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시도유형문화재로서는 마지막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녹동서원 소장 목판 및 고문서류에 관하여 검토한다.
성책(成冊) 문서 : 서원청금안(書院靑衿案) 25책, 서원서재유안(書院西齋儒案) 2책, 심원록(尋院錄) 5책, 합경재보노안(合敬齋保奴案) 3책, 등
낱장 문서 : 통문(通文), 완의(完議), 노비기증문서(奴婢寄贈文書) 등
녹동서원 소장 목판 및 고문서류에는, 고문서로서 원생들의 명단을 적은 서원 청금안 25책, 서원 서재 유안 2책, 심원록 5책, 합경재 보노안 3책 등 성책 문서를 비롯하여 통문, 완의, 노비 기증 문서 등 낱장으로 된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목판은 연촌 최덕지의 연촌집 26판, 산당 최충성의 산당집 60판, 문곡 김수항의 문곡집 560판, 등 녹동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의 문집과 인근지역 출신인 석천 임억령의 석천집, 수은 강항의 강감회요 등이 있는데 고문서와 목판은 녹동서원이 철폐될 때 덕진면 영보리 합경당으로 옮겨서 보물 제594호 연촌공 초상화와 함께 보존되고 있으며 목판은 판각을 지어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
<서원청금안>처럼 서원 운영과 관련된 문헌은 전문가나 관심이 있을 것이고, <문곡집>, <석천집>, <강감회요>는 전주최씨와는 무관하고, <연촌집>, <산당집> 중에서 <산당집>은 비지정문화재 녹동서원에서 다루기로 미루어 두고 <연촌유사>는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없으므로 이번에 자세히 살피기 위하여 7파트로 나누어서 검토한다.
파트 1에서는 <연촌유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보고,
파트 2에서는 연촌공의 저술 <논공법답험편부소>를 분석해보고,
파트 3에서는 <공원창화시>에 대하여 알아보고,
파트 4에서는 이예가 지은 <퇴휴시송별시서>를 통하여 연촌공 은퇴 배경을 알아보고,
파트 5에서는 <유미사송최선생>을 살펴보고,
파트 6에서는 존양루에 관하여 알아보고,
파트 7에서는 연촌공 초상화를 찬양한 글과 <연촌유사>의 발문을 알아볼 것이다.
파트 1. 문화재의 개략과 연촌유사
모든 문헌을 제외하고 <연촌유사>만 분석한다.
문공 한유가 소윤 양거원을 배웅하는 글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승상이 시를 노래하니 장안에서 시를 잘 짓는 사람들이 화답하였다. 라고 하였으므로, 당시 많은 사람이 시를 지어 준 것으로 보이지만 오직 장적 문창과 사공 배도가 지은 시만 후세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전해오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 연촌 최 선생의 유적을 살펴보니 모든 시문이 하나도 빠짐없이 온전하게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양거원에게는 덕행이 있었으나 어진 자손은 없었지만, 연촌 선생에게는 덕행과 함께 어진 자손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今見烟村先生遺蹟則其一切詩文無有漏失豈少尹有德行無賢子孫而先生則兼有之耶
송시열은 영암종회 의령공(지성)파 13세 감찰공 최세영(崔世榮)의 친구이자 아들 양정재공(養正齋公) 최방언(崔邦彦)의 스승인데 양정재공의 부탁으로 이 글을 지었다.
송시열 표현 그대로 의령공파 후손들은 <연촌유사> 보전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옛날 성리학계의 큰 어르신 최 선생께서 존양 두 글자를 누각에 걸어 놓고 그 곳에 올라 세상일을 걱정하셨는데 조정의 선비들이 시를 지어 읊었다. 시를 엮어 책으로 만든 선생의 어진 아들이 책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서문을 적으라 하니
昔有斯文大老崔先生以存養扁其樓縱登臨遺世慮朝中文士咸有詩詠之遂盈卷軸其賢胤上舍䄂其軸索余書卷端
나는 늦게 태어난 사람이어서 선생을 직접 뵙지도 못하였고 받들어 모시지도 못했지만 아드님과 사귄 인연이 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나 같은 사람의 하찮은 이름 석 자를 이렇게 저명한 분들의 글 아래에 올릴 수 있게 되었으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余生也晩旣不得陪杖履侍左右則納交賢胤何其幸也而又得書名群玉之側又何其幸也
연촌공 사후 막내아들 생원공 최숙(崔淑)이 연촌공 문집을 처음 정리하여, 존양루(存養樓)와 완동구제(完東舊第)에 보관해 왔으나,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의령공파 12세 기정공(棄井公) 최정(崔珽)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재정리하였는데, 뒤에 양정재공이 보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분은 부수를 늘려 전쟁이 나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불후(不朽)하게 전하도록 하려했으나 돈이 없어 못하다가 1805년 녹동서원에서 <연촌집>으로 대량 인쇄하여 책이 많이 전해 온다.
연촌집은 1805년 녹동서원에서 목판을 새겨서 인쇄한 책으로 연촌 최 선생 유사서, 선생 출처 사적, 연촌 유사, 원 직학 갈명, 참의공 유사, 소윤공 묘갈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104페이지 일 책이다.
연촌최선생유사서(烟村崔先生遺事序) 1805년(순조 5) 10월 송환기(宋煥箕), 선생출처사적(先生出處事蹟)
출처(出處) : 벼슬에 나가고(出),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거처함(處)
1805년 10월 송환기가 지은 연촌 최 선생 유사 서는 연촌집을 간행하게 된 경위와 의미 등을 기록한 것이고, 선생 출처 사적은 연촌공의 간단한 이력을 소개한 것인데,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연촌집을 간행할 때 저술하여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란 벼슬에 나가는 것과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거처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선생이 벼슬에 나갔다가 물러나 은거하게 된 사적이라는 뜻이다.
<연촌최선생유사서>는 <연촌집>의 서문이고 <선생출처사적> 또한 <연촌유사>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사전지식을 제공하기 위한 글로 <연촌유사>의 일부로 볼 수 없다.
연촌유사에는 연촌공의 저술로서 논공법답험편부소와 제존양루라는 절구 두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논공법답험편부소는, 공법과 답험법의 편리하고 불편한 점을 비교 논술한 상소문이다. 제존양루는 마당 장자와, 길 장자를 압운으로 하고 있는데, 연촌공 사후 영암을 방문한 사람들이 이 절구를 원운으로 삼아 지은 시가 존양루라는 단원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시의 내용은 그 때 가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 외 공원창화시 12수와 서문은 연촌공이 공원 참시관으로 있을 때 동료들과 함께 지은 시이고, 퇴휴시송별시 48수와 병서 그리고 사, 발 등은 연촌공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한강변에서 열린 전별연에서 지은 글이며, 추영시 13수는 연촌공이 영암으로 내려 온 다음 지어서 보내 준 것들이다.
존양루기, 존양루를 제목으로 한 사와 시 18수, 그리고 추영시 16수, 존양서원을 제목으로 한 시와 작은 서문은 모두 존양루를 제목으로 지은 글인데 절구 18수는 앞서 연촌공이 지은 절구 제존양루이수의 운자를 사용하여 지은 것이다.
원운(元韻)과 차운(次韻)은 대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여러 사람이 운자(韻字)를 맞추어 시를 지은 것인데, <존양루>는 수십 년 간격을 두고 앞 세대 사람이 지은 원운에 뒷 세대 사람이 운자를 맞추어 차운을 지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연촌공의 가르침 존심양성을 따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중간에 김창협(金昌協)의 서원청액소가 있는데 녹동서원으로 미룬다.
연촌 선생 초상화를 제목으로 한 시와 화상찬, 화상개장찬 등은 모두 보물 제594호 연촌공 초상화를 찬양한 시이다. 그 외에도 발문류로서 전쟁 후 문고 수록지, 연촌 최 선생 가전 시문록 후서, 연촌 선생 유사 발, 연촌 선생 유사 후를 제목으로 함, 연촌 최 선생 가록 후 발 등이 있다. 이상 연촌유사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서 생육신 집현전 직제학 원호 묘갈명이 있고, 부록으로 참의공이 지은 시 2수와 여러 사람이 지은 찬시 10수와 병서로 구성된 참의공유사가 있고, 마지막으로 소윤공 묘갈이 있다.
<연촌집>이 <연촌유사> 중 가장 오래되었고 또 문화재 지정도 되었으므로 저본으로 삼는다. <서문류>는 잘 알려진 내용이며 <연촌유사>의 일부도 아니므로 생략하고, <참의공유사>는 한벽당에서 이미 검토했고. <소윤공묘갈>은 비지정문화재 삼기정에서 검토하기로 하고, 그래도 분량이 너무 많으므로 <원직학갈명>은 전라북도 보호수 풍남동은행나무로 미루고 오직 <연촌유사>에 한정하여 검토하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