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수지 상현동 심곡서원에 잠자리 잡으러 나 온 아이들... 2011.9.13. 화요일
아파트 숲에 숨은 조광조의 심곡서원을 찾아 나선 날
2011.9.13일
추석연휴 마지막날이다.
아파트 밀집촌인 용인수지 상현동에 위치한 심곡서원을 찾았다.
심곡서원은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1519) 때 죽임을 당하였다.
효종 원년(1649)에 세워
‘深谷書院’이라는 사액서원의 현판를 받고
토지·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 길안내 *
죽전역 3번출구 신세계백화점, 죽전역 버스정류장 -> 82번 버스
-> 상현동금호5단지 정류장 하차 -> 오른쪽에 심곡서원 위치
심곡서원에 도착해 홍살문으로 들어 간다.
바로 앞 가까이에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현대건축과 고건축의 부조화로 문화적 가치가 다소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제법 규모가 크고 역사적인 향이 짙은 서원으로 잘 찾아 왔단 생각이 들었다.
심곡서원 외삼문(外三門)
심곡서원 [深谷書院]
1972년 5월 4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1650년(효종 1) 조광조(趙光祖)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공론에 의거, 설립하고 위패를 모셨다.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용인에서는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현면(慕賢面)의 정몽주(鄭夢周)를 배향한
충렬서원(忠烈書院)에 입향하였다가 이 서원이 설립되면서 위패를 옮겨왔으며
양팽손(梁彭孫)을 추가 배향하였다.
건물은
사당·일소당(日昭堂)·재실·장서각·내삼문·외삼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지붕의 좌우에 방풍판을 단 겹처마이다.
일소당은 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합각지붕에 겹처마이며,
목판벽으로 각 칸마다 판자문비(板子門扉)를 달아 사면을 다 개방할 수 있다.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과 강론에 사용된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반 칸의 합각 홑처마이며, 원생이 기거·면학하던 곳이다.
내삼문은 박공지붕집의 3칸 솟을대문이며, 장서각은 맞배지붕에 홑처마로
67종 486책을 소장하였으나 1985년 도난 당해
현재 《정암집(靜庵集)》 《조선사(朝鮮史)》 등만 전해진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의 하나로서
해마다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낸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서원은 마을 뒤쪽 야산에 서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강당인 일소당·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 안의 여러 행사와 유림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서 각 칸마다 널문을 달아 사면을 전부 열 수 있게 하였다.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사당은 앞면에 트인 퇴칸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심곡서원 안내도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형식으로 사묘(祠廟)공간이 뒤에 있고
강학(講學)공간이 앞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 전면에 있는 홍살문
강학공간인 일소당
조광조가 중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하늘이 이 땅을 굽어 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라는 시를 남겨, 이 시에서 한 자씩 따와서 이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일소당 日昭堂은
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合閣(합각) 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木板壁(목판벽)으로 각 칸마다 板子門 扉(판자문비)를 달아
사면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강당은 원내의 여러행사 및
유림의 회합과 학문의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강당 안쪽 벽에는 숙종어제어필의 현판을 비롯하여
서원의 규약(規約). 중수기(重修記). 제영(題詠)등이 걸려 있다.
![](http://cfile238.uf.daum.net/image/1716053B4E6F90571092DD)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 유생들의 기숙사(左:동재,右:서재)가
외삼문을 들어서면서 양 방향에 각각 위치한다.
양쪽 건물 모두 앞면 3칸 조그마한 건물로 실제로 이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많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서원의 기능이 교육보다는 제향(祭享)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외삼문과 동재
일소당 뒤 책을 보관하던 藏書閣(장서각)
심곡서원에는 재실(齋室)이 없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교육공간으로서 보다는 제향위주의 서원으로 주목되면서
재실의 의미가 적어진 때문이다.
내삼문은 출입금지로 굳게 닫혀 있다.
담 넘어로 바라 본 심곡서원 현판
심곡서원 제일 뒷편에 위치한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
뒤뜰 400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
풀 숲에서 노란 얼굴 내민 우드베키아가 방긋! 미소를 건넨다.
서원 옆뜰에 있는 보호수
[보호수]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
소 재 지 : 용인시 상현동 203-1
수 종 : 느티나무
수 령 : 500년
수 고 : 17m
나무둘레 : 400cm
서원 신축당시 식재된 것으로 보이며
심곡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동재 뒷편 연당 위에 있는 수령 500년 정도 된 느티나무
조광조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500년 정도 된 느티나무가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느티나무 앞에는 연당이 있다.
심곡서원에는
사당과 공부방 이외에도 천원지방(天圓地方)을 형상화한
연못과 재래식 아궁이도 만난다.
*천원지방(天圓地方)*
동양사상에 있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관념에서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말이 있다.
외삼문
가운데 굳게 닫힌 내삼문이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느낌이 들었다.
눈앞의 가까운 곳은 목조로 된 예날 서당건물이 분명한데
눈을 들어 멀리보면 고층아파트 숲이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심곡서원 관람을 마치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외삼문으로 나오니
담 밖에 연분홍꽃을 곱게 틔운 배롱나무가 우릴 보고 좋다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조선 후기 하마비.
용인시 상현동의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배향된 선열(先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비문을 새겨 서원 입구에 세워지게 되었다.
하마비에 대한 전설
이 하마비는 서원 부중의 한 여인이 세운것이라 전해진다.
조광조 선생이 이곳에서 시묘를 하면서 하루는 잠깐 출타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선생이 돌아 왔을때 이웃집 아낙네의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선생은 무슨일인지 궁금하여 종자에게 사연을 알아 오라고 했다.
잠시 다녀온 종자의 말로는
여인의 외아들이 마마를 앓고 있었는데 잠시전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특히 죽은 아이는 5대독자 여서 여인의 비탄이 자심하다는 전갈이었다.
이 말을 듣자 선생은 급히 서찰을 써서 종자에게 주면서
"지금 즉시 모처에 가면 백발 노파가 푸른 보따리를 가지고 지나갈 것이다.
노파를 보거든 이 서찰을 전해 주거라" 하고 일렀다.
종자는 선생이 일러준 곳에 가 있었더니 정말로 노파가 오고 있었다.
종자는 공손히 절하고 서찰을 내밀었다.
노파는 이를 보더니
"아하 정암선생의 부탁이니 어쩌겠수" 하면서 알았다고 하였다.
노파가 들고 있었던 푸른 보자기의 속에는 5대 독자의 혼이 있었던 것이다.
종자가 부지런히 돌아와 보니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다.
그때 부터 지금까지 이곳 상현리 마을에는 마마가 끊어 졌다는 전설이 있고,
선생의 은헤를 잊지못한 5대 독자의 어머니는 그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하마비를 세웠다고 한다.
서원 바로 도로앞 마을풍경이다.
심곡서원 뜰 감나무에 가을이 매달렸다.
감나무에서 가을이 노릿하게 익어 간다.
심곡서원의 초가을이 달콤한 속삭임으로 내게 다가 온다.
시원한 가을 바람이 자리 잡으면 요 감도 주황빛으로 곱게 물들테지..
용인시 수지구 상현 1동
趙光祖先生(조광조선생)의 묘비와 絶命詩(절명시) 碑(비)
뒤쪽으로 보이는 건 神道碑(신도비).
絶命詩(절명시)란 : 선비들이 죽음을 마지하여, 마지막으로 남긴 시를 의미한다.
[絶命詩(절명시) 碑(비)]
絶命詩(절명시)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아래 세상 내려다보고 있나니
가이 없는 이내 충정 길이길이 비추리라
쌓인 눈 위에 하얀 종이가 펼쳐지고 먹을 머금은 붓이 빠르게 지나간다.
먹 선이 가는 곳에 조광조의 마음이 그려졌다.
검은 먹 점이 글씨가 된 형체위에 하얀 눈발이 날리고, 붓 끝에는 조광조의
염원과 회포가 알알이 맺혔다.
붓을 놓은 조광조는 북쪽 하늘을 쳐다보며, 심호흡을 하는 조광조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렸다.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글.
이것이 진정 죽음을 앞둔 絶命詩(절명시)다.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조광조는 시중을 들던 사람들에게 일렀다.
"내가 네 집에 묵었으므로 마침내 보답하려 했으나 보답은 못하고
도리어 너에게 흉변(凶變)을 보이고 네 집을 더럽히니 죽어도 한이 남는다."
말을 마친 조광조는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4배를 드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군신의 예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유엄으로부터 사약을 받아 든 조광조는 단숨에 들이켰다.
의지의 선비 조광조는 이렇게 갔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흐트러지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그래도 머리는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고 돌아가셨다.
한이 맺혀서 일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양팽손이 떨리는 손으로 눈을 쓰다듬어 내리자 그때서야 눈을 감았다.
[神道碑(신도비)와 묘역]
490여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이 우리의 가슴에 각인되어있는 것은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그의 도(道)가 백성에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개혁(改革)은 문자 그대로 죽음과 맞바꾸는 아픔을 동반한다.
혁명은 밭을 갈아 엎듯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개혁은 판을 깨지 않고
가는 길이라, 그래서 혁명보다 개혁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文正公 趙光祖(문정공 조광조) 墓(묘)]
그는 어려서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운 이래로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한사람이 되었다.
중종 5년(1515) 사마시에 합격한 후, 새롭게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시대적인 분위기를 타고 관직에 나섰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유교로 정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고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였다.
신진사류들과 함께 잘못된 제도의 개혁 및 그에 따를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노력하였지만 기성세력이었던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사진. 글 / 초아(안내판과 인터넷 참조)]
趙光祖는 개국 초의 鄭道傳(정도전)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의
고식적인 王道論으로 당시의 혼란상을 수습코자 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첫째, 中宗 8년 이후 난세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더구나 功臣세력들이 비록 도덕적으로는 수세에 몰려 있기는 했으나
아직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제압하려면
좀더 치밀하면서도 점진적인 방안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趙光祖는 士林세력과 中宗의 지지를 배경으로
이들 功臣세력을 벼랑으로 몰고 갔다.
功臣세력이 필사의 반격을 가할 것은 불문가지였다.
둘째, 王權강화를 염두에 둔 中宗의 이해와 충돌할 소지가 컸다.
中宗이 趙光祖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땅에 떨어진 王威를 회복하는데 있었다.
그렇다면 趙光祖는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소위
「挾天子領諸侯(협천자영제후)」의 계책을 적극 활용해 마지막 순간까지
中宗을 자신의 편에 서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趙光祖는 오히려 中宗과 대립해 王威를 형편없이 실추시켜
中宗의 이반을 초래하는 愚를 범했던 것이다.
당시 趙光祖는 道를 밝히는 소위 「明道(명도)」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조차 항상 삼가는 소위 「謹獨(근독)」
이라는 두 가지 행동원칙을 견지했다.
이는 修齊論에 불과한 것으로 결코 나라를 다스리는
治平論(치평론)으로 원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원칙을 통치문제까지 그대로 확대·적용코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己卯士禍였다.
趙光祖의 개혁은 反역사적·非현실적
趙光祖는 기본적으로 일신의 修德(수덕)에는 뛰어났을지언정
결코 經世家(경세가)는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학문이 경사서와 제자백가서를 博覽(박람)하는 경세학과는
거리가 먼 金宏弼의 小學 차원에 머문 것이 그 증거이다.
趙光祖의 정국주도는 당시 士林세력의 「과거사 청산」
작업으로 인해 世祖 통치의 정당성이 부인되고
조선조의 왕통이 뒤흔들리는 非정상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시종 과거사 청산을 기치로 내걸고 修齊論으로 治平論을
대신코자 했던 趙光祖의 개혁 노선은 「小學」 차원의
反역사적·非현실적 노선이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이런 점에서 己卯士禍를 계기로 趙光祖와 金宏弼 등이 道學을 위한
殉道者(순도자)로 미화된 전래의 평가는 再考되어야만 한다.
(신동준의 조광조론에서 인용)
그 밖에 조광조는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사사됐으며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에 竹樹書院을 세워 靜菴 趙光祖(1482~1519)와
學圃 梁彭孫(1488~1545)과 함께 제향하였다
감사합니다.
권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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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심곡서원과 조광조의 묘역을 한번 들러본 일이 있는데
이렇게 세세하게 답사 후기를 올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선배님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용인 수지구 성복동 엘지빌리지에 1년이상 살면서도 이 곳 심곡서원과 조광조묘를
못 가 보았습니다 추석연휴에 한번 가 보니 새삼 역사의 현장을 느껴습니다.조광조의 스승인 寒喧堂 金宏弼선생의 서원인 경북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의 道東書院을 다녀오면서 감회가 더욱 깊어 이 글을 올렸습니다.도동서원과 의성의 고운사,대구 파계사,송림사,달성 용연사,유가사도 별도로 올리겠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