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삼천년기 아시아 교회 안에서의 한국교회의 역할
제삼천년기에 한국교회가 아시아 교회 안에서 수행할 사명에 관하여 생각하기로 한다. 고도로 발달한 교통과 통신수단을 통하여 지구촌이 된 세계 안에서 한국교회는 제삼천년기에는 여러 아시아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표출된 염원인 ‘아시아적 교회’를 창출하려는 의지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이의 실현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구원 행업으로서의 ‘사랑의 문화‧문명’ 건설을 위해 이웃 사촌 교회로서 다른 아시아 교회들과 더불어 돈독한 친교를 나누면서 곤경에 처해 있는 아시아 교회들과 형제자매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이번 아시아 주교시노드는 아시아 교회 안에서의 각국 교회의 위상과 현주소를 세계교회에 알리는 장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각국 교회 지도자들이 지역교회의 현실과 복음화를 위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하다고 여기는 주제들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가운데 제이천년기를 보내고 새로운 제삼천년기를 맞으려는 준비 자세와 비젼 제시 여부가 그대로 세계교회 무대 위에서 펼쳐짐으로써 다른 지역교회 지도자들의 자세와 입장과 비교되는 일이 자연스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에서의 공동 회합을 통해 정립된 입장들이 여러 지역교회 주교들에 의해 부연되는 일이 광범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특히 일본과 인도네시아 주교단의 입장표명은 충격과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들 교회들은 수치상으로 우리 교회보다 복음화율이 훨씬 낮은 교회이면서도 이번 주교시노드에서, 주교회의 차원의 진지하고 치밀한 연구와 광범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심도있고 체계적인 신학적 논거에 의거 제삼천년기 미래 비젼에 해당하는 입장, 즉 ‘서구 교회’의 입장과 구별되는 ‘아시아적 교회’의 대안을 의연하게 제시하고 아시아 교회의 자율성 요청을 당당하게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이들이 밝힌 주장과 요청한 제안 내용들이 즉각적으로 보편교회의 공식 입장으로 수용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지난 25년간 아시아 주교 연합회의 차원에서 신중한 논의과정을 통해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된 내용을 집약 정리한 것이기에 제삼천년기 중에 보편교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고 아시아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실천 단계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전망은 제일천년기와 제이천년기 동안에 보편교회 안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온 구미의 소위 동방 ‘제1교회’와 라틴 ‘제2교회’에 속한 지역교회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래 쇠퇴 기미를 완연히 드러내고 교회 안에서 다수 교회의 입장으로부터 소수 교회로 전락하는 데 비해,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교회들은 이미 소수 교회로부터 다수 교회로 탈바꿈하여 제삼천년기에는 보편교회 안에서 섭정받는 교회가 아니라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상황에 의거하여 생겨난다. 그런데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교회 등 ‘제3교회’가 속한 지역에서의 대다수 민중이 여전한 빈곤과 사회부조리로 말미암아 그 교회들과 더불어 진통을 겪고 있거나, 국민대비 신자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여러 지역교회들이 이슬람교나 힌두교, 불교 등 다른 전통 종교들의 위세에 눌려 현상유지에 급급하거나, 더 나아가 거의 만회불가능한 침체상태로 빠져드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제삼천년기에 세계적 중요성을 드러낼 것으로 전망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인접 일본이나 대만 교회들이 바로 현상유지도 힘들 정도로 침체일로에 처해 있는가 하면, 공산 사회주의 국가들인 중국과 북한 교회들은 신앙의 자유를 크게 아니면 거의 전적으로 제약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적이고 아시아적인 교회의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지난 70년대 이래 높은 경제 성장력을 이룩한 사회 안에서 이례적으로 경이적인 외적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350여만의 신자들을 포용하면서 아시아 교회 안에서 필리핀 다음으로 공산 베트남과 함께 국민 대비 7%를 상회하는 가장 높은 복음화율을 보유하기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한국교회는 아시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경제적 안정을 이룩하여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는 비용을 들여 대규모의 본당, 회관, 학교, 병원, 복지시설 및 기타 시설을 다수 건립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 가운데 본당 사목과 사회복지 사목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70년대 이래 인권이 제약되는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하에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및 민주화 실현을 위해 투신하는 가운데 범국민적 신뢰를 받으며 사회적으로도 다른 어느 집단에 못지 않은 높은 위상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며, 많은 신자들이 사회 주류층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등 해당 사회 안에서 소수 주변층에 머물러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다른 인접지역 교회에 비해 실로 괄목할만한 활력을 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필리핀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한국교회와 같은 강력하고 드높은 위상을 사회적으로 확보한 지역교회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2. 그런데 새로운 천년대를 목전에 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기로에 처해 있는 듯이 보인다.
한국교회 안에는 제삼천년기의 여명기인, 아직까지도 입으로는 변화와 쇄신을 이야기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구태의연한 자세를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현상유지를 도모하고자 한다는 느낌을 자아내는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 한국교회가 지난 7,80년대에 이룩된 괄목할만한 외적 성장과 사회, 경제적 안정과 인정에 자족한 나머지(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입교자 수가 현저하게 감소하고 냉담자 및 행방불명자 수가 날로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현 교회 상태를 ‘이대로!’ 유지하려는 분위기가 여러 지도층에게서 별 어려움없이 감지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국가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가운데 수입 감소와 물가고, 그리고 실업자의 대량 증가로 말미암아 국민 대다수가 심한 경제난과 정신불안에 시달리는 등 심각한 변화가 광범하고 심층적으로 생활 전 영역에서 일고 있고, 어떻게 세계와 교회 질서 안에서 대두되는 도전과 제기되는 요청에 적극 대응하여 면모를 일신하여 민족과 아시아 새 복음화를 실질적으로 선도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할 기로에 서있다고 믿는다.
한국교회가 삼천년기에 택해야 할 바람직한 진로는 분명하다. 아시아 대륙에서는 유일하게 안정적 여건에 처해 있는 지역교회로서 한국교회는 이에 상응하는 책임있는 역할을 아시아 교회 안에서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에서 이미 정립된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기본입장인 삼중적 대화, 곧 가난한 사람들과의 대화,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 지역 문화와의 심도있고 진지한 대화를 전개하여 ‘한국적이고 아시아적인 교회’가 형성되도록 적극 투신하여 이를 모범적으로 실현해야 할 것이다. 제삼천년기를 겨냥한 한국교회의 새 복음화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접근방법과 표현, 그리고 목표를 설정하여, 민족 복음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국내적 사목을 겨냥하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거시적 안목으로 아시아 내지 인류 복음화를 자기 본연의 목표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삼천년기에 민족과 아시아 교회의 새 복음화를 수행하는 데 있어 교회의 공식입장을 정립하기 위해 해당분야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진지한 연구과정이 필히 요청된다. 이번 아시아 주교시노드를 계기로하여 일본 주교단이 심도있는 연구과정을 거쳐 거시적 안목으로 치밀하게 마련한 청사진을 세계교회 앞에서 정연하게 제시해 주는 모습에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이에 상응하는 구도적 자세를 대하게 된다. 한국교회도 아시아와 세계 인류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이웃 아시아 교회들과의 연대를 도모하면서 한국의 정서와 문화, 그리고 실정에 적합한 사상, 전례, 사목 모델 등을 정립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질적 성숙을 도모하고 아울러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 말
앞으로 1년 6개월 남짓 앞으로 다가온 2000년대에 아시아 안에서 한국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시도하였다.
아시아 현실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교회가 한국에서 ‘새 복음화’의 시대적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제삼천년기」에 의거 과거와 현재의 과실을 진정으로 회개하여 자기쇄신을 이룩한 기반 위에서 세계 안에 주도적인 지배-정복 지향적 ‘죽임의 문화‧문명’을 지양하고 공존-섬김 지향적 ‘사랑의 문화‧문명’을 창출하는 데 주도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한국 아시아적 교회’ 창출을 위한 토착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역사적 대전환기에 드러나는 ‘시대의 징표’에 유의하면서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구도적 노력을 진실하고 결연한 자세로 기울일 때에, 민족과 아시아의 복음화 실현과 아울러 세계교회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성숙한 모습을 드러내고 제삼천년기에 구원을 위한 민족과 아시아, 그리고 세계 인류의 희망의 표징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