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아모 3,1-8; 4,11-12
복 음 : 마태 8,23-27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사람이 비가 내리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강으로 투신하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방관했습니다.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또 자기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냐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이 여인은 강으로 투신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이 사람은 큰 문제를 겪게 되었습니다.
기억 속에서 여인은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투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후회가 밀려옵니다.
만약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말렸다면
이런 기억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도덕성과 인간성이 결여된 자기의 무관심이
이제 자기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카뮈의 소설 내용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대형 참사를 겪은 당사자는 큰 트라우마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단순히 그때의 사건 그 자체 때문일 때도 있지만,
그 안에서 살아남은 자기가 하지 않았던 행동에 대한 후회가
아픔으로 자리 잡게 되어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이렇듯 자기 기억을 만드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끔찍한 기억을 간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보살피고 책임지는 것, 나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했습니다.
그 누구도 나와 상관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나와 상관있으며 나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런 관계 안에 살아갈 때,
지금 사는 이 세상에 이미 온 하느님 나라가 완성 되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완벽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계속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면서 사랑의 반대편에 서려고만 합니다.
그때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처럼 외면하신다면 어떨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외면하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서둘러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약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보았던 많은 기적과 말씀에서
믿음을 굳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겁을 내고 울부짖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괘씸하기도 한 우리의 모습을
제자들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임에도 당신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면하지 않는 사랑을 우리도 실천해야 함을
당신이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무관심한 모습이 아닌,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보호 아래 영원히 머물 수 있습니다.
불안할수록 더 큰 믿음이 필요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굳센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믿음이 큰 만큼 하느님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믿고 의탁하는 만큼 강하고 깊게 만납니다.
풍랑이 이는 호수에서 같은 배를 탔는데 어떤 이는 잠을 자고 있고,
어떤 이는 겁에 질려 허둥거립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있었기에
무섭지 않고 절박한 생존의 난국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는 위기는 아예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깨운 것을 보면 아직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품 안에 있었으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였지만 철저히 맡기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아마 우리도 같은 위험에 처했더라면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려움에 맞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청했다는 것입니다.
허둥대던 제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를 가지고 선포한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고,
풍랑과 파도를 지배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무서움의 차원을 넘어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면서 커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따른다기보다 따름으로써 성장합니다.
혹 어려움에 직면할 때 아직도 허둥대고 있다면 믿음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1베드5,7).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25.3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수많은 폭풍우 속, 시련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느끼지 못한다고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주님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주님께 떠맡기십시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성경을 보면 롯의 가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하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19,26).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민수21,9).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역사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말입니다”(까롤로 까레또).
믿음 안에서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앞 장면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도 그 배에 오르시어 동행하십니다.
사실 배는 항구에 매여 있을 때 안전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항구에 가만히 정박해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항해하라고 만들어졌습니다.
항해하면 당연히 풍랑을 만나고 표류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공동체)라는 ‘배’, '가정'이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런데 ‘배’ 안에 그분이 함께 계시는데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세시풍랑에 배가 휘청거릴 때도 있고, 방향을 잃고 헤맬 때도 있고, 위험에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도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킬 수 있으시지만, 그 풍랑 속에서도 잠들어 계십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가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마치 물고기들이 맘껏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서도 물 밖에 나와 숨을 깔딱거리면서야
비로소 자신이 헤엄칠 수 있었음은 물이 있는 까닭이었음을 알게 되듯이,
새들이 맘껏 하늘을 날다가도 새장에 갇혀서야 하늘이 있어서 날 수 있었음을 알게 되듯이,
그렇게 우리는 풍랑을 맞고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내가 키잡이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물결이 들이치고 배가 흔들려도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그분이 아니라 나 자신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신 그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나야 할 이는 그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분이 함께 계심에도 두려워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키잡이십니다.
그러니 이제 결코 겁낼 일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순수한 의탁과 신뢰입니다.
곧 그 속에서 함께하시는 그분을 의탁하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오늘도 그분께서는 배가 하늘 항구에 닿기까지 우리를 이끄시고 동반하십니다.
단지 동반하실 뿐만 아니라 배를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주무셔도 깨어 계셔도 우리의 키잡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죽으면서도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주님!
당신은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시지만,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고통과 수난을 몸소 겪으시지만, 온갖 질병을 고치시는 분,
못에 박히고 창에 찔려 죽임당하지만,
부서진 뼈와 마음의 상처를 새롭게 하고 죽은 이마저 살리시는 분,
잠들어 계셔도 깨어 계셔도 저의 키잡이이신 당신이 진정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꾸르실료 봉사자들을 만나려고 휴스턴에 다녀왔습니다.
댈러스에서 왕복 10시간 걸립니다.
지난번 꾸르실료 교육 때에 휴스턴 봉사자들이 댈러스로 올라왔고,
꾸르실료 교육이 잘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저도 한번 내려가 보고 싶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접 가보니 오고 가는 길이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어머니들이 불평불만이 많았던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너도 너 닮은 자식 한번 낳아서 키워 보아라.”
직접 내려가서 봉사자들을 만나니 모두 좋아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이 절대 쉽지만은 않습니다.
발품도 팔아야 하고, 시간도 내야하고, 장거리 운전에 허리도 아프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이 보람 있기 때문입니다.
보람 있는 일은 더불어 사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보람 있는 일은 하느님께 축복받습니다.
매일 아침 산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는데 제가 가는 길에 저를 보는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출근길에 제가 지나가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고 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신독(愼獨)은 대학 6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군자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던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충실하게 가는 것입니다.
남이 볼 때면 선을 행하고, 혼자 있을 때는 악을 행한다면 이는 군자의 길이 아닙니다.
시편 139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제가 새벽 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고 해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
하느님, 저를 살펴보시어 제 마음을 알아주소서. 저를 꿰뚫어 보시어 제 생각을 알아주소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모를 거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공기가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었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몰라서 용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용서를 청하면 눈과 같이 희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용서를 청하면 양털처럼 희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슨 명예나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둘째,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시급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는 가운데 2024년도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이 긴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 버려두어라.”
죽은 것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미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생계유지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리며 7월의 첫날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제자 됨의 본질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신다.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속된 것에서 거룩한 것으로,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건너가라고 명령하신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끝없는 탈출이다. 그때 율법 학자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 학자는 그분이 가시는 곳을 알지 못했다. 막연한 짐작뿐이었다.
예수님은 최후의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고 계셨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20절).
그분은 차림새도 수수했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 나라에 대해 알고 계셨지만, 임금이 되기를 마다하셨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주십시오.”(21절)
이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려면,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카인처럼 둘째가는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는 이들을 위하여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가족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22절)
이 말씀은 죽은 것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콜로 3,5)
이런 것들은 죽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던져버려야 한다.
몸 전체에 병이 옮지 않도록 베어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신 분이다.
당신이 하느님이심까지도 모두 버리시고 당신을 낮추신 분이시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곳에 즉 아버지의 뜻 안에 당신의 거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도 주님을 따른다고 할 때, 철저히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뜻 안에 머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자녀이다.
내 마음은 호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오늘은 내 마음은 호수라는 주제로 나눔을 할까 합니다.
내 마음은 호수여 라는 노래가 있잖습니까?
내 마음도 오늘 복음의 호수처럼 파도가 크게 일 수도 있고,
그러던 내 마음이 아주 고요해질 수도 있지요.
어떤 때 우리는 한마디 말에 마음이 요동칠 때도 있고,
좋지 않은 일이 생겨 마음이 몹시 불안할 때도 있지요.
이것이 외인성 마음의 동요라면
내인성 마음의 동요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욕망이 들끓습니다.
어떤 대는 주장이 아우성칩니다.
어떤 때는 분노가 가득합니다.
어떤 때는 걱정이 가득합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 안에서 요동칠 때
적절한 프란치스코의 권고가 있습니다.
<악습을 몰아내는 덕>의 일부분입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동요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걱정도 방황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권고하듯 동요를 잠재우는 데는 덕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덕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잠재웁니다.
인내와 겸손의 덕은 분노와 흥분을 몰아내고 잠재웁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덕을 얘기하다가 고요와 묵상도 얘기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마음의 동요는 잠재우고 고요는 얻는 것입니다.
이때의 묵상은 오늘 주님께서 파도를 잠재우는 것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기도는 ‘잠잠해지고 고요해져라!’라고
주님께서 내 마음의 파도를 꾸짖으시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왜 이리 더디 오십니까? 대체 어디 계십니까?
양승국 스티파노 신부
신앙 안에서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시계 바늘과 인간의 시계 바늘의 속도가 현격히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시편 작가의 말씀처럼 주님께는 천년도 하루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기에 인간은 너무 조급하고 성급한 반면,
주님 측의 반응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고 더딥니다.
그러나 그분의 시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갈릴래아 호수에서 큰 풍랑을 만나 허둥지둥 대던 제자들의 모습과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크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높은 파도에 배가 기우뚱거리고 배 안에 물이 가득 차게 되자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비상사태를 맞아 제자들은 업무를 분담했을 것입니다.
한 제자는 더 세게 노를 젓고, 다른 제자는 배 안에 고민 물을 바가지로 퍼내고,
또 다른 제자는 배의 방향을 잡아 주고...
다들 한번 살아보려고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는 순간,
제자들은 기가 차지도 않은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야단을 피우는 와중에 스승님께서 쿨쿨 주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강도 높은 전도 여행에,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에,
예수님의 육체는 과부하가 걸렸을 것입니다.
어디 앉기만 앉으면 꾸벅꾸벅 조셨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체험을 해봤기에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기가 차지도 않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리고 볼멘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
조급한 제자들에 비해 예수님은 한없이 느긋하십니다.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제자 교육을 단단히 시키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하늘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많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의 신원, 당신의 정체성을 말과 동시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분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즉시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돌아보니 저도 참, 믿음이 약했습니다.
주님의 시간이 되면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해 주실텐데,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왜 이리 더디 오시냐고, 대체 어디 계시냐고, 투덜거리고, 갖은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조급한 마음을 떨치고 좀 더 너그럽고 큰마음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 그분께서 내 안에 언제나 현존하신다는 진리,
그분께서 내 인생 여정에 굳건히 동반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