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트브잡스의 야망(1)
미국 첨단산업의 주역을 꼽으라면 스티브 잡스를 빼놓을 수 없다.
애플 컴퓨터사를 세워 매킨토시 PC를 처음 개발해 컴퓨터업계의 신화적 존재가 된 스 티브 잡스는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새로운 기술과 사업을 일구어 왔다.
잡스는 85년 애플사를 떠나 넥스트 컴퓨터사를 설립해 이제 또 하나의 신화를 꿈꾸고 있다. 사업의 성패와 더불어 나타나는 그의 이상과 불의 투지는 많은이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본지는 캐나다 맥스웰 맥밀란사가 최근 출판한 "스티브 잡스와 넥스트사의 장래(Steve Jobs and the Ne.t Big Thing) 랜덜스트로스 저)"를 입수, 매주 3회(월, 수, 금요일)독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처음에 거기에는 제록스가 있었다.
컴퓨터의전문가들이 총집결되어 훗날 명성을 날리게 될 기관이 1970년 설립 되었다.
증권분석가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연설에서 제록스사의 피터 매컬러 회장은 자신도 정확히 모르면서 "정보시대"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강연했다 . 그는 정보통신기술 개발을 통해 새로운 "지식폭발"에 대처하겠다는 의욕을 밝히면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부회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내가 말한 개념을 구현할 수 있는 연구소를 세우시오." 이처럼 제록스사의 팔로 알토 연구소는 정보통신기술과 미래사무실을 개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는 약자인 PARC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이름은 인근 스탠퍼드 대학이 조성한 녹음이 우거진 공원내에 위치한 사실에비추어 "공(Park)"과 발음이 같은 것이 흥미롭다.
PARC는 마치 대학 캠퍼 스의 종합과학관처럼 보였다.
본부건물은 매우 인상적인 현대적 감각을 지니고 있고 뒤에는 농구코트도 있었다. 연구원들은 근무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출퇴근했 는데 어떤 이들은 티셔츠를 입기도 하고 또 "의문권위자"(Question Authori ty)라는 배지를 달고 다니는 연구원도 있었다. 출퇴근은 주로 자전거를 이용했다. 그러나 PARC는 마치 여름방학에 들어간 학부생이 없는 대학캠퍼스처럼 텅빈듯이 조용했다. AT&T가 역벨사로 분할되기 전 한때 직원수가 2만5천명에 달했던 벨연구소와 비교해볼 때 PARC는 너무나도 작은 규모의 연구 소였다. 70년대 PARC의 직원수는 2백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나오는계보처럼 개인용 컴퓨터 분야에서 이룩한 모든 중요한 발전을 추적해 올라가보면 근원은 오직 하나임을 알 수 있다.
PARC가 연구개발사업에 착수했을 당시만 해도 컴퓨터는 개인적으로 사용하는제품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기계는 빠르고 사람은 느리다"라는 관념에 젖어있어서 기계 한대를 가지고 여러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했다. 60년대에는 이같은 정도의 기술발전도 대단한 일이었다. 컴퓨터 한대를 한사람이 사용하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컴퓨터 한대를 나눠 쓴다는 것은 비능률적이었다.
컴퓨터를 동시에 연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컴퓨터가 어느 한 사람의 명령에 반응하는 속도는 그만큼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가령 컴퓨터는 A라는 사람에게 천분의 몇초 동안 서브하다가, B라는 사람에게 옮겨가고, 이어 C에게 옮겨가는 식으로 해서 기다리고 있는 사용자들을 모두 한번씩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A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 중앙처리장치가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사람을 상대하게 되면, 사람들은 컴퓨터가 마치 기어다니는 것처럼 느려졌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도 사용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요인이 되었다.
컴퓨터가 받아들이게끔 명령을 하려면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언어에 통달해야만 했으며 그 명령은 자판을 두드려야만 전달될 수 있었다.
사용자가 화면상으로 볼 수 있게끔 해주는 소프트웨어의 개발은 타자기에 있는 글자와 숫자만 표시해주면 된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화면은 눈에 보이지 않는 네모로 나누어졌고 각 네모안에는 글자나 숫자가 한개씩 자리를 차지하게끔 했다. 이런 시스템은 타자를 쳐서 컴퓨터에 명령을 내릴 경우에는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으나 그림이나 그래프를 표시할 경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텍스트를 띄울 때에도 문제가 있었다. 글자 크기나 글자체를 달리하는 것이불가능했던 것이다. 네모칸은 글자의 크기를 제한했고 특정글자나 숫자를 나타내라는 명령을 받을 때마다 반복해야 했다.
예를 들어 "G"자를 치면 소프트웨어는 오로지 같은 크기의 한가지 글자체만 을 화면에 띄웠던 것이다.
PARC의 연구진들은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했다. 그들은 "개개인 컴퓨터"를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줄 방도를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대의 중앙컴퓨터를 공유케 하는 대신 개인을 위한 기계를 고안하고 또 개발해냈던 것이다. 한대 의 컴퓨터를 공유하는데서 오는 번거로움과 지체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컴퓨터개발에 참여했던 한 연구원은 "밤이 되면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반면 PARC컴퓨터과학연구실은 융통성없는 글자와 숫자로 표시하는 고정된 칸에서 해방되어 화면을 무한하게 다양한 마크로 뒤덮을 수 있게 해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냈다.
작성일자 : 1994.10.31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
이른바 "비트 맵 디스플레이"라는 것을 개발해 냄으로써 화면에 있는 개개의점 즉 모든 픽셀이문자이건 아니건간에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컴퓨터에 더 많은 부담을 주었다.
PARC 초창기의 연구요원이었던 버틀러 램슨이 말했듯이 컴퓨터가 "사람이 원하는 대로 작동" 하도록, 즉 몇분의 1초도 안될 만큼 극히 짧은 시간에 화면 상에 멋지게 포맷처리된 텍스트와 그림을 그려주게 됨으로써 종전에 가졌던관념이 완전히 뒤집어지게 되었다. 이제 "사람은 빠르며, 정작 느린 것은 컴퓨터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컴퓨터 한대가 한사람 이상의 인원과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개인은 혼자서만 사용하는 컴퓨터를 한대씩 가져야만 하게 되었다. PARC 설립 3년뒤인 73년, PARC의 연구진은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알토(Alto)를 개발했다.
대형 컴퓨터에 길들여진 컴퓨터 사용자들이 각자가 자신만의 전용컴퓨터를 갖는다는 사실에 적응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PARC의 상위급 연구 요원중 하나인 짐 호닝은 잠시나마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었는지를 호소했다. 그것은 너무도 불합리한 낭비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알토" 는 단순히 따로 떨어져 있는 개인용 컴퓨터만은 아니었다. RARC의 알토는 서로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는데, 이는 PARC의 전자우편 개발을 가져온 또하나의 혁신이었다. PARC에서는 최초의 전국적인 전자복권 , 최초의 전자광고우편 및 최초의 전자부고 등 최초로 개발된 것이 많이 있다. 최초 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최초의 레이저 프린터, 다른 프로그램에도 쉽게 재사용될 수 있는 자가 모듈을 사용한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소프트웨어 개발, 자판을 두드리는 대신 한손으로 잡고 책 상위에서 굴려 컴퓨터에 명령을 내리는 "마우스"라 부르는 장치를 개발한 일등이 그다. 이것은 나중에 다른 것들과 함께 한데 묶여서 "윔프(Wimp)" 인터페이스라 불리게 되었다. 즉 이는 윈도즈(Windows), 아이콘(Icons), 마우스 Mo-use 풀다운 메뉴(Pull-down men-us)등의 머리문자를 딴 약어인 것이다. PARC가 이룩한 업적을 열거하자면 많다. 과거 PARC에서 일했던 연구요 원들은 PARC를 떠난 훨씬 뒤인 90년대까지도 더이상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필요는 없고 다만 당시의 기술들을 기억해내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PARC의 연구개발요원들은 훌륭했고, 또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약점을 명확하게 보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그들은물론 컴퓨터 산업에 종사하던 다른 모든 사람들은 PARC의 역사에 먹구름을 안겨주는 이른바 "창조신화"를 이루어냈다. 그 신화는 다음과 같은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옛날 옛적 인류가 타락하기 전인 에덴 동산 시절, 천사들이 이 세상에 개인용 컴퓨터라는 것을 선물했는데 제록스라는 어리석은 부모가 거절해버리고말았다. 관료주의적이고 우둔한 제록스는 PARC의 발명가들이 열심히 개발해낸 것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간파하지 못했다.
회사측은 알토를 시장에 내놓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뒤늦게 81년이 되어서야 알토의 후속제품인 스타 Star 를 발표했지만 그것은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른 실패작이었다. 멍청한 거인 제록스사는 미래를 손바닥위에 올려놓고는 그만 그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둔 꼴이 되었다. 신화는 그렇게 계속되었다.
PARC의 연구요원들은 천사처럼 하얀 옷을 입었고, 제록스 왕국은 악마같은 빨간 옷을 입었다. 이는 대기업이 안고 있는 경직성을 증오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고무적인 신화가 될지 모르나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PARC도제록스사가 개인용 컴퓨터시장에서 무참히 실패한 점에 대해서는 책임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컴퓨터업계가 이 사실을 아무리 무시하려 한다 해도 PARC는 한 조직의 오만성이 실패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사례다. 그러한 오만성은 직원선발과정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PARC의 컴퓨 터과학연구실에 취직하려 하는 사람들은 긴장된 가운데 일련의 발표와 인터뷰를 계속해야만 했는데 이는 연구실 부실장인 로버트 테일러의 말에 의하면 의도적으로 " 지원자들의 신경체계의 우수성"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는것이다. 호된 시련을 견디어내고 최고로 뽑힌 사람들은 "양손에 떨어진 벼락 을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익숙"해진 극소수 몇명뿐이었다. 테일러는 우수하더라도 훌륭하지는 않은 후보들은 과감히 실격시켰다.
모든 조직체는 응시자중에서 가장 우수한 후보를 채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PARC가 우수한 후보대신에 훌륭한 후보를 선호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PARC가 연구소와 바깥세계를 이질화시키는 선을 긋는 방향으로 연구원들을 선정했다는데 있다. 즉 하나는 명석한 두뇌로 구성된 PARC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덜 우수한 나머지 사람들로 혼합된 외부세계가 그것이었다. PARC는 디지털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이진법의 단순성을 자신들의 이분 법적 견해에 그대로 반영하여 연구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PARC의 요원들은 그 관리층과 보조를 맞춰 능력을 인정받든가, 아니면 "멍청한" 사람이 되어멍청하다는 소리를 직접 면전에서 듣게 되든가 둘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작성일자 : 1994.11.02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 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3)
특수한 재능을 가진 정신박약자처럼 뛰어나게 똑똑한 컴퓨터 과학자는 어느 한가지 분야에서는 탁월할 수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약할수도 있다. PARC의 연구진은 새로운 컴퓨터시스템을 개발하는 재능은 가지고있었지만 연구실에서 개발한 발명품을 상점에 내놓을 제품으로 바꿔놓는 데는 적격이 아니었다. 그들은 잠재적 소비자들을 위해 컴퓨터를 개발한 것이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PARC의 "우리가 만든 것을 사용합시다"라는 표어는 연구소가 개발해낸 기술 을 즉각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시험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일반사용자들보다는 컴퓨터 전문가들의 손에서만이루어지고 있었다.
PARC의 알토를 사용한 유일한 외부 사용자들은 제록스사의 다른 부서였다.
이들 부서는 각 부서 업무특성에 따라 다른 형태의 컴퓨터를 주문했는데 가격은 1만2천~2만달러선이었다. 만일 알토를 일반에 판매해서 이익을 남기려면 대당 4만달러을 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높은 수준이었다. 포춘지 선정 5백대 기업으로 뽑힐 정도로 재정이 든든해서 자사제품을 "사들이는" 그런 회사보다 일반 소비자는 가격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가격수준을 뛰어넘으려면 제록스사의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직원들과의 공동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PARC의 연구요원들은 자신들의 혁신적인 발명을 상품 화하려고 제록스 본사와 협의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PARC연구요원들의 오만함이 "창조신화"에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제록스의 다른 직원들은 PARC에서 일할 만큼 두뇌가 명석하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겸손 해야 할 때와 기술적으로 무지하다고 하여 PARC연구원들이 뒤에서 자기들을비웃는다는 것을 알아챌 정도의 머리는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PARC가 제품 화 가능성이 있는 것을 상품화하기 위해 제록스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때 차가운 반응을 얻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창조신화에서 우리가 그토록 많이 들었던 사악한 모회사 제록스가 좀더 진보 적이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상상해보자. 가령 제록스가 PARC에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더이상 너희를 뒷받침해주지 않겠다. 여기 지금까지 네게 쏟아부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있다.
이 돈을 갖고 떨어져 나가라.
이제는 혼자 서서 너희가 개발한 제품을 직접 판매해 보아라. 서든 쓰러지든 혼자 힘으로 해보는거야. 이 새회사에 대해 우리지분은 계속 유지시키겠다" 그랬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까. 멍청한 부모에게서 해방된 PARC가 과연PC회사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을까.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PARC의 알토는 일반 대중 용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PARC의 환경은 소비자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연구문화였다. 연구원들은 마치 대학에서처럼 자신의 "관심"을 끄는 프로젝트를 자유롭게 선택했다. PARC에서는 이런 것을 "톰소여의 모험"이라 불렀는데, 누군가가 어떤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 다른 연구원들이 그에 관심을 갖게 되고 흥미를 느낀 사람들은 함께 울타리를 하얗게 칠하는 것을 돕곤 하는 식이었다.
PARC에서 각자가 주관하여 얻어진 전문기술지식은 이상적인 연구환경속에서 더욱 축적되고 발전되어 마케팅, 재정, 마케팅, 생산, 그리고 또 마케팅과 같은 다른 분야의 전문지식과 연결되어야만 했다. 연구요원들은 경비의 제약 을 전혀 받지 않고 엄청나게 비싼 하드웨어를 남보다 5~10년 앞서 사용할 수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겪어야하는 가격의 제약은 감안했어야 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예산상의 제약이 없었던 PARC에서 연구 원들에게는 상상력의 부족이라는 한계가 있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PC의 기억 용량을 최대한 활용할 소프트웨어를 설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전설적 인 알토의 주기억용량은 오늘날 PC의 표준용량인 수백만 바이트 또는 메가바이트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에 불과한 12만8천 바이트밖에 되지 못했으며 설 계상의 한계로 추가기억용량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제한되었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PARC를 떠난 몇몇 연구원들은 직접 컴퓨터 유관 사업을 시작하여 상당규모의 기업을 세우면서 성공했지만 대중적인 제품보다 는 전문적인 제품을 취급했다. 가장 성공한 업체로는 3컴과 아도브 시스템사가 있는데 가족중에 컴퓨터 네트워크나 레이저 프린터 폰트 소프트웨어 등을 잘 아는 컴퓨터 전문가가 있지 않는 이상 이들 회사제품은 일반가정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PARC연구원 출신들은 비전문가들에게 자신들을 이해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특수한 재능을 가진 정신박약자처럼 뛰어나게 똑똑한 컴퓨터 과학자는 어느 한가지 분야에서는 탁월할 수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약할수도 있다. PARC의 연구진은 새로운 컴퓨터시스템을 개발하는 재능은 가지고있었지만 연구실에서 개발한 발명품을 상점에 내놓을 제품으로 바꿔놓는 데는 적격이 아니었다. 그들은 잠재적 소비자들을 위해 컴퓨터를 개발한 것이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PARC의 "우리가 만든 것을 사용합시다"라는 표어는 연구소가 개발해낸 기술 을 즉각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시험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일반사용자들보다는 컴퓨터 전문가들의 손에서만이루어지고 있었다.
PARC의 알토를 사용한 유일한 외부 사용자들은 제록스사의 다른 부서였다. 이들 부서는 각 부서 업무특성에 따라 다른 형태의 컴퓨터를 주문했는데 가격은 1만2천~2만달러선이었다. 만일 알토를 일반에 판매해서 이익을 남기려면 대당 4만달러을 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높은 수준이었다. 포춘지 선정 5백대 기업으로 뽑힐 정도로 재정이 든든해서 자사제품을 "사들이는" 그런 회사보다 일반 소비자는 가격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가격수준을 뛰어넘으려면 제록스사의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직원들과의 공동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PARC의 연구요원들은 자신들의 혁신적인 발명을 상품 화하려고 제록스 본사와 협의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4)
가장성공한 업체로는 3컴과 아도브 시스템사가 있는데 가종중에 컴퓨터 네트 워크나 레이저 프린터 폰트 소프트웨어 등을 잘 아는 컴퓨터 전문가가 있지않은 이상 이들 회사제품은 일반가정에서 쉽게 사용할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PARC연구원출신들은 비전문가들에게 자신들을 이해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창조신화와 다른 여러 요인 덕택으로 각광를 받게된 PARC는 컴퓨터 게임에서 는 IQ 평균치가 최고로 높은 회사가 이긴다는 법칙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과연 지능만이 최고의 선인가. 그것이 마력이나 효율성이 같은 어떤 종류 의 일과 대체하고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보통 긍정적으로 가정한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최초의 발명가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그 뒤를 따라가면서 때로는 상당한 정도까지 발명품을 개선시킨 사람들은 무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념때문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가를 치렀다. 일본인들이 미국에서 개발한 전자기술을 가져다가 변형하는 것을 단순 한 "복제"정도로 생각해 결국 미국의 가전산업이 무참히 참패했던 것이다.
PARC 발명의 신격화는 이런 관념의 연장인 것이다. 찰스 시머니는 PARC의 다른 연구원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명석한 젊은 과학자 였다. 그는 1948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66년 서방세계로 망명, 미국으로 건너 와 버클리에서 학사, 스탠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머니는 74년 PARC에 들어가 인쇄체 문자가 화면에 나타나게 하는 최초의 알토용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것은 현재 고차원의 하드프로 그램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WYSIWYG(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의 머리글자)이지만 시머니가 브라보(Bravo)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당시 이것은 일대 혁신적인 것이었다.
81년 시머니는 팔로알토를 떠나면서 스스로 "PARC바이러스"라 부른 이 기술 을 빌 게이츠가 세운 마이크로소프트사로 가지고 갔다. 그는 원래 프로그램 의 기본적인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래도 그에게는 세계 최고의 프로그래머라는 의식이 남아 있었다.
80년대 중반 어느 인터뷰에서 시머니는 "다른 저명한 프로그래머들과 의사가 잘 통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그들과 서로 얘기할 것이 별로 없었다. 마치 개그맨들의 회합에서 죽 둘러앉아 웃기는 얘기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웃기는 얘기 번호만 말하면 사람들이 다 알아듣고 웃는 격이다 라고 말했다. 이같은 그의 말에는 시머니의 과거 기억속에 남아있는 PARC의 뿌리, 즉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대가로서 가지고 있는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그의 말에는 알토 컴퓨터가 널리 보급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는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이제는 즐거움보다 사업목적을 위해 프로그램을 개발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이 기뻤으며 벌어들인 돈으로 이집트여행도 가고 헬리콥터도 대여해 탈 수 있게 되는것 역시 기뻤다. 시머니는 헬리콥터를 타는 것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헬기를 타는 것은 매우 피곤할 일이 되기도 하며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프로그램 개발과 관련해 그처럼 강한 물욕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은비PARC적인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빌 게이츠가 갖고 있는 사업적 재능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는 시머니같은 PARC출신 연구원들의 고용가치를 알고 있었으며 기술중심 의 연구소에서 나온 전문지식을 시장장악을 목표로 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활용하였던 것이다.
시머니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마이크로소프트는 매우 작은 회사였다. 시머니의 입사로 분위기가 PARC같아졌다기보다는 마이크로소프트 고유의 문화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커다란 유기체에 PARC의 유전자가 흡수된 셈이었다. 시머니의 워드프로그램 "브라보"는 수정돼서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라는 SW로 새롭게 등장했다. 이 프로그램은 추후 PC워드프로그램시장을 장악한 주요 프로 그램이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서너차례의 중요한 수정을 거쳐야만 했으며 여기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노련한 마케팅전략이 결합했다.
결국 근원을 따져보면 초기 PARC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는 적절히 잘 붙여진 이름이다. 그것은 PARC가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기 때문이다. 제록스사의 고위경영진의 서명이 빠진 것 이상의 이유 때문에 PARC의기술이 보류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주는 사례다.
작성일자 : 1994.11.07 매킨토시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5)
빌 게이츠는 시머니와 같은 우수한 프로그래머들을 많이 고용했다. 그는 어느 회사보다도 높은 봉급과 주식 배당 등으로 이들을 매수했다.
그러나 그 동기는 PARC를 재창조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게이츠는 이들을 자신의 사업 과제인 응용제품개발에 이용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나온 제품은 파생적이고 독창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그래머들은 공개 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최고의 기술적인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회사는 프로그래머들이 어떠한 제품을 개발하든지간에 거기에서 상업적 가치를 최대한으로 뽑아내는환경이다. 이는 프로그래머들이 개발실적에 대해 동료전문가들로부터 인정받는 대신 상업적 목적을 위해 이용된다는 조건을 스스로 수락한 파우스트의 계약인 것이다.
PARC는 자체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자기기만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PARC의 경영진은 자기들만이 세계 최고의 컴퓨터 과학자들을 모아놓았다고 믿는 오류를 범했다. 79년 PARC의 간부인 래리 테슬러는 상관 인 로버트 테일러와 언쟁을 벌였다. 테일러는 PARC에는 명석한 사람들이 모두 집결되어있으며 PC기술을 선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테슬러는 다른 곳에도 똑똑한 사람들은 있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럼 그 사람들을 채용하게." 테일러는 말했다. 테슬러는 PARC밖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모두 다 데려올 수는 없습니다.
-수백명도 넘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구요." 화가 난 테슬 러는 결국 PARC를 떠나 그가 만났던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로 결심 했다. 그들이 바로 애플컴퓨터사를 설립했던 스티브잡스와 몇 명의 엔지니어 들이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PARC가 이루어낸 성과 덕택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은제록스 내외를 막론하고 스티브 잡스를 따를 이가 없는 것 처럼 보인다. 신화는 이렇게 전개된다.
79년 어느날, PARC 관리자들은 잡스를 비롯한 애플사 사람들의 PARC방문 요청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없이 이를 허락했다. 제록스가 PARC 연구원들이 개발해낸 알토와 다른 기술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바로 그때에 잡스가 나타난 것이다. 잡스는 알토를 한번 보고는 상용화 설계 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이것을 가지고 왜 아무것도 안합니까?" 그는 PARC측에 물었다. "이건 정말굉장합니다. 가히 혁신적입니다." 그는 알토와 같은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확신을 가지고 회사로 돌아와 곧 래리 테슬러를 PARC에서 끌어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매킨토시가 개발됐고, 잡스는 제록스가 해낼뻔 했던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PARC의 창조신화처럼 스티브잡스가 PARC의 지적인 보석을 애플로 훔쳐간 사실은 그리좋은 선례는 아니다. 거기에는 중요한 구체사항이 결여되어 있을뿐 아니라 잡스를 필요이상으로 사악하거나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로 평가하기 쉽기 때문이다.
지적재산의 도둑행위로 낙인 찍힌 79년, 스티브잡스의 PARC방문에 얽힌의혹을 생각해 보자. 몇 가지 사실을 잠깐 들여다보면 그 사건을 다른 시각 에서 볼 수 있다.
당시 PARC의 관리층은 외부인의 연구소방문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70년대초까지만해도 PARC는 외부에 개방적이었다. 연구소 건물은 스탠퍼드대학과 자전거로 왕래할 수 있는 거리에 세워졌기 때문에 PARC의 간부들은 스탠퍼드 인공지능 연구소 및 기타 다른 학과의 동료들과 자유 로이 왕래하곤 했다. 원래 PARC에는 보안통제가 없었으며, 대학 캠퍼스 처럼 공개된 곳이었다. 심지어 71년 자체 회의에서 PARC소속 친구를 따라 온 스탠퍼드 인공지능 연구소 연구원이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제록스의 잭 골드먼 연구팀장은 그 사람이 외부 방문객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의 제안 에 찬사를 보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연구원들은 모르는 척하며 웃음을 참아야했다. 이같은 태평세월은 72년 장발의 PARC프로그래머들에 대한 기사가 롤링스 톤지에 게재되면서 갑자기 중단되었다. 연구원이었던 앨비 레이 스미스는 훗날 그 기사가 제록스사 본부를 크게 진노케했다고 회고했다. "연구소에 있는이 장발의 망나니들이 모두 기사에 나왔다니-어찌나 당혹스러웠던지." 잭 골 드먼은 캘리포니아로 날아가 긴급 회의를 열고 롤링스톤지 기사같은 것이 한번 더 나오면 제록스는 연구소 문을 영원히 닫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후PARC에 대한 기사는 통제되었으며 PARC 연구원들의 기술적인 연구기 사도 상당 수준 격감되었다.
활자로 발표할 기회는 없어졌지만 자신의 실적을 동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PARC의 연구원들은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를 통해 외부세계와 교류를 가졌다. PARC의 핵심이었고 훗날 애플 컴퓨터의 "무임소장관"이 되었던 앨런 케이는 "설명회"를 PARC의 일상생활로 표현했다. 잡스의 유명한 방문이 있기 4년전인 75년, 다양한 크기의 그룹으로 이루어진 약 2백여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가졌다. 나중에는 많은 방문객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라고 판단, 설명회 횟수를 어느정도 줄이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방문객중 일부는 설명회에서 본 것을 상품화해야겠다는 착상 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잡스는 그런 초기 PARC방문자중 하나는 아니었다. 잡스의 방문이 다른 사람들의 방문과 다른점이 무엇인가는 케이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방문객 중 억만장자나 20대의 회사 사장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PARC를 방문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아트를 타고 돌아가서 "그래,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거야"라고 말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작성일자 : 1994.11.09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6)
분명히 애플사는 제록스의 경쟁업체였지만 제록스는 스티브잡스의 방문을 허락했다. 사실 제록스사는 애플이 주식을 공개하기전에 비공개리에 상당량의 애플지분을 매입했던 것이다.
잡스는 제록스사와 자금조달 관련협의를 하면서 PARC를 방문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잡스를 약탈자가 아닌 새로운 동업자로 간주한 제록스사는 방문을 허락했다. 애플사의 이익은 곧 제록스사의 이득이 될 것이다. 애플사 방문단 은 PARC에서 알토에 대한 한시간의 설명을 두번에 걸쳐 들었다. 애플사 일행 의 두번째 방문시에 잡스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 보고 듣는 것은 청사진을 받아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잡스와 함께 PARC를 방문했던 애플사의 빌 애킨슨은 PARC에서 본 것이 그렇게 대단한 비밀사항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PARC에서 하고 있는 일을 이미 언론을 통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익했던 점은 그런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되는 것을 보고, 자신과 동료들이 택한 방향이 올바른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PARC의 조지 페이크소장도 이에 동의했다. 물리학자 페이크는 후에 자신의제록스사 상관들이 잡스의 방문을 허락한 것은 "아둔한 짓"이었다고 비판했다. 페이크는 제록스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잡스가 혁신적인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었다고 말했다. 페이크는 이렇게말했다. "러시아와 원자폭탄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것을 만들 수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자 즉시 개발해냈던 것이다." 페이크나 다른 PARC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속에서 마치 79년 이후 애플사의 성공이 당연히 PARC의 공이었다는 듯한 어조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PARC가 개발한 것들이언제까지나 비밀로 남을수만은 없는 것이며, 제록스는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토를 소개했었고, 당시 PARC는 다중 윈도즈와 팝다운 명령 메뉴 등 특징을 갖고 있는 알토 소프트웨어 "스몰토크"를 다른 회사들에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모회사로부터받은 상태였다.
그들은 또한 애플사의 엔지니어들이 제록스의 연구소를 방문하고 돌아간 뒤에도 많은 연구개발을 추진해야 했고 마케팅 담당자들 역시 판촉전략을 세워야 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후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서 성공 이 결코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으며, 따라서 성공의 몫은 제록스가 아닌 애플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했다. PARC를방문했던 잡스와 다른 애플직원들은 단지 기계와 그 소프트웨어의 겉만을 봤을 뿐이었다.
훗날 애플사가 독창적인 프로그램 코드를 사용해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작동 면에서 제록스 알토의 소프트웨어와 비슷하다면 애플이 "모양과 느낌" 을 복제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양과 느낌"이라는 것은 저작권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하기가 매우 모호한 개념이다. 이것은 마치 자동 차 제조업체가 최초로 운전대를 자동차의 왼편에 설치했고, 브레이크 페달은 왼쪽에 액셀러레이터페달은 오른쪽에 설치했다고 해서 그들만이 독특한 자동차설계의 "모양과 느낌"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애플사가 PARC에서 가져간 것은 지적재산이라고 간주할 만큼 구체 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이로소프트사가 애플의 매킨토시 소프트웨어의 모양 과 느낌을 복제했다하여 입장이 뒤바뀌었을때, 애플사는 아이로니컬하게도제록스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불만을 표시했다.
애플은 88년 마이크로소프트를 고소했는데, 아무리 현대가 소송의 시대라 해도 이는 참으로 위선적인 행위였다. 애플은 IBM의 컴퓨터를 매킨토시 비슷한 모양을 갖게 해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즈"소프트웨어가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당연히 많은 경쟁자들과 경쟁을 벌여왔지만 애플로부터 태고의 불의 비밀을 훔쳐내는 것은 위반항목중에 들어있지 않았다. 모양과 느낌을 도둑질했다는 애플의 주장은 세가지 이유에서 어리석은 주장이었다.
첫째, 법률적개념 자체가 불투명하고 집행불가능했고 둘째, 이 경우 애플사 가 상호 특허라이선스계약에 따라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부여한 소프트웨어 권리로 인해 문제가 단순치 않았으며 셋째, 애플과 PARC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애플사의 마이크로소프트사 제소는 자신의 역사를 잊어버리려는 엄청난 노력 을 필요로 했다.
작성일자 : 1994.11.11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7)
그러나 소송의 행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이듬해 제록스사는 애플사가PARC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위해 애플에 대해 1억5천만 달러를 요구하는 저작권 침해 소송을 걸었다. 이렇게 해서 소송건은 갈피를 잡기가 어렵게 되어 버렸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애플에 의해, 애플사는 제 록스에 의해 피소당했으며, 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제록스사는 컴퓨터 마우스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이유로 스탠퍼드연구소 로부터 제소당할 수도 있었으며, 개인용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기술의 원조 를 찾아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소송이 끝없이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애플사에 대한 제록스의 제소는 납득이 안갈 정도로 뒤늦게 이루어졌는데 제 록스의 주장대로라면 애플사가 저작권을 침해한 지 6년이 지난 것이다. 이 소송은 법정에서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보언 워커판사는 6건중 5건의 기소사항을 즉각 처리했고, 나머지 하나도 곧 기각시켜버렸다. 워커의 견해 에 따르면, 애플사는 소프트웨어를 독자적으로 개발했으며, 제록스사의 것과유사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제록스는 당시 아무 쓸모가 없어진 자사의컴퓨터 스타(Star)로부터 뭔가 구제해보려는 시도에서 부당한 저작권 주장을 한 것에 불과했다.
스타가 81년 시장에 나왔으나 판매실적은 아주 형편없었는데 이는 애플사를 제소하기 훨씬 전의 일로서, 당시 애플사는 아직 "모양 과 느낌"이 유사한 컴퓨터를 개발하지 못한 상태였다. 워크는 제록스의 스타 가 애플제품의 성공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때문에 불만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그는 저작권법이 "상업적인 실패를 구제해주려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냉철하게 말했다.
애플사는 판사의 논리덕분에 구제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똑같은 논리를 애플 사에 적용할 수도 있었다. 저작권법은 마이크로소프트사 윈도즈의 성공에 따른 애플의 실망을 위로해주는 적절한 치유법이 아니었다. 애플 대 제록스 사건을 다룬 바로 그 판사가 애플 대 마이크로소프트 사건도 다루게 되었는데 그는 애플사를 제록스사로부터 보호했던 그 논리를 가지고 이번에는 마이 크로소프트사를 애플사로부터 보호했다. 비록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은 꼭쟁취하고야 마는 8백파운드의 고릴라와 같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지지하는것이 잘된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92년 4년간에 걸친 법정투쟁이 마이크로소 프트의 입장을 지지하는 판결로 종결지어졌을 때, 사람들은 이성의 힘이 마침내 승리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만 했다.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제소하기 훨씬 전에 애플사를 떠났기 때문에 애 플의 위선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플사 근무시절,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즈를 처음 보고 화를 냈다.
이에대해 빌 게이츠는 "이봐, 스티브. 자네가 나보다 먼저 제록스에 침입해 TV를 가져갔다고해서, 내가 나중에 들어가 스테레오를 가져오지 말라는 법은없잖나? 넥스트사를 설립하여 애플에서는 갖지 못했던 회사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되자 잡스는 회사를 완전히 밀실화시켜 경쟁가능성이 있는 회사는 물론 앞으로채용할 직원들까지도 내부를 들여다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이 철저한 보안조치에 경비를 많이 들이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기준에 비춰봐도 잡스는 넥스트를 훗날 만들어냈던 컴퓨터같이 폐쇄된 블랙박스처럼 만들었다.
이런 행동으로 잡스는 PARC경영진의 불유쾌한 회상에서 수시로 나타나는 잘못된 생각이 모두 맞는 것과 같은 느낌을 안겨주었다. 즉 발명품은 겉모습만살짝 보기만 해도 쉽게 모방될 수 있고, 기술력은 마케팅 기술에 달린 것이며 비교우위는 너무 취약해서 나쁜 상대에게 살짝 보여주기만 해도 회사를 망하게 한다는 생각 등이다. 그것은 마치 잡스가 자신이 PARC에서 그랬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넥스트사의 귀중한 기술을 훔쳐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이를 소재로하여 잡스를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범죄를 자신이 저질렀다고 확신하는 천진난만한 사람으로 묘사한 심리추리소설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작성일자 : 1994.11.14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8)
컴퓨터 발표회에 참석하는 것이 중대한 절도죄에 해당된다면 PARC를 방문한 애플사 사람들이 훔쳐온 것은 너무나도 거친 다이아몬드였다.
제록스사가 PARC에서 개발한 기술에 기초하여 최초로 시장에 내놓은 컴퓨터 "스타(Star)"
의 비운을 보자.
애플사가 79년 PARC에서 한번 본 것과 닮은 애플사 최초의 컴퓨터 "리사(Li sa)" 역시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리사 개발계획은 잡스가 79년 11월 PARC를방문하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83년 1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장에 선보인 것이다. 제품의 설계에서부터 완성까지의 리드타임이 이렇게 오래 걸린 사실은 애플사의 절도혐의를 풀어주는데 일조를 했음에 틀림없다. 당시 애플 은 "리사"의 개발에 5천만달러를 투자했는데 그중 2천만달러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썼다고 주장했다.
잡스는 리사를 시장에 내놓는데 그렇게 오랜 시일이 걸린 것에 대해 이렇게말했다. "우리는 리사를 1년전에 내놓을 수도 있었지만 완벽한 것을 만들고자 했다." 사실 수년간에 걸친 개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벽한 제품은 아니었다. 리사를 작동시키기 위해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IBM의 개인용 컴퓨터 나 애플사의 애플Ⅱ, 애플Ⅲ의 소프트웨어보다 훨씬 더 사용하기 쉬웠다.
리사에는 여섯가지의 프로그램이 달려있는데, 이들 프로그램은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나 안내서에 의존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 되었다. 그러나 상호호환성이 있게끔 고안된 이들 소프트웨어는 엄청난 양의프로그램 코드를 필요로 함에 따라 실행속도를 더디게 했고, 광고만큼 잘 작동되지 않았다.
더구나 기본 시스템 소프트웨어가 독자적이어서 다른 개인용 컴퓨터와 호환 성이 없기 때문에 리사를 갖고 있는 컴퓨터 사용자는 다른 컴퓨터에서 사용가능한 수천 가지의 소프트웨어를 하나도 사용할 수 없었다. 리사가 그렇게비싸지만 않았더라면 소비자들은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시장에 나올때까지만 잠시 겪으면 되는 불편으로 생각하고 이를 감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 사의 가격은 9천9백95달러로 당시의 개인용 컴퓨터의 일반적인 가격을 훨씬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애플사는 고가 제품의 판매에서 성공한 경험이 없었다. 당시 대단한 성공작인 애플Ⅱ는 1천5백달러였다.
잡스는 가격과 소프트웨어의 비호환성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그는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에 가장 큰 신경을 썼다. 리사를 출시하면서 그는 "컴퓨터 산업은 5년 동안 실질적인 기술혁신을 이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리사는획기적인 혁신제품이었으나 잡스가 그 개발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못한것이아쉬웠다. 그는 리사 개발책임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는 애플사의 부사장에 불과했고 결정은 그가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애플사는 설립 초기에도 공동 설립자 잡스와 워즈니악이 아닌 마이크 마쿨라회장과 그가 임명한 사람들이운영했다. 잡스에게는 비록 리사가 자신의 개인적인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그의 취향에 맞는 기술적으로 훨씬 뛰어난 컴퓨터였던 것이다.
제록스의 PARC가 선구자적인 알토의 상업적 잠재력에 대해 지나치게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잡스와 애플사의 다른 고위간부들도 리사에 대한 기대 가 너무 컸다.
애플사는 강력하고 사용하기 편리한 개인용 컴퓨터를 필요로 하는 3천만명의 사무직 전문가와 관리자들과 같은 "지식근로자"들을 리사의 소비자 그룹으로 보았다. 그것은 소비자들에게 흑백 개인용 컴퓨터(리사는 컬러 디스플레이가없었음 한 대에 최고 얼마 정도를 지불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가진 몽상에 불과했다. 분명히 잡스는 리사가 사무 실내의 다른 컴퓨터 및 네트워크와 공존해야 하며, 리사의 비호환성이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잡스는 "우리는 리사를 가지고 IBM을 날려버릴 것이다. 이 컴퓨터가 나오면 그들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향후 10년간은 리사를가지고 사업을 할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리사는 겨우 두 살만에 죽고 말았다. 그의 종말은 84년 그보다 가격 이 훨씬 저렴한 매킨토시가 등장하자 더욱 앞당겨졌다. 매킨토시는 79년부터 별도로 개발되어 리사보다 늦게 시장에 나왔다. 사라지기 전 리사는 매킨토 시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되었고, 가격도 좀더 적정한 수준인 4천달러까지 떨어졌다. 이에대해 시장반응이 긍정적으로 나타나 판매도 3배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판매는 월 1천대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재정적 파탄에서 애플사를 구한 것은 소박하고 조그마한 애플Ⅱ였다.
애플Ⅱ는 개인용 컴퓨터의 선사시대에 속하는 것이긴 하지만, 애플은 훨씬 오랜 기간동안 계속해서 분기당 수억달러상당의 애플Ⅱ를 판매했다. 32비트 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용한 리사가 사라진 반면, 8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를 탑재한 애플Ⅱ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매우 아이로니컬하다. 리사의 실패에 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소비자들과 계속 접촉하고, 고립되어 단절되지 않도록 하라. 소비자들이 신형 컴퓨터를 얻기 위해 어떤 값이라도 치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마라. 구형과 신형을 이어줄 수 있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다리를 제공하여 소비자들 이 손쉽게 새로운 컴퓨터에 적응할 수 있게 하라. 시장에서 최상위종컴퓨터 가 확고한 자리를 잡을 동안 기능과 성능이 약한 제품을 먼저 내놓을 것등이다. 이런 교훈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사를 시작하면서 이 모든 교훈을 전적으로 무시했다.
작성일자 : 1994.11.16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명해질 뻔한 대표적인물 두사람이 있다. 한 명은 영국인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인이다. 이 둘은 서로 만난 일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지만 한쌍으로 간주할 수 있다. 피터 베스트는 링고 스타가 들어오기전 비틀즈의 드러머였으나, 비틀즈가 유명해지기 바로 전에 그룹을 떠나야만했던 사람이다. 제프 라스킨은 스티브 잡스에 앞선 매킨토시 컴퓨터의 아버지였으나 매킨토시가 인기를 얻기 전에 역시 떠나야 했던 사람이다. 베스트 와 라스킨의 업적은 하찮은 화젯거리로 어쩌다 떠오를 뿐 운명의 장난으로 "어떻게 될 수도 있었는데"라는 아쉬움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라스킨의 경우 잡스가 매킨토시의 창시자로서 칭송을 받게되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그의 가슴에 사무치는 일이었다. 응당 자기에게 돌아와야할 공을 주장하기 위해 라스킨은 언론과의 인터뷰나 편집인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그것은 마치 공원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행인들에게 소리를 질러대는별난사람의 경우처럼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라스킨이 아무리 열심히 세인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더라도 일반 대중의 머리엔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적절한 가격의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낸 최초의 인물로는 언제나 스티브 잡스가 떠오르게 되어있는 것이다.
매킨토시의 태동기를 명확히 밝혀주는 것은 라스킨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는차원에서 뿐 아니라 잡스와 그후 넥스트사 제품으로 어떤 것들이 나왔는지를잘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매킨토시는 PARC의 야심적인 비전과 제록스사의 "스타"와 애플사 "리사"
의 실패를 넥스트 컴퓨터사의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와 연결해주는 고리다. 스티브 잡스와 넥스트사의 직원들 은 자신들의 역사에 너무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역사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같은 성공의 결과를 거둘지라도 그에 이르는 비결을 일반화시켰던 것이다.
매킨토시의 모태는 79년에 있었던 잡스의 제록스사 연구소 PARC의 방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방문은 앞서 살펴봤듯이 그저 언뜻 본 것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게다가 잡스가 PARC를 방문한 이후 줄곧 온 몸에받았던 후광은 그의 것만은 아니었다.
PARC개발품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내고 잡스에게 방문하도록 권한 사람은 바로 제프 라스킨이었다. 라스킨은 잡스보다 12살 연상이었으며, 31번 째로 애플사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철학에서 음악, 시각예술,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조예가 깊어서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교직을 갖기도 하였고, 또 같은 이유로 교직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그는 기구를 타고 총장관저위를 날라서 대학을 빠져나왔는데, 이것을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라스킨은 애플사에 들어가기 전 PARC근처에 있는스탠퍼드 인공지능연구소에서 일하면서 PARC의 연구활동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 훗날 애플사에서 그가 잡스에게 PARC를 방문하여 그곳의 연구원들이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 직접 보라고 설득하는데에는 무려 1년이 넘게 걸렸다.
라스킨은 잡스가 PARC를 방문하기 전부터 매킨토시개발을 추진했다. 그는 마이크 마쿨라애플사 회장에게 비싸지 않은 패키지에 그림과 정규 텍스트 를 혼합시키는 새로운 모델의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마쿨라 회장은 그런 기계가 5백달러에 팔릴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라스킨은 일주일간의 심사숙고끝에 그 컴퓨터의 가격은 1천달러가 되어야 할것이라고 대답했다. 화상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컴퓨터는 그래픽 전문 워크스테이션으로, 당시 가격은 수만 달러에 달했다.
마쿨라의 격려에 힘입어 라스킨은 개발작업에 착수, "매킨토시 도큐먼트"라 는 노트에 설계계획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잡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계획이었는데, 당시 잡스는 훨씬 더 고도화되고 값비싼 컴퓨터 "리사" 에열중하고 있었으며, 매킨토시 계획을 방해하려하기도 했다. 그의 방해행위는 마쿨라와 마이크 스콧 애플사 사장에 의해서 저지당하긴 했지만, 라스킨은 잡스의 방해를 피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라스킨이 매킨토시 개발 프로젝트에 함께 일하기 위해 처음 선발한 사람중에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샌디에이고 극단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 가이 버드 트리블이 있었다. 트리블은 라스킨처럼 전혀 분야가 다른 서너가지의 직업 경력을 가지고 있던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애플사에 들어온 것은뜻밖의 수확이었다.
80년 당시 그는 시애틀 소재 워싱턴대학에서 신경생리학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트리블은 라스킨이 애플사에서 첨단기술의 저가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팀을 구성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애플사를 방문하여 약 4백페이지에 달하는 매킨토시 연구자료를 보고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의학연구에서 잠시 떠나 매킨토시 그룹에 합류하기 로 결정하게 되었다. 애플사에서, 또 그 이후 넥스트사의 공동 설립자중 한 사람으로서 신경생리학자 트리블은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탁월한 능력을 나타냈다.
작성일자 : 1994.11.18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10)
트리블은 제프 라스킨과 함께 일하기 위해 매킨토시개발팀에 합류했지만, 라 스킨이 스티브 잡스와 사이가 나빠지게 되자 그의 의욕이 시험대 위에 놓이게 되었다.
애플사 사장이 "리사" 프로젝트 팀장으로 임명해 달라는 잡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잡스는 매킨토시팀으로 옮기려고 결심했다. 잡스가 "리사"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는 것이 어렵게 되자 그는 다른 프로젝트를 물색했고, 결국 라스킨의 매킨토시팀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얼마안가서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라스킨과 잡스는 가격에 영향을 주게될 디자인 결정을 놓고 가장 심한 의견차이를 보였다. 가격을 가능한 한 비싸지않게 하여 1천달러정도에 판매하기 위해서 라스킨은 잡스와 반대로 새 칩보다는 기존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용하려고 했다. 여기에서 잡스의 견해가 우세했다. 그러나 새로운 칩을 택하게 되면 그에 따라 하드웨어사양도 달라져야 했다. 컴퓨터의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느리긴 하지만 단가가 낮은 일종의 변형 테이프리코더를 사용하는 대신, 단가는 높지만 훨씬 빠른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채용해야 했다.
컴퓨터 기억용량도 원래 계획했던 6만4천바이트보다 확장시켜야 했다. 화면의 확대, 자판의 분리 등과 같은 변경사항 역시 가격을 훨씬 더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라스킨은 제품단가가 치솟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허사로 끝나자 결국 잡스를 통렬히 비난하는 문서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남의 말을 듣지 않았고, 분별없이 행동했으며, 칭찬에 인색했다.
그는 사람을편애했고 약속을 어겼다"등등. 라스킨은 회사의 공동설립자인 잡스와 대결 했지만, 그를 이기기에는 사내기반이 너무 약했다.
그들사이에 버드 트리블이 있었다. 오랜 친구 라스킨은 트리블을 설득해서 매킨토시가 설계나 가격면에서 리사처럼 되지 않도록 막으려 했고, 또 한편에선 스티브 잡스가 트리블이 작업하고 있던 소프트웨어를 탑재할 수 있게끔고성능 하드웨어를 개발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기술중독자" 트리블은 보다 "환상적인 비트"의 컴퓨터를 선호했다. 훗날 트 리블은 당시를 되돌아보며 "그같은 유감스런 정치적인 일들이 벌어졌었지"라 고 말하곤 했다. 매킨토시에 몰두한 그는 프로젝트가 완성되기를 바랐으며잡스의 판정승으로 라스킨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자,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끝까지 지원하게끔 만들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이든지간에 그를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잡스에게 달라붙었다.
라스킨이 애플사를 떠나고, 3년이 지난후 매킨토시가 출하되었을 때 그 가격 은 라스킨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2천4백95달러였다. 그러나 잡스와 트리블에게는 운이 따라서, 매킨토시에 채용한 반도체가격이 예상밖으로 하락했기 때문에 가격이 상당히 내려갔다.
매킨토시가 시장에 나오자 잡스와 트리블을 비롯한 고성능컴퓨터개발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옹호를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같은 컴퓨터도 용량이 부족하다느니, 느리고 작으며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내지 못한다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트리블은 한때 매킨토시 컴퓨터의 용량을 당초 계획한 6만4천바이트보다 두배로 늘린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도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새로운 매킨토시는 훨씬 더 많은 용량을 필요로 했다. 애플사로서는 잡 스와 트리블의 견해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매킨토시의 사양 결정이 모두 다 현명했던 것은 아니다. 잡스는 마우스를 사용해 컴퓨터 화면상의 화살표를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마우스를 사용해야만 화살표를 움직일 수 있게끔 하려고 했다. 그는 연구원들의 반대에도 불구 하고 다른 컴퓨터에서는 표준화되어 있는 화살표 키를 매킨토시 자판에는 만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용자가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을 지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잡스는 매킨토시를 완전히 "밀폐된"박스로 만들어버렸다.
사용자는 다른 장비를 추가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컴퓨터 내부를 들여다보지도못했다. 사용자가 실수로 뚜껑을 열게 되면 이상이 생기게 되어 있었다.
애플은 다른 컴퓨터업체가 만든 다양한 주변기기에 대해 고민할 필요없이 쉽게 매킨토시의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IBM은 박스안 에 빈 슬롯이 있는 "개방된"컴퓨터를 제공하여 소비자들로 하여금 기억용량 을 확장시키고 다른 회사의 주변기기를 추가하며 컴퓨터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조정할 수 있게 했다. 잡스는 IBM PC와 매킨토시보다 먼저 나온애플 의 개방성이 그 컴퓨터를 성공시켰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만약 제프 라스킨이 매킨토시 프로젝트 책임자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묻는다면 가격은 훨씬 저렴했겠지만 그에 따라 성능이 훨씬 약한 매킨토시가 탄생되었을 것이라고 대답이 나올 것이다. 경제성보다 성능을 택한 잡스의 생각은 옳았다. 그러나 자판, 애드 온 보드를 비롯하여 기타 컬러 디스플레 이 또는 플로피디스크보다 더 많이 저장할 수 있는 하드디스크드라이브 등 소비자의 선택권을 도외시한 것은 옳지 않은 결정이었다.
매킨토시가 발표되자 여러가지 설계상의 문제가 제기됐다. 후에 애플사가 잡스의 결정을 번복하고 선택의 폭을 제한한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하지 않았더라면 매킨토시는 틀림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잡스가 넥스트사로 옮겨간 후였고 그로 인해 문제들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 해결되었다. 또 당초 매킨토시를 창안한 사람은 라스킨이었지만 매킨토시를 성공시킨 공을 가져간 사람은 잡스였다.
작성일자 : 1994.11.21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11)
잡스는 혼자서 천재적인 설계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했고 일반인들의 뇌리 에 이같은 단순한 이미지를 고착시키는데는 언론도 한몫을 했다. 그의 전임자인 라스킨과 공덕을 나누려하지 않았던 잡스는 자신이 예리한 직감력을 가졌다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그의 판단력을흐 리게 하였고 매킨토시를 창안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하여 후에경쟁력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넥스트사에서도 비슷한 설계상의 결정을 내릴 때, 즉 성능을 강조할지 아니면 경제성을 우선해야 할지, 하위 소프트 웨어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시스템을 고립시킬지 아니면 다른 컴퓨터와연결 되도록 할 것인지, 컬러옵션을 제공하기전에 먼저 기술발전이 이루어지도록 기다릴 것인지 또 품질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컬러모니터를 탑재할지 등의 일에 직면할 때도 잡스는 그전과 같은 방식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는 그의 결정이 매킨토시에서 적중했으므로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매킨토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일부 컴퓨터광을 제외하고는 그 판로가 매우 불확실한 상태였다고 하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기업인들은 사업에 필요한소 프트웨어가 없고 IBM PC와 거의 호환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용을 기피 하였고 학교에서는 가격 때문에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위기종인애플 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판국인데 학교용으로 2천4백95달러라는 특별 할인가격이 제시되었지 학교재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애플은 누구를 겨냥해야 할 것인가. 매킨토시를 살 사람들은 재력이 있어야 했고 새롭고도 IBM에 뒤지지 않는 퍼스널컴퓨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다시 말해 매킨토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컴퓨터 초보자로 기존의 프로그램에는 별 관심이 없고 매킨토시에만 적합한 새로운 프로그램에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대학생들이었다.
대학 근처에 있는 애플대리점은 새로 나온 이 제품을 대학생들에게 기꺼이 판매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플사의 매킨토시그룹은 대학이 대리점 역할을 하여 캠퍼스안에서 학생들에게 제품을 판매하도록 하는 매우 색다른 계획을 세웠다. 대학이 당시로서는 독특한 이런 판매방식에 동조하도록 하기 위해 애플사는 소매가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컴퓨터 한대당 1천달러를 제시했다.
이 컨소시엄에 가입한 대학들은 2백만달러상당의 컴퓨터를 구입하여 3년내에 학생들에게 그것을 팔도록 했다.
그러나 대학들은 이런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만일 대학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비상업주의를 표방하는 교육기관의 기본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또 특정회사에 편중되지 않고 모든 컴퓨터업체들과 공평한 관계를유지하고자 하는 대학의 중립적인 자세를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애플사가 2백만달러상당의 컴퓨터를 판매하도록 제안한 자체가 수락하기에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학은 고등교육을 시키는 기관이지 재고를 관리하거나위험 부담이 있는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 아닌 것이다. 대학에 있는 서점은 재고가 남으면 언제라도 출판사에 책을 반품하도록 되어 있어서 위험부담을 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애플사는 할인된 가격에도 구매자에게 부담이 되고 아직 시장에 출시되지도 않아 그 기능이 입증되지 않은 제품을 판매하는위험을부담하라고 나선 것이다. 만일 매킨토시가 실패작이었더라면 대학은큰 빚을지게 되었을 것이고 대학이 신봉하는 형평의 원칙이 크게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작성일자 : 1994.11.23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12)
애플사는 아이비 리그와 유명한 연구소를 가진 대학들을 주요 공략대상으로 삼았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사가 유명 대학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면 다른 대학들은 자연스럽게 동조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비 리그가 관행을 깨고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보급하기 위해 한 업체와 거래한다면 매킨토시가 정말 특별한 제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애플-대학 컨소시엄의 회원이 되지 않은 대학들에게 영향력을발휘하려면 매킨토시 그룹은 엘리트 대학을 설득시켜 계약을 맺도록 유도해야만 했다. 즉 매킨토시가 처음 발표되기 전에 컨소시엄 회원명단을 작성해 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사실 잡스는 대학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의사결정 과정을 잘 몰랐다. 그는 스탐퍼드 대학 총장인 도널드 케네디 와 점심 식사를 하면서 매킨토시를 소개하고 마치 컴퓨터가 아닌 사과를 도매로 넘기려는 식으로 제의했다.
그는 "이것 천개를 백만달러에 구입할 생각 이 있습니까?"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결정은 컴퓨터연구소 소장, 학장, 부학장, 대학 부총장 및 교직원 전체의 의사를 수렴하여 이뤄져야 하는 것이었다. 잡스는대학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무자들을 설득할 능력이나 인내력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옆에는 잡스와 비슷하게 20대 후반이고 프린스턴 대학 출인 인덴 르윈이 있었다. 르윈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소니사의 판매담당과장으로 근무할 당시 애플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잡스와 처음으로 만난 인물이다. 르윈이 잡스를 처음 만난 이유는 소니사가 개발한 3.5인치 플로피디스크드라 이브 신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였다. 잡스는 그 디스크드라이브가 마음에 들었을 뿐 아니라 르윈의 수완에 감동하여 애플사로 오도록 설득하게 된 것이다. 르윈에게 고등교육기관에 매킨토시를 판매하는 과제가 주어졌고 그는 각 캠퍼스를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설득시키는 활동을 폈다.
트리블과마찬가지로 르윈은 특별한 인물로 후에 잡스와 함께 넥스트사를 설립하게 된다.
르윈은 매킨토시가 미래형 컴퓨터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매킨토시는 카네기 멜론 대학의 팻 크레신과 다른 대학에 있는 컴퓨터 전문가들이 요구하는 1백 만 바이트의 메모리 용량, 1백만 도트의 화면조성과 초당 1백만개의 명령을 수행하는 속도를 갖는 이른 바 "3M"컴퓨터가 아니었다. 매킨토시는 모든 면에서 용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윈은 매킨토시가 사용하기 편리하면서 강력한 성능을 갖춘 "3M"형 컴퓨터라고 설명했다. IBM퍼스널 컴퓨터는 작동이 어렵고 다른 PC들은 용량이 부족하다고 역설했다.
르윈은 매킨토시야말로 대학이 필요로 하는 성능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켜 줄것이라고 설명했다. 르윈은 애플-대학 컨소시엄이 고객으로 구성된 단체가아니라 "함께 연구하는 집단"이라며 애플사와 함께 고등교육기관에 상당한영향 을 미칠 수 있는 혁신적인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말했다. 스탐퍼드 대학측은 매킨토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컨소시엄에 가입 하는 것과 2백만달러라는 재정적 부담을 져야하는 조건은 기피했다. 그러나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 소유의 중앙 집중식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도비용이 많이 들었다. 대학측은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미니 컴퓨터에 지대한관심 을 가졌다. 학생들이 대당 1천달러의 매킨토시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중앙컴퓨터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덜 들었다.
게다가 매킨토시를 사용하도록 하면 그 비용은 스텐포드 대학이 아닌 학생이 나 학부모가 지게되는 것이었다. 대학이 컨소시엄에 가입하면 대학은 대형컴퓨터를 도입하지 않아도 되므로 1년안에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 대학은하 룻밤 사이에 컴퓨터 지원금으로 6백~7백만달러라는 추가 예산을 얻는 셈이었다. 이같은 조건은 대학의 구미를 충분히 당길만한 것이어서 대학의 재정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애플사의 혁신적 기술을 수용하도록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아이비 리그 대학이 5개 있는 미국 동부지역을 이끌어 가는 인물은 스테시브레슬러였다. 브레슬러는 젊고 활달했으며 열정적으로 일했다. 애플사는 그녀를 캘리포니아로 초청해 개발단계에 있는 매킨토시를 보여 주었다. 당시개발 된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기계에 커다란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뿐 아니라 그 컴퓨터를 미리 본 사람들은 호감을 갖게 되었고 생명이 없는 물체치고는 친밀감을 느끼게까지 되었다. 그때부터 애플사는 판매업무를 그만두고 판촉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밑바닥부터 애플-대학 컨소시엄 회원을 모집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브라운 대학은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브라운 대학에 있는 컴퓨터 전문가들은 컴퓨터업계의 여러 소식통을 통해 이미 제품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들어온 상태였고 그녀가 방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제품을 소개 하려하자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하고 시험해 보겠다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들은 곧 계약을 맺겠다고 그녀에게 연락했다.
아이비 리그 대학들은 쉽게 설득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들 모두 그 제품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응답했다. 사실 그들은 퍼스널 컴퓨터를 사용할 것인지의 여부조차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고 사용한다고 결정이 되더라도 IBM퍼스 널 컴퓨터를 사용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좌절감을 느낀 브레슬러는 게릴라 전법으로 전술을 바꿔 매킨토시 시제품을 직접 들고 학교 기숙사와 근무처등 을 찾아가 그 성능을 학생과 교무처 직원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다트마 우스에서는 컴퓨터센터 로비에 컴퓨터를 설치하여 한마디의 설명없이 화면그림을 조작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곧 소문이 퍼지게 되어결국 그 컴퓨터센터의 윌리암 암스소장이 직접 나와보게 되었다. 그는 그자 리에서 설득당했다. 그는 네트워크를 통해 중앙컴퓨터와 학생 및 교직원모두 를 연결하는 개인용 매킨토시를 갖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견한것이다. 다트마우스는 1960년대에 학생들이 캠퍼스내 컴퓨터를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었다. 이제 암스는 다트마우스가 컨소시엄 에 가입하도록 하여 캠퍼스내에 퍼스널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애플사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변혁이었다.
작성일자 : 1994.11.25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15)
그러나 디스크 드라이브에 문제가 생겨 제 날짜를 맞추지 못하였다. 드렉셀 대가 가을에 학생들에게 선금을 받았지만 실제로 매킨토시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84년 1월24일이었다. 매킨토시를 처음 발표하는 자리에서 잡스는아이비리그대학과 드렉셀, 스탠퍼드, 시카고 대학 및 연구소등 총 24개 기관 이 애플-대학 컨소시엄에 참여하여 새 제품을 개발하는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만일 드렉셀 대학이 성능실험도 제대로 거치지않고 출하시기도 지연된 컴퓨터에 투자하겠다는 위험한 결정을 내린 것에 조바심을 내고 포기했더라면 여러 유명 대학이 참여한 컨소시엄의 일원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매킨토시를 실은 트럭이 학교에 도착해 기대에 찬 학생들에게 컴퓨터가 전달된순간 모든 의혹이 사라졌다.
애플사나 대학당국은 학생들이 얼마나 빨리 매킨토시와 친숙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3년 안에 2백만 달러 상당의 매킨토시를 판매할 수 있을지 우려하던 스탠퍼드대학당국은 첫 2주 동안에 2백5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흥분 을 감추지 못하였다. 사실 애플사가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팔렸다. 스탠퍼드 대학은 학생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해 추첨을 해야했고 그렇게 하고도 1천달러를 선불로 낸 학생 모두가 컴퓨터를 받기까지6 개월이 걸렸다. 컨소시엄에 가입하지 않은 대학에서는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샌 루이스 오비스포에 있는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니컬 주립 대학에서는 학생 1천명 이상의 탄원을 받아 1백여명의 학생들이 총장실 앞에서 애플사와 재협상해 컨소시엄에 참가하라는 농성을 했다.
대학측은 중요한 계약을 맺을때 입찰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주정부법에 따라 애플사의 제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매킨토시를 구입한 학생들이 구매할 때의 약속을 어기고 대학가 근처에서 비싼 가격을 받고 매킨토시를 암거래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신문 보도가 나오자 매킨토시는 다시 언론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드렉셀 브라이언 허킨스는그런 행위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고 학생들에게 경고 했으나 법적 구속력 은 없었다. 그는 "매킨토시를 판매하는 것은 학문적 자살 행위이다"라고 경고했다. 대학 교육에 매킨토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애플-대학 컨소시엄이 전국의 유명 대학으로만 구성되자 매킨토시는 다른 컴퓨터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85년 초 잡스는 1년 안에 매킨 토시가 표준 컴퓨터로 대학에서 널리 사용될 것이라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내가 올해 만든 모든 매킨토시는 24개 대학에 모두 판매할수 있다"고 큰 소리쳤다. 그는 매킨토시가 데뷔할 당시 중요 대학에 이를 보급시킬 수있도록 도와준 애플-대학 컨소시엄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통있는 명문대학이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가 새 제품을 출하할 때 그 이름 을 빌려준 사례는 지금껏 없었다. 컨소시엄은 매킨토시의 신뢰도를 높이는데기여했고 다른 대학은 뒤늦게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학생과 교직원들은 자연스럽게 매킨토시를 수용하게 된셈이지만 대학 구내서점은 애플컴퓨터를 판매하도록하는 애플사의 요구를 못마땅히 여겼다. 대학 서점은 가격이 정해 있고 많은 수요가 보장되어 있는 교과서, 티셔츠등과 같은 간단 한 상품만을 취급해 왔기 때문에 애플사 직원이 판매 촉진을 위해 광고를 어떻게 할것이며 홍보 비용을 어떻게 책정하여 컴퓨터를 판매해야하는지 설명하는데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것이다. 대학 서점은 비영 리 단체이기 때문에 마케팅 활동은 하지 않는다며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런 태도를 취하는 서점들에게 애플사는 "당신들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고 말하면서 설득했다. 높은 수익률의 컴퓨터를 팔고도 학생들에게 제품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으면 학생들이 불평하지 않겠냐고 설명했다.
또학생이 서점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매킨토시가 판매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학교 밖에 있는 애플 대리점에서 학생 할인 혜택없이 제품을 구입한다면, 학부모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대학측에 항의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하면서 그들을 설득시켰다.
이렇게해서 서점은 판매뿐 아니라 일반 대리점에서 하는 마케팅 활동까지 모두 수행하게 되었다. 서점은 또 학생들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분아래 가을, 크리스마스 그리고 봄철이 되면 홍보 활동을 벌여 이윤을 남기려 하기 보다 컴퓨터를 되도록 많이 판매해 학생들에게 더 많은 할인 혜택 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대학이 학생들에게 많은 할인혜택을 주려면 일반 대리점은 특별할인 혜택에 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리점은 크게 반발했다. 특히 학생들이 매킨토시의 주요 구매자층으로 부각 되자 대리점들은 자기들에게도 학교와 비슷한 할인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만을 가진 미시간에 있는 한 대리점은 덴 르윈과 애플사를 제소하기까지 했다. 뉴 잉글랜드에 있는 스테 이시 브레슬러 관할의 한 대형 대리점은 애플-대학 컨소시엄의 결성에 분노 를 느껴 그 컨소시엄이 자기 영업을 방해한다면 그녀에게 신체적 가해를 입히겠다고 위협했다.
작성일자 : 1994.12.05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16)
결과적으로 브레슬러를 위협한 대리점사장은 후에 그녀에게 사과하였다. 그리고 애플사는 미시간에서 승소했다. 다른 대리점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할인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대학가 시장이 계속 번창하게 된것에대한 만족감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가에서 매킨토시가 대량 판매되자 소프트 웨어 개발업자는 그 제품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많이 개발하게 되었고 결국 매킨토시를 취급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득을 보게 되었다. 대학에서 매킨토시 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졸업하고 나서도 대리점을 찾아가 매킨토시를 구입하였다. 이렇게해서 이윤을 추구하는 일반 대리점과 비영리조직인 대학이 함께 공존해 나갈 수 있었다.
만일 애플사보다 큰 회사들이 대학생들에게 컴퓨터를 판매하는데 성공했더라 면 애플사는 대학 서점이 PC를 취급하도록 설득시킨데 대한 보람을 느끼지못했을 것이다. 대학서점은 컴퓨터를 독점 판매하도록 한 회사에만 판매권을 주면 자신의 비영리적 이미지가 손상될까봐 여러회사 제품들도 취급했다. 매 킨토시 마케팅 그룹이 개척한 판로에 IBM 및 여러회사가 침투하여 매킨토 시와 비슷한 할인혜택을 줄 수 있게 된것이다.
그러나 매킨토시는 IBM이 한대 팔릴때 15대 때로는 40대까지 판매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침투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매킨토시 마케팅 담당자들 조차도 재정적으로 훨씬 튼튼한 다른 회사들의 매출과 비교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차이가 생길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잡스 자신도 놀라워 했다.
그는 IBM이 4백여명을 동원하여 대학캠퍼스에 수천대의 컴퓨터 선물 공세 를 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의기양양해 했다.
학생들은 매킨토시를 선호하였고 대학 당국도 컴퓨터를 공짜로 많이 받아도 그것을 사용하기위해 소프트웨어 개발에 투자되는 비용과 IBM호환PC를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킨 토시가 사용교육 비용을 절감시켜준다면 IBM PC를 공짜로 준다고 해도 매킨 토시를 구입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IBM의 지원금을 받아 애플 매킨토시를 구입한 대학도 있을 지경이었다.
IBM컴퓨터를 대학에 널리 보급하기 위해 IBM은 스탠퍼드대학에 거점을 확보 할 필요성을 느꼈다. 스탠퍼드대학은 1천8백만달러 상당의 IBM PC를 받았지만 매킨토시를 훨씬 더 많이 사용했다. 스탠퍼드 대학 당국은 IBM 컴퓨터를 용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교육훈련시키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현상을 반가워했다. IBM PC를 처음 받고 스탠퍼드는 복잡 난해한 워드스타라는 워드 프로그램 사용법을 교직원들에게 가르치느라 12시간을 소비했다. 매킨토시용 워드프로그램인 맥라이트는 그런 교육과정이 필요치 않았다.
IBM은 스탠퍼드의 관심을 사려고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했고 애플사는 소규모의 마케팅 팀만으로도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보급시킬 수있었다. 캠퍼스내 매출이 5천만달러를 넘어설 당시 고등교육기관을 상대로 매킨토시 마케팅을 담당한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
매킨토시가 대학에서 발판을 다지자 애플사는 대학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혜택 즉 매년 신입생이 들어오면 25%에 달하는 새로운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대학만이 이런 정기적 매상고를 보장할 수 있었다. 애플사는 국민학교 및 중학교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 경우 학생들에게 직접 파는 것이 아니라학교측에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이득을 올릴 수 없었다.
일반 기업도 마찬가지로 각 개인에게 컴퓨터가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회사로 판매되는 것이기 때문에 애플에 돌아오는 이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은 애플 사 내부에서 "연례시장"이라고 부를정도로 매킨토시의 사용이 많았고 매년 신입생의 입학과 동시에 새 고객이 생겨 자연스럽게 정기 수입을 챙길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도 학생들은 애플사에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매킨토시 는 IBM보다 월등히 우수했기 때문에 젊은 사용자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이들은 취직한 다음에도 매킨토시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해 기업에서 주로 사용한 IBM으로 바꾸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직장 상사에게 매킨토시를 소개해 때로는 매킨토시 판매에 기여했는데 애플사는 이런 현상을 "아래로부터의 판매 "라고 표현하였다.
매킨토시는 처음에 대학가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기업에서 고객을 만족시키는데 그치지 않았다. 매킨토시 사용자들은 IBM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했다.
IBM사용자들은매킨토시사용자들과 컴퓨터표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면 으레 짜증으로 자신들을 변호했고 매킨토시 사용자들처럼 컴퓨터를 바꿔 보라고 강력하게 권유하지 못하였다.
작성일자 : 1994.12.07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17)
이같은 매킨토시의 대학가 판매성공은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즉 매킨토시라는 새로운 형태의 PC, 대학서점을 통한 판매체계 그리고 매킨토시만 고집하는 충직한 고객의 확보 등이다.
애플사는 중간단계인 대리점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량의 제품을 값싸게보급할 수 있었고 컴퓨터 대금은 학생과 학부모가 직접 부담하기 문에 대학은 별다른 예산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매킨토시 의 성공사례는 이차적인 관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매킨토시의 마케팅 담당 자들과 대학을 놀라게한 것은 매킨토시가 학생들의 학문활동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애플사의 스테이시 브레슬러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보면 성공에 기여한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매킨토시가 공개되기도 전에대학 캠퍼스에서 진을 치고 애플-대학 컨소시엄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던 브 레슬러는 매킨토시가 캠퍼스에서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놀라워했다. 그는 폭증하는 수요에 대비하고 여러 대학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주일에 1백시간이나 일했다. 할일이 너무 많고 재미 있어서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매킨토시 판매 담당자들에게 있어서 매킨토시가 출하된 이후 처음 몇년이 가장 신나는 해였다. 대학에서 매년 들어오는 수입이 처음에 수천만 달러였던 것이 후에 수억달러로 증가해 90년초에 들어서 8억달러를 상회하는 수준에 달했지만 그들은 초창기를 잊지 못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에 타성이 붙게되었고 개척 정신도 무뎌졌다. 매킨토시가 캠퍼스에 널리 보급되자 사용자들이 가졌던 특권의식도 점차 사라졌다. 캠퍼스 밖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적어도 대학가에서 매킨토시는 매출면에서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캠퍼스에 매킨토시를 보급하는 일에 참여하여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평생 그 후광을 입게 되었다. 르윈은 컨소시엄을 구성하는데 세운 공로로 애플사 에서 확고한 자리를 확보했다.
매킨토시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그것을 받아들여 위험을 무릅쓴 드렉셀 대학 의 브라이언 호킨스는 명철한 투시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게되었다. 이를부러워한 많은 사람들이 제2의 매킨토시가 나오게 되면 르윈이나 호킨스와 같은 영웅이 될 것을 꿈꾸기도 했다.
대학이 초창기에 매킨토시를 수용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는 여러가지 면에서 혜택을 받게 되었다. 대학은 그 컴퓨터가 일반 대중에게 소개되기도 전에구매계약을 맺었고 기존의 IBM제품을 제치고 새로운 컴퓨터를 지원했던 것이다. 더구나 대학은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려면 앞으로 몇년 더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매킨토시를 지원한 것이다. 대학은 융통성이 있고 새로운 기술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졌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형성 했다.
매킨토시가 발표되고 3년이 채 되기도 전인 87년 초에 백만번째 매킨토시가판매되었다.
작성일자 : 1994.12.09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18)
매킨토시가 일찍이 쇠퇴해버리지 않게 작용한 요소 중에 레이저 프린터의 등장과 출판용 데스크톱 PC로 매킨토시의 사용을 들 수 있다. 데스크 톱 출판 기능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매킨토시가 큰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대학도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학은 매킨토시가 상업적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그 생명력을 유지시켜 주었다.
잡스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가지 교훈을 얻었다. 즉 대학이 한번 첨단 기술을 지원했으므로 다음번 넥스트사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교훈이 다. 1985년 2월 스티브 잡스가 30회 생일을 맞이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애플사와 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머지않아 새로운 컴퓨터 회사를 설립하게 될 것이라는 운명을 알지 못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회사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확고한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애플 사 직원의 평균 나이가 29세라는 것을 주목한 한 플레이보이지 기자가 잡스 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젊은 사람들이 컴퓨터업계를 장악하는 이유에 대한 견해를 묻자 그는 "생화학적 변천과정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비닐 레코드 판에 패인 홈에다 비교하며 그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고정관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고 말했다. 그는 30, 40대가 되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놀랄만한 일을 해내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기처럼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은영예롭게 사라지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컴퓨터업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어 절대로 필요없는 존재가 되지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잡스는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위치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더이상 태연할 수 없었다.
매킨토시는처음 몇개월 동안은 잘 팔려 나갔다. 그러나 대학가 이외의 시장 에서 나타난 판매폭주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자 매킨토시의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잡스는 존 스컬리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잡스는 펩시사에서 일하고 있던 스컬리를 "평생 설탕물이나 만들면서 지내겠느냐 아니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보람있는 일을 해보겠는가"라고 말하며 2년 전에 애플로 데리고 왔다. 매킨토시의 수요가 줄어들자 잡스와 스컬리의 사이가 멀어지게된 것이다.
그는 매킨토시의 부진을 자신의 측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고 획기적인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위해 일에 몰두하였다. 1985뇬 늦은 봄 애플 사는 결국 그의 업무 활동을 모두 정지시키고 잡스가 시베리아라고 부를 만큼보잘것 없는 회사의 회장으로 그를 좌천시켰다.
갑자기 그는 할 일이 없어졌다. 아침에 출근하여 날아온 우편물을 검토하는 일 외에는 별일이 없었고 이 일도 머지않아 줄어들어서 그에게 보고되는 업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는 곧 자신이 "별 이용 가치가 없는"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결심을 한 그는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새로운 다짐을 한 그는 자신은 그냥 잊혀져 가는 인물이 되지 않을 것이며 30살이라는 나이가 절대로 많은 나이가 아니고 원하지 않는 퇴직을 하지 않을것이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기보다 힘차게 일어서리라는 결의를 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결의는 9월말 스탠퍼드 대학의 생화학자인 폴 버그와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잡스가 후에 버그와 나눈 이야기를 회고하 면 그를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대학중퇴의 학력으로 30세에 불과한 잡스가 버그처럼 바쁜 노벨 수상자와 점심식사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주목해야 한다. 이들 두 사람이 점심식사를 함으로써 잡스와 버그가 탄생시킨 넥스사의 장래가 밝아졌다.
버그가 그의 전공분야인 유전자 분리 연구를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자 잡스는 컴퓨터를 사용하여 모의 실험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러면 버그의 연구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앞으로 제대로 된 DNA(유전 인자)재조합소프트웨어 개발시 신입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것이라는 설명이 었다. 자기보다 젊은 잡스의 제안에 노벨 수상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잡스 는 이렇게 해서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노벨 수상자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버그의 말에 의하면 잡스는 이미 전국에 있는 대학을 방문하면서 대학이 필요로 하는 이상적인 컴퓨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작성일자 : 1994.12.12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19)
잡스는 가장 이상적인 컴퓨터 가격은 대당 2만5천달러가 될 것이라고 들었지만 그는 대당 5백달러에 판매하려고 했다. 사전에 대학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는 버그를 만났을 때 설명을 많이 했다. 대학 에 맞는 이상적인 컴퓨터를 만들어야겠다는 구상은 자신과 그 저명한 대학 교수의 공동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더 바람직했다.
며칠 후 잡스는 애플사의 컴퓨터를 보완하고 대학생과 대학 교직원의 필요에 맞는 컴퓨터를 제조하는 회사를 설립한다는 사실을 이사회에 통보했다. 그는애플사에서 하위직원 몇명을 데리고 갈 것이며 회장직을 사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애플사는 은밀히 의논한 끝에 애플사와 직접 경쟁하지 않을것이기 때문에 10%의 지분을 구입할 의향이 있다고 답변했다. 이 대화를 끝으로 애플사와의 우호관계가 종료되었다.
다음날 잡스는 그와 함께 애플을 떠날 다섯명의 명단을 스컬리에게 보냈다.
애플대학컨소시엄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댄 르윈, 매킨토시 하드웨어 엔지니어인 버드 트리블, 하드웨어 엔지니어인 조지 크라우와 리치 페이지 그리고 재무를 담당한 수센 반즈가 명단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의 평균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다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스컬리는 애플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려는 잡 스에게 분노를 느꼈다. "이들의 직위는 절대로 낮지 않소"라고 그는 잡스에 게 분노를 터뜨렸다.
스컬리와 애플 임직원들은 잡스와 5명이 빠져나가는 자체가 애플에게 상당한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새로 설립되는 넥스트사가 애플이 "빅맥"이라는 코드명으로 개발중인 제품과 맞먹는 용량을 가진 컴퓨터를 개발.판매하게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다. 이 제품은 대학가에서 계속 요구해온 용량을 제공할 수 있는 1백만바이 트급 메모리를 가진 "3M"을 목표로한 것이다.
넥스트사의 창립자들은 애플에있는 동안 미래사업에 필요한 제품의 가격 및 마케팅 관련 정보들을 수집해 놓았다. 스컬리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잡스의 법정출두는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회사 창립자 중 한명을 고소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고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그 소송은 존속살인과 같은 비극이라고 하기보다는더 큰 비극을 사전에 막으려는 조금 어리석은 법적 투쟁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잡스의 애플재직당시 경영진은 그를 무능한 관리자로 치부했었는데 그가 독립하자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신기한 일이다.
애플사는 소송에서 잡스와 그의 동료들이 애플이 개발한 "차세대 제품"을 이용하려 한다고 비난 했고 잡스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유하고 있던 애플 주식을 비밀리에 팔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주식판매는 불법행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애플은 잡스가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 최고 한도의 애플 주식을 판매하려 한다는 정도로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비난은 잡스가 애플의 "극비정보"를 알고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스컬리는 잡스가새 회사를 설립하여 컴퓨터 업계에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불어넣도록 도와주는 일"과 "애플의 극비 정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은 구분하려 했지만 사실 후자가 발생하지 않게 하면서 전자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스컬리는 실리콘 밸리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이 분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포들의 핵 분열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다. 잡스는 스컬리가 "문화적 몰이해" 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하였다.
마이크 마쿨라와 다른 애플사임원들은 그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마쿨라는 첫 행운을 인텔사에서 잡게되었는데 그 회사 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성장한 것이다. 즉 인텔사를 창립한 엔지니어 출신인 로버트 노이스와 고돈 무어는 페어차일드 반도체라는 모세포에서 분열되어 나온 것이다. 따라서 분열행위를 금지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인 것이다.
잡스는 대학시장이 그렇게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애플은 언제라도 넥스트사와 경쟁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본규모 20억달러에 4천3 백여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가 청바지를 입은 6명으로 구성된 신생기업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했다.
아무튼 그 소송으로 인해 넥스트사는 큰 타격을 입었다. 소송이 종결될 때까지 컴퓨터를 제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애플이 불과 6명 의 직원을 가진 작은 회사와의 경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어 잡스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애플이 그들을 비난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 큰 자신감과 사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작성일자 : 1994.12.14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0)
잡스는 애플사 초창기처럼 청바지를 입고 겸손하게 일하는 식으로 다시 밑바닥부터 사업을 시작할 생각은 없었다. 애플은 차고 안에서 사업을 처음 시작했고 잡스가 매킨토시 그룹을 지휘하여 회사 안의 또다른 회사를 운영할때도비유적으로 창고의 이미지를 창출하려 노력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메리카 은행의 창립자인 기아니가로부터 구입한 우드사이드에있는 대저택에서 그는 넥스트사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사무실을 구할때까지이곳에서 4개월을 임시로 보냈다. 나이가 들고 어느정도 재산을 모은 그는최고가 아닌 것은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는 그 지역에서 가장 값비싼 사무 실을 임차하였다.
넥스트사는 첫 사무실 건물로 팔로 알토에 있는 스탠퍼드 대학 산업단지내 현대식 건물을 선택했다. 그 사무실은 개발되지 않아 야생 생물들이 번식하고 있는 산중턱에 있는 제록스 PARC연구소와 엎어지면 코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잡스는 다른 신생기업처럼 초기자본 을 아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넥스트사가 처음으로 10명의 신입사원을 채용 할 때 전임으로 일할 수 있는 실내 디자이너도 포함시켰다.
건물 위층부터 시작하여 내부구조를 새로 수리했다. 2층 공용공간의 바닥을 목재로 다시 깔고 부엌 싱크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라운지에는 12명이 앉을 수 있는 U자형 소파를 갖다놓았다. 벽에는 대형 거울을 달았고 안젤 애 덤스의 대형 작품들을 걸었다. 가구는 용도와 구조에 맞게 주문제작하고 화장실도 많은 돈을 들여 새로 단장했다. 이렇게 하여 이 회사가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회사라는 인상을 풍기려고 했던 것이다. 컴퓨터를 일반인들에게 소개하기도 전에 잡스는 전국에 설치할 판촉사무소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를실내장식설계자들과 구상하기 시작했다. 잡스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을 우선적으로 했고 그에게는 넥스트사의 외양이 가장 중요했다. 이런 고집은 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0만달러를 내걸고 넥스트사의 로고를 공모할 때 극에 달했다.
로고를 만드는데는 그렇게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잡스는 4명의 디자이너를 만나보고 예일대학 교수이자 미국 디자인업계에서 최고수준으로 알려진 폴 랜드에게 의뢰하기로 했다.
잡스는 최고를 선택한 것이다. 랜드는 IBM 로고를 제작한 사람으로 잡스는 대IBM을 만족시킨 사람이라면 자기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랜드는 잡스를 최고의 고객이라고 생각했다. 랜드는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고객을 싫어했고 최고 결정권자와의 면담을 허락지 않는 기업의 관료주의적 풍토를 혐오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직접 잡스를 만났기 때문에 결정권자 와 모든 것을 의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잡스는 랜드를 격찬하였고 한푼의 에누리없이 10만달러를 선불로 주고 그 금액은 디자인 하나값이라는 랜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랜드는 디자인을 수정하지 않겠다고 못박았기 때문에 넥 스트사로서 그는 로고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해야 하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랜드에게그 일을 맡긴다는 것은 도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0만달러를 주는 대가로 잡스는 로고뿐 아니라 디자인의 배경까지 상세히 설명을 붙인 팜프렛까지 받게 되었다. 랜드는 로고로 NEXT대신 NeXT를 제안하였다. 다른 문자에 비해 눈에 띄는 소문자 e는 "교육, 우수, 기술, 예외적, 흥분 e=mc2"의 의미를 가진다고 랜드는 설명했다. 랜드는 28도의 각도로 기울어진 글자를 검은색 입방체위에 놓음으로써 젊은이들이 호감을 갖도록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또 "멋스럽게 살짝 기울어진 글자는 크리스마스 실이 갖는 친근감과 비형식적 이미지 그리고 도장이 주는 권위를 나타낸다 고 말했다. 네 문자 모두 주홍과 연분홍색 등 독특한 색깔로 칠했다. 모든 것이 세밀하게 고려되고 도안되었다. 랜드의 로고에 부연되는 설명을 읽은 잡스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꽉 껴안았다.
완벽한 로고는 완벽한 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되고 회사가 완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잡스는 설명했다. 제거해야 할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무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애플에서온 넥스트사의 한 매니저는 "넥스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올바르게 시작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라고 했다. 이 말은 30세 안팎의 연령층으로 구성된 이 회사는 완벽을 추구할 만큼 젊고 또 그것이 갖는 위험성을 알 만큼 성숙 했다는 것을 시사했다. 잡스는 애플Ⅱ와 매킨토시를 성공시킨 경험을 토대로 넥스트사를 애플보다 훌륭한 회사로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뛰어난 직감력"을 가졌지만 그 직감력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넥스트사에서 과거에 큰 성공을 거둔 경험을 토대로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그동안 배운 교훈이 있다면 고객의 의견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것이었다. 그는 1985년 10월에 "두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 했다.
몇년후 모범회사로 부상하려는 넥스트사의 사훈이 공식적으로 발표되 었다. 소비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덜되고 세계를 바꾸어놓을 수 있는 컴퓨터 를 만든다.
신명나는 작업환경을 갖추어 아침 출근시간이 기다려지는 위대한 기업을 만든다. 고객을 최고로 대우하여 그들이 우리제품과 회사를 사랑하도록 한다.
통찰력과혁신으로 업계를 선도한다."
작성일자 : 1994.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