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가출
문경여중에 입학한 나는 날이 갈수록 공부에 대한 열의를 잃어 갔다. 중학교도 겨우 갔으니, 고등학교 진학하는 것은 일찍 포기했다. 공부는 계속 하고 싶지만 부모님의 도움 없이 집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는 어렵다. 열심히 공부에만 올인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도 토끼를 길러 학비를 마련하려면 토끼 농장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불안은 나를 정서적으로 우울하게 했다. 중학교에 진학을 하고 나서도 학교가 끝나기 바쁘게 집으로 귀가하지 않으면 엄마의 잔소리와 매질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을 사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시 대회를 앞두고 습작 연습을 하는 것도 엄마는 불만이었다. 내가 군내에서 실시하는 경시 대회에서 상을 받아오고, 엄마 친구들로부터 내 칭찬을 듣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매를 드는 것이 조금 뜸해지기는 했지만 엄마의 기분에 따라 언제 또 맞을지 몰라 항상 불안한 마음이었다. 특히 엄마의 폭언과 막말은 집을 뛰쳐나가고 싶게 했다. 몇 번이나 가출을 결심하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용돈이란 것을 받아본 적도 없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하굣길에 약국에 가서 아버지 은단을 사 오라며 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았다. 평소 아버지가 먹던 은단이 없다고 해 다른 은단을 사면서 거스름돈 10원을 껌이랑 사탕을 사먹었다. 은단 값을 10원 더 줬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죽도록 맞았다. 그 후로는 아예 군것질은 생각도 못했다. 가끔씩 집에 오는 손님이 용돈을 주기는 했지만 그 돈은 손님이 가고 나면 엄마에게 맡겨야만 했다. 집을 나가고 싶어도 차비 한 푼도 없어서 포기하고 살았다. 글쓰기 연습도 책을 읽는 것도 엄마의 눈치를 보며 했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일기였다. 두 분 모두 글을 모르니 내가 어떤 글을 써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일기를 쓰며 상상 속의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나의 삶과는 다른 상상의 나라를 만들고, 그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다 잠이 들곤 했다. 이런 상상에 밀려 공부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친구들이 조금만 노력하라고 충고를 했지만 나는 공부에 매달릴 분위기도 아니었다. 모르는 것이 있어도 찾아볼 참고서도 없었고, 영어 사전도 없어서 영어 실력도 늘지가 않는 것도 문제였다. 내가 처음으로 영어 사전을 접한 것은 중학교 삼학년 때다.
자꾸만 떨어지는 내 성적을 걱정하신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집에 가정 방문을 오셨다. 선생님은 내가 지각을 밥 먹듯 하는 이유가 아침마다 집에서 밥이며 설거지까지 다 하고 등교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 계셨다. “중 3인데 아침에 밥은 꼭 영숙이가 해야 합니까?” 하고 담임선생님이 아버지께 여쭈었다. “그럼요, 지가 나중에 팔자가 좋아 남을 부리고 산다고 해도 지가 할 줄 알아야 남도 부리지요. 당연히 밥은 해먹을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참고서나 사전은 부모님이 글을 모르시니 대화가 아예 안 되었다. 그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담임선생님께서 영어사전을 선물로 주셨다.
사전에는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선생님께서 써 놓으셨다. 내 생의 첫 사전이며 참고서였다. 이런 환경에서도 우등생을 놓치지 않은 것은 운이 좋아서였다. 친구 집에 가서 공부도 하고 참고서도 빌리고 했다면 다를 수도 있었지만 난 그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늘 깊은 생각에 잠겨 먼 곳을 바라보는 이상한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나의 고립은 더 심해졌다. 학교에 가면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누구와도 절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꿈은 있으되 이룰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며, 나는 수업 시간에도 창밖이나 보는 날들이 많아졌다.
친구들이 걱정을 해도 마음을 다 털어놓고 울 수 있는 친구를 내 스스로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다른 친구들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것도 열악한 가정환경도 감추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와 집만을 오가며 혼자서 마음의 갈등과 수없이 다투어야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나는 집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사회가 아무리 열악해도 엄마보다는 편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엄마의 성격을 어쩌지 못해서 내게 매를 들겠지만 말로도 충분히 알고, 이해하는 나이에 가해지는 다소 비이성적인 채벌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는 고등학교 진학 문제가 나오자 처음에는 아버지랑 같이 무조건 반대를 했다. 내가 각종 군내 문예 백일장은 물론이거니와 도내 경시에서도 입상을 하고, 선생님들의 기대에 어린 말씀이 계속되자 엄마는 점촌에 있는 문경여고에 입학시켜 주면 장학생이 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물론 맘먹고 공부에 매달린다면 가능도 하리라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은 엄마의 감정 해소제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엄마를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돈도 벌면서 공부도 하는 대구한일여실고에 입학시험을 봤다.
실업고등학교지만 경쟁률이 높다는 것을 현장에 가서 알았다. 나는 좋은 성적으로 합격을 했고, 같이 시험을 본 친구도 나란히 합격을 해서 기분이 좋았다. 엄마는 장학생이 안 되어도 좋으니 집에서 문경여고에 다니라며 대구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나의 의지는 확고했다. 처음으로 엄마의 반대를 이기고 기어이 중학교 졸업과 함께 집을 떠났다. 집을 떠나는 나의 가슴은 설렘과 기대로 부풀었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까지 내 마음을 돌려보려 했다. 드디어 자유를 찾아가는 해방감 나는 날개를 펴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마음 아프기는커녕 통쾌하기까지 했다. 엄마로부터의 탈출, 대구행 기차 안에서 나는 꿈이 아닌가 싶어 몇 번이나 내 손을 꼬집어도 보았다.
첫댓글 여울 아우님,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잘 견디셨네요. ^^속이 다 후련해집니다. 동병상련도 진하게 느끼고요. 요즘 제가 댓글로 화답하는 것이 좀 게을러졌습니다. ^^좋은 글을 읽었으면 글쓴 이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이 독자의 몫일 텐데요. 시골에서의 텃밭 농사와 아동안전지킴이 역할, 성주시니어합창단, 월항공소회장, 백날글쓰기 숙제 등등이^^ 저를 넘 바쁘게 합니다.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 우리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하고 자존감 높은 학이사 독서아카데미 시민으로 살아갑시닷!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여울 아우님
아휴, 이렇게 절절한 댓글 황송합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하시네요.
우짜든지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