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가는 사람 따로 있었다
권영국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 연기 둥근 너의 얼굴 보이고 넘치는 술잔에 너의 웃음이...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헤어짐의 아쉬움과 우정, 그리고 군복무의 비장한 각오가 표현된 입영전야란 노랫말의 일부분이다.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움, 힘든 훈련과 얼차려 등 말로만 듣던 군 생활에 대한 두려움 속에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은 이 노래를 합창하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훈련소로 떠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와의 긴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젊은이들은 군입대를 반갑지 않은 인생의 장애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군생활이 젊은 시절에 새로움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3년이라는 기간이 짧은 청년기에서 너무나 길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고려시대 사람들의 군대 생활은 어떠하였을까? 어떤 사람들이 군대에 갔고, 복무 기간은 얼마 동안 이었으며, 군량과 무기는 어떻게 마련하였는가? 등의 여러 의문을 오늘날과 비교하면서 살펴보자.
어떤 사람들이 군대에 갔나
오늘날의 의무병제 아래에서도 권력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여러 편법을 동원해 군역의 의무를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 권력층이나 부유층 자제들의 현역입영 비율이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최근의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양반 신분과 평민. 천민.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했던 고려시대에는 군대에 가는 계층부터 오늘날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모든 양인 남자는 일단 법제상으로는 모두 군대에 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특권 지배층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군대에 가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과거나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어 군대에 가지 않았다. 설령 군인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특별한 군사조직에 편입되거나 장교로 진출하여 일반인이 지는 힘든 군역은 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군대에 갔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 그 동안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들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군사력의 중심을 이루는 중앙군은 농민이었다고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군과 지방군 모두 일반 농민 출신의 군인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전자는 신라 말기 중앙 귀족이나 지방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이 후삼국의 전란 속에서 점차 전문적인 군인이 되고 신분도 아울러 향상되어 일종의 특수한 신분층을 이루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군인을 핵심적 지배층인 문무 양반 속에 끼지는 못했지만 말단 지배층에 포함되는 중간 계층으로 이해한다.
후자는 군인이 농민으로 구성되었다고 이해한다. 평상시에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군인이 되어 개경에 올라가 도성을 지키거나 변경에 나아가 국경을 지켰다고 본다. 이처럼 지금까지 연구자들을 군인의 존재를 둘러싸고 그 신분을 두 가지로 각기 달리 파악해 왔다.
평상시엔 농민으로, 순번제로 군인되어
최근에는 위의 두 견해를 절충하여 오늘날의 직업 군인과 같은 전업 군인과 일반적인 의무 군인의 두 부류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추세이다. 그러나 이처럼 두 부류의 군인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전체 군인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농민 출신의 의무 군인이었고 이들이 국방력의 중심을 이루었으므로 결국 고려시대의 군인은 병농일치의 존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양인 농민이 다 군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서 군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일부만이 군인이 되었다. 즉 군대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비교적 부유한 농민들이 군인으로 징발되었는데 이들을 정호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워 생업을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어서 군대 생활을 감당하지 못하는 농민은 군인이 되는 대신 조, 용, 조 3세로 불리는 조세의 의무를 졌다. 이들을 백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정 농민도 언제든지 군인이 될 수 있는 후보자로서 군인이 부족한 비상시에는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이 경우 국가에서 토지를 지급하여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군대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군인이 된 기본 계층은 농민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6품 이하의 양반, 향리, 노비 등도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오면서 모든 농민층이 군인의 징발 대상이 되었다. 즉 농업 생산력의 발전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안정되면서 그동안 농민층 내에 존재하던 정호와 백정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모든 백성이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점차 강화되면서 그동안 사실상 군인으로 징발되지 않았던 양반층의 상당 부분이 군인으로 징발되거나, 간접적인 형태로 군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기에는 거의 군인으로 징발되지 않던 노비도 일부가 군사조직 속에 편입되게 되었다.
군대 생활은 얼마 동안 하였나
오늘날 군인들의 복무기간은 육군이냐, 공군이냐, 해군이냐 또는 현역이나 보충역이냐 등의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6개월에서 30개월 정도이다.
고려시대 군인의 복무기간은 원칙적으로 16세에서 59세까지였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군대 생활로 보내는 셈이다. 물론 지금도 현역으로 제대한 후에는 예비군이 되어 1년에 며칠씩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고, 또 제대 후 8년 동안 예비군으로서의 의무가 끝난 다음에는 민방위에 편성되어 40세에 이르기까지 1년에 몇차례씩 소집에 응하여야 한다.
군인들의 복무 기간이 16세에서 59세까지라고 하여도 44년간을 계속 군대에 매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3년에 한 번씩 교대로 개경에 올라가 경비하거나 양계 지역에 들어가 국경을 방어하였다. 따라서 16세에서 59세에 이르기까지 1년은 군복무를 하고 2년은 자신의 고향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식의 군대 생활을 반복하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4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러한 군복무를 계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20, 30대의 건장하고 젊은 동안에는 3년에 한 번씩 교대로 개경에 올라가 경비하거나 변경에 나아가 국경을 지키는 군 생활을 반복하였겠지만, 고된 군복무를 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면 오늘날 예비군과 비슷한 군사조직에 편입되어 자기 고향에서 향토를 지키거나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정도의 가벼운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오늘날의 군복무 기간인 2, 3년에 비하면 엄청나게 긴 기간 동안 군 생활을 하여야 했다.
군사 조직은 어떠 하였나
군사 조직에는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이 있었다. 2군 6위로 구성된 중앙군은 그 기능에 따라 국왕과 궁성을 호위하는 부대와 수도 개경을 경비하는 부대로 구분되었다.
2군 6위의 전체 병력은 편제상으로 4만 5천명이었다. 그 가운데 3만 8천명은 지방에서 교대로 개경에 올라와 도성을 경비하는 농민 의무병이었으며, 나머지 7천명 정도는 직업군적 성격의 전업군인이었다.
지방군은 지역에 따라 남도의 주현군과 국경의 주진군으로 구분되었다. 주현군은 보승군, 정용군, 일품군 등 오늘날의 현역병과 같은 성격의 군인과 2, 3품군으로 불리는 예비군적 성격의 군인으로 나뉘었다. 주진군은 동북면과 서북면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초군, 좌군, 우군, 보창군, 영새군 등의 여러 부대로 조직되었다. 특히 국경지역에는 토착주민으로 조직된 주진군 이외에 남도 주현에서 교대로 수자리하러 오는 방수군이 주둔하였다.
주현군의 수는 현역병이 약 5만여 명 정도였고 예비군의 성격의 군인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한편 국경지역은 적과 바로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장정이 주진군 조직 속에 편입되어 그 수는 약 14만명 정도였다.
군복무 중에 하는 일들
군대 생활은 형식이나 절차, 내용 등에서 오늘날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방에 배치되어 휴전선을 지키거나 후방에서 향토를 방위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고려와 같은 왕조국가에서는 국경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국왕이 거처하는 궁성과 도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따라서 수도인 개경에는 많은 군인을 배치하였다.
군복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부대와 병종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먼저 중앙군인 2군 6위의 주된 임무는 왕실과 도성을 경비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2군은 국왕의 신변과 궁성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6위는 개경을 경비하고 도성 안의 치안을 유지하였다.
중앙군의 또 하나의 임무는 양계 지역에 들어가 국경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국경의 수비는 1년을 단위로 교대하였는데 비상시에는 그 기간이 더 길어졌다. 이것은 군인의 임무 가운데 가장 힘들고 무거운 것이었으며 복무 기간 중이나 왕래하는 도중에 죽는 군인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이들의 시체를 수송해 주고 장례비용을 지급해 주는 등 군인 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를 하였다.
이들은 또한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다. 이러한 출정시에는 중군, 좌군, 우군, 전군, 후군의 5군이나 중군, 좌군, 우군이 3군으로 편제되었다.
지방군 역시 병종과 부대에 따라 임무에 차이가 있었다. 남도의 주현군 가운데 보승군과 정용군은 교대로 개경에 올라와 자신이 속한 중앙의 6위에 각기 소속되었다. 이 밖에 그들은 중앙과 지방의 각종 노역에도 동원되는 한편 일부는 교대로 지방관아 소재지에 나아가 향토방위와 치안을 유지하였고 비번시에는 거주지에서 생업에 종사하였다.
주현군 가운데 1. 2. 3품군은 성을 쌓거나 다리를 놓거나 궁궐을 짓거나 제방을 쌓는 등의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들 품군도 비상시에는 모두 전투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주진군의 임무는 국경 지역의 방어였다. 이들은 성을 견고히 하여 굳게 지켰다.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고 등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들을 매번 물리칠 수 있었던 저력은 다름 아닌 이 주진군의 활약에서 나왔던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품군이라는 노동부대가 따로 조직된 것이 한 특징이기도 하였지만, 일반 군인들도 중앙이나 지방에서 벌어지는 온갖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이러한 노역동원에 대한 군인들의 누적된 불만은 무인정변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되기도 하였다.
군량과 무기는 어떻게 마련하였나
오늘날에는 군에 입대하면 자신이 입고 간 옷이나 신발을 비롯한 소지품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군 생활에 필요한 군복. 군량. 무기 등 군수품 일제를 국가로부터 지급받는다. 몇 푼 안 되는 액수이지만 월급까지 받는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군복이나 군량은 물론 무기까지도 군인이 스스로 마련해야 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이러한 군수품들을 어떻게 마련하였을까?
고려사에서 “국가는 기름진 땅을 나누어 42도부 갑사 10만여 인에게 녹으로 주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옷과 양식과 무기가 모두 토지에서 나와 국가에서 따로 군사를 양성하는 비용이 없었다”라고 한 것처럼, 국가에서 군량. 의복. 무기 등을 지급하는 대신 군인전이라는 명목의 토지를 지급하여 군복무에 필요한 비용을 군인 스스로 조달할 수 있게 하였다.
군인전은 전업 군인과 의무 군인 모두에게 지급되었는데 지급 규정이나 토지 지배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전업 군인의 군인전은 관리에게 지급되는 토지와 마찬가지로 전시과 규정에 따라 지급 되었다. 이들의 군역은 문무관리의 관직과 같은 직업의 성격을 띤 것이므로, 이들의 군인전은 관리에게 지급된 토지와 성격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토지는 원칙적으로 자기 소유토지에 대해 수조권을 지급하는 형태로 조세를 면제받았다. 그러나 토지가 없거나 부족한 경우에 한해 타인의 토지에서 수조권을 지급받았다.
의무 군인도 역시 군인전이라는 토지를 지급받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지급된 군인전은 전업 군인에게 지급된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이들은 일정한 규모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부농층이었으므로, 이들의 군인전은 본래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군인전이라는 명목을 붙여 조세를 면제해 주는 것이었다.
전업 군인은 직업 군인이었으므로 복무하는 기간 내내 군인전을 보유하였던 반면에, 의무군인의 경우는 실제 군인으로 복무하는 기간에 한해 군인전을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개경에 올라가 도성을 경비하거나 변경수비에 나아간 기간에 한해서만 그의 소유토지에 대해서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복무 기간 동안의 군인전 경작과 군량 수송 등을 위해 군인을 도와주는 양호를 지급하였다. 따라서 의무 군인의 경우 16세에서 59세까지 군역을 지는 기간이라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군복무를 하는 기간에 한해서만 군인전을 지급하였고 나머지 기간에는 일반농민과 마찬가지로 조. 용. 조의 3세를 비롯한 각종 국역을 부담하였다
군인전의 지급 액수는 지급 시기와 병종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전시과에 규정된 전업 군인의 경우 대체로 20결에서 25결 내외를 지급받았다. 그런데 고려 후기 공민왕때에 ‘예전에 국가에서 토지 17결을 1족정으로 삼아 군인 1정에게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전시과 규정과는 다른 계통의 자료로 바로 이것이 의무 군인에게 지급한 군인전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즉 전업 군인이 아닌 의무 군인에게 17결을 1족정으로 하는 군인전을 지급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의무 군인들은 대부분 17결, 즉 1족정의 토지를 지급받지 못하였다. 족정과 반정이라는 구분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부분의 군인전은 족정인 17결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미치지 못하는 7, 8결 정도의 토지를 반정이라 불렀다.
1결의 면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약 1,500평 정도로 보는 견해에 따른다면 반정을 받은 대부분의 의무 군인은 약 1만평 정도의 토지를 군인전으로 받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