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의 문자는 모두 부처-(1)술작(述作)의 배경 ☞음성으로듣기☜
본초는 1276년 12월, 대성인님 55세 때 미노부(身延)에서 쓰신 어서입니다.
가. 대고중(對告衆)
난죠헤이시치로(南条平七郎)님은 난죠도키미쓰(南条時光)님의 일족(一族)으로 추측됩니다.
닛코(日興)상인의 「제자분장(弟子分帳)」〔弟子分本尊目錄〕에는, 「일(一), 스루가국(駿河国) 후지군(富士郡) 카미가타(上方) 나리데향(成出郷)의 급주(給主)인 난죠헤이시치로(南条平七郎)의 어머니는 에치고보(越後房)의 제자이다」(歷代法主全書 1권 93항)라 되어 있는데, 헤이시치로(平七郎)의 어머니는 에치고보니치벤(越後房日弁)의 제자이며, 어본존을 수여받을 정도로 강신자(強信者)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치고보니치벤(越後房日弁)은 원래 아쓰하라시(熱原市) 류젠지(竜泉寺)의 승려인데 닛코(日興)상인의 교화(敎化)로 시모노보닛슈(下野房日秀)와 함께 개종(改宗)하였습니다. 그것이 주직(住職) 대리(代理)였던 교치(行智)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훗날 그 유명한 아쓰하라(熱原) 법난이 일어납니다.
신변에 위험이 닥친 니치벤(日弁)은 닛슈(日秀)와 함께 한동안 시모우사(下野) 마마(真間) 지역의 닛쵸(日頂) 곁에 몸을 두고 도키죠닌(富木常忍)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고안(弘安) 시대에 닛코상인을 배반했다고 「제자분장(弟子分帳)」에 나타나 있지만, 후에 총본산에 보(坊)를 건립〔현재의 렌죠보(蓮成坊)〕했습니다. 그러나 헤이시치로(平七郎) 본인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나. 배경
대성인님에 대한 난죠가(南条家)의 외호(外護)의 신심은 특필(特筆)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본초도 난죠헤이시치로(南条平七郎)님이 미노부(身延)에 계시는 대성인님께 승려 선료(膳料)를 보내 어본존 공양을 해드린 것에 대한 답례의 편지입니다.
당시 미노부(身延)에 계시던 대성인님의 생활 모습은 여러 어서(御書)에서 나타내신 대로 아주 곤란했습니다.
『마쓰노님답서(松野殿御返事)』에, 「대저 이 산은 남(南)은 야산이 만만(漫漫)하게 백여리(百餘里)에 이르고, 북(北)은 미노부산(身延山)이 높이 솟아서 시라네타케(白根岳)에 이어지고, 서(西)에는 칠면(七面)이라는 산이 우뚝 치솟아 백설(白雪)이 끊임없고 사람의 주가(住家)는 한 채도 없으며, 이러한 곳이기에 찾아오는 사람도 드문데 운운(云云)」(신편어서 p.1045)라는 말씀처럼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여 사람 사는 마을이 없는 외진 곳이었습니다. 특히 한겨울인 12월은 눈이 많이 쌓여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깊은 산이었습니다.
또한 1277년으로 추정되는 『암실수복서(庵室修復書)』에는 「인부(人夫)가 없으니 학승(學僧) 등을 독려하나 먹을 것이 없기에 눈으로 목숨을 지탱하고」(신편어서 p.1189)라 있습니다.
이는 미노부(身延) 암실(庵室)이 변변치 않은 임시 건물이었으며 이 겨울에 기둥이 기울어 비바람을 참고 견뎌낼 수 없을 정도가 되고 특히 겨울이라 추위도 견딜 수 없을 정도였기에 복원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인부(人夫)를 고용할 돈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굶주린 학승들에게 명하여 학승을 독려해서 복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대성인님 자신도 굶주리고 계셨겠지요. 게다가 겨울이라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웠습니다. 「눈으로 목숨을 지탱하고」라는 부분에서, 눈을 먹으며 굶주림을 참고 견디셨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먹을 것도 부족한 깊은 산에서 많은 제자를 거느리며 불도수행과 제자 육성에 힘쓰신 대성인님의 모습을 뵈올 때 눈물이 흘러넘칩니다.
이런 깊은 산에서 어려움을 겪으시는 대성인님의 처지를 생각하시어 헤이시치로(平七郎)님이 미노부(身延)에 공양물을 보내신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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