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요즘 산에 가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휴일이면 배낭을 메고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산을 찾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지난해 등산동우회원들과 철쭉제가 열릴 무렵 소백산(小白山)에 올라보았다. 등산에 초보들이 대부분이라 버스로 상당히 올라가서 걸어갔다. 울긋불긋 차림의 등산객들이 어디서 그렇게 몰려왔는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방불하였다.
도심지 거리를 걷는 것보다 더 복잡하게 밀려서 올라갔다.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혼자 중얼거리면서 피곤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따라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소백산 바람은 이름이 나 있다면서 별것 아니라고 일러주었다. 천문대에서 점심을 먹고 희방사로 내려오니 올라갔던 길은 평지 같았는데 계단을 밟는 내리막은 무릎이 질려왔다. 콩죽 같은 땀을 흘리면서 온 힘을 다해 내려왔다.
사람들은 산에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이 갈까? 산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건강증진을 위해서일까? 자문자답 해보았다. 각자 목적이 다를 테지만 하여튼 산을 찾는 사람들이 근래에 많아진 것은 분명하다.
나는 어린 시절 산촌에 살았기 때문에 산과는 인연이 깊다. 초등학교는 야산을 세 개 정도 넘어서 다녔다. 여름철에는 하교하면 소 먹이러 또 산에 갔으니 산속에서 살았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읍내로 이사 와서 중학교 다닐 때부터 마을 뒷산에 혼자서도 자주 갔다. 그때는 산에 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른 아침이나 오후에 가면 혼자 다녀 올 때가 많았다. ‘야-호’ 고함도 지르고, 노래도 부르고 심지어 웅변연습도 하였다. 듣는 이도 보는 이도 없는 정적의 산이었다. 겨울 아침 눈이 덮인 산을 혼자 걸어보면 눈 밟히는 소리가 적막을 깨듯이 뽀드득 뽀드득 하였다.
산에 가는 습관이 몸에 베여서 이사를 가도 산을 먼저 바라보게 되었다. 아침 산책이 가능한지, 길은 어디로 있는지 살피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 이사를 할 때는 가급적 산 부근으로 집을 구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알피니스트처럼 등산 전문가는 아니다. 산을 구별하지 않고 즐겨할 뿐이다.
내가 혼자 산에 가는 것은 산을 아끼고 사랑한다던지 맑은 공기를 마시고 건강을 증진하는 것은 차후 문제다. 생각하고 계획할 일이 복잡하여 산에 가면 정리가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아침 산책은 가능하면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지인을 만나면 자연적으로 말을 하게 되고 나같이 수양이 부족한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즐기게 된다.
산을 잘 안다고 아니면 낮다고 얕보다가는 변을 당할 수 있다. 친척이 있는 시골 마을에 며칠을 머물게 되어 보기에 나직한 뒷산을 해질 무렵 올라갔다가 길을 잃어버려 나를 찾느라고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또 한번은 여름 방학에 제주도에서 청소년단체 연수가 있어서 아내와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연수 중에 한라산 등정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사정에 의해서 제외되어버렸다. 어떻게 짬을 내어서 아내와 네 명이 한라산에 오르게 되었다.
날씨는 화창하고 등산하기에 좋았다. 최대한 택시를 이용해서 높은 곳까지 가서 걷기로 하였으며 기사는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신나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산을 오르고 있는데 어디서 난데없이 시커먼 구름이 몰려와서 천둥이 우당탕거리고 번갯불이 번쩍번쩍하더니 갑자기 소나기와 우박이 함께 장대비를 쏟아 부었다. 나는 당황하여 아내를 바위틈에 밀어 넣고 밖에서 소나기와 우박을 그대로 맞았다.
어쩌면 조난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가 머리끝을 쭈뼛하게 하였다. 빗발이 좀 약해지는 틈을 타서 우리 일행은 등산을 포기하고 달음박질치듯이 하산하였다. 이게 웬일인가. 우리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인데 산 아래는 햇볕이 쨍쨍하며 더위가 그대로 있었다.
비와 우박에 젖은 옷과 마음이 따가운 햇살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라버렸다. 늘 “준비(Be prepare)” 준비를 강조했던 나의 말이 무색해졌다. 함께 연수 온 동료들에게 산에 가서 죽을 뻔하였다고 말해도 아무도 곧이듣지 않았다. 그 후부터 산행은 각별히 주의하며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지난해 5월 미국동부를 거쳐 세계 3대 폭포인 나이야가라 부근에서 하루를 머물고 카나다 록히산을 멀리서 보고 알라스카 맥켄리산(Mckinley) 아래까지 여행을 하게 되었다. 산 아래 타키티나(Talkeetna)에서 경비행기로 맥켄리산의 베이스켐프까지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세 시간 정도 소요되고 미화 250달러 옵션이며 같이 가자고 일행 중 한 명이 자꾸만 제안을 하였다. 언제 또 여기를 오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세 명이 경비행기로 떠났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좀 불안하였다. 겨우 네 명이 타는 작은 비행기이며 비수기라 운행하는 비행기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설화(雪靴)는 빌려주었고 잘못하면 설맹(雪盲)이 될 수 있다고 선글라스를 반드시 착용하라고 일러주었다. 비행기가 출발하여 맥켄리산 계곡을 헤집고 들어 갈 때는 비경을 보면서도 불안감 때문에 긴장하였다.
허지만 비행기가 눈 위에 스키처럼 착륙할 때 나도 모르게 ‘우-와’하면서 감탄하였다. 해발 2,000m의 베이스켐프는 날씨가 좋지 않으면 비행기 착륙이 불가능하다. 사방이 눈으로 둘러싸인 켐프는 마치 눈 병풍을 쳐 둔 것 같으며 가까이 보이는 정상(頂上)은 인간의 도전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바쁘게 사진을 몇 장 찍고 켐코드로 펼쳐진 장관을 촬영하였다. 눈이 부시는 백옥 같은 눈을 두 손으로 가득 움켜쥐고 입안에 넣어 설수(雪水)를 삼키니 심신(心身)이 정화되는 것 같았으며 발끝까지 시원함을 느꼈다. 인디언 말로 “위대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해발 6,194m로 북미에서 제일 높은 맥켄리산(Mckinley)은 연간 수 천 명의 등산가들이 정복을 시도하지만 실종되거나 부상을 당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1979년 우리나라도 최초로 멕켄리 정복에 성공한 고(故) 고 상돈 산악인과 이 일교 대원이 하산 길에 자일의 고장으로 추락하여 안타깝게 사망하였다. 경비행기가 켐프를 출발하여 타키티나로 돌아올 때는 긴장이 좀 풀렸다.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절경은 빙하시대로부터 현대까지 지구의 변천을 보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산 정상은 하늘에 닿은 것 같았으며 계곡에 움푹 파인 웅덩이는 호수처럼 보이고 이름모를 야생 동물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경비행장이 시야에 들어오니 마음이 놓였다.
시인(詩人) 괴테는 알프스(Alps)산을 보고 모자를 벗고 절을 한 적이 있다. 산의 경건함에 경의를 표한 것이다. 백두대간을 종주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더러 만났다. 우리나라 명산을 모조리 밟아보았다고 으스대는 사람들도 가끔 보았다. 허지만 정말 산을 사랑하고 아끼며 가꾸는 사람은 수가 많지 않다. 산을 위해 산을 찾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 산을 찾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괴테처럼 산을 향해 경건함에 절은 하지 않을 지라도 항상 산을 찾을 때 마다 감사한 마음은 가져야 될 것이다.(2009.10)
첫댓글 겨울 설악산 대청봉을 등산하다 조난당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산은 높고 푸근하기도 하지만 가벼움을 경고하는 매서움도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