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只許老胡知, 不許老胡會. 지허노호지, 불허노호회.
‘알 수 없다!’ 천하인의 혀를 끊다.
어제 올린 글은 체용론에 의거하여 견해를 밝힌 것이다. 소위 把住(파주, 앎과 대상경계를 모두 빼앗아 무념에 들게 함. 이것을 體라 할 수 있다)와 放行(방행, 앎과 대상을 허용하여 일상에 응변하게 함. 이것을 用이라 한다)으로 제자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는 선지식의 방편이다.
그러나 선종에는 殺活自在, 縱奪自在하는 조사선이란 게 있다. 선지식에게 제자의 견해의 흐름을 끊음으로써 본래청정에 들게 하는 일발적중(一發的中)의 방편이 요구되는데 이 방편을 구사하는 수단이 바로 살활자재 및 종탈자재이다. 그렇다면 ‘老胡가 앎을 허용하고, 老胡에 대한 앎을 허용하지 않는다’에서 老胡란 달마대사 혹은 당사자를 지칭 함이니, 누가 되든지 상관없다. 앎을 허용(只許)하고 허용하지 않음(不許)이 서로 부딪히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 가 문제다. 왜 한쪽에서는 앎을 허용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앎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는가? 세상에서는 허용과 허용 않음, 앎과 모름, 지와 무지가 서로 배반하는 개념일 테지만(이율배반), 선에서는 절대모순(문 없는 문, 無門關)을 꽤 뚫어(透過) 상보적 활용(妙用自在)으로 바꿔버린다. 절대모순이란 게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예를 들어 ‘있다’와 ‘없다’라는 두 개념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인데 서로 상반되어 부딪히면서 마음에 갈등(즉 답답함, 苦)를 일으킨다. 그런데 이 모순(苦)은 두 가지 개념이 서로 대립되어 발생한 것(의존적 발생, 緣生)이므로, 두 가지 개념에 대한 집착을 다 놓아버리면(의존적 소멸, 緣滅) ‘있다’, ‘없다’로 갈라지기 이전의 평상의 무심으로 돌아온다(희론적멸). 그러면 무심의 견지에서 ‘있다’와 ‘없다’는 개념을 適時適期에 적용하여 생활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한 쌍의 이율배반이 서로 도와주는 진리가 된다. 소위 ‘모순된 것은 상보적이다. Contraria sunt complementa'. 라는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도 그렇게 해서 나타났다.
앎과 모름, 알 수 없음과 알 수 있음, 분별과 무분별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앞서거나 높거나 한 것도 아니며, 좋거나 나은 것도 아니다. 둘은 평등하여 등가이다. 그리고 상호 의존하며 상호보완 한다. 앎은 모름에 안겨 빛나고, 모름은 앎의 빛 속에서 편안하다. 알 수 있음은 알 수 없음에서 안식을 얻고, 알 수 없음은 알 수 있음으로 말미암아 생생하다. 그래서 허용과 불허, 앎과 알지 못함은 노호의 살활수단이다. 살인검을 휘두를 때는 일체의 앎을 허용하지 않으며, 활인도를 휘두를 때는 임기응변의 실용적 앎을 허용한다.
노호가 앎을 허락함이여, 진주에서 서울 가는 첫차는 새벽 4시. 남강에 오리가 동동동, 버들 솜털이 굴렁굴렁
노호가 앎을 허락하지 않음이여, 다만 모를 뿐!
‘짐을 대하고 있는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양 무제의 물음에
‘알 수 없다!’ 달마가 천하인의 혀를 끊었다.
밤12시 오도가도 못해 누울 곳도 설 곳도 없는데, 차가운 호수에 비가 내린다.
첫댓글 雙遮雙照 遮照同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