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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7일 오늘의 역사
2023년 기시다 일본 총리 방한 12년 만에 일본 정상 방한
2023년 미국 텍사스 쇼핑몰에서 총기난사‥총격범 포함 9명 사망
2022년 월드스타 영화배우 강수연 사망
2022년 지리산서 100년 모삼 포함 '천종산삼' 18뿌리 발견
2020년 LG폴리머스인디아 공장 가스누출사고
2020년 5월7일 오전 8시 LG폴리머스인디아 공장에서 스타이렌 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해 적어도 11명이 사망했다. 당시 인근 주민 수천 명이 눈 따가움, 호흡 곤란 증세 등을 호소해 1000여 명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2019년 국무회의, 간첩조작 중앙정보부 수사관과 경찰 8명 훈장 취소 의결
2015년 일주학원 설립·태광그룹 공동창업 이선애 여사 별세
1927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 이임용 회장과 태광산업을 창업했으며, 이후 태광의 성장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7년 일주학원을 세웠고, 이듬해 서울 서초구에 세화여중·고교 문을 열었다. 당시로는 이례적인 중앙난방을 도입하고 교실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등 투자에 사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여사는 1990년 이 회장과 일주학술문화재단을 만들어 국내외 학∙석∙박사 지원 등 각종 장학∙학술 사업도 폈다. 2010년에는 선화예술문화재단을 세워 신진 작가를 지원하고 문화예술 공간도 늘려갔다.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2011년 횡령·배임 혐의로 아들인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과 함께 기소됐고, 이듬해 항소심에서 징역 4년과 벌금 10억원을 선고받은 뒤 상고를 포기해 형(刑)이 확정됐다. 이후 고도 치매, 뇌졸중 등 지병 악화로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오랜 기간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 왔다.
2014년 기타리스트 김세황(밴드그룹 넥스트 출신) 미국 뮤지션스 인스티튜트에서 동양인 최초 음악학 공연예술 명예박사 학위 받음
2013년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 미국에서 주미대사관 소속 여성인턴 성추행(5.10 대변인 경질)
2012년 신민당 부총재 지낸 이택돈씨 별세
8·9·10·12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 전 의원은 인천고·서울대 법대를 나와 제8회 고등고시에 합격한 뒤 서울고법 판사와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거쳐 1971년 8대 총선 때 고향인 경기 시흥에서 당선됐다. 이후 신민당 정책연구실장, 대변인, 법제위원장, 사무총장, 원내총무, 부총재를 지냈다. 한일의원연맹 부회장도 역임했다.
이 전 의원은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과 관련해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2007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그는 현역 의원 신분으로 계엄사령부 합수부에 연행돼 고문을 당하고 수사관들의 강요 때문에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 전 의원은 이후 당시 함께 탄압을 받았던 이신범 전 한나라당 의원과 함께 “불법 구속과 재판으로 피해를 입었다” 며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2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 항소심에서 3억원 배상 판결을 받았다.
2011년 태풍 에어리 필리핀 강타 사망 24명 이재민 7만여 명
2009년 KKR(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 OB(오비) 맥주 인수
2005년 내신등급제에 반대하는 고교생 촛불시위
2005년 5월7일 저녁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 주관으로 열린 ‘입시교육에 희생된 자살학생 추모제’는 400여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3시간여 만에 끝났다. 경찰(6000여명)과 교사(700여명)들이 에워싸고 있어 현장에 왔다가 발길을 돌리거나 멀찍이서 구경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내신등급제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과 불신은 여전했다. 일부 학생들은 촛불을 쥔 채 ‘학교공부가 너무 힘들어요’라는 구호를 외쳤다.
인터넷 다음의 ‘내신등급제반대추진 카페’에는 ‘9일 저녁 국회의사당 앞에서 모이자’ ‘14일이 진짜’라는 학생들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날 행사를 주최했던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의 한 관계자는 “믿은만큼 아이들이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서 고맙다. 청소년도 사회문제를 피하지만 말고 스스로 나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어른들도 아이들을 믿어달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애들이 과격한 행동을 할 것이다’, ‘우리가 애들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람들의 우려 였다”면서 “그러나 학생들이 잘해줬다”고 말했다.
2004년 미국 워싱턴 한인회장 최제창 박사 별세
미국 워싱턴 한인회장을 지낸 의료계 원로 최제창(98)박사가 7일 미국 버지니아주 자택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최 박사는 1935년 미국 버지니아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군정 시절 일시 귀국해 군정청 보건 관계 업무를 담당했으며, 이후 워싱턴 D.C. 지역에 거주하며 교포 등을 상대로 인술을 펼쳤다.
2002년 중국 여객기 랴오닝성 다렌시 인근 바다에 추락, 112명 사망
중국 북방항공공사 소속 국내선 여객기 한 대가 7일 밤 중국 동북부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인근 바다에 추락, 한국인 승객을 포함한 탑승자 112명 대부분이 사망했다.
승객 103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우고 베이징(北京)을 출발, 다롄에 착륙할 예정이던 사고 여객기(MD-82)는 이날 밤 9시32분(한국시각 밤 10시32분)쯤 다롄 공항 관제탑과 교신이 두절됐으며, 목격자들은 사고기가 다롄시 동쪽 20㎞ 해상에 추락했다고 말했다. 사고기 기장(機長)은 관제탑과의 마지막 교신에서 “기내에 화재가 발생했다” 고 말했다.
사고기에 한국과 일본 국적의 외국인 8명이 타고 있었다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연방 제3대 대통령 취임
푸틴 당선자는 이날 낮 12시(한국시각 오후 5시) 모스크바 크렘린 대궁전에서 고르바초프와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그라이 헌법재판소장 앞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푸틴은 취임 연설에서 러시아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치하하고, 자유롭고 강력한 러시아 건설과 생활의 질 개선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국민 모두가 힘을 모을 것을 촉구했다 . 흑해 주변 휴양지 소치에서 일주일 간의 휴가를 마치고 전날 모스크바에 귀환해 대통령 증서를 받은 푸틴의 취임식에는 448명의 국가두마(하원) 의원과 179명의 연방회의(상원) 의원 전원, 헌법재판관과 외국 대사들이 참석했고, 30발의 축포 속에 1시간 만에 끝났다.
푸틴은 취임식 직후 크렘린궁의 무명 용사 묘에 헌화한 뒤, 미하일 카시야노프(42) 제1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총리 직무대행에 임명했다.
1999년 나토군, 유고연방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 폭격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측의 실수로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이 폭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동안 중국은 나토의 유고 공습을 반대해왔다. 판 잔리엔 유고 주재 중국대사는 부서진 대사관 건물 앞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공격당했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패권주의의 적나라한 작태”라는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베이징에서는 8일 시민-대학생 1만여명이 미국대사관 앞에서 밤늦도록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대는 베이징대학 등 시내 10여개 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돼 오후 12시쯤 미 대사관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오후 2시쯤엔 시민들이 가담하면서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이날 저녁 7시쯤 일단 물러가는 것으로 보였으나 밤이 되면서 더 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숫자가 더욱 늘어나고 시위 양상도 훨씬 격렬해졌다.
시위대들은 “하늘이 클린턴을 저주할 것” “미국은 살인자”라고소리치며 돌을 던져 대사관 승용차와 유리창, 정문 전등을 깨기도 했다. 시위대 일부는 성조기를 불태우며 차량을 앞세워 대사관 정문을 돌파하려다 경찰에 의해 간신히 저지되기도 했다. 또 남부 청두와 광저우, 상하이 등 중국 곳곳에서 반미시위가 벌어졌고, 특히 청두에선 미국 영사관이 시위대 방화로 2층 대부분이 불탔다.
친화쑨 유엔 주재 중국대사는 이날 자신들의 요구로 긴급 소집된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나토는 무고한 인명 살상 방지를 위해 유고에 대한 군사공격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클린턴 미 대통령은 유고에 대한 공습 완화를 시사하고 미국 독일 등은 오폭 사건 수습을 위한 외교적 중재 노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나토군은 8일과 9일 세르비아 남부 니시와 코소보 중심부를 폭격하는 등 공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 대사관 오폭은 비극적인 실수”라며 유감을 표시했으나, “나토의 공습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슈뢰더 독일총리는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유고 특사, 빌트 유엔 사무총장 특사와 회담한 뒤 “정치적 해결”을 지속키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코소보 평화는 외교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있다”며 공습 중단을 촉구했다. 나토는 중국 대사관 오폭 사고가 건물의 성격에 대한 잘못된 정보에 기인한 것이라고 공식 사과했다.
1998년 독일 다임러-벤츠와 미국 크라이슬러 합병을 선언
독일의 자동차회사 다임러-벤츠와 미국의 크라이슬러가 1998년 5월 7일 상호합병하기로 발표했다. 덩치가 작은 대신에 착실한 경영으로 현금이 많은 벤츠가 덩치가 큰 크라이슬러를 합병한 것이다. 세계자동차 역사상 최대의 기업합병이었다.
새 합병회사의 이름은 다임러크라이슬러 주식회사로 결정됐다. 지분은 다임러 주주들이 57%, 크라이슬러 주주들이 43%를 각각 맡기로 했다. 본사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와 미국 오번 힐스 2곳에 두기로 했다.
1996년 이홍구 전국무총리, 신한국당 대표로 임명
신한국당은 7일 오후 하얏트 호텔에서 전국위원회를 열어 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이 지명한 이홍구 전 총리를 신임 대표위원으로 선출했다.
신임 이 대표는 대표수락연설을 통해 “지역갈등의 극복, 생활의 질을 보장하는 복지사회 건설, 중소기업, 자영업, 농어업 육성, 세계화-정보화의 과감한 추진이라는 국민염원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1995년 프랑스 대통령에 시라크 당선
1995년 5월 7일 치러진 프랑스 제5공화국 다섯번째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자크 시라크 파리시장이 당선됐다. 이로써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지난 1981년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을 누르고 엘리제궁에 입성한 이래 14년 동안 지속한 사회당 정권의 대통령 집권이 끝났으며 우파의 엘리제궁 시대가 열리게 됐다.
자크 시라크 파리시장은 1981,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이어 세번째 도전한 끝에 마침내 엘리제궁 입성에 성공했다. 시라크는 1932년 11월 파리에서 태어난 토박이다. 최종학력은 국립행정학교 에나(ENA)에서 학위를 받았고, 앞서 파리정치대학을 다녔다.
시라크는 1959년 회계감사원 감사관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으나 본격적으로 중앙무대의 행정과 정치를 익힌 것은 조르쥬 퐁피두 밑에서다. 시라크는 퐁피두가 총리로 있던 1960년대 총리비서실에서 행정관으로 일했다. 이를 발판으로 시라크는 1967년 고향마을 코레즈에서 드골파 후보로 출마,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시라크는 오늘날 프랑스 원내 1당인 우파 공화국을 위한 연합당 (RPR)을 1976년에 창당, 1994년말까지 총재로 군림했었다. 1978년에는 파리시장에도 당선, 이해까지 18년 동안이나 파리를 통치했다. 그는 또 1979, 1980년에 유럽의회 의원이었다.
1992년 한경직 영락교회 원로목사, 템플턴상 수상
한경직 영락교회 원로목사가 1992년 5월 7일 영국 런던 버킹엄궁에서 종교계의 노벨상인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한 목사는 이날 오후 가족과 이 상을 만든 템플턴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의 부군 필립공으로부터 상금 1백2만달러(약8억원)를 받았다.
템플턴상은 종교분야에서 인류를 위해 큰 업적을 이룬 인물에게 매년 수여되는 상으로 미국의 실업가 J.M.템플턴이 노벨상에 종교부문이 없는 것을 아쉬워해 1972년 창설했다. 지금까지 테레사 수녀(1회), 빌 그레이엄 목사 등 세계적인 종교인 외에 소설가 솔제니친 등이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한 목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이유는 사회복지와 복음전파 및 남북화해에 기여한 일련의 활동을 인정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 4월 19일 생을 마감했다.
1991년 한국 오로라탐험대, 세계11번째 국가로 북극점탐험 성공
1991년 5월 7일 새벽1시. 한국 오로라탐험대 최종렬 신정섭 대원이 갖고 있는 아르고스(위성 교신으로 현재 위치를 가르쳐주는 계기)는 북위 89도59분58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 90도와 2초차. 꿈에 그리던 북극점(오차를 1분으로 감안해 89∼91도 지점이면 극점으로 간주함)에 한국인의 발길이 처음 닿았다는 표시였다.
1909년 미국의 피어리가 처음 탐험에 성공한 이후 국가로서는 11번째, 팀으로는 18번째 개가였다. 이들은 즉시 베이스캠프에 소식을 알렸다. 북위 88도까지 전진했다가 불의의 사고로 화상을 입어 베이스캠프(캐나다 레저루트)로 후퇴했던 허영호 대장과 고정남 단장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탐험은 3월 8일 캐나다 워드헌트섬(북위 83도2분)을 떠난 후 눈보라와 혹한을 뚫고 얼음 언덕을 넘어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리드(빙원이 갈라진 틈으로 드러난 해수면)를 건너다 얼음바다에 빠져 죽을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탐험대는 하루 16∼18시간, 마지막 50km를 남기고는 하루에 22시간씩 강행군을 한 끝에 1200km의 빙판을 61일 만에 주파하는 쾌거를 올렸다. 1990년 노르웨이 팀이 수립한 최단기록(57일)보다 나흘 늦은 호기록이었다.
1987년 포항제철 광양제철소 1기 준공
1983년 중국 공식대표단 민항기 불시착 문제로 첫 내한
1983년 북한군 대위 신중철 귀순
북괴군 13사단 7중대장 신중철 대위가 휴전선을 넘어 탈북 하였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수재이고, 비록 계급은 대위이지만, 똑똑해서 사단 참모장을 했다고 소개됐다 그는 양구에 있는 제4땅굴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왔다
그는 육군 소령으로 시작하여 각 부대의 정보장교 역할을 하면서 대령까지 진급하고 예편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중국으로 잠적하여 북한으로 재 입북 했다 결국 위장귀순이였다
1982년 한국여자등반대 여성 처음으로 히말라야 람중히말봉 정복
1981년 평화통일정책위원회 발족
1977년 제3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막
1964년 울산정유공장 준공
1963년 텔스타2호 발사
1956년 해공 신인희 유해호송, 군중과 경찰 간에 충돌사건 발생
1955년 신서유럽연합(WER) 정식 발족
1955년 민병대 해체
1955년 소련, 영국-프랑스 동맹 조약 폐기
1955년 서구동맹(WEU) 정식 발족
1954년 프랑스군 거점 디엔비엔푸 베트민군에 함락
1949년 6월, 프랑스는 해외에 망명 중인 응우옌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를 주석으로 한 친프랑스 정부를 세웠다. 전쟁이 장기화됐고 전황은 점차 프랑스군에 불리해졌다. 1953년 11월, 프랑스군 총사령관 앙리 나바르는 라오스로 연결된 월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1만 6,000명의 외인부대를 동원해 라오스 국경의 디엔비엔푸를 점령하고 요새를 건설했다. 디엔비엔푸는 주변에 험준한 산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월맹군이 중화기를 가지고 진입해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하지만 월맹군이 이끄는 보구엔지압(武元甲)은 4만 명의 병력으로 터널을 뚫고 요새 벽까지 접근했으며 대포를 분해해서 등에 진 채 인해전술로 산을 넘었다. 1954년 3월 13일, 월맹군이 디엔비엔푸에 공격을 개시했다. 월맹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곧 프랑스군의 활주로는 파괴됐으며 프랑스군은 보급을 공중투하에 의존해야만 했다.
결국 1954년 5월 7일 인도차이나전쟁의 종결을 토의하는 제네바회담 도중 인도차이나에 있는 프랑스군의 거점, 디엔비엔푸가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함락됐다. 56일간에 걸친 전투가 끝난 것이다.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라고 쓰여진 월맹군의 군기가 포연 가득한 디엔비엔푸 계곡에 펄럭였다. 디엔비엔푸에 포격을 개시한 이후 프랑스군 지역을 차츰 점령해 나가던 월맹군은 전술을 바꿔 참호를 파나가면서 서서히 프랑스군 거점에 접근했고 함락 전날인 6일, 네번째 공격에서 백병전을 통해 최후의 거점 이자벨을 점거해 승기를 붙잡았은 것이다.
이 전투로 프랑스군은 6,000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1만 명이 포로가 됐으며, 월맹군도 8,000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 전투를 끝으로 프랑스의 100년간에 걸친 인도차이나 지배도 종지부를 찍었다.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도드 피랍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이 2년이나 지속된 것은 포로 때문이었다. 유엔군측이 발표한 북한군 포로는 13만2400여명(중공군 포로 2만700명을 포함)이었고 북한측이 발표한 유엔군 포로는 1개월 전 평양방송을 통해 주장한 6만5000여명에 훨씬 못미치는 1만1500여명(유엔군 4400여명 포함)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포로송환이었다. 유엔군측이 인도주의적인 점을 강조한 자유송환 즉 원하는 포로만 북한으로 보낸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북한측은 1949년 제네바협정이 규정한대로 자동송환 즉 모든 포로를 북한으로 송환하라는 주장을 폈다. 북으로 송환되기를 원하는 포로가 7만여명 뿐이라고 유엔군측이 북한에 통보하면서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거제도에 수용돼 있던 포로들도 친공ㆍ반공포로로 갈려 유혈사태를 빚고 있었다. 더구나 북한측은 공작원들을 포로로 잠입시켜 수용소 내 친공포로들을 배후 조종하며 반공포로들을 대상으로 협박과 테러를 일삼았다.
이로인해 크고작은 폭동이 빈발하던 1952년 5월7일,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친공포로들에게 납치ㆍ감금되는 포로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했다. 수용소 철조망 밖에서 포로들과 면담을 하던 중 치밀한 친공포로들의 계략에 의해 수용소 안으로 끌려간 것이다. 후임소장 콜슨이 포로들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하고 도드 역시 미군의 잔학행위를 시인함으로써 도드는 나흘 만에 석방됐지만 이로인해 도드는 대령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미군정 수사대에 의해 발각
1946년 5월 7일 미군정 수사대가 조선공산당 본부와 공산계 신문을 발행하는 조선정판사가 자리잡고 있는 서울의 한 빌딩을 수색했다. 수사대는 그곳에서 종이, 잉크, 약1천2백만원에 달하는위조지폐(당시 환율로 약12만달러)를 비롯한 위조지폐 설비를 발견했다.
조선정판사는 일제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곳으로 광복 후 조선공산당이 접수하면서 조선정판사로 개칭하고 공산당 본부로 활용해 온 곳이다. 조사결과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과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이 조선정판사에 있는 지폐 원판을 이용, 선전활동비 등 당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시키기 위해 모두 6차례에 걸쳐 1천2백만원의 지폐를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이 관련자 14명을 구속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해 해방일보를 폐간시켰고 조선공산당 간부들을 검거하는 한편 조선공산당본부를 제외한 다른 사무실들을 폐쇄시켰다.
공산당의 반발은 극심했다. 좌익은 이 사건이 좌익을 탄압하기 위한 조작이라고 주장하면서 검찰과 재판부를 협박하기도 했다. 1946년 7월 29일 제1회 공판이 열리는 날 좌익의 선동에 따른 소란스런 군중때문에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2명이 죽는 불상사마저 일어나 공판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변호인단은 재판부 기피신청을 내면서 소송지연전술을 펴나갔다. 이 소요사건은 해방후 최초의 법정소요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여곡절 끝에 11월 28일 이관술, 박낙종 등 주범들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됐고 나머지 범인들에게도 10년에서 15년이 선고됐다. 이 과정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권총을 소지하고 다니던 양원일 재판관이 미군 헌병의 불심검문을 받는 도중 양 판사가 권총을 꺼내는 것으로 오인한 헌병의 총에 맞아 숨지는 참변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위폐사건을 계기로 미군정과 좌익의 실력대결이 본격화되어 좌익세력은 9월파업과 대구폭동 등 비합법 폭력투쟁으로 치달아갔고 마침내 남로당이 창당됐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종전(독일이 항복문서에 서명)
1945년 5월 7일 독일이 연합국이 제시한 무조건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5년 8개월에 걸친 2차 세계대전이 그 종결을 알렸다.
항복 조인식은 프랑스 상파뉴 지방의 중심도시 랑스에서 이뤄졌다.
독일의 패배는 4월 30일 나치의 ‘신’이라 할 만한 히틀러의 자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연합국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는 "적이 전장으로부터 영원히 쫓겨났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일본군이 항복할 때 우리들의 전투는 비로소 끝이 난다"고 방송했다.
스탈린은 `위대한 조국방위전쟁의 종결`이라는 특별포고를 발표했고, 처칠은 대일선전을 강화하면서도 `전체주의 국가와 경찰국가가 히틀러를 대신한다"며 소련군에 대한 경계를 나타냈다.
8월 6일에 이어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동맹국 독일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던 일본도 마침내 연합국에 백기를 들었고, 그로써 2차대전이 그 막을 내렸다.
이날 독일 항복문서에 독일 대표로 서명한 독일군 장성 알프레드 요들은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전범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1942년 일본군 고레히돌 섬 점령
1934년 진단학회 창립
1921년 황신덕등 동경에서 조선여자기독청년회(YWCA) 조직
1921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창당대회
1915년 독일 잠수함 U보트 영국선 루시타니아호 격침. 1198명 사망
1915년 5월 7일, 약 2,000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뉴욕을 출항하여 리버풀로 향하던 영국 국적의 3만 1,500t급 여객선인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하자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워싱턴 D.C.의 독일 대사관에게 있어 해전 법규는 아주 명확했다. 대영제국 또는 그 동맹국의 국기를 달고 있는 선박이 전쟁 해역-영국제도 인근 해역 포함-에 진입할 경우 이유를 막론하고 공격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독일 잠수함 활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영국 해군 본부는 즉시 루시타니아에 전문을 보내 지그재그로 항해하거나 그밖에 공격을 피할 수 있는 항법으로 항해할 것을 명했다. 루시타니아 승무원들은 이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며, 발터 슈비거 대위는 U-20 잠수함에서 어뢰 발사를 명했다. 이 어뢰는 루시타니아호의 우현 한복판에서 폭발했으며, 엔진실 보일러에서 더 큰 폭발이 일어났다. 루시타니아호는 불과 20분만에 가라앉았으며, 배와 함께 목숨을 잃은 1,198명 중에는 미국인도 128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루시타니아호는 북대서양을 횡단하는 정기여객선 중에서 가장 빠른 선박이었다. 특히 이 배에 타고있던 희생자 중에는 2세 이하의 유아가 100여명이나 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의 독일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영국은 루시타니아호가 여객선이었다고 주장하며 독일을 맹비난하였으며,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독일이 비무장상선에 대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고 믿었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미국 대통령은 배의 격침에 분노한 미국인들의 열화와 같은 전쟁 요구를 묵살하고, 외교 각서를 통해 배상금 및 여객선 공격 중지를 요구하는 협상을 독일과 벌였다. 독일은 루시타니아호에 무기가 실려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배상금 지급에 합의했다.
루시타니아호가 침몰과 함께 그 안에 있던 모든 비밀 역시 바닷속으로 사라지리라 믿었던 사람들은 거대한 선체에 비해 단 한 발의 어뢰 명중으로 인해 완전 침몰까지 18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또 700여 명이 넘는 생존자들 역시 독일 잠수정에 의해 어뢰 공격을 받은 후 2차 폭발이 일어났다는 증언을 했다. 루시타니아호 안에 선박을 20분도 채 안돼 침몰시킬만한 파괴적인 폭발물이 실려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1차대전과 2차대전이 벌어지고, 또 탐사장비의 미비로 인해 한동안 해결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백만장자인 ‘Gregg Bemis’가 발달한 탐사장비를 이용, 90m 이하 깊이에 잠들어 있던 루시타니아호의 일부를 탐사하는데 성공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루시타니아호엔 탄약 4천2백 상자와 유산탄 1천250 상자가 실려있었고, 수뢰 공격을 받을 때 그것이 폭발하여 배의 침몰을 가속화시켰다.
1914년 윌슨대통령, 5월 두번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제정한다는 연방의회 결의를 승인
1909년 사진의 현상과 인화 과정을 단일화한 미국의 발명가, 물리학자 랜드 출생
1902년 황성신문 사장 남궁억 피검
1875년 일본-러시아 사할린 간도 교환 조약 조인
1873년 베네수엘라의 초대 대통령 파에스 사망
1840년 19세기 초 독일의 낭만주의를 개척한 화가 프리드리히 사망
1840년 차이코프스키 출생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러시아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났다.
1859년 19살 때, 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의 관사로서 근무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과 정열에 못이겨 22살 때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갔다. 186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다음해 1월 니콜랑니 루빈스타인이 창설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른바, ‘러시아 5인조’ 등의 광신적인 민족주의가 음악계를 휩쓸고 있을 때, 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전통과 순수한 감정의 표출에 중점을 두어 보편적인 어법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특히 피아노와 바이올린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였다. 이것이 고전적인 작풍과 서로 작용하여 그의 음악에 신선하고 쉬운 영상(影像)을 심어주었고, 이것이 곧 차이코프스키 음악만의 독특한 매력을 지탱하게 하는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특히 선율적 영감과 관현악법에 뛰어나,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유수한 발레 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 후 돈 많은 철도 운영자의 미망인 맥크 부인으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작곡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결혼 실패 후 그 충격으로 한 때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에서 요양을 하기도 했다. 1893년 11월 6일, 그의 ‘비창 교향곡’이 초연된 5일 후, 당시 러시아 전역에 유행했던 콜레라에 걸려 안타깝게도 이날 세상을 떠났다.
1833년 독일 작곡가 브람스 탄생
1812년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 출생
1592년 임진왜란 최초의 대승 거둔 옥포해전(음력일)
1396년 목은 이색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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