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지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역사에 관심이 많다.
레슬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레슬링의 기원인 판크라티온에 대해, 복싱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백년전 기원된 살인 권투 경기에 대해, 그리고 종합격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종합격투기의 발자취를 쫓는다.
이후부터는 종합격투기를 뜻하는 현대식 용어 MMA(Mixed Matial Arts)라고 표시하겠다.
MMA는 사실 그 기원을 찾기가 매우 까탈스럽다.
한때 전세계 MMA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프라이드나 판크라스, 슈토 등의 일본 단체와, 현재 최고의
MMA 단체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미국의 UFC의 시발점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MMA의 역사는 복싱이나 레슬링과 다르게 서양편과 동양편이 다르게 분리되어 있다가
'MMA'라는 공통 용어로 융합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너무나 복잡한 동양편 MMA의 역사보다는 비교적 쉽게 나열되었고 더욱 널리 알려진 서양
MMA의 역사에 대해 많이들 말하는 편이다.
시기적으로 봐도 그렇고, 내용적으로 보아도 확실히 서양에서 이뤄진 역사야말로 현재의 MMA
무대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고로 이번에는 서양편 MMA의 시초에 대해 글을 써보기로 했다.
1. 콘데코마 마에다 미츠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2000전이 넘는 싸움을 펼친 남자가 있었다.
그의 키는 160센티미터도 안되었으며, 낡아빠진 도복을 입고, 2대8 가르마에 콧수염까지 길렀다.
그는 맨몸으로 싸우는 모든 대회와 길거리 싸움을 서슴없이 자행했으며 그 수천전에 달하는 대결에서
단 두번 만을 패했다고 전해진다.
이 남자가 바로 오늘날 MMA의 시초로 불리는 일본이 낳은 불세출의 스트리트 유도가 마에다
미츠요다.
마에다의 본명은 마에다 히데요였으며 아오모리현에서 1880년 태어났다.
그는 크지 않은 체격이었지만 유명한 스모 선수였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완력 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마에다는 어릴적부터 양심류 유술을 배웠는데 뒤이어서는 유도의 본관이라 할 수 있는 강도관에
입문하게 되고 이때 마에다 미츠요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게 된다.
강도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강도관의 관장인 가노 지고로는 일본의 전국시대 때에 탄생한
백병전 무술인 유술을 기술적으로 안전하게 체계화시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유도를 확립시키고
올림픽 정식 종목에까지 채택시킨 유도계의 신화, 유도의 아버지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그 가노 지고로가 관장으로 있는 도장이 바로 강도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강도관의 유도야말로 최강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마에다 미츠요 역시
이 때문에 강도관에 입문했으리라 생각된다.
이 강도관에는 4대천왕이라 불리는 유도가들이 있었는데 가노보다도 강했고 유도 역사상 최강의
남자였다고 전해지는 사이고 시로, 요코하마 사쿠지로, 야마다 츠네지로, 야마시타 요시카즈가
그들이었다.
그리고 마에다 미츠요는 야마다 츠네지로의 양자가 되어 한때 이름을 토미다 츠네지로로 개명하기도
했었다.
이 강도관 시절의 마에다 미츠요에 대해서는 온갖 루머와 갖가지 별난 에피소드가 넘쳐나는데,
마에다가 4대천왕보다도 강했다는 설과 관장인 가노 지고로와 대립 관계였다는 설이 그것이다.
사실 마에다가 강도관에 입문했을 당시에는 이미 4대천왕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였고,
마에다는 가노 지고로에게 지극히 예를 다하는 올바른 제자였다고 한다.
이러한 루머는 마에다를 다룬 일본 만화들과 (픽션이 많이 들어간) 가노 지고로가 금지시한 '타류
시합 금지'를 마에다가 어겼기 때문에 붉어진 오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마에다는 언제부터 길거리 파이팅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1904년... 양아버지인 야마다 츠네지로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마에다
미츠요의 전설이 시작된다.
마에다가 몸 담았던 강도관의 모습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
미국의 명문 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 유도 시범을 가게 된 야마다와 마에다는 그 학교의 레슬링
부에게 기술 시범을 보이게 된다.
레슬링부 선수들은 간결하면서도 치명적인 그들의 시범에 겉으로는 감탄을 내뱉었지만 속으로는
16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동양인들이 자신들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 내심 못 마땅했다.
그리고 한 레슬링부 선수가 마에다에게 스파링을 부탁하자 마에다는 대련을 허락하고 쉽게 상대를
제압해낸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선수가 야마다에게 대련을 청했고 40을 넘겼던 야마다는 거구의 서양 레슬링부
선수에게 그만 제압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에다가 그에게 도전을 하여 역시 승리를 따내며 사건은 일단락 되었지만, 이후
마에다는 야마다 츠네지로와 다른 길을 떠나게 된다.
그것은 일본의 유술과 강도관 유도의 실전성을 실전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마에다 미츠요의 위대한
도전이었다.
마에다는 미국에서만 1000전이 넘는 갖가지 대결과 싸움을 벌였는데 '나를 이기면 1000달러를 주겠다'
는 표지판을 들고 다녔으며 칼이나 맥주병을 휘두르는 괴한들과의 싸움에서조차 자비없는 승리를
거두며 미국에서부터 명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스페인, 포르투갈 등을 돌아다니며 2000전에 가까운 싸움을 펼치는데 그 중에는 최고의 레슬러
이자 스트리트 파이터였던 부처 보이같은 유명한 선수들도 껴있었다고 한다.
마에다가 부처 보이에게 플라잉 암바를 걸어 팔을 부러뜨린 것은 매우 유명한 사건이고, 한번은
러시아 레슬링 챔피언이 인터뷰에서 "레슬링이 유도보다 강하다."고 언급하여 마에다가 그를 찾아가
정식으로 도전하자 자신의 발언이 잘못 되었다며 사과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처럼 마에다는 조국의 무술인 유도가 더럽혀지거나 낮춰지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했던 다혈질의
남자였다.
기술 시범을 보이는 마에다 미츠요
그러나 마에다 역시도 무적은 아니었는데 미국의 캐치레슬링 (관절 기술이 중점이 된 실전형 레슬링.
조쉬 바넷의 주력 무술이기도 하다) 대회에 나섰다가 두번 모두 결승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도복을 입지 못하는 경기 룰이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두번의 패배는
마에다 미츠요의 유일한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1908년 스페인에 머물면서는 자신의 이름보다 유명해진 '콘데코마' 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그 사정이 상당히 재밌다.
스페인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강한 사나이를 동경하는 풍경을 지니고 있었고, 때문에 마에다 미츠요는
거의 귀족처럼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호탕해서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펑펑 뿌리고 다니던 탓에 마에다는 돈이 없을때가 많았고
그 때문에 "코마루....(곤란하다)" 라는 말을 내뱉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스페인 사람들은 귀족을 뜻하는 스페인어 '콘데' 와 코마루를 줄여 말한 '코마' 를
합쳐 '콘데코마' 라는 별명을 그에게 붙여준 것이다.
해석하면 "궁핍한 귀족" 정도의 뜻이지만 정확한 의미는 없다.
그리고 1915년 (마에다 35살) 마에다는 브라질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때 가스타오 그레이시와 친분을
맺게 된다.
가스타우 그레이시는 마에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마에다는 가스타우의 맏아들인 카롤로스
그레이시에게 자신의 유술을 가르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세계 최강의 격투가문' 그레이시 일족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마에다 미츠요를 놔두고 곧바로 그레이시 가문으로 넘어가면 섭섭하니 얘기를 계속하자면
마에다는 이후 스코틀랜드의 여성과 재혼해서 노후를 즐기며 사는데, 이때 했던 일이 브라질에
들어온 일본인들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측은 1940년 마에다가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교통편까지 마련해주지만 마에다는 이를
거절하고서 브라질에 계속해서 머무른다.
마에다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의 아내가 남편이 일본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브라질에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려워했기 때문
이라는 말이 많은데, 그 때문인지 마에다는 단 한번도 일본에 대한 추억이나 말을 내뱉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면, 스승인 가노의 뜻을 어기고 '타류 시합'을 그 누구보다도 맹렬히 시행하며 스스로를
파문시킨 마에다로서는 일본으로 돌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에다는 죽기 직전에야 "조국에 가고싶다... 조국의 물을 마시고 싶어..."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브라질에서 눈을 감는다.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2000전의 대결을 펼쳤던 전설의 파이터치고는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마에다 미츠요가 평생을 바쳐 최강임을 증명하려 했던 유술의 뿌리는 그레이시 가문을 통해
계속해서 전해져 내려오게 된다.
2. '최강을 꿈꾸는 격투집단' 그레이시 가문
마에다 미츠요에게 직접 가르침을 얻은 것은 카롤로스 그레이시였지만 그레이시 가문의 숨은 보석은
따로 있었다.
바로 카롤로스의 친동생인 엘리오 그레이시가 그 주인공!
체격이 워낙 작은데다가 몸까지 허약했기 때문에 도저히 '격투기' 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엘리오는
마에다에게 직접 배움을 얻지 못했지만, 그는 강함에 대한 동경이 너무나 강했다.
선천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강한 것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엘리오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터득하는 능력과 기술을 배열하고 새롭게 승화시키는데 대한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마에다 미츠요가 카롤로스에게 유술을 가르치는 것을 하나하나 눈여겨 본 엘리오는 카롤로스에게
유술을 배우며, 작은 체격의 사람이 거구의 상대를 쉽게 제압할 수 있도록 그 기술들을 일관되게 정립
시켜 나갔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MMA 무대에서 필수로 익혀야 하고, 전세계 최고의 무술로 손꼽히는 그레이시
유술, 즉 브라질리언 주짓수가 된 것이다.
(유술의 영어식 표현이 주짓수이기 때문에 둘은 같은 말이다. 또한 그레이시 유술과 브라질리언 유술
역시도 같은 말인데, 그레이시 가문의 자존심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그레이시 가문의 파이터들만이
그레이시 주짓수라는 말을 쓸 수 있을 뿐, 그 뜻은 완전히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세계 최강의 격투가문 '그레이시 일족' 정가운데 있는 노인이 엘리오 그레이시
그레이시 가문은 엘리오가 정립시킨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배우며 세계 최강의 파이터 집단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리오 그레이시는 자신의 주짓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브라질에서 행해지고 있던
이종격투 시합. 발리투도에 뛰어들게 된다.
발리투도는 포르투갈어로 "뭐든지 가능하다" 는 뜻이며 룰이나 장비가 없이 신체만으로 누가 더
강한지 싸우는 것이 발리투도였다.
이것은 일종의 협약된 싸움에 불과했으며 브라질의 방송국 PD가 TV에 내보낼 때 썼던 TV 프로그램
제목일 뿐이었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마치 하나의 대회명처럼 변화된 것이다.
아직도 인터넷을 찾아보면 그레이시 파이터가 누군가를 해변가에서 눕혀놓고 두들겨 패거나 조르기를
걸어서 우쭐해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것이 발리투도인 것이다.
즉 발리투도는 엄밀히 말해서 TV 프로그램 제목이자 막싸움이지 격투기 단체나 대회명은 아니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하이안 그레이시. 발리투도계의 강자로 알려져 있다.
오늘 날, 격투기 팬들은 그레이시 가문이라고 한다면 세 명의 남자의 이름을 열거할 것이다.
420전 무패의 전설을 남긴 힉슨 그레이시.
UFC 토너먼트 대회를 제패하며 그레이시 가문을 세계에 알린 수문장 호이스 그레이시.
그리고 현재 ADCC(타격이 금지된 순수 그래플링 대회로 주짓떼로들과 레슬러들의 최대 격전지이다)
에서 괴물 같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호저 그레이시.
그러나 그 이전부터 그레이시 가문에는 잘 알려져 있고, 알려져 있지 않은 강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 중에는 힉슨보다도 강했다고 알려져 있는 홀스 그레이시와 MMA 매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한 칼슨
그레이시 등도 존재했다.
서양의 MMA 역사에서 그레이시 가문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와 같은 존재다.
그레이시 가문이 없었더라면, 만약 마에다 미츠요가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는데만 집중했다면 현재
UFC가 존재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때문에 이 장에서는 그레이시 가문을 알린 파이터들에 대해 샅샅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엘리오 그레이시
앞서 언급했지만 엘리오 그레이시는 그레이시 유술, 즉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2008년 12월 29일 현지나이 95세로 사망했지만 그 전까지는 백발이 된 모습으로도 그레이시 파이터
들의 세컨을 직접 봐주는 등 건강한 모습을 보여왔다.
165cm 65kg이라는 외소한 체격으로 격투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은 체구의 사람이 거구를 쓰러뜨릴
수 있는 최고의 기술' 만을 정립시킨 것이 브라질리언 주짓수이다.
여자가 남자를 이길수 있는 유일한 무술이라는 말도 엘리오의 경우를 비춰 보았을 때 결코 허영된
말은 아닌 것이다.
17세에 발리투도에 뛰어들어 브라질의 복싱 챔피언인 안토니오 포르투갈, 레슬링 세계 챔피언인
발라덱 지스코 등을 꺾으며 17번의 생사를 넘나드는 대결에서 모조리 승리한 엘리오는 브라질의
뜨거운 토양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는 전설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그로서는 가장 아쉬운 패배로 남겨진 일본의 유도영웅 기무라 마사히코와의 대결에서 기무라
록에 패배하고, 이후 자신의 제자였던 발레마르 산타나에게 마저 패하며 발리투도계를 떠나게 된다.
칼슨 그레이시
엘리오의 뒤를 이어 발리투도에 등장한 그레이시 파이터는 오늘 날, 지도자로서 더욱 명성이 자자한
칼슨 그레이시.
칼슨 그레이시라 하면 대부분의 격투 팬들은 비토 벨포트, 무릴로 부스타만테, 마리오 스페리, 노게이
라 형제 등을 가르친 스승으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칼슨은 현역 시절 '발리투도 킹' 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파이터였다.
삼촌인 엘리오가 제자였던 발데마르 산타나에게 패배하자 그레이시 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17세의 어린 나이에 발리투도에 뛰어든 칼슨은 산타나와만 4승 2무를 기록했고, 그 외의 대결에서도
압도적인 그레이시 유술의 강함을 증명하며 엘리오가 심어놓은 '그레이시 최강론' 에 불을 지핀 인물
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주짓수 대회나 단체에 직접 참여하여 주짓수를 스포츠화 시키는데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어서 창시자인 엘리오만큼이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2006년 2월 사망하여 유술 매니아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토하게 만들었다.
힉슨 그레이시
UFC 1회 대회를 제패한 호이스 그레이시가 마이크를 집어들고 이렇게 말했다.
"나의 형인 힉슨 그레이시는 나보다 10배는 강하다!"
이 발언 이후 전세계의 격투팬들은 도대체 힉슨 그레이시가 누구냐며 궁금증을 참아내지 못했고 그의
비공식 격투 전적이 420전 무패라는 것이 알려지며 힉슨은 어느새 세계 최강의 사나이로 등극했다.
그레이시 가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웨이트 훈련을 거르지 않은 듯한 몸매와 현역 주짓수 세계 챔피언
들까지 두손을 들어버릴 정도의 그라운드 기술까지 겸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MMA계 강자와의 대결 전적이 전무하다는 점과 상대를 너무 가려가며 싸운다는 점, 효도르의
경기를 보며 '빈틈이 보인다' 는 등의 발언을 내뱉어 많은 격투팬들의 빈축 또한 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위대한 그레이시 가문의 파이터이자 주짓수계에서 만큼은 압도적인 위력을 지닌
신같은 존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명한 대결로는 PRIDE에서 두차례에 걸쳐 펼쳐진 다카다 노부히코와의 대결, 그리고 2000년 후나키
마사카츠를 초크로 실신시킨 경기를 꼽을 수 있다.
홀스 그레이시
주짓수 팬이 아닌 격투기 팬이라면 홀스 그레이시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 이유는 홀스 그레이시가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행글라이더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스 그레이시는 주짓수 파이터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름이다.
만약 홀스 그레이시가 사고로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그레이시 최강의 파이터라는 호칭은 힉슨이 아닌
홀스 그레이시에게 돌아갔을 것이라는 얘기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이들의 삼촌인 칼슨 그레이시는 홀스가 힉슨보다 더욱 뛰어났다고 얘기했으며, 힉슨 본인조차
홀스가 자신보다 한 수 위의 파이터였다는 점을 공공연히 인정해 왔다.
홀스는 엘리오와 마찬가지로 몸집이 외소한 편이었지만 주짓수 뿐만 아니라 삼보, 레슬링 대회까지
휩쓸고 다닐 정도로 그래플링계의 초일류였다.
또한 현재 ADCC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마르셀로 가르시아, 레오 비에이라, 파비오 가젤 등의
스승인 호메로 자카레 카발렌티가 홀스 그레이시의 수제자였으며, 전경기를 서브미션으로 끝내버리는
현역 최강의 그레이시 주짓떼로 호저 그레이시의 친부인 모리시오 모타 고메즈 역시도 홀스의 수제자
였다.
마르셀로 가르시아, 호저 그레이시, 파비오 가젤... 세계 최강의 주짓떼로들의 스승의 스승이 바로
홀스 그레이시였던 것이다.
호이스 그레이시
엘리오 그레이시의 아들이자 힉슨의 친동생인 호이스는 MMA 팬들에게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다.
그는 UFC 대회의 시작과 동시에 '그레이시 가문'의 우수성을 알렸으며 '주짓수 최강론'에 불을 지핀
그레이시 가문의 선봉장이었다.
힉슨 그레이시가 상대를 가려가며 싸운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데 비해 호이스는 상대가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싸우며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강력함을 입증했다.
급소 가격 금지, 눈 찌르기 금지, 깨물기 금지 외에 모든 공격이 허용되었던 UFC 초창기 대회에서
흰 도복을 입은 작은 체격의 호이스 그레이시가 서양의 거구들을 손쉽게 쓰러뜨리는 장면은 전세계
격투계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UFC 1회, 2회, 4회 토너먼트를 전승으로 제패한 호이스 그레이시는 그야말로 당시대의 무적이었으며
세계 최강의 파이터였다.
이후 프라이드 무대에서 사쿠라바 카즈시에게 첫 패배를 당하며 불패기록을 깨뜨리고 말았지만,
현재 MMA계를 주름잡고 있는 챔피언들이 "나는 어린시절 호이스 그레이시가 UFC 토너먼트를
제패하는 것을 보며 격투기에 빠져들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한지
느낄 수 있다.
UFC에서 웰터급 챔피언인 맷 휴즈에게 도전했다가 처참히 패한 뒤 은퇴를 한 상태다.
호일러 그레이시
엘리오 그레이시의 아들 중 한명인 호일러 그레이시는 힉슨이나 호이스보다 작은 탓에 무체급
위주의 경향이 강했던 초창기 MMA 무대에서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그라운드 테크닉이 그레이시 가문 내에서도 최고 수준임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ADCC에서 3년 연속 본체급 왕좌를 차지했으며 프라이드 무대에서는 자신보다 훨씬 큰 일본의
프로레슬러 사노를 처참히 짓밟으며 그레이시의 무서움을 각인시켰다.
그러나 친부인 엘리오가 기무라에게 당했던 것처럼, 사쿠라바 카즈시의 기무라 록에 패배를 당하며
50여년 가까이 이어져온 그레이시 무패 전설을 깨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헨조 그레이시
카롤로스 그레이시의 아들인 '카롤로스 홉슨'의 아들들은 3세대 그레이시 파이터로 불린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선수가 바로 헨조 그레이시.
ADCC 우승을 일궈낸 주짓수 실력을 겸비한데다 일찍이부터 종합격투기에 관심을 가져 복싱과
레슬링 등 그레이시 파이터의 진화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라이드 초창기 때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사쿠라바 카즈시, 댄 핸더슨, 카롤로스 뉴튼, 오야마
슌고 등에게 패하며 그레이시 파이터의 쇠락을 알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레이시 파이터들이 까다로운 출전 조건을 내세우며 상대를 가렸던데 비하면
헨조 그레이시의 순수한 MMA 파이터로서의 행보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온화한 성품으로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르고 있다.
하이언 그레이시
'길거리 파이팅 420전 무패'로 일본에서 소개된 그레이시 가문의 문제아 하이언!
힉슨이나 호이스 그레이시의 말조차 듣지 않을 만큼 다혈질인 성격 탓에 그레이시 가문의 식구들
조차도 두 손을 들어버렸을 정도의 악동.
하이언이 유일하게 따르는 것은 온화한 성품의 헨조 그레이시 뿐이다.
브라질의 거리에서는 꽤나 유명한 편이라고 하며, 실제로 친구이자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인
비토 벨포트의 누나가 갱들에게 납치를 당했을 때 하이언이 직접 움직여 브라질의 거리가 긴장감으로
고조되었다는 일화 또한 전해진다.
프라이드 무대에서는 그레이시 파이터답지 않은 맹렬한 펀치연타로 이시자와를 KO시키며 충격적인
데뷔전을 치뤄냈고, 헨조 그레이시가 오야마 슌고에게 아쉬운 판정패를 당하자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슌고와의 대결을 자청.
오야마의 팔을 암바로 완전히 꺾어버리며 복수에 성공한다.
그러나 총기 오발 사고로 다리에 총상을 입어 격투생활을 마감했고, 이후 사고를 일으켜 수감되었다가
감옥에서 사망하고 만다.
기복도 심한 편이었고, 사고도 많이 일으켜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요절하고 말았지만....
진한 혈전을 염원하는 독특한 내취를 풍겼던 그레이시 파이터 하이언을 빼놓기는 힘들었다.
호저 그레이시
더 이상 그레이시 가문을 세계 최강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다.
그러나 이런 현실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는 그레이시 파이터가 있으니, 그가
바로 '주짓수 황태자' 로 불리는 호저 그레이시다.
훨친한 키에 재능까지 갖춘 호저 그레이시는 어머니가 그레이시 일족의 피가 흐르며, 그의 아버지는
홀스 그레이시의 애제자였던 모리시오 모타 고메즈이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주짓수를 배운 호저는 2002년부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현재는
ADCC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로 불리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토너먼트의 전경기를 서브미션으로 끝내는 충격적인 결정력까지 폭발시키며, 자신이
칼슨이나 힉슨처럼 전설적인 그레이시의 네임벨류임을 증명해 가고 있다.
아직 MMA 무대에서는 많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론 워터맨과 곤도 유키라는 만만찮은 강자
들을 너무나 손쉽게 꺾어버린 그이기에 가능성 하나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키라 그레이시
호저와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그레이시 일족인 키라는 변호사 공부를 하고 있으며, 뛰어난 외모와
몸매 덕분에 모델 일까지 하고 있는 그레이시 파이터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그녀가 세계 최고의 그래플링 대회인 ADCC과 문디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 최강의 여성 파이터 중 한명이라는 것이다.
특히 2005년에는 브라운 벨트였음에도 불구하고 본체급 우승을 차지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삼촌으로는 헨조 그레이시, 하이언 그레이시, 하우프 그레이시 등이 있으며 헨조 그레이시는 그녀의
스승과 마찬가지이다.
하이언은 키라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과보호를 했는데 그녀에게 찝적대다가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청년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_-;
...기술을 당하고 있는 저 남자가 부러워지는 이유는 왜일까
1편을 마치며..
몇년 전 프라이드 경기를 지켜본 힉슨 그레이시가 "효도르의 움직임에서 빈틈이 보인다."는 발언을
내뱉어 MMA 팬들을 술렁이게 한 사건이 있었다.
한물 간 파이터 주제에! 상대를 가려가면서 싸우는 녀석이 무슨 말이 많냐! 출전료로 몇억 달라는 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요... 등등 비난을 넘어서 조롱까지 섞여있는 무자비한 비판이었다.
이것이 오늘 날 그레이시 가문의 아성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원조 MMA의 최강자 호이스 그레이시가 사쿠라바 카즈시에게 패배를 당한 것이 기폭제가 되기는
했지만 이후 댄 핸더슨, 멜빈 맨호프, 고미 다카노리, 스도 겐키 등의 파이터들에 의해 그레이시
파이터들은 암담하다 못해 참담한 패배를 MMA 무대에서 맛보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에게선 '세계 최강' 이라는 이미지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필자는 그레이시 가문의 파이터들이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결코 한 군데에 모을 수 없었던 격투기를 한 곳에 모으게 만든 응집력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데 미르코 크로캅이 노게이라의 서브미션에 패한 뒤 주짓수 훈련에 전념하게 되고, 송언식 선수가
MMA 파이터를 꿈꾸며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주짓수 도장이었듯이, 그들이 격투기라는 다양한
장르를 'MMA' 로 끌어 모으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레이시 파이터가 없었다면 MMA가 이렇게까지 활성화 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보다 MMA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기나 했을까?
그레이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MMA 팬들이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들었다.
2편에서는 MMA계의 꽃, UFC의 탄생과 MMA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다뤄보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