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3대 검객과 조선의 무사정신
요즘 SBS의 '무사 백동수'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데, 이 드라마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무인들이 재조명 될 것 같아 왠지 기대가 되네요.
무예도보통지를 제작한 백동수를 테마로 한 드라마 '무사 백동수'의 포스터(재밌을 것 같네요^^)
조선은 흔히들 문(文)의 나라라고들 합니다. 무예보다는 공자의 말씀을 중요시했고 검보단 붓을 들고자 했던 사상이 강했던 나라였죠. 하지만 그런 조선도 초기에는 무사정신이 살아있던 나라였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그의 의형제 이지란(일명 퉁지란)과 태종 이방원은 우리 역사상 흔치 않은 전설적인 무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초기의 왕들은 일본 사무라이처럼 칼을 차고 다녔고 대신들 또한 국가적인 의전에 칼을 차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세종이 '대신들이 하인들에게 대신 칼을 차게 한다'고 개탄했을 정도로 무(武)를 숭상하는 상무정신이 약해졌습니다. 무를 숭상하지 않는 사상은 곧바로 국방력의 약화로 이어졌고, 왜란과 호란의 아픔을 겪게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을 이끌었던 선비사상은 존경할 만 했습니다. 그들은 곧은 신념과 절개를 갖고 있었고, 비굴하지 않았으며 의를 위해선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그 선비정신도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서서히 퇴색되어 갑니다.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당파만을 생각하며, 온갖 부패가 성행하게 되지요.
이러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실학이 등장했고 부국강병을 위해 다시 무사정신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조선 3대 무사 중 하나로 불리는 백동수(白東脩)가 박제가, 이덕무 등과 함께 무예사전이라 할 수 있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게 됩니다.
조선의 무예교과서 무예도보통지(각 동작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조선 3대 무사의 검법과 무사정신이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무예도보통지를 저술한 백동수가 다른 전설적 무사, 김체건과 김광택의 검법을 이어 받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최고의 무사로 불리는 사람은 김체건(?~?)으로 조선 무예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훈련도감의 살수로 있던 중 일본의 검술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느끼고 일본의 검술을 배우기 위해 부산의 왜관에 들어가 일본인들의 노비가 되어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일본의 비급을 얻지 못하자 일본인들 몰래 구멍을 파고 잠입해 숨어서 엿보아 약 3년간 수련 끝에 그 기술을 체득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전해진 일본의 검술을 왜검이라 하여 숙종 16년 이전에 훈련도감에 보급되었고, 김체건 자신은 숙종 앞에서 왜검술을 시범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영조 때 문인, 문암 유본학이 쓴 <김광택전>에서는 김체건의 검술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嘗試於御前 眩幻驚人 莫知其端 又布灰於地 跣足用兩拇履灰 而舞劍如飛 舞竟 恢無足跡 其體輕如此
"어전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현란한 몸놀림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그 움직임을 눈이 따라가지 못했다. 또한, 재를 땅에 뿌려놓고 맨발 양쪽 엄지발가락으로 재를 밟았는데 나는 듯한 검무는 극에 이르러 재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 몸의 가볍기가 이와 같았다."
김체건은 왜검술 외에도 중국에 건너가 그곳의 검술도 익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죠^^
김체건의 아들인 김광택(?~?)또한 조선 3대 무사의 한 명입니다.
그는 단학을 수련해 "김신선"이라 불리우던 김홍기를 따랐으며 그에게 각종 경신과 술법을 배웠습니다. 광택은 몸이 가벼워 서울에서 금강산까지 두번을 왕복해도 짚신이 태닳지 않았고, 추운겨울에도 옷 한겹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검선(劍仙)"이라 불렀습니다. 신선과 같이 몸가짐이 반듯하고 서예에 능했으며 검술에 통달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김광택의 검술을 표현한 글을 보면 '칼무리가 움직일때 꽃이 떨어져 쌓이는것 같아 칼에 몸을 숨긴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이야기는 문암 유본함의 '김광택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김광택을 조선 최고의 검사로 꼽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드라마 '무사 백동수'에서의 김광택(배우 전광렬씨가 역할을 맡으셨는데, 깊은 눈과 근엄한 표정이 검선 김광택 역할을 아주 잘 소화하는 것 같네요^^)
마지막 조선의 3대 무사는 무예도보통지를 저술한 백동수입니다. 앞의 두 무사가 실록이 아닌 야사에서 그 존재를 찾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 백동수는 실록에도 이름을 올린 이름있는 무인이었습니다. 그는 조부가 서자 출신인 탓에 서얼로 분리되었고, 과거시험 대신 무예에 전념해 김광택에게 검법을 전수받아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해 정조의 친위대인 장용영의 장교가 됩니다. 그리고, 그는 같은 서얼 출신 학자인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검법의 동작을 그림으로 자세하게 묘사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게 됩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선조 31년에 한교(韓嶠)가 곤봉 등 6종을 내용으로 편찬한《무예제보(武藝諸譜)》와, 1759년(영조 35년)에 죽장창(竹長槍) 등 12종을 늘린《무예신보(武藝新譜)》, 정조 때에 이르러 기예(騎藝) 등 6종을 다시 추가하여 24종에 달하는 각종 무예에 관한 자세한 도보(圖譜), 곧 도해와 설명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누구나 조선의 모든 무예를 쉽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 '무사 백동수'에서의 백동수(지창욱 분, 아직 드라마가 많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검사의 모습은 아닙니다만 이 사진이 무사의 모습과 가장 흠사한 것 같군요.)
이들 이후 조선의 무예는 다시 시들어 갔습니다. 계속되는 무예에 대한 천시와 신식무기의 유입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총을 칼이 이길 수는 없었으니까요. 한동안 침체되었던 한국의 검도는 해방 이후 심신수련의 목적에서 다시 부활했습니다. 대한검도가 대한체육회에서 공인한 국가 공인 단체가 되었고, 국가의 공인은 받지 못했지만 대단히 큰 지회를 소유한 해동검도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검도가 일본의 것이라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의 3명의 무사처럼 검과 함께 살아가며 민족의 무혼을 지킨 선조들이 있듯이 검은 우리 민족혼이 깃든 것이기도 합니다. 민족의 무술혼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김체건, 김광택, 백동수 세 명 무사의 노력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민족혼이 깃든 검을 부활시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