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제1독서 : 지혜 1,13-15; 2,23-24
제2독서 : 2코린 8,7.9.13-15
복 음 : 마르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양이과에 속하는 동물인 ‘치타’를 혹시 아십니까?
이 지상에 현존하는 가장 빠른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속 100km대를 달리는 유일한 육상 동물이며,
최대 120km/h의 속력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속도로 사냥감을 쫓아가서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치타의 사냥 성공률은 어떻게 될까요?
41%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동물보다는 성공률이 높기는 하지만,
때로는 계속된 사냥 실패로 인해 굶어주는 치타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끼 치타의 생존율은 어떻게 될까요?
대략 독립할 수 있는 개월 수인 17개월 동안 4.8%만 생존한다고 하더군요.
현재 인간의 기대 수명이 제일 낮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유아는
91%가 첫 번째 생일까지 살아남고, 88%가 다섯 번째 생일까지는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치타는 상위 포식자가 아니라 아주 약한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하다고 해서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강함이 삶을 더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사회에서도 남들보다 강함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 하고, 이를 위해 자기 능력을 키워나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매번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두터워지게 됩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발 앞에 엎드려 간곡하게 청합니다.
자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손을 얹어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가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딸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 보셨기에, 그의 집으로 함께 가십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회당장의 슬픔은 얼마나 컸을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딸의 죽음을 확신하고 비웃었지만,
딸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회당장의 모습으로 인해
실제로 딸은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딸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비웃고, 세상의 것만을 쫓으려는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을 말입니다.
세상의 뜻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 뜻만을 바라보며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면 됩니다.
일어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비가 내렸습니다.
비로 인한 피해가 없기를 소망하며 우리 마음에는 은총의 비를 충만히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시길 빕니다.
복음을 보면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얻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회당장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이고
아쉬울 것이라고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회당장이
타인의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여간해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 때문에 엎드렸습니까?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내면과 가정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거센 돌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시련 중에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사람이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았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한 말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높은 것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회당장은 고통을 통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자기가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분노와 슬픔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엎드려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도 말 못 할 고민이나 걱정을 지니고 있다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더는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이 문제를 당신에게 맡깁니다.
당신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 고통과 고민,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당신만이 해결의 열쇠입니다. 도와주십시오.”하고
주님께 모두를 맡겨 드릴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 간청하는 와중에 시련이 연속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회당장이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말합니다.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매달렸고 희망을 두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가능성이 없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인간적인 한계에 접하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북돋워 주십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지,
네가 지금까지 지켰던 믿음을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선택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을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냐?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시작하십니다.
인간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은총의 때, 구원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회당장은 “사람들의 말”이라는 유혹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의 능력, 권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련은 은총의 기회입니다.
시련을 통하여 나의 믿음을 바라보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혈액암으로 고통을 받는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는데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늘 맑고 밝은 모습이라서 환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투병 중에 천일기도를 시작하셨고 물질로도 매일 일정액을 봉헌하였으며
저에게 매주 편지를 쓰셨습니다. 그의 편지 중 하나입니다.
“요즘에는 몸은 아프지만 성부, 성자, 성령님과 성모님을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나의 사랑하는 딸, 테클라야!
내가 너에게 병고를 주는 것은 너를 얼마나 내가 사랑하는지 깨닫게 함이며
또 한 가지는 너의 몸과 마음을 비울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내려놓아라.
그래야 내가 네 안에 자리 잡고 너의 주인이 될 수 있단다.
이제까지는 너의 몸과 마음이 너에 의해서 움직였지만,
지금부터는 이제 내가 너의 주인 이란다.’
그래서 이제는 저를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많이 많이 비워서,
큰 공간을 하느님이 자리 잡으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거예요.
신부님, 저의 이 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병을 통해서 얻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성체를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쁨인가?
두 번째는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닌 하느님이 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병의 고통을 통해 몸과 마음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 당신이 알아서 저를 쓰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제게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답은 한가지! 제 생명을 주신 분도 한 분, 거두어 가실 분도 한 분,
우리 주 하느님뿐이시니 모든 것을 그분 계획안에 맡기고 따르는 길 뿐임을!”이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남모르게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천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임종을 맞기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크게 느꼈고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주검 앞에서는 울고불고 우왕좌왕 혼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슬픔과 무질서가 지배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습니다.
슬픔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하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삶을 믿는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살 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탈리타쿰!”,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소녀가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믿고 신뢰하면 이런 기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쫓아다니지만, 기적은 믿음을 지닌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길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녀는 육으로뿐 아니라 영으로도 살아났습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라고 한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육적인 음식을 먹던 그는 죽었습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51).
신앙인이 먹어야 할 음식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미사 참례를 더 자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을 밝히 빛내시길 바랍니다.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천상 것들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되어
기적을 낳고 기적을 전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작가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지혜 1,13)고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를 창조하셨음을 말하며,
<창세기>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셨다.”(창세 1,27)는 말씀을 반향 해줍니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지혜 2,24)는
사실도 동시에 말하면서, 불멸의 상급을 받도록 종용합니다.
그래서 <지혜서>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멸은 하느님 가까이 있게 해주는 것이다.”(지혜 6,19).
“당신의 권능을 깨달음은 불사의 뿌리입니다.”(지혜 15,3)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물질적 어려움에 닥쳐 있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도울 수 있도록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을 독려하는 장면으로,
먼저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라고 밝히십니다.
이는 물론 물질적 차원의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의 가난을 말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이를 물질적, 영적 이중적 의미로 확장해 어려움에 빠진 신자들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복음은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인물이 보여준 것은 ‘간절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열병 앓은 여인에게는
“딸아, 너의 믿음이 네를 구원하였다.”(마르 5,34)라고,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두 번째 것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단지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라,
죽은 이도 살리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그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간청을 드립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 23)
회당장은 그야말로 전적인 신뢰의 자세로 진지하고 간절하게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당신 말씀으로 창조하시되 인간만은 당신 '손'으로 창조하셨듯이,
이제 당신 '손'을 얹으시어 딸을 치유하시어 다시 살게 해 달라고 간청입니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이 애틋한 사랑과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라나섭니다.
그런데 도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르 5, 35)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가!
모든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드는 순간입니다.
사람에게는 도저히 희망을 걸 수 없어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는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가 싶더니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참담한 순간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진정으로 응답해야 할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을 때에도 마르타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믿는다면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 23-26 참조)
그렇습니다.
죽음의 이 순간이 바로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길러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생명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예,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11, 27)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이로에게도 이 순간이 병을 고쳐주실 분으로 믿었던 예수님을
이제는 나아가 이미 죽은 딸을 살려주실 분으로, 더 깊은 믿음을 끌어올리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고,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믿음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인가 봅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가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이 밀려오는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다는 것’, 그것은 내가 지배하고 있던 자리를 예수님께서 지배하시도록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눈에 보이는 희망이 가려진 현실 상황에서, 바로 그 상황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단지 지적인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기다리는 인격적인 행위를 동반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회당장 야이로는 믿음으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야이로'라는 이름의 뜻대로,
곧 ‘주님께서 깨우치리라, 일으키리라’는 그 뜻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탈리다 쿰!”(마르 5,41),
이 말씀으로 일어나 걸어가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일어나 새 사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전 세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애쓰시는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교황 주일입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주의적이지 않게,
신자들 위에 군림은 하지만 오직 사랑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다스리기는 하지만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저는 1991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경본을 읽을 때 꼭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교황과 우리 주교”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부분입니다.
33년을 지내면서 우리 교황은 3분을 이야기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우리 주교는 4분을 이야기했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그리고 정순택 베드로 주교입니다.
이곳 댈러스 교구에서는 우리 주교 ‘Burns와 Kelly'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있습니다.
매 미사마다 교황과 주교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은
그만큼 그분들의 직무와 직책이 무겁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결정이 교회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라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성공, 권력, 명예를 얻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돌아오는 목자처럼 모든 이를 품어주는 사랑의 길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용서의 길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품어주는 자비의 길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겸손의 길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희생의 길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시는 나눔의 길입니다.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시는 믿음의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길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가는 성령의 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도, 고통받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교황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질과 자본의 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사랑과 자비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눔과 희생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상처를 받을지라도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황님이 제일 먼저 방문했던 곳은 난민들이 머물던 람페두사였습니다.
교황님은 난민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교황님의 호소에 응답하였습니다.
람페두사에 있던 난민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하였습니다.
바티칸에 노숙자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노숙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실도 마련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이 멀고 험해도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로 26대 사목회가 끝나고 내일부터는 27대 사목회가 출범합니다.
26대 사목회를 이끌어 주셨던 사목회장님과 사목위원들에게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26대 사목회는 팬데믹의 어려움을 함께했습니다.
저는 역사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 교황 베드로 사도로부터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1977년 시작하여
이제 27대 사목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새롭게 출범하는 27대 사목회가
본당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 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새롭게 출범하는 27대 사목회를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
조욱현 토마 신부
연중 제13주일: 나해
오늘의 주제는, “생명”이란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며,
이제 그 생명과 구원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베푸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이는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죽음”과는 반대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항상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께 속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창세 1,26),
하느님의 본성을 본떠서 만드신(지혜 2,23) 존재이기 때문에
불멸한 존재로 영원히 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드신 분이 아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기적들은
예수님을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위해 완전히 함께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복음: 마르 5,21-43: 소녀야, 일어나라!
복음에서는 두 가지 기적의 사화가 함께 소개되고 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과 12년간 하혈하던 부인의 병을 고친 이야기이다.
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죽음과 그 죽음의 일반적 전제조건인 병을 지배하는 예수님의 권위와
그 기적의 근거가 되는 믿음을 북돋우고 있다는 것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사화를 통해서 예수께서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말하고자 하고 있다.
회당장이 예수께,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하고 청한다.
그러나 하혈하는 여인을 만났기 때문에 그 딸의 상황이 치명적인 상황이 되고 만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35절)하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집에 가셔서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39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우선은 그 아이의 죽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극복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주님의 부활과 같이
다른 삶으로 옮아가는 순간으로 보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때(40절)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난다.
“탈리타 쿰”(41절),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하시며 소녀를 다시 살리셨고,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42절) 한다.
이 놀라움은 예수님의 부활 후 무덤 앞에서의 여인들의 놀라움과 같이 표현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과 연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예수께서 죽음에 대한 권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볼 때,
병에 대한 그분의 권능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참으로 그분의 생명에 대한 능력은
예수님 자신도 조절할 수 없는 것같이 보이는 힘으로 옮아가듯이 퍼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
이미 여인은 기적을 체험하였다. 바로 생명이 죽음을 지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시기”(지혜 1,13) 때문이다.
이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에 대한 북돋움이다.
이 믿음은 더 많은 시험을 당함으로써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딸이 죽은 것을 알고 낙담하고 있을지 모르는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하신다.
아마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고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혈하던 여인도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셨을 때,
어쩌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캐는 듯한 말씀을 하셨을 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33절).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기에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며,
그분과 참된 친교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비를 알게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알려주고 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가치 있는 부,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임을 우리가 안다면,
바로 우리의 현세적인 부를,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누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일임을 바오로 사도는 강조하고 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필립 2,7)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 때,
그분은 우리 생활의 모든 순간, 모든 행동에 새로운 의미를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원하시고 또 항상 초대해 주신다.
여기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우리의 믿음을 더 강하게, 굳게 가지도록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살려고 할 때,
그렇게 살 수 있으며, 생명 안에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참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건강하게 살려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성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명을 사는 것이고
영성 생활을 잘하면 건강한 삶을 살 것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셨지, 죽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말 입니다.
실로 창세기에서 모든 생명은 생기라는 하느님 명령대로 생겨난 존재들입니다.
한자어에서도 생명은 생기라는 명령(命令)대로 생겨났다고 해서 생명(生命)이고,
실로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順命)하지 않은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명령대로 순명하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 따라 얘기하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듯이
진리의 길과 생명의 길을 따라 살면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 얘기하듯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대로 살면
우리는 진리의 길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죽었던 소녀는 일어나라는 명령대로 살아납니다.
이렇듯 살아나는 존재는 명령에 순명하는 존재이고,
살아나게 하는 존재들은 소녀의 부모처럼
주님을 믿고 생명을 간청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소녀의 이웃들처럼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는
주님 말씀을 믿지 않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녀의 부모만큼 소녀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이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고
비웃는 자들이 오늘 지혜서가 말하는 “죽음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죽음에 속한 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지혜서가 말하듯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그러므로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속한 자들은 하느님 생명에서 탈출한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에서 탈출하면 그것이 바로 죽음에 속하는 것입니다.
빛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바로 어둠이듯
물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바로 고기에게는 죽음이듯
하느님의 생명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바로 죽음입니다.
이것을 저는 오늘 조금 다르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인간 창조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육신만 당신 모상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당신과 비슷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을 성자의 모습과 성령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반쪽만 삽니다.
육신 곧 몸뚱이만 살고 영성을 살지 않습니다.
영성이란 성령(Holy Spirit)을 사는 것이고 정신(spirit)을 사는 것인데,
프란치스칸은 프란치스칸 정신(Franciscan spirit)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창세기를 보면 명령대로 곧 말씀으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것으로 부족하셨는지 2장에서 다시 인간을 창조하시는데
이번에는 흙으로 당신과 비슷하게 만드신 다음 그의 코에 당신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우리말의 목숨은 이렇게 한자어의 생명과 달리 목에 숨이 들락날락하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숨 곧 성령이 우리 목을 들락날락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숨 곧 성령이 우리 목에서 끊어질 때 우리 목숨은 끊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영성을 산다는 것은 성령을 사는 것이고,
성령을 살 때 우린 육신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영혼 모두
생명을 살고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죽음에 속한 자 될 것인가? 생명에 속한 자 될 것인가?
그 선택이 앞에 놓인 우리입니다.
교황님께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티파노 신부
지난 주 제가 좀 바빴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기로 한 어떤 행사에는 일찌감치 출발했는데도,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시간이 늦어지고, 애를 태우고, 끼니도 제때 못 때운 관계로
밤늦게 집에 돌아와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정말 미쳤구나, 미쳤어. 대체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고 있지?
내 또래 다른 영감님들은 저리 세상 편히 지내고 계시는데, 나는 대체 이게 뭔 꼴이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굳이 안 그래도 때 되면 삼시 세끼 딱딱 밥 나오는데...”
그런데 오늘 교황 주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과 생애를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서 나이 자랑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1936년 12월 17일생이시니,
새롭게 정한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87세+6개월이십니다.
한쪽 폐도 온전치 않은 데다, 무릎까지 문제이니, 고생이 참 많으십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래분들은 안 그런 분들도 많지만,
많은 분들이 요양원에 계시거나, 오늘 내일 하시거나,
그래서 산에 누워 계시나 집에 누워 계시나 별반 차이 없는 분들도 많으십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십시오. 그 연세에도 하루 스케줄이 살인적입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님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수많은 회의와 행사가 교황님을 시간대 별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관계로 정확한 파악은 안 되지만,
아마도 이분도 여러 이유로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처럼 살아생전 사임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 연세에 일어나기도 힘들고, 걷기도 힘들고, 숨쉬기도 힘든 상황이기에,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임서를 제출하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카스텔간돌프 교황 전용 별장에서 편히 쉬고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로서는 그러지 않으실 듯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시작하신 교회 쇄신과 개혁을 위해, 시노달리타스 작업의 완성을 위해
순교자의 마음으로 불철주야 노력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이미 달릴 곳을 다 달리신 교황님이시지만,
또 다시 힘을 내서 열심히 달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이 너무나 사소한 고통 앞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하며 인내심을 가져야겠습니다.
매일 죽을 각오로,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공동선을 위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남아있는 우리의 에너지를 활활 불태워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그간 행보는 언제나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노숙인들, 난민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지, 약소국들의 딱한 처지를 나 몰라라 하는
강대국들의 횡포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유달리 꺼려하시고 비판의 날을 세우시는 폐해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의 성직자들이 보이고 있는 지나친 성직주의입니다.
성직자는 경영자나 관리자에 앞서 겸손한 봉사자이며,
동시에 양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목자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많은분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천 년 교회 역사 안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교황님,
영성가이자 활동가, 개혁가이자 교회 쇄신의 적임자이신 교황님께서
너무 고령이시기에, 그분에게 주어진 개혁과 쇄신의 시간이 얼마나 더 주어질지 걱정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힘차게 깃발을 올리셨는데,
측근들이, 그리고 지역 교회들이 너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혜성처럼 우리 앞에 등장하신 뜻밖의 선물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좀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하셔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계획하신 그 좋은 꿈과 희망 사항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기를...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