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제1독서 : 2열왕 22,8-13; 23,1-3
복 음 : 마태 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세기에 수십 명의 아기가
오늘날 영아 돌연사 증후군이라는 증상으로 죽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은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죽은 아기들을 부검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가슴샘이 크다는 것을 발견하지요. 하지만 사실은 정상이라고 합니다.
의사들이 이제까지 봤던 아기의 가슴샘은 가난한 가정의 아기였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부검할 수 있는 아기 시신은 모두 가난한 가정에서만 가능했고,
대부분 설사나 영양결핍으로 가슴샘이 이미 위축된 상태였습니다.
이제까지 위축된 가슴샘을 정상으로 생각했으니,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은 아이의 가슴샘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가슴샘 비대로 아이의 기관이 눌러져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부유한 집에서는 아기 때 가슴샘을 키우려고 조치했습니다.
가슴샘에 방사선을 쬐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기가 화상을 입거나 가슴샘이 위축되었고,
그 결과로 암까지 생겨 결국 1만 명이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과학 연구가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생각이 이 세상에 큰 상처와 아픔을 낳을 수 있습니다.
맞는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도
역시 모두 맞다고 하더라도 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습니다.
주님만이 진리 그 자체임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다가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라고 하시지요.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 그들이 맺은 열매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의 상태와 가치를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맺는 열매가 하느님의 뜻과 다르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거짓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합니다.
이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는 하느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 속에 숨어있는 거짓 예언자의 모습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할 때가 바로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을 알려고 노력하기보다,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에서 예언자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시골 사제관 앞 텃밭에 토마토, 오이, 고추, 상치, 가지, 파를 심었고,
좁은 공간이지만 농사짓는 형제님의 도움을 받아
아주 알뜰하게 가꾸어 제법 식단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작은 정성이 있으면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제 때에 거름을 주고 잡풀을 뽑으며 가꾸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사제관 뜰에는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많이 열렸고, 그래서 늘 기대되었습니다.
여러 새 들과 너구리, 스컹크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좋은 열매는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입니다.
그들은 단 맛을 용하게 알고 무화과를 찾아 왔습니다.
매서운 눈을 가지고 다가오던 그들이 구경거리였습니다.
잘 익은 좋은 열매는 사람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사람이나 과일, 채소에 이르기까지 잘 익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햇빛과 비, 그리고 밑거름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보면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는지는 입술로 하는 말에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도 그 끝을 보면 놀라워할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며 햇빛과 비, 거름을 주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없어지면 힘이 듭니다.
따라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어야겠지만
기왕이면 갈수록 깊어지는 멋을 담아야 합니다.
겉은 화려하고 속 빈 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경륜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를 무서워합니다. 눈이 무섭다고 합니다.
제가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의 속을 볼 줄 모릅니다.
다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저를 무섭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지 않은지......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으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사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속이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못 속입니다.”
그러므로 눈속임으로 하지 않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육의 열매를 지향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
“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할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집니다.’
결국, 신앙과 사랑으로 무르익은 삶만이 심판의 불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익은 좋은 열매가 되십시오!
혹 시들한 열매가 보이거든 햇빛을 보게 하고
비를 맞을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거름을 주십시오.
“열매를 보면 나무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보면 부모를 짐작하여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참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좁은 길과 널찍한 길’을 대조시키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
예수님께서는 ‘양’과 ‘이리’의 표상으로 대비시키면서,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십니다.
곧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니 겉의 옷차림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라 하시면서,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행실로 맺는 열매’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
사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양과 이리’,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의 표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 줍니다.
당신이 ‘참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고,
또한 ‘구원의 열매’라는 좋은 열매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서
“참 예언자”로 제시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라는 말씀은
곧 “참 예언자”이신 예수님 당신을 따르라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나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는 ‘뿌리’가 튼튼한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뿌리를 어디에 박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만약에 세상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세상이 원하는 열매를 맺고자 할 것입니다.
곧 세상의 평가와 명예를 얻고자 할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자신의 능력과 힘을 이루고 자신을 실현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성취와 자기 기쁨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바칠 것입니다.
좋은 나무의 두 번째 특성은 잘 받아먹는 나무입니다.
곧 양분을 잘 받아먹는 일, 하느님의 은총을 잘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은총을 건네주는 타인을 위한 자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받아먹은 줄을 알아야 잘 베풀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란 무엇일까요? 세상의 명예나 자신의 성취일까요?
우리가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열매일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처럼,
자신을 훼손시킬 수 있는 곧 자신을 손해 볼 줄 아는 행동이요,
옳으면서도 질 줄 아는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늘 아버지 앞에 겸손한 행동일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곧 저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지, 나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혹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보다
풍성한 잎이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헛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실, 저는 거짓 예언자이고 싶지는 않지만,
거짓 예언자처럼 겉모양을 꾸미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저는 참된 예언자는 아니지만, 참된 예언자 행세는 곧잘 합니다.
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신의 화려함을 버릴 때
열매는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마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맺는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이 따 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마태 7,17)
주님!
잘려 불태워지기 전에, 가지를 자를 줄을 알게 하소서!
위선의 껍데기 옷을 벗고, 기만의 숨겨둔 살을 도려내게 하소서!
치장하여 꽃을 피우기보다,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그럴싸하게 때깔을 꾸미기보다,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늘 당신께 붙어 양분을 얻고, 당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사제복’을 주로 입고 다닙니다.
아침에 산보할 때도, 마트에 갈 때도, 식당에 갈 때도 사제복을 입고 다닙니다.
산보할 때는 마주치는 사람들이 ‘Father'라며 인사하곤 합니다.
본인도 가톨릭 신자인 경우에는 더욱 반갑게 자신도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식당에서도 주인이 신자인 경우는 반갑게 인사하고, 덤으로 반찬을 주기도 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마트에서 ’떡‘을 사는데 주인이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얼마 전에 새로 온 본당신부냐고 물었습니다.
본인은 최근에 교통사고가 나서 한동안 성당에 못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자매님의 본명을 물으니 ’헬레나‘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아침에 저는 떡을 주로 먹는다고 말하니 이것저것 덤으로 싸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사제복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사제복이 저를 지켜주는 것 같았습니다.
사제복을 입으니 행동을 조심하게 됩니다.
사제복을 입으니 가지 말아야 할 곳은 알아서 안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닐지라도 나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서울에 있는 동창 신부님이 ‘Facebook'에 본당 가두선교에 대한 글과 사진을 올렸습니다.
개신교회는 가두선교를 적극적으로 하지만, 성당은 가두선교를 자주하지 않는 편입니다.
저도 2번 정도 교우들과 가두선교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본당에서는 3번에 걸쳐서 가두선교에 대한 교육을 마친 후에, 가두선교를 나섰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준비해 간 선물도 나누어주고,
예비자 교리 신청서도 받았다고 합니다.
100여명의 사람들이 기꺼이 신청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쉬는 교우들도 인사하면서 다음부터 성당에 나가겠다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가두선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공동체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는 선교를 통해서 새 신자를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교를 통해서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내가 했던 일의 결실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마귀들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고 있었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화려한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국과 맺은 동맹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우리들에게 ‘나무와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고 하십니다.
좋았던 나무도 거름을 주지 않고, 관리를 소홀히 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빴던 나무도 정성을 다하고, 거름도 주고, 잡초를 뽑아주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밀은 계속 밀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는 늘 가라지가 아닙니다.
밀처럼 자란 사람이 가라지와 같이 변할 수도 있고,
가라지같이 자란 사람이 밀처럼 변할 수도 있습니다.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조욱현 토마 신부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15절)
우리 신앙인은 일반 대중의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닌,
그 반대로 세상을 거슬러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신앙인은 돼지와 개로부터 만이 아니라, 이리로부터도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리는 개나 돼지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개와 돼지는 잘 보인다. 그러나 이리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낸다.
이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고 하신다.
이리의 공격은 그것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시나무에서는 포도를 거두지 못한다.
거짓 예언자들은, 덕의 가면을 쓰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기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20절) 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힘들고 고생스러운 길이다.
위선자는 수고하려 하지 않고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가면을 보지 말고 좁은 길을 따라가는 이들의 행실이 맺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1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악인은 변화할 수 없다거나
선인은 결코 나쁜 길로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사람이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악하게 살았더라도 선으로 돌아설 수 있지만,
악하게 사는 동안에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는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19절)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거둘 수 없고,
가시를 맺는 나무에서 포도나 무화과를 거둘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악한 사람은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한다.
훌륭한 교사가 나쁜 것을 가르칠 수 없다.
자신의 입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 안에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우리의 삶도 참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는 생활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사이비가 나쁜 나무임을 알기 위한 나쁜 열매는 무엇일까?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사람을 속이는 종교들, 거짓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이 열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사이비에 빠져 인생과 영혼을 망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많은 이들은 이단이나 사이비의 잘못된 성경해석이나 교리가 그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이비들의 잘못된 성경해석과 교리를 공부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교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리까지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사실 진실보다 거짓말이 더 논리적입니다.
보이스 피싱을 생각해 보십시오. 매우 논리적으로 다가옵니다.
속이기 위해서는 논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말하는 경비병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여인들의 말 중에서 누구의 말을 믿겠습니까?
그들의 교리로는 그들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교리가 만들어내는 ‘행동’이 그들을 알게 합니다.
한국 사이비의 시초는 1930년대 김성도라는 여인이 만든 성주교입니다.
17살 때 평북 철산군의 돈 많은 관리 세 번째 첩으로 달려가다시피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고 내리 딸을 셋 낳았습니다. 구박받았겠죠.
그러다 힘겹게 얻은 막내아들이 1년 만에 죽어 엄청난 충격으로 정신 이상이 왔는데
동네 어떤 교인이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 해서 기도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뒤이어 낳은 둘째 아들이 병이 들었고 매일 열심히 기도해서 또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다 소문이 났습니다.
그렇게 유명해지자 이젠 예수님을 직접 만나 계시받았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실패하였고 자신이 그것을 완성할 것이라 주장합니다.
또한 창세기에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해 선악과를 따먹은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적 타락으로 봅니다.
뱀과 하와가 성행위를 했으면 그 후손들은 사탄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면 깨끗한 피를 가진 이가
이 사탄의 피로 정결하게 해서 거룩한 피로 바꿔줘야 한다는 사상이 나옵니다.
이것이 성적인 타락으로 이뤄지고 뒤이어 나오는 모든 사이비 교주들은
이를 이용해 신도들을 자기 성적 착취물로 여기게 됩니다.
이후에 나온 백백교라는 사이비는 여기서 더 나가서 돈과 폭력까지 사용합니다.
백백교가 일제히 경찰에 의해서 조사가 되고 재판이 진행되는데
1937년까지 무려 80여 차례에 걸쳐서 백백교 신도 350명을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오대양 사건도 돈과 성과 폭력이 있었고 현재 허경영 씨도 똑같습니다.
이들의 교리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열매가 비윤리적이면 그 삶을 보증해 주는 교리는 올바른 교리일 수 없습니다.
나무를 살피는 게 아니라 열매만 보면 됩니다. 나무를 보면 헛갈립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톨릭교회에는 이단이나 사이비가 없을까요?
그들의 논리보다 그들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알려진 바이든 대통령이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영하려 하자 성체를 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낙태를 찬성하는 이단이자 사이비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톨릭 교리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비윤리적이면 사이비입니다.
윤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추락하기를 바란다는 발언을 한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가톨릭 정통 신학을 공부하였다고 하더라도 사이비입니다.
열매가 비윤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청빈하고 정결하고 온순하고 겸손한 이가 있다면
그가 어느 종교를 믿던 그는 정통입니다.
우리 열매가 무엇인지 살피고, 또 이론만 거창한 거짓 예언자에 속지 맙시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7, 16. 17)
오늘 복음의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는 말씀을
요한복음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와 연관해서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나무는 예수님이시고 좋은 열매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이미 요한복음 15장을 묵상하면서 나눴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지향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존재이고 하느님을 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떨어져서는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인 예수님 안에 살아갈 때, 그 나무의 가지인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항구히 머물 때
자연스레 때가 되면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가장 적당한 때 수도 생활을 시작해서 참 다행이었다, 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느끼는 것처럼 참으로 심각하면서도 신속하게 변하는 세상을 보면서
앞으로 수도 생활할 후학들이 걱정스러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는 모든 사람에게서 떨어져 있는 존재이며, 또 모든 사람과 함께 있는 존재이다, 는
관점에서 볼 때 수도자의 이중적 삶의 운동의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살아가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으리라 봅니다.
예전엔 모든 것이 확실하고 분명했지만, 다원화된 세상에서는
어느 것도 확실한 게 없는 듯싶습니다. 수도자의 청빈, 정결 순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예전보다 더 많고 그럴듯한 갖가지 감언이설로,
진리와 오류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미묘한 요구들로 말미암아 수도자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는 본디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하느님께 속한 자이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세상의 풍조에 맞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요구와 유혹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보조를 맞추려는 저 자신을 볼 때,
분명하고 확고한 성소의 동기가 없다면 자신의 신원을 유지하고 살아가야 할 후학들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7,15)하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연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저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주님이란
좋은 나무에 붙어 있은 지 벌써 50년이 훨씬 지났건만
아직도 제대로 익은 열매가 열리지 않은 듯싶어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열매가 지금은 익어가는 시기이지만
아직 수확의 때가 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안하면서,
수확의 시간까지 꿋꿋이 예수님의 나무에 붙어 있으려고 합니다.
“너희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7,20)라는 말처럼
혹자는 저를 보고 그토록 오랜 시간 수도 생활을 했으면서도
달린 열매마저도 볼품도 없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고 실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도 저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야 더더욱 실망이 클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십시오.
물론 지금껏 저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부족한 게 아니었습니다.
다 저의 노력 부족이고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고려 때 지눌 선사가 표현하길
『소는 물을 먹어서 젖을 내고, 뱀은 물을 먹어서 독을 냅니다.』라고 했습니다.
같은 물을 먹는데 소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젖을 내고,
같은 물을 먹어 뱀은 사람을 해치는 독을 낸다는 뜻입니다.
존재가 바뀌지 않는 한 그 존재에게서 다른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저는 분명 제 존재를 바꿀 수 없지만,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은총에 온전히 의탁하고 봉헌하는 존재를 내치지 않고
항구하게 머무는 그 열정과 열성을 보시고 그 나무에 맞은 열매를 맺도록 바꿔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사이비’라는 단어를 알고 자주 사용합니다.
그 뜻은 닮은 듯하지만, 닮은 게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이비가 무서운 이유는 진짜와 거의 흡사하기에,
누구나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사이비는 자신도 거짓 속에 살지만, 속아 따라오는 사람들도 거짓의 수렁에 빠뜨립니다.
가짜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면 아무도 속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가짜가 아닙니다.
가짜(=작퉁)이면서 진짜(=명품)인 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저는 이 지면을 통해 고백합니다. 저는 거짓 예언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이비 수도자는 아닙니다.
다만 익어가는 과정에 있고 미처 열매를 맺지 못했을 뿐입니다.
다만 저는 저의 실패와 실수에 연연하지 않고 꿋꿋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려고 몸부림치고,
예수님의 은총을 붙들고 살려는 제 마음만은 의심하지 말아 주시고 판단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 우리 모두 당신 안에 항구히 머물면서 언젠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길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