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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족이든 전승이나 전설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뿌리를 확실히 하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소망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해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은 과학적인 해명 따위는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의 논리성과 그들의 정신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한 이야기가 있으면 된다. 로마인에게 그것은 트로이 함락과 관련된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문학사상 최고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소아시아 서안의 풍요로운 도시 트로이는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그리스군의 공격을 받아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공방전도 드디어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변에 서있는 거대한 목마를 발견한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그리스군이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남긴 선물로 오해하고, 10년 동안이나 지켜온 트로이 성 안으로 목마를 끌어들이고 만 것이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고 생각한 트로이 병사들이 깊이 잠든 밤,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한 사람씩 땅으로 내려왔다. 화염과 아비규환에 휩싸인 트로이는 그날 밤에 함락되고 말았다. 왕족도 서민도 가차없이 살해되고, 목숨을 건진 자는 노예가 되었다. 이 같은 참극 속에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만이 일족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한다. 아이네이아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인간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데, 아프로디테는 자기 아들이 그리스 병사의 손에 죽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이네스아스 일행은 몇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불타는 트로이에서 탈출했다. 이들의 편력은 그리스의 여러 섬에서도 카르타고에서도 끝나지 않고, 신들이 이끄는 대로 이탈리아 서해안을 북상하여, 로마 근처의 해안에 이르러서야 겨우 끝난다. 그 땅의 왕이 아이네이아스에게 반하여 딸을 아내로 주었기 때문이다. 조국을 떠나 떠돌던 유민들은 드디어 정착할 땅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네이아스가 죽은 뒤에는 그와 함께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아스카니오스는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그 땅을 떠나 알바롱가라고 이름 지은 새 도시를 건설한다. 이것이 뒷날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였다. 이때부터 로물루스가로마를 건국할 때까지 오랫동안 많은 건설적인 왕들이 잇따라 등장하지만, 그 사연을 일일이 기술하는 곳은 그만두기로 하겠다. 낯선 이름을 나열하여 독자를 따분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인이 억지로 꾸며낸 대목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로마인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이고, 그 로물루스는 트로이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네이아스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리스와 교류를 갖기 시작한 뒤, 로마인은 트로이 함락이 기원전 13세기 무렵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로마인은 400여 년의 공백을 메울 필요에 쫓겼지만, 그래도 별로 난감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승과 전설의 세계에서는 합리적인 것보다 오히려 황당무계한 것이 더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전설은 그 공백기를 적당히 소화한 다음, 한 왕녀의 등장을 맞이했다. 알바롱가의 왕이 죽자, 동생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조카인 왕녀를 처녀인 채신을 섬기는 무녀로 만들어 버렸다. 왕녀가 아들을 낳으면, 왕위를 찬탈한 숙부가 난처한 입장에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을 섬기는 틈에 잠깐 강가에서 잠이 든 왕녀한테 군신 마르스가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마르스는 하늘에서 내려와 왕녀와 사랑을 나눈다. 왕녀가 잠에서 깨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니까, 이런 것을 두고 신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는데, 왕녀는 그 쌍둥이에게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숙부는 격분했다. 왕녀는 감옥에 갇히고, 쌍둥이는 바구니에 담긴 채 테베레 강에 띄어졌다. 갓난아기가 든 바구니는 테베레 강 어귀까지 떠내려가, 강가의 갈대숲에 걸려 멈추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늑대가 안에서 나는 젖먹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두 아기에게 젖을 물려 굶주림에서 구해준 것은 바로 이 어미 늑대였다. 물론 그 후에도 줄곧 젖을 먹고 자랐다면 곤란하게 되었겠지만, 늑대 다음에는 양치기가 쌍둥이를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가서 길렀다. 지금도 로마 시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양떼를 자주 볼 수 있지만, 2천 800년 전에는 양떼가 그 지역의 주인공이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성장하여 그 일대 양치기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과의 투쟁을 거듭하면서 차츰 세력권을 넓혀간 것이다. 세력권이 넓어지면 새로운 정보도 들어오게 마련, 이리하여 형제는 자신들의 출생에 얽힌 비밀도 알게 되었다. 형제는 부하들을 이끌고 알바롱가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싸움에 이겨서 왕을 죽였다. 어머니는 이미 옥중에서 죽은 뒤였다. 그러나 형제는 알바롱가에 머물지 않았다. 산지에있는 알바롱가는 비좁고, 방어하기에는 적합하지만 발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두 사람이 자란 곳은 테베레 강 하류였다. 곧로마라고 불리게 된 그 땅에 두 사람은 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알바롱가의왕을 처단한 뒤에는, 그때까지의 부하들 외에 부근의 양치기와 농민들까지 이들 형제를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 형제 사이가 나빠졌다. 쌍둥이였기 때문에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고, 이런 난점이 둘 사이가 나빠진 원인이었다. 형제는 분할 통치를 하기로 하고,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에 각각 세력기반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싸움은 곧 재발한다. 세력권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로물루스가판 도랑을 레무스가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의 권리에 대한 침해 행위였고, 로마인이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였다. 건설자 오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로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때는 기원전 753년 4월, 그리스에서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 경기도 어느덧 6회를 지나,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벗어난 역사시대에 들어서 있었다.
기원전 8세기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는 북국과 남국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북국의 이점과 남국의 이점을 둘 다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이점은 상호작용으로 증대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한복판에 자리잡은 로마의 지리적 이점은 유일무이한 것이 된다... . 신기와도 같은 인간의 지혜가 이렇게 유리한 지세와 온난한 기후의 혜택을 받은 이 땅에 로마인의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지 800년 뒤인 제정로마 초기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도시계획 전문가의 눈으로 위와 같이 말했다. 듣고 보니, 과연 로마의 입지조건은 매우 훌륭하다.
국가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수도 건설지로서 이탈리아에서는 로마를 따라갈 곳이 없다. 로물루스는 장군의 재능만이 아니라 도시설계자의 재능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솟아난다. 로마가 도시 건설지로서 이만큼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왜 로물루스 이전에는 이곳에 도시를 세운 사람이 없었을까. 최근의 고고학적발굴로 기원전 11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조잡한 무덤과 주거지가 발견되고 있으니까, 누군가가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도시라고 부를 만한 흔적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그 땅에 주목한 최초의 사람은 역시 로물루스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물루스가 전설상의 인물이고 실존했는지 여부가 불확실하다면,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살았던 아무개라고 해도 좋다. 기원전 8세기 중엽의 이탈리아 반도에는 입지조건만 좋으면 당당한 도시도 쉽게 건설할 수 있을 만한 경제력을 갖춘 민족이 적어도 두 개는 존재했다.
중부 이탈리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과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한 그리스인이 그렇다. 그런데 이 두 민족은 로마에 대해서는 전혀 욕심을 내지 않았다.
당시 로마는 일곱 언덕을 제외한 저지대는 모두 습지대였지만, 에트루리아인은 간척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상상하건대, 기원전 8세기 중엽뿐 아니라 그 후에도 꽤 오랫동안 로마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에게는 별로 매력이 없는 땅이었던 것 같다. 그리스인은 통상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해양민족이었다. 바다에 면한 항구를 도시의 필수요건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들에게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닿을 수 있는 로마는 도시 건설지로는 부적격지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스인이 남부 이탈리아에 건설한 대표적인 식민도시는 시라쿠사이(오늘날의 시라쿠사)와 타렌툼(오늘날의 타란토) 및 네아폴리스(오늘날의 나폴리)인데, 이 도시들은 모두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에트루리아인도 산업과 통상을 주로 하는 민족이었지만, 도시 건설에 관해서는 그리스인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높직한 언덕에 도시를 건설한다.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도 배후에 언덕이 없는 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언덕위에 성벽을 두른 경고한 도시를 세워 거기에 틀어박히고 평지에는 살려고 하지 않는 그들의 성향은 피렌체만 보아도 분명하다. 피렌체는 에트루이아인에게 기원을 둔 도시지만, 그들이 거주한 곳은 피에솔레 언덕이다. 아르노 강 연변에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피렌체 시가지는 로마인의 건설할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에트루리아인이 보기에, 로마의 일곱 언덕은 한결같이 너무 작고 너무 낮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나쁜 점은 일곱 언덕이 서로 너무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에트루리아인은 꼭대기가 널찍한 언덕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산재해 있는 중부이탈리아 지방에 뿌리를 내린다. 오늘날에도중간 정도의 도시로 건재해 있는 시에나, 볼테라, 페루자, 키우시, 오르비에토는 모두 고대국가 에트루리아에 기원을 둔 도시들이다.
그래서 열차역에 내려도 금방 시내로, 적어도 구시가지로 나갈 수는 없다. 버스를 타고 능선을 따라 언덕마루까지 올라가야만 겨우 시가지에 닿을 수 있는 것이 이 도시들이다. 이런 도시를 여행하면서, 나는 어째서 일부러 이런 곳에다 도시를 세웠을까 하고 의아해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도시를 건설하는 조건도 물이나 기후 같은 자연조건 외에 민족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도시 건설에 나타난 사고방식의 차이가 이 세 민족의 이후의 운명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방어에는 완벽하지만, 발전을 저해받기 쉬운 언덕을 좋아한 에트루리아인. 방어가불완전한 곳에 도시를 건설한 덕분에 결과적으로 밖을 향해 발전하게 된 로마인. 통상에는 편리하지만, 자칫하면 적의 존재를 잊게 만드는 바닷가에 도시를 세운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공과대학의 도시공학과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우선철학이나 역사 같은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좋다. 도시를 어디에 세우느냐에 따라 주민의 장래가 결정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인
에트루리아인의 문자는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에트루리아인을 수수께끼의 민족이라고 불렀다. 에트루리아라는 나라의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이들을 에트루스크라고 부르지만, 이것도 고유한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대에도 오늘날의 토스카나 움브리아 및 라치오 북부를 합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을 통틀어 에트루스크, 즉 에트루리아인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미국에 사는 사람을 모두 미국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에트루리아인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소아시아에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고, 내륙지방에서 남하해 왔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기원전 9세기에는 이미 철기 제조법을 알고 있었다.
중부 이탈리아에는 광산이 많이 분포되어있었다. 이 지방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은 이 천연의 혜택을 활용한다. 그들은 당장 우수한 기술자가 되었다. 기술력의 향상은 경제력향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역시 경제력이 강한 그리스인과의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졌다. 에트루리아의 유물 중에는 그리스제 항아리가 놀랄 만큼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도 남부 이탈리아에 있던 그리스 식민도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 본토에서 만들어진 제품이다. 언덕 위에 살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항구를 가지고 있었던 에트루리아인은 산업 외에 해상무역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풍부한 광산이 있는 엘바 섬은 물론, 코르시카 섬과 사으데냐 섬에도 발길을 뻗쳤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 일대의 바다를 테레니아 해라고 부르는데, 티레니아 해는 '에트루리아인의 바다'라는 뜻이다.
기원전 8세기, 그들의 세력권은 북쪽의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 강과 남쪽의 로마를 흐르는 테베레 강 사이의 전역에 걸쳐 있었다. 이 지역에 지금도 남아 있는 도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두 고대국가 에트루리아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도시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고대의 에트루리아는 12개 도시국가의 연방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12개 도시 국가 가운데 알려져 있는 것은 아레초, 볼테라, 키우시, 비테르보, 오르비에토, 타르퀴니아, 체르베테리, 베이, 페루자 등 9개다. 이들 가운데 7개 도시가 지금도 건재하다. 에트루리아는 연방제였지만, 각 도시국가는 독립적인 경향이 강해서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 정도였고, 정치나 경제나 군사에서는 일치된 행동을 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12개 도시국가 가운데 어느 도시도 다른 도시들을 제압할 만한 힘을 갖지 못했고, 그 때문에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도시도 없었다. 이것이 나중에는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에트루리아인은 사람이 죽으면 땅 속에 매장했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도 복잡하다. 땅 위에 있는 주택을 축소하여 그대로 땅 속에 세운 듯한 느낌이다. 유력자의무덤은 벽화의 색채도 화려하고 부장품도 호화롭기 짝이 없다. 이런 것을 보면, 에트루리아인은 싸움을 좋아하지 않고 평화를 사랑하며 기술과 통상만으로 번영을 이룩한 평화적인 민족이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특히 그들의 조각품이 보여주는 온화한 모습은 그것을 보는 우리의 마음까지 부드럽게 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 뒤의 삶이라는 꿈에 바쳐진 장식이다. 실제의 에트루리아인은 다른 민족에 비해 특별히 평화적이지도 않았고, 싸움을 싫어하는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에트루리아인은 티레니아 해의 제해권을 둘러싸고 카르타고 및 그리스와 격전을 벌린 일도 있다. 산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풍습도 있었다. 고대로마인은 사람과 맹수가 싸우는 것을 보면서 열광했지만, 이 구경거리도 원래는 에트루리아인이 즐긴 경기였다. 또한 무덤 벽화에 그려진 향락적인 생활상을 보고, 그들이 쾌락에 탐닉하고 노동을 싫어하는 성격이었을 거라고 상상하면 잘못이다. 그들은 기술력을 자랑할 정도로 근면했고, 그런 면에서의 진취적인 기질은 단연 뛰어났다. 이런 에트루리아인이 로마인에게 미친 영향은 많은 점에서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에트루리아의 세력은 로마 따위는 감히 따라가지도 못할 만큼 막강했다. 전성기에는 남부 이탈리아에까지 세력을 떨쳤다. 이 시대에 포 강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는 북쪽의 에트루리아와 남쪽의 그리스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로마는 이 양대 세력권 사이의 골짜기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기원전 8세기의 그리스는 귀족이 통치하는 도시국가(폴리스) 시대에 접어들어 있었다. 농업과 목축업을 주로 하던 왕정 시대에 비해 공업과 상업 및 해운업에까지 손을 뻗친 덕분에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그에 따라 인구도 급속히 늘어났다. 하지만 귀족정치의 숙명인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사람과 경제발전 과정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싸움도 계속 증가했다. 경작지가 별로 없는 그리스에서 이런 사람들은 국외로 나가는 것 밖에는 살아갈 길이 없었다. 기원전 8세기는 그리스인의 식민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그들의 특징인 진취적 정신과 모험을 좋아하는 성향이 여기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스인의 식민지 건설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 골고루 미쳤다. 동쪽으로는 흑해 연안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프랑스에서 에스파냐에 이르렀다. 에스파냐의 말라가와 프랑스의 마르세유도 이 시기에 세워진 그리스 식민도시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가깝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식민도시 건설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왕성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기원은 몇몇 카르타고계 도시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그리스계가 차지하고 있다. 나폴리, 타란토,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페스툼과쿠마이,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 시라쿠사, 아그리젠토 등등. 이런 도시들을 통틀어 '대 그리스'(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불렀다.
'대 그리스'라고 부른 이유는 이런 도시들이 급속히 발전하여 단기간에 풍요로운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미 높은 문명을 가진 그리스인이 정착했으니까, 모든 면에서 시행착오가 없다. 또한 원주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원주민과의 관계로 고심할 필요도 없었다. 조국을 버리고 왔기 때문에, 여기서 실패하면 돌아갈 곳도 없다. 급속한 번영의 요인은 지나칠 만큼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이런 식민도시와 모국의 관계도 독립심이 왕성한 그리스인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 타란토 사람들에게 스파르타는 타국이었고, 시라쿠사 사람들에게 코린트는 타국이었다. 그래도 교류는 활발했다. 그리스인은 육지를 가는 것 보다 훨씬 가벼운 기분으로 배에 돛을 다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로 이주한 그리스인은 또 한 가지 점에서도 역시 그리스인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지만, 단결심과는 인연이 멀었다. '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도 서로 힘을 합하여 공동으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갓 태어난 로마가 북부의 에트루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라는 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로마의 독립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로마에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자기네 세력권 안에 넣고 싶어 할 만한 매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팔러 다니는 상인은 물건을 사주지도 않고 팔 물건을 만들지도 못하는 사람한테는 처음부터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 농업과 목축밖에 모르는 로마인은 아테네의 장인이 만든 아름다운 항아리를 살돈도 없었고, 에트루리아에서 만든 정교한 금속기구를 살 돈도 갖고 있지 않았다. 요컨대 로마인은 상인에게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바다와 가깝지도 않고 방어에도 적합하지 않은 로마는 그리스인이나 에트루리아인이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할 매력도 없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에트루리아인은 해로를 택하지 않으면 육로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지만, 로마 근처에 와도 테베레 강에 떠 있는 작은 섬을 지나 강을 건너서 그리스인이 있는 남쪽으로 갈 뿐이었다. 말하자면 로마는 강을 건너기 쉬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통과점에 불과했다. 통과점이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말없이 보내주기만 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로마는 유년기에 강대한 적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바다를 겁내지 않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을 이어 주는 간선통상로는 그 당시에는 역시 바다였다.
건국의 왕 로물루스
로마에 있는 일곱 언덕은 모두 테베레 강 동쪽 연안에 모여 있다. 테베레 강은 로마를 지나 30킬로미터쯤 흘러서, 오스티아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든다. 아펜니노 산맥에서 비롯하여 3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흘러온 이 강은 대하라고 부를 수 있는 강은 아니지만, 그래도 로마 근처에 이를 무렵에는 수량이 크게 늘어난다. 수량이 풍부한 테베레강은 로마 근처에 이르면 크게 서쪽으로 우회한 다음 동쪽으로 우회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우회하면서로마에서 멀어진다. 이렇게 우회하던 물줄기도 홍수가 일어나면 당장 굵은 직선의 흐름으로 바뀌어, 곧장 지중해로 흘러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곱 언덕은 강 근처에 있으면서도 홍수 피해를 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강이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지점 언저리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는 저지대에도 사람이 살 만큼 인구가 늘어났을 무렵에는 로마의 국가체제도 확고해져 대규모 치수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홍수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졌다. 일곱 언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퀴리날리스(이탈리어로는 퀴리날레), 비미날리스(비미날레), 에스퀼리누스(에스퀼리노), 카피톨리누스(카피톨리노), 팔라티누스(팔라티노), 카일리우스(첼리오), 아벤티누스(아벤티노)로 내려온다. 언덕과 언덕 사이의 평지는 아직 습지였다. 일곱 언덕은 모두 낮아서, 가장 높은 카피톨리노 언덕조차도 해발 50미터밖에 안 된다. 에트루리아인이 도시를 세운 언덕은 모두 해발 300미터 내지 500미터 정도였다. 덧붙여 말하면, 현대 이탈리아의 대통령 관저는 퀴리날레 언덕에 있다. 선거 업무를 담당하는 내무부는 비미날레 언덕 위에 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도 대통령 관저에서 중계한다고 말하는 대신 퀴리날레에서 중계한다고 말하고, 선거 속보를 알릴 때에도 내무부라고 말하지 않고 비미날레에서 중계한다고 말한다.
다시 2천 8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도시 건설의 조건 가운데 방어를 가장 중시한다면, 일곱 언덕 중에서는 카피톨리노 언덕이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어느 언덕보다도 테베레 강과 가까울 뿐 아니라, 삼면이 깎아지른 벼랑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대기의 평지가 너무 좁았다. 오늘날에도 로마 시청과 미술관 두 개와 교회가 들어서 있을 뿐인데도 더 이상 여유가 없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별로 높지는 않지만 언덕 위의 면적이 10헥타르나 되고 테베레 강과도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을 선택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신들의 거처로 예정되었다. 역시 테베레 강과 가깝고 사람이 거주할 면적도 충분한 아벤티누스 언덕은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기 때문에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로물루스와 싸우다 죽은 레무스가 택한 것이 바로 이 아벤티누스 언덕이었다. 레무스가 죽고 유일한 왕이 된 로물루스는 우선 팔라티누스 언덕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신들에게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도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날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이었다고 한다. 이 로마 건국기념일은 그 후 2천 년이 넘은 오랜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해마다 축하되는 명절이 되었다, 그 해에 로물루스의 나이는 열여덟, 이 약관의 젊은이와 그를 따라온 3천 명의 라틴족에 의해 로마는 건국되었다.
로마를 건국하고 초대 임금이 된 로물루스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는 왕이 되지는 않았다. 국정을 3개의 기관에 나누어준 것이다. 왕과 원로원 및 민회. 이 3개의 기둥이 로마를 떠받치게 되었다. 종교제의와 군사 및 정치의 최고 책임자인왕은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양치기와 농민의 우두머리였던로 물루스 자신이 제멋대로 왕이된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 뽑혀서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민회에서 왕을 선출한다는 왕정답지 않은 이 제도도 당시 로마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로물루스는 100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각 가문의 어른을 모으면 그 정도 숫자가 되었던 게 아닐까. 원로원 의원은 정부의 관직이 아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따라서 민회의 선거를 거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원로원이라는 공적 기관에 속해 있었다. 유력자들의 조언을 수렴하는 것이 목적인 기관이지만, 정치체제 확립을 중시한다면 공적인 지위를 주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적 기관은 역할도 책임도 명확하지 않고, 따라서 조언을 받는 쪽- 이 경우에는 왕 개인-의 기분에 좌우되기 쉽게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테르'라고 불렸다. 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낱말에서 귀족을 뜻하는 '피트리키'라는 낱말이 생겨났다. 민회는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되었다. 왕을 비롯한 정부관리를 선출하는 것이 민회의 역할이다. 다만, 민회는 정책을 입안할 권리는 갖지 못했고, 왕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입안한 정책을 승인할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를 결정했을 뿐이다. 전쟁을 할 때도 그들의 승인이 필요했고, 외국과 강화를 맺을 때도 그들이 승인해야만 비로소 효력이 발휘되었다. 로마라는 국가의 기본 형태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당시의 로마 실정에 적합하고 장래에도 적응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고 무리가 적은 정치체제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로물루스와 함께 로마 건국에 참여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왕이 되기 전의 로물루스가 이끌었던 양치기와 농민들이 라틴이라는 이름의 민족이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라틴족은 라틴어를 사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라틴어를 사용하는 민족 가운데 한 부족이 가족과 함께 테베레 강가로 이주해 와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은 아니다. 로마가 탄생한 직후, 로마 시민의 대부분은 독신 남자였던 것 같다. 정치체제를 확립한 뒤, 로물루스가 수행한 두 번째 사업은 바로 이민족 여인들을 강탈하는 일이었다.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폭력까지 동원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여자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남자들의 집단이었다면, 그들의 정체에도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각자의 부족에서 밀려난 자들이 아니었을까. 부족단위의 이주라면, 처자를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위대한 로마의 건국담으로는 아무래도 너무 허술하고, 무엇보다도 자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며 트로이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의 편력 담이 고안되고, 그것과 로물루스가 결부된 게 아닐까.
신화와 전설의 가치는 그것의 사실 여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믿어왔는가에 있다. 로마인은 줄곧 자기네가 트로이 영웅의 후예라고 믿었고, 그리스인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자행한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은 푸생이나 루벤스 같은 후세 화가들한테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게 되는데, 고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줄거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인근에 사는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했다. 신에게 바쳐진 축제일에는 전투가 금지된다. 사비니족도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여온 가족이 로마까지 찾아왔다. 축제기분이 고조되었을 무렵, 로물루스의 명령에 따라 로마의 젊은이들은 사비니족 아가씨들에게 덤벼들었다. 느닷없이 허를 찔린 사비니족 남정네들은 아내와 자식과 노인들을 보호하면서 자기네 부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비니족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들은 로마인에게 강탈당한 여인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로물루스는 정식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삼겠다고 대답했다. 대답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솔선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로물루스 자신도 총각이었을 것이다. 사비니족은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로마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로마인과 사비니족은 통틀어 네 번 전투를 벌였다. 그 대부분은 로마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지만, 한 번은 팔라티누스 언덕과 카피톨리누스언덕 사이에서 전투를 치렀다니까 사비니족이 로마로 쳐들어온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네 번째 전투가 한창일 때, 강탈당한 사비니족 여인들이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저마다 남편과 오라비가 서로 죽고 죽이는 곳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호소했다. 여인들은 비록 강탈당한 몸이긴 하지만 노예가 된 것은 아니고, 아내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인 남편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로물루스 왕도 사비니족의 타티우스왕도 그녀들의 호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두 부족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다.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다. 그 사건 이후 시작된 로마인의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로물루스가 후세의 로마인에게 남긴 관례는 남편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것만은 아니었다. 로물루스는 사비니족에게 서로 세력권을 존중하여 공존하는 형태의 화평이 아니라 두 부족이 하나로 합치는 형태의 화평을 제안했다. 부족 전체가 로마로 이주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곱 언덕가운데 하나인 퀴리날리스 언덕을 사비니족의 주거지로 제공했다. 사비니족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로마인이 네 번의 전투를 모두 이겼기 때문에, 사비니족으로서도 강자인 로마와 합칠 경우의 이익을 계산했을 것이다. 게다가 로마에 합병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대등한 입장에서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로물루스와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결국 로마는 두 명의 왕을 모시게 된 셈이다. 또한 사비니족의 자유민에게는 로마인과 똑같은 완전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사유재산에 관한 모든 권리와 함께 민회에서의 투표권도 갖게 된 것이다. 사비니족 장로들에게는 원로원 의석도 제공되었다. 로물루스로서는 인구 증가와 병력 증강을 위한 방책이었겠지만, 이 방식은 당시 로마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건국자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로물루스가 이룩한 또 하나의 업적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이었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곧 전사했기 때문에, 전투는 거의 대부분 로물루스가 지휘했다. 37년에 걸친 로물루스의 치세는 대부분 신생국가의 숙명이기도 한 인근 부족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100명의 병사로 편성된 백인대 제도를 고안해낸 것도 바로 로물루스였다. 이것은 로마 군단의 최소 단위이자 핵으로써, 로마가 존재하는 한 백인대 제도도 계속 존속하게 된다. 거듭된 전투로 전사자도 적지 않았을 터인데, 로마의 인구와 전력은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증가했다. 사비니족과 합친 것은 단기적으로 보아도 성공이었던 셈이다.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39년째를 맞이한 기원전 715년, 로물루스는 여느 때처럼 군대를 열병하고 있었다. 그때 온 하늘이 별안간 흐려지면서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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