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제1독서 : 사도 12,1-11
제2독서 : 2티모 4,6-8.17-18
복 음 : 마태 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 어느 인디언 보호 구역에 새로 백인 교사가 부임했습니다.
이 교사는 학생들의 수준을 알기 위해 시험을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는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시험을 봐야 하니 서로 떨어져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했고, 제일 나이 많아 보이는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어른들에게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상의하라고 배웠습니다.”
어렸을 때, 시험 본다고 하면 가방을 세워놓고
또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를 오가며 시험 감독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 평가만 중요했고, 공동 평가라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선 아이의 말처럼, 어려울 때는 함께 상의해서 푸는 것이 진짜 교육이 아닐까요?
공동체보다 개인의 역량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개인보다 공동체의 힘이 훨씬 큽니다.
그런데도 개인만 강조하다 보니 개인주의가 더 활개 치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당신께 필요 없음에도 굳이 제자단을 형성하셨습니다.
그냥 혼자 열심히 기도하면 될 것 같은데,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당신께서 함께하시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함을 명령하십니다.
이웃을 통해 큰 상처를 받았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통해 큰 힘을 받았다는 분은 더 많습니다.
무엇을 봐야 할까요?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뽑아서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특히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그 제자단 공동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단의 으뜸이라고 말하는 베드로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정도로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제자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죄 많고 또 부족한 이들이었지만, 이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교회를 성장 발전시킵니다.
베드로를 통해 신앙 고백의 모범을 세우셨고,
바오로를 통해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종종 공동체에서 벗어나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봅니다.
자기의 죄 많음 때문에 차마 신앙생활을 못 하겠다고 말하고,
또 다른 죄 많은 사람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정답이라면,
베드로와 바오로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이들이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도 안 됩니다.
그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세례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 사제 수품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께
주님의 충만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모두가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삶을 본받고 복음 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 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소년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누구냐?’ 했을 때
당당하게 ‘저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무개입니다.’ 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그래, 나는 네가 사랑하는 너의 예수다’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배움이 부족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감정에 휘둘리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모든 일을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에 처형되었고 바오로는 참수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역할이 합하여져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하며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각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예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그들을 다그치신 분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들을 재촉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으며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1,29).
오늘 우리의 소명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반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 주시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7). 하셨습니다.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베드로를 당신의 도구로 쓰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시몬이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5,8).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5,10).
주님의 안배로 베드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으뜸 제자로서의 몫을 다했습니다.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했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6-8).
주님을 만난 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천상의 희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삶의 쇄신을 통해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노력했고
어려움 중에서도 희망을 찾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하며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이 두 분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직무를 맡기신 으뜸 사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베드로는 교회의 ‘주춧돌’로 삼으셨고,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주님께서 감옥에 갇혀있는 베드로를 빼내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제2독서에서는 주님께서 바오로를 사자의 굴에서 구출해 주시고 굳세게 해 주십니다.
복음에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 줍니다.
먼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으로 ‘그리스도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예언자들이 보증해 왔던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인 것만이 아니라,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을 베드로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마태 16,17)
바로 이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곧 교회는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이는 그리스도께서 '반석 위에' 직접 세우신 이 교회가
이 세상 끝 날까지 지탱해 나갈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가 있으니,
그것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권한을 통해 드러난 ‘교회의 신비’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특별한 권한이 그에게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 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곧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 준다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에 있습니다.
이토록 베드로 안에서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늘’이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모두가 용서를 하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우리 안에서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곧 내 안에 하느님 나라가 열리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곧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사랑하게 하시어,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트렌드 코리아 2024의 내용 중에 ‘스핀오프(Spin-Off)'를 읽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스핀오프는 기존의 브랜드에 새로운 콘텐츠를 끼워 넣는 겁니다.
월트 디즈니는 생쥐 한 마리로 그만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디즈니는 영화, 음악, 놀이공원, 장난감, 생활용품, 식당과 같이
디즈니만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고객은 디즈니 월드에서 꿈을 꾸고, 디즈니 월드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고객의 가족은 물론, 고객의 자녀들까지 대를 이어 디즈니의 세계에 머물게 됩니다.
기존의 밭을 갈아엎고 새로운 품종을 심는 것이 아니라,
밭 주변에 콩도 심고, 깻잎도 심고, 호박도 심는 겁니다.
저도 용문 수련장에서 있을 때 비슷한 흉내를 낸 적이 있습니다.
구역장, 반장들이 피정이나 강의를 듣기 위해서 오면
양평읍과 연계해서 농산물을 저렴하게 구입 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했습니다.
수련장에 오신 분들은 피정도 하고, 시장도 보니
시간도 절약되고, 따로 장을 보러 가지 않아도 되니 좋아했습니다.
노래를 듣는 프로그램도 예전에는 ‘가요톱텐이나 가요무대’가 있었습니다.
일정한 형식이 있어서 조금 단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래를 듣는 프로그램도 다양해지고, 전문화되고 있습니다.
‘팬텀싱어, 복면가왕, 나는 가수다, 전설의 무대, 히든싱어, 슈퍼스타 K'와 같이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습니다.
영화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관객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영화의 줄거리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무대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도 하고,
극 중에서 사랑받았던 조연 배우를 주연 배우로 삼아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영화는 ‘스타워즈, 어벤저스’ 시리즈가 있습니다.
자동차의 브랜드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도요타는 중저가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도요타에서 도요타라는 브랜드를 빼고 ‘렉서스’라는 차를 출시했습니다.
사람들은 렉서스가 도요타에서 만든 차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렉서스에 만족한 사람들은 나중에 도요타에서 출시한 다른 차에도 구매력을 느꼈습니다.
렉서스에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현대 자동차도 비슷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제네시스는 현대 자동차에서 만들었지만, 현대 자동차의 로고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제네시스를 좋아하는 고객들은 나중에 현대 자동차에도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네시스가 현대 자동차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스핀오프(Spin-Off)'의 원조는 ‘교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교회가 있습니다.
그 브랜드 위에 동방 가톨릭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스, 러시아 정교회가 생겼습니다. 성공회가 생겼습니다.
루터를 중심으로 개신교회가 생겼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교회가 이렇게 많이 생겼습니다.
때로는 경쟁하기도 했고, 때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죄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 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속해 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시몬 베드로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처럼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조욱현 토마 신부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 호수에 가까운 벳사이다 출신으로 시몬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동생인 안드레아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케파(반석,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우셨다.
그는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도이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인 서기 65년경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고
그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사도보다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를 박해하며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사도가 되었다.
그는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 여행을 다니며 교회를 세웠다.
많은 편지가 성경으로 되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네로 황제 박해 때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제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자, 이렇게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은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더욱 심오한 이해로 인도하시려는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군중들의 수준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그동안 줄곧 그분과 함께 지내며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으며
스승님과 함께 많은 기적을 행했던 제자들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물으신다.
이 질문은 바로 당신을 따라다니던 모든 제자에게 던지신 질문이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즉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은 제자들이 올바로 알아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분에게 열두 제자들은 아직 부족한 사람들일 뿐이다.
마르코 복음에 보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8,33)라고 무섭게 책하시는 말씀이 나올 정도이다.
이 제자들이 어찌 주님께 믿을 수 있는 제자들이었겠는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열두 사도의 신앙고백이며,
교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 고백을 통하여 교회의 기초인 반석(케파)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루카 복음에 나오듯이(9,23)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주님만 따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유혹이며,
하느님의 일과는 거리가 멀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을 통하여서만이 부활의 신비를
우리는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은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먼 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복이 있다고 하셨다.
베드로의 첫 번째 이름은 시몬이었다.
시몬이란 말은 말씀에 온순하다는, 잘 따른다는 뜻이다.
하여간에 주님은 이 이름 대신에 ‘케파’라는, 반석, 믿음에 있어 확고한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반석과 같은 신앙 위에 주님은 당신 교회를 세우셨다.
본래 바위는 주님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바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바위 위에 서 있는 사도들의 신앙은
결코 정복당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절)
사도가 땅에서 맨 이는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푼 이는
하늘에서도 풀리도록, 하늘나라의 열쇠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제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로의 행진을 계속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으로 내가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가?
혹시 나는 주님을 기계적인 주님, 혹은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양대 산맥인 이 두 분의 축일을 지내면서
그분들이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죽기까지 충실했던 신앙을
우리도 이 시대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진정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한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우리는 가톨릭교회라는 건물의 주춧돌이 되신
두 사도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살아생전 보여준 복음 선포를 향한 놀라운 헌신과 열정,
주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인정받아
이제는 하늘나라의 별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이 되시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국 문의 열쇠를 지닌 관리인으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요 탁월한 말씀 선포자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베드로 바오로 사도이지만,
한때 두 분 다 스승님과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
잠잘 때마다 ‘내가 그때 왜 그랬지?’ 하면서 이불 킥을 계속해야만 하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게파,
즉 반석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신뢰받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능동의 시기가 지나가고 수동의 때가 된 어느 날,
정말 잘 나가던 그분께서 한없이 나약한 한 인간 존재로 추락하는 그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파악한 베드로 사도는, 여지없이 스승님을 버렸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세 번씩이나 스승님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베드로 사도 못지않았습니다.
회심 이전 그는 예수님과 신생 그리스도교 교회를 박해하는 데 있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결정적인 회심을 하게 된 그날도 사실 어딘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다는 첩보를 듣고, 싸그리 체포하려고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사람,
자신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을 가장 가까운 제자로 부르시고,
그 배반, 그 박해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럴수록 더 큰 사랑을 베푸시며,
지속적인 스승 제자 사이를 맺으시며, 가장 큰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두 핵심 사도의 흑역사는 초 세기 교회 안에서 정말이지 감추고 싶었던 큰 오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 한 가지는 이 두 사도의 흑역사에 대해
성경과 교회 전통은 전혀 감추지 않았습니다.
보통 세상의 조직이었으면, 벌써 두 분의 흑역사를 몇 번이고 세탁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싸그리 삭제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을 비롯한 성경 저자들의 서술은 냉정하기만 합니다.
두 사도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흑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했습니다.
교회의 초석이 된 두 위대한 인물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우회적으로, 혹은 완곡한 표현으로 기술할 만도 한데,
성경 저자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습니다.
일체의 옹호나 왜곡 없이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의도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두 분의 흑역사 통해서 우리는 나름대로 한 가지 진리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 인간의 언약, 인간의 역사, 인생의 모든 각본은
한순간에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는 진리 말입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던 베드로였지만,
순식간에 가장 낮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만은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단 몇 시간 만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토록 기고만장하던 그가 단 몇 시간 만에 완전히 찌그러집니다.
금강석보다도 더 단단했던 그의 언약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철저한 배신에 따른 수치심과 죄책감, 부끄러움만이 그를 휘감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자세는 ‘지속적인 겸손’입니다.
“주님, 이 연약한 인간을 보십시오.
천국을 살다가도 일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이 가련한 인간을,
시시각각으로 배신을 거듭하는 이 불충실한 인간을….”
그래서 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이제 주님 당신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제 삶의 의미입니다. 당신만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붕괴된 한 인격을 사랑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평생 따라다니게 될 죄책감과 좌절감으로부터 한 인간을 사랑으로 다시 건져내십니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폐허, 완전히 맛이 간 반석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그 위에 다시금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십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트리십니다.
바닥에서 겪게 될 고통이 만만치 않겠지만,
그 바닥에서 우리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정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헤매고 있는 그 바닥까지 내려오십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재창조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야말로
하느님 자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는 은총의 꼭지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6,18)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맞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 대축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반성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만난 인연이 악연이 아니라 아름다운 인연이 되기 위해
서로 다른 인격이 서로의 다름에도 서로 보완하고 보충해 주는 관계와
상생의 관계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분명 가톨릭교회의 가장 중요한 분들이며 교회의 기초를 놓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두 분은 참으로 다른 분들입니다.
소위 출신 성분이나 자란 환경이나 학식 그리고 성격마저도 전혀 다르신 분들입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사람을 주님께서는 놀랍게 조화시키시며
당신의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한 주춧돌과 대들보로 활용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미사 감사송은 두 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이토록 다른 분들이시지만,
이 사도들이 지닌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 사도들이 지닌 공통점 안에서
우리가 두 성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고 봅니다.
첫째는 두 분 다 처음부터 완전하고 완벽한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회심을 통해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반하였던
상처를 지니고 살아갔던 분이잖아요.
비록 예수님으로부터 부활 후 용서받으셨지만,
그 자신 스스로는 평생 그 아둔한 기억(=흑역사)을 떨쳐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오로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고
더구나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던 아픈 기억은 지울 수 없는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베드로나 바오로에게도
그 아둔하고 아픈 기억이 주님께 나아가는 데 전혀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두 사람의 회심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생애를 통해
지속적인 은총의 사건이었다는 점을 우리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누구도 처음부터 완전한 제자란 있을 수 없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체험해 가면서
점진적으로 예수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가 고백하잖아요.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2디4,17)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고, 함께 계신 주님 안에 우리가 꿋꿋이 머물러 있다면.....
두 번째로 두 분 모두 ‘믿음의 사람이고 믿음으로 순교하신’ 분들이십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에서 이렇게 이 두 분의 믿음을 노래합니다.
“이 사도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의 피로 교회를 세웠으며,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네!”
이처럼 이 사도들은 주님을 만나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위해 한 생을 기꺼이 바치신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숱한 시련과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순교의 영예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감히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는 없다고 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바오로는 세 번째 칼날에 목이 잘린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두 분은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믿음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순교로 증거하신 분들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그분의 영광이 나타 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4,12~13)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일생을 요약하듯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2디4,6~8)
누가 참으로 진실하고 참된 신앙인입니까?
자신의 생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비와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끊임없이 회심하고 변화되어,
믿음의 사람으로 자신이 전해 받은 신앙의 지혜를 말로 선포하고,
행동으로 증거 하면서도 그로 인한 시련이나 환난을 사랑으로
기꺼이 하느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드리려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마치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훌륭히 싸우고, 달릴 길을 끝까지 달리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진정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들처럼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닌 사람을
우리 시대도 하느님과 하느님의 교회는 필요합니다. 아멘.
* 오늘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맞아
축일을 맞는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와 함께 기도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길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