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이해(종합)
작성자:2017년1학기 현재 문화교양과 2학년이며 2학기에 법학과로 편입 예정 김추경 (金秋經) 김추경다음 블로그-http://blog.daum.net/ks82821119 |
목차 ①요약 (학보.송찬섭교수) ②2017년 장별 워크북 작성자-김추경 ③장별기출문제(2017년 개편교재에 맞춤)작성자-국어국문학과(졸)능소니(김선미) ④기말시험 기출문제 (2016년~2012년) 2학년문화 담당투터 이선아교수 |
■워크북문제와 기출문제를 일일이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정답과 오답에 대하여 해석을 달았으나 정확하지 않을수 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기출 문제가 오자가 있을수 있으니 기출문제 원본비교를 필히 확인바랍니다. 아래 3가지를 첨부파일로 공개하니 많은 도움바랍니다. 시험을 끝나고 충분한 검토를 거친후 공개하려고 하였으나 이번 기말 시험에 도움이 될까 싶어 공개하니 오자 정답이 틀린 것이 나오더라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작성자 -김추경 1)한국사 종합편-학보.워크북 기출문제(2016-2012) 정답과 오답 해석 (인터넷검색하여) 2)한국사 정답-정답 3)한국사 문제-문제지 |
■2016-2012.기말문제(2학년문화 담당투터 이선아교수님께서 사이트에 올린 것입니다) 사이트 자료근거-http://tutor.knou.ac.kr/tutor/dtt/site/initTutrStudDtlRetrieve.do [한국사의 이해] 기말시험 기출문제 (2012~2016, 구교재) 작성자-이선아 튜터 학우님들, <한국사의 이해>는 2017년 1학기부터 개정 교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5년간 기출문제의 구체적인 문항에서 생소한 용어 등 약간 다른 점들도 있습니다. 한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기출문제의 경향을 파악한다는 맥락으로 학습하시길 바랍니다. 현재 사용하는 교재에 나오지 않은 내용과 용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신경쓰시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
참조-연표로 보는 한국사 사전 연관목차 <네이버 지식백과] 구석기 시대부터-현대까지> 사진과 함께 보는 역사 내용 필독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0495&cid=58669&categoryId=58688 | |||
1 | 선사 시대 | 11 | 남북국 시대 |
2 | 구석기 시대 | 12 | 통일 신라 |
3 | 신석기 시대 | 13 | 발해 |
4 | 청동기 시대 | 14 | 후삼국 시대 |
5 | 초기 국가 시대 | 15 | 신라 · 후고구려 · 후백제 |
6 | 철기 시대 | 16 | 고려 시대 |
7 | 삼국 시대 | 17 | 조선 시대 |
8 | 고구려 | 18 | 대한 제국 시대 |
9 | 백제 | 19 | 일제 강점기 |
10 | 신라 | 20 |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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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주권국가 건설운동과 일제의 한국강점 |
제11장 요약 (학보.송찬섭교수) |
(11-1) 대한제국의 수립과 광무개혁
개화식자층은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문건립『 독립신문』발간 토론회 개최활동등을 했으나 만민공동회의 일부인사들이 권력장악을 꾀하여 독립협회는
결국해산되었다 고종은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1899년「대한국국제」를 제정하여 정체를 전제 군주정으로 정하였다 대한제국은 근대주권 국가를 지향하며 구본신참의 원칙아래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04년 일본의 러일전쟁 도발로 개혁은 중단되었다.
(11-2).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책동
한반도에서 세력을 다투던 러시아와 일본은 1904년 전쟁으로 들어갔다. 일제는 러일전쟁의 승기를잡자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일제는 1907년 고종을 강제퇴위 시켰고 의병을 토벌하는등 한국인의 저항을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1910년8월29일 한일병합 조약이공포되어 우리민족은 일제의노예 상태로 떨어졌다.
(11-3) 문명계몽 운동과 의병전쟁
계몽운동가들은 1905년 을사조약전후 국채보상운동 상공업진흥교육ㆍ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탄압으로 계몽운동마저 어려워지자 일부운동가들이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안에서 나타난독립전쟁론과 해외독립군기지건설운동은 1920년대 만주독립군 활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을사조약 앞뒤로 불붙은 후기 의병 운동은 평
민 의병장이 등장하는 등 참여계층이 확대되고 반침략항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1910년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자 대부분의 의병 부대는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
동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11-4) 사회ㆍ경제적 변동과 근대문화의 형성
아관파천 이후 신분제가 사라지고 사회적 평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평등의식 확산은 국권수호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러일전쟁이후 일본은 철도부설명목으로 토지를 침탈했으며 대한제국의 재정과 금융을 장악하여 식민지배 자금을 조달하였다 개항이후 신소설 신체시와 같은 새로운형태의 문학이 나타났다 대한제국 시기 민족의식을 높이고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해 국학연구가 더욱발전하여 국사와 국어연구가 활발하였다.
2017년 워크북 1강 문제 작성자 -김추경 |
1) 독립협회의 활동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독립신문발간 ② 독립문건설
③황국협회 결성 ④ 만민공동회개최
독립신문발간:일제에 맞서 비밀리에 발간한 국내의 대표적 신문. 1919년 3월 1일 천도계의 보성사에서 창간하여 6월 22일까지 제36호, 8월 20일까지 제42호를 펴냈으며 종간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사장 윤익선, 편집인 이종린이었고 이종일·박연호·김홍규 등이 참여했다. 내용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명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전개될 것임을 알렸다.그러나 발간되자마자 이종일·윤익선이 일본경찰에게 잡히고 보성사는 폐쇄당했다. 이종린은 몸을 피하여 경성서적조합 사무소에서 장종건과 상의하여 제2~4호를 프린트판으로 발간했다. 그뒤 이종린도 잡히자 장종건이 유병윤의 집에서 제6호까지 펴냈고 제9호부터는 김일선·장채국·장용하·강매·김유인·김옥영 등이 발간·반포에 적극 참여했다. 8월 29일에는 국치 특집호를 펴내기도 했다. |
독립문건설: 서울 독립문(서울 獨立門)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1896년 11월에 준공되어 1897년에 완공되었다.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1]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2][3]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서재필의 원작을 배경으로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사파진), Sabatin, 흔히 사바틴)이 설계·시공했고, 그 현판은 김가진의 작품이다. 조선의 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뒷편에 건립되었으며, 독립문 전면에는 영은문이 서 있던 기둥돌이 함께 남아 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
황국협회결성: 황국협회는 1898년 정부가 일본 상인들의 상권 침투에 대항해 조선 상인들의 몰락을 타개하기 위해 조직했으나,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독립협회를 방해하는 공작을 펼치기도했다. 청일전쟁 이후 더욱 심화되고 있던 일본상인들의 상권침투와 조선상인들의 몰락을 타개하기 위하여, 정부권력과 결탁하여 황권의 강화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특권상업체제를 복구하려 했다. 그리고 정부의 비호 하에 만민공동회에 습격해 독립협회원에게 테러를 가했다. 이때문에 서울 도성에서 독립협회와 황국협회의 두 세력이 충돌·대치하게 되자, 정부는 12월 25일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시켰고 후에 황국협회도 해산되었다. 외세의존적인 개혁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근대적 상업체제를 지향하는 데에는 나아가지 못했다. |
만민공동회개최: 독립협회의 정치 활동 중 하나로 도시소상인·소수공업자·빈민과 일부 지식인층이 주도했다. 초기에는 독립협회와 연계 아래 전개되었으나 점차 그 영향에서 벗어났다.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주최로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약 1만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하여 개최되었다. 만민 공동회는 자유롭게 정치적 소견을 발표했고, 민권신장이 그 주요내용을 이루는 ‘헌의 6조’를 결의함으로써 독자적인 민중 운동으로 성장해 갔다. 만민 공동회 운동이 강력해지자 정부는 주요 인사를 체포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민공동회가 시위운동을 전개하자 정부는 보부상들을 이용하여 이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만민공동회의 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반제의식을 불어넣은 대중정치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
2) 대한제국이 광무개혁의 원칙으로 삼은 것은?
① 구본신참(舊本新參) ② 보국안민(輔國安民)
③ 제폭구민(除暴救民) ④ 내선융화(內鮮隆化)
대한제국광무개혁:아관 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와 대한 제국을 선포하였는데, 대한 제국은 자주독립을 바라는 여론과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 세력의 균형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1899년에 선포된 대한국 국제에서는 대한 제국이 전제 국가임을 밝히고, 육·해군의 통수권,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관리 임면권, 조약 체결권, 외교권 등의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켰음 광무개혁원칙:구본신참(舊本新參)→복고성과 개혁성의 절충, 위로부터의개혁 |
구본신참; 옛 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것을 참고한다는 뜻입니다.즉, 옛 것에 중점을 두고요. 새로운 것은 필요한 것만 받아들인다는 보수적 성향의 개혁을 뜻합니다 |
보국안민: 나라님을 도와 국정을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동학 혁명 때, 동학 교도들은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의 구호를 내걸고 백성들의 지지와 궐기를 호소하였다. |
제폭구민: 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함/동학 농민군은 제폭구민을 위한 것이었지 권력과 영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
내선융화: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 약칭: 반민족규명법 ) [시행 2012.10.22.] [법률 제11494호, 2012.10.22., 일부개정] 공포법령보기> |
3)러일전쟁(1904)뒤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책동으로 볼 수 없는 것은?
① 한일 신협약 ②을미사변
③ 군대해산 ④을사조약
러일 전쟁: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청일전쟁 결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이 요동반도(遼東半島) 영유를 확정하였다.이에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주도함으로써 이를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러·청비밀동맹을 체결함과 아울러 동청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를 계기로 1898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25년간 조차, 만주를 세력권화하려 하였다.한국에서도 을미사변 이후 4개월 만에 아관파천을 성공시켜 친러정권이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될 때까지는 일본과의 타협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다.한국 문제를 둘러싸고 러·일이 1896∼1898년 사이에 맺은 베베르·고무라(Weber·小村)각서, 로바노프·야마가타(Lobanov·山縣)협정 및 로젠·니시(Rosen·西)협정 등이 바로 이것들이다.그러나 북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란(義和團亂)이 만주로 파급되자(1900),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만주를 무력 점령하고, 난이 진압된 뒤에도 철수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영일동맹론과 러일협상론으로 대응 방안이 갈렸으나, 결국 1902년 1월 영일동맹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추가내용참조: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7238 |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 제3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함과 동시에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07년 6월 한국이 을사조약의 무효를 세계 열강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퇴위시켰고, 7월 24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국권을 빼앗는 내용의 신협약을 작성하여 한국정부에 제출하자 이완용 내각은 하루 만에 찬성하여 순종의 재가를 얻었다. 공포된 7조약은 실제로 이미 이토가 한국의 정무 일체를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명문화하고 권한을 다소 확장한 것에 불과했다. 이 조약에는 비밀각서가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및 경찰권을 일본이 운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일제는 이 협약에 의거하여 1910년 강점할 때까지 사법권·행정권·관리임명권을 탈취하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위한 마지막 기반을 조성해갔다. |
을미 사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 살해사건. |
군대 해산 ;1907년 일본에 의하여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사건 군대 해산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정미칠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을 탈취한 뒤,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군대해산 이후 무장해제를 당한 대한제국 군대. |
을사 조약(을사늑약): 1905년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만이 참석한 회의에서 강제로 체결된 조약.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무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어 각종 반대운동에 일어났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명칭에 대한 논란: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다. 을사늑약의 명칭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체결 당시의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었으며, 을사년(乙巳年)에 체결되었다고 하여 '을사조약', 또는 이 조약을 계기로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찬탈하고 보호하기로 했다는 뜻에서 '을사보호조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1904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제1차 한일 협약(정식 명칭은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에 이어 체결되었다고 하여 '제2차 한일 협약'으로 부르기도 한다. 문서 자체에는 제목과 같은 공식 명칭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을사늑약'이라는 명칭은 이 조약이 강압적인 상황에서 불평등한 내용으로 체결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관인을 일본 관리가 훔쳐 찍었고, 협정에 임하는 양국의 대표에 대한 양국 통치권자의 위임 절차가 결여되었으며, 한국 고종 황제가 비준을 거부하고 이 조약이 무효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천명하였다는 점 등을 들어 불법적이며 원천 무효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
4) 일본 정부로부터 빌려 온 차관을 갚기 위해 전개했던 계몽운동은
① 만민공동회 운동 ② 독립협회 운동
③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운동 ④ 국채보상운동
① 만민공동회 운동: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주도한 대중 집회로, 관료, 학생, 서민 등 각계각층이 모였기 때문에 만민공동회라고 한다. 정부가 지나치게 열강에 의존하는 정책을 펴자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하여 국권을 세우고 국정을 개혁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집회를 주도한 독립협회는 고종이 해산을 명령하자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다가 이듬해 초에 해산하였다. |
② 독립협회운동:요약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하여 서구 시민사회를 체득하고 있던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들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이어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이 당시 독립협회는 고급관료들이 주도하는 사교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먼저 청으로부터의 자주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청의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고쳤다. 독립협회는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어 국민 계몽 운동도 전개했다. 토론회의 주내용은 국민계몽을 위한 주제뿐 아니라 당시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집권 관료층이 이탈해간 반면, 신지식인 계층이 점차 전면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또한 종로광장에서 만민 공동회를 열어 이권 침탈에 반대하는 자주 국권과 신체와 재산의 보호를 위한 민권 등을 요구하는 민의를 담은 내용을 정부에 주장했다. 이후 독립협회는 개혁 내각을 수립하고 의회 개설도 추진했으나 고종의 해산 명령으로 1898년 12월 해산했다. 창립과 발전과정 ①제1기(창립~1897. 8. 28) ②제2기(1897. 8. 29~1898. 2. 20) ③제3기(1898. 2. 21~9. 10)④제4기(1898. 9. 11~12. 25) |
③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운동;(보안회) 1904년 7월 13일 일본의 조선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조직된 항일단체. |
④ 국채보상운동: 외채를 상환하자는 국민의 자발적인 모금운동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협정서를 바탕으로 대한제국에 강제적으로 차관을 들인다. 또한 대한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외교 고문을 맞아야 했다. 이에 따라 일본 고문들은 대한제국의 재정, 금융, 화폐 제도 등을 재편하여 식민 지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06년, 1,300만 원이던 대일 국채가 1년 만에 1,840만 원으로 늘어나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채 1,300만 원은 우리 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이다. 2,000만 민중이 3개월 기한으로 담배 피우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마다 매달 20전씩 거두면 1,300만 원이 될 수 있다. 설령 다 차지 못 하는 일이 있더라도 1원부터 10원, 100원, 1,000원을 출연하는 자가 있어 채울 수 있을 것이다. |
5) 1907년 결성된 비밀결사 조직으로써 독립군기지 건설과 독립전쟁을
주장했던 단체는?
① 신민회 ② 보안회 ③헌장연구회 ④ 서북학회
신민회: 안창호가 1907년에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 단체 안창호가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박은식·신채호·양기탁 등과 함께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로 교육구국운동, 민중계몽운동, 독립군 양성운동, 민족 산업 진흥운동 등에 힘썼다. 그러나 1911년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에 휘말려 해체되었다 |
보안회: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 | 보안회는 1904년 조직된 단체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해 저항하였다. |
헌정연구회:1904년에 발생한 러일전쟁에서 일제는 전세가 유리해지자 한일의정서·한일협정서 등을 강요하는 등 점차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강화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이준·양한묵·윤효정 등이 중심이 되어 국민의 정치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계몽단체의 하나인 헌정연구회를 조직했다. 근대적 국가의 특성을 헌정으로 보고 근대국가의 성격과 운영에 관한 정치교양을 쌓아서 앞으로 쟁취할 근대적 독립국가의 헌정에 관해 연구하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정치집회가 금지되자 합법적인 정치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방향을 바꾸어 산업을 진흥시키고 교육을 보급시키는 사회문화운동을 전개했으며, 그 후신으로 1906년 윤효정·장지연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자강회를 설립했다. |
서북학회 :설립자 이동휘, 안창호, 박은식, 유동열, 최재학 외 의의와 평가 서북학회는 1909년초 신민회와 같이 독립전쟁전략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여 독립군기지건설에 주력하여 국외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국내활동 특히 교육운동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원동력이었다. |
6) 을사조약 뒤 활약했던 대표적 평민 의병장은
① 민종식 ② 최익현 ③ 신돌석 ④ 박승환
민종식 :을사조약 반대운동 독립운동가 클릭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luebird5519&logNo=120113236510 |
박승환 -대한제국 군대해산 명령에 항의 하고자 권총으로 자살 독립운동가 |
최익현: 을사조약(외교권박탈) 반대 독립운동가 |
(1905년 을사늑약:. 《황성신문》은 주필인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오늘 목 놓아 통곡하노라>을 실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2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만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멸망하고 멈추겠는가? 아!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로 끝을 맺으며, 을사조약을 맺은 정부 대신들을 도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조약을 맺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 이 다섯 명을 을사5적이라고 부르며 매국노라 하였습니다. 군대해산 이후 의병 전쟁의 확산 과정 |
7) 을사조약 뒤 의병부대의 전투력이 강화되고 의병전쟁이 전국으로 확산된 계기는?
① 아관파천 ②광무개혁 ③임오군란 ④군대해산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 개설 일명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하였다. 이로 인해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아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
광무개혁:1896년부터 고종 및 대한제국 정부의 개명(開明)된 집권층이 주도한 근대적 개혁.개설:1897년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이 개혁이 집중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고종황제의 연호인 ‘광무(光武)’를 따서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부른다. 서재필 등 독립협회(獨立協會)세력이 주도한 아래로 부터의 개혁과 자주 비교된다. 내용: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주로 보수파가 주도하였다. 1894년의 갑오개혁과 1895년의 을미개혁은 비록 외세의 종용과 간섭이 있기는 했지만, 1876년 개항 이후에 확산된 개화사상을 정책적으로 구현하고 동학농민혁명 이후엔 발생한 과제들을 수습하기 위한 시도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장(更張)사업은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성립된 정부에서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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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요약: 1882년 6월 5일 무위영 소속 구훈련도감 군병들이 부당한 급료로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민씨 정권 아래 각종 수탈을 받았고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던 빈민과 5군영의 폐지와 13개월이나 급료가 지불되지 않은 하급군병이 민씨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은 곧바로 정상적인 급료 지급을 약속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서 폭동은 가라앉았으나 군병들은 소규모 부대를 이루어 활동을 계속했다. 대원군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과 청국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서울에 들어온 청군은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가는 한편, 군대를 몰아 서울 시내와 궁궐을 장악했다. 이에 군병과 서울의 빈민들은 청군에 저항하여 무기를 들고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전개했으나 청군에 의해 군병의 집단적 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이 진압되고 말았다. |
군대해산:1907년 일본에 의하여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사건. | 역사적 배경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킨 다음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을 탈취하였다. |
8) 대한제국 시기에 일어난 사회 경제적 변동으로 볼 수 없는 것은
① 신분제가 사라지고 사회적 평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② 시전상인들이 근대 상인으로 변신하려고 노력하였다
③ 활빈당은 지배층의 무능과 수탈을 비판하였다
④ 여성의 사회 진출은 이체 금지 되었다
활빈당: 1900년충청남도 일대에서 시작하여 남한 각지에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던 무장민중집단 1900년 2월경 충청남도 내포(內浦) 지방의 신창·예산·대흥·청양·정산·홍주·덕산·해미·법성·보령·남포 등지에서 봉기한 뒤, 충청북도·경기도·강원도·영남·호남 등 남한 각지로 그 세력이 파급되어 1904년까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
9) 개항이후 나타난 새로운 문예 경향으로 볼 수 없는 것은?
① 신소설 ② 신체시 ③ 탈춤 ④ 창가
신소설(新小說)은: 한국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성행한 소설 문학의 한 종류이다.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개화기소설(開化期小?)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
신체시: 신체시는 구체시(舊體詩)를 배제하고 서구의 시(poetry)에 해당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신체시에 해당되는 작품은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대체로 1908년에 발표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후부터 1919년 〈창조〉 창간호에 발표된 주요한의 〈불놀이〉 이전까지의 시를 가리킨다. 한국의 신체시가 가지고 있는 새로움의 요소는 형태적인 면에서 종래의 시가가 지녔던 고정된 운율로부터의 탈피이다. 신체시의 또다른 특징은 기존의 율어체가 아닌 구어체를 채택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최남선은 장르 의식의 결여로 자유시로의 발전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내용적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진취적 의욕과 낙관적 세계를 노래한 일종의 계몽적 서정시라 할 수 있다. |
창가: 개화기 시가 양식의 하나. 개화기의 한국 시가는 서구의 충격을 받아서 그 내용과 형태에서 고전시가와는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하였다. 창가는 개화기 시가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양식으로 개화가사의 다음 자리에 위치하고, 다음 단계의 시가인 신체시의 형성과 전개에 징검다리 구실을 하였다. 내용-창가라는 명칭은 개항과 함께 한국 사회에 수용된 서구의 악곡에 맞추어 제작된 노래가사의 뜻을 지닌다. 바꾸어 말하면, 시가 형식으로 창가는 서구의 곡조에 맞추어 지어진 가사 형식에 해당된다. 창가의 효시를 이룬 작품은 1876년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지어서 부른 <황제탄신경축가>이다. |
10) (독사신론) 지어 근대 민족사학의 연구 방향을 제시한 사람은?
① 신채호 ②박은식 ③최남선 ④주시경
신채호:요약 한말에 언론, 교육, 신민회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중국 망명 후에는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노선을 견지하면서 외교론 중심의 상해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무정부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또한 역사연구를 통해서 한국근대역사학의 방법론과 인식을 성립시켰다. 호는 단재, 일편단생, 단생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이며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자이다. 구한말 관료였던 신기선의 서재에서 많은 서적을 읽으며 개화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세 때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29년 5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36년 2월 옥사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박은식:1898년은 그에게 전환기였다. 박은식은 서울로 올라와 애국문화운동에 열렬히 참여했고, 교육이 구국의 요체임을 주장하고는 《학규신론(學規新論)》을 지어 정부에 냈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은 서울 거리에 울렸다. 이즈음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간행되자, 두 신문사에서 차례로 주필을 맡아 장지연, 남궁억 등과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박은식은 만주 땅에 있을 때에 앞에 말한 《몽견금태조전》을 비롯,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실기》, 《연개소문전》 등을 써서 만주 일대에서 활약한 우리 민족의 웅대한 역사를 기술했다. 이 글들은 뒷날 이 지방의 자녀들에게 민족혼을 고취하는 교재가 되었다. 1912년에 박은식은 중국 대륙으로 발길을 돌려 상하이에 정착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교민이 몇십 명에 지나지 않았고 신규식, 홍명희 등이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청년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박은식이 오자 그 총재로 추대했고 곧이어 교육기관으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운동을 벌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태동하기 전 상하이에서 청년교육언론 운동을 벌이면서 《안의사중근전》, 《이순신전》, 《이준전》 등을 저술했고, 흥선대원군의 집권에서부터 나라가 망할 때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한국통사(韓國痛史)》라는 이름으로 완성했다. 그가 망해가는 나라의 역사를 썼기에 ‘통곡의 역사’라는 뜻에서 ‘통사’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발해사와 금사(金史)를 우리나라 역사라는 의식으로 이를 한글로 저술하여 우리 동포 자녀들에게 읽혔다.그의 나이 회갑이 되던 해에 3·1만세운동을 맞이했고 이어 임시정부가 태동했을 때에는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묵묵히 봉직하면서 동학농민전쟁에서 3·1만세운동까지 철저하게 민족사관에 입각해서 엮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완성했다. 그의 회갑연이 베풀어졌을 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국통사》를 쓰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썼거니와 내가 비록 늙었더라도 건국사를 쓰고야 죽겠다.” 이 결의와는 달리 그는 끝내 우리나라의 건국사를 쓰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죽고말았다. |
최남선(崔南善) 굴절된 친일파 지식인-당대 3대 천재의 한 사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 하면 우리는 흔히 천재를 떠올린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박람강기(博覽强記, 동서고금의 서적을 많이 읽고 사물을 잘 기억함)한 학자로, 부지런한 신문화운동가로, 논설을 쓰면서 신문사 사장을 지낸 언론인으로, 많은 시조를 쓴 시조시인으로, 우리 역사를 줄기차게 쓴 역사학자로, 수많은 책을 모은 장서가로, 3·1운동의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민족대표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확실히 그는 자신이 살았던 당대에 3대 천재의 한 사람으로 꼽혔을 정도로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중략-시류에 타협하는 굴절된 지식인의 모습
1919년 봄, 나라 안팎의 정세에 힘입어 국내 인사들 위주로 일대 시위운동이 준비되면서 그에게도 일거리가 하나 주어졌다. 그의 문장력을 높이 사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게 한 것이다. 그는 웅혼한 문장으로 이 선언문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민족대표 서명 차례가 되자 학자로 남겠다는 뜻을 비치면서 이를 거부했다. 그 말고도 김성수는 사업을, 송진우는 언론을, 현상윤은 교육을 핑계대고 서명에 끼지 않았다.
그가 작성한 〈독립선언문〉은 뛰어난 한문투의 문장이었고, 그때로서는 참신한 감각을 지닌 용어가 구사되었다. 그러나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독립선언문으로서는 지나치게 온건했고, 또 지나칠 정도로 비폭력을 내세웠다. 이에 이 선언문을 맨 처음 비판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한용운이었고, 오늘날에도 그 온건한 내용과 함께 어려운 문투가 민중의 가슴에 와닿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는 이 글 말고도 〈일본 정부에 대한 통고〉, 〈윌슨 미 대통령에게 보내는 의견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메시지〉등의 공식문서를 썼는데, 이것들도 오늘날 한결같은 비판을 받고 있다.중략-이후 이들은 총독부가 거들어 이루어진 연정회(硏政會)에도 참여하고 조선자치론에도 찬성하고 나서는 등 총독부 정책에 영합하고 나섰다. 여기에 참여한 세력은 거의 민족주의 우파들로서 언론이나 교육계의 지식인들, 기업을 벌이고 있던 이른바 민족자본가들이었다. 추가정보-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5XX13000067 |
주시경: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개척자 역할을 한 우리나라의 국어학자(1876~1914) 개화 청년으로 성장하다 한글연구에 몰두하다 한글운동과 구국운동에 신명을 바치다 망명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급사하다 개화 청년으로 성장하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이름을 순수한 우리말인 ‘한힌샘’으로 지어 부른 것으로 유명했다. 우리는 그를 국문법의 창시자로 받들고 있으나 여느 사람들은 정작 그의 내력과 사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한글학자 주시경은 어느 정치가보다도 큰 공적을 쌓아 우리 겨레의 문자생활에 이바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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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대한제국의 좌절과 일제의 한국 강점 장별 문제 정리(2017년 개편교재에 맞춤) 국어국문학과(졸) 능소니(김선미) |
1-5 |
12424 |
1. 대한제국 수립의 현장으로 적절한 곳은?
가. 경운궁(덕수궁) 나. 환구단 다. 명동성당 라. 일본영사관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248쪽 :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돌아와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수립선포식을 가졌다.
2. 한말 호남지역에서 의병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던 가장 큰 이유는?
① 이 지역 군인들이 적극 도왔다. ② 개항 뒤 일제의 경제침탈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③ 이곳에 포진한 일본군 병력이 약했다. ④ 이 지역 부호들이 군자금을 많이 지원하였다.
☞ 교재 256~259쪽 : 개편교재에서는 자세한 설명이 빠졌으나 이 지역은 개항 뒤 일제의 경제침탈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었다.
3. 을사조약 체결 과정을 잘못 설명한 것은?
① 이토 히로부미가 조약체결을 서둘렀다. ② 이완용 등 대신이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③ 일본군은 왕궁을 포위하였다. ④ 고종은 쉽게 계약을 재가하였다.
☞ 교재 251쪽 : ④ 고종이 끝까지 조약체결을 거부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외무대신의 직인을 가져오게 하여 강제로 조약을 체결했다.
4. 독립협회와 관련 있는 것은?
가. 척화비 나. 만민공동회 다. 헌의6조 라. 한성순보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247~248쪽 : 척화비는 흥선대원군과 관련된다. 한성순보는 개화파가 계몽활동을 홍보하기 위해 간행했던 신문이다.
5. 통감부 설치 이후 경제적 침탈을 목적으로 한 일제의 사업이 아닌 것은?
① 화폐정리사업 ② 재정정리사업 ③ 신작로 건설 ④ 청계천 준설 사업
☞ 교재 252~253쪽 : 청계천 준설 사업은 영조의 정책이다.
6-10 |
31243 |
6.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추진한 광무개혁의 내용은? ☞ 교재 248~250쪽
가.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 실시 나.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 실시
다. 자주독립과 영토보존을 위해 중립화 정책 추구 라. 토지조사 및 지계발급 사업 실시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7.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광무개혁을 추진하며 내세운 원칙은? ☞ 교재 248~251쪽
① 구본신참 ② 보국안민 ③ 척왜척양 ④ 숭명반청
8. ‘가난한 사람을 살려내는 무리’라는 뜻으로 1900년 이후 대표적인 반봉건, 반침략 민중항쟁 조직은?
① 동학 ② 활빈당 ③ 만민공동회 ④ 탁지부
☞ 교재 256~257쪽
9. 1907년 비밀리에 결성된 신민회의 활동이 아닌 것은?
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다. ② 평양, 마산 등지에 자기(磁器)회사를 세웠다.
③ 출판물 보급을 위해 태극서관을 설립했다. ④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 교재 254~255쪽 : ?번은 독립협회에 대한 설명이다.
10. ‘을사조약’ 체결 이후 ‘태백산을 나는 호랑이’로 불리며 의병활동을 벌인 인물은?
① 최제우 ② 윤치호 ③ 신돌석 ④ 김윤식
☞ 교재 257쪽 : 개편교재에서는 자세한 설명은 빠졌다.
11-15 |
24411 |
11.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추진한 것은? ☞ 교재 250쪽
① 갑오개혁 ② 광무개혁 ③ 동도서기 ④ 척왜양이
12. 통감부 설치 이후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목적으로 한 일제의 사업은? ☞ 교재 261쪽
가. 화폐정리사업 나. 만민공동회 다. 육군무관학교 설치 라. 재정정리사업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13. 다음 중 독립협회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가.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설했다. 나. 토지조사 사업과 지계발급 사업을 실시했다. 다. 고종이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만든 기구이다. 라. 만민공동회를 열어 반정부운동을 벌였다.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247~248쪽 : ‘나’, ‘다’는 대한제국 시기 양지아문에 대한 설명이다.
14. 민중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계몽운동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진 빚을 갚자는 운동은?
① 국채보상운동 ② 물산장려운동 ③ 실력양성운동 ④ 브나로드운동
☞ 교재 253쪽
15. 조선이 사대관계를 청산한 것을 기념하여 독립문 건설과 독립공원 조성 사업을 위해 조직된 기구는? ☞ 교재 247쪽
① 독립협회 ② 궁내부 ③ 내장원 ④ 양지아문
16-19 |
1312 |
16. 한말, 민중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계몽운동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진 빚을 갚자는 운동은? ☞ 교재 253쪽
① 국채보상운동 ② 실력양성운동 ③ 만민공동회 ④ 변법자강운동
17.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추진한 광무개혁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② 임진왜란 당시 불탄 경복궁을 다시 지었다.
③ 자주독립과 영토 보전을 위해 중립화 정책을 추구했다.
④ ‘사람이 한울(人乃天)’이라는 사상을 원칙으로 하였다.
☞ 교재 248~250쪽 : ①②번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이다. ④번은 동학사상에 대한 설명이다.
18. 독립협회의 활동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만민공동회를 열어 반정부운동을 벌였다. ② 감영군을 상대로 황토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③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실시했다. ④ 교조신원운동을 벌였다.
☞ 교재 247~248쪽 : ②③④번은 1894년 농민전쟁과 관련된 설명이다.
19. 아래 빈 칸에 들어갈 말은? ☞ 교재 251쪽
강제 체결된 정미조약(제3차 한일협약)으로 ( )은(는) 법률 제정, 중요 행정 처분, 고위 관리 임명 등의 권한을 가지며 대한제국의 내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
① 궁내부 ② 통감 ③ 통신사 ④ 연행사
제 11장 답 안 | 1-5 | 6-10 | 11-15 | 16-19 | 21-25 | 26-27 |
12424 | 31243 | 24411 | 1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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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안 : 12424 31243 24411 1312 |
제11장-장 별. 기말문제 (2016년-2012년) 자료출처:2학년 담당투터 문화교양과 이선아교수 클릭 http://tutor.knou.ac.kr/tutor/dtt/site/initTutrStudDtlRetrieve.do 정답과오답해석작성 : 문화교양과 김추경 |
2016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23. ‘가난한 사람을 살려내는 무리’라는 뜻으로 1900년 이후 대표적인 반봉건, 반침략 민중항쟁 조직은?
① 동학 ② 활빈당 ③ 만민공동회 ④ 탁지부
① 동학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한국 근대의 신종교. |
② 활빈당- 1900년충청남도 일대에서 시작하여 남한 각지에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던 무장민중집단 1900년 2월경 충청남도 내포(內浦) 지방의 신창·예산·대흥·청양·정산·홍주·덕산·해미·법성·보령·남포 등지에서 봉기한 뒤, 충청북도·경기도·강원도·영남·호남 등 남한 각지로 그 세력이 파급되어 1904년까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
③ 만민공동회.독립협회가 주도한 대중집회 만민공동회- 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주도한 대중 집회로, 관료, 학생, 서민 등 각계각층이 모였기 때문에 만민공동회라고 한다. 정부가 지나치게 열강에 의존하는 정책을 펴자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하여 국권을 세우고 국정을 개혁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집회를 주도한 독립협회는 고종이 해산을 명령하자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다가 이듬해 초에 해산하였다. 1896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다. 1897년 고종이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대한제국을 설립하다. 1898년 최초의 근대적 민중대회인 만민공동회에 시민 1만여 명이 참석하다 광무(光武) 2년인 1898년 10월 29일 서울 종로광장에서 열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 백정 박성춘이 한 연설이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민중대회로, 아관파천 이후 심화된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규탄하고, 국정 개혁을 요구하는 시국 집회 성격을 띠었다. |
그해 3월 첫 집회가 열린 이후 10월을 즈음해 만민공동회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집회에는 전·현직 관료와 각종 단체 회원, 학생, 교원, 종교인, 하층민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의정부 참정(參政) 박정양(朴定陽)을 비롯한 정부 관료의 참여에 의미를 두어, 이날 집회를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라고도 한다. 이 집회에서 참석자들은 시국에 대한 개혁안을 담은 헌의(獻議) 6조를 채택하고, 이를 고종 황제에게 건의한다. 헌의 6조는 다음과 같다. 1. 외국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관민이 동심협력하여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할 것. 2. 광산, 철도, 매탄(煤炭), 삼림의 개발 및 차관, 차병(借兵)과 외국과의 조약은 각부 대신 과 중추원(中樞院) 의장이 합동으로 서명하지 않으면 시행되지 못하게 할 것. 3. 전국의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관할하여 다른 기관이나 사회사(私會社)가 간섭하지 못 하게 하고 예산과 결산을 인민에게 공포할 것. 4. 지금으로부터 중죄범은 모두 피고가 충분히 설명하고 자복(自服)한 후에 재판할 것. 5. 칙임관(勅任官)은 황제가 의정부에 자순(諮詢)하여 과반수의 찬성을 받아 임명할 것. 6. 장정(章程)을 실천할 것. |
④ 탁지부- 1894년(고종 31) 성립된 김홍집·박영효 연립정권은 일본인 고문관들이 기초한 정부개혁안을 채택, 다음해 3월 공포했다. 이때 8아문이 7부로 개편되면서 탁지아문도 탁지부가 되었다. 기본 업무는 탁지아문을 계승해 정부의 회계·출납·조세·국채·화폐·은행 등의 사무 일체를 통괄하며, 지방의 재무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탁지부의 전신인 탁지아문이 관장하던 왕실경비의 예산·결산·보관·출입 사무 등을 궁내부 회계원에서 따로 관장하게 됨에 따라 다시 재정이 탁지부와 궁내부로 이원화되었다. 이후 관장업무의 변화, 부서의 통폐합, 소속인원의 증감과 개칭 등을 반복하다가 1910년 한일합병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
24. 1907년 비밀리에 결성된 신민회의 활동이 아닌 것은?
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다.
② 평양, 마산 등지에 자기(磁器)회사를 세웠다.
③ 출판물 보급을 위해 태극서관을 설립했다.
④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영은문-조선시대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맞아들이기 위해 1536년에 세운 문으로 1896년에 헐리고, 이후 독립 협회의 주도로 그 자리에 독립문울 세움. |
25. ‘을사조약’ 체결 이후 ‘태백산을 나는 호랑이’로 불리며 의병 활동을 벌인 인물은?
① 최제우 ② 윤치호 ③신돌석 ④ 김윤식
① 최제우-출생-1824(순조 24), 경북 경주 사망-1864(고종 1), 대구 국적-한국 요약 최제우는 한국에서 자생한 종교인 동학의 교조이다. 동학은 서양에서 전래한 종교인 '서학'에 대하여 천도교를 이르는 이름이다. 최제우는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1860년 종교체험 후, 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많은 신도가 추종하기 시작했다.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이듬해 3월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형에 처해졌다 |
② 윤치호 출생 -1865(고종 2), 충남 아산 사망 1945 국적 한말, 한국 요약 평양의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청년운동을 적극 지도하는 한편, 신사상·신사업의 개발 등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계몽강연 연사로도 활약했다. 1906년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의 원장으로 실업교육을 제일 중시하여, 청년들에게 근로정신을 고취, 노동을 천시하는 폐습을 타파하고 경제적 자립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힘썼다. 한편 현실생활의 구원을 통하여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실천의 장으로서 기독교모범촌 건설계획을 추진했으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으로 일했다. 1941년에는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에 대한 결의문을 낭독하고, 친일세력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의 고문으로 일제의 징병에 협력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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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신돌석 출생 1878(고종 15), 경북 영해 사망1908(융희 2) 국적한말, 한국 요약 강원도와 경상도 등지에서 의병세력을 구축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반봉건적 배경과 항일의식의 영향하에서 성장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인 1896년 3월 영해의병에 가담하여 중군장으로서 의병 100여 명을 이끌었다.이후 1906년 3월 13일에 영릉의병장이라는 기호를 내걸고 계속 일본군과 격전을 별였다. 이듬해 11월에 엄동을 맞아 다음해 봄에 활동을 재개할 것을 기약하고 해산한 후 눌곡에 있는 부하의 집에 은신했다가 이들 형제에게 암살당했다. |
④ 김윤식金允植=정세에 민감한 변신의 명수 출생1835년.사망1922년 권력 앞에 굴절된 지식인의 모습을 보이다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태어날 적에는 세도정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고, 그가 죽을 적에는 이른바 일제의 문화통치가 막바지에 이를 때였다. 우리나라에서 19세기 후반에 태어난 사람치고 평탄하게 산 사람이 드물겠지만, 김윤식은 때로는 주역으로, 때로는 막후의 인물로 득의와 좌절을 거듭한 정치가였다. 그러면서 그는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고뇌와 정세에 약삭빠르게 대처하는 변신을 거듭했다. 그를 두고 민족주의계열에서는 교활하고 민족운동을 분열시킨 장본인으로 꼽았으며,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는 “학의 머리칼과 은빛 수염[鶴髮銀髥]을 가진 신선과 같은 유학자”라거나 “중정온건(中正穩健)한 정치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로 보아 그가 어떤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
2015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28.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광무개혁을 추진하며 내세운 원칙은?
①구본신참(舊本新參)
②보국안민(輔國安民)
③척왜척양(斥倭斥洋)
④숭명반청(崇明反淸)
①구본신참(舊本新參)구본신참(舊本新參) 뜻 : 옛것을 근본으로 삼아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뜻으로, 19세기 말 개화파에 의해 전개된 서양문명의 수용논리.舊 : 예 구 本 ; 근본 본 新 : 새 신 參 : 간여할 참 1897년 대한제국이 출범하면서 나타난 서양문명의 수용논리로, 이전에 전개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도서기론은 김윤식이 1880년(고종 17) 주창한 이론으로, 전통문화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론이다.1894년의 갑오개혁과 1895년의 을미개혁도 동도서기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그러나 외국 제도의 무분별한 모방과 급진성으로 인해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구본신참은 이 무렵에 등장하였다.구본신참은 옛 것을 근본으로 해서 새로운 것을 참작 또는 참조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의미상 동도서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구본신참에서 말하는 옛 것은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이전의 우리 것을 뜻한다. 즉 갑오·을미 두 개혁의 실패를 거울삼아 고유의 전통문화와 사상·제도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론이다.대표적인 구본신참론자들로는 김병시·이용익·정범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구본신참론자들에 의해 추진된 것이 광무개혁이다. 왕권 강화와 통치권의 집중, 군제(軍制)의 전면적인 개편, 친위대·시위대·호위국의 개편과 창설, 무관학교 설립 등이 구본신참론과 관련되어 있다.그러나 구본신참론에 입각해 추진된 광무개혁의 성격을 자주성에 두느냐, 수구성에 두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나뉜다. 중국에서 양무운동의 기치로 내세운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일본의 개화론자들이 내세운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과 통한다. |
②보국안민(輔國安民)최제우가 『동경대전』 포덕문(布德文)에서 사용한 동학 용어.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동학을 창도할 때에 외세로부터 국권을 지킬 것을 강조한 계책이다 연원 및 변천 -19세기 중엽 동학을 처음 세운 최제우는 ‘①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해 내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뜻으로 보국안민을 외쳤다. 그 후 ②최시형은 조선 조정과의 평화적 관계를 염두에 두고 ‘나라를 이롭게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1894년(甲午)에 일어난 동학혁명 당시에는 ‘③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뜻으로 바뀌어졌다. 이는 서양의 침략에 대항하는 관계에서 조정의 탄압에 순응하는 관계로 변천했다가, 다시 조정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새로운 관계로 변천한 것을 의미한다. |
③척왜척양(斥倭斥洋)-외세배격의 민의 전달하는 시위 형태로 진행되었다. 1893년 3월과 4월 동학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척왜양(斥倭洋)’을 내걸고 충청북도 보은에서 개최한 집회 |
④숭명반청(崇明反淸)-청나라의 무력에 굴복한 조선이 청을 중국의 정통왕조로 인정하지 않고 명나라만을 중국의 정통왕조로 인정하던 태도. |
29. 1980년대 이후 조선에 들어온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사상은?
①위정척사사상
②국수보전론
③사회진화론
④ 양무론
①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이론(闢異論)에 바탕한 새로운 유교적 정치윤리사상 송대 이후 여진족의 침공으로 한민족(漢民族)과 중화문화가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주자(朱子)는 한민족의 독립과 문화적 자존성을 확립하기 위해 유교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로 이민족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여, 민족적 화이의식(華夷意識)을 근간으로 한 위정척사사상을 체계화하였다. |
②국수보전론- 신채호의 '국수보전론(國粹保全論)'에서 시초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한말부터 이미 국수의 보전을 강조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실력양성에 앞서 국가정신의 무장을 강조하고, 정신무장의 요체는 국수의 보전에 있다고 역설하였다. 여기에서 국수란 '그 나라에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풍속, 습관, 법률, 제도 등의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같은 국수보전론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크게 확산되면서 국수의 상징으로 특히 단군숭배의 풍조가 일어나 대종교가 창건되었다.(박찬승 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하)』, 제2장 「신채호」, 89쪽. )] |
③사회진화론 -다윈의 생물진화론에 기초한 사회이론이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인간 사회의 생활을 생존 경쟁으로 보았고, 그 투쟁은 적자생존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인구 변동에 작용하는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우수한 경쟁자가 살아남고 인구의 질이 계속 향상된다고 믿었다. 사회도 이런 방식으로 진화하는 유기체로 간주했는데, 무제한적인 경쟁과 현상 유지가 생물학적 선택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도태된 자'로서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되며, 생존 경쟁에서 부는 성공의 상징이라고 인식했다. 한편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적·식민주의적·인종주의적 정책을 철학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은 20세기 이후 생물학적·사회적·문화적 현상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고 그 이론구조가 배격되면서 쇠퇴했다. |
④양무론-. 온건 개화파는 청의 양무론을 본받아 유교 사상을 정신적 토대로 두고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고 온건한 방법으로 개혁을 추진하자는 입장이었다 |
2014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26. 한 나라에게 경제 이권을 넘겨주면 다른 나라에게도 같은 수준의 이권을 주어야 하는 내용의 대표적인 불평등 조항은?
① 삼림채벌권 ② 삼포개방 ③ 치외법권 ④ 최혜국 대우
27.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추진한 광무개혁의 내용은?
가.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 실시
나.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 실시
다. 자주독립과 영토 보전을 위해 중립화 정책 추구
라. 토지조사 및 지 계발급 사업 실시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광무개혁-아관파천 이후 구성된 새 내각은 대체로 보수파였다. 이 시기의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갑오개혁에서 단행된 개혁을 보완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1899년 공포된 대한국제는 국왕에게 무한불가침의 군권을 부여했고 황실 재정 확충을 위해 각종 잡세를 부활시켰다. 정치개혁은 내각을 의정부로 환원하고, 지방행정구역을 갑오 이전 상태로 복귀시켰다. 군비를 증강하고 간도 지역에 해삼위통상사무·북간도관리를 설치하는 등 부국강병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도량형 통일, 철도 건설, 전등·전차 가동 등도 이루어졌다. 근대적 호적제가 마련되고, 사회복지기관인 제중원·혜민원이 설립되었다. 아관파천 이후 철회된 단발령도 다시 공포되었다. 그러나 광무개혁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는 무력했으며,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
2013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26. 1894년 농민전쟁 이후 전개된 사건을 올바로 나열한 것은?
① 청일전쟁-을미사변-을미의병-러일전쟁
② 청일전쟁-러일전쟁-을미사변-을미의병
③ 을미의병-청일전쟁-러일전쟁-을미사변
④ 러일전쟁-을미사변-을미의병-청일전쟁
청일전쟁-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 |
을미사변(1895.8.20.)-주한공사 미우라는 수십 명의 일본인 낭인과 일본 수비대를 하수인으로 고용하여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일본인들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이어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살해한 뒤,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12월 1일 고종은 정식으로 명성황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다. 이후 단발령과 건양 연호의 사용, 친위대·진위대 등으로 군제 개편, 소학교령 공포, 태양력 사용 등의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황후시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서 친일내각에 의해 추진된 개혁은 전국적인 반일의병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
을미의병-(1896.1.)-1895년 8월 20일 일본에 의한 민비학살의 비보로 분노한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민비의 폐위에 반대하고,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의병운동을 일으킬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 발표된 단발령은 거의를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6년 1월 경기도·강원도·충청도 일대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2월 아관파천 후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활발했다. 을미의병의 지도층은 유생들이었으며, 병사는 농민전쟁을 경험한 농민이나 소작농민이 대부분이었다. 을미의병의 당면 목표는 단발령을 철폐하고 친일내각을 퇴진시킨 다음 일본군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을미의병은 1896년 여름 거의 해산했는데, 이는 농번기를 맞아 전투조직을 유지킬 수 없었고, 국왕의 선유에 저항할 논리도 궁했기 때문이었다 |
러일전쟁발생1904년 2월 8일-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7238 |
27. 독립협회와 관련 있는 것은?
가. 척화비
나. 만민공동회
다. 헌의 6조
라. 한성순보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나. 만민공동회.독립협회가 주도한 대중집회 만민공동회- 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주도한 대중 집회로, 관료, 학생, 서민 등 각계각층이 모였기 때문에 만민공동회라고 한다. 정부가 지나치게 열강에 의존하는 정책을 펴자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하여 국권을 세우고 국정을 개혁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집회를 주도한 독립협회는 고종이 해산을 명령하자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다가 이듬해 초에 해산하였다. 1896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다. 1897년 고종이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대한제국을 설립하다. 1898년 최초의 근대적 민중대회인 만민공동회에 시민 1만여 명이 참석하다 광무(光武) 2년인 1898년 10월 29일 서울 종로광장에서 열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 백정 박성춘이 한 연설이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민중대회로, 아관파천 이후 심화된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규탄하고, 국정 개혁을 요구하는 시국 집회 성격을 띠었다. 그해 3월 첫 집회가 열린 이후 10월을 즈음해 만민공동회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집회에는 전·현직 관료와 각종 단체 회원, 학생, 교원, 종교인, 하층민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의정부 참정(參政) 박정양(朴定陽)을 비롯한 정부 관료의 참여에 의미를 두어, 이날 집회를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라고도 한다. 이 집회에서 참석자들은 시국에 대한 개혁안을 담은 헌의(獻議) 6조를 채택하고, 이를 고종 황제에게 건의한다. 헌의 6조는 다음과 같다. 1. 외국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관민이 동심협력하여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할 것. 2. 광산, 철도, 매탄(煤炭), 삼림의 개발 및 차관, 차병(借兵)과 외국과의 조약은 각부 대신 과 중추원(中樞院) 의장이 합동으로 서명하지 않으면 시행되지 못하게 할 것. 3. 전국의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관할하여 다른 기관이나 사회사(私會社)가 간섭하지 못 하게 하고 예산과 결산을 인민에게 공포할 것. 4. 지금으로부터 중죄범은 모두 피고가 충분히 설명하고 자복(自服)한 후에 재판할 것. 5. 칙임관(勅任官)은 황제가 의정부에 자순(諮詢)하여 과반수의 찬성을 받아 임명할 것. 6. 장정(章程)을 실천할 것. 그해 3월 첫 집회가 열린 이후 10월을 즈음해 만민공동회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집회에는 전·현직 관료와 각종 단체 회원, 학생, 교원, 종교인, 하층민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의정부 참정(參政) 박정양(朴定陽)을 비롯한 정부 관료의 참여에 의미를 두어, 이날 집회를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라고도 한다. 이 집회에서 참석자들은 시국에 대한 개혁안을 담은 헌의(獻議) 6조를 채택하고, 이를 고종 황제에게 건의한다. 헌의 6조는 다음과 같다. 1. 외국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관민이 동심협력하여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할 것. 2. 광산, 철도, 매탄(煤炭), 삼림의 개발 및 차관, 차병(借兵)과 외국과의 조약은 각부 대신 과 중추원(中樞院) 의장이 합동으로 서명하지 않으면 시행되지 못하게 할 것. 3. 전국의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관할하여 다른 기관이나 사회사(私會社)가 간섭하지 못 하게 하고 예산과 결산을 인민에게 공포할 것. 4. 지금으로부터 중죄범은 모두 피고가 충분히 설명하고 자복(自服)한 후에 재판할 것. 5. 칙임관(勅任官)은 황제가 의정부에 자순(諮詢)하여 과반수의 찬성을 받아 임명할 것. 6. 장정(章程)을 실천할 것. |
헌의 6조-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6개조 원칙을 결의했다. 이 6개조가 황제에게 헌의된다고 해서 헌의6조라고 했다. 독립협회는 헌의6조를 통해 자주성을 가진 군주주권국가를 확립하되, 서구의 상원의회와 같은 중추원을 설립하여 왕권을 견제하고자 했다. 또한 갑오개혁 때 추진했던 재정기관의 탁지부로의 일원화, 재판제도의 확립 등 여러 개혁조항의 실시를 요구했다. 정부도 헌의6조를 받아들였으나, 국왕의 측근세력은 독립협회를 모함했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 주요간부의 체포와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했다. 체포를 면한 일부 간부들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항의·농성했는데, 정부는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폭력으로 저지했으며, 12월에 독립협회를 강제해산시켰다. |
한성순보-개화파는 국민계몽과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일본의 협조 하에 근대신문 발행을 도모했다. 1883년 1월 한성부에 신문국을 설치하고 창간을 준비했으나 보수세력의 반발로 중지되었다. 같은 해 8월 박문국이 설치되면서 창간 작업의 주체는 온건개화파로 바뀌었으며, 1883년 10월 30일 <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 10일에 1번씩 발행했으며, 크기는 국배판과 비슷했고 순한문을 사용했다. 관보적 성격의 내용이 우선이었으며 개화사상 고취를 위한 내용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반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성에 대한 인식은 부족했다. 독자층은 중앙·지방의 관리들과 한문 해독이 가능한 양반계층에 한정되었다. 경영난 속에 40호 이상을 발행하다가 갑신정변 때 화재로 박문국 건물이 소실됨으로써 창간 14개월 만에 폐간되었다. |
2012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23. 대한제국 수립의 현장으로 적절한 곳은?
가. 경운궁(덕수궁)
나. 환구단
다. 명동성당
라. 일본영사관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경운궁(덕수궁)-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로서, 대한민국의 사적 제124호이며 면적은 63,069㎡이다. 원래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뒤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또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1906년 대안문(大安門) 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순종 1) 순종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변경되었다. [1] 1611년 ~ 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 ~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또한 월요일에는 휴관한다. |
환구단-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황제에 오르며 근대적인 자주 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이를 하늘에 고한 곳이다. 선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 지내는 종묘,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과 함께 환구단은 조선시대 국가 의례를 거행하던 중요한 장소였다. 국왕이 신성한 곳에 제단을 쌓고 풍년을 기원한 제천의례는 오래전부터 시행되어왔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 성종 때부터 국가적으로 제도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서서 명나라가 자국의 황제만이 천자로서 천제(天祭)를 올릴 수 있다고 외압을 넣기 시작했고, 명의 눈치를 보던 조선 조정은 결국 1464년(세조 10) 제사를 마지막으로 이를 완전히 폐지하고 말았다. 그러던 것을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부활시켰다. 특히 환구단을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남별궁(南別宮) 터에 조성한 것을 보면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고종황제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고종의 노력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시청 앞 서울광장 주변에 형성된 태평로, 을지로, 소공로 역시 고종황제가 근대 도시의 꿈을 품고 덕수궁을 중심으로 조성한 방사형 도로 체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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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한말 호남지역에서 의병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던 가장 큰 이유는?
① 이 지역 군인들이 적극 도왔다.
② 개항 뒤 일제의 경제침탈이 이 곳에 집중되었다.
③ 이 곳에 포진한 일본군 병력이 약했다.
④ 이 지역 부호들이 군자금을 많이 지원하였다.
25. 을사조약 체결 과정을 잘못 설명한 것은?
① 이토 히로부미가 조약체결을 서둘렀다.
② 이완용 등 대신이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③ 일본군은 왕궁을 포위하였다.
④ 고종은 쉽게 조약을 재가하였다.
제12장 일제의 식민지배와 민족해방운동의 전개 |
제12장 요약 (학보.송찬섭교수) |
(12-1) 일제의 무단통치와 식민지 체제
1910년8월29일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고 식민통치의 최고기구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일제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며 정치활동을 탄압하고 기본권을 빼앗았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 (1910~1918)을 실시해서 식민지배의 경제적바탕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토지조사 사업으로 농민은 경작권을 잃고 불안정 해졌고 노동자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렸다.
(12-2)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운동의 가장큰원인은 일제와 조선민중 사이에 깊어진 민족모순 이었다. 1919년1월 민족대표와 학생대표가 모여3월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하였다. 민족대표들은 계획을바꾸었지만 학생과 민중들은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1운동은 전국으로 확산 되었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4월말 수그러 들었다
3·1 운동은 광범한 민중이 참가한 항일운동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결실을 맺었다.
(12-3)문화통치와 민족해방운동의 발전
일제는3·1운동에 놀라 무단통치 대신‘문화통치’를 들고나왔지만 독립운동을 더욱감시하 고 탄압했다 3·1운동 앞뒤로 세워진 여러 임시정부는 통합되어 우리나라
최초로 삼권분립에 따른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 3·1운동뒤 만주지역의 독립군부대들은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를거두었다 1919년 김원봉등은 의열단을 결성하여 조선총독부 고위관료와 친일파를 암살하고 일제의 통치와 수탈기구를 파괴하는 활동을 하였다.
(12-4) 조직운동과 대중운동의 활성화
3·1운동뒤 사회주의가 빠르게퍼져 1925년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1920년대 노동운동은 1929년 원산총파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1923년 전남무안군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 전반기 대표적농민운동이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은 전국적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20년대 중반민족 개량주의자들이‘자치론’을 주장하자 사회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격렬히 반대하며 1927년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신간회는 1931년 해소되었지만 사회주의세력과 비타협적민족주의 세력이 결성한 최초의 반일민족
통일 전선이었다.
(12-5) 일제강점기 사회 변화
일제강점기 만주나 연해주 일본 미국 멕시코 등지로 이주했던 조선사람들은 항일단체를 결성하거나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한성부를 경성부로
바꾸었고 서울을 게이조’라 부르며 식민지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모던걸’로 불린 1920년 대신 여성으로는 급진적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기독교 계열의 신여성이 있었다
2017년 워크북 12강 문제 작성자 -김추경 |
1)1910년 8월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 설치한 신민통치의 최고기구는?
① 통감부 ② 중추원 ③ 조선총독부 ④동양척식주식회사
통감부요약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자 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형식상으로 대한제국의 내각회의를 거쳐 제2차 한일협약이 통과되었으며, 제3조에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행사의 주체가 통감이라고 규정되었다.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다. 통감정치의 실시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제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에 필수적인 폭력기구를 급격히 확대·강화해 무단통치 실현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에 국권회복을 위한 저항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었으며, 대한제국 황실의 헤이그 밀사 파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자결 등이 이어졌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체결되고 완전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다. |
중추원: ①고려 시대, 왕명의 출납(出納), 숙위(宿衛), 군기(軍機) 등을 맡아보던 관청. 991(성종 10)년에 설치되었는데, 뒤에 추밀원(樞密院), 밀직사(密直司), 중대성(中臺省)으로 고쳤다. ②조선 초기, 숙위(宿衛), 군기(軍機) 등을 맡아보던 관청. 1400(정종 2)년에 삼군부로 고쳤다가, 1466(세조 12)년에는 중추부(中樞府)로 고쳤다. ③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의 어용 자문 기관. |
조선총독부요약: 초기 조선총독부는 일제가 우리나라의 내정에 관섭하던 기구인 통감부를 계승하면서 한국 소속 관청을 축소 흡수해 급격한 변화를 피하는 과도적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기관 통폐합 시 민생 발전을 고려하지 않고 주로 치안에 초점을 두었다. 신설된 총독부는 총독관방 외에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사법부의 5부를 구성하여 각 부의 장을 장관이라 하고, 각 부에 국을 두어 칙임 국장을 두었다. 부속기관으로는 취조국·철도국·통신국·임시토지조사국·전매국·인쇄국을 두었으나 압도적으로 많은 직원이 사법과 치안 등 탄압 기구에 배치되었다. 일제 육해군 대장 출신의 총독의 지휘 아래 있던 총독부는 약탈 목적의 무단통치조직으로 전체주의적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했으며, 민족문화의 말살과 동화정책을 강요했다. |
동양척식주식회사:1908년 일제가 '동양척식주식회사법'으로 한국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하여 한국내 설립한 국책회사. 일제의 한국농민 수탈의 선봉이 됨으로써 민원의 대상이었으며 현재의 서울시 중구 을지로2가 한국외환은행 자리에 있었다. |
2) 1910년대 일제가 식민지배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고 실시한 것은?
① 토지조사사업 ② 산미증식계?
③조선공업화 ④ 신사참배
토지조사사업: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식민지적 토지제도를 확립할 목적으로 실시한 대규모의 조사사업. | 내용 일제 하의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1910년 우리 나라를 완전히 식민지로 강점한 전후 식민지체제 수립을 위한 제1차적 작업으로 실시한 종합적 식민지 정책의 하나였다 |
산미증식계?:토지개량사업과 농사개량사업으로 일본의 식량문제를 조선에서 해결하려는 의도로 입안된 것이다. 1920~25년 '산미증식계획', 1926~34년 '산미증식갱신계획', 1940~45년 '조선증미계획' 등 3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산미증식계획은 1920년에 15년 계획으로 수립되었으나 실적이 매우 부진하자 1926년에 계획이 수정되었다. 산미증식갱신계획은 1926년에 12년 계획으로 수립되었으나 1934년에 계획이 중단되었다. 조선증미계획은 1940년에 수립된 것으로, 전 시기의 자재난과 인력난으로 이 시기의 증산실적은 거의 없었다 |
조선공업화: 요약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정책.일제는 1920년대말 불어닥친 세계공황을 만주침략을 통해 모면하려 했다. 이를 위해 '북선개척을 통해 조선의 부원을 증진한다'는 명목하에 조선 북부일대에 침략전쟁을 위한 중화학 군수공업을 건설하고, 교통망을 확장함으로써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는 조선 농촌 내 과잉인구의 혁명 세력화를 방지하고 동시에 조선의 저렴한 노동력을 식민지 군수산업과 원료자원의 수탈에 이용함으로써 막대한 식민지 초과이윤을 착취하고 이로써 식민지 지배체제의 재편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일제는 조선 북부 일대에 경금속공장, 화학공장, 군수품생산과 관련된 공장 등을 급속히 신설, 확장시켜갔다. 이와 더불어 화학군수공업 건설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북부지역의 교통망 정비·확충, 산림자원·지하자원·수력자원의 개발 등에 주력했다. |
신사참배:일제 강점기, 일제가 우리의 종교와 사상, 자유를 억압하기 위하여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참배할 것을 강요하던 일.신사 참배를 반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갔다. 일제는 종교계에도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압력을 행사했다. |
3) 3.1운동으로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광범한 민중이 참가한 항일운동 이었다.
②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다
③ 노동자들은 운동에 참가하지 않했다
④ 나라 밖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 3.1운동의 결과로써 상하이에 수립된 것은?
① 경학사 ② 신흥강습소
③ 신한청년당 ④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학사요약: 1907년 조직된 신민회 임원들은 중국 동북지역 일대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삼고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한편, 이회영을 서간도로 파견하여 장소를 물색했다. 그리하여 1910년말부터 1911년초에 걸쳐 가족 단위로 이주하여 1911년 4월 경학사를 설립했다. 경학사는 식산흥업·교육구국론에 입각하여 생산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라 농업개발과 군사교육, 기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부설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도 설치했다. 그러나 경학사는 흉작으로 인한 운영난과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1914년 해산되었다. 그후 경학사의 조직경험은 중국 동북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신흥강습소는 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어 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
신흥강습소:1911년부터 1920년까지 만주에서 운영된 대표적인 한인독립군 양성기관. 신민회의 임원이었던 이회영, 이상룡, 이동녕 등이 중국 만주로 이주해 1911년 자치단체 경학사를 조직하고 함께 세운 무관 학교이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경학사가 해체되면서 다른 조직인 부민단(扶民團)과 함께 장소를 옮기고 명칭을 신흥중학으로 개칭해 이어갔다. 3·1운동 이후 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들어오고 일본육사 출신의 이청천·김경천 등이 망명해 신흥학교에 참가하면서 성장했다. 1919년 5월에는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했고 부민단이 개편되어 조직된 한족회(韓族會) 산하의 학교로 발전했다. 신흥강습소에서는 일반 중학과정인 본과 외에 무관양성을 위한 속성과를 두었으며, 신흥중학교에서는 4년제 본과와 6개월 과정을 두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1920년 폐교 시까지 졸업생 2,000여 명을 배출하며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
신한청년당요약: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라 국제질서의 재편을 앞두고 이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 1918년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였고, 김규식, 서병호, 여운형 등이 주도했다. 신한청년당의 결성목적은 대한민국 독립의 완성, 민족의 실력양성으로 전 인류에 기여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해 12월 ‘조선독립에 관한 진정서’라는 독립청원서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다음 해 1월에는 파리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12월 1일에는 기관지 〈신한청년〉을 창간했다. 1923년 6월 이후 해체되었다. 해체의 직접적인 이유는 여운형을 비롯한 핵심세력의 일부가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영어: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 1948년)는 1919년 3월 1일 경성(京城)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 13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망명정부이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각지의 임시정부들을 통합하여 중국 상해에서 단일 정부를 수립하였다. 1919년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 임시정부 하에서 독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지원하였고, 중국 국민당, 소련, 프랑스 등으로부터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전문과 1987년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계승 의지가 수록되었다. |
5)1920년대 일제의 문화 통치에 대해 잘못된 것은?
① 조선인에게 언론 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였다.
② 보통경찰제도를 헌병경찰제도롤 바꾸었다
③ 집회는 경찰의 허가를 받아 할수 있었다
④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유력한 조선인을 포섭하려 하였다
6) 1920년 만주 독립군의 활동을 맞게 묶은 것은?
가,봉오동전투 나, 청산리 대첩 다,경신참변 라, 자유시 참변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가
봉오동전투: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이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였다.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독립군 2명이 전사하고 재류동포 9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이화일(李化日) 소대장의 교묘한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
청산리대첩: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이와 같이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그 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해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 |
경신 참변: 일제는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있던 일본군까지 합류시킨 대부대를 간도 일대에 투입시켜 독립군을 소탕할 음모를 꾸몄다. 그 후 일제는 독립군 토벌을 빌미로 무고한 한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3·1운동 직후 만주에는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과 무장 독립군부대가 편성됐으며, 여러 번 국내로 잠입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일제는 1920년 10월 중국 마적을 사주해 간도의 일본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대거 만주로 출병시켰다. 독립군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산속 등으로 이동하자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감행했다.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한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으며, 한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현재 확인된 학살피해자만 해도 3,469명에 이른다 |
자유시참변: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은 1921년 6월 27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이만, 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소련군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다른 말로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자유시에 집결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독립군 100명이 전사하였으며, 약 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동만주, 북만주 지역 대한 독립군 세력이 위축되고, 독립군 3부를 기반으로 한 국민부가 민족주의 무장 투쟁을 주도하게 된다. 이 사건은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
7)1926녀 조선공산당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함께 준비하여 일으킨 항일운동은?
① 물산장려운동 ② 민립대학 설립운동
③ 6.10 만세운동 ④ 자치운동
물산장려운동:3·1 운동 이후 경성 방직과 같은 한국인 기업이 설립되어 미약하게나마 한국인 자본가 계층이 형성되었다. 1920년대 들어 회사령이 폐지되자 일본 자본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진출하였으며, 1923년 일본과 조선 사이에 관세가 대부분 철폐되자 일본 상품이 대량으로 밀려들어 왔다. 한국인 자본가와 언론은 민족의 경제적 실력 양성을 주장하면서, 한국인 자본의 보호와 육성을 대중에게 호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 조만식 등은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발기하고, 자작자급을 위한 운동을 펼칠 것을 제창하였다. 이어 1923년 서울에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되면서 물산 장려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졌다. 지방에서도 자작회, 토산 장려회 등의 단체들이 조직되어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등의 구호를 앞세우며 토산품 애용, 근검저축, 금주·단연 등을 실천하자고 주장하였다 |
민립대학설립운동요약: 1920년대 초 우리의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일어난 일제하의 문화운동. |
6.10 만세운동: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잇는 전국적·전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경성부에는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켰다. 주동자는 사회주의계의 권오설, 김단야, 이지탁, 인쇄직공 민영식, 이민재, 연희전문의 이병립, 박하균, 중앙고보의 이광호, 경성대학의 이천진, 천도교의 박내원, 권동진 등으로, 이들은 10만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하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
자치운동: 실력 양성 운동 이후 분화된 민족주의 계열에서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에 타협하여 자치권과 참정권을 얻어내자는 운동을 벌임. 자치 운동은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고 조선 사람들의 자치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벌인 운동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0년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힘을 기르고 독립을 쟁취하자는 실력 양성 운동이 민족주의 진영에서 전개되었다. 이들은 경제, 교육 등의 측면에서 근대적인 발전과 계몽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실력 양성 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민족주의 계열도 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로 분화되었다.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경제적인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일제와의 타협이 불가피하며, 일제의 지배 하에서 참정권, 자치권 같은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광수, 최린, 김성수 등이 있다. 이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거세게 비판하였으며,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이 두 세력이 힘을 합쳐 신간회를 결성하였다(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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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820년대의 농민운동으로 맞는 것은?
①원산총파업 ②암태도 소작쟁의
③광주학생운동 ④형평운동
원산총파업:요약 1928년 원산의 석유회사에서 일본인 현장감독이 조선인 노동자 구타사건이 발생한 뒤 1929년 부두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이후 원산의 모든 산업, 운수기관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투쟁으로 역량이 크게 약화되고 일제의 탄압으로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파업지도부를 잃은 반면 투항적 자세를 지닌 노동자들이 나타나면서 4개월간 계속된 총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원산총파업은 한국의 노동운동사상 처음으로 1개 도시 전체를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뜨려 일제에 가장 큰 타격을 가한 파업투쟁이었으며, 또한 노동자들의 연대성과 완강성을 잘 보여준 파업이었다. 이 사건은 1930년대 이후 노동운동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으로 전환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암태도소작쟁의:요약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인들이 벌인 소작농민항쟁. 일제강점기 때 지주가 소작인을 구타하여 크게 사회문제가 되었던 암태도사건을 실은 신문기사. 동아일보 1932년 4월 6일자. |
광주학생운동: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 투쟁은 사회, 청년 단체들의 적극적인 참여 아래 전 민족적인 독립운동으로 전개됐고, 간도와 일본을 비롯해 국외로도 확대됐다. 이것이 학생운동사상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광주 학생운동으로,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다. ‘광주’는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광주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며, ‘학생’은 학생들이 이 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을 뜻한다 |
형평운동: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白丁)의 신분적·민족적 인권해방운동(한국사).] 백정이라는 칭호는 고려시대에는 평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살업(屠殺業)을 전문으로 하는 천민계층을 뜻하게 되었다.
백정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해방의안(解放議案)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백정들은 기와집에서 살거나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고, 외출할 때는 상투를 틀지 않은 채 평량자(平凉子:패랭이)를 써야 했으며, 장례 때도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학교나 교회에서도 함께 수업을 받거나 예배를 볼 수 없었고, 상민들과 떨어져 집단으로 거주했다.
더욱이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 질서를 온존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도 차별을 받았다. 즉 민적(民籍)에 올릴 때 이름 앞에 붉은 점 등으로 표시하거나 도한(屠漢)으로 기재했을 뿐만 아니라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도 반드시 신분을 표시하도록 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은 조직적인 사회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과 장지필(張志弼)과 같은 백정 출신 지식인, 이학찬(李學贊)과 같은 경제력을 갖고 있던 백정은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상호 친목을 도모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는 목적하에 형평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발기총회에서 결정된 사칙을 통해 진주의 본사를 중심으로 각 도에 지사를, 각 군에 분사를 두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성할 것을 명시했다. 이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에 지사와 분사가 활발히 설치되자, 1924년 2월 전국의 지사·분사 대표 300여 명이 부산에 모여 '형평사전조선임시총회'를 개최했다. 이때 전라도·충청도·강원도를 기반으로 한 장지필 등 혁신파는 본사를 서울(경성)로 이전할 것을 주장했고,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강상호·신현수 등 보수파는 진주 본사를 고수할 것을 주장해 내부 대립이 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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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927년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결성한 반일민족협동전선은?
① 조선노동공제회 ② 조선형평사
③ 연정회 ④ 신간회
조선노동공제회: 1920년 서울에서 조직된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운동단체 조선노동공제회는 일제 치하에서 생존권을 위협받던 노동자·농민들이 권리 신장과 함께 일제 지배에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한 민족 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닌 노동 단체이다 |
조선형평사요약: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이라는 신분적 차별이 법률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실생활에서는 차별이 여전했다. 1922년 일본 관서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3년 진주의 이학찬·강상호·신현수·천석구·장지필 등을 간부로 하여 조선형평사가 창립되었다. 창립 목적을 계급 타파, 공평한 사회 건설,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향상, 사회참여 의의의 앙양, 동지의 화목·협력·상조 등에 두고 백정이라는 기록을 호적에서 삭제할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후 서울로 본거지를 옮기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조직이 확대되면서 노선에 대한 갈등이 불거져 신파와 구파로 갈라졌다. 1931년 표면적으로는 구파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활동이 침체되었고, 1937년 일제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
연정회요약:1924년 〈동아일보〉 계열의 김성수·송진우·조만식·서상일·안재홍 등이 모여 민족운동의 노선을 자치운동으로 전환시키려는 문제를 논의했는데 이는 독립의 전단계로써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실은 일제가 독립운동의 분열과 변질을 위해 이를 선동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민중의 반응을 보기 위해 〈동아일보〉에 이광수의 논설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자 반발이 심했으므로 결국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의 결성계획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 사이토와 정치고문 아베가 자치론의 부활을 획책했다. 이후 자치론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거의 결성단계에 도달했으나 김준연과 안재홍이 아베가 이에 관계되어 있음을 알고 이를 조선민흥회에 통보했다. 이에 따라 참가자들이 이탈함으로써 연정회 결성은 무산되었다. |
신간회: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이다. 1920년대∼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두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만∼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
10) 일제감정기 사회 변화로 맞지 않은 것은?
① 한성부는 경성부로 바뀌고 위상이 낮아졌다
②서울은 전통적이고 상징적인 건물들이 잘보존되었다
③경성은 남촌과 북촌이라는 이중구조를 띠게 되었다
④신여성이 나타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남촌과 북촌 :조선시대에 청계천 북쪽 일대를 북촌, 그 남쪽 일대를 남촌으로 불렀다. 북촌이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데 비해,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남촌은 양반의 자손이긴 하나 몰락한 사람들이거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남산골 샌님’, ‘남산골 딸깍발이’라 놀림을 받았던 불우한 선비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후에 일제강점기에는 이 남촌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어, 조선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북촌과 일본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남촌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인들이 이 남촌 지역을 왜놈들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제12장 일제의 식민지배와 민족해방운동의 발전 장별 문제 정리(2017년 개편교재에 맞춤) 국어국문학과(졸) 능소니(김선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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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목적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교재 270쪽
① 조선의 황무지 개간 ② 조선 농민의 경작권 보호
③ 식민지 농업체계 수립 ④ 조선농민의 경제적 발전
2. 3ㆍ1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학생과 지식인이 앞장섰다.
② 비밀결사나 단체가 결성되어 시위를 이끌기도 하였다.
③ 농촌에서는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하였다.
④ 노동자들은 참여를 거부하였다.
☞ 교재 273~275쪽 : ④ 3·1운동의 시위주체는 처음 학생과 종교인에서 점차 농민과 노동자 대중으로 바뀌어 갔다.
3. 3.1운동에 영향을 준 사건에 해당하는 것은? ☞ 교재 273쪽
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 나. 암태도 소작행위 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라.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4. 1927년 민족·사회주의 양 진영에서 일제와 비타협을 원칙으로 민족의 반일 역량을 총집결시킨 항일단체는? ☞ 교재 288쪽
① 신간회 ② 조선공산당 ③ 대한국민의회 ④ 북로군정서
5. 1920년대 조선인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작농이 크게 증가하였다.
② 소작료가 매우 낮아서 소작농민의 생활이 윤택했다.
③ 조선인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 수준의 임금을 받았다.
④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의 임금은 동일한 수준이었다.
☞ 교재 271쪽 : ? 자작농, 자소작농마저도 땅을 팔고 소작농으로 몰락했다. ? 소작료는 1920년대 중반 평균 7~8할이나 되었다. ? 여성 노동자는 남성 노동자보다도 훨씬 열악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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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1 |
6. 1920년대 만주지역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대표적인 전투는?
가. 봉오동 전투 나. 청산리 전투 다. 자유시 참변 라. 훈춘사건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282쪽 : 이 시기 가장 큰 전과를 올린 것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였다. 훈춘사건은 봉오동전투 이후 일본군이 행한 토벌작전이며, 자유시참변은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군이 행한 경신참변을 피해 자유시에 집결했다가 시베리아 한인부대 사이의 내분에 휘말려 겪은 참변이다.
7. 3.1운동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 교재 273~275쪽
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민족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다. 복벽주의를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라. 농민, 노동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8. 3.1운동 이후 ‘실력양성론’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 교재 279쪽
① ‘봉건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지닌 이론이었다.
② 교육진흥과 산업육성을 주장했다.
③ 시천주 사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했다.
④ 즉각 독립을 위한 무력투쟁을 주장했다.
9. 일제가 부족한 쌀을 조선에서 확보할 목적으로 시행한 것은? ☞ 교재 277~278쪽
① 화폐정리사업 ② ‘신작로’ 건설 ③ 국채보상운동 ④ 산미증식계획
10. 1920년대에 일어난 민중운동은?
① 암태도 소작쟁의 ② 3.1 만세시위
③ ‘초토화’ 작전 ④ 남한대토벌작전
☞ 교재 286쪽 :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 전반기의 대표적인 농민운동이었다. ? 3.1 만세시위는 1919년의 민중운동이다. ? ‘초토화’ 작전은 제주 4·3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이로 인해 애꿎은 민간인이 대거 학살되었다. ? 남한대토벌작전은 일제에 국권침탈에 맞선 의병, 특히 호남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이다.
11-15 |
23233 |
11. ‘신간회’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은 것은?
① 민족의 반일 역량을 총집결한 항일단체였다. ② 일제와 적극 타협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③ 단체가 아닌 개인 가입을 본위로 조직되었다. ④ 지방에는 지회를 두었다.
☞ 교재 288~289쪽 : 신간회는 일제와 비타협을 원칙으로 만들어진 항일단체였다.
12. 1910년대 헌병경찰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은 것은?
① 치안뿐만 아니라 식민지 행정상 중요한 역할을 처리했다.
② 조선인에게 벌금, 태형, 구류형 등을 즉결 처분할 수 있었다.
③ 식민 통치의 최고 실력자였다.
④ 조선인의 일상생활까지 감시하고 간섭했다.
☞ 교재 269~270쪽 : ③ 식민 통치의 최고 실력자는 조선총독이었다.
13. 1919년 3·1운동에 대한 평가로 옳은 것은? ☞ 교재 273~275쪽
가. 비밀결사 항일운동이었다. 나. 민중들이 민족으로서 각성, 결집했다. 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라. 러시아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14. 1920년 10월 김좌진과 홍범도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는? ☞ 교재 282쪽
① 경신참변 ② 훈춘사건 ③ 청산리전투 ④ 자유시참변
15. 1920년대에 만주지역에서 독립단체가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는? ☞ 교재 282쪽
가. 우금치전투 나. 황토현전투 다. 봉오동전투 라. 청산리전투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16-20 |
42422 |
16. 1929년 원산총파업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은 것은?
① 전국적 항쟁으로 발전했다. ② 일제와 자본가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③ 프랑스, 일본, 소련 노동자의 지원도 받았다. ④ 가혹한 소작료 인하 투쟁이었다.
☞ 교재 285~287쪽 : 원산총파업은 자본가에 맞선 노동자들의 총 파업이다.
17. 다음 중 신간회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국제공산당인 코민테른의 지시로 창설되었다.
② 민족의 반일 역량을 총집결한 항일단체였다.
③ 김구, 이승만 등이 결성한 한인 단체였다.
④ 입법, 행정, 사법 기관을 갖춘 일종의 ‘자치정부’였다.
☞ 교재 288~289쪽 : ? 코민테른은 신간회 해지에 영향을 미쳤다. ??번은 임정에 대한 설명이다.
18. 1920년대에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군부대가 아닌 것은?
① 북로군정서 ② 대한독립군 ③ 대한국민군 ④ 결심대
☞ 교재 282~283쪽 : 북간도와 연해주에서는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국민군, 대한군무도독부 독립군,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비단 등이 활동했다.
19. 3.1운동이 실패한 뒤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결성한 대표적인 조직이 아닌 것은?
① 한인사회당 ② 신민회 ③ 고려공산당 ④ 조선공산당
☞ 교재 284쪽 : 신민회는 1907년 2월 결성된 것으로, 민족운동과 교육운동의 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대성학교를 세우고 실력 증진 등을 목표로 했다.
20. ‘신간회’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국제공산당인 코민테른의 지시로 해체되었다. ② 민족의 반일 역량을 총집결한 항일단체였다.
③ 국내 사회주의 진영의 유력한 세력이다. ④ 일제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 교재 288~289쪽 : ? 코민테른이 신간회 해체에 영향을 미쳤으나 신간회가 해체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이다. ?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에서 힘을 합쳐 만든 것이다. ?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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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다음 중 조선총독부의 ‘동화정책’에 활용되었던 제도는?
① 조선교육령 ② 국민교육헌장 ③ 교육칙어 ④ 약법삼장
☞ 교재 269쪽 : 일제는 1911년 8월을 시작으로 총 4차에 걸친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22. 1919년 3·1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 교재 273~275쪽
① 민중이 민족해방운동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했다. ② 대한제국을 다시 세우려는 복벽운동이었다.
③ 농민들의 소작료인하 투쟁이다. ④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적 개혁이었다.
23. 1920년대 서북간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가 아닌 것은? ☞ 교재 282~283쪽
① 북로군정서 ② 조선사편수회 ③ 대한독립군 ④ 대한국민군
24. 아래 빈 칸에 들어갈 단체의 이름은? ☞ 교재 288~289쪽
이상재를 회장으로, 홍명희를 부회장으로 선출한 ( )은(는) 일제와 비타협을 원칙으로 민족의 반일 역량을 총집결한 항일 단체였다. 단체 가입이 아닌 개인 가입을 본위로 하여 서울에 본부를, 군 단위에 지회를 두었다. |
① 한국민주당 ② 향회 ③ 신간회 ④ 활빈당
제 12장 답 안 | 1-5 | 6-10 | 11-15 | 16-20 | 2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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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13 | 11241 | 23233 | 42422 | 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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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안 : 34313 11241 23233 42422 1123 |
제12장-장 별. 기말문제 (2016년-2012년) 자료출처:2학년 담당투터 문화교양과 이선아교수 클릭 http://tutor.knou.ac.kr/tutor/dtt/site/initTutrStudDtlRetrieve.do 정답과오답해석작성 : 문화교양과 김추경 |
2016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26. 일제가 부족한 쌀을 조선에서 확보할 목적으로 시행한 것은?
① 화폐정리사업 ② ‘신작로’ 건설
③ 국채보상운동 ④ 산미증식계획
① 화폐정리사업-1905년 일본이 대한 제국의 경제 침탈을 목적으로 벌인 사업.일본은 1904년 고문 정치를 목적으로 강압으로 한일협약을 맺었다. 이는 외교와 재정에 일본이 간섭하려는 목적이었으며 이어 일본은 국가 재정 전반을 담당하는 탁지부 재정고문으로 메가타를 파견했다. 메가타는 조선에서 주조, 유통되던 백동화를 환수하고 경제 침탈을 쉽게 하기 위해 일본화폐인 다이이치은행권을 조선의 법화로 발행하였다. 백동화를 환수하는 과정에서 질이 떨어지는 백동화는 적은 값으로 바꾸어 주어 조선인들의 피해가 컸다. 또 유동성 결핍, 어음 시장의 혼란, 외획의 폐지 등으로 많은 상인들이 파산했다. 화폐 정리 사업으로 일본은 사실상 대한 제국의 경제를 장악했으며 민족 경제는 몰락했다 |
② ‘신작로’ 건설(1905-1910)-본 논문은 구한말에 ‘신작로’의 건설과정을 시ㆍ공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교통체계의 급변기에 그것이 어떤 계기로, 어떤 과정으로. 어떤 양태로 진행되었는지를 역사지리학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연구의 규모는 전국 스케일로 하여, 연구시기는 통감부 시정하에 있었던 1905년부터 1910년까지로 하였다.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작로의 계획 및 건설의 목적은 군사적인 목적보다 경제적, 행정적 목적에 치중하고 있었다. 노선은 중요한 두 지점간을 연결하는 단거리 노선이 많았고, 도로를 이용한 네트워크 구성은 간과되었다 둘째, 노선형태는 한일합방 이전에 일본인들이 활동 근거지로 삼은 개항장이나 철도역과 인근의 경제적으로 관심을 가진 장소 혹은 도청소재지 등 지역중심지를 연결하는 형태를 취했다. 셋째, 간선철도가 이미 존재하던 곳에서는 철도역을, 철도가 없던 지역 즉 함경도나 전라도 등지에서는 개항장 등 항구를 기점으로 한 교통체계를 보였다. 종래 서양 연구자에 의한 교통발달모델은 항구 중심으로 내륙 진입노선이 생기고, 최종단계에서 내륙 관통노선이 형성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한반도의 경우 진입노선보다 먼저 간선철도라는 내륙관통노선이 군사목적으로 생겼기 때문에, 독특한 교통발달단계가 나타났다. 이는 동시에 기존모델을 절대시하는 시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것이기도 하며, 국가, 지역마다 발달모델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
③ 국채보상운동(1906)-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협정서를 바탕으로 대한제국에 강제적으로 차관을 들인다. 또한 대한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외교 고문을 맞아야 했다. 이에 따라 일본 고문들은 대한제국의 재정, 금융, 화폐 제도 등을 재편하여 식민 지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06년, 1,300만 원이던 대일 국채가 1년 만에 1,840만 원으로 늘어나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
④ 산미증식계획 토지개량사업과 농사개량사업으로 일본의 식량문제를 조선에서 해결하려는 의도로 입안된 것이다.① 1920~25년 '산미증식계획', ②1926~34년 '산미증식갱신계획',③ 1940~45년 '조선증미계획' 등 3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산미증식계획은 1920년에 15년 계획으로 수립되었으나 실적이 매우 부진하자 1926년에 계획이 수정되었다. 산미증식갱신계획은 1926년에 12년 계획으로 수립되었으나 1934년에 계획이 중단되었다. 조선증미계획은 1940년에 수립된 것으로, 전 시기의 자재난과 인력난으로 이 시기의 증산실적은 거의 없었다. |
27. 1920년대에 일어난 민중운동은?
① 암태도 소작쟁의 ② 3ㆍ1 만세시위 ③ ‘초토화’ 작전 ④ 남한대토벌작전
①암태도 소작쟁의-(1923년 9월,-1924.) 암태도에서 생존권에 위협을 느낀 소작인들이 1년 동안 친일 대지주를 상대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쟁의를 벌여 마침내 소작료 인하 요구를 관철시켰다. 이것이 암태도 소작 쟁의 사건이다. 일제의 식민지 농업 정책에 편승한 대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의 통치 권력에 항거한 1920년대 초반 대표적인 농민운동으로 꼽힌다 전남 무안군(현 신안군) 암태도 수곡리 출신인 지주 문재철(文在喆)은 암태도뿐만 아니라 인근 섬과 전남북 일대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문재철은 1920년대 들어 산미증식에 따른 일제의 저미가(低米價) 정책으로 수익이 줄어들자 소작료를 높여 그 손실분을 메우려 했다. 그는 특히 예상 수확량에 따라 소작료를 약정하는 집조제(執租制) 방식을 적용하여 자의적으로 70~80퍼센트의 소작료를 암태도 소작인들에게 책정했다. 중략- 이를 계기로 근처 도초도와 자은도, 지도 등 서해안 섬 지역으로 소작 쟁의가 확산되고, 전국적으로도 소작 쟁의 건수가 급증했다. 이처럼 대지주의 수탈과 일제의 식민지 억압에 조직적, 체계적으로 대항한 암태도 소작 쟁의는 1920년대 항일 농민운동 발전 과정에서 결정적인 분기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
②3ㆍ1만세시위(1919년 3월 1일)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
③‘초토화’ 작전-매수대상기업이 취하는 방어전략의 하나로서 매수기업이 가장 큰 매력을 느끼는 사업부문, 자회사 등(즉 왕관보석)을 매각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기업매수가 일어나면 모든 부채를 즉각 상환하도록 하는 내용을 채무계약(회사채계약 등)에 포함시켜 두는 것도 초토화전략의 하나로 이해되기도 한다. |
④남한대토벌작전(1909.9.1.-10.30)-남한 대토벌 작전(南韓大討伐作戰)이란, 일본 제국이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약 2달간에 걸쳐서 대한제국내 전라남도와 그 외곽지대에서 저항을 했던 항일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세운 토벌작전이다 |
28. ‘신간회’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은 것은?
① 민족의 반일 역량을 총집결한 항일단체였다.
② 일제와 적극 타협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③ 단체가 아닌 개인 가입을 본위로 조직되었다.
④ 지방에는 지회를 두었다.
2015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30. 3ㆍ1운동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민족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다. 복벽주의를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라. 농민, 노동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31. 3ㆍ1운동 이후 ‘실력양성론’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봉건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지닌 이론이었다.
② 교육진흥과 산업육성을 주장했다.
③ 시천주 사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했다.
④ 즉각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주장했다
실력양성론實力養成論 -일본 제국주의 지배하의 한국사회에서 타협적 민족주의자들(민족주의 우파)이 주창한 민족운동 방략의 하나 |
2014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28. 1920년대 조선인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작농이 크게 증가하였다.
② 소작료가 매우 낮아서 소작농민의 생활이 윤택하였다.
③ 조선인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 수준의 임금을 받았다.
④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의 임금은 동일한 수준이었다.
29. 1920년대 만주지역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대표적인 전투는?
가. 봉오동 전투
나. 청산리 전투
다. 자유시 참변
라. 훈춘사건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가.봉오동 전투.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였다.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3974 |
나.청산리 전투-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 또는 청산리 대첩(靑山里大捷)은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羅仲昭), 서일,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만주 지린 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다.
삼둔자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연패한 일본군은 중국의 영토를 불법으로 침략했다는 비난을 만회하고자 훈춘 사건을 날조하고, 이를 계기로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하게 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을 크게 대파하게 된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제가 1920년 초부터 계획한 만주 내 한인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화 계획을 실패로 만들었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에서의 대승을 계기로 일본은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한인 독립군들은 러시아로 일부 건너가는 등 만주 독립군벌은 해체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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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은 1921년 6월 27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이만, 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소련군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다른 말로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9C%A0%EC%8B%9C_%EC%B0%B8%EB%B3%80 |
훈춘사건-일제가 마적단을 매수해서 훈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한 뒤에 이를 계기로 만주의 한국인을 학살한 사건.
'간도사건'이라고도 한다. 일제가 간도지역의 조선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간도출병(間島出兵)의 구실이 되었다. 이후 간도지역의 독립운동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간도는 일제의 법이 직접 미치지 않는 곳으로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온 독립지사들의 주된 활동무대였다. 특히 간도지역의 독립운동은 강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해서 무장투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에 일제는 중국군을 동원한 조선독립군 토벌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고, 그러자 일제가 중국영토인 간도에 직접 출병한다는 '대토벌'계획을 세웠다. 이 대토벌의 구실로 공작된 것이 '훈춘사건'이었다.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 일본군에게 매수된 장강호(長江好)를 두목으로 하는 마적단이 훈춘을 습격했다. 마적단은 상가를 약탈하고 훈춘의 일본영사관 분관에 방화한 뒤 오전 8시에 퇴각했다. 일본측의 피해는 사망 13명, 중상 11명, 경상 20여 명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재만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즉각 군대와 경찰을 출동시켰다.
그해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계속되는 토벌로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되고, 건물과 곡물 등에 커다란 피해가 발생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상실되는 등 간도지역의 조선인 독립운동이 크게 약화되었다. |
2013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29. 3.1운동에 영향을 준 사건에 해당하는 것은?
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
나. 암태도 소작쟁의
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라.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다.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오늘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민족 자결주의란 각 나라는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전쟁에서 이긴 나라와 진 나라들이 모여 보상 문제 등을 놓고 의논한 뒤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습니다.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4개 항목의 평화 원칙을 발표했는데,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으로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습니다. 민족자결주의란, 한 민족이 독립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고, 또 그 민족은 독립적은 정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 입니다. 당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 나라에서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독립으 꿈을 더욱 강하게 품었습니다. 결국 1919년 모든 백성이 독립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3.1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독립 요구를 귀담아 듣는 강대국은 하나도 없었습니다.사실 윌슨 주장한 민족자결주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식민지를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에서 이긴 연합군이 식민지로 삼고 있는 나라에는 전혀 적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였습니다. |
동경유학생들의 ‘2 ? 8 독립선언’ 오는 2월 8일은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가 동경(東京)에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발족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93년 전의 일이다. 우리는 이를 ‘2 ? 8 독립선언’이라 이름하였다.
敵都에서 펼친 大韓靑年들의 氣槪 젊은 피, 끓는 가슴! 우리의 젊은 동경 유학생들은 모두 선구자적(先驅者的)인 애국 ? 애족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의 「평화안 14개조(The Fourteen Points)」에 담고 있는 약소민족의 해방을 약속하는 ‘민족자결원칙’(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은 당시 동경 유학생들에게 암흑에서 광명의 불빛을 보게 하는 기쁨이었다.
조국애(祖國愛)에 불타고 있던 유학생들은 이 민족자결원칙을 우리 조국광복의 기회로 삼았다. 영자신문「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에 보도된 “미국에 거주하는 이승만 ? 민찬호 ? 정한경 3인이 한국의 민족대표로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기사는 유학생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 기사를 접한 유학생들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입각한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자신들이 앞장 서서 투쟁하여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그들은 이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1919년 1월 8일, 조선유학생학우회는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최팔용(崔八鏞) ? 전영택(田榮澤) 등 학생대표 10명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광수(李光洙)로 하여금 ‘조선청년독립단 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케 하였다.
1919년 2월 8일! 긴장과 흥분 속에서 그날이 밝았다. 오후 2시 정각,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발족대회의 막이 올랐다. 대회장에는 입추의 여지 없이 600여명의 일본 유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개회가 선언되었다. 여기서 최팔용이 역사적인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백관수(白寬洙)가 감격과 흥분에 찬 목소리로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리고, 김도연(金度演)의 결의문 낭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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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항의 요구가 실패될 때에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의 혈전(血戰)을 선포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慘禍)는 우리 민족이 그 책(責)에 임(任)하지 않는다”는 결의문 낭독이 끝나자 침묵 속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남녀 600여명의 유학생들은 우래같은 박수로 화답하였다. 그리고, 일본 국회에 보낼 한국독립청원서(韓國獨立請願書)를 만장일치로 가결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하고, 흥분을 참지 못해 울부짖기도 하였다. 나라 잃은 설움이 붇바쳐 올랐으리라. |
이 날의 ‘2 ? 8 독립선언’은 일본의 수도인 동경, 적도(敵都) 한 복판에서 개최된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선언은 한국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고 있으며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민족임을 강조하고,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의 당위성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우리 민족의 기개(氣槪)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얼마나 통쾌하고 자랑스러운가. ‘2 ? 8 독립선언’! 우리 젊은 유학생들의 철두철미한 민족주의(民族主義) 정신에 입각한 참으로 비장한 결의였다. 패기와 열정,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
30. 1927년 민족? 사회주의 양 진영에서 일제와 비타협을 원칙으로 민족의 반일 역량을 총집결시킨 항일단체는?
① 신간회
② 조선공산당
③ 대한국민의회
④ 북로군정서
①신간회 -·1운동 이후 일제는 일제지배하에서 자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 자치운동을 추진했다. 이에 이상재, 권동진 등은 '비타협적 민족전선의 수립'을 제창하면서 자치운동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그 결과 1927년 2월 15일 기독교청년회(YMCA)회관에서 신간회 창립대회가 거행되었다. 회장에 이상재를 선출했으며, 창립 후 각지의 독립운동가·민중운동가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신간회의 각 지회는 대중의 의식개발에 노력했고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지정책 반대운동을 했으나 신간회 본부는 일제의 탄압과 지도력의 미비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가 1929년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대대적인 반일시위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민중대회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집행부의 다수가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다. 이후 등장한 김병로 체제는 일제와의 직접적 충돌을 가급적 피하려 했고 이런 온건노선에 사회주의자들이 반발하여 결국 1931년 5월 15일 신간회 전국대회에서 해소가 결의되었다. |
②조선공산당- 1925년 4월 25일 국내 공산주의 서클이었던 화요회 등 구성원 19명은 서울에서 조선 공산당을 창당하고, 국제 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국제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의 당면과제를 조선의 완전독립,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실시 등으로 정하고,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기치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고, 신간회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4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는 와중에서 제3인터내셔널은 조선 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하고, 당 재건의 지침을 내림으로써 제1차 조선 공산당은 1928년 12월 7일자로 막을 내렸다. 조선공산당은 당초 조직구성에서 인텔리겐치아와 소부르주아지가 중심이었던 한계로 인해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정당으로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파벌간의 대립과 갈등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
③대한국민의회- 1917년 5월 러시아 2월혁명 후 러시아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조직했다. 민족을 기초로 하는 단일 중앙조직이 성립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되는 등 세계정세가 변모하자 총회는 1919년 3월 러시아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했다. 대한국민의회는 세계민족자결주의에 기인해 한국민족의 정당한 자주독립을 강력히 주장했고, 일본의 강압으로 성립한 한일합병조약을 부정하면서 일본의 통치 철폐를 주장했다. 그러나 상하이와 한성에 임시정부가 결성되자 세 단체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었고,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8월 해산을 결의했다. 1920년 문창범 등이 재건했으나 헤이룽 주로 근거지를 옮기고 세력이 약화되면서 결국 해체되었다. |
④북로군정서-북간도에 거주하던 민족주의자들은 1919년 대한군정회를 조직해 3개 대대에 약 1,100여 명의 병력을 갖추었다.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이미 독립군부대를 편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구별해 북로군정서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간부들은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총사령관 김좌진 등이다. 1920년 김좌진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전투 등 5차례의 전투를 단독으로 수행했으며, 어랑촌 전투 등 2차례의 전투를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와 공동으로 수행했다. 1921년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일본군을 피해 모인 여러 독립군단체들을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으나 1921년 자유시사변으로 해체되었다- |
2012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26.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목적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조선의 황무지 개간
② 조선 농민의 경작권 보호
③ 식민지 농업체계 수립
④ 조선농민의 경제적 발전
① 조선의 황무지 개간-1905년과 1906년에 경기도 인천군 주안면 주안포와 부평군 가자포의 황무지 개간권을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통감부 사이에 발생한 분쟁 |
27. 3.1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학생과 지식인이 앞장섰다.
② 비밀결사나 단체가 결성되어 시위를 이끌기도 하였다.
③ 농촌에서는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하였다.
④ 노동자들은 참여를 거부하였다
28. 일제 강점기 국외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던 기관은?
① 신흥무관학교
② 대한독립의군부
③ 대한광복회
④ 신한청년단
① 신흥무관학교요약 1910년 신민회의 이회영, 이시영 등이 남만주에 신흥 강습소를 조직하였는데 신흥 중학으로 개칭하였다가 1919년 신흥 무관 학교로 개칭했다. 이후 류허 현 고산자에 2년제 고등 군사반을 두어 고급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분교를 두어 초등 군사반을 편성하여 훈련을 시켰다. 1920년 폐교 시까지 졸업생 2000여 명을 배출하여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
② 대한독립의군부-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는 일제강점기 1912년에 임병찬이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만든 비밀결사단체 조직이다. 전국 의병장과 유생들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주로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경기도, 강원도 지역까지 그 활동영역을 넓혀갔었다. 이 단체는 대한제국 때의 왕정 복고주의를 추구하였으며,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벌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임병찬은 한때 조선총독부관리에게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통고하고 '국권반환요구서'를 수차례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립의군부는 일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면서 임병찬을 비롯한 지도부가 구속되는 사태로 일단락되었다. 독립의군부는 비밀 결사의 형태를 띠었지만, 지도부나 활동 방향 등을 보면 전형적인 의병운동에 해당한다. 즉, 독립의군부는 의병운동의 장점과 한계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8F%85%EB%A6%BD%EC%9D%98%EA%B5%B0%EB%B6%80 |
③ 대한광복회- 경상북도 풍기에 있었던 ‘광복단’과 경상북도 대구에 있었던 ‘조선국권회복단’이 뜻을 합해 1915년 조직한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 총사령은 박상진이다. 1916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만주에 기지를 두기도 했다. 이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군 양성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 구입에 노력했다. 전국적으로 일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밀·폭동·암살·명령이라는 행동강령 아래 일본인 광산을 습격하거나 친일 지주를 처단했다. 구성원으로는 의병출신자가 많았으며, 신교육을 받은 인사들과 구체제의 한학 교사, 양반과 상민이 함께 참여했다. 근대공화정치를 지향했으며, 다른 독립운동단체와 달리 지역성을 극복했다. 1918년 조직이 발각되어 박상진 등은 사형을 당했고 조직은 해체되었다. |
④ 신한청년단-일명 신한청년당이라고도 한다.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은 1918년 8월 중국 상하이에서 창립[1] 되어 1919년 3.1 운동 전후에 크게 활약한 한인 청년독립운동단체이다.[2][3] 당수는 여운형, 6인의 발기인은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이었으며, 그 밖에도 1919년 4월에 서병호, 김구, 이광수, 신규식[4] 등 신한청년당에 가담해 활동하였다.[5]
당의 강령은 대한독립·사회개량·세계대동 세 가지였다.[6] 1918년 12월 독립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며, 1919년 1월에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6] 또한 도쿄, 연해주, 미주와도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7] 이 작은 단체인 신한청년당의 활약으로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한국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3·1운동을 일으키는 진원이 되었다.[8][9]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1919년 4월 10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축을 이루었다.[9]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선 이후 1922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진해산 명령에 의해 해체되었다 1)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33536 2)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D%95%9C%EC%B2%AD%EB%85%84%EB%8B%B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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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대공황과 전시체제 민족해방운동과 사회변화 |
제13장 요약 (학보.송찬섭교수) |
(13-1) 세계공황과 일제의 지배 정책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을 계기로 군수와 중화학 공업을 확장했고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에 공황의 여파가 미치자 일제는 농촌진흥 운동을
펼쳐 식민지 배를 안정시키고 혁명적농민조합 운동을 막으려 하였다. 일제의조선공업화’는 일본 독점 자본이 식민지 경제를 지배하여 조선민중을 더욱착취하는 것이었다
(13-2) 공황기’민족해방 운동의 재편
노동자와 농민은 공황의 여파속에서도 생존권을 지키려고 파업투쟁과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하였다
1930년대 들어 종교단체와 언론기관은 농촌계몽운동에 나서『조선일보』는 한글 보급 운동을『동아일보』는 문맹 퇴치운동을 하였다.
(13-3) 중일 전쟁뒤 일제지배 정책과 민족해방 운동의 새로운 모색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일 제는 황국 신민화 정책으로‘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일본어를 강요하였다. 일제는 항복할때까지 20만명의 조선청년을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1백만명이상의 조선인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했고 조선여성을‘위안부’로 강제 동원하였다.1944년 8월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건국동맹을 만들어 나라안팎의 민족해방 운동세력과 힘을 합치려고 하였다.
(13-4) 1930년대 무장 독립 전쟁
만주사변이후 독립군 활동은 더욱 어려워졌다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은 중국인 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했다가 한국독립군은 대한민국임시 정부에 합류하였다 만주의사 회주의 계열무장독립군은 동북항일연군의 한부대가 되어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8년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집권 정당의 성격을띤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했고 1941년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한국광복군은 국내진공을 준비했으나 일제패망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13-5) 전시체제속의 삶의 변화
중일전쟁이후 전시체제 아래서 조선은 병영처럼 되었다 일제는 옷차림마저 통제하였다 학교교련은 갈수록 강화되어 태평양전쟁이 일어난뒤 학교는 전시병력을 보충하는
“청년훈련소”가 되었으며 여학교에도 군사문화를 깊숙이 침투시켰다
2017년 워크북 13강 문제 작성자 -김추경 |
1)일제가 세계 경제공황을 극복하려고 일으킨 사건이 아닌 것은?
①만주사변 ②중일전쟁 ③태평양전쟁 ④ 남한대토벌
만주사변: 만주 사변(滿洲事變, Manchurian Incident, Mukden Incident, 9·18 사변)은 일본 제국이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만철 폭파 사건)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을 말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1918) 이후, 일본이 지원하는 중국의 군벌 봉천파(장쭤린)는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밀리기 시작하여 일본 본국 정부는 장쭤린에게 퇴각을 권고했고, 만주에서 그를 보호하려 하였다.(1927) 일본 정부의 시각에 반발해, 관동군의 일부 참모들이 모의하여 장쭤린을 암살(1928)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관동군과 봉천파의 협조는 종결되고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국민당 정부에 합류(1929)하였다. 국민당 정부는 반일 공세를 전개하였고, 세계 경제 대공황(1929)과 겹쳐 만주에서 일본의 이권(利權)이 타격을 받았다. 일본이 이러한 위기를 타파하고자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등이 터져 나와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때, 관동군은 다시 한번 계략을 꾸며 자작극인 류타오후 사건(1931년 9월)을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은 1932년 1월까지 동삼성(東三省) 전역을 점령, 3월에는 괴뢰(傀儡)정권으로서 만주국을 성립시켰다. [1]이러한 일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국제연맹은 1933년 2월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여 일본의 철병(撤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1] 만주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전쟁의 시작이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서곡(序曲)을 이루는 것이었다. |
중일전쟁:중일 전쟁(中日戰爭)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전쟁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 항일 전쟁(중국어 간체: 中?抗日??, 정체: 中國抗日戰爭, 병음: Zh?nggu? K?ngr? Zh?nzh?ng), 일본에서는 일중 전쟁(일본어: 日中?? にっちゅうせんそう)혹은 지나 사변, 서양에서는 제2차 중일 전쟁(Second Sino-Japanese War)[2] 이라고 부른다. 중일 전쟁은 20세기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3]
1931년 이후로 두 나라 사이에 간헐적으로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7년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과 함께 1945년 9월 2일 종료되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였으며, 원료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주의는 전쟁을 중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1937년 이전에는 양쪽이 다양한 이유로 소규모, 국지적 전투를 벌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7년의 루거우 다리 사건(盧溝橋事件, 노구교 사건)으로 두 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본에 맞섰으나, 진주만 공격 후 중일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4년 즈음에 일본은 이른바 '대륙타통작전'을 개시하면서 반격을 꾀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가 연합군에게 발표한 무조건 항복 선언과 같은 해 9월 2일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을 끝으로 중일전쟁 역시 종결되었다. |
태평양전쟁:요약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를 강탈하여 태평양의 지배세력이 되고자 했다. 태평양 전쟁은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 해군 기지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미국은 12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초반에는 일본이 기선을 잡았으나 미드웨이 해전을 전환점으로 대세가 기울어갔다. 1945년 미국은 오키나와 섬을 점령했으며, 도쿄에 대한 야간 공습을 시작으로 일본의 대도시를 공습했다.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각각 투하했다. 1주일 뒤 일본 왕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항복문서는 1945년 9월 2일 조인되었다. 1945년 9월 9일 일본은 중국에 대해서도 별도의 절차를 거쳐 항복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
남한대토벌: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달에 걸쳐 진행된 전라남도와 그 외곽지대의 반일의병전쟁에 대한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 1907년 군대해산으로 거세게 타오른 제3단계 의병전쟁이 가장 격렬한 곳은 전라남도였다. 이에 일제는 2,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이 지역 의병을 진압했다.
제1단계 작전은 남원을 기점으로 고흥·광주·영광으로 이어지는 지대, 제2단계는 고흥·광주·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대, 제3단계는 도서지방으로 탈출한 의병을 섬멸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한 초토화 작전이었다. 양민과 민가까지 살육·방화·약탈함으로써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했다. 의병장만도 103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전해산 등 23명은 체포되어 형장에서 순국했다. 이때 일본군에 잡힌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보성·낙안·순천을 경유하는 광양·하동까지의 도로작업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라고 했다. 이후 의병들은 만주로 옮겨가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
2) 1930년대 일제가 만주 진출의 토대를 만들려고 추진한 정책은?
①조선회사령 실시 ② 조산공업화 정책
③언론 출판 자유 허용 ④ 토지 조사사업
조선회사령 실시:조선을 강점한 1910년 이후의 10년간,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한반도 전역을 전율(戰慄)의 상태에 두면서 한반도 경제의 제국주의적 재편작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이 작업에는 두 가지 큰 시책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인 토지조사사업은 농토의 약탈과 농민수탈의 농업정책을, 다른 하나인 이 「회사령」은 일제식민지 상공업정책을 집약하고 대표하였다 |
조선공업화정책:일제는 1920년대말 불어닥친 세계공황을 만주침략을 통해 모면하려 했다. 이를 위해 '북선개척을 통해 조선의 부원을 증진한다'는 명목하에 조선 북부일대에 침략전쟁을 위한 중화학 군수공업을 건설하고, 교통망을 확장함으로써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는 조선 농촌 내 과잉인구의 혁명 세력화를 방지하고 동시에 조선의 저렴한 노동력을 식민지 군수산업과 원료자원의 수탈에 이용함으로써 막대한 식민지 초과이윤을 착취하고 이로써 식민지 지배체제의 재편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일제는 조선 북부 일대에 경금속공장, 화학공장, 군수품생산과 관련된 공장 등을 급속히 신설, 확장시켜갔다. 이와 더불어 화학군수공업 건설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북부지역의 교통망 정비·확충, 산림자원·지하자원·수력자원의 개발 등에 주력했다. |
토지 조사사업-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식민지적 토지제도를 확립할 목적으로 실시한 대규모의 조사사업 |
3) 1930년대 일제의 억압 정책으로 볼 수 없는 것은?
①헌병경찰제실시 ② 경무관제도 실시
③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시행 ④ 조선 사상범예방구금령 시행
헌병 경찰제실시 -1910년 대한 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제가 실시한 것으로 헌병이 경찰 업무까지 담당하도록 하여 무단 통치를 뒷받침함. |
경무관제도 실시:일제는 1930년대 초반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를 검거하는 데 효과를 본 '경무관' 제도를 조선에도 실시했다. 이것은 경무관이 사상운동 탄압을 전문으로 맡아 지방 경찰과 중앙의 보안과를 밀접하게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제경찰이 통일적인 공조체제를 마련한 것은 조선 곳곳에서 혁명적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사회주의운동도 생산현장과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1932년 '사상결찰망'을 크게 늘려 사회주의운동이 노동자, 대중과 결합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 |
4) 1930년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내용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소작료 인하운동 ②신간회건설운동
③ 부역동원 반대운동 ④노동절투쟁
소작료 인하운동:농민 운동 배경:토지 조사 사업·산미 증식 계획 등 일제의 경제 수탈과 지주의 과도한 수탈 농민조직:농민 조합을 기반으로 조선 농민 총동맹 결성(1927), 조직적인 농민 운동 전개 소작쟁의의성격:1920년대에는 주로 소작권 이동과 높은 소작료 반대 운동 → 점차 반일 민족운동으로 발전 대표적인소작쟁의:암태도소작쟁의(1923), 불이흥업 농장의 소작 쟁의(1929) 등 |
신간회건설운동:신간회 건설운동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신간회:신간회는 창립 후 각지의 독립운동가·민중운동가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아 1927년 12월 27일, 지회 100개소 돌파 기념식을 개최했다. 신간회 지회는 1928년 2월 123개, 1929년 2월 144개로 급증했고, 해산될 무렵인 1931년 5월에는 124~126개였다. 그리고 회원수를 보면 1928년 2월 15일 현재 2만 여 명, 1929년 2월에는 3만 여 명, 1931년 5월 15일 해산시에는 3만 9,914명이었다. |
부역동원 반대운동;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던 고율의 소작료 인하뿐만 아니라 군수용물자 강제수매 반대, 공과금 납부 거부, 부역동원 반대운동 등을벌여서 일제의 전시 수탈에 맞섰습니다. |
노동절투쟁: 1930년 노동자들은 메이데이 투쟁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했다. 1929년 원산 총파업을 겪은 바로 뒤였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와 농촌에서 일제의 탄압을 뚫고 기념투쟁이 벌어졌다. 전주 합동노동조합 산하 500여명의 노동자들은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념집회와 시위를 단행했다. 일제 경관이 해산을 명령하자, 노동자들은 격렬히 항의하며 주재소로 달려가서 유리창을 부수는 등 투쟁을 전개했다. |
5) 1930년대 초 언론기관이 전개한 농촌계몽운동은?
①물산장려운동 ② 광주학생운동
③민립대학설립운동 ④ 브나로드운동
물산장려운동: 1920년 초에서 1930년대 말까지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일어난 민족 운동. 일본의 경제 침략에 대응하여 국산품 애용, 민족 기업의 육성 등을 목표로 하였다. |
광주학생운동;1929년 광주 지역의 학생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항일독립만세운동. |
민립대학설립운동:1920년대초 우리의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일어난 일제하의문화운동 |
브나로드운동:동아일보사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 동아일보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 규모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제3회까지 이 운동을 ‘브나로드’로 부르다가 민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하여 제4회부터 ‘계몽운동’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금지 조처로 계속하지 못하였다.원래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帝政)러시아 말기에 소련의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말 구호이다. 이 구호를 내세우고 1874년 수백 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뒤부터 이 말은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는데, 동아일보사는 뒤에 명칭만을 빌려 쓴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뒤에도 계속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계몽운동의 애칭으로 사용되었다. |
6)1930년대 후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볼수 없는 것은?
① 토지사업실시 ②창씨개명 실시
③ 황국신민서사 강요 ④ 신사참배 강요
토지사업실시 ; 일제는 조선 총독부가 토지와 지세를 효율적으로 장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10년부터 1918년까지 2,456만 원이라는 거액을 투입하여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은 크게 보아 소유권 조사, 지형 지모 조사, 지가 산정, 토지 대장 작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1910년 토지 조사국을 창설하고, '임시 조사국 관제'(칙령 20호)를 공포하였으며, 1912년에는 '고등 토지 조사 위원회 관제'와 '토지 조사령' 공포 등을 잇달아 단행하였다. 일제가 토지 조사 사업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목적은 지세 부담의 공평, 지적의 확정과 소유권의 보호, 토지 개량과 이용의 자유 보장, 생산력의 증진 등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질적인 목표는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조선 총독부의 지세 수입을 증대시키기에 적합한 토지 제도를 만들어내는 데 있었다. 토지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한 기간 내에 토지에 관한 모든 것을 신고해야 하는데, 한국인은 절차상의 번잡함과 이민족의 강압적 지배 등의 이유 때문에 제대로 신고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신고인은 서류 수속을 누락하거나, 도장을 잃어버리던가, 형식에 잘못이 있어 서면 접수를 기한 내에 하지 못하여 소유권을 잃어버린 경우가 있었다. 토지 조사는 일본 관헌과 지주가 중심이 되어 시행되면서 일본인과 지주에게 유리하고, 한국인과 영세 농민에게 불리하였다.토지 조사 사업은 결국 실제로 토지를 경작하고 있는 농민으로부터 전통적으로 형성된 여러 가지 권리를 빼앗고, 한 마을 또는 한 집안의 공유지였던 동중 또는 문중 토지를 국유지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창씨개명 실시: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개정(제령 제19호)하여 ?우리 고유의 성명(姓名)을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제(創氏改名制)를 공포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조선총독은 미나미 지로(임기 1936-1942)로 역대 총독 중 가장 악명 높은 자로 알려져 있다.
■ 여자가 결혼을 해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성(姓)을 유지하는 부계 혈통에 기초한 조선의 가족제도를, 가(家)의 칭호인 씨(氏)를 붙여 일본식 성씨를 만드는 '창씨'가 이 제도의 핵심이며, 조선총독부는 이것이 조선인들의 희망에 의해 실시하는 것으로 일본식 성씨의 설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하여 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 허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후 친일정권을 앞세운 단발령에 이어 ?성까지 갈도록 강요하는 '창씨개명'은그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 중 하나의 것에 불과하며,심하게는 민족말살 정책의 ‘완성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황국신민서사강요: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황국신민화 등을 강요하면서 일본제국주의가 암송을 강요한 글. 1937년 10월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교학쇄신·국민정신함양을 목적으로 보급했다. 학교·관공서·은행·회사·공장·상점 등의 모든 직장의 조회와 각종 집회 의식에서 낭송이 강요되었으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실천요강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황국신민서사를 낭송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아동용과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용·일반용의 2종류가 있는데 ■아동용은 "①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②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한다. ③ 나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고 되어 있다. ■일반용은 "① 우리는 황국신민이며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②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③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의 힘을 키워서 황도를 선양하자"라고 되어 있다. 보급을 위해 아동용 100만 부, 일반용 20만 부를 인쇄·배포했으며 신문·잡지 등에 싣는 한편, 영화로 제작·상영하고 라디오로도 방송·선전했다. 문안은 직업적 친일파인 이각종이 지었다고 한다. |
신사참배 강요:신사참배 강요(神社參拜?要)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운 뒤 조선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가리킨다. 신사참배는 신토의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이다. 종교의 교리가 신사참배와 충돌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신사참배 강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저항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배경-신토는 조선에 1876년 개항 이래 문화 침략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보호 아래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면서 점차 강제적인 정책으로 변화했다. 일본 천황 신격화와 강제 신사참배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지배함으로써 효율적인 식민 통치와 전쟁체제의 구축을 노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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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중일전쟁 뒤 일제의 강제동원 수탈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② “국민징용령”을 실시하였다
③ 여성을 “위안부”로 강제동원 하였다
④ 물자공출은 시행하지 않했다
8) 1944년 여운형을 중심으로 반일 세력을 모아 낸 조직은?
①원산그룹 ② 경성 콤그룹 ③ 건국동맹 ④조선어학회
원산그룹:일제시대 기업(1929년원산총파업) |
경성콤그룹:요약 1939~41년 대중조직 건설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적으로 김단야(金丹冶)·박헌영(朴憲永)·김삼룡(金三龍)·이관술(李觀述) 등이 중심이 되어 경성·함경도·경상도에서 활동한 조직. |
건국동맹;일본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던 무렵 여운형(呂運亨)·조동호(趙東祜)·현우현(玄又玄)·황운(黃雲)·이석구(李錫玖)·김진우(金振宇)·이수목(李秀穆) 등이 주축이 되어 일본의 패망과 조국광복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조직한 비밀단체였다. 연원 및 변천-이 단체는 1944년 8월 10일 국내의 사회주의자 일파들이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하여, 현우현의 집인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三光醫院)에서 일본의 패망과 조국건설에 대한 논의를 거쳐 조직하였다. 그 뒤 이여성(李如星)·이만규(李萬珪) 등이 가담하여 조직이 더욱 확장됨으로써, 위원장 여운형 산하에 여러 부서를 두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펴 많은 맹원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불문(不文)·불언(不言)·불명(不名)의 3대 원칙과, ① 각인·각파는 대동단결하여 건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② 반추축제국(反樞軸諸國)과 협력하여 대일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③ 건설부면에 있어서 일체 시정을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동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
조선어학회:1921년에 주시경의 문하생이었던 최두선, 임경재, 권덕규, 장지영 등이 모여 국어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창립된 민간 학술 단체. 1931년 조선어 연구회를 고친 이름이며 뒤에 한글 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
9)1940년 중국 총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군(軍)은
①한국독립군 ②한국광복군 ③ 조선혁명군 ④동북항일연군
한국독립군:1931년 창립된 민족주의 세력인 한국 독립당의 당군으로 중국군과 합작하여 동·북만주 지역에서 활약한 군대. |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민족주의 세력인 한국 독립당은 항일투쟁의 적기가 왔다가 판단하고 한국 독립군을 창립하였다. |
한국광복군:1940년 9월에 중화민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군으로, 1946년 5월 환국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 한국 광복군은 1939년 1월 8일에 창립된 임시 정부의 여당 한국 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였다. 이후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조직되었다. 1940년 5월, 임시 정부 측은 중국 정부 장제스 주석에게 한국 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중국 국민 당군의 지휘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허락받았다. 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지원하에 활동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하였던 것이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한국 광복군 행동 준승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건을 하달하였다. 준승에 따르면 한국 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 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이 준승은 한국 광복군이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일개 보조, 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인 군사 협정이었다. 한국 광복군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 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1941년 1월에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 의용대의 일부가 흡수되었다. 이로써 광복군은 지청천 총사령과 김원봉 부사령 밑에 3개 지대와 제3전구공작대, 제9전구공작대, 토교대를 두게 되었다. 또한, 중국 각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고 한국 청년 훈련반과 한국 광복군 훈련반이라는 임시 훈련소를 운영하였다. 기관지 "광복"을 펴내기도 하였다. 임시 정부는 아시아 ·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1941년 12월 9일에 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에는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 ·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시 정부 구미 외교 위원부 위원장인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OSS 특별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1945년 4월 당시 광복군의 총 병력수는 339명이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700여 명으로 성장하였다. |
조선혁명군: 1929년 3월 만주 길림시 우마행호동(牛馬行胡洞) 거리의 국민부(國民府) 사무소에서 항일투쟁의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남만주일대의 유일혁명군정부인 국민부를 지지, 육성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의 당군(黨軍)으로 1938년 9월까지 남만주 일대에서 활발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설립목적:친일인사 숙청, 교민 보호, 국내 진입작전 전개에 의한 일제기관 파괴, 일제 관헌 및 악덕 부호 응징을 주요 목표로 하였다. 즉 조선혁명군이 항일무장투쟁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 비협조적인 지주나 부호도 처벌하는 등 계급투쟁의 활동도 병행했음을 보여준다.
기능과 역할:1931년 만주사변 이전까지의 초기 조선혁명군 활동은 선민부(鮮民府) 등 일제 주구기관 및 친일파 처단, 국민부 의무금 징수 및 군자금 모집, 독립군 모병, 반공활동 등에 집중되었다.
조선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일본군과의 단독전투와 중국군과의 연합전투를 통해 항일무장투쟁사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1929년 7월유하현(柳河縣) 추가보(鄒家堡) 전투와 1932년 1월양기하(梁基瑕)부대의 혈투 등은 대단하였다. 그리고 1932년 3월에서 7월에 걸친 흥경현(興京縣) 영릉가(永陵街)전투는 정규전을 벌여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대승첩이었다. 당시 총사령 양세봉 병력 1만여 명은 중국의용군총사령 이춘윤(李春閏)의 병력 2만여 명과 연합전선을 펴서 일본·만주연합군에 크게 승리했다. 3월 초전에서 일본군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5월과 7월에는 공군의 지원까지 받으며 일본의 대부대와 영릉가에서 접전하였는데, 당시 일본군에선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의의와 평가:조선혁명군은 만주지방에서 독자적 조직을 유지하며 활약한 최후의 민족주의계열 독립군이었다. 특히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10여 년간 고생하며 치열하게 일제와 항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조선혁명군의 투쟁은 1910∼1930년대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결산이었다. 또한 한중 연합작전을 통해 적지 않은 일·만군을 살상하고 만주 및 식민지 한국의 통치를 교란함으로써 강대한 일본 군경과 만주국 관헌 등의 활동반경을 확대하지 못하게 하였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크게 증강된 일본군의 대부대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점에서 무장독립투쟁상에서 의의가 크다 |
동북항일연군:1935년 만주지방에서 항일무장운동을 통합해 항일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하여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하여 만든 항일무장단체. 개설-1935년 제7차 코민테른에서 결정된 ‘반제국주의 인민통일전선’에 따라 설립된 만주지역 항일무장운동 단체로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북한정권 수립 시기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인과 한인의 연합부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인적 유대를 강화하였고, 북한 국가 설립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의의와 평가-동북항일연군 제1로군과 제2로군에는 한인대원이 많았기 때문에 동북항일연군은 사실상 중국인과 한국인의 항일연합전선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은 해방까지 군대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실질적으로도 중국 측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과정에 참여한 다수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인적 유대는 강화되었고, 또한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일성을 포함한 최현, 최용건, 김책 등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며, 이들은 1945년 해방 후 당과 군의 요직을 차지하며 북한 정권 창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
10) 중일전쟁 뒤 전시체제사회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일반 남성에게 국민복 입도록 하였다
② 여성들의 복장은 통제하지 않았다
③ 학교을 병영화 하고 군사 교육을 강화 하였다.
④ 여학생들에게 군국주의 체육교육을 하였다.
제13장 전시동원 체제와 항일무장투쟁 장별 문제 정리(2017년 개편교재에 맞춤) 국어국문학과(졸) 능소니(김선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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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 전시동원체제 가운데 여성에 대한 강제동원에 속하는 것은?
① 육군특별지원병제 ② 학도지원병제
③ 정신대근무령 ④ 국민징용령
☞ 교재 307쪽 : 1944년 8월에는 ‘여자정신대근무령’을 만들어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 수십만 명을 강제로 군수공장과 전쟁터로 끌고 갔다.
2. 일제말기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조직에 속하는 것은?
가. 대한자강회 나. 한국광복군 다. 조선의용군 라. 신민회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312~313쪽 :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8년 조직된 무장 부대,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창설한 부대이다.
3.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관련된 것은?
① 구본신참(舊本新參) ② 내선일체(內鮮一體)
③ 동도서기(東道西器) ④ 척왜양이(斥倭洋夷)
☞ 교재 305쪽 : 구본신참, 동도서기, 척왜양이는 개화파들의 주장이다.
4. 1930년대 일본이 한민족 말살을 위해 실시한 황국신민화 정책은? ☞ 교재 306쪽
① 애국계몽운동 ② 창씨개명 ③ 만민공동회 ④ 물산장려운동
5. 1930년대 일제의 전시수탈에 맞선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가들의 주요 활동은?
가. 고율의 소작료 인하 운동 나. 문맹 퇴치 운동 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 라. 부역동원 반대 운동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304, 309쪽 :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가들은 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던 고율의 소작료 인하뿐만 아니라 각종 공과금 납부 거부, 군수용물자 강제수매 반대, 부역동원 반대운동 등을 벌였다.
6-10 |
21141 |
6.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가. 조선인이 경영하는 한글 신문의 간행을 허용했다. 나. ‘황국신민서사’를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했다. 다. ‘황국신민 양성소’라는 의미로 소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꿨다. 라. 치안유지법을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305~307쪽 : 황국신민화 정책이 실시되면서, 이미 친일지로 돌아선 한글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켰다. 치안유지법은 일제의 강제침탈 이후 바로 실시되었다.
7. 1930년대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관련이 없는 것은?
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 ② 일본어 교육 강화
③ 신사참배 ④ 창씨개명
☞ 교재 305~307쪽 : ?번은 3·1운동 이후 시행한 문화통치와 관련된다.
8. 1930년대 중국 지역에서 활동한 항일투쟁 단체가 아닌 것은?
① 독립협회 ② 한국광복군 ③ 조선의용대 ④ 한국독립당
☞ 교재 312~313쪽 : 독립협회는 1896년 6월 창립했으며,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여 독립한 것을 기념하려고 여러 사업을 벌였다.
9.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은 것은?
가. 조선인이 경영하는 한글 신문의 간행을 허용했다. 나.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했다. 다. 신사(神社)를 만들어 조선인들을 강제로 참배시켰다. 라.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전환하였다.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305~307쪽 : ‘가’와 ‘라’는 1920년대 문화정치에 대한 설명이다.
10. 일제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전쟁 인력을 채우기 위해 실시한 것은? ☞ 교재 305~307쪽
가. 육군특별지원병제 나. 학도지원병제 다. 토지조사사업 라. 산미증식계획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11-15 |
11414 |
11. 1938년 10월 창설된 조선의용대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은 것은?
① 김좌진과 홍범도의 연합부대였다. ② 중국의 지원을 받아 창설했다.
③ 중국국민당 정부군의 각 전선에 배속되었다. ④ 포로 심문, 후방 교란 등의 임무에 종사했다.
☞ 교재 312쪽 : 조선의용대는 관내의 좌파 단체를 결합하여 창설한 것이다.
12.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조상의 자손이기 때문에 ‘한국병합’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한 일제의 식민사관은?
① 일선동조론 ② 당파성론 ③ 타율성론 ④ 정체성론
☞ 교재 306쪽 : 일제는 1939년부터 일본 조상과 조선 조상은 같다(일선동조론)고 하며 조선인의 고유한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13. 일제 말기에 전시동원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시행한 제도가 아닌 것은? ☞ 교재 305~307쪽
① 육군특별지원병제 ② 국민징용령
③ 여자정신대근무령 ④ 산미증식계획
14. 1944년 8월, 여운형 등이 국내의 사회주의자들과 만들어 무장봉기와 군사 활동을 준비하던 조직은? ☞ 교재 308쪽
① 건국동맹 ② 한국광복군 ③ 청년연합회 ④ 조선의용대
15.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①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했다.
② 신사(神社)를 만들어 조선인들을 강제로 참배시켰다.
③ 제3차 조선교육령을 실시해 일본어 교육을 강화했다.
④ 토지조사 사업과 지계(地契)발급 사업을 실시했다.
☞ 교재 305~307쪽 : ④ 토지조사 사업과 지계 발급 사업은 대한제국 시기에 행한 정책이다.
답안 : 32224 21141 11414
제 13장 답 안 | 1-5 | 6-10 | 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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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24 | 21141 | 11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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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안 : 32224 21141 11414 |
제13장-장 별. 기말문제 (2016년-2012년) 자료출처:2학년 담당투터 문화교양과 이선아교수 클릭 http://tutor.knou.ac.kr/tutor/dtt/site/initTutrStudDtlRetrieve.do 정답과오답해석작성 : 문화교양과 김추경 |
2016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30. 1930년대에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맞서 벌인 ‘국학운동’은?
① ‘조선어사전’의 편찬과 보급 ② 창씨개명
③ 조선교육령 실시 ④ 신사참배
조선일보 1933년 10월 28일 기념할 29일! 488년 전에 우리 한글이 발포된 이 날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발전에 새로운 비약이 약속되었던 날이다. 민족의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고 굳은 결심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 조선인은 다시금 이날의 한글 발포를 뜻있게 기념코자 하는 바이거니와 이 기념은 오랫동안을 두고 조선어학회에서 연구 중에 있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발포되는 날이니 우리는 이 기념일이 거듭 뜻 깊음을 느끼는 바이다. 실로 한글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교묘한 조직을 가진 글이었으나 민족의 문화 체계가 혼란되면서 그 문자의 쓰임도 또 혼란하였던 것은 후대의 손자된 백성의 수치였다. 이번에 한글 맞춤법을 정리하여 시대에 맞게 쓰이도록 하고자 조선어학회에서 통일안을 만든 것은 실로 문화적 가치가 크다 할 것이다. 훌륭한 공적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널리 쓰이도록 하지 않은 한에는 그 공적은 또한 헛된 것이 될 것이니 이제 통일안의 발포를 하루 앞두고 각계 인사의 의견을 들어 널리 보급되기를 돕기로 하자 |
2015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32.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가. 조선인이 경영하는 한글 신문의 간행을 허용했다.
나. ‘황국신민서사’를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했다.
다. ‘황국신민 양성소’라는 의미로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바꿨다.
라. 치안유지법을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요약)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황국신민화 등을 강요하면서 일본제국주의가 암송을 강요한 글. 1937년 10월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교학쇄신·국민정신함양을 목적으로 보급했다. 학교·관공서·은행·회사·공장·상점 등의 모든 직장의 조회와 각종 집회 의식에서 낭송이 강요되었으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실천요강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황국신민서사를 낭송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아동용과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용·일반용의 2종류가 있는데 아동용은 "①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②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한다. ③ 나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고 되어 있다. 일반용은 "① 우리는 황국신민이며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②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③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의 힘을 키워서 황도를 선양하자"라고 되어 있다. 보급을 위해 아동용 100만 부, 일반용 20만 부를 인쇄·배포했으며 신문·잡지 등에 싣는 한편, 영화로 제작·상영하고 라디오로도 방송·선전했다. 문안은 직업적 친일파인 이각종이 지었다고 한다. |
2014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30. 1930년대 일본이 한민족 말살을 위해 실시한 황국신민화 정책은?
① 애국계몽운동
② 창씨개명
③ 만민공동회
④ 물산장려운동
② 창씨개명-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 제령 제19호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1940년 2월부터 이를 시행하기로 했다. 그 내용은 ① 조선인의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성씨(姓氏)의 칭호를 사용할 것, ② 서양자(養子 : 데릴사위)를 인정하되 양자는 양가의 씨에 따를 것. ③ 타인의 양자를 인정하되 양자는 양가의 씨를 따를 것 등이다. 이중 중심이 되는 것이 씨설정(氏設定)으로 이것이 바로 창씨개명이다 |
31. 1930년대 일제의 전시수탈에 맞선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가들의 주요 활동은?
가. 고율의 소작료 인하 운동 나. 문맹 퇴치 운동
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 라. 부역동원 반대 운동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문맹 퇴치 운동 출제자의 눈 : 조선일보는 한글 교재를 보급하고 문자 보급 운동을 전개하였다.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가 주관하여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동원하여 펼친 농촌 계몽 활동이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1935년 중단되고 말았다 |
민립대학 설립 운동요약 1920년대 초 우리의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일어난 일제하의 문화 운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되자, 민족 지도자들은 실력 양성 운동을 벌여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벌려 나갔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이 맨 처음 일어난 것은 한말이었다. 당시 윤치호(尹致昊)·남궁억(南宮檍)·박은식(朴殷植)·양기탁(梁起鐸) 등이 600만 원을 모금하여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1운동 이후 다시 시도된 것이다. 중략- 한편, 민립대학기성회 회금보관위원이었던 김성수는 1931년 1년여에 걸쳐 구미 각국의 대학시설 운영 상황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독자적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의 한국인에 의한 대학설립 불인가라는 기본 방침을 알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인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립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이를 관철사키기 위해, 1940년보성전문학교의 대학 승격을 추진하였지만, 또 총독부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결국, 1920년대 이래 우리 민족이 기도하였던 민립대학설립운동은 그때마다 좌절되어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이 땅에는 경성제국대학 외에는 단 한 개의 민립 또는 사립대학이 설립되지 못하였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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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31.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관련된 것은?
① 구본신참(舊本新參) -② 내선일체(內鮮一體)
③ 동도서기(東道西器) ④ 척왜양이(斥倭洋夷)
①구본신참(舊本新參)구본신참(舊本新參) 뜻 : 옛것을 근본으로 삼아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뜻으로, 19세기 말 개화파에 의해 전개된 서양문명의 수용논리. 舊 : 예 구 本 ; 근본 본 新 : 새 신 參 : 간여할 참 1897년 대한제국이 출범하면서 나타난 서양문명의 수용논리로, 이전에 전개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도서기론은 김윤식이 1880년(고종 17) 주창한 이론으로, 전통문화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론이다. |
②내선일체(內鮮一體)내선일체는 반도 통치에서의 최고 지도 목표입니다.……(중략)…… 원래 내선일체의 이념은 극히 고매하고 장엄한 것으로, 한반도라고 하는 작은 범위에서만 완성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세계 어느 곳이라도 일본인과 조선인이 사는 곳에서는 모두 내선일체의 취지가 철저하게 실행되지 않으면 참된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중략)…… 나는 내선일체라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와 같이 정의에 입각한 통치는 세계 여러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숭고한 도의적 통치이기 때문입니다.……(중략)…… 내가 항상 역설하는 바는, 내선일체는 서로 손을 잡는다든가 형상이 융합한다든가 하는 미지근한 것이 아닙니다. 잡은 손은 놓으면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물과 기름도 무리하게 뒤섞으면 융합된 형태가 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됩니다. 형상도 마음도 피도 육체도 모두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선 총독부, 『조선에서의 국민 정신 총동원』, 1940년 3월, 90~104쪽……(전략)…… 무릇 내선일체라는 국시(國是)는 고매하고 장엄한 것으로, 그 궁극의 목적은 반도 동포로 하여금 충량한 황국 신민으로 만들고, 객관적?주관적으로 일본인과 조선인 간에 어떤 구별도 발견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는 데 있습니다.……(후략)……조선 총독관방 문서과 편찬, 『유고?훈시?연술총람』, 38~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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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동도서기(東道西器) -동도서기(東道西器)는 동양의 도덕, 윤리, 지배질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서양의 발달한 기술, 기계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한다는 사상이다. 온건개화파가 주장했던 사상으로 급진개화파와는 대립되는 사상이었다. 급진개화파는 동양의 도덕, 윤리, 지배질서까지 바뀌어야 한다는 변법자강과 같은 사상을 주장하였다 |
32. 일제의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한국사의 특징이 아닌 것은?
① 자율성론 ② 정체성론 ③ 당파성론 ④ 일선동조론
② 정체성론-요약 일제가 주장한 식민사관 중 하나로, 한국의 역사는 고대 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고 발전하지 못했다는 내용. 정체성론은 한국이 여러 정치, 사회적인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일제가 주장한 식민사관 중 하나이다. 일본은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한글 사용을 통제하여 조선에서 민족 의식이 싹트는 것을 막으려 했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이후 발굴, 조사 등의 명분으로 조선의 각종 문화재를 파헤쳤고, 귀중한 문화재를 일본으로 약탈해 갔다. 또한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하여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해서 정리한 “조선사”를 편찬하였다. 일제의 학자들은 한국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 당파성 등을 강조하는 식민사관을 제시하였다. 정체성론은 한국이 세계사적 발전 과정에 따라 시대별로 단계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정체되어 왔다는 내용이다. 한국 역사는 중세 사회로 발전하지 못하고 고대 사회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
③ 당파성론-일제가 내세운 식민사관 중 하나로 붕당 정치로 인해 조선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함. 당파성론은 일제가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주장한 식민사학 중 하나로 조선 시대의 붕당 정치를 당파 싸움으로 규정한 것이다. 당파성론은 한국의 정치가들이 자기 세력의 이익을 위해 편을 갈라 싸웠다는 내용으로 조선 시대에 행해진 붕당 정치로 인해 조선의 문화 수준이 낮고 발전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붕당 정치는 단순한 당파 싸움이 아닌 다양한 의견을 교류하고 토론하며 행해진 정치 형태였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의 국권을 피탈한 후 조선의 말과 역사를 축소시키고 일본어와 일본사를 확대시켰다. 또한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여 한국인의 열등감을 조장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와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려고 하였다. 식민사관으로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 등이 있다 |
④ 일선동조론-요약 조선 강점 이후 기다 사다기치는 〈일선양민족동원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연구를 통해 유물·언어·신화·풍습 등 다방면에서 조선과 일본 민족이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과 일본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피를 나눈 근친관계에 있고 태고 이래 조선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가부장적 지배가 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조선은 일본에 흡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일제의 조선 강점을 합리화했다. 일선동조론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 밑에서 강조된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통해 정책적으로 한층 심화되었으며, 만주사변 이후 한국민에게 강요된 창씨개명 등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민족 말살정책도 여기에서 기인되었다. |
2012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29. 일제 전시동원체제 가운데 여성에 대한 강제동원에 속하는 것은?
① 육군특별지원병제 ② 학도지원병제
③ 정신대근무령 ④ 국민징용령
정신대[挺身隊 ] 일제가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한 여성 위안부와 근로 정신대. 한일합병이 된 1910년부터 조선 여성을 일본으로 팔아 넘겨 매춘 행위를 시키는 일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그 뒤 1932년 상하이사변이 일어나고 일본군의 강간 행위가 빈발하자 그 대책으로 오카무라 야스지[岡村] 중장은 나가사키의 지사에게 군대 위안부 유치를 요청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 위안부를 끌어들인 첫 시기로 보여진다.
그 후 1937년 난징대학살사건 때 일본군이 일반 시민을 강간하는 포악 행위가 드러났으며,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위안부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여성이 전통적인 유교 교육 등으로 성병의 위험이 없으리라는 판단으로 미혼의 조선 여성을 위안부의 적절한 대상으로 정했다. 근로 정신대의 경우는 전쟁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제사, 방직 공장 등에 조선 여성을 동원하여 노동력을 착취했다. |
중일전쟁이 전면 전쟁으로 확대된 후인 1937년 일본은 각료회의를 통해 '국민총동원실시요강'을 가결하였으며, 1941년 11월 '국민근로보국협력령'에 따라 14세에서 25세의 여성에게 연간 30일 이내의 국민 근로 보국 대협력 활동을 하도록 했다. 1941년 12월 이후 조선에서의 여자몰이가 본격화되어 지원과 동원을 위한 강연회와 회의가 계속 이어졌다. 1942년 5월 발송된 '제2차 특별 요원 진출에 관한 조회'라는 문서에 의하면 병사 29명에서 35명 당 1명의 군대 위안부가 계획되어 그 수를 배당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정신대는 노동력을 주로 착취당한 근로 정신대와 성적인 착취를 당한 위안부로 나뉘는데, 몇 가지의 증언으로 미루어 근로 정신대로 착취되었으나 뒤에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던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근로 정신대는 일본의 도야마, 시즈오카 등지와 대구, 부산, 광주 등의 군수 공장과 방직 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임금도 받지 못하고 굶주리며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
위안부의 경우는 중국, 일본, 동남 아시아 등지로 끌려가 군의 감시와 통제 아래 군인들의 성적 도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미얀마, 트랙 섬, 필리핀, 테니안 섬, 마리아 군도,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등에 위안소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전쟁이 끝나고 군대 위안부의 존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군 내부에 공창단까지 있었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한 일본은 증거 인멸을 위해 갖가지 노력을 했다.
각종 문서와 자료들의 인멸과 중국, 동남 아시아, 남양 군도, 일본 국내 등에 있었던 위안부들을 현지에 그냥 버려두거나 참호에 가두어놓고 폭파해 일본군과 함께 옥쇄시키는 일도 많았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현재 정신대 문제 규명과 배상에 대한 우리의 요구에 일본은 이를 방관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1992년 2월,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 여성을 정신대로 강제 동원한 것은 당시 일본 국왕이 재가해 공포한 '여자정신대근무령'에 근거한 것임을 입증하는 관계 법령과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일본 정부 수뇌부가 정신대 강제 모집과 총원 및 관리에 깊숙이 개입했음이 명백히 밝혀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신대 [挺身隊] (소설 토지 용어.인물사전, 1997. 10. 20., 솔출판사) |
30. 다음 중 조선총독부의 ‘동화정책’에 활용되었던 제도는?
① 조선교육령 ②국민교육헌장
③ 교육칙어 ④ 약법삼장
①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시행일시 1911년 8월 일제강점기의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교육방침과 교육에 관한 법령. 내용-1910년 8월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의 교육방침은 우리 민족에게 이성이 발달할 수 있는 교육기회를 주지 않는 데 있었다. 일본신민화(日本臣民化)의 토대가 되는 일본어의 보급, 이른바 충량(忠良)한 제국 신민과 그들의 부림을 잘 받는 실용적인 근로인·하급관리·사무원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취지와 교육방침을 가지고, 데라우치는 1911년 8월에 전문 30조로 이루어진 제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실업학교·사립학교 등의 교육규칙과 학교 관제 등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전문학교의 규칙이 공포된 것은 1915년의 일이다. 제1차 「조선교육령」과 이에 따른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국권 상실 초기의 식민지 교육방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본어 보급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② 우리 민족을 이른바 일본에 ‘충량한 국민’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며, ③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하여 한국인에게 저급한 실업교육을 장려하였으며, ④ 한국인을 우민화(愚民化)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기본 방침은 각급 학교의 교육 연한과 학교 명칭에서 일본인 학교와 차별을 둔 교육정책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교육령 [朝鮮敎育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②국민교육헌장-1968년 12월 5일에 반포된 교육헌장. |
③교육칙어-교육에 관한 칙어(일본어: ?育ニ?スル勅語 きょういくにかんするちょくご 교이쿠니칸스루초쿠고[*])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일본 제국에서, 메이지(明治)정부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내각총리대신과 요시카와 아키마사(芳川?正)문부대신에게 내린 교육에 관한 칙어이다. 일반적으로 교육칙어(일본어: ?育勅語 きょういくちょくご 교이쿠초쿠고[*])라 불린다. 1890년 10월 31일 반포 되었으며 1948년 6월 19일 폐지되었다교육에 관한 칙어(교육칙어)는1890년 10월 30일에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발표된 칙어이다. 그 취지는 일본 제국 신민들의 수신과 도덕 교육의 기본 규범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식민지에서 시행된 조선교육령과 타이완 교육령에서는 교육 전반의 규범을 정했다. 또한 일본 신화의 "기원절"로 정한 2월 11일,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11월 3일과 새해 첫날의 "4대 명절"에는 학교에서 의식을 치르는데, 전교 학생을 향하여 교장이 교육칙어를 엄숙히 읽는데, 그 교육칙어의 사본은 어진영과 함께 봉안전에 보관되어 정중히 취급되었다 |
④약법삼장?法三章 줄일/약속할 약 · 법법 · 석삼 · 글장 뜻-간략한 3장의 법. 서로 준수할 것을 약정한 간단한 규정을 말한다. 중략- 그러고 나서 유방은 각 고을로 사람을 파견하여 이 사실을 알리게 했다. 백성들은 이를 듣고 기뻐하며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군사들에게 향응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유방은 이를 사양하였다. 백성들은 유방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고, 유방이 진왕이 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할 정도였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온다. 《한서(漢書) 〈형법지(刑法志)〉》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조가 처음 관중에 들어가서 법을 3장으로 간략하게 했다.(高祖初入關, 約法三章.)」 용례-우리 모임이 무슨 정치단체나 이익 단체가 아닌 단순한 친목 단체니까 그냥 ‘약법삼장’처럼 간단한 몇 가지 원칙만 정하도록 합시다. |
31. 일제말기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조직에 속하는 것은?
가. 대한자강회
나. 한국광복군
다. 조선의용군
라. 신민회
가-대한자강회 大韓自强會 설립-1906년 4월 /성격 사회운동단체 해체-1907년 8월 설립자-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김상범, 임진수 대표자-윤치호(尹致昊) 요약 1906년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운동단체. 대한자강회는 1905년 5월이준(李儁)·양한묵(梁漢默) 등이 조직한 헌정연구회(憲政硏會)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심의성(沈宜性)·임진수(林珍洙)·김상범(金相範) 등 20여 명이 국민 교육을 고양하고 식산(殖産)을 증진해 부국강병을 이루어 장차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1906년 4월에 조직되어 강연회의 개최, 기관지 발행 등을 추진하였다 -중략-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매월 1회씩 열리는 통상회마다 회원 이외에도 일반 대중이 참석할 수 있는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또 이를 일반에게 알리기 위해 『대한자강회월보』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회에서 긴급히 실시되어야 한다고 결정된 사항은 정부에 회원을 파견해 건의, 관철시키려 하였다. 정부에 건의한 사항은 교육활동 측면으로는 학부교과서 편집문제·의무교육 실시·사범학교 설립·각 사립학교 연락건 등이 있다. 이 밖에 사회교육의 일환인 조혼 금지 등을 들 수 있다. 이 단체는 국채보상운동 이후에는 적극적인 현실참여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07년 8월이완용(李完用) 내각의 지시에 따라 내부대신의 명의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5173 |
나. 한국광복군- 1940년 9월에 중화민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군으로, 1946년 5월 환국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 한국 광복군은 1939년 1월 8일에 창립된 임시 정부의 여당 한국 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였다. 이후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조직되었다. 1940년 5월, 임시 정부 측은 중국 정부 장제스 주석에게 한국 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중국 국민 당군의 지휘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허락받았다. 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지원하에 활동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하였던 것이다. |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한국 광복군 행동 준승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건을 하달하였다. 준승에 따르면 한국 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 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이 준승은 한국 광복군이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일개 보조, 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인 군사 협정이었다.한국 광복군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 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1941년 1월에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 의용대의 일부가 흡수되었다. 이로써 광복군은 지청천 총사령과 김원봉 부사령 밑에 3개 지대와 제3전구공작대, 제9전구공작대, 토교대를 두게 되었다. 또한, 중국 각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고 한국 청년 훈련반과 한국 광복군 훈련반이라는 임시 훈련소를 운영하였다. 기관지 "광복"을 펴내기도 하였다. 임시 정부는 아시아 ·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1941년 12월 9일에 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에는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 ·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시 정부 구미 외교 위원부 위원장인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OSS 특별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1945년 4월 당시 광복군의 총 병력수는 339명이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700여 명으로 성장하였다. |
다. 조선의용군-요약 1938년 무한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의 일부 부대는 옌안 지역으로 이동해서 중국 공산당의 영향 하에 옌안의 한인 무장세력과 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했다. 이 군대가 1942년 만들어진 조선의용군의 모태였다.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조선의용군은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참전에 즈음해 소련군과 함께 입국할 준비를 하였다. 일본이 항복하자 화북과 만주에서 팔로군과 협동관계를 유지하면서 재류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1945년 10월초 선발대 1,500명이 신의주에 도착했으나 무장해제 되어 만주 안동현으로 후퇴했다. 일부인사가 개인적으로 북조선 신민당에 참여했을 뿐 대부분 입국하지 못하고 중국 동북지방에서 동북민주연군에 흡수되어 그곳에 잔류했다 |
라. 신민회 요약 1907년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결사. 설립1907년 4월 설립자-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전덕기(全德基),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등 한말 애국계몽운동기 개화자강파들이 일제에 반대하여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창건한 전국적 규모의 비밀결사 조직 1907년 4월에 안창호의 발기에 의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과 서울 지역의 인사들이 주동하여 창립했다. 1906년말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남쪽 리버사이드에서 안창호의 발의에 의하여 이강·임준기 등이 대한신민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1907년 2월 안창호는 귀국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을 역설하면서 각지에 강연회를 열고 동지를 모았다. 그는 즉시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급진론에 반대했으며, 동지들의 단결로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도모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중략- 이후 12월에는 국내에 잔류한 양기탁·주진수·이승훈·김구·이동녕 등이 전국간부회의를 열어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서간도에 한인집단이주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 신민회원을 대량 체포하여 신민회의 국내조직이 사실상 와해되었으나, 신민회 간부 이동녕·이회영 등은 그해 봄에 만주 펑톈 성[奉天省] 류허 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하고, 사관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력양성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밖에 신민회 간부들에 의해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등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건설에 의한 독립전쟁 전략은 1910년 이후 여러 민족운동세력의 기본적인 독립운동 전략이 되었으며,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 대규모의 독립군부대에 의한 항일 무장투쟁의 기초가 되었다.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제14장 해방과 분단 |
제14장 요약 (학보.송찬섭교수) |
(14-1) 해방과 38선 분할 그리고 좌우익 대립의 격화
1945년 8월15일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즉시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없었다.
일반 명령1호를 통해북위38도선을 중심으로 미군과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였다. 미국과 소련정부는‘조선 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결정을 합의하였다.3상회의 결정은 미소양국의 한국개입을 최소화 하려는 것이었지만 한국에는 전혀 다르게 알려져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데올로기 대립이 깊어졌다
(14-2) 통일정부 수립의 좌절
3상회의 결정에 따라 1946년3월 재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휴회되었다 1947년5월 재개된 재차 미소공위는 끝내 결렬 되었고 좌우합작 운동은 막을내렸다 김구
와 김규식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4김회담’)을 추진했으나 분단을 막지는 못하였다 남북협상은 한국인들이 분단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자 통일운동의 기원이되었다 1948년5월10일 총선거를 통해국회결성 제헌헌법제정 정 부통령 선출이 이루어졌으며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4-3) 한국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1950년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전쟁초 북한은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였다 10월 중순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바뀌어 1·4후퇴를맞았다 그로부터 2년동안 전선은 38선부근에서 고착되어 고지전이 계속되었다 1951년7월 유엔군과 공산군이 정전협상을 시작하여 19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 되었다.
2017년 워크북 14강 문제 작성자 -김추경 |
1.해방과 38선 분할 그리고 좌우익 대립의 격화
1)1945년 해방전후의 정세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② 한국은 일본 패망 즉시 독립국가 수립을 보장 받았다
③ 미국은 한반도에 4대강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
④ 한국은 배방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되었다
2)1945년 8월15일 해방직후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해 한국인들이 조직했던 기구는
① 건국준비위원회 ② 대한민국 임시 정부
③ 미소공동위원회 ④ 남조선 과도정부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건국준비를 위해 자신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 을 중심으로 건설한 정권 예비기관. 여운형은 이에 앞서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정치범 석방 및 3개월간의 식량확보,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에 대한 불간섭 등 5개항을 조건으로 치안권을 인수했다.
그해 8월 16일 여운형은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안재홍은 경성방송을 통해 치안권 인수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결성을 알리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는 경위대(警衛隊)와 정규군 편성, 식량확보, 통화 및 물가 안정, 정치범 석방 등이 언급되었다. 건준은 8월 17일 제1차 부서 결성을 하여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백, 선전부장 조동호, 무경부장 권대석 등을 임명했다. 산하단체로는 치안확보를 위한 건국치안대, 식량확보와 보급을 위한 식량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 중앙조직 간부들은 처음에는 대체로 여운형·조동호·최근우 등의 조선건국동맹 계열, 안재홍·이규갑·권태석 등의 신간회(新幹會) 계열, 정백 등의 장안파(長安派) 조선공산당 계열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조직 개편에 따라 점차적으로 조선건국동맹 계열과 장안파 조선공산당 계열이 강화되었고, 신간회 계열이 이탈하여 좌파가 강화되었다. 지방에서도 건준 지부들이 중앙조직의 지시 아래, 또는 독자적으로 결성되어 지방의 치안을 관장했다. 1945년 8월말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준 지부가 결성되었다.
이후 건준이 해체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됨에 따라 대부분의 건준 지부들은 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을 계속했다. 건준은 8월 25일 선언과 강령을 채택했는데, 선언에서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의해 국가건설의 준비기관과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의 집결체로서 결성되었음을 밝혔다.
강령은 ①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전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등의 3가지를 채택했다. 중앙 건준의 간부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리문제나 토지문제에 대한 견해가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배제시킨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중앙 건준 간부들의 구성 및 이념적 지향을 살펴볼 때 건준에는 자유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세력들이 공존했고, 조직개편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중도세력과 좌파를 망라하고 있었다.
또한 건준은 지부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건준은 국민들의 지지하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반민주적 반동세력을 제외한 민주세력의 통일전선적인 정권예비기관이었다. 건준은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됨에 따라 10월 7일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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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원회:1945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들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회동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안을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격렬히 대립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설치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다 결국 좌초되었고, 한반도는 남북 분단의 길로 접어든다. 배경 ▶1943년 제1차 카이로 회담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되다. ▶1945년 미국, 영국, 소련 3개 연합국이 참여한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리다. ▶1946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으로 반공을 선포하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는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기본 구성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얄타에서 미 대통령 루스벨트(F. D. Roosevelt)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20~30년간 한국을 신탁통치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소련 수상 스탈린(I. V. Stalin)도 신탁통치라는 기본 구상에 동의했다. 앞서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제안에 따라 한국의 자주독립을 유보하고 ‘적당한 절차를 통해’ 한반도를 독립시킨다는 안이 결정된 바 있었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구체적인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확정되었다.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발표된 ‘한국 문제에 관한 4개 항의 결의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주의 원칙 아래 독립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셋째,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 정부가 공동으로 조선을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3상회의에서 미국은 국제연합(유엔)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제안했고, 소련은 임시정부 수립 후 이를 통해 4개국이 원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두 가지 방안을 절충한 것이 4개 항의 결의서였다.
이 결의안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 방안은 민족의 분단을 저지하고, 경과에 따라 신탁통치를 완화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장치로 활용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3상회의의 결과가 처음 국내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임시정부 수립 방안보다 신탁통치안이 최대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각 정파와 국민들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우익 진영은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 소련의 적화야욕에 따라 제2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이라고 선전하며 곧바로 신탁 반대 운동에 들어갔다. 찬탁론자는 곧 반역자로 규정되었다. 귀국한 중경 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 등은 1946년 2월 17일 신탁통치 반대 비상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를 결성하는 등 반탁 운동을 통해 우익 세력의 정치적 결속을 강화해 나갔다. 좌익은 초기에는 반탁 입장이었으나, 임시정부 수립안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결국 3상회의의 결정안을 총체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은 우익 세력의 국민회의에 맞서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을 발족시켰다. 이후 좌익과 우익은 각각 민전과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찬탁과 반탁으로 격렬히 대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미소 공동위원회의 주된 과제는 한국 내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임시정부가 참여한 가운데 4개국 신탁통치 협약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의 협의 대상인 정당과 사회단체를 어떻게 선정할 것인지를 놓고 미국과 소련이 팽팽히 맞서면서 회의는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협의 대상으로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는 임시정부 구성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 자명했고, 이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두고 미국과 소련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등이 참석했다.
소련은 3상회의의 결정안에 반대한 정당, 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이에 반박했다. 결국 양국은 4월 18일 ‘3상회의 결의에 지지를 표명하는 서명을 하면, 반탁 행위를 했더라도 임시정부 수립의 협의 대상으로 삼겠다’라는 취지의 공동성명 5호를 발표하면서 서로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우익의 한국독립당은 협의 참가는 곧 신탁통치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협의에 참가할 수 없다며 반발했고, 한민당도 협의는 가능하지만 신탁은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가 4월 27일 특별성명을 통해 ‘서명한다고 해서 그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신탁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자, 우익 진영은 공동성명 5호를 지지하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련이 “하지의 성명은 공동성명 5호의 합의 내용에 벗어난다.”라며 반박했다. 특히 소련은 미국이 남한 쪽의 협의 대상으로 제시한 20개 정당, 사회단체 가운데 민전 소속 정당, 단체는 세 개뿐으로 나머지는 3상회의의 결정을 반대하는 우익 세력이라는 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조선부녀총동맹,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의 단체들이 제외되어 있다는 점을 문제시했다. 미국은 소련이 제시한 북한 쪽 협의 대상에는 우익 단체가 포함되지 않았으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은 파괴적 폭력 단체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미국은 또 38도선 철폐 문제와 남북 간 경제적 통일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의했고, 이에 대해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의 설립 목적에 벗어나는 문제라며 거부했다. 미소 양국의 이견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5월 6일 휴회 상태에서 결렬되었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우익에서는 반공, 반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승만은 6월 3일 “무기 휴회된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미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졌으니,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를 조직해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한다.”라며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반면 좌익의 민전에서는 6월 10일 6·10만세운동 기념 시민대회 등을 통해 미소 공동위원회의 재개와 이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을 촉구했다.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단독 정부 수립 주장까지 나오자 여운형과 김규식은 7월 하순 남북 분단을 막고 중도적인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좌우익 인사 다섯 명씩으로 좌우 합작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이어 10월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좌우합작의 임시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 토지 개혁과 중요 산업 국유화, 친일파 및 민족 반역자 처벌조례 성안 등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다.
하지만 미 군정이 12월 좌우 합작위원회와 한민당 인사를 중심으로 하고 김규식을 의장으로 하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자,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 좌파는 남한만의 입법기구 조직에 반대하며 좌우 합작위원회에서 탈퇴했다. 미 군정은 지역 유지들의 간접 선거를 통해 우파 중심의 입법의원을 구성한 데 이어 1947년 2월에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고, 5월 17일에는 남조선 과도 정부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앞서 입법 의원들은 1월 신탁통치 반대 긴급결의안을 채택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협의 대상의 좌우 비율 문제 등으로 미국과 소련은 또 다시 신경전을 벌였다. 소련은 남한 측 등록단체 425개를 118개로 줄이고, 반탁운동을 벌이는 정당, 단체를 협의 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반탁운동은 표현의 자유’라는 입장을 거듭 밝히며 이를 거부했다. 소련은 미국이 제안한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 회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은 소련의 반대 속에 한반도 문제를 미국을 지지하는 세력이 우세한 국제연합으로 넘겼다. 결국 10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최종 결렬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약 1919년 중국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자들이 수립했던 임시정부. ·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상해를 거점으로 1919년 9월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되었다. 상해에 있던 시기(1919∼1932)에는 국내외동포사회에 통할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 통할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초기의 독립전쟁은 만주와 연해주(沿海州)의 독립군단체에 일임하고,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의 운영과 외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베르사이유 강화체제에 의한 국제적 안정기조를 고집하는 열강의 냉대와 일제의 추격에 의한 국내조직의 파괴, 그리고 상해·만주·연해주·하와이 등 해외 각처에 산재한 동포사회 사이의 교통·통신의 장벽과 당해국가인 중국·소련·미국 등의 방해 또는 방관적 비협조로 애초의 계획대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 위에 헌정을 기초로 한 민주공화정부 체제였으나, 운영 기술이 미숙하여 국민적 지지기반이 붕괴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독립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기반을 회복하는 어떤 방도를 찾아야만 하였다.
그래서 정부 외곽에서는 공론(公論) 수합을 위해 국민대표회(1923)가 소집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헌법개정을 단행하였으며(1925·1927), 민족유일당촉성운동(1927) 등을 추진하였지만, 침체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의거로 활로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발악적인 반격으로 상해를 떠나게 되었고,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1937)으로 중국 각처를 옮겨 다녀야 하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상해(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江, 1939)·충칭(重慶, 1940) 등지를 차례로 이동하며 기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39년 치장으로 옮긴 뒤부터는 전시체제로 정비함으로써 정상적 운영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뒤 곧 충칭으로 옮겼는데, 그 곳에 있는 동안(1940∼1945)에는 상해시대처럼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성과는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여, 때마침 일어난 태평양전쟁에 임하여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발하고 연합군과 함께 중국·인도·버마 전선에 참전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주로 중국정부를 통로로 국제외교도 강화하여 카이로선언(1943)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약속도 받았다. 그리하여 건국강령(建國綱領)을 발표(1941)하고 헌법을 개정(1940·1944)하면서 광복 한국의 새로운 통치기반을 다져나갔다. 이와 같이 한때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27년 동안 전개한 활동과 그간의 세계사를 고려하면 영고성쇠의 과정은 당연하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추가자료-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5017 |
남조선 과도정부요약:1946년 미군정청이 행정권의 민정이양을 위해 잠정적으로 설치하였던 집행부. 1946년 3월, 「군정법령」제64호로써 군정청 기구의 국(局)을 부(部)로 개칭하면서 군정청 기구가 대체로 확립되고, 이를 전후하여 각 부처장에는 한국인이 채용되어 한미 양부처장제를 실시하였다. 그 해 9월 미군정 당국은 부장회의 석상에서 군정장관 러치(Lerche, A. L.)의 특별발표를 통해, 군정하의 행정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 발표에서 미국인은 고문으로 남아 부결권만 행사하며, 종래 한미 양국어로 사용하던 문서는 한국어만을 사용하도록 하는 조처가 단행되었다. 이 원칙에 따라 1947년 2월 한국인 부처장을 통괄하는 민정장관에 안재홍(安在鴻)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군정 2년을 맞이하게 되었고, 1946년 12월에는 김규식(金奎植)을 의장으로 하는 관선 45명, 민선 45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창설하여, 당면한 제반 법령을 한국인들의 손으로 제정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사법부 대법원장에 김용무(金用茂)와 아울러 미군정이 이른바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을 갖춘 통치기관이 성립된 셈이었다.
6월 「군정법령」제141호에 의한 38선 이남 지역의 입법·행정·사법 각 부문의 재조선미군정청한국인기관(在朝鮮美軍政廳韓國人機關)을 남조선과도정부라고 부르기로 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미군정이 점차로 이양되는 절차를 밟았으나, 실권은 거부권을 가진 미국인 고문에게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과도정부는 기구개혁위원회를 설치하여, 현실적인 기구개혁안을 작성하고 이를 실시하였다.
한편 7월에는 당시 미국에 있던 개화운동의 선구자인 서재필(徐載弼)을 한미인최고의정관(韓美人最高議政官)으로 맞이하여 군정의 고문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이른바 군정의 조선인화에 더욱 진전을 보게 되었다.
남조선과도정부의 기구로는 종래의 13국 6처를 13부 6처로 하는 동시에, 인사위원회와 중앙경제위원회를 신설하였다. 그 동안 군정장관도 경질되어 1946년 12월에는 소장 아놀드(Arnold, A. V.)의 뒤를 이어 소장 러치가, 1947년 10월에는 러치의 사망으로 소장 딘(Dean, W. F.)이 뒤를 이었다. 과도정부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과 동시에 자동 소멸되었다. |
3)해방초기 주요사건의 흐름을 순서대로 연결한 것은?
①모스크바 3상회의 -제1차미소공동위원회 -4당캄파-좌우 합작운동
②모스크바 3상회의 -4당캄파-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좌우합작운동
③좌우합작운동-모스크바3상회의-4당캄파-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④좌우합작운동-4당캄파-모스크바3상회의-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모스크바 3상회의:요약 1945년 12월 16~25일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상회의. |
4당캄파:1945년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발표 이후 1946년 1월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 ①한국민주당, ②국민당, ③조선인민당,④ 조선공산당 등 좌우익의 주요 정당이 모여 합의한 이른바‘4당 캄파’에 반대했어요./결국 3상회의의 결정은 반탁운동 진영과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진영 간에 대립을 격화시켜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데올로기를 떠나 정치 세력 간의 통합을 위한 노력으로 4당 캄파가 조직되었으나 합의가 나온 다음날 임정의 일부 정치인이 이 회합에 참여하여 합의문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그 직후 한국민주당은 반탁의 입장을 견지할 것을 발표했다. 좌우 세력 간의 대립을 막고 좌우 통합을 통해 통일된 민주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
제1차미소공동위원회:1945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들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회동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안을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격렬히 대립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설치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다 결국 좌초되었고, 한반도는 남북 분단의 길로 접어든다. |
좌우합작운동:요약 1946년 김규식·안재홍 등 중도 우익 정치 세력과 여운형·백남운 등 중도 좌익 정치 세력이 손잡고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여 통일된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활동. 1946년 5월 8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 무기 휴회로 들어가자 좌우익 단체의 반목이 극도에 달했다. 이에 민주 통일 전선의 구축을 목표로 6월 14일 미군정 정치고문 L. 버치 중위의 지원 하에 김규식·여운형을 각각 대표로 하여 좌우 합작 위원회가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좌파는 7월 27일 합작 5개 원칙을 발표하여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의 지지를 표명했고, 우파는 7월 29일 합작 8개 원칙을 발표하여 반탁 입장을 취했다. 좌익측의 빈번한 불참으로 결렬된 좌우 합작 위원회는 신탁 통치 문제와 토지 문제에 대한 좌우익 간의 심한 의견 대립과 분열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김규식·안재홍 등 중도 우익 정치 세력과 여운형·백남운 등 중도 좌익 정치 세력이 손을 잡은 좌우 합작 운동은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여 통일된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좌·우익 양 세력의 반대와 미군정의 정략적 고려 때문에 실패했다. |
4)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정치지도자를 맞게 제시한 것은
가: 김 구 나, 김규식 다. 여운형 다, 이승만 |
①가,나 ②나,다 ③ 다,라 ④ 라,가
5)1948년 5-10 총선거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많지 않은 것은?
① 5?10 총선거는 한국 역사상 처음 실시된 보통선거였다
② 5?10 총서거는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③ 5?10총선거로 결성된 국회에서 정?부통령을 선출하였다
④ 5?1 총선거에서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6)다음 중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있었던 일은?
① 모스크바 3상회의 ②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③ 5.?10총선거 ④ 농지개혁
모스크바 3상회의:요약 1945년 12월 16~25일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상회의. |
건국준비위원회조직: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건국준비를 위해 자신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 을 중심으로 건설한 정권 예비기관. 여운형은 이에 앞서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정치범 석방 및 3개월간의 식량확보,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에 대한 불간섭 등 5개항을 조건으로 치안권을 인수했다. |
5.?10총선거: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국회 구성을 위한 국회 의원 총선거.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의에 따라 구성된 미소 공동 위원회가 1947년 10월 이후 결렬되고, 이후 미국에 의해 한국 문제가 국제 연합(UN)에 상정되었다. UN에서 한국 문제는 미국의 총선거 실시 주장과 소련의 외국군 동시 철수 주장이 대립되었다. 결국 UN 감시하의 총선거가 결정되어 UN 한국 임시 위원단이 구성되었다. 위원단은 1948년 1월 12일부터 임무에 착수했으나, 소련군이 북한 지역 입경을 거부하여 북한에서는 총선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선거는 남북 협상파 및 중도파의 불참 속에서 1948년 5월 10일 강행되었다. 선거권은 만 21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피선거권은 만 25세 이상의 국민에게 주어졌으나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일제 때 판관·임관이었던 자들에게는 선거권 또는 피선거권을 주지 않았다. 선거는 보통, 평등, 비밀, 직접 선거로 치러졌으며. 선거 결과 모두 198명이 당선되어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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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요약 한국의 농지개혁은 8·15해방을 계기로 실시되었으며, 일제의 지주적 토지소유를 해체하고 농민적 토지소유를 확립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일반농지는 정부가 수립된 후에 분배되었다. 1948년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에 농지개혁 실시를 규정함으로써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제정·공포되었고 1950년 3월 10일에는 이 법의 개정법이 공포되었으며, 3월 25일 농지개혁법 시행령, 4월 28일 시행규칙이 공포됨으로써 농지개혁은 본격적인 실시단계에 접어들었다.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몰수 또는 국유로 된 농지와 소유권의 명의가 분명치 않은 농지는 정부에 귀속했다. 농지개혁은 1968년 3월 13일 농지개혁사업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으로 일단락되었다 |
7) 한국전쟁의 주요사건을 순서대로 연결한 것은?
① 인천상륙작전-1?4후퇴 -정전협상
② 인천상륙작전-정전협상-1?4후퇴
③ 1?4후퇴-정잔협상 -인천상륙작전
④ 1?4후퇴-정전협상-인천상륙작전
8)정전협상 의제가운데 오랜 기간 논란이 되었던 것은?
①국경선 문제 ②정전 감시 문제
③포로 문제 ④평화협정 문제
9)한국 전쟁기간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닌 것은?
①국회 프락치 사건
②한국 인도교 폭파사건
③국방방위군 사건
④부산정치 파동
국회 프락치 사건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현역 국회의원 10여 명이 검거되고 기소된 사건.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소장파’ 국회의원들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들이 기소된 이유는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에 외국군 철퇴와 군사고문단 설치에 반대하는 진언서를 제출한 행위가 남조선노동당 국회프락치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모두는 혐의사실을 부인했으나, 재판부는 고문으로 인한 허위진술의 자백 내용과 신빙성이 검증이 되지 않은 암호문서를 근거로 1950년 3월 14일에 국회의원 13명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역사적 배경
결과-국회에서 ‘소장파’ 의원들이 제거됨으로써 국회의 대정부 견제기능은 현저히 약화되었고, 이 때문에 1950년 9월까지였던 반민족행위처벌법의 공소시효가 1949년 8월 말까지로 대폭 단축시키는 개정안이 1949년 7월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의의와 평가-국회프락치사건은 1949년 6월 6일에 발생한 경찰에 의한 반민특위습격사건과 6월 26일에 발생한 김구 암살사건과 더불어 이승만 정권의 ‘6월 공세’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던 ‘소장파’ 의원들이 국회에서 제거되면서 정부에 대한 국회의 견제기능은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해방 직후부터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려는 흐름 역시 거의 끊기게 되었다. 또한 국가보안법이 헌법을 능가하게 되는 체제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추가자료-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6576 |
한국 인도교 폭파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漢江人道橋爆破事件)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민간인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개요-정부는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있던 둘 밖에 없던 다리였던 한강철교와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4] 한강대교(인도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5] 한강대교(인도교)는 폭파됐지만 화물을 수송하던 한강철교는 제대로 폭파되지 않아 조선인민군은 약간의 보수공사 후 빠르게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책임 소재-한강 철교의 폭파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1962년 재심에서 폭파 명령의 책임은 채병덕에게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지만, 최창식의 고문이었던 미군 크로포드 소령은 당시 폭파명령을 내린 것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라고 증언했다. 당시 지휘계통상 채병덕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던 사람은 하우스만 대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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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방위군 사건-국민방위군 사건(國民防衛軍 事件)은 한국전쟁중 1951년 1월 1·4 후퇴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2월 사이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 가운데 아사자, 동사자가 약 9만에서 12만여 명에 이르렀던 사건을 말한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 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최초에 대동청년단 단장 김윤근을 육군 준장에 임명한 뒤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추가로 병력을 모집하였다. 부사령관에는 독립운동가 출신 윤익헌이 대령으로 특별 임명된 뒤 보직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 할 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1951년 봄이 돼서야 이 사건이 국회(당시 부산)에서 폭로되어 드러남으로써, 이 사건으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진상규명되는 과정에서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상규명이 방해받는 것을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은 제1공화국 정부에 크게 실망감을 느껴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였다. 또한 야당 내에서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던 한민당과 민국당계 인사 조병옥, 윤보선, 김성수 등이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된다. 또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군입대 기피현상 증가 및 이승만 내각의 신뢰도는 급격히 실추하게 된다. |
부산정치 파동-요약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라남북도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같은 해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이 공포되기까지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발생한 일련의 정치적 소요사건이다. 1950년 5.3 총선거 결과 국회는 60%이상의 무소속의원들이 당선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직 연임에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해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개헌안을 내놓은 동시에 세력기반 확충을 위해 자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개헌안이 부결되자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장택상을 임명했다.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데 이어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구속하는 등 국회 기능을 마비시켰다. 장택상은 발췌개헌을 추진하여 통과시켰다. 1952년 7월 28일 비상계엄령이 해제되고 정치파동은 일단락되었다. |
10)한국전쟁의 결과와 영향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전쟁으로 일반국민들이 큰피해를 입었다
②남한의 반공주의체제가 강화 되었다
③정전협상 체결로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
④북한의 김일성이 권력을 강화 하였다
제14장 해방과 분단 장별 문제 정리(2017년 개편교재에 맞춤) 국어국문학과(졸) 능소니(김선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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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북협상에 앞장선 인물들을 꼽는다면? ☞ 교재 332쪽
가. 이승만 나. 박헌영 다. 김구 라. 김규식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2. 한국전쟁 휴전회담에 대해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미국은 포로들의 자원송환을 주장했다. ② 북한과 중국은 자동소환을 주장했다.
③ 이승만은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기도 하였다. ④ 휴전회담은 남북 당국만이 참여하였다.
☞ 교재 338~342쪽 : ④ 전쟁을 멈추기 위한 협상(정전협상)은 유엔군과 공산군이 참여하였다.
3. 해방 후 새 국가 건설을 준비하기 위해 여운형, 안재홍 등이 조직한 과도기적 기구는?
① 한국민주당 ② 조선공산당 ③ 한국독립당 ④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교재 325쪽 : 개편교재에는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한국인들은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4. 한국전쟁 이전 한반도의 정세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은 것은?
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점령 하였다.
②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었다.
③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를 찬성하였다.
④ 남한 단독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교재 335~336쪽 : ③ 김구의 한독당을 비롯하여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남로당 등은 단독선거가 민족을 분열시킨다며 반대했다.
5. 해방 직후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대부분 친일세력이었다. ② 미군정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③ 새 국가 건설을 준비하기 위한 과도적 기구였다. ④ 이승만, 김구가 함께 조직했다.
☞ 교재 308쪽 : 개편교재에는 자세한 설명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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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48년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일어난 사건은?
① 제주 4·3 항쟁 ② 노근리 사건
③ 국민보도연맹 사건 ④ 남한대토벌 작전
☞ 교재 334~335쪽 : 남로당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2·7투쟁을 벌였다. 제주도의 남로당 세력과 민중은 1948년 4월 3일 새벽 봉화를 신호로 경철지서와 서북청년단을 공격했다.
7. 해방 직후 창당한 ‘한국민주당(한민당)’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김구 등 충칭 임시정부 세력이 결성하였다.
② 새 국가 건설을 준비하기 위한 과도기적 기구였다.
③ 미군정에 적극 협조하면서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④ 미국의 반공, 반혁명 정책과 대립하며 탄압을 받았다.
☞ 교재 328~329쪽 : 한민당은 친일 지주, 자본가 및 친일반민족자 등 보수우익 세력이 창당한 것이다. 이들은 미군정에 적극 협조하면서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8.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북한군은 1950년 38선을 넘어 침략했다. ② 한국군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지휘했다.
③ 유엔은 한국전쟁 참전을 거부했다. ④ 휴전회담에는 남한 정부도 참여했다.
☞ 교재 335~338쪽 : 미국은 유엔군 파견을 이끌어 냈다. ‘한국군 통수권의 미군 이양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유엔군이 한국군의 작전권을 넘겨받아 한국전쟁을 지휘했다. 휴전회담에는 미국과 중국·북한이 참여했고, 한국은 작전권이 없어 참여하지 못했다.
9. 1945년 해방 직후 조직된 단체가 아닌 것은?
① 독립촉성중앙협의회 ② 한국민주당 ③ 대한자강회 ④ 조선인민당
☞ 교재 328쪽 : 대한자강회는 1906년 4월, ‘국법의 범위 이내’에서 주로 교육개발과 식산흥업을 목표로 활동했던 조직이다.(교재 254쪽)
10.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조선공산당, 이승만, 김구 세력 등이 모두 참여했다. ② 여운형, 김규식 등이 중심이었다.
③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를 적극 주장했다. ④ 미국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 교재 330~332쪽 : ? 조선공산당과 이승만, 김구 세력 등은 좌우합작운동에 함께하지 않았다. ?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를 주장한 것은 이승만과 한민당 등의 우익세력이었다. ? 신탁통치에 반대한 것은 김구의 한독당은 물론 이승만과 한민당 등이었다.
11.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가. 김구와 김규식 등이 적극 참여하였다. 나. 이승만은 남한 단독선거를 찬성했다. 다. 4·3봉기로 제주에서는 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다. 라. 소련과 미국의 감독 하에 실시되었다.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333~335쪽 : 김구와 김규식 등은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한 인물들이다. 소련과 북한은 배제한 채 유엔총회에서 결정하여 단독선거가 실시되었다.
12. 한국전쟁 직전의 국내외 정세로 옳은 것은?
① 이승만은 김구를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② 소련은 한반도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③ 중국의 마오쩌둥은 북한의 지원 약속을 거부했다.
④ 38선에서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 교재 335~337쪽 : ? 이승만은 최대 정적이자 반이승만 진영의 중심축이었던 김구를 암살했다. ? 소련은 북한과 경제·문화협정을 맺고, 또 중국과 군사비밀협정을 맺어 군사력을 강화했다. ? 마오쩌둥은 김일성, 박헌영 등과 만나 전쟁 지원을 약속했다.
13. 남한 정국에 우익과 좌익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을 가져온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안은?
① 애치슨선언 ② 미곡 자유판매제도
③ 대소 봉쇄정책 ④ 신탁통치
☞ 교재 326쪽 :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안에서 한국의 전후 처리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한국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는 미소공위와 신탁통치를 협의하여 실시한다’라는 것이었다.
14.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가. 중요 산업 국유화, 토지개혁 등을 실시했다. 나. 여운형, 김규식을 중심으로 모색되었다. 다. 미군정이 적극 지원했다. 라. 조선공산당, 이승만, 김구 세력도 참여했다.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329~332쪽 : ‘가’는 맞지 않는 설명이며, ‘라’ 좌우합작운동에는 이승만, 김구 세력 등이 빠져 있었다.
15.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은 것은? ☞ 교재 335~338쪽
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켰다. ② 미국,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가 강화되었다.
③ 전쟁 이후 분단의식이 강화되었다. ④ 자본주의 진영 간의 전쟁이었다.
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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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은 것은?
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이 참전했다.
② 유엔군이 한국군의 작전권을 넘겨받아 지휘했다.
③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④ 중국은 참전을 거부하였다.
☞ 교재 335~337쪽 : ④ 중국은 10월 중순 본격적인 파병을 시작하였다.
17.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정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은? ☞ 교재 332~335쪽
①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② 제주 4·3 항쟁
③ 여순반란 ④ 5·10 총선거
18. 1950년 10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는?
① 일본 ② 영국 ③ 중국 ④ 프랑스
☞ 교재 337~338쪽 : 개편교재에서는 자세한 설명은 빠졌다.
제 14장 답 안 | 1-5 | 6-10 | 11-15 | 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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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안 : 34433 13132 24424 413 |
제14-15장 장별. 기말문제 (2016년-2012년) 자료출처:2학년 담당투터 문화교양과 이선아교수 클릭 http://tutor.knou.ac.kr/tutor/dtt/site/initTutrStudDtlRetrieve.do 정답과오답해석작성 : 문화교양과 김추경 |
2016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31.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조선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안재홍과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조직한 것은?
① 북로군정서
② 근우회
③ 독립협회
④ 조선건국준비위원회
① 북로군정서-요약 북간도에 거주하던 민족주의자들은 1919년 대한군정회를 조직해 3개 대대에 약 1,100여 명의 병력을 갖추었다.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이미 독립군부대를 편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구별해 북로군정서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간부들은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총사령관 김좌진 등이다. 1920년 김좌진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전투 등 5차례의 전투를 단독으로 수행했으며, 어랑촌 전투 등 2차례의 전투를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와 공동으로 수행했다. 1921년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일본군을 피해 모인 여러 독립군단체들을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으나 1921년 자유시사변으로 해체되었다. |
② 근우회-1927년 여자의 단결과 지위향상이라는 강령으로 창립총회를 열었고 근우회 해산론이 대두되던 1931년초까지 70여 지회가 국내외에 조직되었다. 여성 지위향상을 위해 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봉건적 민습과 미신타파, 조혼폐지 및 결혼의 자유, 부인노동의 임금차별 철폐 등으로 사회구조적 문제와 경제적 차별에 문제를 제기했다. 1931년 신간회 해소를 결의는 근우회 해소에도 영향을 끼쳤다. 근우회 해소의 주요원인은 일제의 탄압, 사회주의 운동계의 행동통일, 여성지도자의 지도력 문제 등이었다. 근우회는 계몽적 범주의 여성운동을 여성해방운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점에서 한국 근대여성운동사의 중요한 장을 이루어 한국여성해방운동의 모태로 평가된다. 차미리사·김영순·김활란·김일엽·길정희·정칠성·조원숙·유영준·이현경·박원·최은희·정종명·신알벳트·황신덕 등 사회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는 여의사·교사·기자·종교인·문학인·실업인 40여 명은 1927년 4월 26일 발기인 총회를 열었다. 창립총회는 1927년 5월 27일 YWCA 강당에서 회원 150명, 방청인 1,000명의 참석 아래 유옥경의 사회로 21명의 집행위원을 선출했다. |
③ 독립협회-설립 -1896년 7월 2일 성격-사회정치단체 설립자-서재필(徐載弼) 요약-189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정치단체. 1896년 7월부터 1898년 12월에 걸쳐 열강에 의한 국권 침탈과 지배층에 의한 민권 유린의 상황 속에서,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사상에 의해 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운동을 전개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1896년 7월 2일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하여 발족되었다. 창립자인 서재필(徐載弼)은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해 민주주의와 근대 문명을 익혔다. 의사생활을 하고 있던 중, 갑신정변 주모자들에 대한 반역죄가 사면되고 개화정부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서재필은 조국에 자유와 독립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포부를 안고 11년 만에 환국하였다.
서재필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으로 민중을 계발하고자 하였다. 자각된 민중의 힘으로 조국을 ‘자주독립의 완전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적 단체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던 것이다. 이에 앞서 서재필이 같은 목적에서 창간한 ≪독립신문≫은 독립협회 창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당시 사회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주독립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강령을 내걸었다. 구미파의 총본산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세력, 갑오개혁의 주동 인물들의 모임인 건양협회(建陽協會) 세력, 자주개화정책을 추구하는 실무급 중견관료층 세력 등, 당시 형성되고 있던 각계각층의 신흥 사회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朝鮮建國準備委員會 요약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건국준비를 위해 자신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 을 중심으로 건설한 정권 예비기관. 여운형은 이에 앞서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정치범 석방 및 3개월간의 식량확보,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에 대한 불간섭 등 5개항을 조건으로 치안권을 인수했다. 그해 8월 16일 여운형은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안재홍은 경성방송을 통해 치안권 인수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결성을 알리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는 경위대(警衛隊)와 정규군 편성, 식량확보, 통화 및 물가 안정, 정치범 석방 등이 언급되었다. 건준은 8월 17일 제1차 부서 결성을 하여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백, 선전부장 조동호, 무경부장 권대석 등을 임명했다. 산하단체로는 치안확보를 위한 건국치안대, 식량확보와 보급을 위한 식량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 중앙조직 간부들은 처음에는 대체로 여운형·조동호·최근우 등의 조선건국동맹 계열, 안재홍·이규갑·권태석 등의 신간회(新幹會) 계열, 정백 등의 장안파(長安派) 조선공산당 계열 등으로 구성되었다.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됨에 따라 10월 7일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
그러나 조직 개편에 따라 점차적으로 조선건국동맹 계열과 장안파 조선공산당 계열이 강화되었고, 신간회 계열이 이탈하여 좌파가 강화되었다. 지방에서도 건준 지부들이 중앙조직의 지시 아래, 또는 독자적으로 결성되어 지방의 치안을 관장했다. 1945년 8월말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준 지부가 결성되었다. 이후 건준이 해체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됨에 따라 대부분의 건준 지부들은 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을 계속했다. 건준은 8월 25일 선언과 강령을 채택했는데, 선언에서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의해 국가건설의 준비기관과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의 집결체로서 결성되었음을 밝혔다.
강령은 ①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전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등의 3가지를 채택했다. 중앙 건준의 간부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리문제나 토지문제에 대한 견해가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배제시킨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중앙 건준 간부들의 구성 및 이념적 지향을 살펴볼 때 건준에는 자유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세력들이 공존했고, 조직개편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중도세력과 좌파를 망라하고 있었다.또한 건준은 지부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건준은 국민들의 지지하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반민주적 반동세력을 제외한 민주세력의 통일전선적인 정권예비기관이었다. |
32. 1945년 해방 직후 조직된 단체가 아닌 것은?
① 독립촉성중앙협의회
② 한국민주당
③ 대한자강회
④ 조선인민당
가-대한자강회 大韓自强會 설립-1906년 4월 /성격 사회운동단체 해체-1907년 8월 설립자-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김상범, 임진수 대표자-윤치호(尹致昊) 요약 1906년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운동단체. 대한자강회는 1905년 5월이준(李儁)·양한묵(梁漢默) 등이 조직한 헌정연구회(憲政硏會)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심의성(沈宜性)·임진수(林珍洙)·김상범(金相範) 등 20여 명이 국민 교육을 고양하고 식산(殖産)을 증진해 부국강병을 이루어 장차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1906년 4월에 조직되어 강연회의 개최, 기관지 발행 등을 추진하였다 -중략-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매월 1회씩 열리는 통상회마다 회원 이외에도 일반 대중이 참석할 수 있는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또 이를 일반에게 알리기 위해 『대한자강회월보』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회에서 긴급히 실시되어야 한다고 결정된 사항은 정부에 회원을 파견해 건의, 관철시키려 하였다. 정부에 건의한 사항은 교육활동 측면으로는 학부교과서 편집문제·의무교육 실시·사범학교 설립·각 사립학교 연락건 등이 있다. 이 밖에 사회교육의 일환인 조혼 금지 등을 들 수 있다. 이 단체는 국채보상운동 이후에는 적극적인 현실참여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07년 8월이완용(李完用) 내각의 지시에 따라 내부대신의 명의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5173 |
33.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조선공산당, 이승만, 김구 세력 등이 모두 참여했다.
② 여운형, 김규식 등이 중심이었다.
③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를 적극 주장했다.
④ 미국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34. 1960년 4월 혁명 이전에 발생한 사건은?
① 사사오입개헌
② 한일협정
③ 베트남전쟁 파병
④ 제1차 경제개발계획
35. 1972년 발표된 ‘7ㆍ4남북공동성명’의 평화통일 3대 원칙이 아닌 것은?
① 자주
② 평화
③ 민족대단결
④ 적화
2015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33. 해방 직후 창당한 ‘한국민주당(한민당)’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김구 등 충칭 임시정부 세력이 결성하였다.
② 새 국가 결성을 준비하기 위한 과도기적 기구였다.
③ 미군정에 적극 협조하면서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④ 미국의 반공, 반혁명 정책과 대립하며 탄압을 받았다.
34.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북한군은 1950년 38선을 넘어 침략했다.
② 한국군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지휘했다.
③ 유엔은 한국전쟁 참전을 거부했다.
④ 휴전회담에는 남한 정부도 참여했다.
35.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사건은?
가. 한일협정
나. 사사오입개헌
다. 3ㆍ15 부정선거
라. 베트남 파병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2014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32. 해방 직후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① 대부분 친일세력이었다.
② 미군정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③ 새 국가 건설을 준비하기 위한 과도적 기구였다.
④ 이승만, 김구가 함께 조직했다.
33. 1948년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일어난 사건은?
① 제주 4ㆍ3항쟁
② 노리 사건
③ 국민보도연맹 사건
④ 남한대토벌 작전
2014년 1학기 33번 문제
4ㆍ3항쟁의 현장 제주의 역사에서 가장 큰 상처를 남겼으면서도 한동안 누구도 말할 수 없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4ㆍ3항쟁이다. 4ㆍ19혁명 직후 겨우 일기 시작한 진상규명운동은 이듬해 발생한 5ㆍ16 군사 정변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4ㆍ3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사람들은 옥고를 치렀고, 4ㆍ3항쟁에 관한 글은 판금되거나 필화 사건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군부독재정권은 4ㆍ3항쟁을 은폐 왜곡했고 철저히 금기시 했다. 유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부모가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어려서부터 ‘폭도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장래가 막혔다. 깡그리 불태워져 잿더미가 된 마을로 돌아온 후 굶주림에 벗어나기 위해 맨손으로 척박한 땅을 일구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국민들은 고립무원의 섬에서 발생한 이 처절한 학살극에 대해 사건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교과서는 왜곡된 내용만을 전달했고 언론도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어둠을 가르는 한 발의 총성은 순식간에 제주도를 흔들어 전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라산의 봉우리마다 붉은 봉화가 오르고 이상한 공기가 제주도 전체에 감돌았다. ‘탕’하는 총성은 5ㆍ10 망국선거를 실력으로 저지하기 위한 전무장 세력에 대한 공격 개시의 신호임과 동시에 제주도민 전체의 궐기를 촉구하는 호소였다. 그것은 또 폭력에 의하여 단독 정권을 수립하려는 자들에 대한 일대 철퇴이며 제주 민중의 대대적인 궐기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
1.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2. 망국 단독선거 절대 반대. 3. 투옥 중인 애국자를 무조건 즉시 석방하라. 4.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은 즉각 돌아가라. 5.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6. 경찰대와 테러집단을 즉시 철수시켜라. 7. 한국 통일 독립 만세. |
이러한 슬로건과 함께 3000여 명의 무장ㆍ비무장대원들은 각지의 산봉우리부터 일제히 올려진 봉화와 총성에 동서남북으로 호응하여 봉기의 포문을 열었다.
은밀하게 산에서 내려온 여러 무장대는 전격적인 공격을 가하여 순식간에 제주도 전체를 완전하게 제압했다.
- 박세길 『다시 쓰는 현대사』 중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한라산 정상과 한라산 일대 주요 오름에서 일제히 타오른 봉홧불을 신호로 무장한 세력들이 경찰관서와 우익단체의 사무실에 불을 지르고, 경찰관과 지역유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당시 제주도에 경찰관서가 20군데가 있었는데, 14곳이 불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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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 놈들은 모조리 죽이시오”라고 했고,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道)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신성모는 그보다 한 술 더 떠서 “제주도의 30만 도민이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곧바로 미 군정청과 국방경비대의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되었다. 제주도 전역에 초토화 작전과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다. 유격대는 1949년 초 신년 대공세를 펼쳤지만 토벌군의 압도적인 우세와 지리적인 고립, 그리고 병력보충과 보급품 조달이 중단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야기되었고,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4ㆍ3항쟁으로 제주도는 쑥대밭이 되었다. 그때 희생된 사람이 8만 8000명에 이르렀고, 1만 5000호가 불에 태워졌다. 7만 8000두의 소와 2만 2000필의 말 및 2만 9000마리의 돼지가 도살되었다. 곡류 13만 5000석, 고구마 420만 관, 면화 9만 9000관, 소채 90만 관이 소각되었다. |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 예고장을 살포하고 바다에서는 함대가 경적을 울리고 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그날, 빨갱이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 중학생들을 금학벌판으로 몰고 가 집단 몰살하고 수장한 데 이어 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두고 표창 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 버린 그날 (······) 서귀포 임시감옥소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페너로 혓바닥까지 뽑아버리던 그날, 바로 그날, 관덕정 인민광장 앞에는 사지가 갈가리 찢어져 목이 짤린 얼굴은 얼굴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전봇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 이산하의 시 『한라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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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주도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에는 마을 출신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는 자는 반동이라고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낮에는 토벌대와 경찰들이 찾아와 도피자 검색을 했다. 결국 마을의 남정네들은 낮이나 밤이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4ㆍ3항쟁으로 제주도가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전체 마을 169군데 가운데 130여 군데가 피해를 입었고, 1만 5188가구가 피해를 입었다. 제주 인구의 10퍼센트가 죽거나 다친 4ㆍ3항쟁은 지금도 제주 사람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트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성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 구술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벅적했고, 5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려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
그러나 철부지 우리 어린 것들은 이 골목 저 골목 흔해진 죽은 돼지 오줌통을 가져다가 오줌 지린내를 참으며 보릿짚대로 바람을 탱탱하게 불어넣어 축구공 삼아 신나게 차고 놀곤 했다. 우리는 그 한밤중의 그 지긋지긋한 곡성 소리가 딱 질색이었다. 자정 넘어 제사 시간을 기다리며 듣던 소각 당시의 그 비참한 이야기도 싫었다. 하도 들어서 귀에 박힌 이야기, 왜 어른들은 아직 아이인 우리에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었을까?
현기영의 『순이 삼촌』에 실린 글이다. 1949년 4월에 대대적으로 벌인 토벌작전으로 우두머리인 이덕구가 사살되었고, 그들의 주요 근거지를 점령했다. 토벌대들이 그들의 무기를 빼앗으면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산으로 숨어든 그들은 4년이 지난 1954년까지 저항을 그치지 않았다. 9월 21일에야 스무 명쯤으로 줄어들어 저항 능력을 상실하면서 4ㆍ3항쟁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마지막 폭도가 잡힌 것은 1957년이었다. |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로 남아 가끔씩 들쑤시고 일어나는 것이 4ㆍ3항쟁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1243&cid=43723&categoryId=43730 제주항쟁기념탑 [네이버 지식백과] 4ㆍ3항쟁의 현장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 2012. 10. 5., 다음생각) |
노근리양민학살사건 [老斤里良民虐殺事件 ] 요약1950년 7월 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양민 300여 명을 사살한 사건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미군이 노근리의 경부선 철도 아래와 터널, 속칭 쌍굴다리 속에 피신하고 있던 인근 마을 주민 수백 명을 무차별 사격하여 300여 명이 살해당했다.
1999년 9월 미국 AP통신은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명령에 따라 학살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AP 통신의 보도는 비밀해제된 당시 군 작전명령 중에서 '그들(피난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라는 명령의 원문(原文), 미군 제1기갑사단과 미군 육군 25사단 사령부의 명령서 등 미군의 공식문건 2건과 참전미군 병사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이 외부에 처음 드러난 것은 1960년 민주당 정권 때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하면서였다. 당시 미군측은 소청을 기각하였고, 이 사건은 그대로 역사의 미궁 속에 묻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4년 4월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이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 소설을 출간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이 책에 주목한 《한겨레》은 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그해 5월 4일자로 싣고, 7월 20일자에는 다시 집집마다 '떼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스케치기사로 실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2566&cid=40942&categoryId=31778 [네이버 지식백과] 노근리양민학살사건 [老斤里良民虐殺事件] (두산백과) |
③ 국민보도연맹 사건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의의와 평가 국민보도연맹 평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좌익관련자의 전향 조직으로서 반공활동과 교육, 그리고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살해이다. 조직결성 취지는 일제의 사상보국연맹이나 대화숙을 모방한 좌익 관련자들의 사상전향을 목적으로 반공활동을 주로 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국민보도연맹원이 군인과 경찰,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연행된 후 집단학살된 것은 정부가 전향을 목적으로 결성한 조직에서 소속 국민을 책임지지 못하고 오히려 살해한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5218&cid=46626&categoryId=46626 [네이버 지식백과] 국민보도연맹(사건) [National Guidence of Alliance, Bodo-League, 國民保導聯盟(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④ 남한대토벌 작전 일제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할 목적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개월에 걸쳐 의병세력의 주요 근거지인 전라남도 및 그 외곽지대에 일본군 등을 배치하여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근거지를 상실한 국내 의병세력은 중국 만주 및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457439&cid=46623&categoryId=46623 [네이버 지식백과] 남한대토벌작전 [南韓大討伐作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34.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얻은 성과는 무엇인가?
① 금융실명제
② 대통령 직선제
③ 베트남 전쟁 파병
④ 지방자치제도
35.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가. 경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개발전략이었다.
나. ‘조국 근대화’의 구호를 내걸었다.
다.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적극 받아들였다.
라. 사회복지제도를 크게 확대했다.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2013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33. 해방 후 새 국가 건설을 준비하기 위해 여운형, 안재홍 등이 조직한 과도기적 기구는?
① 한국민주당
② 조선공산당
③ 한국독립당
④ 조선건국준비위원회
34. 한국전쟁 이전 한반도의 정세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점령 하였다.
②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었다.
③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를 찬성하였다.
④ 남한 단독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35. 1960년 4월혁명과 관련된 사건은?
① 한일협정
② 3ㆍ15 부정선거
③ 남북학생회담
④ 베트남 파병
2012년1학기 기말시험문제 |
32. 남북협상에 앞장선 인물들을 꼽는다면?
가. 이승만
나. 박헌영
다. 김구
라. 김규식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33. 한국전쟁 휴전회담에 대해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미국은 포로들의 자원송환을 주장했다.
② 북한과 중국은 자동소환을 주장했다.
③ 이승만은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기도 하였다.
④ 휴전회담은 남북 당국만이 참여하였다.
34. 4월혁명의 전체 전개과정과 관련 없는 것은?
① 2ㆍ28 대구시위
② 3ㆍ15 마산시위
③ 4ㆍ11 마산시위
④ 사사오입개헌
35. 6월항쟁의 결과로 일어난 일은?
① 12ㆍ112사태를 야기하였다.
②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③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었다.
④ 긴급조치를 발표하였다.
제15장 경제 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대장정 |
제15장 요약 (학보.송찬섭교수) |
(15-1). 개발독재 시대의 경제성장
1960년대 경제계발계획 성공으로 한국경제는 성장을 거듭하였다.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도 경제개발계획에 도움이 되었지만 한일관계의 근본적문제를 해결하지못
했고 베트남 파병도 후유증을 남겼다 1960년대말 세계 경제불황을 맞아 경제정책은 중화학공업으로 전환 하였다. 1973년의 오일쇼크로 한국경제는 다시위기를 맞았다
1980년대 신군부하에서 경제안정화 정책이 실시되었으며 이후경제는 신자유주의화의 길을걷기 시작하였다.
(15-2) 냉전체제하에서의 민주화
1960년4·19혁명은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의 힘으로정권을 교체한 사건 이었다 그러나 1961년5·16쿠데타로 군부가 집권했으며 1963년말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적극추진했으며 독재체제를 운영하였다.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발생했고 10·26사건으로 유신체제는 막을내렸다 곧이어 신군부가 등장하여‘서울의봄’과 광주의 민주화 투쟁은 실패하였다.
1987년6월 항쟁은 신군부의6·29선언과 대통령 직선제개헌을 이끌어냈다 6·29선언이 완전한 민주화는 아니었지만 국민의 힘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5-3) 탈냉전 세계화 그리고 다원화
탈냉전 시대가 열렸지만 남북관계는 협력과 긴장을 반복하며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이나 통일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1980년 대한국 경제는 최대의
호황이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 하고OECD 국가중 하나로 발돋움 하였다. 1997년 심각한 금융 위기를 겪어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 났으나 사회에
거대한변화가 초래되고 양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1980년대 이전 과는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다
2017년 워크북 15강 문제 작성자 -김추경 |
1)한국전쟁이후 1960년대까지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1950년대 미국원조는 한국경제 운영의 기초가 되었다.
②한국 정부는 대충자금 용도 결정에 결정적 권한을 행사하였다.
③정정협정 이후 대충자금의 대부분은 군사비로 사용되었다.
④1961년 이후 무상원조가 유상 차관으로 바뀌었다.
2) 1960년대 경제개발 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도움이 되었던 계기는?
가,정전협정 나,사사오입개헌 다,한일협정 라,베트남 파병 |
① 가, 나 ②나,다
③ 다,라 ④라,가
정전협정: 6·25 전쟁에 유엔군과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쟁이 장기화되었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정전 협상 결과 1953년 7월 27일 체결한 협정. 정전 협정은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 총사령관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사이에 체결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정전 협정은 판문점에서 체결되었으며, 6·25 전쟁의 정지와 평화적 해결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 행위와 모든 무장 행동을 완전히 정지시키기 위해 체결되었다.
1948년 8월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같은 해 9월 북한에서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북한은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하고 중국에도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어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자, 무력 통일을 위한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미국이 1950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였는데, 애치슨 라인에 한반도가 포함되지 않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미국이 참전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였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받아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시작하였다. 이후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세를 역전하였지만, 중공군이 참전하여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였다. 이에 유엔군과 중국군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여 정전 협상을 시작하였다. 정전 협정은 양측의 대립으로 1953년에 가서야 체결되었다. |
사사오입개헌: 1954년 제1공화국의 제3대 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 대한 3선제한의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제2차 헌법개정. 1954년 제1공화국의 3대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3선제한의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제2차 헌법개정. 사사오입이란 1954년 11월 27일에 국회개헌안의결정족수의 산정에 1인 이하의 수는 계산하지 않는다는 해석하에 개헌의 가결을 선포하였다. |
한일협정: 1965년 6월 22일 조인되고 12월 18일 발효된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협정. 한·일 협정은 '청구권·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을 말한다. 한·일 협정은 전후 미국에 의해 구상된 동북아시아 평화 체제의 구도 속에서 시작되었다. 1965년 6월 22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기본 조약과 4개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그러나 한·일 협정은 일제 강점기의 죄악상에 대해 일본 측의 공식 사과가 한마디도 없었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문화재 및 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일제가 35년간 강탈해간 한국의 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어업 문제에서는 평화선이 철폐되고 일본 측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 수역이 설정되었으며, 기선저인망 어구의 사용이 허용되어 어자원의 남획이 방치되었다. |
베트남 파병: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주한 미군의 베트남 파병을 차단하기 위하여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가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베트남 파병은 1964년 9월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 이루어졌다. 이 기간 동안 총 4만 7,872명(년 합계 34만 6천여명)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 6천여 회의 군사 활동을 수행하였다. 미국은 한국군 파병의 대가로 한국군의 현대화, 일부 군수 물자를 한국에서 구매하기로 약속하였고,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과 한국 상품의 수출을 지원하였다.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발생한 전쟁 특수는 제2차 경제 개발 계획의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지만, 수많은 전투 병력이 파병되어 이중 5천여 명의 병사들이 전사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고엽제 피해자 문제, 베트남 한국인 2세 문제, 민간인 살상 문제 등 부정적인 결과도 초래하였다. |
3)1970년대 한국경제 상황에 대해 맞지 않은 것은?
①중화학공업 정책이 추진되었다.
②한미합동 경제위원회가 처음조직되었다.
③일부기업들이 재벌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④오일쇼크로 석유가격과 수입 원자재 가격이 올라갔다
4)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의 힘으로 정권을 교체한 사건은?
① 4?19혁명 ② 부마항쟁
③ 광주민주화 운동 ④ 6월항쟁
4?19혁명:1960년 4월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정부 민주주의 혁명.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에 항의하며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정권 교체를 요구했다. 4월 혁명, 4·19의거라고도 한다. 4·19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자유당 정권의 불법·부정 선거였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탄압이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를 정권 비호세력인 반공청년단이 습격하자, 4월 19일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당일 서울에서만 약 130명이 죽고, 1,000여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위가 거세지자 4월 26일 이승만은 사임을 발표했고, 허정의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
부마항쟁:[정의]: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전개된 시민과 학생들의 유신 반대 투쟁.-[역사적 배경]:1970년대 후반 유신 체제는 억압의 강도를 더해가고 경제적 위기와 불평등은 심화되었으며 지배층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였다. 특히 부산과 마산에서는 지역 경제의 침체로 지역민의 생활이 위기로 치닫는 한편 민주화 운동의 발전으로 지역 내 민주 세력의 성장과 결속이 강화되고 있었다.
[경과]:부마 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대학교 교내 시위에서 발화되었다. 10월 15일의 부산대학교에서는 신재식과 이진걸을 중심으로 시위가 시도되었으나 불발로 끝났다. 하지만 시위는 이튿날 다시 시도되었고, 이는 부마 항쟁의 발단이 되었다. 10월 16일 오전 10시경 경제학과 정광민이 앞장 선 시위는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삽시간에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
광주민주화운동:요약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당시 광주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운동. |
6월항쟁:6월 항쟁(六月抗爭)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4·13 호헌 조치[1]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후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 운동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
5)박정희정부 시기에 있었던 일이 아닌 것은?
① 8?3조치 ② 한일협정
③베트남 파병 ④부산정치파동
8?3조치:( 8·3긴급금융조치 八三緊急金融措置) 1972년 8월 3일 공포된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위한 긴급명령 제15호로 실시된 조치.
그 내용은 첫째, 모든 기업은 자체 보유하고 있는 사채를 정부에 신고하고 채권자에게 이를 분할상환 또는 출자로 전환시키고, 둘째, 금융기관은 기업의 단기고리대출금을 장기저리대출금으로 전환하며, 셋째, 정부는 중소기업신용보증기금 및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에 20억 원을 출연하며, 넷째, 정부는 산업합리화자금을 기업에 장기저리로 대여하여 세제상의 혜택을 주는 등 총 7개의 긴급명령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대통령의 내각지시사항으로서 금융기관의 금리인하, 환율 안정, 공공요금 인상 억제, 물가상승 억제, 예산규모 증가 억제 등이 제시되었다.
요약하면 이 조치는 기업에 방대한 규모의 금융 및 조세상의 특혜를 베풂과 동시에 강력한 물가억제책을 천명한 것이다. 그 결과 사채신고액(채권자 신고액이 3,555억 2,000만 원, 채무기업 신고액 3,450억 6,000만 원) 중 3,203억 원이 동결되었고, 금융기관의 단기고리대출금 2,000억 원이 장기저리대출금으로 전환되었으며, 500억 원의 산업합리화자금이 풀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제면에서도 감가상각률의 할증률의 인상 및 국내자원이용 기업의 법인세·소득세의 투자공제율 인상 등의 특혜가 주어졌다. 또한 물가안정시책 차원에서 지시사항 외에 8월 5일 모든 주요상품가격의 동결조치가 발표되었다 |
한일협정: 1965년 6월 22일 조인되고 12월 18일 발효된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협정. |
베트남 파병: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주한 미군의 베트남 파병을 차단하기 위하여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가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베트남 파병은 1964년 9월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 이루어졌다 |
부산정치파동:요약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라남북도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같은 해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이 공포되기까지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발생한 일련의 정치적 소요사건이다. 1950년 5.3 총선거 결과 국회는 60%이상의 무소속의원들이 당선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직 연임에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해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개헌안을 내놓은 동시에 세력기반 확충을 위해 자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개헌안이 부결되자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장택상을 임명했다.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데 이어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구속하는 등 국회 기능을 마비시켰다. 장택상은 발췌개헌을 추진하여 통과시켰다. 1952년 7월 28일 비상계엄령이 해제되고 정치파동은 일단락되었다. 추가자료-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0b0883a |
6)1970년대 초반 국내외 정치상황에 대해 잘못된 설명은?
①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완화되고 있었다.
② 미국정부는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였다.
③ 박정희 정부는 유신체제를 선포하였다
④ 유신체제에서 대통령직선제가 시행되었다.
데탕트정책:미국과 소련의 긴장 완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 1972년 5월 미국 닉슨 대통령과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모스크바 회담 결과 [미·소 관 계의 기본] [SALT] [ABM조약]이 조인되었고, 1973년 6월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방미시 핵전쟁 방지협정이 체결된 이래 두 나라는데탕트 정책을 추진했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때 미·소 [위기 관리 외교]는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 후 소련의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무기 원조 및 쿠바군 파견, 해군력 증강 등으로 미국은 소련이 데탕트 정책에 대해 강한 의혹을 품게 되었다. 그 뒤, 1979년의 카터·브레 즈네프 회담 결과 [SALTⅡ]가 조인되었으나 그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데탕트는 붕괴되었다. 1985년 제네바, 1986년 레이캬 비크, 1987년 워싱턴, 1988년 모스크바에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간에 미·소 수뇌 회담이 개최됨으로써 협조 노선이 정착되어 새로운 데탕트 구축을 형성했다. |
7)1987년 6월 항쟁으로 결과로 이루어진 일은?
① 삼선개헌 ②내각책임제 개헌
③ 대통령직선제개헌 ④ 유신선포
삼선개헌: 1969년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삼선문호를 열어 주기 위해 단행된 개헌. 1969년 제3공화국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삼선 문호를 열어주기 위해 단행된 개헌. 이 3선개헌으로 박정희대통령의 장기집권의 문호가 열렸으며, 유신체제로까지 연장되는 길이 마련되었다. 사진은 1969년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 장면. |
내각책임제 개헌: 1952년 7월 7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번째의 헌법개정. 발췌 개헌안 통과 1952년 7월 7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번째의 헌법 개정.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다. |
대통령직선제개헌 : 6·29 선언(六二九宣言)은 1987년 6월 항쟁에 굴복해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이며 여당의 실질적인 대선후보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이다. 6월 29일 발표해 일반적으로 6.29 선언으로 부른다. 배경과 의미에 대해 정리해 본다. 추가자료-http://oldconan.tistory.com/36386 |
유신선포:(유신 체제)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95만 표 차이로 김대중 후보를 겨우 이긴 데다 5월 총선에서 야당의 약진(신민당 89석), 밖으로의 긴장 완화의 분위기, 그리고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점차 강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공포하고, 12월 6일에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였으며, 12월 27일에는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 을 발동하였고, 이는 유신 체제로 이어졌다. |
8) 1991년 남북한이 합의한 것으로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통일에
접근한 것은
① 7?4 남북공동성명 ② 남북기본합의서
③ 6?15공동선언 ④ 유신선포
7?4 남북공동성명: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조선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 원칙을 동시에 발표했던 성명이다. 중상비방 및 무장도발 금지, 남북적십자회담 실시를 위한 적극협조, 서울과 평양 간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의 합의사항도 포함되었다. 공동 성명의 발표 배경은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와 국내의 정권 안정 및 명분 추구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 성명은 통일 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 없이 정부 당국자들 간의 밀담을 통해 처리되었다는 한계성과 통일 논의를 자신의 권력 기반 강화에 이용하려는 남북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의도로 빛을 잃었다. 그러나 기존의 외세 의존적이며 군사적·이념적 대결을 절대시했던 통일 노선을 거부하고 올바른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
남북기본합의서:1990년9월 4일부터 5차에 걸쳐 개최된 남북 고위급 본회담을 거쳐 1991년 12월 13일 체결한 합의서. 1990년대 초 북한은 경제적인 파탄과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북한의 국제연합(UN) 동시 가입과 남북 고위급 회담을 수락했다. 1990년 9월 4일부터 5차에 걸친 남북 고위급 본회담을 거쳐 남북은 1991년 12월 13일 역사적인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어서 1992년 2월 19일 제6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는 위의 기본 합의서 외에 정치, 군사 및 교류, 협력의 분과 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합의서는 서문과 남북 화해, 남북 불가침, 남북 교류·협력, 수정 및 발효 등의 4장 25조로 구성되었다. 합의서는 분단 46년만에 남북한 정부 당국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 합의로 통일에 대비하는 획기적인 이정표가 마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6?15공동선언: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합의하여 발표한 공동 선언.
2000년 6월 15일 공식 발표되었다.?6·15 남북 공동 성명은 형식적 측면에서 볼 때 남북 정상이 머리를 맞대어 이끌어 낸 합의라는 점에서 이 성명이 갖는 정치적 무게는 종전의 남북 '당국' 간 합의들의 그것을 크게 뛰어넘는다. 내용적 측면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측이 그 동안 사실상 기피해 오던 자주적 통일 원칙을 재천명한 것과 남북 정상이 상대방의 통일 방안인 연방제안과 2체제 2정부의 남북 연합제안의 공통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내 이를 수용할 뜻을 분명히 한 데 있다. 두 정상이 8·15 남북 가족·친척 방문단 교환과 남측의 비전향 장기수 북송을 비롯해 경제·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남북 교류 활성화에 합의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6·15 남북 공동 성명은 남북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실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군비 축소 등의 군사적 대립 완화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
유신선포:(유신 체제)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95만 표 차이로 김대중 후보를 겨우 이긴 데다 5월 총선에서 야당의 약진(신민당 89석), 밖으로의 긴장 완화의 분위기, 그리고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점차 강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공포하고, 12월 6일에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였으며, 12월 27일에는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 을 발동하였고, 이는 유신 체제로 이어졌다. |
9)1980년대 한국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① 3저 현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였다.
② 북방적책을 통해 공산권으로 시장을 확대하였다
③ 사회 민주화는 기업들의 창의력을 높였다
④ 금융위기를 맞아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였다.
IMF에 구제 금융신청-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1997년 12월 3일 ~ 2001년 8월 23일)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IMF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사건이다. 1997년 12월 3일에 이루어졌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외환보유액이 급감했고 IMF에 20억 달러 긴급 융자를 요청하였다. 외환 위기 속에 대한민국은 외환보유액이 한때 39억 달러까지 급감했지만, IMF에서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 간신히 국가부도 사태는 면했다. 추가자료클릭- |
10)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모습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① 청년실업이 중요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②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③ 외국인 증가로 한국사회의 다원화가 진행되었다.
④ “한류”가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15장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대장정 장별 문제 정리(2017년 개편교재에 맞춤) 국어국문학과(졸) 능소니(김선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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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월 항쟁의 결과로 일어난 일은? ☞ 교재 362쪽
① 12.12사태를 야기하였다. ②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③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었다. ④ 긴급조치를 발표하였다.
2. 1960년 4월 혁명과 관련된 사건은?
① 한일협정 ② 3·15부정선거
③ 남북학생회담 ④ 베트남 파병
☞ 교재 354쪽 :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시작한 시위는 3월 15일 마산의 부정선거 규탄시위로 발전했다.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시위는 전국 주요 도시로 확대되어 4월 혁명으로 발전했다.
3.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얻은 성과는 무엇인가? ☞ 교재 362쪽
① 금융실명제 ② 대통령 직선제
③ 베트남 전쟁 파병 ④ 지방자치제도
4.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설명이 옳은 것은? ☞ 교재 347~353쪽
가. 경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개발전략이었다. 나. ‘조국 근대화’의 구호를 내걸었다. 다.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적극 받아들였다. 라. 사회복지제도를 크게 확대했다.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5.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사건은?
가. 한일협정 나. 사사오입개헌 다. 3.15 부정선거 라. 베트남 파병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356~360쪽 : 사사오입개헌과 3.15 부정선거는 모두 이승만 정권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6-10 |
14123 |
6. 1960년 4월 혁명 이전에 발생한 사건은?
① 사사오입개헌 ② 한일협정
③ 베트남전쟁 파병 ④ 제1차 경제개발계획
☞ 교재 354쪽 : 사사오입개헌은 1954년, 한일협정과 베트남전쟁 파병은 1965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1962년이다.
7. 1972년 발표된 ‘7·4남북공동성명’의 평화통일 3대 원칙이 아닌 것은?
① 자주 ② 평화 ③ 민족대단결 ④ 적화
☞ 교재 358쪽 : [도움글 15-8] 참조
8. 1960년 이승만 독재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는 계기가 된 사건은? ☞ 교재 354~355쪽
① 3·15 부정선거 ② 남북학생회담 ③ 한일회담 ④ 닉슨 독트린
9. 1970년 재단사 출신으로 침체된 노동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은? ☞ 357쪽
① 박종철 ② 전태일 ③ 김주열 ④ 이후락
10. 1987년 민주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발표한 것은? ☞ 교재 362~363쪽
① 12·12 사태 ② 10·26 사건 ③ 6·29 선언 ④ 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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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2 |
11. 미국이 농산물수출원조법(PLO480)에 따라 우리나라에 원조한 잉여농산물이 아닌 것은?
① 담배 ② 밀 ③ 면화 ④ 설탕
☞ 교재 347쪽 : 미국이 원조한 것은 설탕, 밀가루, 면화 등이었다.
12.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은?
① 한일협정 체결 ② 베트남 파병
③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④ 금융실명제 실시
☞ 교재 356~360쪽 : 금융실명제 실시는 김영삼 정권 시기의 일이다.
13.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지원을 받은 시기는? ☞ 교재 368쪽
① 1957년 ② 1977년 ③ 1997년 ④ 2007년
14. 1970년 11월, 침체된 노동운동을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은? ☞ 교재 357쪽
① 전태일 노동자의 분신사건 ② 발췌개헌
③ 사사오입개헌 ④ 7.4 남북공동성명
15. 1960년대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은?
① 한일협정 체결 ② 대통령 직선제 개헌
③ 베트남전쟁 파병 결정 ④ 3선 개헌
☞ 교재 354~356쪽 :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1987년 6월 29일 6·29선언에서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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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960년 4월 혁명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 아닌 것은? ☞ 교재 353~354쪽
① 진보당 사건 ② 사사오입 개헌 ③ 발췌개헌 ④ 한일협정
17.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은 것은?
① 중화학공업을 수출주력산업으로 전환했다. ② 정부가 경제개발을 주도하였다.
③ 정경유착이 구조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④ 경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개발전략이었다.
☞ 교재 350~353쪽 : ① 중화학공업을 수출주력산업으로 전환한 것은 1970년대에 해당한다.
18. 1997년 IMF가 한국 경제에 제시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가. 자본시장 개방 나. ‘문어발식’ 기업 확장 다. 수출 제일주의 라. 노동시장 유연화 |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 교재 368쪽 : IMF가 한국 경제에 제시한 것은 자본시장 개방과 노동시장의 유연화였다.
제 15장 답 안 | 1-5 | 6-10 | 11-16 | 16-18 |
32214 | 14123 | 14312 | 414 | |
답안 : 32214 14123 14312 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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