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토끼풀 여자☆]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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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풀 여자]
조송이 시집 / 현대시학시인선 005 / 현대시학사(2015.01.10)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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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풀 여자
조송이
오후 2시가 젖고
풀이 살아나고 풀밭은 즐거워 옥상이 달린다
머리에 띠 두르고 연둣빛 철책 바깥으로 질주하는 풀토끼들
옥상은 해체 중
파헤쳐지는 텃밭 천정부지 솟아오르는 풀밭
반짝이는 곡괭이 등 떠미는 드릴 소리
한 토끼 소름 돋는다고 토끼고 또 한 토끼 이석이 어긋나 토끼고 눈알 빠져라 토끼고 머리꼭지 싸매며 토끼고 눈 내리깔며 샐쭉하니 토끼고 한눈을 팔다가 눈치껏 귀띔 주며 토끼고 하품하며 토끼고 턱이 빠져 토끼고 생각에 잠긴 척 토끼고 머리 뒤엉켜 토끼고 불난 얼굴에 부채질하며 토끼고 심장 벌렁거려 토끼고 발이 부어 토끼고 요동치며 토끼고 쥐어뜯으며 토끼고 주저앉아 토끼고 혓바닥 내밀며 토끼고
층계참을 오르락내리락 빙글빙글 떠도는 토끼 위로
흰 꽃들이 회중시계처럼 떠 있다
사시사철 발붙일 틈 없는 공사판, 1평짜리 토끼장에
풀토끼들 달린다 하얀 풀밭이 핀다 옥상이 자라난다
* 제19회《 詩로 여는 세상 》신인상(2013년 가을호) 당선작 :
북두칠성 돌부처 / 보이지 않는 꽃들 / 林和
북두칠성 돌부처
조송이
운주사 와불에게 차이어
바닥으로 엎질러진 별이
빛의 뼈를 쓸어 담는다
이목구비 공중으로 다 날리어
서늘해지는
벼랑 끝 웃음으로
부처가 된
일곱 개의 둥근 돌들
남천 울타리를 치고
하루쯤 누운 부처나 일으켜 세워 볼까
봄의 손가락을 자르고 마음만 들고 사라진 허공
맹렬한 비애의 방향에서 돌멩이 같은 밤이 굴러오고
부서지는 하늘 끄트머리를 딛고 일어서는
돌부처의 웃음기
갓 태어난 햇볕 속에서 단단한 이슬방울로 반짝인다
다시 발밑에서 꼼지락거리는
봄의 체온
손 없이 움켜쥔 공중의 첫 문장처럼
보이지 않는 꽃들
조송이
돌멩이처럼 어두운 봄입니다
아웃백 옆 벚나무 길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은 내일을 서둘러 완성합니다
산수유에서 목련 개나리 진달래
발바닥부터 피어납니다
패대기당하고 넘어지고
깨금발로 잘근잘근 돌멩이 씹으며
꽃들이 순서 없이 돌 속으로 들어갑니다
배곯은 섬진강이 비틀거리며 밤의 바깥으로 흘러가고
조약돌은 무어라고 웅얼대기 시작합니다
강물에 진초록 아침을 풀어놓고 떠나는 산벚나무 숲
풀잎 끝에 닿은 허공의 둥근 입술이 뜨겁습니다
林和
조송이
길가 구르는 돌멩이 속에서 입 없는 노래가 태어난다
겨울처럼 터진 구두
시대만큼 가파른 골목길 계단을 오른다
조타모 비뚤게 걸친 그가
낙산공원 성곽 담벼락에 기대어
휘파람으로 네거리 복판의 順伊들을 부른다
인왕과 북악과 종로
어두워지는 저녁의 표정 자세히 들여다본다
늙지 않은 누이들은 시간 밖에서 죽은 계절을 노래한다
낙산으로 돌아와
비브라토의 밤으로 꺾이는 네거리의 오빠
順伊들은 어디로 갔을까
새끼 고양이 두 마리 넘나드는 이화장
이쪽과 저쪽의 경계 사라지고
밤은 밤을 지우며 걸어간다
비탈로 연명하는 골목 뒤돌아보면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쥐고
그가 있다
무한정 자라나는 어제의 약속이 서 있다
저녁의 방향
조송이
나무 이파리 같은 아이들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황소 모양이 되다가 풀 모양이 되다가
새가 되다가 물고기도 되었다
폭염 속 뱀사골은 칡꽃이 주렁주렁
보랏빛 체온에 지느러미가 맺혔다
몸속에서 자라는 산을 뒤흔들었다
잉잉거리는 핏줄로, 덮치며 날아오르며 바닥을 기며
여러 날의 밤이 제 몸을 자르며 지나갔다
세 잎의 커다란 체크무늬 아이들
같이 얽혀 있으면서 혼자인 채로
도대체 얼마나 오래 달려야 발바닥이 맑아질 수 있을까?
주렁주렁 신호등에 걸려
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저앉은 보름달처럼
등 뒤에서 걸어오던 길
숲이 쏟아 놓은 아이들이 고장난 밤의 수레를 끌고 지나갔다
어제의 약속을 잘게 찢어 폭설이 날리던 날이었다
몽유도원도
조송이
내 안을 밖에 걸어두고 월등* 복숭아밭으로 간다
구름의 왼쪽 어깨를 밟고 오르는 길
한 잎 꽃이 절벽으로 떨어진다
길눈 어두워
낟알을 찾는 새의 눈 속으로 흘러든다 연분홍 지도
바닥에 드러누워
그림자에 쩍 달라붙어
하루 종일 일백 번도 더 열다가 닫다가
꽃 밖으로 나와서야 홀가분한 꽃그림자를
호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볼 때마다
진품으로 바뀌는 복제 몽유도원도
오늘은 아직 태어나지 않고
그림자 가지 위로 무너져 내리는 노래
무더기로 지고 피는
꽃 보러 가는 길
내 안에서는 눈 없는 저녁이 더듬더듬 걸어나온다
* 월등 : 순천시 월등면
머풀러
조송이
뜨개질하는 꽃을 처음 본 건 오늘이다
그 꽃이
고양이를 몰고 나가는 걸 본 것도
분홍은 어렵다
꽃이 눈뜨지 못하게
털실뭉치에 끼어들어 힐끗거린다
꽃을 곁에 두고
고양이는
눈 밝은 색으로 진입 중
좌우 건반을 훑듯 앞발이 격렬하다
눈꺼풀 속에서
다섯 손가락 지문이 닳는다
꽃이 든 대바늘에 콕콕 찔리며
보이지 않아 찬란한
꽃의 페이지를 함부로 헝클며 한 코 한 코 겨우 넘긴다
고양이를 읽어 내는 꽃의 자세가
꼰 다리 풀어
허공을 수습할 때
오양이 발목에
분홍을 두른다
소리 없이 감은 눈 열고
웃는다
명랑한 꽃을 마감한다
토요일
조송이
여천공단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른다
팔다리를 잘라 낸 마음이다
박수치며 덜덜거리는 구름의 오장육부
영취산 진달래꽃으로 떨어진다
어제의 역사를 반복하며 손발 없는 문장을 남긴다
바람의 뾰족한 미래가 오래 된 슬픔의 모서리에 닿는다
불도 아니고 물도 아닌 늙은 나무의
기우는 아침처럼
굴뚝에 앉아
대낮의 입술이
붉은 사투리로 육필원고 중얼거린다
회색빛 연기가 쫓기듯 생각 밖으로 내몰리고
일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안쪽이 없다
목어처럼 시간과 마음을 발라내
안팎을 지우는 구름의 육체
토요일이 팔다리가 없는 토요일을 안고 지나간다
아무도 비문 같은 토요일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두 생각
조송이
별의 눈이 불꽃 뿜은 적 있었으리
달그림자가 절벽 따라 추락하였으리
맹서의 알 슬어 놓고 적적하여 그냥 아득하였으리
입추쯤에서 꽃차례대로 홀연 저물었으리
단맛은
나무 한 그루가 차려 놓은 한 알 한 알마다 들어가
꽃상여 보내듯 곡비 같은 소란을 떨었을 것
뱃가죽에 달라붙은 통점의 기억 털어내며 줄초상을 여럿 치르고 나왔을 것
왼손 엄지 손톱만 한 자두 씨
그날 이후의 함구령을
땅 속 어디에 똑 부러지게 박아 둔 말둑을
햇빛 노란 속살을 베어 먹다가
스리처럼 볼에 남긴 그날의 궁리
영산홍, 봄을 넘다
조송이
저놈의 시뻘건 꽃이 우리 간판을 다 가려뿌러 똑 지랄 같네 저기 저 구석대기로 처박아뿔세
삽들이 달라든다
맨몸으로 한파를 다 받아내던, 수만 개의 봄을 눈여겨보며 한눈을 팔던 꽃이 시빗거리에 흔들인다 잎이 움츠러들며
눈앞 캄캄하고 향기가 숨는다
삽등이 인정머리 없게 콧날 스치고 잡도리 시작한다
오싹오싹 달라드는 한기를 벗어 손 깍지 끼고 자잘한 돌멩이 치우는 눈 부릅뜬다 아랫도리에 불근 힘주고 봄의 곁가지들 선동한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입에 거품 물고 발버둥 친다 삽날을 굴비 두름처럼 엮어 울타리 세우자 진땀으로 퉁퉁 불은 흙이 나동그라진다 사수하던 뿌리가 콧김 내뿜으며 목덜미 홧홧하다
왓따에 뭔 놈의 꽃이 이리 징하게 생겨묵엇다냐
발치에서 어쭙잖게 북적대던 사람들은 삽과 곡괭이 내던지며 손사래를 설레설레 친다
돌배나무 보살
조송이
흔들바위가 돌 안에 뼈를 부러뜨렸다
조각들이 벌레처럼 부석거렸고
건너편 나무 옆구리로 고래가 뚫렸다
이쪽으로 그만 좀 미세요
마침표 같은 돌배가 떨어지며 내뱉는 문장들
풀풀 날리려와 쌓이는 허공을 뭉쳐 왼종일 산 위로 던졌다
공양 마친 수작이 구름을 몰고 올라갔다
농담처럼 희고 가벼운 살의 예감들
보살은 뜬구름의 북면 향해 돌배 한 봉다리를 냅다 던졌다
꽝꽝 박힌 대못들 하나씩 일어났다
검은 독을 껍질째 한입 물었다
오래 갇혀 있던 노래의 즙이 다디달았다
압록매운탕
조송이
여름이 산 채로 매달려
산발한 내장을 겨울바람에 맡기고 있다
떠나지 못해 소용돌이치다가 맞닥뜨리는 그곳
압록*, 매운탕집 처마 밑에서 펄떡이는 무청 이파리들은
칼바람에 낯빛 싹둑싹둑 잘리어 말라비틀어져 가고
사람들도 통나무집 속에서 야위어
바람의 실타래에 친친 감기며 힐끔거린다
머리 거꾸로 처박고 강의 상류를 휘젓는 바람은
너럭바위에 퍼질러 앉아 오장육부 헹구며 방망이질하다가
푸른 바늘침 꼿꼿이 새워
어중간히 뒤집혀진 마음까지 마름질하여
겨우내 뒤집혀진 마음까지 마름질하여
찬 허공에 대고 재봉을 하고
드륵 드르륵 틀질까지 해댄다
바늘땀이 촘촘히 박혀 허공에 붙어사는 무청 시래기들
매운바람이
비린내를 먹으며 끓고 있는 무쇠 솥단지 옆
여름이 땀 뻘뻘 흘리며
겨울의 속살 콕콕 집어 발라내고 있다
*압록 : 보성강과 섬진강이 합류하는 지점.
오월
조송이
하늘이 머리에 한 동이의 논을 이고
구름 따라 달린다
전봇대 는 도랑에서 나란하다
양동이 속에서 요동치는 못물
손잡이를 움켜쥔다
물 한 박자 걸음 한 박자 따로 놀며
쥐난 팔뚝을 흥건히 적신다
곤두박질치다가 사라진다
오동나무 보랏빛 꽃 위로 오동동 걸터앉아
한통속으로 염탐을 한다 오월 막바지
사라진 봄의 함성을
양동이에 채우고
논가 빙빙 도는 찌푸린 하늘
모내기를 마친
논두렁 끝자락에
물동이와 함께 내팽개쳐진다
두 다리 뻗고 바닥처럼 운다
주황색 양수기 호스가 볕을 빨아들인다
못물 속
구멍 숭숭 뚫린 어린 모 사이로
흑두루미 한 마리가 외발로 구름 따라 달린다
장날의 화단
조송이
파장의 찔레꽃 향기
일면식도 없는 얼굴 내민다
장바구니 인도에 부려 놓고
정류소 턱에 걸터앉거나
다리 쭉 뻗고 맨바닥에 퍼질러 앉아
천지간에 홀로임을 깜박 잊고
한꺼번에 흐드러지게 웃고 있다
물기 훔쳐내고 꽃짓하는 파마머리
플래시가 터진다
뽀글뽀글 자지러지다가
내일과 모레가 손가락에서 접힌다
글피 후 웃장에서 또 보자며
엉덩이 툴툴 털고 하나 둘 일어나는 찔레 가시덤불 속
순천 아랫장 버스 정류소
모계
조송이
냉이야 너는 꽃을 낳지 마라말아라
그 아낙의 아버지는
다섯이나 퍼질러 놓고 20년을 못 살고 돌아갔다더라
낮술 깨우느라
골목 어귀부터 고래고래 이름을 불러댔다나
뽀뽀뽀 하다 뽀뽀, 일본말 창가 들어는 봤니
하얗게 세어 갈가리 찢겨 바둥거리는 줄기를
검지에 둘둘 말아 머리끄덩이 잡아챌 듯해도
고개 처박고 퍼질러 앉아 한자나절 내내
미메가 호시니까 소라 야지소 민나데 나까요꼬 다베니꼬 히
뜻 모르고 따라 부르는 꽃을
숨죽여 뿌리째 뽑네
냉이야 너는 꽃에게 얼씬도 말아라
그 아낙은 홀린 듯
짠하게 허공으로 살다가 돌아가는 중이란다
뽑힐 때 뽑히더라도
머리에는 절대 꽃을 이지 말아라
눈요기하는 셈 치고 생긴 대로 살다가 오너라
너무 많은 냉이야 두근두근 끝도 없이 보고 싶은 꽃아 속수무책 피어나는 냉이꽃아
풋풋풋, 풋냉이 같은 냉이야
흑매
조송이
섣달 그믐달 맞은 첫 펀치가 워낙 세게 왔어
한 방에 나가떨어질 순 없잖아
무릎 꿇고 이 악물고 있는데
흰 피가 철철
몸뚱이 절간에 두고 빠져나갔어
내 몸 안에 조등을 매달기 직전까지
눈앞에 시커먼 허공이 선글라스 끼고 왔네
외투 속에 C컵의 먹구름 감추고
알아듣든지 말든지
씨앗 본 바람에게 이골이 나
도망가자는 팔다리 휘늘어뜨리며
과속으로 차를 몰고 나왔네
두 팔을 크게 벌려
뒤따라온 젖은 그림자 등 뒤에 세워 놓고
엎드려 팔꿈치 괸 채 이마를 바닥에 찍고
귀 쫑긋 모아 손바닥 위 올리고
마음으로 둥그렇게 구부려 허리로 가네
미친 봄바람에 실컷 얻어터졌으니
누가 좀 와 티끌 치우듯
여기서 꺼내 준다면
겨우 칼끝을 다 빠져나왔다 싶을 때
이런, 단숨에 큰 주먹 하나 또 눈앞을 지나가더라, 언니야
대추껌
조송이
민어 이름처럼 미끈한 씨앗 하나
속살까지 다 파먹고 남은 씨를
입에 물고
이리저리 궁글리며 하루 종일 갖고 노는데
비수가 되어 혀를 찌른다
말귀 못 알라듣는 사람 송주
아이래부유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자장가
왕지동 111동 2004호
게으른 자는 원하여도 얻지 못하느니라
부지런한 사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가요무대 월요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남산 우에 조서나무
쓰레기통 속 낙서 쪽지
뾰족하니 각진 글씨체가 낯익다
조서나무는 최후로까지 밀려 나가
눈물범벅으로 불어터져 곤죽이 되어 있다
천 번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내 속을 모를 거라는
늙은 대추꽃 한 주의
깡깡한 유서가 입천장을 뚫는다
보령을 들여다보며
조송이
벚꽃 구경 갔다더니
꽃구경 실컷 하고도 꽃이 없다 했다더니
잠귀 어둔 낙화
그곳으로 혼불 내린다
수갑을 풀고 차꼬를 풀고
조당阻擋을 풀고
실오라기 하나 없이
정색하며
염습실에 누워
장의사의 분장을 받고 있다
소스라치며 와락, 포옹한다
목놓아 오열하는 봄의 얼굴들
안면박대하고
벚꽃 만개가 아직 멀었다며 복화술한다
쉿,
손가락 얹고
인증이 짧은 꽃을 들여다본다
꽃 같지 않다고 말하며 영정사진 속으로 미끄러지는 봄, 사람들
선암사 뒷간
조송이
조류탐사대에 들러
흉금 털어볼까
반가유상 한 분이
거뭇하게 기우는 순천만으로 고개 트는데
센 갈대가 그만그만 서서 환호작약양이라
어느 세월에서 저 음모 다 쓰러뜨릴까
개밥바라기별에게 들켜
연못 늪에서 능수벚나무 한 그루가 미끄러지네
비단잉어 한 마리 뒤집혀 있네
쇠락한 만개를 딛고
갈대 우듬지에
덥석 포옹당하는 오월 하순
뒷간
지붕 홀리며
똥을 푼다네, 황홀한 소문
귀가 절벽이다
조송이
그대가 서른일곱 당의정을 힘껏 털어 넣었지
이마 언저리에 대고 궁리를 쏘아 댔었지
기호들이 발버둥 치며 마구 빠져나갔었지
귓바퀴로 흐르는 뻔한 알리바이, 모르는 척 지웠었지
피가 없는 귀
자명한 주소지를 이마에 달고 밤의 군청색이 흔들렸었지
파문을 거꾸로 펼쳐 들면, 오베르* 갈림길에서 본적이 지워지고
손끝 닿지 않은 등 쪽 어디쯤
귀가 자라났었지
꽁지털 물에 살짝 담그고 속편을 제작하는 바람의 발군
어렵게 문병 나온 그대는
벼랑 위 떠돌며 바람의 지문까지 장악했었지
혈육처럼 울며불며 무릎으로 달려갈 거야, 라고 편지를 쓰고
허리에 찬 권총을 내려놓았었지
*『오베르의 교회』고흐 그림
와온의 해와 달
조송이
남해 바다 수평선에 걸린 낙조
대상의 행렬에서 벗어나
낙타떼의 혹 밟고 단숨에 육지로 달린다
작은 포인세티아 화분이 세 개씩 놓여 있는 창문
문밖에 서서
궁금한 듯 안을 들여다본다
램프가 사람들의 머리까지 내려오고
스푼과 포크가 조용히 움직이고
순한 눈빛이 간혹 새어나온다
11월의 밤이 여유롭게 칼질하며
원탁에 둘러앉아 편안히 저녁을 먹고 있다
요기를 느끼는 해
배고프지 않게 따듯한 밥을 먹고 사는구나
참 다행인 듯
가슴 쓸어내리는데
티롤 978 바닷가에서
행주치마에 손 닦으며 뛰어나오는 보름달
와온의 낙타떼와 맞닥뜨린다
곧 썰물이다
사릉思陵 난간석 돌꽃처럼
조송이
사초지 밟으며 능원 오른다
가시 두른 땡볕을 물고
입 안에서 덜그럭거리는 빛들
마른 수세미 혓바닥 너머 꺽꺽대는 목울대
멀리서 소나무 가지 분질러지는 소리
백두대간을 타고
넓어지는 빛의 장례
곡장 밖 부고가 시구문을 돌아와
간신히
난간석 돌꽃으로 피는 시간
홍살문 빠져나와
금천교 건너는
저녁이
긴 다리를 돌 속에 주섬주섬 잡아넣고
수백 년 바람이 밤으로 기우뚱 기울어진다
종자를 맡기다
조송이
밭이랑 지천에 핀 토종 쑥부쟁이 따라
종일토록 해와 종종대다가
짬짬이 그늘에 내어 널다가
뭉치고 밟고 메치며 실컷 갖고 놀다가
못나고 거칠며 옹이 박힌 고구마를 추려내고
호미 자국 하나 없는 미끈한 놈들만 박스에 골라 담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고구마 박스 사이 좁은 구석
쓱쓱 손바닥으로 훔쳐내고 모로 누워
울퉁불퉁 둥글둥글 잠을 잔다
농협기름 절절 끓는 안방은 멀찍이 두고
창고방 구석에서 고구마 쌔근쌔근 숨 쉬는 소리
봄여름가을 내내 노지를 나대던 씨알들의 소리
공기 통하게
생강은 절대 덮지 말고 열어 놓아라
자디잔 감자알 밖으로 내돌리지 말고
깡깡한 옥수수는 따듯한 거실에다 꼭 걸어 두어라
금쪽같은 내년 농사 내려놓는 잔소리
다른 농사는 남에게 다 내어주고
무슨 끙끙이로 떼어 낸 암 조각보다 소중히
씨알을 품고 한뎃잠을 잔다
노랗고 차지고 다디단 속살이 익느라
코 고는 소리조차 굵고 힘차다
우두커니들
조송이
집을 나와
추녀마루 위로 팔짝 뛰어오른다
오른발을 넓적다리 위로 얹어 가부좌 튼다
난세에 매달린 서너 줄의 사설시조
대당사부 삼장법사 사포 바람으로 맨 앞 장악하고
손행자 손오공이 적요를 날고
저팔계 냉큼 배흘림 기둥과 눈 맞는다
사화상 사오정은 배 째라는 듯 입술 두껍고
마화상 순하디순한 소주병 표정
삼살보살 징처럼 깜깜하다
이구룡 살을 맞아 안상하고
천갑산 시선이 얽히고
이귀박 억장 무너지게 고개 떨구고
나토두 용두 맴 맨 끝에서 봉두난발 짐승 소리
경복궁 근정전 콧잔등에 굳건히들 앉아
막다른 골목인 듯
거대한 밤이 형광 눈빛을 힘겹게 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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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가장 고독하면,
10년 동안 시가 종교였다.
고해성사하듯 옛무덤 맴돌며
모국어로 절을 했다.
아장아장 달려와
등 돌리지 않고 품에 안기던,
원선아, 첫 시집을 바친다.
2015년 아직은 이른 봄
조송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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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이 詩集 [※토끼풀 여자※]
[ 해설 ] -
인간이 피워낸, 꽃보다 아름다운 것들
이 승 하 시인, 중앙대 교수
시인의 약력을 먼저 보았다. 조송이는 광주에서 태어난 광주의 시인이다. 전남대학교 간호대학을 나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했으며 2013년에『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했다. 만학도요 늦깎이 시인이다. 자서를 보니 시가 종교였고, “고해성상하듯 옛무덤 맴돌며 모국어로 절을 했다”고 한다. 문학공부, 시쓰기를 늦게 시작했지만 각오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시인의 말이다. 한때 스승이었다는 죄(?)로 시집 원고를 받고서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는데, 세 번째 수록된 시에서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
길가 구르는 돌멩이 속에서 입 없는 노래가 태어난다
겨울처럼 터진 구두
시대만큼 가파른 골목길 계단을 오른다
조타모 비뚤게 걸친 그가
낙산공원 성곽 담벼락에 기대어
휘파람으로 네거리 복판의 順伊들을 부른다
인왕과 북악과 종로
어두워지는 저녁의 표정 자세히 들여다본다
늙지 않는 누이들은 시간 밖에서 죽은 계절을 노래한다
낙산으로 돌아와
비브라코의 밤으로 꺾이는 네거리의 오빠
-「林和」부분
임화는 누구인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서기장으로서 프롤레타리아 사상으로 요약되는 무거운 주제를 이해하기 쉬운 단형서사시라는 형식으로 풀어내「우리 오빠와 화로」,「네거리의 순이」,「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등의 대표작을 남긴 시인이다. 광복을 맞이하자마자 ‘문학건설본부’의 간판을 내걸고 많은 문인들을 규합했고, 1946년 2월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주최의 제1차 전국문학자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월북 후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조․ 소문화협회 중앙위 부위원장으로 일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서울에 온 김에 낙동강 전선에 종군하기도 했지만 휴전협정 이후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조송이 시인은 서울에 와서 인왕과 북악과 종로를 보고「네거리의 순이」를 썼던 임화를 떠올린다. “길가 구르는 돌멩이”를 근로자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생각해볼 수 있으므로 시의 첫 연은 그 무렵 막 도입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말한 것이라 여겨진다. “입 없는 노래”는 이야기시 또는 단형서사시로 간주해도 좋지 않을까. 이 땅의 주인은 백성일진대 일본인들과 그들의 앞잡이인 친일파들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때였다. 시인이 생각해보니, 임화는 “낙산공원 성곽 담벼락에 기대어/휘파람으로 네거리 복판의 順伊들을 부르”고 있었을 것 같다. “근로하는 여자”는 1920년대에만 있었던 것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종로 네거리의 순이는 “시간 밖에서 죽은 계절을 노래한다” 아니, 지금의 순이가 보이지 않는다.
順伊들은 어디로 갔을까
새끼고양이 두 마리 넘나드는 이화장
이쪽과 저쪽의 경계 사라지고
밤은 밤을 지우며 걸어간다
비탈로 연명하는 골목 뒤돌아보면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쥐고
그가 있다
무한정 자라나는 어제의 약속이 서 있다
-「林和」뒤 2연
화려한 종로 네거리, 낙산(이화장) 그 어디를 가보아도 ‘근로하는 여자’는 안 보이고 새끼고양이 두 마리만 보인다. 임화가 꿈꾸었던 것은 근로자가 자신의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었으리라. 현실참여 의식이 확고했던 임화였기에 북을 택했지만 그는 ‘사형’이라는 극한의 대우를 받는다. 봄도 오지 않았고 임화가 꿈꾸었던 세상도 오지 않았으니 차량이 물결을 이룬 종로네거리에서 시인은 쓸쓸하기만 하다.
이 시에 눈길을 준 이후 다시 집중해서 읽게 된 시는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한 몇 편의 시다.
순천만 빠져나와
봉화산 가슴을 태우는 계절에 닿아서야
짠물에 버무러진 발목들 죄다 풀리어 픽픽 고꾸라지는디
개펄 주물럭거리던 손 움켜쥐고
용산 봉우리 한 번씩 들었다 놓았다. 종주먹대는디
갈대 머리
까무러치듯 끓어재끼며 자망들 해쌌는디
늘어진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젖은 저녁
-「봉화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갈대」부분
무덤 속으로나 들어가 높이 떠 있겄다
몸 닫아걸고
고차수 흰꽃에 팔팔 끓여 낸 폐허 들이붓것다
자지러지는 헛웃음의 혼백을 보것다
팔다리 잘라 버리것다
목 없는 바윗덩이가 산 밖으로 굴러가 달덩이되겄다
-「선암사 부도밭」전반부
‘~하것다’는 전라도 지방만의 사투리는 아니지만 ‘~하는디’는 다른 곳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전라도 사람들만 쓰는 말이다. 앞의 시는 순천 시내 봉화터널(990미터의 긴 터널이다)에서 직선거리로 8.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순천만의 풍경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이다. 시인은 터널을 빠져나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스케치 해 나간다. 어찌하여 갈대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바람의 조화造化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개펄에 뿌리째 처박혀 보이지 않던 바람기가
터널 속
갈대의 입술에 들썩거려 주체를 못 하는디
어깨를 툭툭 치면서 깨방정인디
바람 한 끗에도 속살거리며
연분홍 혀끝에서 자진하고 마는디
-「봉화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갈대」부분
언어의 연금술이 능수능란하다. 이 능수능란함을 가능케 하는 것이 ‘~하는디’라는 사투리 어조에 담긴 가락이다. 특별한 이야기가 없지만 흥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발휘하게끔 하는 것이 구수한 장맛 같은 전라도 사투리다.
「선암사 부도밭」도 일종의 풍경화다. “목 없는 바윗덩이가 산밖으로 굴러가 달덩이되것다” 같은 시구나 “몸통이 폐사의 명부전 하나를 말아 쥐고 넘어오고 있것다”같은 시구는 단순하지가 않다. 시를 많이 써본 시인만이 구사할 수 있는 고도의 시적 표현인데 첫 시집에서 보게 되닌 이채롭다. “씨앗에 사족 달아 말을 걸며 천 년째 헛꽃이나 따르것다”라는 구절로 미루어보아 이 시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시간의 비정함과 인간사의 허망함에 대한 탐구로 보인다. 이 두 편의 시에 비해 아래의 시는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를 마구마구 구사하며 전개된다.
저놈의 시뻘건 꽃이 우리 간판을 다 가려뿌러 똑 지랄같네 저기 저 구석대기로 처박아뿔세
삽들이 달려든다
맨몸으로 한파를 다 받아내던, 수만 개의 봄을 눈여겨 보며 한눈을 팔던 꽃이 시빗거리에 흔들린다 잎이 움츠려들며
눈앞 캄캄하고 향기가 숨는다
삽등이 인정머리 없게 콧날 스치고 잡도리 시작한다
오싹오싹 달라드는 한기를 벗어 손 깎지 끼로 자잘한 돌멩이 치우며 눈 부릅뜬다 아랫도리에 불끈 힘주고 봄의 곁가지들 선동한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입에 거품 물고 발버둥친다 삽날을 굴비 두름처럼 엮어 울타리 세우자 진땀으로 퉁퉁 불은 흙이 나동그라진다 사수하던 뿌리가 콧김 내뿜으며 목덜미 홧홧하다
왓따메 뭔 놈의 꽃이 이리 장하게 생겨묵엇다냐
발치에서 어쭙잖게 북적대던 사람들은 삽과 곡괭이 내던지며 손사래를 설레설레 친다
-「영산홍, 봄을 넘다」전문
시뻘건 꽃이 간판을 가린다고 삽으로 파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을 다룬 것으로, 시 자체에 별다른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와 온 산에 영산홍이 피어났다는 것인데, 전개 과정이 판소리 가락처럼 흥겹다. 삽과 곡괭이로 영산홍 꽃나무를 파내다 그만두게 되는 것은 오로지 연산홍의 진한 색깔과 짙은 향기 때문이다. 대지와 꽃을 의인화한 대목도 재미있지만 역시 전라도 사투리가 시의 재미를 십분 살려내고 있다.
광주 태생의 시인이어서 그럴 것이다. 지리산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빨치산에 대한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곤달걀 같은 무덤에 구멍 내어 굴뚝을 달아요 밥 짓고 연기 도로 불어넣으며 김빠진 폭약을 가슴에 달고 들창 하나 없이 그 속에서 살아요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는 않았다지요 노다지 광야가 펼쳐지는 세석평전 그 많은 참꽃들
(중략)
아무도 없는 가을 피아골 계곡에서 짭새들이 섬뜩하고 더 무서운 건 되새떼가 하늘 덮으며 행진하는 거지요 그러다가 감쪽같이 숨어버리면 발원지를 찾듯 온몸이 귀 기울여요 차르륵 차르륵 소리 좀 내봐요
(중략)
산바람의 영혼이 연기 피워 올리며 산책 나오시는 길, 그 길의 어깨 함께 토닥이며, 세 치 푸른 혓바닥 담그러 가요 산길을 열어, 날자 날아보자 주문 몇 번 외고 나면 흑백 사진첩 덮고 자는 듯 홀가분해져요
-「빨치산 루트」부분
지리산 일대에 형성된 빨치산 루트는 워낙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어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았다고 한다. 시의 제 1연, “무덤에 구멍 내어 굴뚝을 달아요 밥 짓고 연기 도로 불어넣으며”는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 안에서 빨치산들은 밥을 지어 먹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총기를 손질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빨치산 루트가 화신花信이 올라가는 길이다. 또한 그 길 위에서는 철새와 되새떼가 수를 놓는다. 이 길에서 얼마나 많은 빨치산과 토벌대가 죽어간 것일까. 산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간 빨치산 루트에서 시인은 심각한 상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산사람의 영혼이 연기 피워 올리며 산책 나오시는 길”이라고 하며 애도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이다. 「검지」같은 시도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빨치산을 다룬 시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검지 자르고 군대 대신 산으로 들어가
민주와 계약 결혼하고 세 아이 낳앗다 한다
지금도 깜깜한 새벽에 벌떡 일어나
나무와 함께 시위도 한다고 한다
(중략)
뭉툭하게 남은 검지 구부려 방아쇠 당긴다
욱신욱신 사태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검지」부분
봄이 오면 고로쇠나무에서 물을 뽑아서 사람들이 건강에 좋다고 마시는데, 그 과정을 다룬 것 같지만 해설자에게는 이 시가 어느 빨치산의 한 많은 생을 다룬 시로 읽힌다. 자수를 했던 것인지, 살아남은 빨치산 한 분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지금도 깜깜한 새벽에 벌떡 일어나/나무와 함께 시위를 한다”고 표현했다. “빨치산 옛무덤에서 뽕짝 리듬으로 풀려 나오는 혼백”(「봄날은 간다 엑스레이」)같은 구절에도 눈길이 오래 머문다.
시인은 광주 출신이므로 20대 초반에 1980년의 광주민주화 운동을 겪었을 테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이 시집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다룬 시는 「금남로 네거리에서」요, 은유적으로 다룬 시는「산화散花」다
목탱 점안식이 눈앞이다
이곳에서 어서 나가라! 새벽 마이크 소리가 들린다
대낮에
손 시리고 발자국이 눅눅하다
안개 사태
한 달 넘게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
그곳까지 행진할 수 없었다
그곳을 끊을 수 없었다
안개 한복판에서 감전사를 작정했다
화인火印이 쏟아져내렸다
도청 앞 분수대
클랙슨이 포복하며 네거리를 장악했다
불빛이 동그랗게 박곽현 열사를 에워쌌다
한쪽으로 쏠렸고 그는 빨아 먹히고 말았다
맹목의 3인칭 인질극
해를 똑바로 쳐다본다 헤드라이트가 쏟아진다
지독하게 찬란한 시계視界
목탱에 눈을 박을까 최후의 눈알을 찍을 수 있을까
-「금남로 네거리에서」전문
‘목탱’은 은행나무에 조각하는 탱화다. 탱화를 조각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눈에 눈동자를 찍어 넣는 의식이 이제 막행해질 참이라고 시인은 왜 서두 부분에서 말한 것일까? 시인은 금남로 네거리에 서면 그날, “이곳에서 어서 나가라!”고 외치던 새벽의 마이크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한가 보다. “한 달 넘게/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었던 것은 핏자국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그날의 현장을 “화인火印이 쏟아져내렸다/도청 앞 분수대/클랙슨이 포복하며 네거리를 장악했다/불빛이 동그랗게 박관현 열사를 에워쌌다”고 하면서 실감나게 묘사한다. “맹목의 3인칭 인질극”도 그날의 참극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그런데 이후 광주청문회가 열렸고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기도 했지만 속 시원히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특히나 행불자가 많았는데, 계엄군이 어디에 갖다 묻었는지, 아직 시신을 못 찾은 이가 꽤 된다. 안개가 걷히고, “지독하게 찬란한 시계視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안식은 끝내 행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목탱에 눈을 박을까 최후의 눈알을 찍을 수 있을까”라는 결구는 미해결의 역사에 대한 분노의 발언으로 읽힌다.
뱀파이어에게 그의 모국어로 중형이 구형되고 생면부지 전경이 건성건성 건너보다 말고 화염병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무찔러 오고 보도블록은 무방비로 뜯겨 나가고
가짜 비극은 웃긴다
역광을 밀고 들어온 적 있는 뜨거운 사람
수소문하여
어안의 굴절이 그물에 매달린다
할 말 잃고 모로 누워
물 속에서 상하좌우 검은 무덤을 읽는다
녹슨 배가 동맥을 쪼개는 빛의 삭발식
전경의 시간을 뱀파이어는 걷어내리라
-「산화散花」부분
이 시에서 뱀파이어는 도대체 누구일까? 뱀파이어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된다. 하나는 조선의 처녀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일본군이다. “바리케이드의 현해탄”이 그렇다고 말해주는 단서다. 산화의 장소는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시위 현장이 아닐까. 제3연의 상황은 끔찍했던 그날의 현장을 재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산화는 꽃이 져서 흩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꽃이 피어도 과실을 맺지 못하는 꽃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니까 이런 해석을 해보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전경戰警을 대신해 공수부대원을 투입, 광주를 진압케 한 이를 뱀파이어로 보는 것이다. 행정 수반과 군 수뇌부 몇 사람은 청문회에서도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발뺌을 했다. 시의 제 3,4,5연을 종합해 보면 계엄군이 전경에서 공수부대원으로 바뀐 이후의 상황인 것도 같다. 광주는 잠시 해방구가 되지만 머지않아 시민군들이 도청에서 “붉은 눈은 소용돌이로 흩어지”고 만다. “행방불명이다”를 마지막 연으로 삼은 것은 광주민주화운동 때 행방불명된 사람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조송이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이와 같이 ‘광주’를 의식하면서 읽게 되는 시가 몇 편 되지만 사실은 전라도의 여러 곳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된다. 운주사 와불, 여천공단, 와온의 소뎅이마을, 달천바다, 해남, 순천만, 순천아랫장, 순천 화포바다, 쌍계사, 선암사, 섬진강,지리산, 피아골, 두지마을……. 전라도인의 아픔과 슬픔, 외로움과 그리움은 이번 시집의 가장 확실한 색깔이다.
「토끼풀 여자」는 풀을 먹으며 살아가는 토끼와 ‘토끼다’라는 우리말을 적절히 섞어가며 전개해 음상音相의 효과를 얻는 작품이다. 머리에 띠를 두른 풀토끼들은 시위대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시위대는 함성을 지르다 토끼게 되니까.
머리말에서 “옛무덤 맴돌며”라고 했는데, 여기에 관련된 시가 몇 편 보인다.
홍살문 빠져나와
금천교 건너는
저녁이
긴 다리를 돌 속에 주섬주섬 집어넣고
수백 년 바람이 밤으로 기우뚱 기울어진다
-「시릉思陵 난간석 돌꽃처럼」부분
그녀 대신 허공에 서 있는 나무들에게
그녀만의 방식으로 꼬박꼬박 인사하며 손 내민다
검버섯 핀 얼굴에 핏기가 없다
빳빳한 몸을 풀며
능원을 도는
11월의 왕릉처럼 헛헛하며 멀고 아스라하다
-「김포 장릉에서」부분
왕릉에 가본 사람이라면 대개 비슷한 상념에 빠져들 것이다. 왕후장상이 살던 고대광실도 때가 되면 폐사지처럼 황량해진다. 부귀영화가 다 덧없는 것이고, 인간은 때가 되면 모두 죽게 됨을 절감하게 되는 곳이 바로 왕릉 앞이 아닐까. 사릉은 조선 단종의비 정순왕후의 능으로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있다. 김포 장릉은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의 무덤이다. 두 여인의 무덤 앞에서 시인은 착잡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왕과 왕후의 자리도 ‘권력과 영광’의 자리라기보다는 ‘불안과 긴장의 자리’, 즉 바늘방석이나 가시방석인 경우가 많다. 어느 한 순간도 법도와 체통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데 구설수에 오르기 쉽고, 적들의 눈총을 받기도 쉽다. 그렇게 살다 간 이들의 무덤 앞에서 시인은 세상 모든 권력의 무상함을, 인간만사가 새옹지마임을, 화무십일홍임을 더욱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이색적인 시도 있다. 절에서 스님이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치르는 제사가 천도재遷度齋인데 웬 돼지 천도재?
물배나 뚝뚝 채워요
너무 좋아라 어안이 벙벙해지는 장면을 함께 가둬요
흰 트럭이 막 도착하고 안개 속 지나며 우왕좌왕 천도재 지내요
음력 섣달 그믐달이 몸 풀며 사라지는, 젖 불리며 삶아 먹인 발목뼈 붙들고 우리 속으로 숨어 들어가 몇 달을 지내요
오방색 살은 안 붙고 거죽만 두꺼워지고, 어쪄죠?
차곡차곡 접어 둔 살색 거죽을 뚫고 나와 허공으로 퍼져요
강이 잡혔나요?
강을 붙잡은 얼음 살짝 열고 뒤를 보고 달리며 먼저 돌아간 애저의 강 이름 호명해요 눈에 넣어 통풍을 찍어요
매장은 그만두고 발만 동동거려요
하루 1달 1년 100년 1000년
-「돼지 천도재」부분
우리는 조류독감이나 구제역이 번지면 각 동물의 감염 여부를 제대로 따지지 않고 일망타진 식으로 살처분을 해버린다. 반경 몇십 킬로미터 내의 모든 닭과 오리를, 소와 돼지를 남김없이 생매장한다.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니 이런 아비규환이 없다. “매장은 그만두고 발만 동동거려요”는 생매장 현장의 참상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살처분 이후의 우왕좌왕 천도재는 비극인가 희극인가 희비극인가. 돼지를 위해 수백만 원을 들여 천도재를 지내기도 하는데, 조류독감에 걸린 조류들까지 다 불러들여 하니 독경을 들은 죽은 조류와, 소, 돼지의 넋은 극락왕생하게 되는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인간 세상에서의 처절한 비극에 대해 시인은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제 제일 앞의 시와 마지막 시를 다뤄보기로 하자.
돌멩이처럼 어두운 봄입니다
아웃백 옆 살구나무 길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은 내일을 서둘러 완성합니다
산수유에서 목련 개나리 진달래
발바닥부터 피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꽃들」전반부
봄이 오면 세상천지가 꽃으로 뒤덮이는데 아직은 이른 봄 “돌멩이처럼 어두운 봄”이다. 산수유에서부터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다투어 피어나게 될 텐데, 이들 꽃의 개화가 영 심상치 않다.
패대기당하고 넘어지고
깨금발로 잘근잘근 돌멩이 씹으며
꽃들이 순서 없이 돌 속으로 들어갑니다
배곯은 섬진강이 비틀거리며 밤의 바깥으로 흘러가고
조약돌은 무아라고 웅얼대기 시작합니다
강물에 진초록 아침을 풀어 놓고 떠나는 산벚나무 숲
풀잎 끝에 닿은 허공의 둥근 입술이 뜨겁습니다
-「보이지 않는 꽃들」후반부
가난한 서민을 가리켜 흔히 ‘민초’라고 한다. 봄 산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나무와 풀이지만 그 각각 생명체의 값어치는 소중하다. 그런데 역대 왕조는, 역대 공화국은, 민초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 사실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간 백성들이 몽고의 침입 때나 임진왜란 때, 한국전쟁 때 이 나라를 지켜오지 않았던가. 꽃들이 “패대기당하고 넘어지고”, “순서 없이 돌 속으로 들어가”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배곯은 섬진강이 비틀거리며 밤의 바깥으로 흘러가고”라는 시구 속에는 백제와 전라도의 아픈 역사까지도 담겨 있다. 우리는 “강물에 진초록 아침을 풀어 놓고 떠나는 산벚나무 숲”의 “풀잎 끝에 닿은 허공의 둥근 입술”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꽃들이 사실은 보이는 꽃들보다 더욱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텨 왔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 시에서는 문루나 전각의 지붕 네 귀퉁이에 꾸며 앉히는, 열가지의 잡상인 십신十神을 다루고 있다.
집을 나와
추녀마루 위로 팔짝 뛰어오른다
오른발을 넓적다리 위로 얹어 가부좌 튼다
난세에 매달린 서너 줄의 사설시조
-「우두커니들」제1연
우두커니는 명사가 아니라 부사인데 여기서는 ‘들’을 붙임으로써 명사처럼 쓰였다. 제2연은 10신의 각 신에 대한, 사설시조에 가까운 묘사다. 그런데 이 10신이 신의 모습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마지막 두 연은 다음과 같다.
경복궁 근정전 콧잔등이에 굳건히들 앉아
막다른 골목인 듯
거대한 밤이 형광 눈빛을 힘겹게 민다
-「우두커니들」제3, 4연
경복궁 근정전 전각 지붕에 굳건히 앉아 있는 10신을 쳐다보다 시인은 여기서 생의 막다른 골목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거대한 밤이 형광 눈빛을 힘겹게 민다”고 한 것은 밤이 깊어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일 터, 귀가도 잊은 채 넋을 놓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시인도 이들 10신처럼 우두커니 서서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해설자는 조송이 시인의 작품 중 10수 편만 골라서 내 구미에 맞게 해설해 보았다. 나머지 시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지나친 모호성과 사적인 담화, 리듬의 끊김, 통일성 부족 등 시편의 흠결에 대해서는 일일이 지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 시집의 미비점을 잘 살펴 극복할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옛 제자의 첫 시집에 괜히 췌언을 늘어놓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늦게 출발한 만큼 배전의 각오로 노력해 이 땅의 소중한 시인, 큰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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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낡은 집 옥상에 난 토끼풀을 보며 “풀이 살아나고 풀밭은 즐거워 옥상이 달린다”고 하고, 홍시로 변해가는 감을 들여다보며 “죽을힘을 다해 팔방으로 뛰어다니며 팥죽 끓듯 명랑하다”고 하는 시인.
무청 말리는 겨울바람을 보고 “너럭바위에 퍼질러 앉아 오장육부 헹구며 방망이질하다가 푸른 바늘침 꼿꼿이 세워 무청의 살을 콕콕 찌른다”고 하고, 절의 부도를 보고는 “목 없는 바윗덩이가 산 밖으로 굴러가 달덩이되것다”고 하는 시인.
그 시구들에서는 선천적인, 막무가내의 순진성이 느껴진다. 그의 내면에는 어린이처럼 뛰어다니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이 있는 것 같다. 시인의 천진한 명랑함과 자연의 본성이 만나는 순간 터져 나오는 생동의 기운이 있다.
-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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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송이 시인∥
∙ 1959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 전남대학교 간호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과를 졸업했다.
∙ 2013년『詩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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