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제1독서 : 에페 2,19-22
복 음 : 요한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 삶이 너무 고단하고 힘들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모두 힘들다는 것입니다.
특히 직장 생활은 자기와 전혀 맞지 않았지만,
그만두면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해서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집에 가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 사고만 치는 아들, 계속 잔소리만 늘어놓는 아내로 인해
집에 아예 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자기 어려울 때만 도와달라고 찾아오지,
평상시에는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적인 말도 서슴지 않고 말하니
친구와의 만남도 불편함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현자를 찾아가 어려움을 하소연했습니다.
이 현자는 양팔을 쭉 펴라고 하더니만 손바닥 위에 여러 권의 책을 올려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충분히 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서 도저히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현자가 말합니다.
“손 위의 책들이 바로 당신을 지금 힘들게 하는 고민입니다.
지금 편해지려면 책이 줄어들어야 가능하겠지요?
그렇다면 형제님이 가지고 계신 힘들게 하는 고민의 책 중에서 무엇을 빼시겠습니까?
직장, 아버지, 아내, 자녀, 친구….
빼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땅에 모두 떨어뜨리고 말 것입니다.”
현자의 말이 정답입니다. 모든 고민을 다 들고 갈 수 없습니다.
자기 혼자 고민을 다 들고 있겠다는 것은 욕심이고 겸손하지도 또 지혜롭지도 않은 모습입니다.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것과 또 함께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때로는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이런 용기를 갖춘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일화는
예수님 부활에 대한 공동체의 증언을 믿지 않고
특별한 체험을 요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지금을 사는 우리 모습에서 너무나도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면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하느님의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자기 삶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손길이 지워지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죽음 이후 다락방에 숨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처음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혼자만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혼자 행동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함께하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고 또 믿음도 잃었던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가 내려놓아야 할 것, 또 함께해야 할 것,
그리고 주님께 의지해야 할 것을 따져보면 어떨까요?
믿음은 선물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믿음의 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 체험하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토마스라는 사람은
주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깨우러 갈 때 거기에 있었고,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였으며
예수님께서 고별사를 할 때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한
용맹심과 충성심이 높은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20,25)하고 말하였을 때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솔직한 답변입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
우리를 위한 사랑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한 토마스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같이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는데 특별히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20,20,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힘과 능력에 믿음을 두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믿음을 둡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드레 뒤에 다시 오셨는데 그것은 토마스에 대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 되어 실망할 수 있는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섬세한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안배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토마스 혼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혼자만 왕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버려두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데 장애가 될 요소를 없애주시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결국 토마스는 감히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아챘고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신 말씀이
‘못 자국을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토마스가 했던 말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면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제자는 토마스가 처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진정한 하느님으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믿음이었듯이 오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그렇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던 구애 받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서 행복하길 바랍니다.
거짓으로 믿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편이 훨씬 더 주님 마음에 듭니다.
따라서 정직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름만 신자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토마스의 훌륭한 점은 형제들의 증언을 의심하면서도
형제들과 함께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심과 싸울 때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토마스는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기에 믿음의 최종적 자리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시험받고 도전받아야 합니다.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예수회 존포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는 비록 자리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한
그를 환히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엠마오를 가던 제자들이 빵 쪼개는 만찬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본 것처럼,
토마스도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찢어지고 구멍 뚫린 당신 몸의 성찬이었습니다.
토마스는 그때서야 비로소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마침내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런데 대체, 무엇이 토마스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한 것일까?
토마스는 동료들 중 자신만 주님을 뵙지 못한 것이
마치 자신만이 부활하신 주님을 뵐 자격이 없는 자로 여겨져 더 큰 슬픔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 뵙기를 더더욱 고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더욱더 확인하고 싶었고,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보게 된 것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뵌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앞에서 모든 의혹과 자책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주님의 끝나지 않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상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표시임과 동시에,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남김없이 쏟아부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눈에 보이는 상처를 통에,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에게는 사랑의 성찬이 베풀어진 것처럼,
토마스에게는 사랑의 성혈이 베풀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마음이 열리고, 믿음의 눈이 열려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사랑을 베푸시는 성찬을 통해,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 그분의 사랑을 통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사실, 보이는 것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히브리서>에서 말씀해 주듯이,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그러니 토마스가 본 것(보고 인식한 것)은 상처였지만,
믿은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보지 않고는 믿지 못했지만, 보고서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또 보고 보지만,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마치,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던 히브리인들이 보지 못해서 못 믿었던 것이 아니라,
보고도 목이 뻣뻣해져 하느님을 믿지 안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보고도,
특히 매일 영성체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고뇌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 가까이 계신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찢어진 가슴을 열고,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증거해야 할 것도 역시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 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금은 ‘줄’ 서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더 빨리 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덜 복잡하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는 ‘줄’ 서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버스가 한 대 오면 승객들이 버스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버스는 정류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정차했고,
승객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승차하려고 좁은 문을 향했습니다.
저도 그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등교하기 위해서는, 출근하기 위해서는 버스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차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달리는 차에서 승객을 안으로 밀어 넣었고,
버스 안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같았습니다.
지금은 자동차가 많이 보급되었고, 지하철도 노선이 늘어서
예전처럼 만원 버스를 경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버스가 올 때까지 길게 줄을 서서 스마트 폰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비행기 여행을 하면서 입국과 출국을 위해서 줄을 서는 일이 있습니다.
출국을 위해서는 3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라고 합니다.
대기하는 사람이 많기도 하고, 뜻하지 않는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터미널이 바뀌기도 하고, 출발 시간이 바뀌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입국을 위해서도 줄을 서야 합니다. 보통은 1시간 정도 기다리게 됩니다.
어떤 직원은 빠르게 입국 심사를 하지만 어떤 직원은 까다롭게 입국 심사를 하기도 합니다.
앞에 심사받는 사람이 서류에 문제가 있으면 직원은 아예 문을 닫고,
심사받는 사람을 데리고 나가기도 합니다.
그런 줄에 서 있으면 평소보다 늦게 입국하게 됩니다.
입국과 출국의 절차만 간단해도 여행의 피로가 많이 감소할 것 같습니다.
저도 환승하는 과정에서 비행기를 놓칠 뻔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연착하였고, 환승 하는 비행기의 터미널이 바뀌었습니다.
서둘러서 뛰었지만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문을 닫았습니다.
다행히 저처럼 늦은 승객이 7명이 더 있어서 직원은 닫았던 문을 열어주었고,
저는 무사히 다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계산하기 위해서 줄을 섰습니다.
제 앞에 있는 분이 미사 반주 봉사하는 자매님이었습니다.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매님이 이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라면서
제 카트에 있는 것들까지 계산해 주었습니다.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떠올라서 웃었습니다.
줄과 관련 해서 재미있게 읽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양파 한 뿌리가 생각났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옛날 못된 할머니가 살았는데, 죽고 나서 보니 착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기에,
악마들은 할머니를 불바다 속에 던져 버렸다.
그래도 이 할머니의 수호천사는 뭔가 구제할 거리가 없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단 하나의 선행을 기억해 내고는 하느님께 고했다.
할머니는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 양파를 가지고 가서 할머니가 양파를 붙잡고 나오게 하라.
만약 불바다에서 나오면 천국으로 가지만, 양파가 끊어진다면 불바다에 남게 되리라.‘
수호천사가 내민 양파를 붙잡고 할머니가 조심조심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다른 죄수들이 할머니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고!’
그녀가 이 말을 하기 무섭게 양파는 뚝 끊어져 버리고 할머니는 불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천사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떠났다고 한다.”
그렇습니다.
나만 잘 살겠다고 하는 이기심의 줄은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하지 못합니다.
더 많이 채우려는 권력과 재물 그리고 명예의 줄 또한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하지 못합니다.
시대를 탓하고, 부모를 탓하는 불평과 원망의 줄도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줄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의 줄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처럼, 절망의 터널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는
그 희망의 줄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센 풍랑에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왜 이리 믿음이 약하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줄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사도 성 토마스 축일이다.
토마스라는 말은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복음에 나타나는 대로 토마스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는 말로 보인다.
쌍둥이라는 것은 형제가 있는 쌍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토마스 사도는 페르시아와 인도에 가서 선교하던 중,
마드라스(현: 첸나이)에서 순교하였으며, 그곳에 성 토마스 성당을 지어,
지금 중앙 제대 아래 안장되어 있다.
인도에서는 성 토마스가 인도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으며,
많은 신자가 세례명으로 토마스를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성 토마스는 건축가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는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후에 토마스에게 나타나신다.
왜 곧바로 나타나시지 않고 그렇게 늦게 나타나셨을까?
그것은 토마스가 다른 사도들에게 계속 이야기를 듣고 더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뵙고 믿게 될 준비를 하시느라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소망을 들어주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이제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분과 부활하신 분이 같은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사람들의 모습이며,
이 고백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오늘 복음에서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하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말씀하신다.
의심하는 제자가 스승의 몸에 난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였다.
토마스는 우리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믿음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해서 얻으신 영광이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예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도 신앙을 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고 해도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절대로 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바쳐서 얻으신 영광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새로운 태어남을 의미하며,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태어남이다.
이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 토마스 사도와 같이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계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우리도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토마스 사도께 도움을 청하면 좋겠다.
토마스를 따라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저의 주님, 저희 하느님!”
토마스를 따라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토마스를 따르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의심하거나 불신하신 적이 없으니
우리가 믿음으로의 여정을 주님을 따를 이유가 없지요.
반대로 토마스는 제일 의심이 많고 믿지 못하던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제일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에 도달했으니
토마스처럼 의심 많고 믿지 못하는 우리는 토마스가 우리 모델로 딱 맞지요.
그런데 우리는 토마스의 믿음 여정을 본받아야 하지만
의심과 불신도 토마스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의심과 불신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한 토마스처럼 딱 부러지게 불신해야 하는데
우리는 확고히 믿지 못하면서도 불신의 자기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에,
그리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지 않고 대충 의심하기에
의심을 끝장내지 못하고 여전히 의심에 머물곤 하지요.
우리는 나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한 토마스처럼
자기의 불신에 솔직할 수 있고 의심에 철저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토마스는 제자들 공동체를 떠나있다가 8일 만에 나타납니다.
왜 떠나있었을까요? 어디 있었을까요?
진짜 절망했고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의 떨거지들과도 절연하고 완전히 혼자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절망해 본 사람은 압니다.
절망의 절연입니다.
어쩌면 동굴에 숨어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서 고독하게 자기와만 싸우지 않고
분명히 하느님과 마주하며 하느님과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제자들 공동체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할 때 토마스처럼 자기 절망 안에만 갇히지 않고,
하느님과 마주하며 하느님과 싸웁니까?
어쨌거나 이런 과정의 여드레가 지난 다음 공동체에 돌아왔는데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부활 체험은 공동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 혼자서 부활 체험했더라도 체험한 뒤에는 공동체와 나눕니다.
부활과 생명과 사랑과 기쁨은 어디에 갇히지도 않고
그것들을 내 안에 가두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동굴에 혼자 있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공동체로 돌아온 토마스에게 나타나시고 이제 부활을 믿으라고 하시는데
부활을 믿으라고 하심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때 토마스는 비로소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분이 하느님이시고 자기의 주인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의혹과 의심은 말끔히 가시고 주님만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토마스의 믿음 여정을 따르라고 주님의 초대를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홀로 어두컴컴한 회의와 불신의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던 토마스 사도!
양승국 스티파노 신부
전승에 따르면 토마스 사도는 성격이 조금은 내성적이었지만
마음이 무척이나 너그러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다른 그 어떤 제자들보다도 충실히 스승님을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받았던
심리적, 정신적 충격이 엄청나게 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토마스 사도의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그는 점점 자신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의지하고 희망할 대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열 제자들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는데,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던 이유도 뻔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의욕이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만사가 귀찮아졌습니다.
그 결과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처박혀 있었을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그의 실망감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얼마나 실망하고 좌절했으면
예수님 부활을 직접 목격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나 베드로 사도의 증언도 그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간 토마스 사도는 홀로 어두컴컴한 회의와 불신의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너무나 기뻐 환호하고 용약하고 있는데
토마스 사도 혼자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토마스 사도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증언하는 다른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런 토마스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뒤에 발현하셨는데,
토마스 사도가 그토록 바라고 있던 뚜렷한 증거를 하나하나 보여주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 순간 토마스 사도는 마치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순식간에 모든 저항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약한 믿음은 한순간 크게 비약하게 되었습니다.
연못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폭우가 와서 진흙들이 많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연못이 흐려졌습니다.
원래 연못 안에는 크고 예쁜 비단잉어들이 살고 있었는데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잉어의 멋진 자태를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진흙탕 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부족한 우리들 영혼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흙으로 흐려진 연못 같은 우리들의 눈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잡다한 걱정거리들, 유혹 거리들로 우리의 영혼이 흐린 상태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진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작업입니다.
그 작업이 바로 침묵이요 기도입니다.
창조론을 믿지 않는 이유가 과학적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는 의심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사실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봤다고 하면 믿어야 할 텐데요.
그런 이유는 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직접 자기 손으로 예수님 상처를 만져봐야겠다고 말합니다.
증거가 확실해야 믿겠다는 사고입니다.
과학적 사고를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진화론만 과학적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과학을 많이 이용하기는 하지만, 과학적이지는 않습니다.
진화라는 말 자체가 발전한다는 뜻이고 저절로 발전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배워야 하고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흡수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퇴화하는 게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들은 유전자 변이로 설명하려고 하지만, 몸에서 유전자가 변이된 것을 암세포라 부릅니다.
더 완전해지는 변이는 없습니다.
개가 유전자가 변이되면 두 발로 걷고 말도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제가 신앙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창조론도 이치를 따지는 과학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성적 사고를 한다고 자부하는 현대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을 만나게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자임을 피조물이 알아주는 것을 가장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하는 아버지에게 자녀에게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냥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영화 ‘블랙’은 헬렌 켈러와 같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여
자신이 사람인지 동물인지도 모르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이 아이에게 엄마, 아빠란 말 한마디 듣기 위해 엄청난 돈을 써 가며 교육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이가 엄마, 아빠란 말을 했을 때 그들의 모든 고생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원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당신을 알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눈을 감아버리고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서도 하느님을 믿었다가 점점 과학자가 되어가며 의심하고 하느님을 버렸던 이가 있습니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알려는 마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31세의 파스칼은 심오한 종교적 경험을 합니다.
그 경험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체험을 기억하기 위해 양피지에 써서 옷 안쪽에 꿰매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의 글을 보면 오늘 토마스 사도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 성령의 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철학자와 학자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확신,
확신,
감격,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너의 하느님.
너의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 이외에 이 세상과 온갖 것에 대한 일체의 망각.
하느님은 오직 복음서에서 가르치신 길에 의해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습니다.
환희,
환희,
기쁨,
환희의 눈물.
나는 당신에게서 떠나있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당신이 보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당신을 저버리고, 피하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오직 복음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지도자에게 전적인 순종.
이 땅에서의 잠깐의 노력을 통해 얻는 영원한 기쁨.
나는 당신의 말씀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파스칼의 신과의 만남과 그에 따른 개종은 그의 유명한 작품 ‘팡세’를 포함하여
그의 철학적, 신학 저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조금은 잔인한 말이지만 지금 길을 찾고 있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면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냥 믿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믿기를 원하면 반드시 만납니다.
믿기 싫은 이유는 자기 뜻대로 살고 싶은데 창조자가 있다면
창조자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가 있는 편을 택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사는 고통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사고를 하더라도 믿고 싶으면 반드시 믿어집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