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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드, 공의회, 공동합의서
3. ‘시노드’는 교회의 거룩한 전승 안에서 사용되어 온, 오래되고 존중되어야 할 단어이다. 전치사 ‘쉰’(συν:-와 함께)과 명사 ‘호도스’(οδος:길)가 합성된 이 단어는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을 가리키는 바, 당신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고 말씀하시는 주 예수님을 따라 “그 길을 따르는 이들”(사도 9,2; 참조 19,9.23; 22,4; 24,14.22)이라고 불리던 그리스도인들을 연상시킨다.
4. ‘시노드’라는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초세기부터 점차 나타나는 교리적, 전례적, 교회법적, 사목적 문제들을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성령께 귀를 기울이면서 식별하고자 교구, 관구 또는 지역, 총대주교구, 세계 등 여러 차원에서 소집된 교회의 집회들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근래에 와서는 규모에 따라서 지역 공의회(전국 또는 관구 공의회)와 보편 공의회(세계 공의회)로 열리기도 하고, 참석 주체에 따라서 주교 시노드(각 교구의 주교 대의원들이 대륙 단위로 모이거나 전체 대의원들이 로마에 모여서 여는 시노드)와 교구 시노드(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등 교구의 하느님 백성 전체가 모이는 시노드)로 구분되어 시노드적 집회들이 열리고 있다.
5. 지난 수십 년 동안 열린 이 집회들에서 공동합의로 모아진 의견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여기서 하느님 백성의 뜻을 모으는 ‘공동합의성’의 절차가 교회 본질적인 요소로 부각되었다. 이 공동합의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도권적 결정에 근거하여, 그 이후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 안에서 살아온 체험을 성찰하여 숙고한 것이며,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의식 안에서 성숙해 온 결과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친교, 공동합의성, 단체성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공동합의성이라는 단어와 개념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공동합의성에 대한 요구는 공의회가 약속한 쇄신 작업의 중심에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느님 백성’의 교회론은 실상 다양한 형태로 행사되는 세례 받은 모든 이의 공통된 품위와 사명, 그리고 그들의 은사와 소명, 직무의 질서 있는 풍요로움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이룩되는 하느님 백성의 친교는 교회의 신비와 사명이 얼마나 심오한지를 잘 드러내주며, 그 원천이며 절정은 성찬례 모임 즉 미사이다. 미사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친교는 우선 백성 전체가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루는 수직적 친교로 나타나며 그 다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백성들 사이의 수평적 친교로 나타난다. 이러한 친교의 우선순위와 특성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공동합의적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 역시 하느님과의 친교 위에서 백성 간의 친교로 나타나야 함을 알려준다. 이 모든 요소는 하느님 백성이 함께 길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7. 공동합의성의 개념은 하느님 백성 전체가 교회의 삶과 사명에 관련되고 참여하는 것을 일컫는다. 교회의 삶과 사명은 하느님과의 친교 위에서 백성 간의 상호 친교가 나타나야 하며, 하느님과의 친교는 하느님 백성들 개개인들이 개별적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방식이 아니라 길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백성이 그 길을 통해 하느님과 친교를 맺기를 원하신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방식은 예수님께서 몸소 제자로 부르시어 사도로 양성한 이들을 당신 현존의 제도로 삼으시고 그 제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친교를 맺기를 원하신 교계적 친교로 나타난다. 이 교계적 친교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단의 단체성(collegialitas, collegiality)이라 일컫는다. 따라서 공동합의성이 참으로 언제나 드러나려면 그 본성상 주교들의 합의체적 직무 (collegiale/collegial minitry) 수행이 요청된다. 그러므로 주교들의 단체성은 교회의 공동합의성이 어떤 지역 안에서 개별 교회들 사이의 친교 차원에서, 그리고 보편 교회 안에서 모든 교회 사이의 친교 차원에서 주교들의 직무를 통하여 드러나고 실현되는 교계적 친교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공동합의성을 이룩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백성이 참여해야 할 교회의 삶과 사명에 있어서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가톨릭교회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뒤따르는 데에서 새로움이 시작된다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주교들에게 그들의 단체성에서 나타나야 할 교계적 친교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 전체가 공동합의적인 의식을 공유하고 함께 실천할 수 있기를 촉구하면서 제시한 쇄신 과제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며, 이 과제들이 풍요롭고 소중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분명한 신학적 원리들과 명확한 사목적 지침들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9. 공동합의성에 관한 이 문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은 이러하다. 공동합의성은 우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구상하였으며,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와 2세 그리고 베네딕도 16세 등 그의 선임자들이 앞서 갔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이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이는 예수님의 복음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며, 오늘날 역사 안에서 거룩한 성전(聖傳)에 대한 창조적 충실성 안에 육화되어야 하는 교회의 모습을 표현하는 길이다. 이는 새로운 교회의 길을 함께 걷기 시작하자는 초대이다.
공동합의성이야말로 교계 직무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의 틀이다. 즉,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현존시켜야 하는 교계 직무의 특별한 사명이 존중되면서도 평신도들이나 수도자들을 배제시키는 성직주의로 변질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복음화를 위한 능동적 주체로 나아갈 수 있는 신자들의 신앙 감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중요함을 교회 헌장이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공동합의성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참여하는 선교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필수적인 전제이다.
이는 가톨릭교회를 쇄신시키는 길인 동시에 갈라진 형제들, 그러니까 동방 정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개신교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과도 다시 일치하려는 노력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과제이다. 공동합의성이 충만한 친교를 향한 길을 함께 걸어가자는 초대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갈라진 이후 서로 발전시켜온 다양한 카리스마들을 서로 배우면서 교회에 대한 이해와 체험을 더욱 풍요롭고도 올바르게 하게 해 줄 것이다.
문헌의 목적과 구성
10. 이 문헌에서는 첫 두 장에서 공동합의성의 신학적 의미를 살피고 다음 두 장에서 공동합의성을 실천하기 위한 사목적 지침을 제공할 것이다.
- 제1장에서는 성경과 성전의 규범적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 교회의 공동합의의 모습이 계시의 역사적 전개 과정 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규명할 것이며, 또한 공동합의성의 개념을 정의하고, 그 실천을 규정하는 기본 특징들과 명확한 신학적 기준들을 밝힐 것이다.
- 제2장에서는, 먼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적 교리에 따라 공동합의성의 신학적 기초들을 제시한 다음, 선교적 사명을 받아 역사 안에서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전망에, 그리고 친교인 교회의 신비에 그 기초들을 연결시킬 것이다. 또한 교회의 특징적 속성들인 단일성, 거룩함, 보편성, 사도성에도 그 기초들을 연결시킬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이 교회의 사명에 참여하는 것과 목자들의 권위 행사 사이의 관계를 더욱 심도 있게 다룰 것이다.
11. 성경과 성전 안에서 발견되는 교회의 공동합의적 삶에 대한 규범적 원천들로 인해서, 교회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바탕 위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고 교회의 직무를 통하여 실현되는 인류가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자신의 소명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 계획의 중심에서 빛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 원천들로 말미암아 교회는 자신이 수행해 온 바 공동합의적인 삶과 구조와 과정과 사건들을 격려받을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이룩해야 할 바 공동합의적인 삶과 구조와 과정과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식별하는 데 필요한 기본 노선들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1.1. 성경의 가르침
12.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온갖 피조물들이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도록 세상을 돌봄으로써 당신을 닮으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회적 존재라고 증언한다(참조 창세 1,26-28). 생김새로써가 아니라 역할로써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존재, 그가 인간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런 계획을 알고 방해하려는 악마는 최초의 사람부터 유혹하였고, 아담과 하와는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서 하느님을 닮으려 하기 보다는 아예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넘어서고자 하는 죄를 저질렀다. 이 같이 악마가 사람을 유혹하여 죄를 저지르게 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게 되었고, 창조의 진선미가 표현되어야 할 질서 있는 관계망도 깨졌으며, 인간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을 닮아야 할 소명도 흐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그러우신 자비로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어 인간을 새롭게 하시고,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일치의 길로 이끄시는 한편, 인간의 자유를 치유해 주셨다. 그리하여 인간이 성숙된 자유를 행사하여 하느님과 결합하고, 피조물들의 공동의 집 안에서 형제들과 일치하며, 그런 지향으로 살아가도록 하신다.
13.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시고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불러 모으셨다. 이러한 불러모음은 시나이에서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확인되며, 종살이에서 해방된 백성에게 하느님의 대화 상대로서의 품위를 부여한다. 하느님께로부터 ‘불러모인’ 백성은 이집트 탈출의 여정 안에서 주님의 배타적 속성들을 인정하면서 예배를 통하여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의 법대로 살고자 주님 주위에 모인다.
‘불러모인 백성’은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적 소명이 드러나는 본디 형태이다. 광야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인구 조사를 명하시고 그 각각에게 자리를 정해 주신다(참조; 민주1-2장). 만남의 장막 앞에서 각 지파들이 지정받은 자리로 출발하여 행진하는데, 그 행렬을 이끄는 이는 주님이셨다(민수 2,34). 백성(참조: 탈출 24,7-8) 가운데에는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외국인들(여호 8,33.35)도 포함되어 있었다. 각 지파 행렬의 선두에는 천인대장, 백인대장, 오십인대장, 십인대장 등의 재판관들(탈출 18,25-26), 원로들(민수 11,16-17.24-30), 레위인들(민수 1,50-51)이 종속적이고 단체적 방식으로 모세에게 연결되며, 주님께서는 모세의 직무를 통하여 현존하고 계셨다(참조: 민수 12장; 15-16장; 여호 8,30-35).
14. 예언자들은 ‘불러보인 백성’에게 하느님의 부르심이 담긴 계약에 충실하게 역사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회개해야 함은 기본이고, 이웃과 맺는 관계에서 정의로워야 함이 필수임을 상기시켰다. 특히 가난한 이웃, 억눌린 이웃 그리고 이방 출신 이웃에게 공정하게 대해야 하고 이런 공정함을 실천하는 일을 이웃과 신의 있게 함께 하는 것이 주님의 자비를 눈에 보이게 증언하는 것이며, 이렇게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주님 앞에 겸손하게 사는 것이라고 일깨웠다(예레 37,21; 미카 6,8).
예언자들이 촉구한 대로 ‘불러모은 백성’이 회심하도록 하느님께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실 것이며(에제 11,19), 이 백성의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와 같은 해방의 길을 이 백성에게 새로이 열어 주실 것이며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새로이 당신의 나라를 창조하시고자 하는 약속이므로 이집트에서 해방될 때보다 더 보편적인 지평으로 확장될 것이다(참조: 이사 43,16-21; 61,1-2; 65,17-25).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신 주님의 종(참조: 이사 42,1-9; 49,1-7; 50,4-11; 52,13-15.53,1-12)이 겨레들을 불러 모을 것이고, 주님의 종이 받은 것처럼(이사 61,1-2) 이들 모두에게 주님의 영을 불어넣음으로써 그 계약이 봉인될 것이다(요엘 3,1-4).
15.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새 계약을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실현하신다. 그분께서는 메시아이시며 주님으로서, 당신의 케리그마와 삶과 인격을 통하여 그 계약을 실현하시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와 은총으로 온 인류를 끌어안아 사랑의 친교를 이룩하시려는 계시였다.
인류와 사랑의 친교를 이룩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은 예수님의 파스카 안에서 성취되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 생명을 내놓으신 뒤에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으시고(요한 10,17) 성령을 “한량없이”(요한 3,34) 부어주심으로써, 당신 제자들이 그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파스카는 새로운 이집트 탈출이다. 예수님께서는 신앙 안에서 믿는 이들을 모두 모으시어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당신과 일치시키시고 백성들도 하나가 되게 하신다(요한 11,52). 이러한 일치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심으로써 이루어진 구원의 업적이다(참조: 요한 17,21).
16.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길’(루카 20,20)을 알리시고 그 방향을 따라가시며(참조; 루카 9,51-19,26),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는(참조: 루카 4,14-15; 8,1; 9,57; 13,22; 19,11) 순례자이시다. 그분 자신이 하느님께 가는 ‘길’(요한 14,6)로서, 성령 안에서(참조: 요한 16,13)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해 주시며,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고 형제들과도 친교를 이룰 수 있는 생명을 전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새 계명(참조: 요한 12-15)에 따라 하느님과 그리고 형제들과 친교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역사 안에서 새 계약의 하느님 백성으로서 자신이 받은 선물에 합당하게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당신의 말씀으로 비추어 주시고 생명의 빵으로 양육하신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인도로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살아 있는 표상을, 우리는 루카 복음서 저자가 묘사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참조; 루카 24,13-35).
17. 신약 성경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전달하시는 능력을 가리키고자 ‘신적 권위’(‘엑수시아’, εξσυσια)라는 한 가지 특별한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부께로부터 받으신 것이며, ‘성령의 힘’인 ‘뒤나미스(δυναμις)’ 안에서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행사하시는 능력이다. 이 신적 권위는 ‘하느님의 자녀’(요한 1,12)가 되게 하는 은총을 전달하는 데 있다. 사도들은 그러한 신적 권위를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받았으며, 예수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라고 사도들을 파견하신다(참조: 마태 28,19-20). 파견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행사하는 신적 권위에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세례를 통하여 참여하게 되는데, 그 과정과 방식은 ‘성령의 기름부음’(참조: 1요한 2,20.27)을 받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들으며(참조 요한 6,45) ‘모든 진리 안으로’(요한 16,13) 인도되는 것이다.
18. 부활하신 예수님의 ‘엑수시아’, 곧 그 신적 권위는 교회 안에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을 건설하시고자 하느님 백성 안에 베풀어 주시는 다수의 영적 선물들(τα πνευματικα, 프네우마) 또는 은사들(τα χαρισματα, 카리스마)을 통하여 표현된다. 그런데 그 선물들과 은사들을 사용하는 데 객관적인 질서가 존중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전개되어 모든 이를 위한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참조: 1코린 12,28-30; 에페 4,11-13).
그 가운데 첫째는 사도들이며,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시몬 베드로에 고유하고 가장 뛰어난 역할을 주셨다(참조: 마태 16,18-19; 요한 21,15 이하). 사도들에게는 신앙의 유산을 충실하게 보존하며 교회를 이끄는 직무가 맡겨졌다(참조: 1티모 6,20; 2티모 1,12.14).
그렇지만 은사(χαρισμα, 카리스마)라는 단어는,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각자에게 고유한 선물을 주시는 성령의 자유로운 주도권 속에 드러나는 무상성과 다양한 형태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참조: 1코린 12,4-11. 29-30). 그러므로 모든 은사를 사용할 때에는 항상 상호 복종과 상호 봉사의 논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참조: 1코린 12,25).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선물은 사랑이기 때문이다(참조: 1코린 12,31).
19. 사도행전은 사도 교회가 걸어가는 여정에서 하느님 백성이 부활하신 주님의 뜻을 공동체적으로 식별하도록 부름받았던 중요한 순간들을 증언하는데, 이 여정을 이끌고 인도하시는 주인공은 오순절에 하느님 백성에게 부어지신 성령이시다(참조; 사도 2,2-3). 그리고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걸어가야 할 길을 식별하려고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바로 사도들의 책임이다(참조: 사도 5,19-21; 8,26.29.39; 12,6-17; 13,1-3; 16,6-7.9-10; 20,22). 사도들의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좋은 예로서, 사도들이 식탁 봉사의 임무를 맡기고자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선택한 것“(참조: 사도 6,1-6)과,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에서 결정적인 문제에 대하여 식별한 것(참조: 사도 10장)을 들 수 있다.
20. ‘예루살렘 사도 공의회’(참조: 사도 15장; 갈라 2,1-10)에서는 사도 교회가 그 여정의 결정적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 현존의 빛을 통하여 선교의 관점에서 자신의 소명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공동합의의 사건이 이루어짐을 알아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교회 안에서 거행된 시노드들의 원형적 모습으로 해석될 것이다.
21. 이 공의회에서 처음에 문제를 제기한 이들은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교우들이었으며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사도 15,2) 문의하기로 결정하고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그들에게 파견하였다. 질문을 받은 예루살렘 공동체, 곧 사도들과 원로들은 곧 함께 모여 상황을 검토하였다(참조: 사도 15,4).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일어난 일을 보고하자, 이어서 활발하고 솔직한 논쟁이 이루어졌다(사도 15,7). 그리고 베드로의 권위 있는 증언과 신앙 고백을 모두가 들었다(참조: 사도 15,7-12).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백성을”(사도 15,14) 선택하신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증언하는 예언에 비추어서 지금 일어난 일을 해석하고(아모 9,11-12; 참조: 사도 15,14-18), 몇 가지 행동 규칙을 제시하며 최종 결정을 내린다(참조: 사도 15,19-21). 예루살렘 공동체 전체가 그 결정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고(사도 15,22.28), 이어서 안티오키아 공동체도 그렇게 하였다(참조: 사도 15,30-31).
처음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 제기가 있었고, 이어서 이에 대한 활발하게 토론하는 과정은,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증언과 서로의 판단을 교환하여 서로 함께 성령의 뜻에 귀 기울이는 가운데 만장일치적 합의(참조: 사도 15,25)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합의는 교회의 복음화 사명을 위한 공동체적 식별의 결실인 것이다.
22. 바오로 사도는 성찬 모임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표상을 제시함으로써 유기체의 단일성과 더불어 그 지체들의 다양성을 표현한다. 인간의 몸 안에서 모든 지체 각각의 고유성이 필요하듯이, 교회 안에서도 모든 이가 세례에 힘입어 동등한 품위를 지니는(참조: 갈라 3,28; 1코린 12,13) 동시에, 또한 모든 이가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구원 계힉을 실현하는 데에 각자 이바지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이는 공동체의 삶과 사명에 공동 책임이 있다. 모든 이가 같은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는다는 점에서(참조: 1코린 15,45), 이들은 각자의 특별한 직무와 은사를 존중하며 상호 연대성의 법칙에 따라 일하도록 부름받고 있다.
23. 하느님 백성이 걸어가는 여정의 종착점은 하느님 영광의 찬란한 광채에 싸여 있고 천상의 전례가 거행되는 새 예루살렘이다. 천상의 전례에는 천사들과 ‘수백만 수억만’의 사람들과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이 함께 참여할 것이다(참조: 묵시 5,6.9.11.13). 그때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 중에서 가장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묵시 21,30).
1.2. 제일천년기 교부들과 성전의 증언
24. 교회의 역사 제일천년기에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과 민족들의 흥망성쇠에 따라 히브리 문화권에서 그리스-로마 문화권을 거쳐 게르만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여정을 걸었다. 이렇듯 다양한 문화를 거치고 또 그 문화들이 교회 안에 공존하는 가운데에서 여러 민족들의 체험 안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복음에 충실히 나아가기 위하여 교회가 받은 도전이 공동합의성이었다.
초대 교회가 낯선 문제에 직면하여 사도 회의를 거치면서 ‘성령과 우리의 결정’이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처럼, 공동합의 과정을 이룩하는 일은 처음부터 교회의 사도적 기원과 보편적 소명에 대하여 창조적으로 충실하려는 노력이었다. 그것은 본질에서는 단일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서로 다른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환경을 만나고 더구나 낯선 사회적 상황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다양하게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25. 2세기 초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의 증언에 따르면,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충실성,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의 인도 아래 이루어지는 성찬 거행, 여러 직무들의 질서 있는 수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서로 봉사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친교의 수위성, 바로 이것들이 참된 교회를 구별해 주는 특징들이다.
이러한 전승을 물려받아 3세기 중반에 해석한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의 증언에 따르면, 지역적 차원에서 그리고 보편적 차원에서 교회의 삶과 사명을 다스려야 하는 공동합의적 원리는 이러하다. 지역 교회 안에서 ‘주교 없이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제들과 부제들의 조언 없이 그리고 백성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여기서 언제나, “주교직은 하나이며, 각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부분을 통하여 전체에 동참하게 된다.”는 규칙이 견지되어야 한다.
26. 지역 교회들 사이의 친교를 드러내고 촉진하는 교회 관구들이 4세기부터 형성되었는데, 이 교회 관구들은 지역 관구들 안에서 수위권을 인정받는 수도 대주교를 그 수장으로 하고 있다. 또한 수도 대주교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니케아 공의회 법규 제6조), 콘스탄티노플(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법규 제3조), 예루살렘(칼케돈 공의회 법규 제28조) 등 다섯 주교좌 체계(pentarchia)가 완성되었다.
27. 3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역 교회 주교의 관할을 넘어서는 모든 결정은 공동합의를 통하여 내려져야 한다(『사도들의 법규』, 제34조)는 공동합의의 전통이 이미 세워져있었다. 즉, “각 민족의 주교들은 자신들 가운데 첫째 주교를 인정해야 하고, 그를 자신들의 머리로 여기며, 그의 동의 없이는 어떤 중요한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 그러나 그 으뜸은 모든 이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처럼 교회적 일치의 과정과 절차로 이루어지는 공동합의적 행위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려는 것이다.
28. 그리하여 이 공동합의의 전통에 따라서 3세기부터 지역 안에서 발생한 규율, 경신례, 교리에 관한 문제들이 교구와 관구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시노드에서 논의되었다. 여기에서 내려진 결정들이 모든 교회의 친교의 표현이라는 확신은 매우 견고하였다.
로마 교회는 처음부터 특별하게 여겨졌는데, 이는 그곳에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하였기 때문이고, 로마의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굳건하게 수호된 사도적 신앙, 교회들 사이의 친교에 봉사하려고 로마의 주교가 행사한 권위 있는 직무, 그 안에서 확인되는 공동합의의 삶의 풍부한 실천으로 로마 교회는 모든 교회를 위한 기준점이 되고, 교회들은 논쟁을 해결하고자 로마 교회에 문의했으며, 그래서 로마 교회는 다른 교회들이 상소하는 좌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좌는 서방에서, 행정적 차원과 법적 차원에서 다른 교회들에게 조직화의 원형이 되기에 이르렀다.
29. 325년 니케아에서 역사상 첫 번째 보편 공의회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소집으로 개최되었다. 이 당시에 동방에서는 천여 명의 주교들이, 서방에서는 8백여 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성자의 신원을 교리적으로 확정하고자 아리우스 이단 문제를 논의한 이 공의회에서 논의과정이 진통을 겪기는 했지만, 이 공의회는 성부는 성자를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낳으신 분으로 고백하는 한편,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고백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밖에도 몇 가지 법규정을 결정했는데, 이는 교회 전체를 위한 규범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니케아 공의회에서 처음으로 주교들의 직무가 공동합의적으로 행사됨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여정을 성령 안에서 이끌고 인도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권위(εζουσια. 엑수시아)가 보편적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개최된 제일천년기의 보편 공의회들에서 공동합의를 위하여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식이 점진적으로 명확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여러 교회 수장들의 조화, 로마 주교의 협력, 다른 총대주교들의 동의 그리고 그 공의회의 가르침과 이전 공의회 가르침 사이의 일치이다.
30. 제일천년기 동안 개최된 보편 공의회들에는 주교들이 참석하여 위와 같은 발전을 이룩한 반면에, 지역적 차원에서 열린 공의회 즉 관구 시노드와 교구 시노드에서는 보편 공의회가 공동으로 합의한 사도적 전승 위에서 구체적인 문화적 맥락에 따라서 고유하고 다양한 결정을 이끌어내었다.
1.3. 제이천년기 공동합의적 실천의 발전
31. 제이천년기가 시작되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되었다(1054년). 특히 동방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와 서방의 로마 교회의 친교가 단절되고, 이후 동방 교회에 속한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구들에 속한 교회 영토들이 이슬람의 정치적 지배 아래 속하게 되면서, 공동합의가 실천되는 양상은 서방과 동방에서 달라진 정치적 상황만큼이나 서로 다르게 진화하게 되었다.
동방 정교회 안에서는 총대주교구와 관구 차원에서 시노드가 열리고, 총대주교와 관구장 대주교가 함께 참석하는 특별 시노드들이 열려서 전례와 교회법 그리고 사목적 문제들을 검토하는 등 교부들의 전승에 따른 공동합의적 관습이 지속되었다.
32. 서방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그레고리오 교황이 개혁 조치를 단행하고 대외적으로 교회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벌이면서 교황의 수위권을 강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황제가 교회 내부의 논의에 개입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교회들과 주교단의 발언권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수위권을 강화한 교황이나 교황사절이 주재하는 공의회가 열리면, 교회적 권위를 가진 이들(주교, 아빠스, 수도회 장상)과 더불어 세속 권력자들(황제, 임금, 고위 귀족 대표자), 그리고 전문 신학자들과 교회법 학자들이 참석하였다.
33. 서방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지역 교회 차원에서도 교회적 성격을 상실하고 정치적 성격이 짙어져서 왕의 시노드 또는 국가 시노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클뤼니 수도원과 탁발 수도원 등에서는 모든 수도회원에게 개방된 시노드 관습을 부활시켰다.
34. 중세 말기에는 동시에 두 명, 나중에는 세 명이 스스로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대립 교황 사태가 발생하였다. 교황권이 약화되는 이러한 사태가 초래되자 교황의 수위권에 대하여 공의회 우위설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대립 교황 사태가 해소되면서, 공의회 우위설은 교회의 머리와 지체들이 함께 공동합의적 실천을 이룩해야 한다는 교회 전승에 따라 사라졌다.
35. 한 세기 뒤에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으로 말미암아 촉발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더 이상 정치적 대표로 참석한 이들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대내적 질서를 더 강화하였는데, 예를 들면 해마다 교구 시노드를 개최하고 삼 년마다 관구 시노드를 거행하는 규범을 제정함으로써 트리엔트 공의회가 개혁한 조치들의 추진력을 교회 전체에 전달하는 기능을 강화하였다. 이 교구 및 관구 시노드에서는 하느님 백성 전체, 즉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공의회가 결정한 규범과 결정들을 전달하는 일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불평등한 이들의 완전한 사회(societas perfecta et inaequalium)라고 교회를 규정하는 교계제도적 전망이 강조되었다. 나아가,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목자들로 구성된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나머지 다른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배우는 교회(Ecclesia dicens)를 구분하기에 이른다.
36.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들은 가톨릭 전통과는 거리가 있는 교회론과 성사론 및 직무론을 배경으로 독특한 공동합의적 관습을 만들어냈다.
루터교회 공동체들은 세례에서 유래하는 만인 사제직(sacerdotium commune)에 힘입어 일정 수의 신자들이 참여하는 교회적 공동체의 공동합의로 통치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모든 신자들이 직무자 선출에 참여하고 복음의 가르침과 교회의 지침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도록 부름받는다.
목사, 박사, 장로, 집사 등의 네 가지 직무를 주장하는 장로교회 공동체들은 세례로 모든 이에게 주어진 품위와 권한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목사들과 함께 지역 공동체의 책임을 맡는다. 장로들은 박사들, 집사들 그리고 일반 평신도들이 참석한 일반 회합에서 의견을 수렴한다. 그러니까 장로제를 중심으로 간접적인 공동합의 형태를 띠는 셈이다.
성공회는 “공동합의로 통치되지만 주교에 의하여 인도된다.”(Synodically governed, but episcopally led.)는 공동합의 관습이 지역과 국가와 초국가 차원에서 유지되고 있다. 이는 입법권과 집행권 사이의 구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교들의 은사와 개인적 권위가 공동체 전체에 부여된 성령의 선물과 협력하여 이루는 동반 상승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37.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는 교황의 수위권과 교도적 무류성의 교리를 승인하였다. 비오 9세 교황이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선언할 때와, 비오 12세 교황이 성모 승천 교의를 선언할 때 주교들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의견을 구하고자 노력했으나, 결정하는 최종 과정에서는 이 교리를 따랐다.
38. 19세기에 요한 아담 묄러(1796~1838), 안토니오 로스미니(1797~1855), 존 헨리 뉴먼(1801~1890) 등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면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 공동합의의 관습을 되살릴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성경과 성전의 규범적 원천들을 상기시키면서, 성서학과 전례학 그리고 교부학 등에 근거하여 질서 있는 공동합의의 관습을 내포하는 친교의 차원을 강조하고, 주교와 교황의 특수한 직무와 내적으로 본질적 관계를 맺고 있는 신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i fidelium)을 중시하였다. 또한 이들은 교회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교회 외적으로, 즉 다른 교회들과 교회적 공동체들과 맺는 관계도 교회 일치적인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과, 공적 영역에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데 대해서도 무조건 단죄할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식별해서 시대의 징표를 찾아내야 한다는 등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39. 19세기 후반부터 한 나라의 주교들이 ‘주교회의’로 모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교회’가 단순히 그 목자들과 동일시되지는 않으며, 교회 전체가 성령의 활동으로 성전의 주체이거나 ‘기관’이 된다. 그래서 평신도들도 더 이상 사도적 신앙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 나서게 된다.
40.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전 수십 년 동안 형성되어 온 예언자적 여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성전에 비추어 풍요로운 종합을 이룸으로써,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획을 다시 취하여 이를 전체적인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의 전망 안에 통합시켰다.
‘교회 헌장’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친교로서 바라보는 전망을 제시하는데, 여기에서 공동합의성을 의미 있게 되살리려는 신학적 전제들이 발견된다. 곧 교회에 대한 신비적이고 성사적인 개념, 하느님 백성이 천상 본향을 향하여 역사 안에서 순례한다는 특성, 그리고 하느님 백성 안에서 모든 구성원이 세례로 하느님 자녀로서 같은 품위를 지니고 같은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 주교직의 성사성과 로마 주교와 교계적 친교 안에서 단체성에 대한 가르침 등이 그것이다.
‘주교 교령’은 개별 교회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주교들이 사제단과 친교를 이루고 사제 원로 회의 또는 사제 평의회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에게 맡겨진 교회에 대한 사목적 돌봄을 행할 것을 촉구하며, 각 교구에서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사목 평의회를 구성할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관구 시노드와 관구 공의회 그리고 ‘주교회의’ 제도 등이 활성화되기를 권고하였다.
‘동방 교회 교령’에서는 동방 가톨릭 교회들과 관련하여 총대주교 제도와 그 공동합의적 형태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었다.
41. 보편 교회 차원에서 공동합의적 관습을 되살리고자, 바오로 6세 교황은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창설하였다. 이 회의의 정기총회가 14회에 걸쳐 개최되고, 주교회의의 경험과 활동이 자리를 잡아 강화되며, 곳곳에서 시노드 회합들이 거행되었다. 그 밖에도 평의회들이 구성되어, 지역 또는 대륙 차원에서 사목 노선들을 계획할 수 있도록 지역 교회들과 주교들 사이에서 친교와 협력에 도움을 주었다.
제2장 공동합의성의 신학을 향하여
42. 성경과 성전의 가르침은 공동합의성이 교회의 본질적 차원임을 증언한다. 공동합의성을 통하여, 교회는 순례의 여정 중에 있는 하느님 백성,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불러 모으신 회중(會衆)으로 드러나고 형성된다. 이 문헌의 제1장은 특히 예루살렘 공의회(참조: 사도 15,4-29)의 모범적이며 규범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 이 회의는 신생 교회에 대한 결정적 도전 앞에서 공동체적이고 사도적인 식별을 행하는 방법을 실제로 보여 주는데, 이러한 방법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이루는 친교의 신비라는 교회의 본질 자체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공동합의성은 단순한 활동 절차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살아가고 활동하는 고유한 형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전망 안에서, 이 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에 비추어 공동합의성의 신학적 기초와 내용들이라는 주제를 다루게 된다.
2.1. 공동합의성의 신학적 기초
43.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이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의 길을 방향짓도록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름받고 그 자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온 인류를 품고자 하시는 삼위일체 친교의 삶에 참여하게 된다. 교회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나아가야 할 길들을 식별하고 또 그러한 여정을 실행하는 데에 모든 교회 구성원이 책임과 질서 있게 참여함으로써, 친교는 하느님 백성의 고유한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을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사실 공동합의성을 실행하는 데에서, 하느님과 결합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일치하는 가운데 진실하게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실현되는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인간의 소명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4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구원 계획을 실현하시려고 사도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전달하셨다(참조: 요한 20,22). 성령 강림 날에 하느님의 영이 세상 곳곳에서 와서 케리그마를 경청하고 받아들인 모든 이에게 부어짐으로써, 모든 민족들이 유일한 하느님 백성으로 부름받는 보편적 소명의 예표가 된다(참조: 사도 2,11). 성령께서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살아 있는 성전인 교회의 친교와 사명에 생기와 형태를 주신다(참조: 요한 2,21; 1코린 2,1-11). “교회가 ‘거룩하고’ ‘보편되며’ 또한 ‘하나이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임을 믿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분리될 수 없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50항)
45. 교회가 하나인 것은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일치가 교회의 기원이고 모범이며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참조: 요한 17,21-22). 교회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 안에서 모든 사람을 화해시키고자 지상에서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이다(참조: 1코린 12,4).
교회가 거룩한 것은, 교회가 곧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업적이기 때문이다(참조: 2코린 13,13). 신랑이 신부에게 자신을 내어 주듯 교회에게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교회는 거룩하게 되었고(참조: 에페 5,23),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안에 부어진 아버지의 사랑으로 생기를 얻는다. 교회 안에서 성인들의 친교는 두 가지 의미로, 곧 거룩한 것들의 공유와 성화된 사람들 사이의 친교라는 의미로 실현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일치와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 세워지고 파견되어,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와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전구로 동반을 받으며, 교회의 모든 구성원의 소명인 거룩함의 완성을 향하여 걸어간다.
교회가 보편적인 것은 신앙의 온전성과 전체성을 수호하기 때문이고(참조: 마태 16,16), 또한 지상의 모든 민족들을 단 하나의 거룩한 백성으로 모으도록 파견되기 때문이다(참조: 마태 28,19).
그리고 교회가 사도적인 것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고(참조: 에페 2,20),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하게 전달하며,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성화되고 다스려지기 때문이다(참조: 사도 20,19).
46. 그리스도의 몸의 친교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여정 안에서, 성령의 활동은 공동합의성의 원리이다. 성령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 안에서 사랑의 끈으로서, 바로 그 사랑을 ‘성령의 친교’(2코린 13,13)로 건설되는 교회에 전해 주신다. 세례 받은 모든 이 안에서, 유일하고 동일한 성령의 선물은 많은 다양한 형태들로 드러나게 되는데, 보편적 성화 소명, 모든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하는 것, 교계와 은사의 선물들의 풍요로움, 각 지역 교회의 삶과 사명 등이 바로 그것이다.
47. 교회의 공동합의 여정은 성체성사로 형성되고 양육된다. 성체성사는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는 물론 신자 개개인에게도 그리스도인 생활 전체의 중심이다.”(『로마 미사 경본』,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16항) 공동합의성의 원천과 절정은 전례 거행, 그중에서도 특히 성찬 모임에 대한 충만하고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통하여 드러나게 된다.
48. 주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 백성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시어, 그 백성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고, 성체성사로 그 백성을 기르시며, 공동합의적 친교 안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신다.
2.2. 순례하며 선교하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 여정
49. 공동합의성은 교회가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특성을 드러낸다. 민족들 가운데에서 부름을 받고 모인 하느님 백성의 표상(참조: 사도 2,1-9; 15,14)은 그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며 선교적인 차원을 드러내는데, 이는 나그네로서 인간 존재의 조건과 소명에 상응한다.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아버지께 인도하시는 ‘길’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하도록 비추어 주는 표상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향하시는 하느님의 ‘길’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길’이시다. 우리 가운데 당신 천막을 치심으로써(참조: 요한 1,14) 예수님 스스로 순례자가 되신 은총의 사건은 이제 교회의 공동합의의 여정 안에서 여전히 계속된다.
50.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간다. 여행자이시고 길이시며 고향이신 그분께서는 당신 사랑의 성령을 보내 주시어(참조: 로마 5,5), 우리가 그분 안에서 “더욱 뛰어난 길”을 따를 수 있게 하신다. 교회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참조: 1코린 11,26)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부름 받는다. 교회는 천상의 나라를 향한(참조: 필리 3,20) 길을 따르는 백성이다(참조: 사도 9,2; 18,25; 19,9). 공동합의성은 마지막 안식에 이르기까지 친교 안에서 걸어가는 교회 여정의 역사적 형태이다(참조: 히브 3,7-4,4).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앞으로 올 도성”(히브 13,14)을 향한 주님 백성의 순례를 인도하고 안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이방인과 나그네”(1베드 2,11)로 살아가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은혜와 책임을 부여받는다.
51. 하느님의 백성은 시간의 종말까지(참조: 마태 28,20) 그리고 땅끝까지(참조: 사도 1,8) 걸어가는 여정 중에 있다. 교회는 여러 지역 교회들 안에서 공간을 통과하여 살아가며, 예수님의 파스카로부터 그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통과하며 걸어간다. 교회는 하느님과 이루는 결정적인 결합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류 가족의 일치라는 종말론적 목표가 이미 현존하고 작용하는 단 하나의 역사적 주체가 된다. 이러한 여정에서 공동합의적 형태는 순례하는 각각의 개별 교회들 안에서 친교와,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별 교회들 사이의 친교의 실천을 표현하고 촉진한다.
52. 교회가 공동합의를 이룬다는 것은, 여러 지역 교회들이 그들 서로 간에, 그리고 로마 교회와 관계 안에서, 통시적 관점(고대성. antiquitas)에서나 공시적 관점(보편성. universitas)에서 모두 살아 있는 성전을 통하여 신앙의 친교를 이룸을 의미한다. 신경과 지역 시노드와 관구 시노드, 그리고 특별하고 보편적 형태로 보편 공의회의 결정들이 전해지고 수용되는 것은 어디에서나, 항상, 그리고 모든 이를 통하여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 안에서 친교를 규범적으로 표현하고 보증해 주었다.
53. 공동합의성은 교회가 사명에 봉사하고자 삶으로 살아낸 것이다. “순례하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이다.” 그 교회는 복음화를 위하여 존재한다. 하느님의 백성 전체는 복음 선포의 주체이다.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세례 받은 모든 이는 선교의 주역이 되도록 부름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선교하는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복음화의 길들을 식별하려는, 공동합의적인 상승 작용으로 교회의 삶 안에 현존하는 직무와 카리스마들을 활성화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2.3. 친교의 교회론의 표현인 공동합의성
54.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친교의 교회론의 전망 안에서 공동합의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필수적 원리들을 제시한다. 특히 이 헌장의 구조와 순서에 그 필수적 원리들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제1장에 ‘교회의 신비’가 먼저 나오고, 제2장에 ‘하느님의 백성’, 제3장에 ‘교회의 교계제도와 주교직’이 뒤따라 나오는 순서는, 전체가 부분보다 우선하고 목적이 수단보다 우선한다는 논리 안에서, 교계제도는 하느님 백성에 봉사하려는 것이고, 이는 교회의 사명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실현되도록 하려는 것임을 강조한다.
55. 공동합의성에 있어서는 교회 전체와 교회 안의 모든 이가 주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교황, 주교들, 신부들 같은 모든 사제들과 부제들처럼 교계제도에 속한 신앙인들을 비롯하여, 평신도 신앙인들(제4장), 수도자들(제6장) 등 모든 신앙인들이 공동합의에 이르는 여정의 동반자들이다. 또한 이 신앙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직무적으로나 보편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성령께서 베풀어 주시는 다양한 은사를 받아 공동선을 위하여 능동적으로 봉사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는 주체들이다. 이 신앙인들 모두가 공동합의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서로 친교로 결합된 교회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서로의 자유를 존중함으로써 서로 다른 주체들로 구성되었지만 하나가 된 교회를 증언하는 것이다. 그 교회는 공동체적인 단 하나의 주체로서 역동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와 기둥인 사도들을 기초로 하여, 수없이 많은 살아 있는 돌들로 이루어진 “영적 집”(1베드 2,5)이며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에페 2,22)로서 지어진다.
56. 모든 신앙인들은 세례성사로 받은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예언자, 사제, 왕의 직분에 참여하는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증언하고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신앙인들이 세례성사 때에 받은 은총은 성령의 도유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는 신앙 감각(sensus fidei)으로 나타난다.
“세례 받은 모든 사람 안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의 성화하는 힘이 작용하여 복음화를 재촉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 힘에 의하여 거룩해집니다. 이는 믿음에서 오류가 없게 합니다. 비록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여도, 하느님 백성은 믿을 때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하느님 백성을 진리 안에서 이끄시어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인류에 대한 당신 사랑의 신비의 일부로, 하느님께서는 신자들 전체에게 신앙의 본능, 곧 신앙 감각을 심어 주시어 무엇이 참으로 하느님의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해 주십니다.”(「복음의 기쁨」, 119항)
주교들은 모든 신앙인들이 하느님 백성으로서 받은 이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고 신앙 감각에 따라 식별할 수 있도록 봉사할 특별한 임무를 맡고 있으며, 이를 위해 주어진 사도적 권위로써 그들에게 맡겨진 교회를 가르치고 성화시키며 다스린다.
57.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적 전망을 받아들이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동합의적 교회의 모습을 ‘역삼각형’으로 그려 내었다. “교회의 본질적 차원인 공동합의성은 우리에게 교계 직무 자체를 이해하는 가장 적합한 틀을 제시해 줍니다. …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에 그 정점에 사도단을 두셨고, 그 안에서 베드로 사도는 ‘반석’(참조: 마태 16,18)이며 믿음 안에서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하는(참조: 루카 22,32)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 안에서는, 마치 역삼각형처럼, 그 정점이 밑변의 아래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은 ‘봉사자’라고 불립니다. 이 단어의 본디 의미에 따라, 그들은 이 모든 이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정 50주년 기념 연설)
2.4. 보편적 친교의 역동성 안에 있는 공동합의성
58. 공동합의성은 친교인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표현이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과 결합된 머리로서 현존하시고(참조: 에페 1,22-23), 그래서 교회는 그분께 구원의 충만한 수단들을 받는다. 또한 교회는 풍요로운 다수의 문화적 표현들을 지닌 인류 가족 전체를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그리고 성령의 일치 안에 모으도록 모든 사람에게 파견되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공동합의의 여정은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이 충만한 신앙을 공유하는 역동적 형태를 보여 주고, 또한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에게 그 신앙이 전달되게 한다는 이중적 의미에서 보편성을 표현하고 촉진한다.
59.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교회는 지역의 다양한 현실 안에서 보편성을 실현하고, 또한 보편성이 지역적 현실 안에 구체적으로 육화된 특성을 실현한다. 어떤 장소에 있는 교회의 특수한 현실은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의 품 안에서 실현되고, 보편 교회는 지역 교회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 상호 간의 친교와 그들과 로마 교회 사이의 친교 안에서 드러나고 실현된다.
60. 보편적 일치성과 지역적 다양성은 단순한 공존이 아니라 상호 관통하며 상호 의존한다. 유일한 보편 교회 안에서 교회들 서로간의 친교는, 베드로와 함께 베드로 아래 일치되어 모여 있는 주교직의 합의체적인 ‘우리’라는 표현을 교회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61. 지역 교회들은 서로 다른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상황 안에서 유일한 하느님의 백성을 고유한 방식으로 실현하는 공동체적 주체들이며, ‘긴밀한 친교의 유대’를 촉진하려는 상호 교환을 통하여 선물들을 함께 나눈다. 각자의 교회적 규율, 전례 예법, 신학적 유산, 영적 선물들과 교회법적 규범들을 지닌 “지역 교회들의 다양성은 갈릴 수 없는 교회의 보편성을 더욱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일치의 중심인 베드로의 직무는 “정당한 다양성을 보호하고 또 동시에 개별 요소들이 일치에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일치에 이바지하도록 감독한다.” 베드로의 직무는 교회의 일치에 봉사하고 각 지역 교회들의 특수성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다.
2.5. 사도적 친교의 전승(traditio) 안의 공동합의성
62. 교회는 세 가지 의미에서 사도적이다. 첫째로 사도들을 기초로 세워졌다는 점에서(참조: 에페 2,20), 둘째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보존하고 전한다는 점에서(참조: 사도 2,42; 2티모 1,13-14), 셋째로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교회의 목자들인 주교단을 통하여 지도를 받는다는 점에서(참조: 사도 20,28), 교회는 사도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한편으로는 각 교구와 본당과 사도직 공동체 등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할 공동합의의 삶을 통해서 실현되는 사도적 직무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교들 사이와 그들이 로마 주교와 맺고 있는 합의체적이고 교계적인 친교 안에서 주교들의 직무를 통해 실현되는 사도적 직무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63.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확고한 단체’의 형태로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에서 선택하신 베드로를 으뜸으로 삼으셨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후계자는 주교들이며, 주교직은 주교 축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제는 주교로 축성됨으로써 성품성사의 은총을 충만하게 부여받게 되며, 주교는 주교단을 이루는 단장과 단원들과 합의체적이고 교계적인 친교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64.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에 대한 교리와 교황과 교계적 친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교직의 성사적인 단체성의 교리를 토대로, 우리는 공동합의성의 신학을 심화시킬 수 있다. 교회의 공동합의적 차원은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능동적 주체라는 특성을 표현하고, 동시에 로마 주교와 합의체적이고 교계적인 친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교 직무의 특수한 역할을 또한 표현한다.
그리하여 공동합의성은 전체 신자들이 행사하는 신앙 감각을 바탕으로 하고, 이를 대변하는 각각의 사제단과 함께 하는 주교단이 행사하는 직무의 성사적 권위를 통하여 이들과 일치하는 교황의 권위로 온전한 형태를 이룬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신자들과 목자들 사이의 단 하나의 일치를 촉진하며, 이는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일치의 표상이 된다. 그래서 교회는 “그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완성될 때까지 세기에 걸쳐 하느님 진리의 충만을 향하여 꾸준히 나아간다.”
65. 교회의 공동합의적 삶의 쇄신을 위해서는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 자문을 구하는 절차들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신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관행은 교회 생활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중세 교회에서는 로마법의 원리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모든 사람이 관련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논의하고 승인해야 한다(Quod omnes tangit, ab omnibus tractari et approbari debet.) 그래서 교회 생활의 세 가지 영역들, 곧 신앙과 성사와 통치에서, 회합하여 토의함으로써 동의를 구하는 제도를 교계 구조와 결합시켰으며, 이는 ‘사도전승’으로 이해되었다.”
66. 그리하여 공동합의성의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전망 안에는 신자들의 친교(communio fidelium), 주교들의 친교(communio episcoporum), 교회들의 친교(communio ecclesiarum)가 있으며, 이 세 차원의 친교는 서로 내포되어 있다. 즉,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성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이 계명은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처럼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상호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바, 신자들과 주교들과 교회들의 세 차원에서 그 친교가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보증해 주는 것이 주교직의 성사성과 주교들의 단체성이고, 특히 주교들의 단체성은 ‘베드로와 함께 그리고 베드로 아래’ 있는 주교단을 통해서 공동합의성을 실현하는 하느님 백성의 친교가 실현되도록 발휘되어야 한다.
2.6. 교회의 합의체적 삶 안에서 참여와 권위
67. 공동합의적인 교회는 참여적이고 공동 책임을 갖는 교회이다. 이 공동합의성을 실행함에 있어서 하느님 백성에 속하는 모든 신자들은, 그가 평신도이건 수도자이건 또는 성직자이건, 교황을 으뜸으로 하는 주교단에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와 단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교단의 권위는 예수님께서 부여하시는 특별한 선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백성으로부터 위임받거나 백성을 대표하는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68. 첫째는 교회 안에서 모든 이들에게서 받는 자문을 존중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합의적인 교회에서는, 구성원들이 가지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다양성 안에서, 공동체 전체가 하느님의 뜻에 더 부합되는 사목적 결정을 내리고자 기도하고 경청하며 분석하고 대화하며 식별하며 조언하도록 소집된다. 그러므로 공동합의를 위한 결정을 내리는 목자들은 이 신자들의 자문을 경청한 다음에만 비로소 결정을 내릴 수 있다.
69. 둘째는 목자들이 지닌 고유한 권한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합의적 과정은 교계적으로 구조화된 공동체 안에서 폭넓고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식별과 자문과 협력의 공동 작업을 통하여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친 후에 결정을 내리는 일은 목자의 고유한 권한과 직무적 책임에 속한다.
70. 요컨대, 제1장과 제2장에 언급된 규범적 원천들과 신학적 토대들에 비추어, 교회의 본질적 차원인 공동합의성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개략해 볼 수 있다.
가. 무엇보다 먼저, 공동합의성은 교회의 삶과 사명을 특징짓는 고유한 방식이다. 섬김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신 교회 창립자의 계명을 받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합의성은 교회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과 작용 방식 안에서 드러나고 관철되어야 한다. 즉 생활 방식에서는 공동체적으로 말씀을 경청하고 성찬을 거행하는 전례 생활과 친교의 형제애를 이루는 공동체 생활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작용 방식에서는 하느님 백성 전체가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직무와 역할을 구별하며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고 공동 책임을 이행하는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 교회의 공동합의성은 개별 교회나 지역 교회나 보편 교회 등 여러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 구조와 교회 절차 등에서 성령께 귀를 기울이며 그 이끄심에 따라 걸어가야 할 방향을 찾아내도록 부름을 받았으니 만큼, 위 ‘가’항에 언급된 정신과 유리된 채 실제로는 구조와 절차의 과정에서 공동합의 정신이 실종되지 않도록, 권위 있고 신중하며 사려깊게 식별해야 한다.
다. 구조와 절차 등의 제도는 공동합의 정신을 반영할 수 있도록 늘 쇄신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열리는 각급 회의에서 그야말로 공동의 합의가 정확하게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공의회, 주교대의원회의, 대륙별 주교 시노드, 교구 시노드 및 교구 사목평의회 등 상설 회의체 등에서 교회의 복음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필요한 결정과 지침을 정하고, 긴급한 현안 문제들을 식별하여 선택하기 위한 목적이 달성되어야 한다.
제3장 공동합의성의 실현: 공동합의적 사건들의 주체, 구조, 절차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적 전망 안에서 공동합의성을 신학적으로 이해하려면,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적 소명은 무엇인지, 개별 교회와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차원에서 공동합의적 구조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공동합의적 절차를 주도해야 할 다양한 주체들은 누구인지에 대하여 언급해야 한다.
3.1.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적 소명
72.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본디 받고 있는 부르심은 공동합의성을 내용으로 하는 삶의 양식으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이다. 이 부르심에 따라서 공동합의적 삶의 양식은, 모든 신자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 감각을 바탕으로 하고, 공동합의성을 식별하는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식별 작업을 거쳐 그리고 일치와 다스림의 사목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결정을 내리는 권위 사이를 순환하는 역동적 관계로 나타난다.
73. 그러자면 평신도들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의 절대 다수이고, 그들이 교회 공동체의 삶과 사명, 대중 신심 그리고 사목 전반의 다양한 표현 형태들에 참여하는 데에서 배울 것이 많으며, 문화와 사회생활의 다양한 영역들 안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고유한 능력들도 또한 배울 점이 많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은 공동합의 구조의 틀 안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평신도들에게 공동합의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소양을 제공하는 양성 절차가 또한 꼭 필요하다. 또 평신도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공식적 자리도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을 교회 생활의 주변부에 묶어 두려는 성직중심적 사고방식도 극복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절차부터 공동합의성을 실천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74. 나아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토대로, 교계적 선물과 은사적 선물의 공동 본질성이라는 원리를 분명하게 존중해야 한다. 교회 안에는 성품성사라는 교계적 선물을 받은 사제들 – 주교, 신부들 –뿐만 아니라, 봉헌 생활 공동체들, 교회 운동들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들이 있는데, 이들 역시 공동합의적 구조 안에 참여해야 한다.
75. 공동합의적 소명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신학자의 몫도 배려되어야 한다. 신학자들은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신앙을 학문적이며 예언적 차원에서 이해하며, 그 신앙에 따라 시대의 징표를 복음적으로 식별하고, 복음을 선포하려는 사회와 문화에 대하여 대화를 해야 하는 소명이 있다. 물론 신앙에 충실한 평신도들의 체험과 진리에 대한 묵상이나, 사목자들의 설교도 공동합의적 소명 실현에 필요하지만, 신학자들은 복음이 현실에 더욱 깊이 관통할 수 있도록 공헌해야 한다. 이 공헌을 개별적으로만이 아니라, 신학자들이 서로 함께 경청하고 대화하며 식별하고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요구와 공헌을 통합하는 능력을 함양함으로써 신학 연구 작업 또한 공동합의적인 형태로 할 수 있다면,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적 소명은 더욱 알차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76.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을 바탕으로 하되 특히 은사를 받은 구성원들이 모든 교회적 결정에 영감을 불어 넣기 위해서는 친교의 역동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느님 백성이 참여해야 하고, 그 백성이 내리는 결정마다 올바로 식별할 수 있는 절차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 절차들도 공동합의적인 교회 구조 안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준비하고 거행하며 수용하는 여러 단계들을 거쳐서 교회는 하느님 앞에 소집되는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께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하며 교리에 대해서도 충실해야 한다. 모든 구성원은 질서 있게 참여해야 하고, 각자의 은사를 나누며,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교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도구들을 찾아내어 창의적으로 실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고대 교회의 규정과 현대 교회의 규정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안을 개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3.2. 개별 교회 안의 공동합의성
77. 공동합의성을 실행하는 첫 단계는 개별 교회인 교구 안에서 이루어진다. 개별 교회에서 공동합의성을 실행해야 할 가장 큰 근거는 주교가 사제단과 더불어 하느님 백성을 위해 봉헌하는 성찬례이다. 또한 개별 교회에서는 동일한 역사와 언어와 문화의 유대 속에서 상호 인격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동합의적 방식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고 이를 기초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회심도 훨씬 용이하다. 개별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증언이 한층 친밀한 인간적 상황 안에서 또한 모두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사회적 상황 안에서 구현되기 때문이며, 이 증언에 따라 선교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논의를 하게 되더라도 그에 따른 임무 분담에 있어서 한결 수월하게 공동합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3.2.1. 교구 회의
78. 교구 회의는 ‘교구 안에서 참여 구조의 정점’으로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자리이다. 이 회의들에서 하느님 백성은 사목적 도전의 상황을 식별하고, 식별한 결과에 따라서 함께 걸어가야 할 방향을 찾으며, 성령께 귀를 기울여 적절하게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들 회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소집하고 주교가 주재하며, 하느님 백성이 능동적으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은총을 체험하는 기회가 된다.
79. 서방 교회에서든 동방 교회에서든 교구 회의는 주교가 하느님 백성을 통치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하느님 백성과 친교를 나누는 모임이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의 교회적 공동 책임 의식을 새롭게 하고 심화시키며, ‘모든 사람’과 ‘몇몇 사람’과 ‘한 사람’의 논리에 따라 모든 구성원이 사명에 참여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3.2.2. 개별 교회 안에서 공동합의적 삶에 봉사하는 다른 구조들
80. 개별 교회인 교구 안에는 일상적으로 주교의 직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좌하는 여러 기관들, 교구청, 참사회, 전례 사제단, 재무 평의회가 설치되어 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사제 평의회와 사목 평의회도 설치되었다. 이 기관들은 교구 내에서 친교를 촉진하고 공동합의성을 실행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81. 사제 평의회는 교구를 다스리는 주교를 돕는 사제 대표들의 원로원이다. 주교는 사목 활동의 필요와 교구의 선익과 관련되는 일에 대하여 사제 대표들의 의견을 듣고 자문을 구해야 한다.
사목 평의회는 주교와 그의 사제단이 추진하는 사목 전반에 대하여 자격을 갖춘 평신도 대표들이 자문하는 기구로서, 때에 따라서는 주교의 특별한 권위 아래 결정을 내리는 자리가 되기도 하므로, 교구 안에서 공동합의성을 실현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상임 기구이다.
82. 그밖에도 교구들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반포한 가르침을 실현하려고 필요한 회합들을 정기적으로 열게 되는데, 여기서 친교를 촉진하고 공동합의성을 표현하며 통합적인 사목을 계획하고 평가함으로써, 교구 시노드를 실현하는 틀이면서 또한 준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3.2.3. 본당 생활 안에서 공동합의성
83. 본당은 교회의 신비를 가시적이고 즉각적이며 일상적인 형태 안에서 실현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본당에서 우리는 형제적 관계망 안에서 주님의 제자들로 살기를 배우게 된다. 그 관계망 안에서 부르심과 세대와 은사와 직무 그리고 능력의 다양성 안에서 친교를 체험하고, 각자의 고유한 기여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확고하게 자신의 사명과 봉사를 수행하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84. 본당 안에는 공동합의적 특성을 지닌 사목 평의회가 있어서 평신도 대표들이 본당 사목자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고 본당의 사목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기구 외에 재무 평의회를 별도로 독립시키는 방안을 로마 교구의 마지막 시노드에서 통과시킨 바 있는데, 다른 본당들에도 이 방안을 수용하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또한 교구 안에서 공동합의적 역동성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교구 사목 평의회와 본당 사목 평의회들이 조화로운 협력 속에서 활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
3.3. 지역 내 개별 교회들 사이의 공동합의성
85. 지역 차원에서 공동합의성은, 한 관구나 한 나라 또는 한 대륙 안에 있는 개별 교회들의 모임을 통해서 체험될 수 있다. 이들은 ‘형제애의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나, ‘세계 선교를 향한 열정으로’나, 또는 ‘개별 교회의 선익과 공동선을 증진하기 위하여’ 유기적으로 결합된 모임들이다. 이 모임들에서 개별 교회들은 서로 역사적 기원이 같고, 문화적으로 동질적이며, 선교 활동에서 마주치는 도전들도 비슷하기 때문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필요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 모임들을 통하여 문화가 다양하고 맥락들도 다양하지만 각 개별 교회 안에 모여 있는 신자들이 각기 고유한 형식으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현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이들 모임에서 개별 교회들의 공통된 여정을 추진하고, 그들의 영적이고 제도적인 유대들을 강화하며, 은사들을 상호 교환함으로써 사목적 선택을 조율해야 한다. 특히 공동으로 합의해야 할 식별과정을 통하여, 문화를 복음화시키는 새로운 과정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86. 지역 내 개별 교회들 사이에서 공동합의성을 촉진하는 데 있어서, 총대주교, 관구장 대주교들은 명시적으로 특별한 역할을 맡는다. 이는 초세기부터의 전통이며, 동방이나 서방이나 마찬가지로서 사도나 그의 협력자들이 설립한 교회를 맡고 있는 주교들에게 공동합의성에 관한 사도적 책임을 더 크게 지우게 된다. 이는 주교들의 단체성에 대한 의식, 즉 모두가 논의하고 대표가 결정한다는 원칙에 대한 의식이 성숙해짐으로써 더욱더 확고해지게 된다.
87. 라틴 전례를 거행하는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역 차원의 공동합의적 구조로서, 관구 특별 공의회와 관구 일반 공의회, 주교회의, 그리고 대륙 차원의 주교회의들이 있다. 동방 전례를 거행하는 가톨릭 교회에서는 총대주교구 시노드와 관구 시노드, 여러 동방 자치 교회들의 교계 책임자들의 회합, 동방 가톨릭 총대주교들의 공의회가 있다.
3.3.1. 개별 공의회
88. 지역 차원에서 거행되는 개별 공의회들은, 개별 교회들의 모임 안에서 공동합의성을 실행하는 특수한 구조가 된다. 이 공의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식별과 결정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하기에, 이는 주교들 사이의 합의체적 친교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맡겨진 하느님 백성의 한 부분의 모든 구성원과 이루는 친교”를 나타내고, 따라서 “교회들 사이의 친교”를 드러내며, “특히 신앙과 관련하여 더욱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는 적절한 자리”가 된다. 교회법은 교리를 가르치고 신자들을 사목함에 있어 개별 공의회에서 행사되는 공동합의적 식별과 관련한 범위를 재확인하는 한편, 그 사목적 성격을 강조한다.
3.3.2. 주교회의
89. 한 나라 또는 한 지역 범위 안에서 주교회의는 민족주의 국가들이 확립되면서 생겨난 근래의 제도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친교의 교회론 전망 안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주교회의는 주교들의 단체성을 드러내면서, 해당 국가들 안에서 사명을 수행할 목적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교회들의 공동선을 위하여 주교들 간에 협력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한다.
90.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적 여정을 촉진하려는 주교회의의 중요성은 “개별 주교들은 자기 교회를 대표한다.”(교회 헌장, 23항)는 점에 있다. 주교회의는 신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다양한 교회적 체험을 받아들이는 적절한 절차를 통해서, 그리고 평신도 전문가들을 참여시킴으로써, 효과적으로 사목 지침들을 작성할 수 있다.
91.
3.3.3. 동방 가톨릭 교회들의 총대주교들
92. 동방 가톨릭 교회들에서, 총대주교구는 동일한 신학적, 전례적, 영적, 교회법적 유산을 갖고 있는 한 관구 또는 지역 내의 교회들 사이의 친교를 표현하는 공동합의적 구조이다. 총대주교구 시노드에서, 단체성과 공동합의성의 행사는 총대주교와 각각의 교회들을 대표하는 다른 주교들 사이의 조화를 요구한다. 총대주교직은 로마 교회의 주교와 보편 교회와 친교를 이루는 가운데, 하나의 동일한 총대주교구 교회의 품 안에서 신자들의 친교를 통하여 다양성 안에서 일치와 보편성을 촉진한다.
3.3.4. 주교회의와 동방 교회 총대주교구들의 지역 평의회
93. 주교회의들과 이들의 연합 형태로 이루어진 주교 평의회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에, 세계화의 도전을 고려하면서도 여러 맥락에서 복음이 각 지역에 토착화되도록 촉진함으로써 다양한 모습으로 교회가 아름다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3.4. 보편 교회 안의 공동합의성
94. 보편 교회 차원에서, 교회의 본질적 차원인 공동합의성은 신자들의 동의(consensus fidelium), 주교들의 단체성, 로마 주교의 수위권 사이에서 역동적 순환 관계로 표현된다. 이러한 기초를 토대로, 교회는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에 충실하면서도, 성령의 목소리에 창조적으로 개방되어, 때때로 구체적인 상황과 도전들의 질문에 응답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가 함께 하느님의 백성을 구성하는 모든 주체에게 귀를 기울여, 오류를 식별하여 진리에로 나아가는 한편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 여정에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95. 이러한 교회론적 맥락에서, 보편적 차원에서 공동합의성을 실행하려는 로마 주교의 특별한 직무가 부각된다. “공동합의적인 교회 안에서 베드로의 수위권 행사도 더욱 빛날 수 있다. 교황은 혼자 또 교회 위에 있는 것이 아니며, 교회 안에서 세례 받은 이들 가운데 있는 세례 받은 이로서, 그리고 주교단 안에서 주교들 가운데의 주교로서 존재하며, 그와 동시에,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사랑 안에서 모든 교회를 주재하는 로마 교회를 이끌도록 부름받고 있다”(교황 프란치스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정 50주년 기념 연설, AAS 107(2015), 1144면).
96. 주교단은 보편 교회 차원에서 공동합의성을 행사하는 데에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직무를 수행한다. 실상 주교단은 내재적으로 자신 안에 그 단장인 로마 주교를 포함하고, 로마 주교와 더불어 교계적 친교 안에서 행동한다는 점에서,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력의 주체’이다.
3.4.1. 보편 공의회
97. 보편 공의회는 보편 교회 차원에서 주교들의 단체성과 교회의 공동합의성이 표현되는 가장 충만하고 장엄한 특별 사건이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지극히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a Synodus)라고 일컫는다. 이 보편 공의회를 통해서, 단장인 로마 주교와 결합된 주교단의 교회 전체를 위한 권위 행사가 표현된다. 복자 바오로 6세 교황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을 공포하실 때에 사용했던 ‘교부들과 하나되어(una cum Patribus)’라는 표현은, 주교단과, 보편 교회에 대한 사목 직무의 주체로서 그 주교단을 주재하는 교황 사이의 긴밀한 친교를 드러낸다.
98. 보편 공의회는 개별 교회들의 친교이기 때문에 하나이고 보편된 교회를 대표하는 특별한 형태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주교는 교황과 더불어 […] 온 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보편 공의회 안에서 그 머리인 로마 주교와 함께 하는 주교단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 전체가 대표되는 것은, 주교의 서품이 그 수품자를 성사적 차원에서 사도적 계승과 주교단 안으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주교에게 하나의 개별 교회의 대표직을 부여한다는 사실에서 도출된다. 그러므로 보편 공의회는 보편 교회의 여정을 식별하기 위하여 하나로(in unum) 소집된 개별 교회 목자들을 통하여 그 개별 교회들 사이의 친교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주교들이 교황과 친교를 이루는 가운데 교회의 공동합의성을 최고도로 실현하는 것이다.
3.4.2.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99. 복자 바오로 6세 교황께서 상시적인 공동합의 구조로서 제정하신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소중한 유산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 구성하는 주교들은 가톨릭 주교직 전체를 대표하며, 그래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주교단이 교황과 교계적 친교를 이루면서 전 세계 교회를 돌보는 데에 참여함을 드러낸다. 그것은 “온전히 공동합의적인 하나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교들의 단체성의 표현”이라고 일컬어진다.
100. 모든 시노드 회합은 연속적인 단계들에 따라 전개된다. 거기에는 준비와 거행 그리고 실행의 단계가 있다. 교회 역사는, 목자들과 사도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자문 과정의 중요성을 증언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실현하고자, 개별 교회 차원에서 자문 과정들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더 폭넓고 주의 깊게 경청하도록 하는 주요 지침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하여,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교회 생활의 모든 차원에서 진행된 경청의 역동성이 수렴되는 지점”이 되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하느님 백성에게 의견을 구하는 과정, 그리고 주교들의 교회적 대표성과 로마 주교의 주재를 통하여,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교회 생활의 모든 차원에서 공동합의성을 실현하고 촉진하는 특권적 구조가 된다. 자문을 통하여 공동합의 과정은 하느님 백성 안에서 그 출발점을 갖게 되며, 토착화된 실행 과정을 통하여 또한 하느님 백성 안에서 그 종착점에 이르게 된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주교단이 전 세계 교회에 대한 사목적 돌봄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교회법에서는 이렇게 강조한다. “주교단이 보편 교회에 대한 그의 임무를 합의체적으로 수행하는 양식을 교회의 필요에 따라 선택하고 촉진하는 것은 교황의 소임이다.”
3.4.3. 수위권의 공동합의적 행사를 위한 구조들
101. 처음에는 로마 교회의 신부들과 부제들, 그리고 로마 주변 교구 주교들로 구성되었던 추기경단은 역사적으로 로마 주교의 고유한 직무 행사에서 그를 돕는 공동합의적 평의회가 된다. 현재의 형태에서 추기경단은 보편 교회의 얼굴을 반영하며, 보편 교회를 위한 교회의 직무를 돕고, 이를 위하여 추기경 회의로 소집된다. 이러한 기능은 로마 주교를 선출하려는 콘클라베가 소집될 때에 특별한 형태로 행사된다.
102. 교황청은 보편 교회를 위한 교황의 직무를 상시적으로 돕고자 설치된 기구로서, 그 본질상 주교들의 단체성과 교회의 공동합의성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친교의 교회론에 따른 교황청의 개혁을 요청하면서, 공동합의성을 증진시키기에 적합한 몇 가지 요소를 강조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모든 교회의 생각과 열망과 요구를 교황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게” 교구 주교들을 포함시킬 것, 그리고 “평신도들이 교회 일에서 자기에게 알맞은 역할을 다하도록” 평신도들에게 자문을 구할 것 등이 있다.
제4장 쇄신된 공동합의성을 향한 회심
103. 공동합의성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신 주 예수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인도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삶과 복음화 사명을 고무하려는 것이다. 교회의 공동합의적 쇄신은 물론 공동합의적 구조들이 활력을 되찾게 함으로써 이루어지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역사 안에서 걸어가는 당신 백성으로 살도록 부르신 하느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통하여 표현된다. 이 장은, 그러한 응답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수한 요소들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곧 친교 영성의 형성, 경청과 대화와 공동체적 식별의 실천, 교회 일치 여정의 중요성, 그리고 형제적이고 공동합의적이며 포괄적인 사회 기풍(ethos)을 건설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예언적 봉사(diakonia)의 중요성 등이 그것이다.
4.1. 교회의 삶과 사명의 공동합의적 쇄신을 위하여
104. “교회의 모든 쇄신은 본질적으로 교회 소명에 대한 충실성의 증대에 있다.”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실현하면서 끊임없는 회심으로 부름받으며, 그 회심은 또한 늘 자신의 소명에 더욱 충실하려는 사고방식과 태도와 관습과 구조의 쇄신을 포함하는 ‘사목적이고 선교적 쇄신’이기도 하다. 공동합의적 의식으로 형성된 교회적 사고방식은,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제자이며 선교사로서 자격과 부름을 받게 하는 그 은총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이고 또한 촉진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이루어지는, 오늘 교회 생활을 위한 사목적 회심의 큰 도전은, “평신도를 의사 결정에서 제외시키는 지나친 성직주의”의 유혹을 언제든 피하면서, 평신도를 성직자처럼 만들거나 성직자를 세속화시키지 않고, 각자의 선물과 역할에서 출발하여, 복음화를 위한 증언에서 모든 이의 상호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105. 공동합의성의 실현을 위한 사목적 회심은, 지금도 교회 문화 안에 흔히 남아 있는 몇 가지 패러다임들을 극복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친교의 교회론으로 쇄신된 교회 이해를 표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예로는, 사명의 책임이 목자들의 직무에만 집중되는 것, 봉헌 생활과 카리스마적 은사들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것, 평신도들과 특히 여성 평신도들이 그 권한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특수하고 유능한 기여의 가치를 잘 인정하지 않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106. 친교의 전망과 공동합의성 실현이라는 전망 안에서, 사목 행위의 지침으로 몇 가지 기본 노선을 제시할 수 있다.
가. 개별 교회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차원에서, ‘한 사람’과 ‘몇몇 사람’ 그리고 ‘모든 사람’의 역동적 순환성에 따라, 목자들의 직무, 평신도의 참여와 공동 책임성, 카리스마적 선물로부터 오는 자극들 사이의 순환성을 활성화시킬 것.
나. 목자들의 단체성 행사와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살아가는 공동합의성을, 전 세계 교회 안에서 개별 교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교의 표현으로서 통합 해 낼 것.
다. 로마 주교로서 행사하는 베드로의 직무, 곧 일치의 직무와 전 세계 교회를 이끄는 직무가, 모든 개별 교회와의 친교, 그리고 주교들의 합의체적 직무 와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적 여정과의 상승적 협력(synergy) 속에서 수행되 게 할 것.
라. 각각의 전통들이 화해를 이루는, 다양성 안에서 충만한 일치를 향하여 걸 어가려는 불가역적인 노력 안에서, 가톨릭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교회적 공 동체들을 향한 개방성을 지닐 것.
마. 다른 종교적 신앙과 신념을 지닌 남녀들과 함께 사회적 봉사와 건설적 대 화를 함으로써 만남의 문화를 실현할 것.
4.2. 친교의 영성과 공동합의적 삶의 양성
107.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헌장, 1항)가 되도록 성부께서 소집하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기풍은 친교의 영성을 향한 인격적 회심으로 발산되고 길러진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그 기풍을 성령의 선물이며 또한 서약으로 받아들이도록 초대되는데, 그 서약의 실행은 성령의 움직임에 순응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세례 때에 받았고 성체성사로 완성되는 은총을 친교 안에서 살도록 교육되기 위해서이다. 개인주의적으로 이해된 ‘나’에서 교회적인 ‘우리’로 옮겨 가는 파스카적 전이에서, 각각의 ‘나’는 그리스도를 입어(참조 갈라 2,20)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느님 백성의 유일한 사명을 수행하는 책임 있고 능동적인 주체로서 살아가며 걸어간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가 “친교의 원천이며 친교의 학교”(「새 천년기」, 43항)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게 된다. 마음과 정신의 회심 없이는, 그리고 서로 함께 수락하고 경청하려는 수덕적 훈련 없이는, 친교의 외적 도구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마음도 얼굴도 없는 단순한 가면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분명한 참여 규칙을 정하여 법의 지혜가 교회의 교계 구조를 밝혀 주고 독단이나 부당한 요구에 대한 모든 유혹을 물리친다면, 친교의 영성은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의 존엄과 책임에 따라 온전히 신뢰와 개방 정신을 촉진함으로써 제도적 실재에 혼을 불어넣습니다”(「새 천년기, 45항).
108.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신앙 감각에 따라 살아가고 이를 성숙시키고자 요구되는 것과 똑같은 자세들이, 공동합의적 여정에서 그 신앙 감각을 실행하기 위해서도 요구된다. 이것은 공동합의적 정신을 기르는 데에 핵심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복음의 요구들과 인간적 덕목들이 잘 존중되지도 않고 적절하게 교육되지도 않는 문화적 배경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세들 가운데 기억해야 할 것으로는, 성체성사와 화해 성사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 생활 참여, 하느님의 말씀과 대화하고 그것을 삶으로 옮기려는 말씀에 대한 경청의 실행, 신앙과 도덕에 관한 가르침에서 교도권을 따름, 서로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며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비롯한 형제들에게 파견되었다는 의식 등이 있다. 이들은 ‘교회와 함께 느끼기’(sentire cum Ecclesia)라는 정식에 포함되어 있는 태도들이다. 교회와 함께 느낀다는 것은 “교회와 조화를 이루어 느끼고 체험하며 지각하는 것”으로서, 이는 “순례적 여정에 있는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이 일치를 이루도록” 하며, “그들의 ‘함께 걸어가기’에 열쇠가 된다.” 구체적으로, “일반 사람과 그리스도인을 교육하는 곳이든, 제단의 봉사자들이나 봉헌 생활자, 사목 활성가를 양성하는 곳이든, 가정과 공동체를 육성하는 곳이든” 그 어디에서나, 친교의 영성이 ‘교육적 원리’로서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이상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90항).
109. 성찬 모임은 친교의 영성의 원천이며 모형(paradigm)이다. 거기에서 공동합의적 정서를 형성하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특별한 요소들이 표현된다.
가. 삼위일체를 부름. 성찬 모임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를 부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성부께서 소집하신 교회는 성찬에 힘입어, 그리고 성령의 부르심 으로,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성사가 된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세 신적 위격 의 친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일치는 “진리와 사 랑 안에 있는 결합”을 따라 살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께 받은 각자의 선물과 은사들을 실행함으로써 드러 난다.
나. 화해. 성찬 모임은 하느님과 화해 그리고 형제들과 화해를 통하여 친교를 이루게 한다. 죄의 고백(confessio pecatti)은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을 기념 하며 죄로 말미암은 분열의 길이 아니라 일치의 길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공동합의적 사건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서로 용서를 청 하는 것을 내포한다. 화해는 새로운 복음화를 삶으로 살아 내려는 여정이 다.
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 성찬 모임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 는데, 이는 그 말씀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것으로써 길을 밝히려는 것이 다.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형제들 특히 가난한 이들을 받아 들이면서, 우리는 성경 특히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법 을 배운다. 사목 직무를 수행하며 성찬의 빵과 더불어 말씀의 빵을 쪼개도 록 부름받은 사람은, 공동체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메 시지를 전달하려면 그 공동체의 삶을 알아야만 한다. 성찬 전례의 대화적 구조는 공동체적 식별의 모형이 된다. 곧 서로가 서로에게 경청하기에 앞 서, 제자들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해야만 한다.
라. 친교. “성찬은 친교를 낳고 친교를 강화합니다”(「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40 항).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서 생겨난 친교에 많은 남녀의 사람들이 참여한다. 그들은 세례 받은 이로서 동일한 품위를 지니고, 성부께 다양한 소명들을 받아 책임 있게 이를 수행하는데, 이 소명들은 세례성사와 견진성 사와 성품성사로부터, 또한 성령의 특별한 선물들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품 위와 소명을 통하여 그들은 많은 지체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다수성이 일치성 안으로 풍요롭고 자유롭게 수렴되는 것이, 바로 공동합의적 사건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마. 선교.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Ite, missa est). 성찬에서 실 현된 친교는 선교를 촉구한다.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사람은 그 기쁜 체 험을 모든 이와 나누도록 부름받는다. 공동합의적인 모든 사건은 교회가 “진영 밖으로 나가”(참조 히브 13,13),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게 그분을 전하게끔 재촉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길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일치는, “하느 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시는 그 종말론적 목표를 향하여 시간의 오솔길들을 따라 인도해 주는 이 내적인 목적(télos)이 없다 면, 참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느 님을 향하여 모두 함께 걸어가고자, 모든 이를 향하여 “밖으로 나가며” 살 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진정 공동합의적인 교회가 될 수 있겠는 가?
4.3. 공동체적 식별을 위한 경청과 대화
110. 교회의 공동합의적 삶은, 교회의 모든 지체 사이에서 신앙과 삶과 선교적 사명 사이의 효과적인 소통이 실제로 이루어짐으로써 실현된다. 그러한 소통 안에서 기도로써 살아가고, 성사들로 양육되며, 서로 간에 그리고 모든 이를 향한 사랑에서 꽃피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기쁨과 시련에 참여함으로써 성장하는, 바로 그 성인들의 통공(communio sanctorum)이 드러나는 것이다. 공동합의의 여정에서, 소통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묵시 2,29)을 알아차리려면 하느님 말씀에 공동체적으로 귀를 기울임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필요가 있다. “공동합의적인 교회는 경청하는 교회입니다. … 신앙을 가진 백성, 주교단, 로마 주교, 그 각자는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모든 이는 성령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111. 공동합의적 대화는 말할 때에나 들을 때에나 용기를 내포한다. 이것은 말하는 한 사람이 다른 이들을 능가하려고 하거나 무딘 논거들로써 다른 이들의 입장을 반박하려고 하는 토론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안에서 성령께서 공동체적 식별을 위하여 유용한 것으로 알려 주시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견해들 가운데 같은 성령께서 ‘공동선을 위하여’(1코린 12,7)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열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일치가 갈등보다 우월하다는 기준은 특히 대화를 실행하고, 의견과 경험의 다양성을 다루는 데에 적용 가능하다. 이 기준은 또한 “역사를 일구어 가는 방식, 그리고 갈등과 긴장과 대립이 새로운 삶을 낳는 다양한 형태의 일치에 도달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을 배우는 데에도 특별히 적용되며, 차이 속에서 친교를 증진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실상 대화는, 해당 주제에 대한 논의를 비추어 주는 새로운 전망과 관점들을 얻기 위한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것은 “관계에 바탕을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기에, 공유된 인식의 형태를 취하게 되며, 타자의 눈을 통하여 보는 시각이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유하는 시각”이다. 또한 “참된 대화는 영성적 만남으로서, 사랑, 존중, 신뢰, 신중함 등과 같은 특별한 자세들을 필요로 하며, 이는 우정이나 섬김의 분위기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진리는 말씀이기에 대화를 생겨나게 하고, 거기서 소통과 친교가 이루어진다.”
112. 공동합의적 대화에서 필수적인 태도는 겸손이다. 각자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순종하는 태도가 겸손이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겸손의 본보기를 본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상기시켰다 :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예수님의 모범, 즉 자기비허(自己脾虛)야말로 그분의 겸손이다. 그래서 “그분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리하여 “뜻을 같이 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는”(필리 2,2) 친교의 삶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는 공동체 삶의 기초가 겸손인데, 이를 위협하는 두 가지 유혹으로서 이기심과 허영심을 들었다(참조 필리 2,3ㄱ). 겸손하자면,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공동의 선과 이익을 첫 자리에 두어야 한다”(필리 2,3ㄴ-4)는 것이다.
113. 식별은 공동합의적인 과정과 그 사건의 핵심에 위치한다. 교회의 공동합의적 삶에서는 언제나 그러하였던 것이다. 친교의 교회론과 거기에서 나오는 고유한 영성과 실천은, 사명 안에 하느님 백성 전체를 참여시키면서, “오늘날 과거의 그 어떤 때보다도 …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식별의 원리와 방법들을 교육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시대의 징표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하느님께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 안에서 들려주시는 부르심을 발견하게 한다.
114. 공동체적 식별은, 하느님의 백성이 명시적으로나 또는 침묵으로 부르짖음을 통하여 들려오는 ‘성령의 탄식’(로마 8,26)에 주의 깊고 용감하게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내포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하느님과 함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기까지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뜻을 백성에게서 인지할 때까지 백성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 말씀의 관상자이며 또한 하느님 백성의 관상자’여야만 한다. 식별은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에 필요한 기도, 묵상, 성찰, 연구의 공간 안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식별은, 형제자매들과 진솔하고 평온하며 객관적인 대화를 함으로써, 체험들과 각 공동체와 각 상황의 실제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고 복음을 선포하고자 선물들을 교환하고 모든 힘을 모으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식별은 또한 모든 감정과 생각을 정화시켜 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성령에 대한 열림을 약화시킬 수 있는 모든 장애물로부터 복음적 자유를 찾으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4.4. 공동합의성과 교회 일치의 여정
115.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하나이고 보편적인 교회가 존재하는데, 이 가톨릭 교회가 세례 받은 모든 이와 여러 이유로 결합되어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갈라진] 교회들과 [교회적] 공동체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 수단의 힘이 가톨릭 교회에 맡겨진 충만한 은총과 진리 자체에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 안에서 충만하고 가시적인 일치를 향하여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 오직 그분만이 역사를 거치면서 당신 몸에 가해진 상처들을 낫게 하실 수 있고 성령을 주심으로써 사랑 안에서 진리에 따라 차이점들을 화해시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교회 일치의 노력은 하느님 백성 전체와 연관되는 여정이다. 이러한 노력에는,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 사이를 서로 갈라놓았던 차이들의 장벽을 허물고자 하는 지향이 담겨 있다. 그렇지만 우리를 일치시키는 많은 풍요로움이란 결국 한 분이신 주님께서 하나의 세례로 주시는 선물임을 발견하고 함께 나누며 향유하려는 마음의 회심과 서로 간의 개방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교회 일치의 노력에는, 기도에서부터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사랑의 체험에 이르기까지, 또한 복음에 대한 증언에서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 대한 봉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정의롭고 연대적인 사회적 삶을 위한 노력에서 평화와 공동선을 위한 투신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116. 지난 여러 해 동안의 교회 일치 대화에서, 공동합의성이 교회의 본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계시적 차원에 속하는 동시에, 다양한 표현을 지닌 교회의 단일성을 이루는 본질적 차원임을 인정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는 친교(koinonia)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에 대한 의견 일치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의견 수렴은 각 지역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 지역 교회와 다른 교회들 사이의 관계에서, 고유한 공동합의적 구조와 절차들을 통하여 실현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의 대화 안에 이루어진 근래 「키에티 문헌」(Documento di Chiti)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교회적 친교가 제일천년기에 동방과 서방에서 “수위권과 뗄 수 없이 연결된 공동합의성의 구조들”을 발전시켰고, 그 신학적 또는 교회법적 유산이 “제삼천년기를 시작하면서 그들의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 필수적인 기준점이 된다.”고 말한다.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산하 신앙직제위원회(Commission of Faith and Order)의 문헌 「교회, 공동의 전망을 향하여」(The Church: Towards a Common Vision)에 따르면, “성령의 인도 아래 모든 교회는 교회 생활의 모든 차원에서, 곧 개별 교회와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차원 모두, 공동합의적이다. 공동합의성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삶의 신비를 반영하며, 교회의 구조들은 친교로서의 공동체의 삶을 실현하려고 이러한 공동합의성을 표현한다.”
117. 이러한 교회관에 동의함으로써, 우리는 아직 해결해야 할 중요한 신학적 문제들에 평온함과 객관성을 지니고서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다. 그 첫 번째 문제는, 그리스도의 성령께서는 세례 받은 모든 이 안에 신앙 감각을 불러일으키시고 길려주심으로써 그들이 공동합의적 삶에 참여하고 그에 따라 사명의 식별에서 자격과 책임을 지니게 된다는 것과, 성사적으로 부여된 특수한 은사에서 나오는 목자들의 고유한 권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둘째는, 지역 교회의 목자들과 로마 주교의 친교를 통하여 표현되는, 지역 교회들과 보편 교회 사이의 친교에 대한 해석 문제와 더불어, 다양한 문화 안에서 신앙을 표현하는 형태들의 합법적 다수성에 속하는 것이 무엇이고 영구적인 동일성과 보편적인 단일성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짓는 문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동합의적 삶을 실현하고 그 신학적 의미를 심화하는 것은 교회 일치의 여정을 계속해 나가는 데에서 대단히 중요한 도전이며 기회가 된다. 신앙의 유산에 대한 창조적 충실성 안에서, 그리고 진리들의 위계(hierarchia veritatum)의 기준에 대한 일관성 있는 준수 안에서, 실상 공동합의성의 지평은, 일치를 향하여 걸어가면서 서로를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선물들의 교환’이 얼마나 희망찬 것임을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치란, 교회 얼굴의 아름다움 안에서 빛나는 그리스도 신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로움이 화해 속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5. 공동합의성과 사회적 봉사
118. 하느님의 백성은 역사 안에서 모든 이와 복음의 누룩과 소금과 빛을 함께 나누고자 걸어간다. 그러므로 “복음화에는 대화의 길도 포함”되는데, 이는 진리를 찾으며 정의를 건설하려고 투신하는 다른 종교, 신념, 문화를 가진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며, 우리 곁에 걸어가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알아차리도록 모든 이의 마음과 정신을 열어 주려는 대화의 길을 의미한다. 만남과 대화와 협력의 선도는 이 공동의 순례에서 귀중한 단계들로서 신뢰를 얻게 되며,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적 여정은 화합주의(irenicism)나 타협이 아닌, 모든 이와 대화를 실천하는 데에 필요한 기풍(ethos)을 배우는 삶의 학교로서 드러난다. 또한 민족들 사이에서 상호 의존성을 의식하게 되면서 세상을 공동의 집으로 생각하게 되는 오늘날, 교회는 교회를 특징짓는 보편성과 교회 자신의 표현인 공동합의성, 이 두 가지야말로 다양성 안에서 일치 그리고 자유 안에서 친교를 촉진하는 누룩임을 드러내도록 부름받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적 삶과 회심, 만남, 연대성, 존경, 대화, 포용, 통합, 감사와 무상성 등의 문화를 추진하는 데에 제공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공헌이다.
119. 교회의 공동합의적 삶은 특히 정의와 연대성과 평화의 표징 안에서 민족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을 진흥시키는 데에 봉사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들도 구원하신다.” 권위주의적이고 기술 지배적인 시류의 위험 속에서 민주주의적 참여 절차가 구조적인 위기를 맞고 그 원리들과 영감을 주는 가치들이 불신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대화를 실천하는 것, 그리고 평화와 정의를 건설하는 공통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은 절대적으로 우선되어야 할 일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과 땅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라는 명령은 하느님 백성의 우선적 임무이며 모든 사회적 행위의 기준이 된다. 이제 사회의 선택과 계획 수립에서, 가난한 이들이 특전적 위치와 역할을 지니고, 부의 보편적 사용과 연대성의 우선성이 강조되며,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볼 의무가 절박하게 요청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
성령의 담대함(parrhesia) 안에서 함께 걸어가기
120. “함께 걸어가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눈과 마음으로 실재를 해석하게 해 주는 암호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을 따르고 이 상처 입은 시대에 생명의 봉사자가 되려는 조건입니다. 공동합의적인 호흡과 발걸음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우리의 결정들을 고무시키는 친교의 역동성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지평 안에서만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사목을 혁신하여, 그것을 오늘의 세계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적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지금까지 해 온 과정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담대함(parrhesia)을 지니고서 단호하게 그것을 계속하며, 이 시대의 복잡함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121. 공동합의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요청되는 성령 안에서의 담대함(parrhesia)은 신뢰와 솔직함, 그리고 “하느님의 넓은 지평 안으로 들어가, 세상 안에 일치의 성사가 있으며 그래서 인류는 추방당하고 길을 잃을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하려는 용기이다. 공동합의성에 대한 생생하고 항구적인 체험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의 원천이고, 새로운 삶의 누룩이며, 선교 임무의 새로운 단계를 위한 도전의 발판이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며 성령께서 오시도록 간청하셨고(참조: 사도 1,14), 그리하여 성령 강림 날 선교의 폭발을 가능하게 하셨다.” 그 마리아께서 이제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의 순례를 동반해 주시고, 그 목적지를 가리켜 보여 주시며, 복음화의 이 새로운 단계에서 아름답고 부드럽고도 강한 방식을 가르쳐 주시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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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윗 글은 지난 9월 8일부터 시작한 작업을 장별로 진도에 따라서 올리다가, 이제 다 마쳐서 전체를 함께 볼 수 있도록 올린 글입니다. 요한 복음 13장에 나오는, 서로 섬김과 서로 사랑함을 해설하려다가 마침 이 문서가 번역되어 나오길래 정독도 할 겸 쉬운 글을 옮겨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요한 복음서의 묵상과 해설 진도를 계속해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체 평이문을 올려 놓고 보니, 이 다음 사이트의 카페 구조에서는 각주가 탈락되어 버린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본문을 쭉 훑어보시는 용도로는 윗 글을 활용하시되, 각주는 아랫 글에 각 장별로 붙여놓은 내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제3장 공동합의성의 실현: 공동합의적 사건들의 주체, 구조, 절차) 부터 읽을 것.
감사합니다.
며칠동안 함께하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이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의 길을 방향짓도록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름받고 그 자격을 받았다.
“세례 받은 모든 사람 안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의 성화하는 힘이 작용하여 복음화를 재촉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 힘에 의하여 거룩해집니다.
첫째는 교회 안에서 모든 이들에게서 받는 자문을
존중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목자들이 지닌 고유한 권한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백성이 함께 길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에 마음에 두고 오늘은 2장까지 읽었습니다.
!
<“모든 교회의 생각과 열망과 요구를 교황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게”
교구 주교들을 포함시킬 것, 그리고 “평신도들이 교회 일에서 자기에게 알맞은 역할을 다하도록”
평신도들에게 자문을 구할 것 등이 있다.>
이십여년전 본당 시노드 회의에서 일들이 생각납니다.
마음을 모아 내 가족찾기와 새가족찾기 운동을 활발하게 했습니다.
어제 힘든 형제를 도와 주려는 과정에서 사무실에
교적정리를 부탁했는데 본인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합니다.
교적만 옮겨놓는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당황스러웠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몇년전 대구까지 가서 유아세례증명 찾아다 보례를 받게 한 자매가
이사를 갔는데 지금 잘 다니고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전화라도 해보고 가능하면 방문하여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책임감 있는 활동이 요구 되는 것에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소공동체장이나 꾸리아의 간부들의 체계적인 활동이 안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3장을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뜻을 같이 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는”(필리 2,2) 친교의 삶을 이루라는 것이다.
이러한 식별은, 형제자매들과 진솔하고 평온하며 객관적인 대화를 함으로써,
체험들과 각 공동체와 각 상황의 실제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고 복음을 선포하고자 선물들을 교환하고
모든 힘을 모으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4장을 읽으며 마음에 답습니다
*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 이런 류의 글을 읽을 때는 머리도 아프고
물위에 기름, 따로 국밥 등의 생각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다행히 페북을 통해 새롭게 볼 수 있었으며 교파를 초월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분들의 삶을 통해 생각이 바뀌며 글들이 읽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내 있는 자리에서 함께 하는 여정으로 하느님나라의 구현을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의 힘, 마음의 힘! 혼탁한 요즘 세상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워낙 가짜가 판을 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