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요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제1독서 : 2역대 24,18-22
제2독서 : 로마 5,1-5
복 음 : 마태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기 강사로 잘 나가던 강사가 어느 순간에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가 없어서 그럴까 싶어서 전보다 유머를 더 많이 사용했지만,
점점 불러 주는 곳이 줄어들 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는 속담처럼,
인기 강사라는 사람들의 인기가 어느 한순간 사라지더라는 것이지요.
그의 스승님을 찾아가서 왜 그런지를 여쭈었습니다.
다음은 그 스승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유명 강사들이 오래도록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크라테스가 인기 없어지는 것 봤어?”
“아니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서 인기가 없어지는 거야.”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지혜가 워낙 깊기에 그 인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지요.
잔재주로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깊이 있는 내용으로 다가서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기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님 가르침의 깊이로 인해 인기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즉, 방법의 문제가 아닌, 깊이의 문제였습니다.
저도 많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깊은 묵상으로 강론과 강의를 준비했었는지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사람은 말 잘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깊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없는 깊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진실된 마음으로 깊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 믿음, 희망을 세상의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닌,
깊이 있는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께 잊히지 않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사제로서는 아주 짧은 시간을 사셨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깊이 있는 삶,
주님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박해자의 칼날에 큰 두려움 속에 떨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주님께 최선을 다하는 삶 안에서 끝까지 견디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의 말씀처럼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다시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얼마나 깊이 있는 삶을 사셨습니까?
그 삶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합니다.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억하며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784년 최초의 영세자를 탄생시킨 한국천주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1794년 12월23일 비로소 한국 땅에 처음으로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 후 1835년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님은 방인 성직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1836년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최방제는 그곳에서 병사하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서양 학문을 정식으로 익힌 첫 조선인으로서 최고의 지성인답게
당시 조선 왕국의 국가 정세와 교회 사정 및 민생상태에 관하여 예리하게 관찰하였습니다.
두 분은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유창한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님들께 보고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46년까지 21통의 편지를 썼는데 대부분 사제 서품 전에 쓴 것이고
그중 한문과 한글로 쓴 편지가 각각 한 통씩이고 그 외에는 모두 라틴어로 썼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60년까지 19통의 편지를 전부 라틴어로 썼는데
사제 서품 후에 쓴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1845년 8월 17일에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10월에 배를 타고 조선의 충청도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846년 5월12일 순위도에서 잡혀 9월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가운데 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였지만
아깝게도 겨우 13개월 동안만 사제로 살았습니다.
그나마 2개월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황해바다 위에서 보냈고
또 4개월은 감옥에서 지내다가 순교하셨으니, 사목활동은 거의 하지 못하였습니다.
한국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784년, 지금부터 약 240년 전입니다.
당시 사회는 유교 사회였고 양반과 상놈이 구별되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으며
조상 제사에 대한 관습과 예절이 철저했던 때입니다.
이때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는 신분 계급과 조상제사라는 두 부분에 큰 충돌을 가져왔습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양반 상놈 차별을 거부하며
우상 숭배의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03년 동안(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산발적인 박해 속에 살아야 했고
그 와중에 한국인 첫 사제가 나왔지만 13개월 만에 목자를 잃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은 분명 다릅니다.
지나고 보니 신부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신앙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출생하신 솔뫼, 순교하신 새남터, 묻히신 미리내는 오늘도 우리에게 신앙의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신부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몫을 여전히 하고 계십니다.
신부님은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상에 대한 희망이 신부님을 지켜 주었습니다.
오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편지를 한 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분의 믿음과 하느님과 그 백성을 위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묵상하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스물한 번째 편지는 옥중에서 쓰신 마지막 회유문(1846년 8월말) 입니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에 나고
주님의 은총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님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은혜를 배반하니
주님의 은혜만 입고 주님께 죄를 더하면 아니 남만 못하리.
이러한 어려운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공덕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성녀의 자취를 가르쳐 성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의로운 아들)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다) 하실 때를 기다리라.”하시며
주님께 대한 믿음을 더하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큰 어려움도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너희가 감수 인내하여
주님을 위하고 오직 주님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하느님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과 믿음을 지키라는 간곡한 호소를 담았습니다.
혹 우리에게도 힘에 겨운 일이 생긴다면 더 큰 믿음으로 주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농부가 수확을 기다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듯이
우리도 참고 견디며 천상 것에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17-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1-4)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의 여정을 보면,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어려운 일이 생기기도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실망과 좌절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고 그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예기치 않은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주님의 안배와 섭리를 찾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새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삶은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일이 서로를 거스를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 속에서, 억울함 안에서, 생각하지 못한 난관 앞에서 끝까지 견디며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만하면 됐지.’ ‘나도 사람인데’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이것이 유혹입니다.
사실 천상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인내가 행복입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흘리는 수고의 땀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도 눈물과 피로써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면서 걸어가셨는데
우리가 아무런 수고 없이 공짜로 천국을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인내에, 인내를 더 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 신심미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충남 당진의 솔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술라 사이에서 3남매 중 맏아들이셨습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사위의 밀고로 체포되어,
아들을 국경을 넘겨 보낸 국사범으로서 온갖 잔악한 형벌을 받은 후에
서소문 밖에서 목 잘려 순교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열다섯 살 때, 곧 1836년에 고국을 떠나 중국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셨습니다.
그 후에 여러 차례 입국하고자 시도했다가 실패했으며,
마침내 1845년 1월에 온갖 고생을 겪고 압록강을 건너 입국하셨습니다.
그러나 전교 신부님을 모셔 오기 위해, 몸이 불편한 중에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다시 상해로 가셔야만했고, 1845년 8월 17일에는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밤낮으로 열심히 사목하던 중 체포되셨습니다.
그는 모진 문초를 받으면서도, 옥중에서 신자들에게 믿음을 잃지 말고
하느님을 섬기며 고통을 참으라는 편지로 격려를 하셨습니다.
1846년 9월 16일,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1개월 만에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로
참수의 거룩한 순교의 빨마를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1949년에 한국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정되셨고,
1984년 5월 6일에 성인으로 시성되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 때문에” 모진 핍박과 수난 속에서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셨습니다.
참으로 살 때나 죽을 때나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만 살고, “예수님 때문에”만 죽으셨습니다.
마치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서처럼 살아있을 이유도, 핍박을 받고
죽을 이유도, 오직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성인의 “옥중편지”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장께서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시니 관장께 감사합니다.”
이처럼 성인께서는 참으로 “예수님 때문에” 고문을 받으셨고, “예수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성인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오로지 예수님께 희망을 거셨습니다.
그렇기에 핍박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감사까지 드리셨습니다.
참으로, 성인께서는 <제2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시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하셨다.’(로마 5,2-3).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렇게 십자가에서 아버지를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증거는 단지 십자가에서만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공생활을 통한 일상적인 삶 전부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일상적인 증거의 삶이,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증거”, 곧 우리의 “순교” 역시 우리의 삶의 현장과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연속되는 죽음 속에 자리 잡아야 할 일입니다.
곧 일상의 삶 안에서, 나 자신의 뜻에는 스스로 죽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명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서,
매순간을 “순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2고린 4,10-11)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시고.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미움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한국 교회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1845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확고한 용기로 순교의 화관을 받았습니다.
비록 1년의 짧은 사목이었지만 신부님이 뿌린 씨앗은 한국 교회의 성직자들로 열매 맺었습니다.
드디어 2009년에는 5000번째 사제가 탄생했습니다.
신부님이 사제서품을 받은 후 164년 만의 일입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의 한인 성당도 주보성인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입니다.
해외에 있는 많은 공동체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주보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태어난 곳은 솔뫼입니다.
솔뫼는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는 뜻을 지닌 송산(松山)의 우리말입니다.
한국을 방문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솔뫼를 방문하셨습니다.
성지는 2004년에 복원한 성인의 생가와 함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관,
소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및 기념탑 등으로 조성됐습니다.
기념관은 성당을 비롯해 성인의 생애와 사목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김대건관,
대전교구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내포교회관, 기증 유품실, 소영상관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김대건 성인의 삶과 신앙을 보고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솔뫼에서 태어난 성인이 순교로 생을 마감한 곳은 서울 새남터입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분은 김대건 신부님뿐만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낳은 순교 성직자 14명 가운데 11명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11명 가운데 8명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그리고 성 샤스탕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새남터에는 현재 이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전통 한옥 양식으로 세워진 새남터성당에서 꼭 둘러봐야 할 곳은
2006년 문을 연 '새남터 기념관'입니다.
모두 4개 공간으로 이뤄진 기념관에서 '도입 공간'(입구)은 새남터성지 역사와 103위성인 성화를,
'전시 공간'은 천주교 수용과 창설, 박해 및 순교과정 유물들을 전시했습니다.
또 '추모의 장'은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 14인의 흉상과 부조 및 추모대가 있습니다.
'체험 및 교육 공간'은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를 모신
조배실과 영상물 상영실, 박해 체험 공간 등으로 꾸며졌습니다.
경기도 안성 산골짜기에 있는 미리내는 성인이 묻힌 곳입니다.
당시 대역죄로 처형당한 김 신부님의 유해를 거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성인이 순교한 지 40일이 지난 후 목숨을 걸고 성인 유해를 거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입니다.
미리내는 다름 아닌 이민식의 고향입니다. 성인이 미리내에 묻힌 사연입니다.
미리내(은하수의 우리말)는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신자들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달빛 아래 냇물과 어우러져 은하수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경당 앞에 있는 네 개의 묘 가운데 성인의 묘는 왼쪽에서 두 번째입니다.
성인의 왼쪽은 강도영 신부, 오른쪽은 차례대로 페레올 주교ㆍ최문식 신부의 묘입니다.
묘역 위편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어머니 고 우술라와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순교하실 때, 오늘날 이렇게 많은 사제가 배출되고,
신앙인이 많아지고, 신앙의 자유가 생기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박해의 칼이 너무 강하고,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교회를 발전시키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순교자들의 피와 땀이 무색할 정도로 나약하고,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잠시의 편안함과 육신의 자유보다는
영원한 삶과 그 영원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참된 신앙을 선택하였고
그래서 오늘 우리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의 수호성인이 되셨고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존경하는 성인이 되셨으며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편안하고 쉬운 길보다는 어렵고 힘든 길
그러나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길은 때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줍니다.
하지만 그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키워주고
그러한 끈기는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희망을 낳습니다.
또한, 그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 걸어가신
신앙의 길, 희생의 길, 순교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박해를 각오하여라.
조욱현 토마 신부
한국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울술라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6살 때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시 남곡리의 골배마실로 이사를 하고
1836년 은이공소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해 12월 모방 나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오르니 16세였다.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1845년 1월 조국에 몰래 입국하였다가
다시 4월에 주교와 신부를 영입하기 위하여 10여 일의 항해 후 상해에 도착한다.
1845년 8월17일 상해 근처 김가항에서 페레올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니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가 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해 10월 12일 주교와 신부를 모시고 충청도 나바위에 무사히 입국하였다.
8개월 동안 국내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중 1846년 6월 5일 몰래 출항하려다
황해의 순위도 부근에서 체포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군문 효수 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26세에 불과하였다.
1925년 비오 11세에 의해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준비시키신다.
그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제자들은 부당한 대우와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신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 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20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시는 말씀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셨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라 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인간의 본모습을 잘 깨닫고, 알고 사랑한 분이시며,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한 죽기까지 효애를 드린 분이시다. 끝까지 항구한 분이시다.
우리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항구한 믿음과 온갖 박해도 이길 수 있는
주님의 은총을 청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너무 편한 신앙생활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여러 차례 말한 바이지만 혹독한 고문과 고통 없는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지금 저의 생각으로는 고통 없는 죽음을 택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중풍을 앓으며 오래 사는 것보다 안락사가 나을 것입니다.
그만큼 고통을 오래 견디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런 저와 달리 김대건 신부님이나 순교자들은
죽음보다 괴로운 고통을 통과하고 순교까지 한 분들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두 가지라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희망이 앞에서 끌어주고 사랑이 뒤에서 밀어준다고나 할까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뒤에서 밀어주고,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우리를 앞에서 끌어줍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모든 환난을 견딜 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가리라는 희망 때문에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서간은 그 희망이 어떻게 생기냐 하면
환난과 고통을 견뎌내면서 생기는 것이라고 또한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분명 인내는 환난을 겪으면서 생기고 자라납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인내력은 환난을 통해서 생기고 자라납니다.
여기서 인내력은 인내심과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인내력이 인내할 수 있는 힘이라면 인내심은 인내하려는 마음가짐인데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에로의 희망이 우리에게 인내심을 준다면
인내력은 환난을 실제로 겪으면서 생성되고 자라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면서 순교의 열망이나 희망이 우리에게 생길 수 있지만
실제 순교 상황이 되고 환난을 겪게 되면 그로 인해 우리의 열망과 희망이
시련을 받아 꺾일 수도 있고 단련을 받아 오히려 인내력이 자랄 수 있지요.
그래서일까, 200주년 성경과 옛날 공동 번역 성서와 개신교 성경은 각기
“환난은 인내를 생기게 하고, 인내는 단련된 품성을, 단련된 품성은 희망을 생기게”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끈기는 희망을 낳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라고 좀 다르게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기도 안에서 막 잉태된 순교의 희망과 열망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것으로,
환난과 고통으로 시련도 받고 단련도 받아 어른의 희망과 열망으로 자라야 하는데,
이러기 위해서는 인내심만 가지고는 안 되고 인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너무도 편안한 신앙생활,
고통이나 환난이 없는 신앙생활,
고통으로 단련되지 않는 신앙생활이
우리의 신망애 삼덕을 약화하고
신앙을 약화함을 걱정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고작 24세의 나이에! 참으로 대단하신 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1821~1846)의 축일입니다.
그간 배출된 한국인 사제 숫자는 7천 명을 넘어섰는데,
신부님은 1호 사제로서, 한국 모든 사제들의 맏형이요 모델이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생애를 묵상할 때마다 우선 드는 느낌은 안쓰럽고 짠한 느낌입니다.
사제직을 꿈꾸며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소년 김대건은 물설고 낯선 곳에서
8년 세월을 고생한 끝에 부제품을 받게 됩니다.
사제직을 준비 중이던 청년 김대건 안드레아의 조국과 동포를 향한 사랑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조국의 동포를 향한 안타까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자 없이 살아가는 조선 천주교 교우들을 향한 연민의 정도 컸습니다.
이런 이유로 신학생 김대건 안드레아는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이
안전하게 입국할 수 있는 길을 뚫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그가 21세이던 1841년 연말 마침내 의주를 통해 밀입국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한양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눈물을 머금고 멈춥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무렵 김대건 안드레아는 부친 김제준의 순교 소식과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어린 동생과 함께 머물 곳이 없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참으로 가슴 찢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같았으면 부모님과 가족이 저 지경인데 사제는 무슨 사제, 하며
다 팽개치고 어머니를 찾아 떠났을 것입니다.
1844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학생은 드디어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습니다.
보다, 안전하게 조선 입국로를 뚫기 위한 그의 노력은 점점 배가되었습니다.
드디어 1845년 1월 꿈에 그리던 입국이 성사됩니다.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던 시절이었기에, 육로를 통한 정식 입국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청년 김대건 안드레아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국경에 도달한 그였지만, 여권이 없었습니다.
기지를 발휘해 아슬아슬하게 국경을 통과했지만,
가는 곳마다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홀로 밤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큰길로는 걷지 못하고 숲이 무성한 산길로만 걸으니, 그 여정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날씨는 한겨울, 눈은 펑펑 오지, 먹은 것은 없지,
결국 그는 눈 위에 쓰러져 정신을 잃기까지 했습니다.
조선지목구장 페레올 주교와 파리외방선교회 사제들을 조선으로 모셔 오기 위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고초는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상해에서 출발한 라파엘호는 큰 바다를 건너다니는 배가 아니었습니다.
연안에서 조기잡이 정도나 할 수 있는 작은 황포돛배였습니다.
바닷가에 살다 보니 바다의 위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제 그리 잔잔했었는데, 오늘은 완전히 돌변해서 무섭고 거친 모습입니다.
그런 날 황포돛배를 타고 큰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상해 바로 건너편은 제주도입니다.
따라서 선장 김대건 신부의 계획은 인천과 가까운 산동 반도 쪽으로 올라가서
한강 하구를 통해 입국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친 파도와 풍랑에 떠밀려 정처 없이 흘러가던 라파엘호는
제주도 앞까지 떠내려갔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새 사제의 전도 여행길은 거의 목숨을 건 여행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의 여정이 마치 바오로 사도의 여정과 흡사합니다.
고작 24세의 나이에!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모습 앞에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외국말로 그 어려운 신학 공부한다고 10년 가까이 쌩고생했지,
입국로 뚫는다고 거의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었지,
뱃길로 선교사 동반하려다 죽을 고생한 새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를
고작 24세의 나이로 당신 나라에 데려가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국과 동포를 향한 극진한 사랑,
선교사 영입을 위한 불굴의 의지, 목숨을 내건 선교 열정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부족한 사제들의 수호자시니, 천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계속 격려하고 계심을 굳게 믿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