤다는 거예요.
생각이 끊어지면 시공간도 끊어지고, 인간도 끊어지고,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모르는 것이 없어지는.
사실은 전 알레프를 볼 때 이 작품 속에는
부처님의 보리수 아래 부처님의 깨달음이 생각이 나요.
부처님께서 깨달은 장면을 잠깐만 생각해보면
한 인간이 시공간의 한계를 뚫고 완전히 이 존재의 전무를 보신 거잖아요.
이런 일이 인간한테는 일어난다는 거죠.
그것이 화엄법계(華嚴法界)를 얘기하는 겁니다. >
사랑하는 신부님, 사랑하는 지혜님~!
정성껏 올려주신 녹취와 함께 감사히 잘 시청하였습니다.
알레프 이야기에서,
사랑하는 신부님의 말씀과 함께
단일한 현동이라는 낱말이 생각나게 해 주셨어요.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에서, 우리는 시공 속에 던져진 존재이지만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에서 거내영으로 이끌어 주시어
시간 속에서 하느님을 살게 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찬미드립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은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어 단일한 현동으로 활동하고
하느님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에 따라
가장 나중에 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늘 모든 것보다 앞서 온 사람이라고 하시니,
< 보르헤스가 이렇게 한번 깨닫는 사람은
결국 불교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했는데
이 사실을 안다면,
거내영을 좋아할 수밖에 없고
거내영의 봉헌을 통하여
하느님 뜻 안의 삶을 목표로 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빠 아버지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콜리지의 꿈에 나온 쿠빌라이 칸의 궁전의 아름다움을
절대가 자기의 상대를 통하여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하는,
아버지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이 세상에 드러내는 통로가 되고 싶어요~
저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통하여 아버지 마음껏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moowee 2012.05.18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간다고들 말하지만,
실지로는
광속의 시간 속을 살아가면서 광속처럼 지나가는 "시간" 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한 "점"에 고정된 삶이 곧 우리의 인생인 것이다.
우리가 때가 되어 하느님 앞에 불려가면
아담부터 시작하여 모세, 아브라함, 요한, 베드로, 아오스딩,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
프란치스코 살레지오, 소화 데레사, 샤를르 드 푸코,
우리 증조, 고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가 모두 일렬 횡대에 서 있다.
하느님은 시공을 초월한 분이시고 우리는 시공 속에 던져졌을 뿐이기 때문이다.
시공의 주인께서 시공을 걷어 가시면, 모두 다 "헤쳐모여"인 것이다.(...) ]
@무화.보조
[ * 단일한 현동- 현재 움직이는 것
인간은 창조되어서 피조물로써 시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창조된 세계에는 과거, 미래 , 현재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되지 않으셨으므로
하느님 존재의 차원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즉 어떤 행위의 연속성이나 반복성이 없습니다.
현재의 한 행위 안에 모든 것이 있어서
하느님의 한 행위 안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는 미래에 태어날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시간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는 예수님이 잉태되어 이세상에 오시는 것,
이세상에 오셔서 하실 것들이 다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단일한 현동』 안에 있고 시간 속에 다 드러난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는 예수님이 피흘리시고 구원하신 것들이 다 있습니다.
거룩한 핏 속에서 잉태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 공로를 먼저 입어서 성모님이 원죄없이 잉태되신 것입니다. ]
- 하느님 뜻 영성 교재에서 -
{ 천상의 책
19-18 1926년 5월 6일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사람의 기원.
2
"딸아,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지고하신 임금님께서 보시기에 첫 사람은
내 의지 안에서 살며 결코 이 뜻 밖으로 나가지 않은 이들이다.
내 엄마는 아담보다 사천 년 뒤에 이 세상에 오셨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내 엄마가 먼저 오신 것이다.
3 그분의 행위, 그분의 사랑이 최초의 것으로서
순서상 피조물의 모든 행위들보다 앞서는 이유는.
거룩함과 일치와 유사성에 있어서
하느님과 더할 수 없이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계셨던 그분이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분이셨기 때문이다.
4
우리의 뜻 안에는 (시간상의) '전'도 '후'도 없고
모든 것이 첫 행위를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의 뜻 안에서 사는 사람은
가장 나중에 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늘 모든 것보다 앞서 온 사람이다.
5 ★중요한 것은 영혼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시대가 아니라,
내 뜻의 생명이 그들 안에 생명의 중심으로 있으면서
그들의 모든 행위를
하느님 신성의 배 속에서와 같이 다스리며 지배하느냐 아니냐 하는 점에 있다.★
6 ★우리의 뜻이 그렇게 생명의 중심이 된 이들이 첫사람들★이다.
9 내 뜻은 스스로의 모든 활동을 합쳐 단일한 현동(現動),
곧 단 하나의 행위로 만들기 때문이다. }
{ 16-30,2
"내 조그만 갓난아기인 너에게
동정이신 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하여 알려 주고 싶다.
3 네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내 신성은 (영원히) 단일한 현동(現動)이라는 점이다.
모든 행위들이 이 단일한 현동 안에 집중해 있다.
행위들의 연속성에 종속되지 않는 것
- 이것이 우리 (성삼위)의 신적 본질의 가장 경이로운 점으로서
우리가 하느님임을 뜻하는 것이다.
피조물이 보기에는 우리가
때로는 어떤 것을 행하고 때로는 다른 어떤 것을 행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때를 기하여)
저 단일한 현동 안에 있는 행위를 알려 주는 것이다.
사실 피조물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알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씩 서서히 알려 주는 것이다.
4
이를테면
영원한 말씀인 내가 인성을 취하여 행하기로 되어 있었던 모든 것이
내 신성이 지닌 단일한 현동과 하나인 행위를 이루고 있었다. }
{ 11-74,13
매 걸음마다 나의 뜻과 사랑이 하나 되어 있어야 한다.
14 ★★★영혼이 일의 전 과정에 걸친 의향을 내 뜻에 맡기면
내 뜻은 단일한 현동(現動)으로 활동★★★하고,
내 뜻이 활동하는 동안 영혼은 쉰다.
15 따라서, 활동하는 것이 영혼이 아니라 영혼 안에 있는 내 뜻이기에
염려와 불안이 없고,
그의 일에도 아무런 결함이 없게 된다." }
@무화.보조
<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제4장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김소영데레사무소 19.03.28
8. 시간
시간을 넘어선다는 것은 그렇게 기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정도의 문제,
다시 말해 의식의 강물이 넓고 얕게 퍼져 흐르지 않고 깊게 흐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멈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늘 어떤 강렬한 체험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가 기쁨을 잃고 산산이 흩어져 분산되는 이유는
미래의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과거를 회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분할이다.
우리가 시간 안에 분할되어 있을 때는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없다.
시간을 벗어난 곳에서는 지루함도 근심도 우울함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시간을 반복으로 보고 있지만
반복된 시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주님의 기도를 백만 번째 기도할 때,
아니면 아침에 일어나 아픔이나 고통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다.
매일 매순간은 유일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시간에 얽매일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
<그러면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여러분 인간의 본질은 보르헤스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시간이라.
시간이 우리가 모르는 어느 저 하늘에서
시간이 지나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시간이 흐르는 것은 바로 모든 삼라만상 자체가 시간이라는 거죠.
삼라만상의 변화 자체가 시간이라는 거죠.
시간이라는 것은 나와 관계없는 어디서 밖에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 바로 시간이라는 거죠.
그러면 영원의 입장에서는 시간은 환영이거든요. 꿈과 같거든요. >
어느 성인의 말씀인지 그분의 기억은 안나는데 말씀은 생각이 납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무것도 확정된것이 없으니 지금을 잘 살라.
그런데 내마음속에 더 깊이 다가온 말씀은 대림피정중에 앗숨 보조교사님이 능구3개월
축하말씀으로 주신 사랑하는 신부님의 말씀이 더 깊이있게 내 마음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다음으로 자꾸 미루는 것은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뜻대로 살고 싶어서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다.
내 뜻이란 곧 '나'이며, 하느님의 듯은 곧 '하느님'이다.
다음은 보장되지 않는다.
'다음'은 하느님의 시간이다.
하느님의 시간을 넘보는 것은 큰 실례다.
우리의 시간은 오늘도 아닌 '지금'뿐이다.
그것도 '여기의 지금'일 뿐이다.} - 위무위 -
아멘 아멘~~!!!
보르헤스가 불교의 업(業)사상을, 직조처럼 짜여진 시간의 미로가 업이다라고 공감하는데
대대로 쌓인업을 짊어지고 가야하니 얼마나 힘들까요
내맡김의 영성에서는 과거거도 미래도 하느님께 맡기고 지금만 하느님 사랑하며 잘 살면,
그 무거운 업보에 짓눌려 근심걱정 안해도 되니 정말 기쁩니다.
거내영으로 이끌어 주신 아버지 하느님만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살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그러니까 지금 전체 내용이 우리가 사는 이 인생에는 틈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인간 의식의 절대가 상대로 드러나는 통로가 있다는 거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현실이라는 것이 사실은 꿈의 세계’
라고 하는 그런 암시를 심어주는 그런 문학 장르를 창조를 한 것입니다.
자기는 그 작은 공간 속에서 지구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크기를 축소되지 않고 동시에 봤는데
아~!이거를 글로 표현하자니까 표현할 수가 없구나! 글은 나열해야 되니까.>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시다'가 생각납니다.
천상의 책에서도 예수님께서 끝도 없이 말씀하실 수 있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어찌 보면 인류의 기원이 언어가 생기면서 일 것이고
그 모든 언어들이 창조를 이루는 것이라 여겨지면서
언어를 통해 절대계와 상대계가 이어지고 그것을 하나의 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 '점'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인 것을 <거내영>을 통하여 알지 못했다면,
보이지도 않는 절대계를 찾겠다고 머리도 나쁘고 무식한 제가
지금 여기의 행복은 발견하지도 못한 채 시쳇말로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되어 육도 마감되었을 것 같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든 그 점을
거룩한 내맡김을 통하여 소유해버렸으니
절대계, 상대계를 완전 접수해버린 거내영파가 된 것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완전하게 잘한 일이라 여겨지네요.
꿈이면서 꿈이 아닌 꿈같은 삶!
모든 언어의 한 점, 바로
아버지!!!
그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다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육하원칙의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해서 알려준 <거내영>,
그것은 오직 아버지만을 사랑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
끊임없는 화살기도의 선물로 불완전을 잊게하고
365일이 성탄이게 하는 것까지,
아버지를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는 것만큼
가슴 뛰고 의미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나머지는 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저절로 저절로 굴러가는 것을 실감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제 심장을 뛰게 하시고 제 정신을 깨어있게 하시고 제 육을 순종하게 하시니
저는 더 이상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아니라
아버지 집에 돌아온 아버지의 분신이 되었습니다.
@초연.보조
감사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의 식구님들,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지혜님의 수고에
다시 한번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드립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우리 불교에서 지금 우리의 무명이 어둠, 무지를 설명할 때
미혹되었다 이런 말을 쓰거든요.
그러니까 미혹이라는 말은 미(迷)자가 고아, 미아 길을 잃을 미고,
그리고 혹(惑)이라는 말은 홀린다는 홀릴 혹자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생각이 딱 끊어진 이 상태
지금 정말 격외 방외 그리고 겁외의 이것인데 이것이 우리의 본래 면목인데,
우리가 여기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지금 사물들에 우리가 홀려 가지고
집을 나와서 홀려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있는 상황.
그것이 지금 인간의 지금 실질적인,어떤 실존적인 모습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존재의 고향인 바로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한번 체험하고 또 이것이 확보된 사람한테는
지금 모든 시간 속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은 환영인 거예요.
이것이 그대로 꿈인 거예요. >
< 창 화살 제3부 14
바빠야 산다?
2010. 06. 16.
바쁨은 사랑이 아니다.
느림도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시간이 아니기에 시간을 모른다.
시간을 느끼지 못한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내맡김을 늦추려 함은 시간을 알고 시간을 헤아리는 것이다.
시간은 없는 것인데
어떻게 시간을 알고 시간을 헤아려 늦추려 하는가?
그것은 시간 속에 들어온 ‘시간 아닌 시간의 홀림’,
그놈의 유혹일 뿐이다.
부디, 시간을 잊고
시간 속에 자신을 내맡김으로 시간을 창조하고
시간의 주인과 함께 영원한 시간을 살아가자. >
< ■ 내맡긴 영혼은 ■
"망설임"은 내맡긴 영혼의 태도가 아닙니다.
2010.09.26
내맡기기 전에는 모든 일에 있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고,
또 생각을 많이 할수록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내맡김"이 뭡니까?
생각마저, 지식마저, 경험마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기고,
그래서 "생각없이", "지식없이", "경험없이" 살아가는 것,
즉, "無腦人間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대신,
하느님이 주시는 靈感과 智慧와 召命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뛰어난 지식도 그 주인을 따라 무덤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도 경험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사라 없어질 지식과 경험과 생각을 모두 다 버리고,
아니, 하느님께 내맡기고
영원히 함께할 하느님의 지혜를 쫓기 위해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입니다.
"지혜"가 뭡니까?
국어사전에
"사물의 도리나 선악 따위를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 슬기" 또는
"불교에서,
미혹을 끊고 부처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힘을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지혜라는 단어 바로 밑에 "지혜검(智慧劍)"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은
"불교에서 번뇌를 끊어버리는 맑은 지혜의 힘을 칼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번뇌"는 생각입니다.
생각을 끊어버려야 맑은 지혜의 힘이신 "하느님"을 얻습니다.
과거의 지식과 경험을 불러들이는 "생각"과
부르스를 땡기지 맙시다!
망설이고 주저하지 맙시다!
"아님말구"입니다.
100%를 완죤히 내맡긴 영혼이라면 - - - - - - - - - - - >
@무화.보조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만 죽도록 뜨겁게 사랑합니다.
미혹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탁월한 최고최선의 재래식 무기
화살기도를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생각이 딱 끊어지면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생각만 없으면 과거 현재 미래 없습니다.
놀랍게도 동서남북도 없습니다. 그리고 너와 나도 없습니다.
모든 분별이 사라지거든요.
생각으로 인해서 분별이 일어나는 건데
생각이 사라지면 모든 분별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눈앞에 바로 이 자리에
우리 바로 발아래에 무엇이 있는가?
이렇게 텅 빈 채로 깨어 있는 우리들의 본래 성품이 이렇게 있는 거 에요.>
'지금, 여기'를 살아가라 하신 신부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내맡겨드렸더니
과거도 생각나지 않고 미래도 그려지지 않게 되어 '지금 여기'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냥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게 되니 모든 것에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무뇌아처럼 살아갈 수 있음이 은총이지요.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하느님~
내맡김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오니 아버지 뜻대로 하시고
부족한 제가 아버지만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완사, 완영을 위하여!!!
<인생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업이
수없이 많은 갈래 길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하나씩 선택하면서
수없이 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나씩 선택하면서 걸어가는 그런 미로 속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업이라고 하는
이 미로 속을 걸어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신부님,
녹취해주신 보조교사 지혜님,
감사합니다~~
어디서도 듣기 힘든 고퀄리티 강의를 들으니 너무 신나고 행복합니다~~
저는 불교의 업, 연기론 등을 참으로 존중합니다.
가톨릭 신자가 된 후에도 그랬답니다...
그런데,
거내영에 와서 이렇게 강의를 통해
연기론, 업, 시간과 영원에 대한 담론들을 접하니,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의 탁월함이 더욱더 절실히 느껴집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주인이신 하느님께 모든것을 내맡겨
하느님의 온전한 소유가 되고, 하느님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면
1.하느님과 온전히 함께하는 지금 현재가 영원이 되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개념으로부터 놓여나고
2.내 뜻으로 살때 지은 업장이 연기로 이어진
여러 일들의 책임과 무게로부터 자유로와지며
(위무위 신부님의 세탁기 이론+
자기 멍에를 버리고 예수님의 멍에를 지게 되므로)
그저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대로 충실히 따라가면 되며,
3. 알 수 없는 인생의 미로를 걸어가지만,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마련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미로 속이기에,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한 삶이기에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늘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는 것이
불교에서 소위 깨달은 자의 연기론적인 삶과
하느님께 내맡기고 사는 삶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시간, 현재, 영원에 대해 일깨워 주시니
아버지께 맡기고 사는 이 삶이
얼마나 얼마나 고귀한 삶인지
다시 한번 보게 됩니다~~
부족한 저희 모두를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