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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8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캐나다 산불 서울크기 두배면적 소실 25000여명 대피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5일부터 지역 전역에 걸쳐 최소 103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지금까지 마을 20곳 이상의 주민이 대피했으며 화재 피해 면적은 서울 크기(605㎢)의 두배인 12만2000헥타르(1220㎢)에 달한다. 전날 오전을 기준으로 산불의 3분의 1 이상이 '통제 불가능'으로 분류돼있다고 전했다. 걷잡을 수 없는 산불에 대니얼 스미스 앨버타주 총리는 전날 비상대책위원회 회의를 마친 뒤 주 정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022년 ‘타는 목마름’으로 독재에 맞선 '저항시인' 이지하 사망
2022년 미국 뉴멕시코주 역대 최대급 산불 발생
2014년 지하철 1호선 역주행
2014년5월8일 오후 2시35분께 서울 용산역을 출발해 동인천역으로 가던 코레일 급행 전철이 300m 역주행했다.
역주행 사고 원인은 송내역과 부개역 사이 수도권 전철 경인선 신호기 고장인 것으로 파악됐다.
코레일에 따르면 이 전동차는 경기 부천 송내역을 지나 인천 부평 부개역 방향으로 향하던 중 신호기의 '정지' 신호를 받고 전기공급이 끊기는 오르막 절연구간에 멈춰섰다.
이 때문에 전동차는 가속력을 얻기 위해 300m 뒤로 역주행한 뒤 다시 출발했던 것.
사고 당시 열차 안에 350여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열차는 19분만에 정상 운영됐다.
2009년 '조훈현 스승' 후지사와 타계
조훈현의 실질적 스승으로 유명한 '괴물기사'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84) 九단이 2009년 5월 8일 오전 도쿄 성로가(聖路加) 국제병원서 타계했다.
천부적 감각의 소유자인 후지사와씨는 한국출신 유학생이던 조훈현 九단의 기재에 반해 수백 판을 직접 지도하는 등 실전적인 스승 노릇을 한 기사로 한국에도 많은 팬들을 갖고 있다. 그는 또 술과 도박, 그리고 세 차례에 걸친 암 극복 등과 관련해 숱한 일화를 남겼다.
2005년 노무현대통령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순방
2003년 한국 농구의 ‘별’ 전규삼씨 별세
“늘 검소하셨고 농구를 하면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
이충희 고려대 감독은 9일 한국농구의 ‘별’ 전규삼(전 송도중고 농구코치·사진)옹의 빈소(인천의료원)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지난 8일 저녁 전 옹의 타계소식을 듣고 곧바로 빈소로 달려와 밤을 지킨 강동희(LG)는 “고인의 농구에 대한 사랑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88세를 일기로 작고한 전 옹은 1961년부터 인천 송도고 코치로 농구지도에 전념, 유희형(한양대 겸임교수) 김동광(삼성 감독) 이충희 정태균(국민은행 감독) 홍사붕(SBS) 등을 길러냈다. 김승현(동양)도 그의 지도로 성장했다. 개성에서 태어나 일본 호세이(法政)대를 졸업, 개성 송도고 교사를 거쳤다.
‘송도고 할아버지’로 잘 알려진 전 옹은 당장의 승부를 떠나 기본기와 창의성을 중시하는 ‘생각하는 농구’를 철학으로 삼았다. 대회 때라도 시험 3~4일을 앞두고는 훈련을 시키지 않았으며, 성적이 떨어지면 훈련에서도 제외시킬 정도였다. 96년 코치직을 그만둔 뒤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던 고인은 최근까지도 거의 매주 학교를 찾아 손자뻘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가르쳤다.
2000년 매향리 사태 발생, 미 7공군 전폭기가 경기 화성 매향리에서 폭탄 잘못 투하
1996년 팔라우공화국 쿠니오 나카무라 대통령 방한
1994년 가키누마 센신 스님, 안중근 의사 유품 기증
안중근 의사의 친필 유묵 3점과 관련사진 원본 7점, 한일 강제병합 직전 한국 관련사진 61점이 한국에 기증됐다. 1994년 5월 8일 방한한 일본 가키누마 센신 스님(62. 한-일불교복지협의회 회장)이 이날 조선일보사를 방문, “이들을 소장한 쓰다 고도 스님이 한국정부가 원할 경우 안의사 유묵과 관련 사진, 한국 관계자료 등 총 71점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쓰다 스님이 소장한 안의사 관련품은 안의사가 러시아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강에게 보낸 편지, 여순형무소에서 찍은 정면사진, 안의사 시신을 태우고 형장에서 묘지로 가는 마차, 처형직전 여순형무소에서 홍석구신부 등과 면회하는 모습, 총탄을 맞은 이토 히로부미, 안의사의 재판 광경, 저격에 사용한 권총사진 등 7점과 ‘민이호학불치하문, 불인자불가이구처약, 계신호기소불도’라고 쓰여진 친필유묵 3점이다.
이들 소장품은 쓰다 스님의 작은 할아버지 쓰다 가이준 스님이 1909년쯤 중국 여순형무소에서 직접 입수한 것으로 사진 원본은 유리건판 상태로 보존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쓰다 가이준 스님은 안의사가 복역하고 있을 당시 여순형무소의 포교사로 활동했다
1993년 남북한 첫 직교역 실시 - 설탕, 소주 교환
1993년 1987~1991년까지 부정 입학생 명단 공개
정부는 87년부터 91년까지 전국 대학에 부정 편-입학한 19개대 학생 1천4백여명의 명단을 8일 오전 일괄 공개했다.
이 명단은 같은 기간 교육부가 각 대학에 대해 실시한 감사자료를 취합한 것으로, 정부는 교육부가 감사 당시 학부모 명단을 확보한 경우에 대해서는 이들 학부모의 명단과 직업도 함께 공개했다.
이와 관련, 김영식 대한교원공제회 이사장(63 전 문교부장관)이 7일 임기를 1년 남기고 이사장직을 전격 사임했다.
김 이사장의 사임은 h대를 졸업한 둘째아들(31)이 89년 고려대에 부당 편입학 사실이 물의를 빚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대학집회서 인공기 게양
광주 전남대 부산 동아대에서 “인공기 게양, 북한과의 서신교류, 북한영화 상영 등으로 국가보안법 어김으로써 법을 사문화시키겠다”며 태극기 만국기와 함께 인공기 게양, 철거하려는 경찰과 충돌
1991년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 분신자살
1991년 5월 8일 오전8시 7분경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26세)씨가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폭력살인 만행 자행하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김씨가 자살한 것은 그해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시위진압경찰의 구타로 사망한 후 운동권 학생들이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는 의미로 분신자살하던 와중의 일이었다.
김기설씨가 분신자살한 직후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 파문을 일으켰다. 검찰은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씨를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해 주었다는 혐의로 자살방조죄 등으로 기소했다. 유서의 진위를 놓고 정권과 검찰에 의한 사건 조작이라는 재야 단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기훈씨는 재판 끝에 실형을 선고받고 3년 2개월간 복역했다.
1985년 카프(KAPF)의 실질적 지도자인 팔봉 김기진 사망
1984년 소련 LA올림픽 불참 선언
1981년 한국-일본 의원연맹 재구성
1980년 WHO, 천연두 완전 퇴치 선언
1980년 5월 8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제33차 총회에서 “지구상에서 천연두가 완벽하게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1977년 소말리아에서 마지막 환자를 끝으로, 단 한 건의 새 환자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연두는 고대 로마에서 군대 내에 집단으로 창궐, 군인을 따라 수많은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1492년 신대륙 발견 후 아메리카 대륙에선 100만명 이상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잉카제국과 아즈텍 문명의 종말을 앞당긴 것도 유럽인이 묻혀온 천연두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18세기 초 영국 사회에서 빼어난 미모와 지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메리 몬태규 부인의 얼굴을 곰보로 만든 장본인도 바로 천연두였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지난 1967년 전세계에서 1000만명이 발병, 200만명 이상이 사망했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엔 1만여명이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다.
천연두 치료 및 예방에 전기를 마련한 사람은 영국의 외과의사 에드워드 제너였다. 제너는 소의 질병인 우두에 걸렸던 여자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을 근거로 천연두 백신 실험을 했다. 제너의 실험은 성공이었다. 제너의 성공은 인류 의학이 세균 정복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음을 의미했다. 균을 약하게 한 뒤, 사람의 면역성을 높이는 ‘백신’ 예방법의 시발이었다.
이후 백신연구는 프랑스의 파스퇴르에서 정교화-체계화됐고, 과학자들은 장티푸스 콜레라 페스트 결핵 등 각종 전염성 질병에 대한 예방백신들을 잇따라 개발해냈다.
1980년 자원개발연구소, 충북 옥천서 우라늄광 발견 발표
1979년 미국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 사망
1973년 레바논 군사정부 수립
1973년 어버이 날 제정
1956년부터 시행하던 어머니날이 1973년부터 어버이 은혜에 감사하고 효사상의 미덕을 함양하기 위해 어버이날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유래는 미국에서 시작된 어머니날이 세계각국에서 어머니란 또는 마더리 선데이 로 기념하고 있다
1972년 해방후 처음으로 일본인 학교, 유치원 서울에 개설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 북베트남 모든 항만에 대해 기뢰봉쇄 선언
1954년 인도지나 문제를 토의하는 제네바회담 개막
1951년 국회 정-부의장 개선 (의장 신익희)
1948년 국제적십자의 날 제정
국제적십자사와 적신월사의 뿌리는 1859년 프랑스와 사르디니아 연합군 간 벌어진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스위스 제네바 출신의 앙리 뒤낭(Henri Dunant)에게서 시작되었다. 뒤낭은 그가 목격했던 전쟁의 참상을 기록해 1862년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전시에 발생하는 부상자를 위한, 평시에 만들어져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는 구호기구를 제안했는데, 이 제안이 후에 적십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는 또한 강제력을 가지고 전쟁터의 부상자를 구호하도록 하는 국제적인 원칙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제네바 협약의 기원이 되었다.
그가 제안한 구호기구는 처음에 국제부상자구호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for Relief to the Wounded)라는 이름으로 출범했으나 곧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로 이름을 바꾸었다. 1863년 10월 26일 ICRC 총회가 개최되어, 부상병을 위한 국가별 구호 단체의 설립을 결정했는데, 이것이 각국의 적십자사 및 적신월사 탄생의 기반이 되었다. 결의안 채택 후 뷔르템베르그, 올덴버그 대공국, 벨기에, 프러시아에 최초의 적십자사가 설립된 이래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자국의 적십자사가 설립되었다.
1864년 8월에는 16개 국의 정부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최초의 제네바협약이 채택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근대적인 인도적 협약이었다. 이해 말까지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및 바덴 대공국이 협약을 비준했다. 적십자사가 주로 기독교 국가들에 의해 운영되자,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도 적십자사와 같은 활동을 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을 모티브로 한 적신월사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919년에는 국제적십자및적신월연맹(IFRC, International Federation of Red Cross and Red Crescent Societies)이 설립되었는데, 이 연맹은 각국의 적십자사들과, 이슬람권에 있는 적신월사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사무국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적십자사와 적신월사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에 존재하고 있으며, 약 190개의 국가 소위원회가 연맹의 정회원으로 인정되고 있다. 1948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국제적십자운동의 창시자 장 앙리 뒤낭의 생일을 기념하고 적십자의 정신을 기리고자 매년 5월 8일을 ‘세계 적십자와 적신월사의 날’로 제정했다.
1945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 무조건항복을 권고하는 대일성명 발표
1945년 자렛 출생 - 20세기 후반의 가장 독창적이고 활동적인 재즈 음악가
1945년 알제리아에서 반프랑스 폭동
1939년 스페인 국제연맹 탈퇴
1936년 독일 역사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 사망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18년 7월, 지극히 비관주의적인 관점에서 서구문명의 몰락을 예언한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 제1권이 출간됐다. 2권은 1922년에 출간됐다.
세계사를 이집트·인도·중국·그리스·로마 등 9개의 유기적인 문화권의 흥망성쇠로 분석하면서 서유럽과 미국 문명도 결코 흥망성쇠의 사이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리스·로마가 몰락할 때의 징후가 서구문명에서도 발견되므로 결국 서구의 몰락은 운명적이라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였지만 정통학자들은 이를 외면했다. 슈펭글러가 고대, 중세, 근대라는 기존의 3단계 역사 구분방식을 단선적이고 근시안적이라고 비판한 것도 못마땅한 데다 그의 사료 취급방식이 부정확하고 표면적인 정보에만 의지했다는 것이다.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난 슈펭글러가 젊어서 철학, 역사학, 수학, 예술 등을 두루 섭렵하고 저술에만 전념하기 시작한 것이 1911년 그의 나이 31세 때였다. ‘서구의 몰락’ 이후 한때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기울어 1933년에 출간된 ‘결정의 시각’에서는 의회제·민주주의·사회주의·유색인종 등을 맹렬히 비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치가 그의 페시미즘(비관주의)을 인정하지 않고 그 역시 인종차별에 반대하면서 나치와 멀어져 말년에는 고독과 불우한 생활을 보내다 1936년 5월 8일 뮌헨에서 56세로 생을 마쳤다.
1931년 세계최초의 TV 야외방송, 런던에서 시작
1926년 영국의 방송인, 작가 애튼버러 출생 - 혁신적인 텔레비전 교육 프로그램으로 유명
1923년 영화배우 허장강 출생
1922년 김수환 추기경 출생
1911년 영국 청국 아편 협정 체결
1903년 프랑스 화가 고갱, 남태평양의 섬에서 심장병 발작으로 사망
1902년 경의선(서울-개성) 기공
1889년 고하 송진우 출생
1886년 코카콜라 시판
1886년 5월 8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시의 약국에서 한 시럽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물 코카콜라의 탄생이었다.
코카콜라의 원래 이름은 코카와인(cocawine)으로 애틀랜타시의 존 펨버튼 박사가 1886년 우연히 발명한 시럽 덕분에 탄생했다. 당시 시럽에 탄산을 섞어 친구들에게 권하자 새롭고 상쾌한 맛이라는 반응이 쏟아졌고 이에 고무된 펨버튼이 얼마 뒤 약국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곧이어 경리사원의 권유에 따라 시럽의 이름은 코카콜라(Coca-Cola)로 개칭됐다.
5월 29일자 '애틀랜타 저널'에는 코카콜라의 첫 광고가 실렸다. "코카콜라 맛있다! 상쾌하다! 활기를 준다! 기운을 북돋운다!"는 문구였다. 이후 펼쳐진 코카콜라 마케팅의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코카콜라는 옥외광고의 원조이기도 하다.
시골 약국의 음료수였던 코카콜라를 본격적으로 상품화한 사람은 캔들러였다. 1887년 펨버튼이 죽자 2,300달러에 일체의 권리를 사들인 캔들러는 오늘의 코카콜라를 만든 장본인이다.
캔들러는 시럽 개선 실험에 착수해 '7X'라는 첨가물을 만들어냈다. 7X는 지금까지도 제조방법을 비밀에 붙이고 있는 첨가물이다. 독특한 곡선미로 여체를 연상시키는 코카콜라 컨투어(등고선)병은 1915년에 디자인됐다. 당시 백과사전에 수록된 코코넛의 일러스트에서 힌트를 얻어 밋밋하고 직선적이던 병에 세로 선을 넣어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날의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이미지도 코카콜라가 만들어낸 것이다. 음료수 비수기인 겨울철만 되면 고전을 면치 못하던 코카콜라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창조한 광고모델이 바로 빨간 옷의 뚱뚱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였다. 그전까지 산타는 굴뚝을 드나들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요정처럼 묘사됐었다 .
한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단어로 'OK!'에 이어 '코카콜라'가 2위에 랭크됐다고 한다.
1884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 출생
1880년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 사망
1871년 미국 영국 워싱턴조약 체결
1864년 한국 근대불교의 개혁운동가 백용성 스님 출생
1828년 국제적십자 창시자 앙리 뒤낭 출생
1828년 적십자운동의 시조인 스위스의 앙리 뒤낭 출생
국제적십자의 창시자 앙리 뒤낭이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본래 사업가였던 뒤낭은 1859년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 지역을 여행하다가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 전투에서 부상병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전쟁과 재해현장에서 헌신적이고 자격 있는 국제구호단체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1864년 12개국 대표가 제네바에 모여 ‘제네바 협약’을 채택ㆍ조인하면서 적십자운동이 시작됐다.
그는 결국 사업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파산했고, 그 뒤 1867년 제네바를 떠나 가난하게 살았으나 계속해서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 노예제도 폐지, 국제적 중재, 무장해제, 유대인 국가수립을 위해 힘썼다.
뒤낭은 1901년 스웨덴 스톡홀름 개최된 제1회 노벨상 시상식에서 적십자 운동의 공로로 ‘제1호’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노벨상의 수상 시비는 첫 해부터 계속돼, 뒤낭의 노벨평화상 수상 역시 노벨의 유언 취지와 어긋난다는 비난을 받았다. 뒤낭이 한 일은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쟁의 공포를 어루만지면서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오히려 전쟁을 인간화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국제적십자운동은 평상시 재난구호와 취약계층 지원을 주 임무로 하는 국제적십자연맹(IFRC)과 무장충돌지역의 희생자 보호지원을 하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그리고 IFRC의 179개 회원국이 3대 축을 이뤄 사업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05년 고종황제 칙령 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제정하면서 대한적십자사가 탄생했으며, 1949년 대한적십자사조직법이 공포되면서 오늘의 조직에 이르고 있다.
1800년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가 러벳 출생 - 선거개혁을 요구하는 `인민헌장`(1838)의 초안 작성
1788년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흥망사` 전6권 완간
1660년 영국 왕정복고
1592년(조선 선조 25년) 이순신, 적진포에서 왜 수군 섬멸
1442년(조선 세종 24년) 측우제도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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