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화요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제1독서 : 신명 30,1-5
제2독서 : 에페 4,29―5,2
복 음 : 마태 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단지 15분’이라는 연극이 있다고 합니다. 이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극 중 주인공은 몸이 이상해서 병원을 찾아갑니다.
여러 검사를 하고 나서 의사로부터 “당신은 15분 후에 죽습니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됩니다.
우울한 마음으로 병원 문을 나서는데 전화가 울립니다.
재산상속을 해줄 테니 얼른 서명하러 오라는 할머니의 전화였습니다.
15분 후면 죽는다는데 유산 상속 소식에 기뻤을까요?
잠시 후에 오랫동안 구애를 했던 여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청원을 받아들일 테니 얼른 자기 집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15분 후면 죽는다는데 결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곧바로 세계적 과학 학술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논문 게재가 확정되었으니, 게재료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시 15분 후면 죽는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주인공은 15분 앞에서 세상의 모든 욕망이 의미 없음을 깨닫고 오열합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 하나였습니다.
‘남은 15분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유한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안에서 과연 중요한 것이 나의 욕망일까요?
그보다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사랑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삶을 통해 지금이 의미 있으며,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나의 전부가 있는 것처럼 살았던 것이 아닐까요?
욕심을 버리고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나의 삶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의 전쟁을 시작으로
남북한은 지금까지도 민족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였던 나라가 둘로 갈라져 너무 오랫동안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과연 중요한 것일까요?
아직도 우리 민족 간에는 거리감이 무척 커 보입니다.
좌파, 우파, 빨갱이, 보수라는 말 등으로써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민족 간의 간격은 너무나 커 보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삶을 통한 일치인데도
아군 적군 식의 편 나누기가 더 중요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동시에 이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따라,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즉,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길 기도합니다.
허물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앞서 내 삶의 여정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 형성도 어려운데 북한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인지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한마음이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이론적으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결코, 두 사람이 일치를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치의 전제조건은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속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피하고 싶어집니다.
마음이 불편하다면, 아직 진심으로 품어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를 수박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하지만 담는 그릇이 커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나를 치켜세운다고 해서
우쭐하지도 않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내지도 않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릿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1절에서 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 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네가 잘난척하지만, 너도 별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 못 할 것이 없지 않으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 18,19-20)
바로 '이 땅'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친교와 화해의 장소라는 말씀입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평화로운 새로운 새 땅에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바로 지금, 서로 마음을 모으라는 호소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는 허물을 탓하지만 말라는 말씀이요, 동시에 무한히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조건이나 단서를 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만, 혹은 용서를 청해야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완고하고 고집부리더라도,
혹은 계속해서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더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도 남북의 형제들끼리 적대 논리로 서로를 적으로 강요당하며,
서로 죽이는 살인 연습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이 아니라 형제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적대감과 대립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편견과 거짓과 위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용서, 일치와 사랑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특별히 '오늘'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2-3)
이는 축복과 저주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도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분단 극복과 화해와 일치의 실현에는
그동안의 우리의 불성실을 성찰하는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의 책무와 투신이 요청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새로운 생활 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에페 4,29)
사실 우리들 사이의 분쟁의 상당한 것들은
잘못된 말이나, 욕, 비난, 중상모략, 거짓말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를 비방하고, 거짓 뉴스와 유언비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멈추고, 오히려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
축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말, 기쁨과 칭송의 말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에페 4,30)
이는 형제들에게 하는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과 온갖 악의'가
사실은 바로 그들 안에 있는 성령께 대한 모독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몸이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 욕하고 비방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형제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성체조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형제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예배드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페 4,32)
사실 용서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거저 받은 것을 마땅히 이웃에게 거주 주어야 할 일입니다.
특히 대립과 반목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남북의 적대를 용서로 바꾸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내가 ‘먼저 용서’하는 일입니다.
먼저 물꼬를 터야 함께 터지게 됩니다.
그러니 상대가 화해하기를 바라지 않아도 먼저 화해하려 해야 할 일입니다.
‘네가 먼저 하라’고 버팅기다가 영영 화해하지 못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에페 5,1)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화해와 일치를 위해 바치는
향기로운 산 제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죄와 죽음을 이겨내신 부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화해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부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이제는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되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60이 넘으면서 꼭 지켜야 할 삶의 태도 5가지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도 어느덧 60이 넘어서인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강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젊어서는 식탁에 꽃병이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식탁에 약병이 놓인다고 합니다.
어쩌면 인생은 꽃병과 약병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점잖다.’라는 말은 젊지 않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그만큼 말에 품격과 품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늙은이’라는 말은 늘 그렇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쉽게 변하지 않고, 나이가 들면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점잖게 늙어가는, 늘 그렇게 변함없는 노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5가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타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사는 겁니다.
남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무엇이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생각하면서 사는 겁니다.
소신껏,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삶은 노년의 시간을 기쁘게 합니다.
저는 신학생으로 지내면서, 사제로 살면서 소신껏 지내기보다는 아무래도 눈치를 보았습니다.
둘째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겁니다.
60년대에 태어난 저는 해외여행을 많이 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가능하면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니면 좋습니다.
여행은 삶에 활력을 주고, 여행은 새로운 견문을 넓혀주고, 여행은 인생을 풍요롭게 합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경제적인 이유로 참다 보면 여행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몸이 떨릴 때 가면 어렵습니다.
여행의 목록을 정해놓고 떠나는 삶은 노년의 시간을 기쁘게 합니다.
다행히 저는 성지순례를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힘들고 어려울 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33년 사제로 지내면서 동창 신부님들은 제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매달 서울에서 동창 신부님들이 만나는데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큰 아쉬움입니다.
뉴욕에서 팬데믹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동료 사제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 댈러스에서도 서울 교구 신부님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 세상 떠나는 날 그 한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면 좋겠습니다.
넷째는 자기 계발입니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아야 움직입니다. 페달을 멈추면 자전거는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하면 좋습니다.
‘난 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나도 할 수 있어’라는 말을 하면 좋습니다.
본당에는 성경 공부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부채춤을 배우는 모임이 있습니다.
사물놀이를 배우는 모임도 있습니다. 저도 팬데믹 때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인생은 많이 소유한 것으로 존경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이웃과 나눌 때 존경받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건강관리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합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스트레스는 면역력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늘 감사하며, 언제나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면역력이 강해집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면 건강해집니다.
이해받기보다 이해하는 사람이 건강해집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는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위해서 이 다섯 가지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방법도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이룰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너그럽게 품어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결실을 맺기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관계는 꼭 시비를 가려야만 해결되는 것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남과 북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비를 가리려고 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엉킨 실타래는 더욱 심하게 꼬이게 됩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참음으로써 원망은 해결되나니 이 가르침은 영원한 진리이다.
시비(是非)란 본시 그른 것만 취한다면 해결되지 않으며,
옳고 그른 것을 동시에 놓아버려야 끝이 난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라고 합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普施와 容恕
그리고 사랑만이 냉각된 남과 북의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도와 용서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독서 복음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남북통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통일을 준비하는 자세가 담겨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한 사랑의 생활과 믿음의 기도로써 민족화합과 통일을 기원하자.
일제의 손에서 우리에게 광복을 주신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평화통일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듯이 서로 용서하라고 하며
분노와 욕설과 악의를 내어버리라고 한다.
북한의 위협적인 태도가 용서와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의 어떤 주민이
“남한과 미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이대로 폭삭 망하는 것이 낫겠다.” 한 기사는
그들 또한 우리를 두려워하고 못 믿고 용서 못 할 자들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 복지와 평화 그리고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안보 의식을 굳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상호 용서를 통해 민족이 화해할 때 그 이상의 안보와 평화는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먼저 마음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에서는 기도와 용서를 가르치신다.
기도는 통일 과정에 필요한 교회의 역할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선택이다.
기도하면서 남북의 화해를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우리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화해하지 못한 형제가 있으면,
이 미사의 은혜로 서로 화해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하고 또 화해하지 못하고
끝내 이 세상을 떠나보낸 적이 있다.
그때는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기도하던 중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와 화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냥 모른 척 부딪히지 않고 관심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와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랑하는 아드님을 통해서 나를 용서하셨고, 그런 나를 받아들여 주신 하느님 앞에
나는 그를 더는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맞대고 손을 먼저 내밀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마음이 열리기를, 용기가 생기기를 기도하였다.
하루 이틀 미루던 중 갑자기 떠나버린 그를 앞에 두고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어리석게도 ‘내가 화내는 이유는 너무나 정당한데
왜 내가 먼저 화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꾸 던졌던 내게, 하느님은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는가?” 하였다.
기회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은총의 때를 잘 알고 그 순간에 우리는 용기를 내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별 뚜렷한 근거 없이 낙관하는 통일관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장벽에 좌절한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통일을 이루어 주시도록 겸손과 인내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생활할 때 통일은 성큼 우리에게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가 서로 용서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먼저 화해하지 못하고 일치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북이 통일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먼저 우리 사이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래서 일치되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여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나라의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결심하며,
오늘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남북통일 기원 미사입니다. 남북통일은 우리가 하는 것일까요?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선물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그 선물을 주십니다.
동서독의 통일되는 과정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통일은 정말 선물과 같이 왔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귄터 샤보프스키 의원이 동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는 동독인들이 해외여행을 위해 비자를 더 쉽게 신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샤보프시키는 일설에 의하면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새로운 규정의 세부 사항과 시기에 대해 충분히 설명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자회견에서 한 언론인은 샤보프시키에게 새로운 규정이 언제 발효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 발표문을 여기저기 뒤적이다가 다소 불확실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가 아는 한, 지체 없이 즉시 발효됩니다.”
이 발언은 틀렸으며 동독 정부를 포함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해당 규정은 즉각 시행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시행되도록 의도됐습니다.
샤보프스키의 성명은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수천 명의 동베를린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통과할 것을 요구하며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습니다.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인구 유입에 대비하지 못한 국경수비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명확한 명령도 없이 늘어나는 군중에 직면한 그들은 결국 문을 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었고
이 물결은 더는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후 몇 달 동안 협상과 외교적 노력이 강화되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선물처럼 통일의 물꼬가 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북한 주민들이 수없이 철책을 넘어온다면
우리는 기쁘게 맞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내가 왜 그 많은 통일비용을 내야 하느냐며 통일을 반대합니다.
앞으로의 치안과 전체적으로 나라가 가난해질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결혼도 안 하고 자녀를 낳지 않아 소멸해 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통일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면 새롭게 국민들의 마음도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통일비용이 많이 든다고 통일을 반대하는 이들은
장기적으로 북한과의 대립으로 우리가 소비해야 하는
군사비용이나 핵무기의 위협과 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관광적으로도 기대되는 이익도 엄청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북한을 이용하기 위한 것 아니냐,
우리가 북한이 불쌍해서 통일해 주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쌍방의 고마움을 전제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존심은 비굴해지느니 죽는 것을 선택 합니다.
로마에 끝까지 맞서다 나중에 집단으로 자살했던 마사다 항쟁을 생각해 봅시다.
아니면 영화 ‘300’에서 자신은 관대하다는 페르시아 장군에게 목숨을 잃더라도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스파르타 군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북한에게 다가갈 때는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선물로 통일의 물꼬가 트일 때
서독인들처럼 기쁘게 동독 사람들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나의 배우자가 “너 나 아니었으면 거지로 살았을 거야?”라고 한다면
그래도 그 사람과 살겠습니까?
통일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 통일이 우리에게 더 좋다는
전반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오면 내분이 없이 바로 통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이 더 좋다는 믿음이 먼저 있어야 그 선물도 받을 수 있습니다.
분명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독에서는 통일의 이점이
어려움보다 크다는 것이 전반적인 공감대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몰려올 때 우리가 기뻐 뛸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통일의 준비가 된 것이고 이때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8,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북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도하고,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지 어언 70년도 훨씬 넘은,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물리적 시간으로 생각했을 때는 꽤 긴 시간이지만, 우리 민족의 심리적 시간은
언제나 서로가 더 가까워지고 하나가 되길 바라는 짧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명절 때면 가끔 이산가족 상봉을 보곤 하였지만, 이제 이마저도 중단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한때 남과 북이 참으로 소통하고 왕래할 날이
곧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아닌 기대를 했었잖아요.
남북의 화해, 곧 남북통일은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며 성취되어야 할 소원입니다.
복음은 우리 민족에게 남북통일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너희가 한반도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예전 마더 데레사 성녀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분열을 원하지 않으시는 주님께 남북의 모든 이가 한마음으로
그 어떤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남북이 화해하고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8,19)라고 언약하신 대로,
두 사람 곧 남과 북이 함께 기도하면 꼭 남북통일은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서로의 화해를 위해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에,4,29)라고 강조하듯이,
서로 좋은 말로 상대방에 도움이 되는 일을 지속적으로 실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을 저해하는 행위
곧 신뢰를 방해하는 악의惡意 찬 상호 비방을 중단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뢰 회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첫걸음은 바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나 되는 방법으로 용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어느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 때 이렇게 강론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통일되길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먼저 옆의 형제들을 용서하십시오.”
사실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정곡을 찌릅니다.
가족 간에 서로 미워하며 갈라지고,
이웃과 직장동료와 국회에서도, 또 교회에서도 서로 갈라지면서
통일 기원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한다고 한들 뭐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부터 서로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야
더 큰 용서와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을 때 따라오는 것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할 횟수는 한편으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죄의 크기,
다른 한편으로 그 사람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강도, 이 둘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한번 잘못하면 그것으로 관계가 끝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속였다면 더 이상 그 사람과 만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친구라면 서로 잘못하고 다시 화해하고 하는 일들이 어느 정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의 경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흔히 ‘가족은 웬수다.’라고 말합니다만,
가족은 아무리 잘못해도 함께 살아야 할 피붙이기에
결코 단절하고 절교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또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라는 말이 있는 것은
아마 부부는 몇 번 싸웠다고 결별하고 이별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는 이혼하면 남남이 되겠지만, 형제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가장 많이 다투는 것은 형제끼리입니다.
그러나 형제는 싸웠다고 갈라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잖습니까?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18,21) 라는
물음을 달리 표현한다면,
“제 형제가 몇 번이나 저에게 죄를 지으면
형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까 ?” 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일곱 번 ? 형제가 나에게 일곱 번 잘못하고 나면, 그 관계는 끝내야 할까요 ?
‘형제’ 라는 표현에 구체적으로 얼굴을 넣어 봅니다.
베드로는 안드레아를 내칠 수 있을까요 ?
형제와 다툰 경험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일곱 번이라고 말씀하셨다 해도,
설령 형제가 일흔여덟 번 나에게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가 형제라면 화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은 형제의 관계입니다.
설사 수많은 잘못을 했다고 하여도
쉽게 형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구약의 레위기 19장 17에 보면,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설사 형제가 잘못했다고 하여도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해서는 아니 되고
오히려 형제가 돌아오게 하여 함께 살아야 만이,
진정으로 형제 를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일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
이 두 가지는 그 형제를 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되고,
궁극적으로는 형제 라는 관계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화해의 노력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남북은 화해가 필요한 형제 관계입니다.
사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정권을 지배하는 김씨 가문과
이들을 떠받들고 살아가는 일부 사람을 적대시하는 것이지,
단지 북한에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
모든 북녘 동포를 미워하고 적대시해서는 아니 된다고 봅니다.
남북통일은 정치적 이념 차이로 서로 갈라져 대립하는
우리 서로가 용서하고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마음에서 모든 응어리를 없애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충만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나라에 통일을 주실 것입니다.
통일, 통일 외치기 이전에 먼저 우리 마음이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민족 화해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용서의 시를 바칩니다.
『용서의 반대말은 증오랍니다.
믿는 사람은 용서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증오합니다.
증오를 하면 사람을 죽이고 용서를 하면 사람을 살립니다.
용서에는 사랑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은 용서합니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면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사람은 원망만 합니다. 자기만 알아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남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기에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면 행복해집니다. 자기도 남도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만나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도 남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자기의 결핍을 인정하게 되면 남의 상처도 감쌀 수 있습니다.
나도 용서받아야 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용서합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결코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감사함도 없고, 긍정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단지 남의 탓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남이 용서해달라고 하기도 전에 용서합니다.
그는 남의 잘못 속에 숨겨진 자기의 잘못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용서도 없습니다.
용서는 망각도 아니고, 무시도 아니며, 덮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사랑을 하면 섭섭함이 쌓이지도 않고 녹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하면 또 하나의 용서를 낳습니다.
그런데도 난 용서해 주는 분량만큼 용서받는다는 것도 모르는 체
어리석은 인간이 되곤 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