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에 관한 시모음 27)
여름 장미 /박정근
서산의 붉은 노을은
길옆 가로수 긴 그림자에
무심하게 걸터앉고
가녀린 덩굴장미는
가지마다 빈 가슴 길게 드리워
지나간 봄날을 그리워한다
꽃 진자리 자리마다
그리움 하나씩 새싹으로 돋아내
가버린 봄날만 애타게 부르더니
철 잊은 장미 한 송이
한 떨기 눈물 꽃으로 붉게 피워
여름 속으로 힘없이 던졌다.
넝쿨장미가 필 때 /이병초
조롱박으로 물을 또옥 뜨는 맑은 소리를 가시내는 볼에 문지르고 싶어 했다
헝겊 쪼가리를 세로로 접어서 책상 틈 벌어진 데 끼우는 손끝에 수초들 발목을 헤적이는
동진강 물살이 반짝였다
갯바닥에 종종종 난 물떼새 발자국을 편지처럼 접었다 폈다 하면서 갯비린내 묻은 바람을
내 손에 쥐어주고 싶어서 가시내는 저렇게 볼이 발개졌을까 아버지 가실 때 보니깐 수의엔
아예 주머니가 없더라고, 주머니가 한 개 달렸다면 그 속에 나를 담아 갈 거냐고 가시내는
따지듯이 물었다
깜빡거리는 가시내의 깊은 눈망울 속에 곧장 꽂히고 싶었다 창 밖에 가시내 볼을 못 지운
넝쿨장미들이 짜웃짜웃 피었다
장미에게 /허정인
담장 가득
아름답던 장미야!
비가 오니
꽃잎이 바닥에 뒹군다
이별은
순리인것을
사랑했었다는
사실만 기억하자
오늘 빗물에서는
네 향기가 나겠지.
늦깎이 장미꽃 /임재화
사계절의 섭리도 외면하고
늦가을에도 변함없이 피어나서
늘 고운 모습으로 수줍어하던
늦깎이 장미 꽃송이들이
날마다 무서리 자주 내리고
겨울로 달려가던 어느 날 아침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어
얼음 장미꽃으로 피었습니다.
여린 나뭇가지 끝마다
곱게 매달려 피어있던
수줍은 장미 꽃봉오리가
손가락으로 톡 하고 건들면
쨍하고 깨질 것만 같은
투명한 유리 겉옷으로
조용히 갈아입고서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장미꽃 연정 /綠樹 여관구
장미꽃 붉은 열정 가지위에 타오르고
5월의 푸른 향기 마음속에 가두어 놓고
그리워 찾아온 고향 내 임인 듯 반겨주네
방긋이 웃으면 보이는
찔레향기 하얀 이빨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바람의 춤사위에 너울너울 춤을 추네.
그리움을 마음속에 숨겨놓고
외로움을 토하다 열려버린 빨간 입술
사랑만큼이나 달콤한 너의 입술을
장미꽃 그 향기가 어루만져 주는구려.
향기를 열고앉아 뜨거운 마음보이더니
검붉은 입술로 사랑한다는 말 고백도 못한 채
마음으로 흐르는 사랑님 생각에
눈물 되어 떨어지는 꽃송이가 되었구려.
줄장미 /이화은
입술이 새빨간 여자는 다 첩인 줄 알았다
손톱이 긴 여자는 다 첩인 줄 알았다
뾰족 구두를 신은 여자는 다 첩인 줄 알았다
녹슨 시간의 철조망을 아슬아슬 건너고 있는
아버지의 무수한 여자들
장미 /문 경
사랑하라,
미움도 사랑하라
장미가 담 넘어 골목을 돌아 나간다
돌아오지 않는다고,
미워하지 마라
담 안에 뿌리 내린 장미가
담 너머에 피어 있다
결혼이란 약속일 뿐이다
꽃이,
어디 담 안에서만 피는 눈물이더냐
장미 /조은길
밤 사이 보슬비가 왔다갔을 뿐인데
담을 뒤덮은 붉은 장미 넝쿨
이 아침 불현듯 창문을 깨고 날아든 돌멩이같이
놀랍고도 황홀한 장미의 포즈
나는 눈이 찔린 듯 눈이 부시다
하지만 나는 시에 미친 여자
장미를 처음 본 듯 가슴에도 대어보고
코에도 비벼보고 가지를 흔들어보고
꽃을 빙빙 돌며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보는데
장미 꽃잎으로 목욕을 했다던 클레오파트라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장미만 그리다 죽은 화가
장미꽃바구니 장미예식장 장미아파트 장미모텔
장미미용실 장미의상실 장미향수 장밋빛머플러
장미쟁반 장미브로치 같은 언어들이
이미 머릿속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장미를 보았을 때
뒷걸음질치며 울었다던데
조금 커서는 장미를 꺾다 가시에 찔려 울었다던데
나는 이미 장미에게서 너무 멀리 온 것인가
하지만 나는 시에 미친 여자
장미는 추하다 시궁창이다 구더기이다
애꾸눈이다 눈물이다 사막이다 악마다 저주다
말을 바꾸어본다
눈을 씻어본다
성 프란치스코의 장미 /백우선
꽃몸살난 프란치스코
장미밭 뒹굴고 뒹굴었어라
낭자한 피
가엾도다 가엾도다
그 가시 탓이로다
우리 하느님
피와 가시마저 꽃피워
꽃 중의
어머니의 꽃
하늘 중심
프란치스코의 장미
하얀 장미 /최원종
폐부를 찌르는 고통
외마디 비명과 함께
표정 없는 눈물을 흘리며
찰나의 순간에 맛보았던 행복에
위안으로 삼는다
가시에 찔려가는 하얀 솜사탕
앙상했던 손톱마다 꽃을 피운다
추워서일까
향기마저 가슴의 문을 닫아버리고
내어주질 않는다
움츠린 어깨
떨어지지 않으려
아픔의 고통도 잊은 채
소리 없는 가식의 눈웃음만 짖는다
가시밭길 걸어가는 묵언의 수행자
침묵의 시간에도 웃음꽃은
피어나고 있다
오월의 장미여 /노승한
하얀 속살 햇살에 나직이 눈부시고
오월의 화신 붉은 장미 그대여
붉게 타오르는 뜨거움의 입맞춤
영혼을 불사르고 바람결에 살랑인다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편지 강물 위에 띄우고
흘러가며 춤추는 덧없는 물결의 파고
소욕의 천지에 담아 고뇌를 만들어 갈망하고
흩어진 찻잔의 갈색 꿈 가을을 벗한다
덜컹대는 번뇌의 수레바퀴 삐걱거리며
우직하게 끌어가 보지만 허무 속에 망연한 그리움
빈손에 빈 수레 그냥 가는 길
안타까움 넘치는 빗장을 치고
달려가는 세월 앞에 빈 가슴 나목의 떨림은 겨울을 부른다
장 미 /나명욱
나는 너를 경멸한다
천박한 웃음도 지나가는
뭇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그 화려한 겉치레도 경건함을 짓밟고
어두운 쾌락을 음모하여
너는 그 중죄로 태어난 인생이다
그리하여 사랑에 굶주린 이 생에서
온갖 장밋빛 애정을 꿈꾸며
몸 흔들거리며 여기저기
남의 담장을 넘어 기웃대는
나는 너의 그 찬란함을 저주한다
나의 모든 상념은 속세의 욕망들을
조롱하는 멀리 하늘빛 눈부심을
세우는 일 물결치며 가는
하얀 날개로 저 높은 곳에서
커다란 왕관을 쓰고 밀려갔다 밀려오는
수많은 무덤들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일
아 ~ 아 나는 너를 꺽지 않으마
너의 감추어둔 가시에 찔려 숨막혀 죽어간
그 순진한 맑은 영혼들이 안타까워
결코 나는 너를 좋아할 수 없으니
차라리 순박한 한 송이 나팔꽃
아침을 알리고 조용히 고개 숙여
희망으로 다시 내일을 기다리는
그 신선한 꽃을 그리워 하리
너는 평생을 사랑에 목말라하며
지독한 그리움으로 살아가라는
화려하나 화려할 수 없는 고독한
어쩔 수 없는 불쌍한 운명의 꽃
아아 나는 너를 미워할 수가 없다
장미 /신진기
수줍은 듯
겹겹이 싸여
발그러이
봄볕 따수워
위태로이
창 끝에
틀어 앉아
불그락 푸르락
엇갈림 길
향긋이
쉬어 가라고
봄볕에
익는 도시,
바람에 빗대어
손 흔든다
장미의 뒷모습 /목필균
그는 화려한
장미 커튼 속에 살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일어서서 쳐주던
요란한 박수소리
가장 멋지게 웃으며
손 흔들어 답할 때
세상은 그를 불러주었다
장미빛 커튼 뒤에
어두운 암막처럼
드문드문 돌아온 집엔
암 말기 아버지
참혹한 육신이 눈물겹다
물 한 모금 넘길 수 없는데
으스러지는 고통을
홀로 인내하는 아버지
향기따라 박수 따라
환호성 따라 다니다
놓쳐버린 안부들
괴로움에 잠못드는
세상이 아파서
순간순간 떠나고 싶었던
세상을 버렸다
넝쿨장미 / 마경덕
봄볕이 등 기대고 간 담벼락, 만삭의 오월 산모들,
설핏 젖꽃판 비치더니 발그레 젖가슴 벌어진다.
휘늘어진 치맛자락 땅에 젖는다.
한나절 벽을 잡고 몸을 뒤튼, 벌겋게 달아오른 앙다문 신음소리, 미끈 불끈 양수가 터진다.
지나가던 바람이 아이를 받아낸다.
산파의 손을 찌르는 가시 탯줄, 좁은 골목에 줄줄이 아이들이 태어난다.
설익은 풋배꼽들, 투명한 햇살에 배꼽이 익는다.
배내똥 묻은 기저귀 담벼락에 널린다.
까치발을 한 젊은 여자, 장바구니에 장미 한 송이를 담아간다.
입양 가는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다산(多産)으로 요란한 골목.
눈부신 출산이다.
장미꽃 /권도중
뱀도 못 오르는 담장에 허리를 얹고
그대에게 가서 핀 마음의 꽃이어서
그 마음이 어깨 짐보다 무거워
가시가 어떤지도 모른 채
그대 대신 현실의 담장에 기데어
사랑으로 피우는 이 내용 저 꽃 정직한 아픔
생각은 앞으로 줄기도 앞으로 지치지 않는 생명으로
담 너머 까지 강하게 이어져 태양의 계절을
진행되어 가면서 알았어요
만물을 태양이 키우듯 그대는 사랑을 키우는 태양인가요
장미꽃이 붉은 것은 향하는 피가 붉기 때문이고
연한 것은 설레임이 연연하기 때문이며
검은 것은 사모하는 마음이 까맣게 탓기 때문이예요
꺾어 창가에 두세요 수 천 송이 중 한 송이
꺽이어 거기 있다 생각하며 장미꽃으로 또 피어나면서
뜨거운 담벼락에 데이면서도
사랑이 눈물겨움을 알게 될 거예요
붉은 장미 /박정재
초록의 카펫 위에
촘촘히 밝힌 촛불
유월의 장미 화원
그 정열의 표정이
걸음을 붙드는구나
속지 말자
절대로 속지 말자
다시는 속지 말자
저 붉은 유혹에 속아
다시는 울지 말자
붉은빛 짙은 화장
아름다움 뒤에는
상상할 수 없는 질투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단다
붉은 유혹에 넘어가
꺾어 든 손가락에는
찔린 가시 핏자국이
쓰린 아픔과 함께
오래오래 남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