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이 시론은 베르그송과 크로소프스키가 만나는 지점에 대해서 탐구한다. 특히 이 글이 주요하게 삼는 주제는 크로소프트키가 해석하는 니체의 영원회귀 이론이다. 나는 이 크로소프소키의 해석을 통해서 영원회귀가 베르그송 이론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밝힌다. 그리고 여기서 출발하여, 크로소프스키 고유의 사유들이 생명에 대한 베르그송 사유와 어떻게 이접과 연접을 만들어내는지 규명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나는 여기에서 크로소프키의 환영과 시뮬라르크 이론을 검토한다. 이것들은 작동하는 권능(la puissance d'agir)을 위한 개념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들을 실존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예시들을 들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베르그송, 크로소프스키, 그리고 니체의 사유 한 가운데에 있는 내재성의 장에서의 순수 사건을 목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베르그송의 8자 도식과 클로소프스키를 통한 니체의 영원회귀론
영원회귀는 베르그송의 8자 도식 위에서도 일어난다. 베르그송의 8자 도식 위에서 의식은 무한히 회귀하면서 자기 생명력을 연다. 그리고 무한한 원환을 그린다. 이 원환은 수렴하는 작은 원이 될수록 신체-이미지에 가까워지고, 확산하는 큰 원이 될수록 베르그송이 기억이라고 말하는 생명의 심연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자세히 탐구하게 될 기억의 상이한 원들 중에서 가장 좁은 원(回)인 A는 직접적 지각에 가장 가까이 있다. 그것은 단지 대상 O 자체와 그것을 덮으러 오는 뒤따르는 이미지만을 포함한다. 그 뒤에 B, C, D라는 점점 더 커지는 원들은 지적인 팽창의 증가하는 노력 들에 상응한다. 곧 보게 될 것이지만 이 각각의 회로들 안에는 기억mémoire의 전체가 들어온다. 왜냐하면 기억은 항상 현재 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유연성으로 인해 무한히 팽창할 수 있는 이 기억은, 대상 위에 점점 증가하는 수의 암시적 사물들을 —때로는 대상 자체의 세부사항을, 때로는 대상을 조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동반적인 세부사항들을一반사한다. 이처럼 지 각된 대상을 하나의 독립적 전체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후에, '우 리는 그 대상과 더불어 대상이 체계를 형성할 조건들을 점점 멀리까지 재구성한다. 물기 115.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 원환은 단순히 형상적인 원환에 머물지 않는다. 이 원환은 지각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존적인 한 점을 계속 교차하며 진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베르그송은 이 책에서는 이 원환이 가능한한 커져서, 그가 추억과 구별하는 기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때 인간 실존이 어떠한 체험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논구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때 그는 자기 생 이전의 생명적 흐름까지도 기억할 것이다. 이 도식이 등장할 때 중요하게 서술되는 것은 도식 자체의 방법론과 작은 원환일 때 기억-추억-이미지의 작동 방식들이다. 아마도 이런 생명의 심연과 소통하는 인간 실존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서술될 것이다.
그런데 크로소프스키(Klossowski) 니체 해석은 베르그송이 설명하지 못한 것을 설명한다. 말하자면, 베르그송의 이 원환을 무한하게 확장하는 실존, 즉 영겁회귀를 경험하는 실존을 크로소스키의 니체는 고찰한다. 크로소스키는 니체가 타자화된다는 것, 그러나 그렇게 타자화된 자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회상은 영원회구의 계시와 일치한다. 영원회귀는 어떻게 망각을 회복시키지 않는 것일까? 나(니체)는 필연적인 영원회구의 진실이 내게 계시된 정획히 그때로, 원환의 영원성이 정점에 이른 핵심적 순간으로 내가 되돌아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회구의 진실을 잊기 위해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르게 지금까지 지냈다는 것, 그러므로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가 다른 것/타자가 되었다는 것, 그것도 동시에 알고 있다. 나는 변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영원 동안, 다시 이 계시를 알게 되는 날까지, 필연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한 번 더 잊을 것인가? 한.87
영겁회귀에서 주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어떤 현상인지는 다양하게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편집증이 아닌 분열증, 심리학적으로는 동질성이 아닌 이질성 등등.
그리고 다시 우리는 베르그송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이 무한히 반복되는 베르그송의 원환을 타자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인격을 상정할 수 있다. 일상에서라면 우리는 기껏 이 작은 원환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원환이 쉬지 않고 축소되거나 확장되는 어떤 진동이란 것조차 ‘알맞게’ 잊고 살 것이 분명하다. 이 원환들의 다양체가 인식될 경우, 그리고 인식하고자 할 경우 우리는 과민해진다.
니체는 실제로 그렇게 과민해졌고, 크로소프스키는 이러한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해석한다. “영원회귀의 계시는 필연적으로 모든 가능한 동일성들을 차례차례 현실화한다.”(87) 베르그송의 8자 도식 속 여러 궤적들은 이 현실화의 증언들이다. 이 궤적은 영원회귀하는 주체의 동일성 상실을 훨씬 더 쉽게 우리가 직관할 수 있게 한다. 인격 안에서의 태어나는 운동을 온전하게 감지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인격들의 이러한 분열증적인 선을 감지한다.
크로소프스키는 이렇게 분석한다. 약간 길지만 크로소프스키의 고유한 니체 분석을 알아볼 수 있는 구절이라 인용한다.
니체, 그가 의식하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그가 니체에길 그만두었다는 것, 그로부터 니체라는 인격이 비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동일성의 부재는 엄처난 변덕스러운 발언에 의해 표명되고, 이 발언은 이러한 변덕 자체에 신의 모습을 요구한다.//자신의 발언을 어느 누구도 믿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면, 니체는 어떻게 고의적으로 자신을 구경거리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그를 이끈 것은 두 종류의 동기였다. 그 하나는 자신을 우롱하고 동시대인들을 우롱하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다고 느낀 권위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한 사례(니체의 사례), 실제로는 으식적 자아의 완전한 공허 안에서 겪은 카오스,의 연출이 제공한 관능적 쾌ᄅᆞᆨ이었다. 연출자는 물론 아직은 니체의 의식이었지만, 더 이상 니체의 자아도, 나체라고 서명한 나도 아니었다. 이 의식에 의해 니체의 표현 니체의 어휘는 존속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직접적으로 충동들이고, 기분의 운동들이다. 이 충동들과 이 운동들은 나에 의해 행사되던 현실 원칙의 검열로부터 해방되어, 의식을 니체적 담론의 잔래는 형태로 활성화하고, 그리하여 이를 테면 그의 연극증의 레퍼토르가 된다. 그리고 그 부속물들은 영혼의 음조에 따라서 조합된다. 이렇게 연극증은 우연한 사례의 실천이 된다. 현실 원칙의 검열이 용인하는 것은, 이 원칙에 따르자면 인유(언어)나 시뮬라크르(배우의 몸짓)의 습관적 작용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편 자기 스스로 자신의 동일성을 해체하면서도, 다른 한편 충동의 정체성은 나날이 더 확장해가는 것, 그 방법으로서 연극증과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을 발견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동일성의 해체를 가동하는 것으로서 충동의 정체성이 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새롭게 태어나는 충동들의 정체성, 즉 충동의 영혼이 동질적인 정체성을 해체한다. 이 충동의 정체성이 영원회귀인데, 이것은 뒤에서 내가 더 자세히 말할 것이다. 이것을 관찰하려 니체는 충동적인 자아와 해체되는 자아를 구별했고, 이질성의 이러한 자아(파토스)는 해체 되어가는 동일성의 자아(에토스)가 만들어내는 시뮬라크르를 구경하면서, 구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을 더 확장해갈 수 있었다. 사회적 코드들이 직조한 에토스는 본래 대본에 충실한 자아이다. 그것을 구경하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의 파토스는 글을 쓸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크로소프스키의 소설 “다이안의 목욕(le bain de diane)”을 만난다. 이 논문에서 이 글을 자세히 분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정도만 밝힌다. 이 소설에서는 다이안이 상징하는 신화적인 동일성의 해체와 악테이온이 상징하는 파토스적인 목격, 둘의 긴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주의할 점은 여기서 악타이온의 미진한 ‘진리’는 플라톤주의의 이데아가 아니라, 베르그송이 말하는 겪고 느낀 필연성(une neccésité subi te senti)이다. 그것은 파토스이다. 파토스의 충동은 늘 최고조에 이르지는 않는다. 언제나 궤를 따르는 에토스의 언어와는 다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사슴의 가면을 쓴 악타이온은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을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미리 정죄를 받았지만 고양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여신의 말은 아이러니를 통해 무분별하고 불경스러운 언어를 사용하여 사슴 인간 앞에 벌거벗은 다이애나의 장면을 묘사하고 신비 속에서 다른 수단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찾도록 유도합니다. 미스터리가 완성되는 무대극.”
베르그송의 직관과 크로소프스키의 망각론, 나아가 시뮬라르크
또한 크로소프스키는 니체를 독해한다: 여기에서 니체의 실존은 망각을 겪게 된다. 망각? 앞서 나는 니체의 실존이 자신의 타자화를 회상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정언은 모순되는 것 아닌가. 사실 이 지점이 크로소프스키의 니체론에 있는 난해한 지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도상화해볼 수 있다. 베르그송의 회로도가 반복되고, 그 반복을 실존이 더 많이 기억할수록 회로도는 궤도들로 가득차서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니체의 실존은 충동을 무한히 새롭게 반복하므로 사실상 이 회로도는 이렇다: 무한한 궤도들의 가득참 속에서 낱낱의 궤도는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놀라운 점이 있다. 그가 이 무한한 회귀를 기억하기 때문에 이 궤도들이 모두 남아서 이 궤도를 알아볼 수 없게 하고, 결국 이 궤도를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기억과 망각은 하나의 평면 위에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일상에서의 망각과는 다르다. 일상에서의 망각은 우리가 과거를 심층화된 기억으로 삼으면서 현재로 더는 끌어오지 않는 현상이다. 가장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존재는 물체이다. 이와 달리, 이 영원 회귀하는 자의 망각은 이 전일한 운동 자체에 대한 가장 순수한 체현이다. 그외에 다른 의미일 수는 없다. 쉽게 말해,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상기법인데, 나는 이 인격을 만들어내는 8자 도식의 궤적들을 “이성적으로” 추론할 수 있어서 내가 회귀하는 운동을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단순하게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차이를 반복해서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직관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과거에 그 작업을 하던 인격을 지금 이 작업을 하는 인격이 망각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인격은 어떤 것을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라도, 인격인 자신이 달리 반복한다는 직관을 인격이 갖는다. 그러한 인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달리 반복한다는 표현이 언어적으로는 역설적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결코 역설이 아니라는 것을 들뢰즈의 언어분열증자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심리학의 또다른 원인론(causalité)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패러디에 대한 크로소프키의 강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베르그송은 이를 표현하려고 직관을 강조한다. 그에게 직관은 지성에 추인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승인하고, 또 지성을 뛰어넘는다. 이 도약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는 인간에게는 구태의연한 플라토니즘, 즉 이데아-모방의 진리론 자체를 뛰어넘는 어떤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크로소스키의 니체 분석은 언제나 다소 시적인 문체 안에서 설명되는 베르그송의 ‘직관’ 개념을 정밀하게 알 수 있게 한다. 크로소프스키의 니체는 망각을 통해, 충동이 어떻게 지적인 작업들을 흡수하는지, 어떻게 타자와 자아의 구별 자체를 무효화하는지를 설명한다.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편의 헤아리지 않는 것으로서 더 유력한 삶의 양태(mode)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베르그송이 내내 비판했던 속좁은, 더군다나 공간적인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통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클로소프스키는 fantasme에 대해서 말한다. 클로소프스키가 강조하고 있는 충동에 의해 우리 안에 생겨난 강박적 이미지가 fantasme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극된, 혹은 자극 가능한 다양한 상태들에 반응하면서 기호 코드에 따라 해석한다. 이 해석에서 이미지가 생겨난다. 이 이미지는 이미 발생 한 것, 내지 발생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표상이고, 따라서 fantasme이다.…달리 말해 fantasme은 예견된 자극이며, 따라서 이전에 체험된 자극이 규정한 도식에 따라 가능한 자극”44)이다. fantasme은 행위자가 충동을 만족시키거나, 없애려고 하는 가운데, 계속 그리 돌아갈 수밖에 없는 강박적 이미지다. fantasme은 각자를 특이한 경우로 만든다. fantasme은 적절한 표현을 발견할 수 없다. 또 fantasme 자체는 전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fantasme은 이해 불가능하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fantasme이 강박적인 것은 이처럼 이해 불가능하고, 전달할 수 없기 때 문이다. fantasme은 어떤 행위로 지속적으로 돌아가게 추동하는 구속력으로 경험된다.
클로소프스키에 의하면, 자아 자체 역시 하나의 fantasme이며, 문법상 주어의 도움으로 충동의 카오스에 심리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성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충동의 카오스적 삶을 통일성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자아라는 fantasme이다. 요컨대 fantasme은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충동의 노력이다. 즉 충동이 스스로 반성하려는 시도가 바로 fantasme이다. fantasme은 단지 표상의 기초를 형성하기 위해서 표상에 저항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체를 상기시키는 것(corporeal reminder)이다. 즉 fantasme이란 흉내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기분, 다시 말해 표면으로서 언어에 깃들어 있는 기분이다.
시뮬라크르는 fantasme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fantasme을 의도적으로 재생한 것이며, 볼 수 없는 영혼의 움직임을 모사한다. 클로소프스키에 의하면, 시뮬라크르는 그 자체로 전달할 수 없고, 표상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강박적 구속력을 발휘하는 fantasme을 현실화시킨 것이다. 시뮬라크르라는 말은 라틴어 simulare(모사하다)에서 나왔고, 로마 제국 시기 흔히 도시 입구에 일렬로 서있던 신들의 동상을 가리켰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만들었지만, 신의 볼 수 없는 힘의 척도가 되었던 대상 이 시뮬라크르였다.55) 그래서 클로소프스키는 원래 건축에서 유래한 시뮬라크르라는 용어를 그림, 말, 글로 된 형상으로 확대했다. 요컨대 시뮬라크르는 fantasme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인공물로, 즉 말이나, 글이나, 조형적인 차원으로 fantasme을 옮겨 놓은 것이다.
앞서 언급된 정의에 따라 볼 때, 시뮬라크르로 이해할 수 있는 영원회귀는 fantasme의 산물이 아니라, fantasme의 교묘한 복제이다. fantasme이 충동의 산물이라면, fantasme 자체는 전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fantasme을 전달하기 위해 시뮬라크르가 필요하다. 영원회귀라는 fantasme의 경우에는 원환의 형상, 내지 악순환의 형상이 필요하다.
한편, 시뮬라크르는 fantasme의 표현이며, 따라서 신체 자신의 창조물이다. 시뮬라크르로서 영원회귀는 자아와 맺은 연대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는 충동 들에 호소한다. 다른 한 편, 시뮬라크르는 일상적 기호 코드에 의해 제한된 다. 다시 말해 시뮬라크르는 fantasme의 운동, 혹은 음조를 모방함 (simulater)으로써, 선택된 청중이 fantasme에 접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fantasme을 일상적 기호 코드와 만나지 않도록 보호하며, 신체적 창조를 위한 공간을 열지만, 그 가운데 일상적 기호 코드에 의존함으로써 fantasme의 본성을 왜곡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시뮬라크르로서 영원회귀의 원환적 형상은 니체가 체험 한 영혼의 높은 음조를 그대로 전달할 수 없고, 단지 패러디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클로소프스키는 현존을 그대로 표상하는 이론적 학설 이 아니라, “학설의 시뮬라크르”59)라고 영원회귀를 규정한다.
베르그송의 생명체와 클로소프스키의 시뮬라르크
바다로. 바닷물이 해변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 자연의 한편에서, 모래에는 그 물자국이 남았다가 곧장 사라진다. 남아있을 때 바닷물이 다시 들이닥치기도 하고 완전히 다 스며들었을 때 바닷물이 덮치기도 한다. 아무도 이 개별의 동작들까지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해변에는 언제나 물결의 선이 fantasme처럼 남아있다. 이 사실은 어떠한 힘의 정체성이 있다는 증거이다. 자신을 늘 갱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을 늘 반복하고, 앞서의 흔적을 늘 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필연적으로 앞서의 운동을 모두 기억하며 행하는 연극이 이 해변에서는 펼쳐지고 있다. 말로만 이것이 역설적으로 보일 뿐이지, 바다에서 이 운동은 아이러니도 아니고 모순도 아니다. 그저 단순한 자연이다.
또한 의식이 그러하다. 우리가 의식이 지성이 잘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생각에 매몰되지 않는다면, 의식의 의미를 철학서적 안에서만 찾지 않는다면, 사실 의식의 실체는 우리 자신들의 근본론적 경험이다. 지금 이순간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이 의식의 실체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성을 통해 개념화해야 하는 필연성이 있었던 것이다. 니체라면 그 필연성의 충동이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간유리를 통과하여 들어오는 달빛은 구름, 비행기 등등에 따라 광도가 달라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들도 달라진다. 충동의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fantasme과 같은 이 빛에는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실은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체는 흥망성쇠를 겪는다. 여러 종들이 생겼다가 사라진다. 수많은 개체들의 충동들보다는 적겠으나, 여러 종의 생명 본능이 지구상에 새겨졌다가 사라진다. 새겨지고 있는 그 위로 겹쳐 새겨지기도 하고, 새겨진 것이 사라지는 그 위를 덮기도 한다. 등등. 말 그대로 말할 수 없이 다양한 진화의 운동들이 fantasme처럼 있다. 그 운동들만큼 다양한 흔적들과 그림자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진화적 운동의 정체성을 해안에서 물결선을 찾듯이 탐구하여 생명력이라고 말한다.
나는 계속 반복해서 새롭게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것들이 다르게 새롭게 반복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연과 의식과 생명에 있는 하나의 창조적이며 반복적인 힘이다. 자연의 힘이고, 의식의 힘이고, 생명의 힘이다. 그러니까 힘이다.
베르그송이 힘주어 말하듯이, 이 힘의 기억(Memoire)의 앞에서 철학은 새롭게 반복하는 충동들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우선 그 충동들을 서 있게 하고 다음에 그것들을 확대하여 서로가 일치되게 하여야 한다. 이런 작업을 밀고 나갈수록 우리는 그것이 생명 자체임을 더욱더 잘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이 힘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반복들을 지성을 통해 파악하고자 할 때에만 이 운동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그 반대로 갈 경우에 우리는 힘의 회로도는 버린채로 충동을 대하게 될 것이다. 이때에 지성은 각 충동들이 얼마나 병적인지 혹은 건강한지 지적할 수 있다. 지성은 그 움직임에서 충동은 삭제한 채, 마치 말레비치가 꿈꾼 넓이 없는 사각형을 대하듯이, 지적으로 순수한 시스템을 조립하는 데에서 그칠 수 있다.
올바르게 간다면, 철학은 우리를 힘의 삶 속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동시에 철학은 우리가 힘의 삶과 물체의 삶 사이의 관계를 보게 한다. 우리가 힘의 삶을 잘못 사유할 때 우리는 그것을 모든 것과 분리한 채로, 그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놓으면서, 자아 속의 타자인 것처럼 다룬다. 그렇게 어떤 철학자들은 이 힘이 모든 공격을 피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놓여있다고 믿게 만든다. 그들은 또 믿는다; 그 교설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힘의 삶은 단지 흉내내기들(simulacres)이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흉내내기가 아니어야 하는가? 오히려 반복과 악순환과 재의지여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의식이 인간의 권능을 긍정할 때 그 교설들이 거기에 마음을 쏟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들은 잘 밝혔다; 우리는 그저 사회적인 자아[Ethos]나, 종교적이고 지적인 자아[Logos]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더 심층적으로는 심리적이고 정념적인 자아[Pathos]이다.
그러나 이른바 지성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들은 즉시 힘이 아니라 물체의 정체성을 도입한다; 원인이 결과를 결정하며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조건짓고 모든 것은 반복하며 모든 것은 주어져 있다. 힘의 철학들이 태어나는 의식의 절대적 실재성과 물질로부터의 독립성을 믿은 것은 옳다. 그러나 과학은 그것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과학은 힘을, 예컨대 신경계와 근육의 움직임과의 연대성으로 이해한다. 신체의 정신에 대한 지배를 부정하는 한, 둘의 연대성은 틀리지 않다. 힘의 교설들이 인간에게 세계 속에서의 특권적 위치를 부여하고, 동물에서 인간에 이르는 거리를 무한하다고 생각한 것은 옳다. 인간이라는 충동이 특별히 다른 충동의 평면에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어떤 강력한 충동이 개체와 개체를 넘어 잔존할 수 있다고 선언할 때 우리(on)는 그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힘의 삶이란 것이 정말로 독립되어 있다면, 그러니까 그러한 힘의 영혼들은 어디서 오는가? 물체가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는 눈앞에서 바로 알 수 있는데, 힘의 영혼들은 어떻게 그 물체 안으로 들어가는가? 직관의 철학이 있어야만 한다. 헤아릴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버리는 지성의 철학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에서부터 시작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것까지도 끌어안는 직관의 철학이 있어야만 한다. 신체의 삶을 그것이 실제로 있는 그곳에서, 즉 힘의 삶 안에서 그것을 직시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보기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답이 없이 남아있을 것이 위의 물음들이다; 작동하는 권능(puissance d’agir), 힘의 정체성, 힘과 물체의 연대성, 인간적 충동의 위상 등등. 심지어 직관의 철학은 과학의 부정이 될 것이고, 머지 않아 과학은 이 철학을 말소할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결심 안에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더 이상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자연선택되고, 개념화되고, 경화된 생명체들이 아니다.
다시 바닷가의 은유로 돌아가보자. 쉴 새 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물결들 하나하나를 관찰한다는 것, 그 관찰이 점점더 고도화될수록, 그것은 결국에 그 운동의 헤아릴 수 있는 구성요소들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기압차, 해수면 온도차, 고도차 같은 것들의 그래프가 그려질 것이다. 사실은 그것들 조차도 나날이 더 세밀하게 분석될 것이다. 그 분석들 가운데에서, 자연의 한 표현으로서의 운동, 에너지의 실체, 우주 영혼과 바다의 연대성, 인간의 감수성 등등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힘의 삶 안에서 우리가 이 물결선을 목도한다면 그 물음들은, 비록 즉답내릴 수는 없을지라도, 다시 돌아온다. 힘의 삶에게는 물결의 일렁임이라는 이 운동을 세계안에 던져 놓은 최초의 충동으로부터 모든 일렁임들이 세계를 휩쓸어가고 있다고 보일 것이고, 이 운동은 소멸하고 해체하는 물결, 물결의 관찰과는 마치 대립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해변에서의 세계 전체와 자아의 일렁임이 미묘하게 엮이는 ‘실존’의 감각을 구토로 묘사한 적 있다. 이 흐름은 바다 안에서는, 그러니까 물체에서는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세계를 추동하고 있는 이 힘이 자신을 통해서 솟아오른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비록 자신이 이 흐름을 약간은 둔하게 할지라도, 이 힘의 현존이 곧 자기 힘의 삶의 실체라고 느낀다. 이 사람은 창조적이다. 그에게 생명의 의미, 그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란, 이 힘의 방향의 논리이다. 이 힘의 목적론이 아니다. 이 샘솟는 흐름은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이다. 그리고 모든 의식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상호침투하는 무한수의 잠재성을 포함한다. 여기에는 물체를 위한 동일성의 범주도 복합성의 범주도 적합하지 않다. 단지 이 의식의 흐름이 삽입하는 물질들이 개체성을 표식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 정말로 비상하다면, 이 흐름이 물체를 통해, 생명체에서, 종들에서, 개체들에서 점점더 세분화되면서, 점점더 많은 개체적인 표식들을 남기면서 드러나는 것을 실제로 느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혼들은 끊임없이 세계에서 창조되면서,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나 다시 해변가로. 이 모든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미리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결국에 해변의 물결선과 인간의 신체의 같은 평면 위에 있다. 물결선을 남게한 그 힘이 내 몸을 남게 한 그 힘이다. 그리고 이 힘들은 공명이 가능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물결선과 나, 심지어 물결선과 물결선들, 심지어 내 의식과 의식들은 모두 다 다른 물체를 끌어오고 있고, 그 때문에 모두 다 다르게 표식되지만, 그 때문에 모두 다 다른 우여곡절을 겪게 되지만, 하나의 운동이 만들어 낸 차이들(differenciation)일 뿐이다. 계속 말하지만 이 힘의 삶 속 정체성은 물질의 삶 속 동일성과는 다르다.
그리하여 강도의 동일성[l'ideintité de l'intencité]이 중요하다. 베르그송 이후에 우리는 강도의 동일성은 공간적 동일성, 그리고 그와 유사한 모든 동일성과 다른 동일성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측정될 수 있는 동일성이 아니다. 오로지 실천하는 동일성이며, 이 동일성에 가장 천착하는 학문은 아마도 실용주의일 것이다. 수많은 논의의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이것을 ‘운동의 영혼’이라고 했다.
[Prenez, toujours dans l’histoire des mathématiques la découverte de Leibniz et de Newton l’invention du calcul différentiel. Qu’est-ce ? Un effort pour plonger plus profondément encore dans la mobilité du mouvement; la dérivée mathématique, c’est la vitesse instantanée d’un point, c’est un point saisi dans son mouvement, dans la transition que sa vitesse effectue en quelque sorte d’un point à un autre151. Ce n’est pas autre chose, c’est un effort pour pénétrer encore plus avant dans l’âme du mouvement, dans la mobilité du mouvement, dans ce qui est l’essence du devenir en tant que devenir. L'idée de temps 168.]
당신들은 수학사에서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와 뉴턴(Newton, 1642-1727)의 발견물, 미분 계산의 발명을 다루어 보세요. 그것은 무엇인가? 노력(un effort), 즉 운동의 운동성 속에 보다 훨씬 깊숙이 빠져 들어가기 위한 노력이다. 수학적 미분(la dérivée), 그것은 점의 순간화 된 속도이며, 점[미분]의 운동 속에서 파악된 점이며, 운동[미분]의 속도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어느 정도로 실행하는 이전[이동]이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라, 이것은 운동의 영혼 속에, 운동의 운동성 속에, 생성인 한에서 생성의 본질인 것 속에,훨씬 앞서 침투하기 위한 노력이다. (168) [이 흥미있는 설명에서 지속 속에 침투하는 것을 운동의 영혼이라 표현하였다.] 책베1901시간념1902강1900
그리고 “이 사람을 보라Voici l'homme (Ecce Homo)”, 어떤 의미에서 미리 존재하는 이것들을 어떻게 이 사람은 활동하는 것일까? 그것도 동일성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늘 새롭게 창조하면서. 여기에 대해서 크로소프스키(Klossowski)의 니체론은 매우 훌륭한 참조점이다.
[106] Un fragment daté de Sils-Maria, août 1881, énonce : « Vincessante métamorphose: en un bref intervalle de temps il te faut passer par plusieurs états individuels. Le moyen en est Vincessant combat. » Quel est ce bref intervalle? Non pas un instant quelconque de notre existence, mais l’éternité qui sépare une existence d’une autre. Ceci indique que le re-vouloir a pour objet une multiple altérité inscrite dans un individu : si c’est là Vincessante métamorphose, elle explique pourquoi Nietzsche déclare que la « préexistence » [107] est une condition nécessaire à Yêtre-tél-quél d’un individu. L'incessant combat indiquerait que dès maintenant l’adepte du Cercle vicieux doit s’exercer à cette multiple altérité : mais ce thème, il le reprendra plus tard lorsqu’il envisagera une théorie du cas fortuit.
질스-마리아, 1881년 8월의 단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끊임없는 변신, 짧은 기간 안에 너는 다양한 개인들 모두가 되어야 한다. 그 방법론은 끊임없는 투쟁이다. 이 짧은 기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실존의 어떤 순간이 아니라, 하나의 실존을 다른 하나의 실존과 분리하는 영원의 시간이다. 이 말의 뜻은 재-의지하기의 목표는 한 개인 안에 기입된 다수의 타자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는 변모라면, 니체가 왜 개인의 있는-그대로-존재하기에 대한 필요조건으로 ‘선재’를 선언하느지를 이 말이 설명해 준다. 끊임없는 투쟁이 가리키는 것은 지금부터 악순환의 신봉자는 이 다수의 타자성을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니체가 나중에 우연적 사례의 이론을 고찰할 때 다시 다룰 것이다. 102
의심의 여지 없이 니체의 이 ‘선재(preexistence)’는 자기-사본이 있기 이전에 자기-진본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라는 개념이 미리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말도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직관이다 ; 니체에게 선재는 자신일 수도 있었을 어떤 힘이, 자신의 실체로서 있다는 것이다. 그 힘은 마치 줄기세포처럼 무한한 것을 끌어안고서 무한하게 분열하는 힘이다. 크로소프스키는 니체의 이 개념으로부터, ‘재-의지’, ‘악순환’ 개념을 사유한다.
이 단편들은 바로 악순환의 사유를 발전시키 위한 새로운 요소들을 가져온다. 그것은 단지 불가역적인 시간에 직면한 의지가 더 이상 아니다. 의지는 징벌로서의 실존이라는 표상으로부터 치유되어, 이제는 의지되지 않은 것을 재-의지함으써 자신을 포획한 사슬을 끊고, 시간의 가역성 안에서 힘에의 의지로서의, 따라서 창조적 의지로서의 자신을 알아본다.//그 대신에 이 단편들이 중시하는 것은 실잰의 변화이다. 그 자체가 언제나 원환이므로, 스스로를 가역적인 것으로 원해서 개인으로부터 결정적인 한번의 행위들의 무게를 덜어주는 그러한 실존의 변화이다. 처음에는 견디기 어려웠던 고지, 즉 동일한 행위들의, 동일한 고통들의 무한한 되풀이라는 고지는 이제부터 속죄 자체처럼 여겨진다. 그때 영혼은 자신이 다른 개인들과 다른 체험들을 이미 주파했고 따라서 앞으로도 주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혼이 지금 여기에서 알고 있는 유일한 개인은 이제부터 그런 개인들과 체험들에 의해 깊어지고 풍부해진다. 이 유일한 개인을 준비했고 다른 개인들을 위해 이 개인을 준비하는, 의식은 생각지도 못한 그러한 개인들과 체험들에 의해서. 102
다시 해변가로. 바닷가에서 어떤 사람이 힘의 평면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달리 말해 그것은 무한을 만들어내는 무한한 힘의 평면으로서 내재성의 평면이다. 심지어 그것은 카오스 자체를 만들었고,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지금도 만들고 있다. 그는 이것이 물질을 만날 때 개체들,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다른 물건들이 만들어진다고 직관한다. 나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고통이다. 힘의 평면은 물체를 만나면서 어느 정도는 제자리를 맴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종의 임시 퇴각 없이는 어떠한 행위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그 사실만큼 반복되는 고통이다. 그렇지만 이 고통을 덜어준다, 이 힘의 평면이 이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무한히 무한을 반복하고 있기에 이런 생을 보존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것은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다른 물건들을 준비했고, 준비하고 있는, 생애이다. 의식은 생각지도 못한 모든 것들이 이 악순환을 올라타 있다.
크로소프스키를 따르면 니체는 베르그송보다 훨씬 더 이 힘의 장을 실존이 확인하는 순간을 믿고 있다. 그는 이렇게 니체를 분석한다.
재-의지, 악순환으로서의 순수한 귀의, 계열 전체를 한 번 더 재-의지하기, 모든 체험들을 재의지하기, 자신의 모든 행위들을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재-의지하기, 내 것이라는 이 소유격은 정확히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도, 목적을 표상하지도 않는다. 의미와 목적은 원환에 의해 청산됐다. 차라투스트라가 침묵하고 그의 메시지가 중단되는 것은 이때문이다. 그 자신의 비탄을 감당하는 폭소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103
결론
크로소프스키는 힘의 삶을 직관하는 방식으로서 시뮬라르크를 니체에게서 읽어낸다. 널리 알려져있듯이, 크로소프스키의 이 고찰은 매우 해박한 것이다. 시뮬라르크는, 내가 생각하기로, 실제로 창조하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 창조하기가 일견 의미론적으로 대조되는 모방하기라는 것, 이 사유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사실 니체가 이 충격을 자기 철학에 도입하는 이유는, 경화된 지성이 규정하는 창조에 대한 폄훼를 파쇄하기 위해서이다. 생명체의 창조적 진화와 그 산물들 자체를 무시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 니체가 보기에 경화된 지성이 만들어내는 코드들만을 해석하는 철학은 우리의 내재성을 감지할 수 없다. 지성은 오히려 그것들을 깨뜨리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간 지성이 저평가해왔던 여러 개념들을 복원해야 한다. 그 개념들을 복원할 때 내재성의 장을 훨씬 더 가까이서 고찰할 수 있다. 니체 뿐만이 아니라, 니체를 읽는 철학자들, 특히 크로소프스키가 그것을 증명해왔다.
앞서 보았듯이, 독존(infatuation)보다 선재를 말할 때에, 의지보다 재의지를 말할 때에, 진화보다 순환을, 특히 악순환을 말할 때에, 내재성이 그 자체로 무한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여기에 원본보다 시뮬라크르라는 것을 더해야 한다.
다시 바다로. 바다가 그저 평평한 풍경이라고 느낄 때보다, 끊임없이 무언가 솟아오르고 가라앉는 움직이는 주름이라고 느낄 때, 심지어 ‘새롭게’ ‘반복되는’ 괴물같은 덩어리라고 느낄 때, 드뷔시는 우리 누구나에게 있지만 우리 누구나가 새롭게 느끼는 바다를 작곡했다. 주름들이라는 시뮬라르크들과 바다라는 fantasme, 그리고 그 앞에서 느끼는 힘의 필연성 ; 한 순수한 사건이 드러나는 것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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