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倫高等學校에는
1962년 한 학생의 자취방에 뜻을 같이 하는 친구 몇이 모여 장래 서로의 발전과 모교 및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모임을 갖자고 결의한 후 해마다 몇 명씩의 후배들이 동참 하며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모교 역사 절반의 연륜을 가진 동문 최대의 同志會 K.N.T.가 있습니다.
자연이나 역사의 형성은 이토록 조그마한 인연이 세월을 따라 참으로 경이로운 변화를
이루는 듯 싶습니다.
여기 샛별 문화 지면을 빌려 모교에 1993년이래 同門奬學事業의 일단을 맡음으로서 알려져 있는 K.N.T. 同志會의 40년을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현재 K.N.T 同志會는 “ 競爭社會에서의 엘리트가 되자 ” 라는 회의 이념아래 항상 모교와
회원상호간의 깊은 애정을 가지고 200여명의 회원들이 교가의 가사와 같이
방방곡곡 , 각계각층에서 샛별이 되어 있습니다.
흘러간 40년의 세월을 되돌아 보고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추억들을 정리하여
작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 창립이후 세기도 바뀐 만큼 새시대 K.N.T.의 역활과 발전을 위한 바탕으로 삼고자 합니다.
一 . 胎動期의 時代的 背景
1950년대 후반 , 동족상잔의 6.25 전쟁으로 무참히 파괴된 우리 나라는 남과 북이 냉전시대 최전방의 휴전지역으로 대치상태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고달픈 삶을 살고 있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전쟁복구에 총력을 기우려야 함에도 政治 , 經濟 , 社會 등 모든 분야가 폭력과 무질서 그리고 이념의 갈등으로 혼란의 시대 였으니까
1960년에 들어서며 4.19 혁명을 거치고 5.16을 맞아 군부의 물리력으로 새로운 질서를 요구받던 그 시절 K.N.T. 창립멤버들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당시 청소년들도 기성세대의 영향으로 사는 동네나 다니는 학교 내에 폭력조직이나 패거리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각 학교들은 그런 성분의 학생들 중심으로 조직되는 서클들을 경계하여 교내 특별활동
이외의 어떤 형태의 동아리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밝혀지면 옥석을 가리지 않고 처벌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대학을 중심으로한 학생들은 4.19혁명으로 주체의식이 높아지고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과
참여의 욕구가 커지면서 향후 근대 데모문화를 주도하게되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고등학교 학생들은 요즘의 학생처럼 극단적인 입시환경에 매여 있지않아
좀 능동적으로 미래나 인생에 대한 고민과 폭넓은 상호토론도 할 수 있는 어쩌면 낭만이
있었던 학창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二 . 胎動期
5.16 이 일어난 1961년말 1학년생 엄창호(엄재호로개명 ),이상복, 이종호등이 교내 모서클로 스카웃됐다. 거기서 어울리던 3 명은 본인들의 장래나 학업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1962년 탈퇴했다.
1962년 9월 당시 직선 학생회장에 선출된 엄재호 , 대대장 이상복 , 이종호 , 한천수 등이 학생회 활동으로 자주 만났다. 모 서클에서 한번 경험한바 학생들도 건전한 모임이 있으면 상호간에 많은 자기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1962년 11월 청도에서 유학온 현경광 자취방에 위 4 명과 현경광 5명이 만나 건전한 서클을 발족하고 명칭을 Knight Prince King (K.P.K.)로 정하였다
三 . 創立
1963년 9월 엄재호 ,이상복 , 이종호는 차기 학생회장에 선출된 주완식 , 부회장 이판진,
대대장 한덕희와 학생회 활동으로 만나며 이들에게 K.P.K. 모임의 취지를 소개,
함께 건전 서클의 전통을 세워 나가자고 권고,승락을 받아냈다.
1963년 10월 3일
3학년 엄재호 , 이상복 , 이종호 , 한천수 . 2학년 주완식 , 이판진 , 한덕희 , 문동승
이상 8 명이 개천절 행사후 삼덕동 소재 중국집에서 만나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a. 名稱 ;Knight,Prince,King (K.P.K.)의 긴 명칭을 knight로 정하고 K.N.T.同志會라 칭한 다.
b. 會員 ; 각 기별 10명 이내로 한정 , 최종기수는 후배들 중 훌륭한 요건을 갖춘
차기기수를 구성한다.
c. 活動 ; 재학시에는 학업에 열중하고 졸업후 각 기별로 활동하며
재학중인 후배기의 진학 등 자문에 적극 협력하고 인접기수 간의 친목을 돈독히 한다.
d. 회칙 및 뺏지 ; 회칙 초안은 이종호 회원이 맡고 뺏지 도안은 당시 미술부장이던
문동승 회원이 맡아 도안 한다.
e. 指導敎師 ; 교내 여건이 허락하면 약간 명의 지도교사를 모시고 그분들의 추천으로
신규회원을 선발할 수있다.
1963년10월20일 산격동 이종호 회원집에서 다시 회동 회칙 초안을 심의통과시키고 문동승 회원이 도안한 뺏지를 확정 제작하여 졸업후 착용하기로하고 3기부터는 졸업 축하 행사 때 전달하기로 했다.
1963년 12월 24일 지저동 이상복 회원댁 과수원.
크리스마스 및 송년 합동모임에서 회칙 프린트와 제작한 뺏지를 나누어 가지고 K.N.T 同志會 1기, 2기회원이 추가로 입회하여
1기; 김광수,김중목,엄재호,이상복,이종호,이충원,한천수(7명)
2기 ;김상규,김성용,문동승,박정태,이영우,이종대,이판진,주완식,한덕희 (9명) 등
당시 확정된 창립회원이 상견례를 하였다.
1964년 9월 학생회장 이격, 대대장 강승철, 김동현 ,김수동 ,공영하가 3기로 입회하였으며
1965년 9월 대대장 조성배, 1964년 석강 장학재단 제1기 장학생으로 입학한 황한택 ,
안동주, 이정탁 이순삼 박현우 ,김호섭 회원이 4기로 입회했다.
이때부터 졸업 축하연에 지도교사를 자임하면서 곽동헌선생님이 참석하셨다.
1966년 9월 최일헌,김윤기,김상한,허상태,서정석,박실경, 백현국 회원이 5기로 입회하였고,
1967년 9월 최영철,김종훈,서석종 (서정호로 개명 ),이성희회원이 6기로 입회하였다.
창립당시에는 이름만 거론해도 교내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던 선배님(학생회장, 대대장을역임하신 선배)들이 60년대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에 접하기 힘들었던 짜장면으로 유혹하며(?) K.N.T.회원 가입을 종용했다고 한다.
특히 민족대륜의 중흥을 주창하며 획기적 장학제도를 마련하여 학업을 일으키던 당시 모교로서는 서클활동은 곧 제적대상으로 이어지는 상황이었으니 아직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순진한 학생으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당시 사회의 혼탁함에 대한 반작용이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이름 그대로 기사도 정신(騎士道 精神)을 표방하며 여느 서클과는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가리라는 선배들의 설득과 공부도 잘하면서 의기투합한 친구끼리 서로 권해서 입회하게 되었다고 한다.
四. 受難期
1968년 9월 K.N.T의 지평을 달리할만한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6기 회원들이 7기 차한영, 김인호, 이영희 등 신입회원 환영행사를 마치고 귀가 중 교외사 찰교사로부터 불량서클로 지목 받아 입건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유행하던 폭력서클의 아류쯤으로 오인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 두기수 회원들은 많은 선배와 관련 스승님들의 구명활동에도 불구하고 3학년 전원 퇴학 , 2학년 전원 정학이라는 가혹한 처벌이 내려 졌다.
당시 지도교사이시던 곽동헌선생님은 최선을 다한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전원퇴학 결정이 내려지자 “제자의 잘못은 곧 스승이 잘못 가르친 것이다”라는 일성과 함께 학교를 떠나신 것이다. 이후 교내서클활동은 완전 중단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었고 이때부터 K.N.T
신입회원은 졸업예정인 3 학년을 선발 했다고 한다..
당사자인 6기 최영철 회원에 의하면
“ 우리는 학교와 스승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확연이 깨닭을 수 있었고 이러한 의연한 제자에 대한 살신의 사랑이 그 제자들에게 진정한 인성교육을 하신 것이라고 우리들은 믿고 있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공태룡선생님이나 장성자선생님등 적지 않은 스승님들의 애정어린 간절한 충고와 배려가 있었기에 학교에 대한 반감을 삭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후일 모교 측의 내부적 인식전환과 KNT선배회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모두가 떳떳하게(?) 복교하여 자기의 몫을 훌륭히 해내고 사회 일각에서 엘리트로서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며 가끔 옛일들을 회상해보기도 한다“ 면서 말씀을 아꼈다.
1976년 K.N.T 동지회의 최대 오점으로 남은 사건이 있었다.
5기 백현국 회원이 유신반대 데모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되었을 당시
정보기관의 성분조사후 전회원이 조사받고 K.N.T회의 해체위기가 올수 있다는 우려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백회원을 제명시킨 사건이 있었다.
1990년 복권된 이후 현재 교편을 잡고 있는 백회원은 다시 K.N.T에 재입회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五. K.N.T 理念과 中興期
K.N.T. 同志會는 大倫高等學校 재학 중이던 몇몇의 학생들이 어쩌면 평범하다고 보이는
작은 모임으로 시작했고 초창기에는 회 자체가 와해 될 수도 있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경향각지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40여년간 전통을 이어온 K.N.T동지회는 결속력에 있어 특별한 요인이 있었다고 본다.
첫째로는 1기 회원과 더불어 정신적 지주로 문동승 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회의 기반을 잡기 전에 초기 창립멤버들은 학생, 군입대, 사회초년생 신분으로 사회적 입지가 약했던 상황에서 당시 문동승 회원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여 인접 가까운
기수끼리 수직적인 친목모임의 명맥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1969년 송년회 형식을 빌어 처음으로 전회원이 수평적으로 만나는 정기총회가 소집되었다.
현재의 K.N.T가 성립할수 있었던 것은 문동승 회원이 초대회장을 맡아 수년간 회를 이끌 어 오면서 회의 기반을 갖추는데 헌신적인 노력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둘째로 선배에게 깍듯하고 후배들에게 헌신적 역할을 한 역대회장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역대회장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1기 엄재호(고13회,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장) , 2기 문동승(고14회,두성주류대표) ,
2기 주완식(대한산업대표) , 3기 강승철(고15회, 전 금복주이사) , 4기 이순삼(고16회,대구 경북양계농협) , 4기 황한택 (고16회, 굿모닝신한증권상무, 전 평화은행상무이사),
5기 최일헌 (고17회,창녕농산물저장창고) , 6기 최영철(고18회,삼코 대표이사) ,
7기 김인호 , 9기 백창훈(고21회,범어빌딩) , 9기 서정렬(정우경영컨설팅대표) ,
9기 김우진 (굿모닝공인중개사) , 12기 최문수(고24회 ,약사, 고 최유련 교장선생님 자제)
13기 서정욱(고25회,성심산부인과원장) , 13기 손진영 (고25회,스파2020대표)
셋째로 끈끈한 형재애와 K.N.T 이념으로 잘 무장된 뛰어난 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K.N.T의 이념은 모든 회원의 가슴에 각인되어 있지만 집행부에서도
우선 매년 4~5명 단위로 영입되는 K.N.T 가족을 하나로 묶어 이념을 공유하는 일이 시급하면서도 중요한 과제이기에 ‘82년도부터 「K.N.T 회보」를 창간하여 활동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으며 지식․정보화시대에 걸맞게 On-Line Home-Page도 개설 운영하고있다.
이념 정립과 실천을 주장해온 4기 황한택회원과 6기 김종훈(고18회,주McMTec대표)회원 에 의하면 , 우리의 주 활동무대가 될 21세기의 도전과 Key-Word를 생각하며「세계화」, 「지식․정보화」,「인간화」시대 도래를 상정하고 그에 걸맞는 우리의 이념을 마련코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1. 경쟁사회에서의 First-Man
세계문명사적으로도 그 우열이 판명되고 있듯이 21세기의 지도원리도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원리가 주류를 이루어나갈 것이고 시장경제원리의 핵심은 적자생존(適者生存) 즉 일류(一流)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법칙이며 따라서 우리 K.N.T 구성원 개개인이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목표이다. 지금은 「경쟁사회에 엘리트」로 표현이 다듬어졌다.
2. 상부상조 정신의 생활화
지금은「회원간 상부상조」로 바꿔쓰고 있지만 경쟁사회에서의 First-Man에 매달리다 보면 자칫 우리사회는 인간성의 상실과 함께 집단 이기주의와 단기업적주의로 치닫게 되고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를 치유하는 방안으로 동양적 상부상조정신의 생활화를 두번째 이념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3. 모교 발전에 기여
K.N.T는 대륜인이 모여 조직한 단체라는 태생적 한계를 설정하고 우리를 양육한 모교에 후배들을 육성하는데 기여하는 방법으로 나아가자는 목표이다.
KNT회는 이념 실천을 위해 3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1992년6월14일 칠포모임에서 3기 강승철 회원의 제안으로 129명(1기-29기)이 발기하여 기금을 조성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한 후 KNT장학기금을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여 1993년 9월10일 첫 장학금이 지급된 이래 금년 봄까지 모교재학생 총33명에 대하여 장학금으로
총액 3천4백여만원이 지급되었으며 장학기금의 현재 잔액은 6천5백여만원에 이르고 있다.
현재 기금 운영 위원장으로 6기 최영철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六. 現在活動
현재 K.N.T 회원은 200여명이 법조계 , 의약계 , 교직계 , 군인 , 공무원 , 정치인 , 사업등 다양한 직업군별로 경향 각지에 흩어져 활동 하고 있다.
40여년이란 연륜으로 조직이 비대해져서 2001년 강승철 회원의 K.N.T 운영대책방안에 따라
지역별로는 본부에서 회무를 총괄하고 서울.경인지부, 부산.경남지부 및 기타로 나누고,
연령별로는 소규모 그룹화 하여 50세 이상 원로부 , 38세 이상 장년부 , 30세 이상 청년부,
30세 미만 학생부로 나뉘어서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K.N.T 기구는 장년부에서 회장을 맡고 운영의 중심집행부인 회장단과, 각지부, 이사회 , 자문위원회, 기금조성운영 위원회 및 편집실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모임은 전국적으로 정기총회 겸 신년교례회 , 임시총회 및 춘.추계 야유회가 있다.
또한 부회장이 간사가 되어 소그룹별 사랑방 모임이 매 반기당 열리고 , 부정기적으로
이사회와 인접기수간의 자생적 친목회가 열리고 있다.
2003년 춘계 야유회는 10기 김윤식(고22회 , 해양대학교 교수 )회원 초청으로 부산지부가 주관하여 1기에서 40기까지 경향각지서 100여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치뤄졌다.
현재 집행부는 회장에 14기 이상복(고26회,대동정형외과 원장 ), 수석 부회장에 14기 이헌수 (고26회,차기회장,엘르산부인과 원장 ), 부회장에 15기 이춘식 (고27회,사업) ,
총무에 19기 이종철 (고31회,thinkingbig world diamond )회원이 소임을 맡고 있다.
주된 활동으로는 이사회 등 회의 소집, 기금 조성 및 집행, 회지 발행 , 경조사 연락, 회비 징수 등 일반 회무 집행과 졸업후 사회를 주도하는 경쟁사회의 엘리트가 되어 모교발전에 이바지하는 대륜의 샛별이 될수 있도록 학생부 지도교육을 최우선의 사업지표로 삼고 있 다. 최근 들어 집행부는 모교발전을 위한 장학기금 외에 회원 가족복지를 위한 기금조성 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학생부의 활동은 동,하계수련대회를 통해 신입회원에게 K.N.T 이념을 교육하고
체력단련도 한다. 자체적으로 매월 집회를 열어 선 후배간의 단합 및 진로 상담을 하고,
KNT 홈페이지(www.knight21.org)를 주도적으로 운영하고, 기자단을 구성하여 자랑스런 선배 탐방을 하여 원로 선배들의 사회 경험과 경륜을 배우기도 한다.
이상 K.N.T의 역사와 이념 그리고 활동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했다.
많은 훌륭한 분들이 K.N.T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 지면 관계상 일일이 소개치 못한 것을 양해바란다.
자료를 주신 엄재호, 이상복, 문동승 , 황한택, 최영철 ,김종훈 원로회원에게 감사드리고
먼저 세상을 떠나신 회원들의 靈前에 세월이 무심하게 흐르지만 않았음을 고하고자 한다.
七. 마치면서
K.N.T의 슬로건은
“ KNT여 영원하라! ” 입니다.
K.N.T는 영원히 대륜을 사랑하는 대륜인들의 모임입니다
동시에 2003년도 대륜50회 총동창회 체육대회 슬로건도 소리 높여 외쳐봅니다.
“ 대륜이여 영원하라! 대륜은 한가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