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아모 7,10-17
복 음 : 마태 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는 가톨릭 신부입니다.
1999년 1월 28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지금까지도 사제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은 했을까요? 당연히 안 했습니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신부는 독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처럼 신앙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 또 사회적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많이 보기에, 이제는 사제로 독신을 지킨다고 해도
그렇게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내가 세 명이나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곳에 사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이나 결혼했고, 세 번 모두 헤어졌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세 번이나 결혼하셨냐고 물으니,
“다 다른 줄 알았어요.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달라질 줄 알았지만 살아보니 똑같더라고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아내가 문제라는 생각에 이혼하고 결혼했지만,
다음 아내도 또 다음 아내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결국 누가 문제일까요?
한 사람과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와도 제대로 지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과 잘 지내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낸다고 하더군요.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주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따라서 지금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 어떤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좋은 관계인가요? 나쁜 관계인가요?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중풍 병자가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뜻에 맞게 산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저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서 치유를 받습니다.
어쩌면 중풍 병자와 데리고 온 사람들의 관계를 본 것이 아닐까요?
중풍 병자인 자신을 데리고 올 정도로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라면
주님 당신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보신 것이지요.
그래서 용기를 내라는 위로의 말씀을 듣고 더불어 죄의 용서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하고,
또 죄의 용서라는 특별한 은총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해 나 역시 주님과 친밀한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만나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이웃에 대해 계속해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나 역시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걸작품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근원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 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는 몸이 마비가 된 지라 제 발로 걸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치유에 앞서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당시에 질병은 죄의 결과로 여겨졌고, 이 병자 역시 자신의 죄책감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감히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 이 놀라운 사실,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아니 이 무뢰하고 불경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마태 9,3)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죄를 용서받았다.”고 누가 선언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용서받았음을 누가 알 수 있을 까요?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히에리무스는 말합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중풍병자가 용서받았는지는 용서하실 수 있는 오직 한 분만이 확실히 아십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을 아시고”(마태 9,4)
전지하신 하느님의 특성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테 9,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당신이 용서권자요, 하느님이심을 직접 드러내시며, 당신의 권한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의 치유를 보여주십니다.
곧 영적 표징의 증거로 육체적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가 평상을 가지고 가게 함으로써
육신이 병과 고통에서 벗어났음을 똑똑히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이 아담의 죄로 떨어져 나온 낙원으로 가는 길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힐라리우스).
이렇게 영혼과 육신의 마비 모두를 고쳐주시며,
당신께서 영혼과 육신 모두의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마태 9,8).
한편, 오늘 복음은 ‘용서’가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처럼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평상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평상을 가지고 가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의 상처를 가지고 가셨듯이,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이 흘러나오는 그 상처를 더 이상은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그 구원의 샘에서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픈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평상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1995년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성화의 날’로 선포하였습니다.
사제들이 먼저 성화 되어야 교회가 성화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예부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였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거룩한 모습을 보이면
공동체도 그런 방향으로 나갈 것입니다.
서울대교구에 있을 때는 사제성화의 날을 의미 있게 보냈습니다.
교구는 사제성화의 날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강의를 듣고, 고백성사를 보고, 은경축을 맞이하는 사제들을 축하하며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저도 8년 전인 2016년 사제성화의 날에 은경축 축하 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는 사제성화의 날이 있음을 알았지만 덤덤하게 지냈습니다.
신문사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제가 속했던 브루클린 교구에서도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24년 사제성화의 날에는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10시 미사를 마치고, 봉성체를 다녀왔습니다.
5개월 전에 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와 할머니를 돌보시는 할아버지를 위한 봉성체였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두 분은 먼저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5개월 동안 성당엘 못 오셨으니 ‘주님 부활 대축일’도 참례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체를 모셔 드리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큰 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 왕은 피신을 가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심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은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힘으로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요청으로 명나라는 파병을 결정하였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 한산, 노량에서 일본의 수군을 물리쳤습니다.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조선의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습니다.
역설적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은 일본의 도자기 생산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으로 팔려 나갔고,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일본 근대화의 기틀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임진왜란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한국의 청자와 백자가 유럽으로 수출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본보다 먼저 조선이 근대활 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명하기도 합니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조선은 임진왜란을 막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명한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입니다.
율곡 이이는 일본의 힘이 강해질 것을 예측했습니다.
강해진 일본은 조선을 넘보리라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십만의 병사를 양성하자고 했습니다.
무너진 산성을 개축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율곡 이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조선은 일본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수신사를 보냈습니다.
일본의 상황을 살펴본 수신사들은 엇갈리게 보고했습니다.
한쪽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할 야욕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다른 한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할 만큼 강인하지 않다고 보고했습니다.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거라는 보고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에 조선의 정부가 율곡 이이의 충정을 받아들였다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수신사의 보고를 받아들였다면 임진왜란을 없었을 것입니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조선은 능히 물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긴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왕과 예언자들은 아모스 예언자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결국 아모스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겼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유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를 빼앗긴 원인을 깊이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성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전을 빼앗긴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편집하였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중풍 병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실려 왔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이웃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가 아니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절) 하신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아들을 부르듯이 말씀하신다.
사지의 힘을 다 잃어버리고 누워있는 그가 주님 앞으로 들려왔다.
치유 받을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어서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4절)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따진다.
그들의 생각을 주님께서는 읽으시고
당신이 마음에 숨겨진 것들을 아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5절)
이것은 어떤 행위가 더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없다.
두 가지는 모두 전능하신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은 예수께서 이 모든 권능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하시고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6절).
이 행위로써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과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병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잃었던 낙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찬양을 드렸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하늘로 돌아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병자의 치유 행위는 죄를 용서하는 행위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분은 영혼과 육신의 마비를 모두 고쳐주셨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주님께
우리 이웃도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도 하느님을 알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오늘의 환자와 같이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며,
우리도 그들과 같이 이웃의 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셔도 받아야 내것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당신께 있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율법 학자들과 권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주님께서는
용서의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의 아들이 되신 당신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비단 주님만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뒤에 군중이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여기서 군중은 사람들에게도 그런 권한을 주신 것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본래는 하늘의 하느님께만 있는 것인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그 권한을 땅에까지 끌어내리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되신 당신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에게도 용서의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용서의 권한은 본래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오히려 용서받아야 할 주제지요.
그러니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용서하는 권한을 받은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이로써 인간인 우리가 신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이 영광스러운 권한을 주심에 감사하지 않고,
이 권한을 포기하고 우리는 용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용서해주라고 하시는데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수준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야 할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그리고 이때 필요한 것이 겸손과 믿음입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처럼 용서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고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청하면 그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다시 하느님 사랑과 용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그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군중이 찬양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받는 존재들인데,
하느님께서 아무리 주셔도 우리가 받지 않으면 그 무슨 소용입니까?
늘 그렇듯 하느님께서 주셔도 우리가 받아야 그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능력도,
용서의 권한도,
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넙죽 받아 하느님처럼 용서하는
사람의 아들들이 되기로 결심하고 용기를 청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9,6)
관구 봉사자 소임을 끝내고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성요셉 병원에서,
현재는 안성 요양병원의 원목 신부로 저는 생활하고 있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중풍병, 편마비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의 어려움과 힘듦을 익히 알고 있기에 오늘 복음의 내용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인생은 홀로 걷는 것이 아니고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길에서 함께 걸어갈 동반자나 도반이 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여행이 없을 것입니다.
오래전 ‘전우신’이란 분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쓰셨는데,
그분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간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를 들것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고 있는 인생길의 동반자와 도반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다시금 느낍니다.
사실 중풍병을 앓는 사람은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입니다.
하지만 복음에 나오는 그는, 몸은 비록 불편하였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은 자신의 불행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으며,
그래서 그는 결코,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풍병을 앓는 그 사람을 동네 이웃들은 오래도록 지켜보아 왔기에,
예수님께서 자기 고을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자비로운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왔기에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9,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중풍병을 앓고 있는 이의 믿음이나 간청이 아니라 순전히 그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그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하지 않으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9,2)하고 말씀하신 것은
당대의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질병이나 불행은 죄의 결과하고 믿고 있었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풍병의 원인인 죄를 용서해 주었기에, 죄의 결과인 중풍병도 치유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을 보고서 율법 학자들은,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사건’을 목격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지는 못할망정
“이 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9,3)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과 중풍 병자의 치유를 목격하면서
시비를 거는 율법 학자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곧 사람을 보는 시선의 차이이며, 이는 자비와 거룩함의 차이라고 봅니다.
율법 학자들은 몸은 비록 건강했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결코, 건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보다는 자신들의 일그러진 마음에서 세상을,
이웃을 바라보는 ‘악한 생각’(9,4참조)으로 넘쳐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6)라는 말씀을 듣고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부디 그가 치유와 치료받고 난 뒤에 율법 학자들처럼 혼자 걷지 않고,
치유 받기 이전의 자신처럼 혼자서는 걷지 못한 이들과 함께 길을 걷고 함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는 곧 우리 모두에게 향한 바램입니다.
전우신은 말합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함께 잘 살아야지. 그게 재미난 삶인겨.”라고,
그의 말이 곧 예수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군가의 질병을 치료하거나 치유할 수 없겠지만,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그들이 자신들의 떠나온 삶의 보금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그들 곁에 머물면서 기도하고 동반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