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스스로를 강하게 담금질하며,
비록 시골이지만 부자라고 불릴만큼 자수성가를 이루셨습니다.
우리 6남매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동네 유지이며, 부잣집아들이라고
불리워지게하신 자랑스런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가정안에서는 강한 남자의
뒤에 감쳐진 독선과 폭력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다투셨고,
그때마다 밥상이 날라갔고 뭐가 깨지는 소리,
겁먹은 우리들의 울음소리로 아수라장이 되곤 하였습니다.
매맞은 어머니는 2-3일씩 누워계셔야만 했고,
그때마다 저는 분노와 복수심이 생기곤 했습니다.
아버지와는 눈이 마주치는 것 조차도 무섭고 싫었습니다.
중학생이던 어느날에는 집마당에 혼자 있던 나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들어오시던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고,
갑자기 아무이유도없이 사정없이 빰을 얻어맞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어머님이 돌아가실때쯤에
병상에서 지난 이야기를 하셨을때에야
그때 아버지가 왜 나를 때렸는 지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저학년때부터
어머님이 돌아가실때까지 한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주 다투셨고,
그래도 어머니는 자식들이 상처받을까봐서 숨기며 살아 오셨답니다.
그때에 아버지는 때때로 자식들이 귀챦은 존재였던가봅니다.
그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머니의 인생에대한 연민,
아버지에대한 분노, 아버지로부터의거절감,
상처입은 자존감으로 착잡하기만했습니다.
어렸을때 예배당에야 한 두번 가보았지만,
조상도 모르는 무지한 무리들이라고 배척하는
어른들의 영향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미션스쿨인 거창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저의 무지함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열심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친구들을 무참하게 하곤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제가 이렇게 돌아올수 있었던 근원에는
그당시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서 받은
씨앗이 남아 있었기때문인가 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도 저를 붙드시려 애쓰고 계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활,
군대생활,직장생활 동안은 술과쾌락에 묻혀
몽롱하게 살아온 잃어버린 시간들이었습니다.
대학때는 술퍼마시느라 그 흔한 당구도 안쳤고,
미팅도 한번 안했습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룸싸롱으로 퇴근하고,
여관에서 출근하는 날들이 점점늘어갔습니다.
제나이설흔이 되는 1월에 6년동안을 사귀던
지금의 제 아내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당시 아내는 대구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관계로
우리는 주말부부로 지내게되었습니다.
우리들의 결혼자금을 줄여서
안산에 조그만 아파트를 마련하였지만,
일주에 3-4일은 술집으로 퇴근하므로 늘 빈집이었습니다.
아내의 간청과 회사의 배려로
부산사무소로 이동하게되었고,
비로소 화명동의 작은 아파트에서
부부가 함께 살게되었습니다.
안산에 있던 아파트를 처분하였지만
밀린 술값 정리하느라 전세자금만 겨우 건졌습니다.
제 아내는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며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구포역에서 새벽6시 기차로 대구로 출근하여
저녁7시반에 부산으로 퇴근하였습니다.
부산에서는 새롭게 살겠다고 내려왔지만
부산의 주위 환경은 오히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향락을 즐기기에 더 좋았습니다.
대리점 사장들과 어울려 부산의 술집들을 섭렵하며,
끝도 없이 쾌락을 즐기는 생활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새벽4시가 넘어서 비틀거리며 집에를 들어오면
아내는 마루에 앉아 밤새도록 기다리다가
제가 잠이들면 혼자서 출근하곤 하였습니다.
한 날은 새벽에들어와 막 잠이 드는데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려 눈을 살며시 떠보니
와이셔츠를 좍좍 찟고 있었습니다.
모른척 있다가 아내가 나간후에 와이셔츠를 보니
여자화장때와 루즈자국이 어지럽게 묻어있고,
화장품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그때는 저도 아내에게 미안했습니다.
남편인 저 하나 때문에 대구에서 여기까지 퇴근하였는데
혼자서 걱정으로 밤을 꼬박세우고는
새벽기차로 출근하는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즈음에 결혼하여 거창에서 살고있던 처제가
처갓집을 전도하여 온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우리집에까지 전도할려고 하였습니다.
처제와 나눈이야기를 저한테 전하는 아내에게
저는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내며 쏘아붙이곤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점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집요하게 제 주위를 좁혀오고 계셨습니다.
얼마후 평소 속이 좋지않던 아내는
위 내시경을 하러갔다가 조직검사까지하게되었고,
결과보는 날은 아내는 출근하고 제가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머뭇거리면서 검사결과 위암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초기이니 너무 걱정말라는 위로를 뒤로하고
외과의사인 친구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아무렇지도않게 위를 잘라버리면 되니까
걱정말고 당장 입원시키랍니다.
저도 아무렇지도않게 농담을 섞어서 아내에게 결과를 알려주고 ,
학교에 병가내고 짐 챙겨놓고 기다리라고하고서는 대구로갔습니다.
통화할때는 웃으며 농담도 하던 아내는
눈이 붓도록 울어서 시무룩하게있었습니다.
다음날 고신의료원에 도착하니 모든절차가 준비되어지고,
바로 입원하여 재검사를하였습니다.
친구의 부탁으로 이승도교수님의 직접집도로 위절제수술을 하였습니다.
새벽부터시작하여 오후까지 수술실앞에서
초조하게기다리며 처음으로 아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문병온 처가집식구들은 제 눈치보느라 찬송도 못하고
구석에서 기도만하고 있었습니다.
외과의사인 친구는 집안대대로 믿는 집안이었고
그 친구 또한 고등학교때 SFC리더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친구였습니다.
평소에는 만나도 신앙이야기는 별로하지도 않더니,
이번에는 기회를 포착한 사자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성경책을 끼고 병실에 나타나서는 교회가자고 조르고,
의사로부터 설명이 갈급한 보호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집도하신 교수님을 만나려면 새벽에도 교회로 오고,
예배때마다 교회를 오라고하였습니다.
이승도교수님은 송도제일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병실에서는 좀처럼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는데,
교회에서 만나면 밥까지 사 주시며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퇴원후에는 장모님께서 미리 등록해놓으신
집 근처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한발은 여전히 세상을 즐기고 한발은 교회문턱에 걸쳐 놓은채,
겨우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하고,
은혜라는 말이 조금은 덜 어색할즈음에
5년전쯤에 창업하여 IMF를 힘들게 넘기면서
서서히 도약을 준비하던 제 사업체에커다란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문경에 신축하는 철도차량공장에
기계설비를 계약하여 납품까지 마치고
설치를 할려던 때에 발주처가 최종 부도처리되었습니다.
계약금으로 받은 어음부터, 중도금까지 부도처리되었고,
발주처의 부탁으로 할인해준 융통어음까지
저에겐 거액인 어음인 모두 휴지가 되버렸습니다.
한번만 더 튀겨서 좀더 큰 공장을 매입하려던
제 욕심이 판단을 흐리게 하였고,
결국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 버렸습니다.
최종부도처리된 그 날에 돌아오는
일억여원의 부도난 어음 환매를 시작으로
극심한 자금압박이 시작되었습니다.
부도난 어음 환매,또 제가 발행한 어음 결제 등으로
돈을 구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자금압박이 심해지자 주거래은행에서는
신용대출상환을 독촉하면서 담보제공을요구하였습니다.
제이름으로된 아파트도
시골에 있던 상가건물도 은행에 잡혔습니다.
암수술후 학교를 그만두면서 받은
아내의 퇴직금을 몽땅 넣으면서 마련했던
아내 명의의 살던 아파트도 마지막으로 집어넣었습니다.
한번말리기 시작한 자금은 대책도,
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만뜨면 당좌막을 돈 걱정에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여
출근길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출근하자말자 전화통 잡고 악을 쓰면서 수금을 독촉하고,
여기저기 사정하면서 돈을 빌리고,
결제자금 연기하느라 쫒아다니고,
어음막는 날이면 쥐약 먹은 개처럼
악을쓰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마감시간을 넘기며 겨우 막고나면
몸과마음은 모두 탈진이 되어 주저앉곤 했습니다.
부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파산후에 가족들이 당할 험한 사태들이 생각될때면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자연히 제 정신은 피폐화되어갔고,
모든 언행은 공격적이 되었고,분노와 원망으로만 꽉 차 있었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그때야 비로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제발 부도만은 나지 않게 해 주세요.
퇴근 후에는 아내와 함께 가나안 수양관이 있는 산으로 가서,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곤 하였습니다.
다행히 저보다 신앙이 깊었던 아내는
현실보다는 하나님께 더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가정안에서만은
마음에 편안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자연히 말씀을 보고, 찬양하고,기도하게 되었고,
그때에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힘을 느낄 수있었습니다.
새벽이면 일어나 말씀묵상하고,
저녁이면 가족들이 모여서 함께 찬양하고,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므로 가정안에서는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은혜충만하여,
아내의 격려를 받으며 출근길에 나서지만
집을 나선지 5분도되지않아
또다시 불안과 두려운이 엄습해오고
마음에 평정을 잃고 방황이시작되곤하였습니다.
그럴때마다 운전하면서 찬양을 듣고
고함치듯이 찬양을 따라 합니다.
하나님앞에 심정을 토로하며 소리내어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부닥칠 문제들이 머리속에서 정리가 되어지고,
솟아날 구멍이 보여지고,
담대함생기면서 사람들을 만나서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놓고 이해를 구하면
서로 공감을 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감사와 만족함으로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고통스런 문제들 속에서 오히려 기쁨을 누릴 수도있슴을 알았습니다.
이후부터는 말씀에 목을 메며 덤볐습니다.
묵상을 통해서 주님을 느끼기를 갈망했고
찬양을 통해서 주님의 만지심을 느끼를 갈망했고,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마음을 알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대충 일 이 마무리되면 부리나케 퇴근하여
아내와 딸과함께 주님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초등학교5학년때부터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말도없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던
딸도 아빠의 어려움 때문에 시작된 가정예배에
함께 함으로 오히려 회복이되어져갔습니다.
언제나 감동의 눈물이 있었고,사랑이 넘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힘이라는 것을 확신함으로 체험하게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밀하게 저를 만지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깊이 체험하게 되었을 때
주님은 마침내 부도가 나는 것을 더 이상 막지않으셨습니다.
1년여를 끌어오면서 저를 단련시키고,믿음을 주신 후였습니다.
담담하게 상황들을 대처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녹녹치않았습니다.
채권자들의 닥달,협박,주위사람들로부터의 따가운 시선,
행여 피해를 당할까봐 슬슬 피하는 모습들속에서
서서히 세상과는 고립되어갔습니다.
동창회도,계모임도,심지어 가족들 모임에도 한 동안은 발을 끊었습니다.
세상 꿈에대한 좌절감에서 오는 원망,
거절감에서 오는 분노,자신에대한 자책감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고통속에 자지러질 때,
하나님만이 나의 위로가 되셨습니다.
오직 주님안에서의 평안과기쁨을 쫒아 살아가게되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이 느껴지고
보여지는 곳을 쫓아 다녀야했습니다.
아버지학교를 섬김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학교를 98년 봄에 부산2기로 수료하였습니다.
교회를 다닌지 2년이 채 안된때이라
한발은 세상속에 깊이 박고서 적당히 향락을 즐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는 시간이었고
인생의 전반전을 뒤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료후 STAFF으로 섬기면서 더 큰 감동과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형제들과 마음을 모아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격려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점점 깊이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 후 아버지학교를 섬길때마다
주님의 섬세한 손길을 느끼게하시고
매번 새로운 감동과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2000년 여름에 시애틀1기 아버지학교때 이민생활25년동안
서로가서로에게 점점더큰 가시로 할퀴며
만신창이가 된 부부가 극적으로 회복되며,
이제는 서로에게 박힌 가시를 뽑아주며,
살아가겠다는 고백을 들었고,
L.A 1기 때는 은퇴를 앞둔
칠순의 목사님께서 평생 이민교회를 섬기며,
자신이 세운 원칙과 강박감으로
아내와 단 둘이 친밀한 대화한번 나누지못하였고,
딸은 아버지영향으로 결혼도 안하겠다고 하고,
아들은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구부러진 삶을 살게한 실패한 가장의 이야기를 고백하며,
회한과 용서를 구할때에
하염없이 울고만 있던 사모님의 모습도 보았고.
시드니에서,오클랜드에서,마닐라에서도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얼마전 부산20기에서는 아내를 바꾸겠다고 계획하던 남편과,
어렸을 때 고아원에 버리고간 엄마 때문에
낮은 자존감과 거절의 기억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끊임없이 남편을 괴롭히며 우울증으로 빠져들던 아내가
자유함과 자부심과 기쁨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학교를 향한 하나님의 비젼과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되새겨봅니다.
이제 교도소의 높은 담장을 넘어,
원망과 분노와 죄책감으로 스스로
고통속에 신음하는 형제들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고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나눌 수 있는 가정을
저들에게 돌려주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계획하심을 쫓아 달려갑니다.
지난 2월에 이어 5월28일부터
진주교도소에서 두번째로 아버지학교를 준비하고있습니다.
아버지학교는 이제 하나님께서
저에게 부으시는 가장 큰 은혜의 새 힘을 공급받는통로가 되었습니다.
부도후 파산 절차에따라
모든 재산은 경매로 날려버렸습니다.
아내가 남겨두었던 비상금도
빚쟁이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습니다.
가재도구까지도 경매를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퇴직금을 모두 쏟아 넣은
살고있던 아내명의의 아파트만은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교직생활12년만에 건강 때문에 그만두면서
장만한 집이라 애착이 컸습니다.
입주하기전부터 쓸고 닦으며,
마음을 달래던 집이었습니다.
땀방울을 흘리며 마루를 닦다가
행복하게 웃어주던 곳이라 그곳만은 꼭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중3인 딸얘에게도 친구들에게 기죽지않게
그곳에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살던집이 작년 초부터 경매가 진행되었습니다.
파산한 금융기관이 1순위 근저당 되었기에
상당기간 늦게 진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은행에다니는 선배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다행히 그 전해 하반기부터 다소 여유를 가지고
채무변제를 해 나가고 있어서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 선배는 우리가 경매를 받아서
그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봐서는 전혀 무리가 없는 계획이었습니다.
선배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해 보자고 했습니다.
은행 대출은 자기가 책임 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반대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놓을 때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아무것도 움켜지지말자는 거였습니다.
사실은 저도 역시 기도중에 집착하지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있었습니다.
주님이 제게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어떤일도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수금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은행대출이자 상환에 시달리다보면
또다시 돈에 묶여 평안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제 딸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부끄러움이,
제 욕심이, 제 자존심이 자꾸 앞서고 있었습니다.
경매당일 날 아침에 아내와 함께 기도하면서,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함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결국 저희는 지난해 4월초에
교회근처의 월셋방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지은지20년 넘은 흐름한 상가의 3층에
마련된 조그만 아파트입니다.
짐이 모두 들어 갈 수없어서 이리저리 처분하였습니다.
이사를 한 후에 교회를 가니
성도들 모두가 측은한 눈길만 보내고,
말을 건네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가족들이 환하게 웃으며 다니고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전혀 아무렇지도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세밀하게 간섭하여주심을
우리로 분명하게 알게하셨고,
친밀함으로 위로하여주시고,은혜로 충만케하시니,
거저 모든게 기쁘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은혜와 평강과 기쁨,웃음소리.
오직 이것만이 우리 가족의 가장 큰 바람이었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모두 같은 본문으로 Q.T를 합니다.
언젠가 전도서를 묵상하면서 제 딸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는 지금 무슨 때인 것 같아?
하나님의 막대기 밑을 지나는 중이지.
그리고 말씀의 끈에 묶여지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집에는 제가 제일 먼저 일어납니다.
일어나자 말자 마루로 나가서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딸이 일어날 시간이되면 딸에게 가서 축복기도하므로 딸을 깨웁니다.
그러면 아내는 안방에서 묵상하다가 부엌으로 나오고,
딸은 자기 방에서 묵상합니다.
아내가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저도 부엌에 서서 아내와 나눔을 가집니다.
그러면 딸 얘도 식탁에 앉아 듣고 있다가 끼어 들곤합니다.
아침 식사 시간은 자연히 Q.T나눔시간이 되어집니다.
저희 가정의 소원이 있다면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의 끈에 묶여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 숨쉬는 순간순간에도
주님의 언약아래 있슴을 잊지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 길만이 제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기때문입니다.
얼마전에 제 아내와 전도서 말씀을 나누면서
또다시 지난번 보다 더 큰 고통의 날이 온다면
그때 우리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를 서로에게 물었습니다.
고난 속에 있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살아갈 힘을 알게 하시고,
소망을 주시고,기쁨을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감사했습니다.
아버지로서 저는 제 딸이 세상 살아가면서
고난을 피해가는 법만을 가르치고싶지않습니다.
험한 세상 살아가다가 닥쳐온 고난이 있다면,
그 고통조차도 주어진 인생으로 받아들이고,
그 고난을 어떻게 즐기며,어떻게 이겨나가며,
오히려 풍요로운 인생으로 바꾸어가는 지를 알게 하고 싶습니다.
제딸이 어른이 되었을때,
어린시절 우리 가정에 닥친 고난과 고통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셨는지,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엄마와아빠는 그 고난을 어떻게 이겨나갔는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고 싶습니다.
제 딸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미련하게 걷는 자에게 어떤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하시는 지를
이 아버지를 통해 체험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이 세상을 이길 힘임을 잊지 않게 하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