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로 이어지는 김영춘의 [홍도야 울지 마라!]와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로 이어지는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에 얽힌 사연을 2004년 8월 [홍도]와 [흑산도]여행을 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서 정리해 보았다.
이 글의 제일 밑에 부분으로 내려가면 [노래따라 사연따라 1] 바로 아래 목록에서 [홍도야 울지마라!를 뒤로 하고...]를 보실 수 있습니다.
♣ 「홍도야 울지 마라」
신파극의 대명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주제가이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위해 기생이 된 [홍도]의 한 많은 사연을 담은 노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와 서해안의 섬 [홍도]와는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조사를 해 본 결과,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기생의 이름이 [홍도]일 뿐이지 섬 [홍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 ~ ♩♪♬ ~
구름에 쌓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거둬주는 바람이 분다
♩♪♬ ~ ♩♪♬ ~
노래는 영화 속의 다른 주제가들과 달리 연극주제가란 점이 독특하다.
그 연극은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1936년 7월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전용극장이었던 동양극장에서 전속극단 ‘청춘좌’에 의해서 첫 공연이 되었다.
공연 첫날부터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일제강점기 한국연극사에서 가장 많은 관객동원기록을 남겼다.
제목이 ‘홍도야 울지 마라’로 알려졌던 이 연극은 극작가 임선규가 동양극장에 입사하면서 시험용으로 쓴 대본에서 비롯되었다.
큰 기대를 걸지 않고 그냥 한번 써본 대본이 졸지에 ‘성공한 작품’으로 연극사에 올라있다.
임선규가 처음 대본을 썼을 때는 극장관계자들 눈길을 전혀 끌지 못했다.
울고불고 너무 눈물을 짜게 하는 내용이란 이유에서였다.
나라 잃은 설움으로 백성들 마음이 아픈데 연극내용까지 눈물을 줄줄 흘리게 만들면 장사가 될 수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특히 연출자 박진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던 중 한 쪽으로 밀려있던 대본이 어느 날 햇빛을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원래 제목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던 이 대본이 동양극장 홍순언 사장 손에 들어갔다.
마침 무대에 올릴 마땅한 작품이 없어 고민하는 차에
“원고를 조금 손질하여 공연을 해 보자!”
는 사장의 고집을 직원들이 마지못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사장입장에선 극장을 놀리는 것보다 다소 맘에 들진 않지만 대본을 약간 손봐서 무대를 돌리면 배우들 월급이라도 벌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장의 집념에 못 이겨 총지배인이 제목을 바꿔서 무대에 올렸다.
이것이 바로 1930년대 대유행을 불러온 신파극의 대명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작품은 예상과는 달리 커다란 흥행을 몰고 왔다.
대성공이었다.
한 여성의 애달픈 사연을 담아 가슴을 찡하게 했던 데다 노래 역시 내용에 맞게 흘렀던 까닭이다.
[홍도]란 기생이 오빠의 학비를 벌기위해 기생이 된다.
홍도는 오빠의 친구를 만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한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멸시와 시누이의 음모로 시집에서 쫓겨나고 남편으로부터도 결국 버림을 받는다.
절망에 빠진 홍도는 우발적으로 칼을 휘두르고 순사가 된 오빠에게 수갑이 채여 잡혀가는 내용이다.
여자주인공 [차홍녀]와 남자주인공 [황 철]의 돋보인 연기는 순식간에 장안에 퍼져 관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서 극장출입문 유리가 박살나기도 했고 입장료가 없어서 보리쌀자루를 내미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현금 외 일절 사절]이라고 써 붙여놔도 막무가내였다.
극장주변 도로까지 가득 찬 사람들로 전차가 못 다닐 정도였다.
급기야 서대문경찰서 형사들이 출동해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질서를 잡기도 했다.
관객들 중에 기생들은 연극을 보면서 남의 일 같지 않다며 훌쩍거렸다.
오빠와 남동생 또는 많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웃음을 팔고 술을 따라야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그녀들에게 홍도의 슬픔은 너무나도 쉽게 공유가 되었다.
기생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건달들도 기생들 따라 구경 왔다가 꺼이꺼이 울고 돌아갔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 장안의 술집들엔 사람들로 꽉 찼다.
기생에서 건달에 이르기까지 한 목소리로
“홍도가 불쌍하다. 배신을 한 광호가 죽일 놈이다.”
하며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연극의 인기는 주제가 <홍도야 울지 마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이서구가 작사하고 가수 김영춘이 부른 이 노래가 빅 히트를 하면서 다시 연극 흥행에 불이 붙었다.
극중에서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하고 노래가 나오면 갑자기 서러움에 북받친 관객들이 따라 불러서 눈물바다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누구나 홍도가 되고 그 오빠가 되어 펑펑 울다가 눈두덩이 부푼 채로 극장을 나갔다.
날만 새면 남자는 징병으로 여자는 위안부로 끌려가는 시대라 나라 잃은 약소국의 서러움이 노래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노래는 단번에 인기 1순위로 떠올랐다.
요릿집, 술집은 물론 서민들도 한잔 들었다 하면 젓가락장단에 맞추어 불러댔다.
거나하게 취한 하루살이 인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매일 서울의 밤을 적셨다.
심지어 가게 출입문에 노래 가사를 크게 붙여놨으나 글을 몰라 답답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친절하게 읽어주는 사람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마음을 울린 이 노래는 어려운 시절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국민들을 위한 말 그대로 [국민가요]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가수 김영춘은 이 노래로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의 으뜸 가수로 우뚝 섰다.
1918년 김해출신인 그는 1932년 김해농고를 졸업하고 1935년 콜롬비아레코드 전속가수로 데뷔, <항구의 처녀설>, <바다의 풍운아>, <항구의 사랑> 등 대표곡들을 남겼다.
이후에도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홍도야 울지 마라’를 능가하는 히트곡을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홍도야 울지 마라>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그의 고향이 아니라 작사가의 고향인 경기도 시흥이었다.
그의 말년은 지극히 쓸쓸했다고 전해진다.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불러 대스타로 두둥실 떠오르던 시절을 추억하고, 그때 만났던 차홍녀의 앳된 얼굴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2006년 2월 김영춘을 마지막으로 홍도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연극이 흥행한 것을 계기로 영화도 만들어졌는데 역시 차홍녀가 주연을 맡았지만 영화는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불세출의 명곡 <홍도야 울지 마라>가 주제가로 스크린을 흐른다.
또 하나 에피소드는 남녀주인공 얘기다.
극장 앞에는 인기절정의 두 사람을 만나러 온 팬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황 철은, 얼굴 한번 보게 해달라며 몰려드는 여성들 성화에 연극이 없는 날엔 숨어서 지냈다.
[황 철]은 청양군수의 아들로 이 연극에서 열연하여 1930~40년대를 통틀어 조선 최고배우가 되어서 이름을 날렸다.
함께 출연한 [차홍녀]를 사랑했으나 결실을 못 맺고 유부녀였던 배우 문정복과 결혼한다.
차홍녀는 1915년 경기도 여천출신으로 17세 때 연극을 시작했다.
마음씨가 착해 ‘천사’로 불렸던 그녀의 이름 [홍녀]에서 따온 [홍도] 배역을 맡았다.
극작가 임선규가 집필 할 때 마음이 워낙 고운 그녀를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타가 된 [차홍녀], 홍도를 한 번 보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어디든지 장사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배역처럼 불운했다.
북부 지역 순회공연을 마친 어느 날 무대 뒤에서 쓰러질 만큼 지쳐 있었다.
그녀는 철원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다가 엎드리고 있는 한 거지에게 적선을 한다.
그녀는 그 짧은 접촉으로 인해서 천연두에 걸리고 만다.
서울에 돌아왔을 때 이미 그녀는 중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를 키운 연출가 박진이 통곡하는 가운데 그녀는 스물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많은 거지들이 훌쩍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고 전한다.
저렇게 아름다운 배우가 우리 같은 사람을 돕다가 저렇게 되었다고…….
남자 배우 황 철과 극작가 임선규는 해방이 되자 이북을 택했다.
황 철은 1948년 월북을 했고 전쟁 중에는 팔을 잃었다.
의수를 하고서도 계속 연기 생활을 했고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그가 죽자 북한 정권은 ‘사회장’으로 예우했다.
극작가 임선규의 경우는 좀 기구했다.
해방 후 친일행각 때문에 수세에 몰려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남로당 활동을 하면서 다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역시 테러와 체포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아내와 함께 월북을 택한다.
아내는 인민여배우로 이름 높은 문예봉이었다.
하지만 만인의 여동생인 홍도를 만들어낸 이 신파극 작가는 살벌한 혁명과 생경한 구호를 그 예술적 기질에 담아내기에는 무리였던지 아내에 비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살다가 죽었다.
♣ 흑산도 아가씨
- 정두수 작사/박춘석 작곡/이미자 노래
남 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만 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 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 ~ ♩♪♬ ~
말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 ~ ♩♪♬ ~
흑산도 12굽이 [한다령]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면 산마루에 그 유명한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있다.
배를 타고 다니던 시절엔 목포에서 흑산도에 가려면 날씨가 좋아도 새벽 밥 먹고 떠나면 밤늦게 12시 경에나 도착할 수 있는 곳이 흑산도다.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외로운 절해고도의 섬이라서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던 섬이었다.
그런 곳이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의 '흑산도 아가씨'를 이미자가 노래로 부르면서 일거에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이 노래를 만들게 된 것은 [흑산도초등학교] 학생들의 수학여행이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이 육지로 수학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당시의 사정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소식을 우연히 전해들은 고 육영수 여사가 해군함정을 주선해 주어서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게 하고, 학생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였다.
이 기사가
“흑산도 어린이들 꿈이 이루어지다!”
라는 기사로 석간신문을 장식한 일이 있었다.
이 기사를 읽고 영감을 얻은 작곡가 박시춘은 작사가 정두수를 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는 다방에서 만나 가사를 쓰게 되었다 한다.
덧붙여서 천주교박해 사건인 ‘신유박해’로 강진에 귀양 갔던 다산 정약용이, 흑산도로 귀양 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다는 내용을 얹어 노래를 만들었다는 일화도 전하여 온다.
1969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권혁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당대 인기절정의 스타인 윤정희, 이예춘, 남진이 출연하여 제작을 해 두었는데, 주제가를 정하지 못해 애를 태우던 때였다.
이 곡이 완성되자 박시춘은 부산에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이미자를 서울역에서 만나 녹음실로 곧장 데리고 와서 완성한 것이 바로 '흑산도 아가씨" 노래였다.
영화 [흑산도 아가씨]의 주제곡이기 때문에 그 깊은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스토리를 알아야 한다.
여름방학을 맞아 어부(이예춘, 이덕화 아버지)의 딸 소영(윤정희)은 학우인 유미와 함께 고향인 흑산도로 내려간다.
상경한 소영은 아버지에게 발동선을 장만해 드리기 위해서 호스티스 생활을 시작한다.
이를 알게 된 아버지는 크게 낙망하고, 친구 유미는 소영의 효성에 감동하여 자신이 발동선을 대신 마련해준다
그렇다면 '흑산도 아가씨'는 누군 인가?
지금은 흑산도에 살고 있는 모든 처녀를 '흑산도 아가씨'라고 한다.
또한, 물질을 하며 햇볕에 검게 타버린 흑산도 해녀들을 말하기도 한다.
한편 어려운 시절에 어촌에 돈 벌러 외지아가씨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흑산도의 술집과 다방 등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갖가지 사연이 생겨났는데, 이들을 모두 '흑산도 아가씨'들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런 아가씨들은, 몸은 흑산도에 있지만,
‘못 견디게 아득한 저 육지를 그리워했을 것이고, 흑산도에서 나그네로, 귀양살이처럼 애타게 보고 싶은 머나먼 서울(고향) 가족을 그리다가 그 마음이 검게 타버렸을 것’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송이골님
명절 잘 보내셨어요?
코로난지 뭔지 참으로 미운놈 얼른 쫓아 버립시다.
좋은시간 감사해요~^^
예!
딸네 식구들이 이제까지 부산하게 떠들다가 방금 마지막으로 출발했습니다.
마누라가 힘이 든다고 하면서도 외손주녀석 재롱에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하는 걸 보니 역시 사랑은 [내리 사랑]인가 봅니다.
수요일에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요~~~
조용한 카페에
좋은글로 활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10월이 되었지만 그녀석은 여전히...
이번주도 건강하고 활기찬 한주가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