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제국 터키[제12부]이스탄불-피에르 롯티 언덕,보스포러스해협,톱카프궁전
2011년10월13일(목요일) 여행 8일째
밤새 도심의 호텔이라서 그런지 약간의 소란스러움으로 밤잠을 설처 아침이 개운하지 않다.
그렇지만 오늘의 하루가 몹시도 기대가 된다.
오늘은 Pierre Loti 라는 찻집,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람선 관광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보물창고 "톱카프 궁전"을 관람한다.
곤하게 자고있는 마누라를 깨워 샤워하라 이르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풀어 헤쳐진 가방을 앙동거려 다시 정리하고, 충전된 스마트폰 밧데리, 카메라밧데리를 케이스에 넣어 윗옷 안쪽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면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오늘은 또 어떤 아침식사가 준비되었을까?"
배탈이나서 이틀을 못먹었더니 곱창이 땡기는 느낌으로 시장기가 온다.
하던 면도를 대충끝내고 화장하는 마누라를 독촉해서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더니 빵굽는 구수한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나는 여기 터키에와서 놀란것은 빵의 종류가 너무 많다는것과, 우유제품 특히 치즈와 요거트의 종류가 또 이렇게 많다는것을 알았다.
오늘 우리가 아침에 갈 곳은 유명한 Pierre Loti 라는 찻집이다. 이곳은 골든 만 맨 위 상류쪽의 언덕 위 무덤 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이 피에르 롯띠찻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것은 다음과 같다고 하는데, 1876년 프랑스 해군 장교인 피에르 롯티가 이스탄불로 부임한다.
외로운 향수병에 졌었던 이 장교는 터키에서 아지야데(Aziyade)라는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이 여인은 이미 결혼한 유부녀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의 눈을 피해 한적한 무덤 가의 이 조그마한 찻집에서 자주 만나곤 하였다.
그런데 피에르 롯티의 근무가 끝나 프랑스로 돌아가자마자 아지아데는 죽었다고 한다. 항간에서는 엄격한 이슬람 가문에서 바람나 지켜야할 법도에 어긋나는 여식은 그들의 율법에 따라 단죄 되었다는것이 정설이나 누구도 정확한 사인은 알 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 후 세월이 지난뒤 롯티는 시인이자 소설가로 유명해져 이스탄불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찻집에 앉아서 터키 커피를 마시며 많은 작품활동을 하였고 아지야데의 무덤을 찾아가는 일과 소설을 쓰는 일로 그의 여생을 보냈다고 하여 이찻집이 유명세를 탓다고 한다.
이 찻집에서 내오는 터키커피는 숯불 위에서 끓인 다음 작은 잔 위에 부어내 오는데, 그 때 잔위의 커피 거품을 그대로 남겨 두어 오랜 전통의 맛을 낸다고 한다.
내가 도착한곳은 “피에르 롯티” 찻집이 있는 언덕아래 주차장인데, 이곳부터 삭도(케이블 카)를 타고 이동한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리자 이곳에서 학교에 가는 여학생들과 마주쳤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반갑게 맞이한다.
K팝의 바람이 불어선지는 몰라도 한국인들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일행들과 사진한 컷을 찍자고하여 그냥 해말은 웃음을 짓는 그들이 너무나 귀엽고 이뻐서 서너컷을 찍었고 시간 때문에 서로 헤어 졌는데 그들이 안보일 때 까지 서로 손을 흔들며 뛰어가는 모습이 참 정겨웠다.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을 오르면서 아침의 골든 만이 보이고 발아래로는 묘지들이 보인다.
우리일행은 찻집의 밖에 꾸며진 식탁에서 준비된 여러 가지 차, 달달한 사과차 부터 전통 터키커피를 주문에 의해서 마셨다.
나는 사실 “피에르 롯티”라는 인물을 나는 여기 와서 처음 알았기에 마음에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애달픈 남ㆍ여 간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골든 혼의 모습을 바라보니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몰라도 뿌여케 안개 낀 골든 만과 조그마하게 보이는 집들은 꼭 내가 우리집 사람과 연애할 때 우리나라의 남산에서 바라다 보이는 한강 그리고 서울의 경치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찻집밖에 준비된 옥외에서 차 한잔을 마시고 피에르 롯티가 자주 찻았던 그 찻집 안으로 들어서서 피에르 롯티가 않아서 책을 보았던 그 자리에서 마누라와 함께 다시 차 한잔을 주문해서 음미했다.
이곳사람들은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유명관광지에 기념품 판매소인것 같다.
찻집 바로 옆에는 궁색하게 보이지만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골목이었는데 조그마한 가게들이 몇 개가 붙어서 장사를 하는데 우리내외가 터키식 부적을 손주한테 주려고 두어개를 사자 너도 나도 사는 모습이 시골장터에온 아낙들처럼 재미있다.
피에르 롯티 언덕을 케이블카로 내려와 부지런히 보스포러스해를 둘러보기 위한 유람선을 타기위해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곳사람들도 우리와 마찬 가지로 나이드신 분들이 낚시대 몇 개 챙겨서 해안에서 낚시를 하는 모습 또한 낫설지 않다.
보스포루스해협 유람선 이용 시 선상에서 맨처음 만나는 돌마바흐체 궁전은 왜 제국이 몰락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전편의 초기에 서술 한바 ‘모든 것이 가득한 정원’이란 뜻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궁전은 화려함과 사치의 극치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궁전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31대 술탄 압둘 마지드가 마지막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는 오스만제국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1853년에금 14t과 은 40t을 들여 대리석으로 새로 궁전을 지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지은 유럽풍 건축물이며,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각각 6개의 발코니와 목욕탕을 가지고 있다.
이궁을 만들면서 국고를 낭비하였기에 오스만 제국은 더욱더 국세가 기울어 지게 되는데,
제국의 쇄락을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러워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함이 조금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한다.
전등 750개가 2층 홀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무게 4.5t의 초대형 샹들리에를 비롯해 36개의 샹들리에와 고급 수제 카펫, 150여개의 벽시계 등 호화스럽게 내부를 꾸몄다. 제국이 공화정으로 바뀐 뒤 프랑스로 쫓겨간 마지막 황태자는 1992년 5박 6일의 아주 짧은 고국 방문 뒤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내가, 나의 부모가, 나의 선조가 나라를 잘 다스렸다면 여러분은 그 옛날의 부귀영화를 아직도 누릴 수 있을 텐데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사연을 소개하면
1992년 8월 한 노신사가 이스탄불 공항에 내렸다.
실로 68년만의 돌아온 83세의 이 신사는 “고국 땅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고 한 경찰이 인사하자 그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노신사가 바로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왕자 이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이제 늙어서 거의 볼 수 없는 시야로 이스탄불에 오게 되었으니…”
보스포러스해협을 지날 때는 “아 아! 이 아름다운 해협…” 하며 눈물이 그치지 않고 계속 흘러내려 바다가 그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경호원에게 부탁하여 차에서 내려 다리 위에 섰다. 아마 이 왕자는 68년 전의 상황을 뇌리에 그려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돌마바체 궁전을 바라보면서….
1924년 3월 3일자로 터키 공화국이 출범한 후 오스만 왕가에는 커다란 파문이 몰려오게 되는데, 모든 왕족들 144명에게 추방령이 내리게 된다.
이 때 술탄 왕실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5세의 어린 왕자 마흐멧 오르한(Mehmet Orhan)은 그 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끼게 되는데,.
2명의 경찰과 경시총감이 눈물을 글썽이며 종이 한 장을 건네 주면서 “저를 용서하십시오. 왕자님, 싸인을 부탁 드립니다.” 이제 막 학교에서 돌아와 자전거를 타려던 어린 왕자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채 읽지도 못하고 싸인을 한다.
24시간 안으로 떠나라는 이 명령서는 왕족들에게 어떠한 이유도 용납되지 않았고, 그리고 재산은 단 한 개도 가져 갈 수 없다는 단서가 붙은 채 1924년 3월5일 이들은 기차와 배에 실려 이날 밤 안으로 국경을 넘어야 했다.
술탄 무랏트 5세의 딸이 홍역을 앓고 있어서 20일간의 출발이 연장된 한 가지 외에는.
이로부터 68년 동안 고국 땅을 밟지 못하는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왕자로서 이미 서있을 땅이 없었다. 망명생활을 하는 왕족들의 집을 이곳 저곳 신세 지다가 드디어 17세가 되자 그는 어느 누구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새로운 나라로 가기로 결심하고 주머니에 단돈 8프랑을 넣고 브라질로 간다.
주석 공장직공, 선박의 화물 나르는 인부, 커피를 포장하는 포장공 등 닥치는 대로 그는 고난 찬 세월을 보내다가 이집트로 오게 되는데 이집트의 왕자들이 그를 알아보고 자동차 한대 살 돈을 꾸어주게 된다.
그는 이 자동차로 장거리 택시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40대 중년이 된 이후 우연히 서방의 신문기자를 자기 차에 태우고 가던 중 자신의 과거 즉 자신은 오스만터키제국의 왕자였으며 지금까지 신분을 숨기고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이를 들은 서방기자는 즉각 신문에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한다.
이일로 자신의 신분이 들어나자 자동차 운전기사를 그만 두게 되고,,,,
또다시 자동차 탁송 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차량을 구매하면 고객의 집까지 배달하는 일이었다.
아무튼 많은 세월을 자동차 운전대와 씨름으로 보낸 후 57세가 되던 해 파리에 있는 묘지에 자리를 얻게 되는데, 미군용사의 묘지를 안내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 덕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1974년까지 매달 190$의 연금을 탈 수가 있었다.
그는 이제 말하기를
"나는 여러 직업을 가졌던 것에 대해 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소. 어떤 일이든 나는 해 내었소. 나는 그 동안 땀으로 번 돈으로 살았고, 내 주머니에 부당한 돈이 들어간 적이 없었소. 동정이나 팁조차 안 받았고 누구에게도 빚이 없소. 나는 오스만 제국의 명예를 더럽힌 일이 없소. 그리고 나의 자식들에게 제국의 마지막 왕손이라는 말을 물려주기 싫어 결혼도 하지 않았소.”
그 당시 터키 땅을 떠난 남자왕족은 50년, 여자는 28년 안으로 귀국을 할 수 없게 법을 제정하였고, 터키 국민으로서의 자격마저 잃게 했다.
50년이 지나자 Mehmet Orhan은 타국에서 유랑하면서도 끊임 없이 귀국 탄원서를 터키 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정부는 이 탄원을 계속 외면했다.
1992년 Turgut Ozal 대통령이 기다리던 그의 방문을 허용하여 이제 꿈에도 그리던 이스탄불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살아서 조국을 밟고자 했던 그의 꿈이 이루어 지게 된 것다.
“왕족 중에서 가장 장수하시는 편인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으셨는지?” 라고 한 기자가 묻자
“나는 조국을 보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다는 일념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어떻게 소일하고 계셨습니까?”
“아침마다 공항 라운지로 나가서 터키커피를 마시며 조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게 내 일과입니다. 나도 저렇게 마음대로 오갈 수가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 죽기 전에 보스포러스를 볼 수 있게 해준 정부에 감사 드립니다”
정이 많은 국민들은 터키정부에 빗발치듯 청원했다.
그러나 왕자는
“아니오. 나는 내 조국에 한번도 세금을 낸 일이 없소. 염치도 없이 어찌 나의 여생을 부탁할 수가 있겠소.”
국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연발하고 5박6일 일정의 방문을 마치고 망명지 프랑스로 떠났다. 조국에 체류하는 동안 눈시울이 한번도 마를 새가 없었던 83세의 이 황태자는
그로부터 꼭 1년 뒤 터키 일간지 신문이 일제히 그의 사망 소식을 보도했다. 그가 자기 숙소 침대에 반드시 누워 숨져있는 것을 이틀 후에서야 발견하게 되었다.
매일 출근 하다시피 하는 공항 라운지의 커피숍에서 그의 모습이 이틀째 보이지 않자 한 웨이터가 왕족의 친척에게 알려주어 발견하게 된 것이다. 터키 기자들이 달려가보니 목욕탕에 빨래를 담가놓은 채로. 잠자는듯이 누워서 한만은 세상과 결별하였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마지막 왕자의 모습이었다.
그가 프랑스 니스로 다시 돌아가서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터키로 돌아가는 터키국민들을 돌보는 것이 그의 마지막 일이었다 힌다. 매일 아침 일찍 나와 커피와 토스트로 가볍게 식사를 하고 터키로 돌아가는 자국민을 위한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 그의 주된 업무가 되었다.
월 190$정도의 연금으로 생활하며 매일 아침 공항라운지에서 터키식 커피를 마시며 터키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것이 마지막 황태자의 일과였다고 한다.
그 황태자 참 슬펐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대한민국 이전의 국호는 고종께서 “대한”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국호는 “대한국”이라고 해야 맞다.
그러나 일부 친일 학자들이 “대한국”을 굳이 “대한제국”으로 불리 우면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1945년8월 일본으로부터 우리 “대한국”이 해방되자. 전승국 미국은 일본이 점령한 우리나라에 미국의 군정을 결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 당시 일본에 볼모로 잡혀있는 영친왕과 그의 아들인 황세손 이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건 참 한심스럽고 통탄해야할 노릇인데,
당연 일본에서 해방 되었다면 국호가 복원되고, 국왕도 복귀하여야 되는 것이 상례인데.
그 당시 상황은 그것이 아니었다.
우리네 사정을 보면,
그 당시 몰락한 조선왕조의 황태자 귀국문제쯤은 안중에조차 없었다. 영친왕은 어린나이에 볼모로 잡혀 순진하게 일본에서 자라나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고급육군장교로 일본을 위해 일을 하게 된다. 배일 감정으로 독기 오른 국민 정서 속에는 그런 황태자를 반길리 없었고, 이슈도 되지 못했다.
내놓으라하는 정객 모두 주인이 없는 혼돈 정국의 주도권을 서로 잡고자 좌우분열과 합종연횡, 서로 잘 낫다고 민중을 선동하고 더 나아가 테러도 일삼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 와중에 왕정복고에 대한 견해마저 자칭 민족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마저 첨예하게 엇갈렸다. 특히 전주 이씨 양녕대군(제3대 태종대왕 장자)파였던 이승만은 왕정체제 환원과 영친왕 환국을 극력 반대했다.
더 나아가 새로 수립한 대한민국 정부는 나라를 망친 장본인들이라며 황실 재산을 국고로 환수시키고 왕손들을 궁핍 속에 방관했다.
같은 시기 일본도 볼모로 잡아 강제로 일본왕실 가족원이된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그리고 그 어린아들에게도 변심했다. 호적을 새로 만드는 신적강하(新籍降下)를 통해 영친왕 가족을 평민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거처와 재산을 몰수했다.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시켜 강제징용 거류민과 동일하게 취급해 곤궁한 생활을 연명하도록 내팽개쳤다.
광복 당시 15세였던 이구는 영친왕(49)과 방자 비(45) 슬하에서 도쿄 학습원을 졸업한 후 195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후견인이 없는 외국 생활은 형극의 가시밭길이었다. 이후 황세손 이구는 1959년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과 결혼하며 미국 귀화하였으나, 1952년 4월 28일 발효된 대일 강화조약에 따라 한국국적 취득하게 된다.
이승만 정권 붕괴이후 박정희 소장이 5.16군사혁명으로 정권이 바뀌고,
1963년 1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의 주선으로 방자 비와 이구는 영친왕과 함께 귀국했다. 김포공항에 첫발을 내디딘 몽환 상태의 영친왕은 “떠나던 날(1907년 12월 5일)도 그렇게 추웠는데 오늘도 바람이 매몰차구나. 이제야 비로소 내 조국, 내 땅이로다”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후 세 가족은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며 은둔 속에 망각돼 갔다.
어느새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분단된 채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고 일본은 한국전쟁 간극을 파고들어 선진국으로 진입해 갔다. 이구는 군사독재와 한·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데모 와중에 1965년부터 서울대·연세대 등에서 건축설계를 강의하며 한국사회에 동화돼 갔다. 그사이 회사설립·사업실패·이혼 등이 이구와 세상을 또 격리시켰다.
이혼 당시 이구 본인은 종친들의 종용으로 대를 잇지 못하는 줄리아 멀록과 강제 이혼했으며 아리타라는 일본 여인과 2005년7월 16일 나가사키의 한 지방 호텔에서 숨지기 전까지 도쿄에서 살았었다.
이후 이구 황세손의 후사는 의친왕 서(序)의 9남인 이갑(이해룡)의 장남 이원(이상협) 씨가 양자로 입후돼 왕실 명맥을 이어 가고 있을 뿐이다.
터키 보스포러스해협의 돌마바흐체 궁전을 보면서 많은 상념에 드는 것은 같이 간 형님이나 나나 전주이씨라서 그런가.
이 보스포러스 해협을 유람선을 승선하면 돌마흐체 궁전과 톱카프 궁전 그리고 궁전을 개조한 츠라한 팰리스 캠핀스키 호텔 등을 지난다.
이 츠라한 팰리스 캠핀스키 호텔은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터키를 방문했을때 묵었었고 또한 한ㆍ터키 상공인 회의를 주제한 곳이라고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이곳은 원래 오스만제국 32대 술탄 압둘 라지즈가 기거햇던 궁전이라고 하는데, 세계적인 호텔체인 업체인 캠핀스키호텔에서 호텔로 개조하여 운영다고 한다.
이곳의 스위트룸의 하루에 1,500만원이 넘는다고 하니 그 호화스러움이 짐작이 가질 않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비싸도 개인의 파티와 결혼식 각종행사에 이 호텔을 찾는 유럽의 부호들이 줄을 섰다고 하며, 어떤 부호들은 이 호텔을 여름에 통체로 빌려서 사용한다고 하니 참 대단한 곳이지만 부자들도 억~수로 많다고 보아야 한다.
좀더 가다보면 제1보스포러스 대교를 지나가 전에 거대한 사원이 하나 나오는데 이것은 오르타콰이 부두옆에 있는 오르타콰이 사원이라고 하며 1856년에 완공 되었고 이것을 건축한 사람은 돌마흐체궁을 설계한 알마니아출신 “발얀‘에 의하여 바로크양식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아래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지금은 수리중이어서 그런지 사면을 포장으로 둘러 쌓여 있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제1보스포러스 대교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최초의 다리라고 하는데 1970년에 착공하여 1973년에 완공 하였으며 그때가 터키공화국 건국 50년째 되는 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다리는 사람의 통행이 않되는 다리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 자살들을 시도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였다고 하며 다리 중간에서 차를 정차하여 내려도 않된다고 한다.
보스포러스 유람선을 타면 제2 보스포러스교라고 하는 술탄 메흐멧 대교 앞에서 회항하여 아시아쪽을 보며 에미뇌뉘 항구로 돌아온다.
이때 술탄 메흐멧대교 부근에서 왼편으로 올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루멜리 히사르 요새를 볼수 있다.
제2 보스포러스 대교가 있는 이곳은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가장 폭이 좁은곳이라고 한다.
건너편인 아시아 지역에 1393년 바지예드1세가 만든 아나툴루 요새가 있다.
1452년에 메흐멧2세는 1000명의 기술자와 2000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5개월만에 루멜리 히사르를 건설하고 당시의 최신군사장비로 무장하였다.
이렇게 가장 좁은 해협의 양안에 요새를 만들어 흑해로부터 비잔틴제국에 수송되는 물자를 차단하여 경제적 압박을 주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려고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실크로드의 마지막 관문인 보스포러스 해협이 장악되자 천년을 지켜온 장구한 역사를 가진 비잔틴제국은 강력한 콘스탄티노플 군대가 최선을 다해 방어했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 성채의 너비는 남북으로 250m,동서로130m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당시 사용 되었던 대포가 해협을 향해 발사관을 도열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전략적 요새로 오스만에게는 승리의 환히를,
장구하고 화려한 역사를 가진 비잔틴제국에게는 비운의 종말을 안겨다주었다.
현재 이 성채는 관광명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여름에는 콘서트 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고 한다.
제2 보스포러스 대교를 회항하면 아시아쪽이 보이는데 그 경치가 반대편과 사뭇 다른것을 느낄 수 있는데 유럽의 화려함에 비교할 수 없음을 볼 수 있다.
출발한 에미뇌뉘 항구로 돌아와 버스편으로 성 소피아사원 쪽에 있는 톱카프 궁전으로 이동했다.
지나가는 도중 이스탄불을 가로지르는 우리나라 전차에 해당하는 트램이 가는 것을 보았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스탄불의 시가지를 달리는 이 전차는 우리나라 현대정공이 생산한 것이라고 하여 많이 놀라웠고,
또한 터키정부가 보스포러스 해협을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해협의 터널처럼 뚫어 전차나 자동차가 다닐수 있도록 사업자를 지정했는데 그 기업이 바로 우리나라 SK이라고하여 또 한번 놀라웠는데, 사업을 진행하려하자 해협공사 중 비잔틴시대의 유적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와 중단한 상태라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구도심으로 들어 왔다.
온곳은 다름이 아닌 어제 우리가 점심식사를 했던 곳인데 바로 옆 식당이다.
어제 그 집이나 이 집이나 생긴 것은 별반 차이가 없었으나,
어제와 메뉴가 틀리다. 어제는 쇠고기였는데 오늘은 닭고기 케밥이란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맞은편에 위치한 면세점에 들러서 기념품을 장만했다.
중동에 위치한 이슬람국가라서 전통문양의 양탄자가 유명하고,
무슬림들이 애용하는 머플러가 참 질도 좋고 문양과 색이 독특해서 몇 개를 구매했다.
그리고 이곳 궁전에서 보았던 고유문양이 들어간 대형 접시를 구매 했는데 참 독특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가 뒤이어간 아야소피아 뒤편의 톱카프 궁전은 약 400년 동안 25명의 술탄이 거주하고 집무를 보던 오스만 제국의 정궁이었다.
보스포라스 해협의 높고 평평한 곳에 위치한 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메흐멧이 이스탄불을 함락하면서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약 70만 ㎡ 넓이로 건설되었다. 면적만으로 보면 중국의 자금성과 맞먹는 넓이라고 하는데 그 후 4세기 동안 꾸준히 그 규모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 결과 오늘날 이 곳은 15세기-19세기 초까지의 오스만 건축양식의 변화된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톱카프 궁전은 원래 오스만 제국 대대로 술탄 군왕들이 거처했던 성으로 한때 이 곳에는 술탄과 그 가족 외에도 5만명이 넘는 시중들과 군사, 관료들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서 맨처음 회랑부분으로 들어가는데 이곳이 부엌건물이다.
이 부엌 건물은 현재 도자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자기 박물관이다.
오스만 제국의 궁전에는 중국, 독일 등으로부터 수집해 온 12,000여 점의 도자기들이 있다.
그 중에서 약 25%에 해당하는 3,000여점만 이 곳에 전시되어있다. 이곳에 전시된 도자기는 동양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라고하는데 우리는 이곳이 문을 열지않아 관람하지는 못하였고 가이드의 설명으로 족해야 햇다.
그 내용은
중국의 당나라(7-9세기), 청나라(10-12세기), 그리고 명나라 (14-17세기) 시대의 도자기들이 연대순으로 진열되어있으며,
중국의 도자기 문화가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등장하는 17세기 일본 도자기들과 18-19세기에 만들어진 유럽 도자기들도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전시된 다수의 도자기들은 몇년전 있었던 마르마라해의 대지진으로 인하여 파손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부엌 건물에 있는 10개의 방은 왕의 어머니, 후궁들, 왕자들, 그리고 내시들을 비롯한 각기 다른 사람들의 음식을 요리하는데 사용되었다.
부엌 건물의 돔들은 15세기에 만들어졌고 궁전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돔 위의 굴뚝은 1574년의 대 화재이후 복원되었다.
위 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 왕조의 지배자들이 살았던 성으로, 400여년간 정치와 문화의 중심에 있었으며, 톱카프 궁전은 골든만과 마르마라해를 마주하고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강력한 권력을 지녔던 오스만 왕조의 거성으로 건설 되었으며, 골든만을 사이에 두고 신시가지 쪽에서 바라보면 톱카프 궁전이 중요한 위치에 세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톱카프 궁전은 자체가 하나의 소도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1856년 돌마바흐체 궁전이 완공되면서 궁전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현재 톱카프 궁전은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궁전 곳곳은 현재 보수 공사 중이며, 공개 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제1문을 지나 부엌건물을 돌아 행복의문을 지나면 왕의 알현실또는 접견실로 불리는 곳으로 가게 되는데,
이 왕의 접견실은 외국 사신이나 국무총리 및 고위 관료들이 왕을 접견하던 곳이아고 한다. 접견실에는 인상 깊은 모습들이 있는데 카페트가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접견실 입구에는 수도꼭지가 하나 보인다. 용도가 무엇일까? 왕을 만나는 사람들이 청결을 위해 손을 씻기 위함일까?
이것을 설치한 이유는 왕과 접견하는 사람과의 나눈 이야기를 외부인이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설치된 일종의 보안 장치이다.
왕이 사신이나 장관을 접견할 때면, 이 수도꼭지를 열어 물소리를 내게 만든다고 한다.
톱카프 궁전은 규모도 엄청 클 뿐만 아니라,
볼거리가 많아서 많은 관광객들이 아직도 이스탄불을 방문하면, 꼭 들르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톱카프 궁전 안의 보석관을 들 수 있는데,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참 아쉬움이 남는데, 처음 입장해서 사진촬영금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술탄이 입던 옷이 있었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몇컷을 찍었는데 옆에 있던 마누라가 조용히 앞으로 다가와서 사진 촬영을 막았다.
그래서 여행후 기행문 작성시 터키 톱카프궁의 홈페이지를 방문해서 그안에 있는자료를 몇장 올리는것으로 아쉬움을 달래 보는 수 밖에 없었다.
보석관에는 당시 엄청난 영토와 권력을 가졌던 오스만 제국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보석관 안에서 가장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보석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86캐럿짜리 스푼 다이아몬드를 들 수 있다. 이 스푼다이아의 이름은 어느날 고기를 잡던 어부에게 발견되었는데 이 어부가 스픈3개와 바꾸었다고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으며,
그 생긴 보습은 86캐럿 대형 다이아몬드 주위에 다시 49개의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아 놓았다.
그 밖에 이곳에는 금화 8만 개(약 250kg)를 녹여 만들었다는 왕좌와 세계 최대 3.3kg의 에메랄드가 박힌 톱카프의 단검 등도 있다.
이것은 모두 진품이다. 그래서 사진도 못찍게 함은 물론 그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곳의 보석만으로도 터키 사람들 몇십년은 먹고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실지로 몇 년전 터키경제가 악화되어 IMF구제금융이 있을 때 이것 몇 개만 내다 팔아도 구제금융 걱정을 하지 않았다는데, 터키 국민들 정서에는 아마 절대 이 보물들을 내다 팔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모세의 지팡이 등 여러가지 전시 유물을 볼 수 있는데,
다윗의 칼이나, 요셉의 터번 , 세레요한의 두개골, 사도요한 손목뼈등이 있다.
그런데 의아해 했던 것은 모세의 지팡이 하면 영화나 성화에서 나오는 웅장하게 크고 끝이 구부러진 모양이 아니라 정말 나무 작대기 같아서 저것이 모세의 지팡이 인지 아니면 어린아이들이 장난치는 나무 막대기인지 정말 알 수 없는 물건이 진열되어 있어서 상당히 황당했다.
원래 모세의 손에 들려졌던 지팡이는 이스라엘 민족 해방의 출-애굽 역사에 있어서 원자 무기처럼 만능의 기구로 쓰여 졌던 사실을 우리는 성서에서 읽었고, 크리스마스때 단골 TV영화에서도 많이 보았다.
애굽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이 모두 이 지팡이를 칠 때마다 내려졌고,
그 시퍼런 바다 홍해를 갈라지게 했던 것도 이 지팡이였으며,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이 탈 때에 반석을 내리쳐서 생수가 터지게 했던 것도 이 지팡이였다.
아니 그런데 그 지팡이가 무슨 가느다란 막대기여서 기가 찰 노릇이었는데,
나중에 내가 이해하게 된 건 모세가 지팡이가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개였지 않는가 싶다.
아마도 여기에 진열된 지팡이는 그런 용도로 쓰인 것이 아니라 아마 다른 용도로 쓰인 지팡이었거니 하는 거다. 믿거나 말거나 여기 가져다 놓은 터키인들은 도데체 무슨 심성인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이곳에 진열된 8만6천여점의 보물들은 터키는 외세가 침입하지 않아 그 보존 상태가 좋았다고 느낀다.
전시관을 나오면 정원에 있는 해시계가 있는 정원이 나오고, 그 정원을 옆에끼고 행복의 문을 나오면 무기박물관과 그 옆의 회의실과 행사장으로 쓰였던 건물이 보이는데 무기를 전시한 곳은 너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가보기를 포기 하였고, 그 옆에 있는 회의장 건물에 들어가 보았는데, 정중앙 돔, 그 가운데 황금추가 보이는데 이곳은 술탄이 서는 곳이라고 하며 그 건물의 모든 벽과 천장의 문양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이 아쉬움이다.
벌써 태양빛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오늘 우리는 이곳을 마지막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가야 한다.
아쉽지만 또 다시 올 것을 보스포러스 해협에게 소리 없이 약속해 보며 시간의 빠름을 야속하다 해야하나....
공항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니 그 동안 정들었던 현지가이드의 목소리가 촉촉하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여러 가지를 느꼈다.
첫 번째가. 여행할 때 여러 사람들과 동행을 하지 않아도 나름 재미있다는 것,
두 번째가 터키는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나라이며, 꼭 다시한번 자유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을
그리고 세 번째가 마누라와 내가 건강할 때 부지런하게 여행을 다녀야겠다는 것을 느끼고 왔다.
이제 극동에서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터키인들과 아쉬운 작별이다.
8박9일간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인솔자 이진숙씨 그리고 터키현지 가이드 김도엽씨에게 감사를 드린다.
여행을 하면서 매번 귀국할 때에는 뭔가를 빠뜨리고 오는 느낌이든다.
그건 아마도 아쉬움의 탄식을 두고 오는것란 느낌이다.
내가 다시 보스포러스해협과 검푸른 에게해, 그리고 일렁이는 지중해를 볼 수 있을까?
나는 2002년 이탈리아 로마를 여행 했을때 트래비 분수에 오백원짜리 동전을 던지며 내가 꼭 다시 마누라를 데리고 방문할 거라고 혼자 마음속에 약속을 했다.
지금 출발을 앞둔 나로서는 그런 약속할 무언가를 잡고싶은 심정이다.
공항에 부는 바람은 쓸쓸하지만 또 다시 여기 공항으로 다시 올거란 마음을 세기고 또 세기며 아쉬운 발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뒤돌아 섰다.
금년에는 이탈리아일주를 할 작정이다.
트래비분수에 약속을 지키기위해....
-'기행문을 마치며' 편에서 계속-
첫댓글 터키만 Deep Dive로 8박9일을 다니셨군요. 그 기간이면 주마간산격으로 유럽도 다 볼 시간일텐데.. 문단에 출사표를 던지셔도 손색없을 멋진 글솜씨에도 감명받고..항상 고문님에게 배울 점이 많습니다. 또 다른 나라도 있으시면 올려주시지요.
엄청난 기행문임다...책을 하나 내셔도 되실듯....^^* 저도 여행을 참 좋아하는데 담에도 올려주세요~잘보고갑니다. 감사~
과찬의 말씀 고맙습니다. 회장님과 선영씨가 잘~ 보아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