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두 하역일·막노동·쌀가게 등 숱한 고생끝 현대건설 세워
1968년 경부고속道 2년6개월만에 사상 최단기간 완공 기록
서산간척사업 폐유조선 활용 '정주영 공법' 세계적인 명성
"똑똑한 사람모여도 머리로 생각하면 기업 못 커, 행동해야"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21일 별세한 지 22주기를 맞았다. 사진은 아산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모습. HD현대 제공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22주기
아산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산골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30년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삿일을 하라는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소 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해 인천에서 부두 하역일과 막노동으로 사회생활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1934년 쌀가게 복흥상회에 취직한 이후 1938년에는 경일상회를 개업, 서울상업학교(당시 경성여자 상업학교), 배재여학교 기숙사에 쌀을 대며 첫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첫 사업은 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실패했다.
그는 잠시 고향 강원도로 돌아가 부인 변중석 여사와 결혼한 이듬해인 1940년 현대그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 정비업체 아도서비스를 설립했다.
하지만 아도서비스 역시 한 달 여만에 화재가 발생하며 수리중이던 자동차 4대를 포함 공장이 전소되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이후 아산은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세워 본격적인 기업인의 길에 나섰다. 1950년에는 두 회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을 설립했다.
정 회장은 방송강연 등에서 "관공서에 수금을 들어가면 우리에게는 30만~40만원을 주는데, 건설업자는 몇천만원씩 받아가는 것을 보고 더 큰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1947년 현대토건을 만들었다"며 건설업에 뛰어든 배경을 설명했다.
건설업 역시 녹록지 않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에는 모든 건설업자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리면서 그는 해외 사업에 눈을 돌렸다. 정경유착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현대건설은 1966년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도로공사, 알레스카 산속의 교량과 주택, 파푸아뉴기니아 지하수력발전소, 베트남 매콩강 준설과 군사기지, 호주의 항만 준설공사 등을 수주했다.
1948년 현대자동차공업사 창업 1주년 기념촬영. 아산정주영닷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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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현대중공업 선박 건조용 도크 앞. 아산정주영닷컴 제공
국내에서는 1968년 사업에 착수한 경부고속도로를 2년6개월이라는 사상 최단 기간에 완공하면서 신기록을 세우게 됐다.
그는 이후 조선업에도 뛰어들었다. 1970년 현대건설 조선사업부가 발족된 이후 스페인, 프랑스, 영국, 서독, 스웨덴 등 유럽 선진국에서 돈을 빌려 조선소를 건설, 영국 애플도어·스코트리스고우 조선소와 기술·판매협조를 맺었다.
당시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하거나 비웃었지만 "이봐 해봤어?"라고 한 말은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가장 유명한 일화다.
1972년에는 그리스 리바노스와 26만톤 규모 초대형 원유운반선 건조 계약을 맞었고, 경상남도 울산 방어진에서 이듬해 선각공장을 준공하며 현대조선중공업으로 분사했다. 1974년에는 울산조선소 1·2도크를 세워 리바노스에 원유운반선 1호선을 인도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순수 국산 자동차 1호인 '포니'도 만들었다. 당시 포니는 현대자동차가 포드와의 기술제휴 관계를 청산하고, 미쓰비시로부터 기술제휴를 받은 후 나온 첫 국산차였다.
서산 간척사업 또한 아산 정주영의 주요 업적 중 하나다. 서산 간척사업은 일제시대부터 계획했지만 조수 간만의 차가 너무 심해 번번이 포기해야 했던 사업이었다.
당시 방조제 공사에서 빠른 속도의 급류로 인해 물막이를 어떻게 해야할지가 화두였는데, 정 회장은 고철로 쓰려고 울산에 정박시켜 놓았던 23만톤급 폐유조선의 탱크 속에 바닷물을 채우고 가라앉히는 방식으로 물의 흐름을 막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 방법은 '정주영 공법'으로 불리면서 타임지 등에 소개되기도 했다. 당시 절약한 공사비만 290억원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살아생전 수많은 실패를 겪었던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과감한 도전정신과 과감한 행동력이었다.
그는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머리로 생각만 해서 기업이 클 수는 없다"며 "우선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한강의 기적 속에 기적은 없다. 다만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나서 한 사람의 기업인이자 성실한 노동자로서 이 나라의 비약적 발전에 한몫을 다한 것에 대해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1950년대 말 미군 공사 계약 장면. 아산정주영닷컴 제공
1978년 현대중공업 선박 건조용 도크 앞에서. 아산정주영닷컴 제공
이상현 기자(ishsy@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