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아모 9,11-15
복 음 : 마태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매일 자정이 되면 누군가 당신에게 24만 원씩 꼬박꼬박 입금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규칙이 있습니다.
첫째, 매시간 1만 원씩 어떤 주식이든 사야 합니다.
둘째, 같은 종목에 반복해서 투자할 수 있습니다.
셋째, 단, 1시간에 1만 원씩만 투자할 수 있으며, 1시간이 지나면 1만 원은 소진됩니다.
그래서 하루가 지나면 24만 원이 모두 소진됩니다.
넷째, 받은 돈은 모아둘 수 없습니다.
다섯째, 자정에 다시 24만 원이 입금되면 매시간 1만 원씩의 투자를 반복합니다.
실제로 꼬박꼬박 24만 원씩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 이야기입니다. 매일 현실 속에서 주어지는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잠자는 주식에, 누구는 글 쓰는 주식에, 누구는 기도하는 주식에,
누구는 공부하는 주식에, 또 운동하는 주식에 투자하기도 합니다.
투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미래를 위한 나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 과연 투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순간의 재미만을 위해 스마트폰, 유튜브, 게임 등에 집중하고 있다면 좋은 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이에 대한 험담과 같은 뒷담화는 또 어떨까요? 역시 좋은 투자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급급하다면
이 역시 좋은 투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위해 매일 받는 24시간으로 어떻게 투자해야 할까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가 열렸고 신랑이 잔칫상에 함께 있는데,
어떻게 단식하느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모습이 당시 바리사이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식만 하면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식의 모습을 보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가득 담아낼 수 있는
잔칫상의 새 부대가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삶을 과거에 연연하면서 낭비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진정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이런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지향적인 삶
반영억 라파엘 신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충실하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합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단식하는가?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거나,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구별됩니다.
단식의 정신은 고행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왜 단식을 하며, 무엇을 위해 하며, 누구를 위한 단식인가?
구약성경에서 ‘단식’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판관 20,26-28),
회개의 표시로(요엘 2,12), 죽은 이를 위한 애도의 표시로(2사무 7,6) 행해졌으며,
이사야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사 58,6-7)에 대해 언급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전에 광야에서 단식하셨으며(마태 4,2),
사도의 임명이나 파견 때 행해졌고(사도 13,2-3;14,23),
마태오 복음사가는 단식할 때의 바른 자세(마태 6,17-18)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 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
이는 단식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신랑이 와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34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신심 행위로 1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고, 요한의 제자들은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아무도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마태 22,1-14)와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에서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요한 3,2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새 천'과 '새 포도주'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6-17)
그러니 이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새 부대는 새 시대를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
사실 이 비유들은 ‘새 것’(헝겊, 포도주)과 ‘묵은 것’(옷, 포도주 부대)의 부조화를 강조하면서,
신랑이신 예수님의 때는 단식이 적합하지 않은 특별한 순간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마치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비연계성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는
이 말을 붙임으로써 다른 전환을 가져다줍니다.
곧 ‘묵은 것’을 잃기를 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묵은 것’이 ‘새것’에 의해서만 보존된다는 것을 제시해 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취해, 기뻐 흥겨우리이다.
온통 젖어, 향기 품으오리이다.
만나는 이마다 축복과 기쁨, 생명과 진리, 그득 담아 건네오리이다.
오늘, 저의 삶이 화들짝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저는 2019년 8월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매년 6월에 교구사제모임이 있습니다.
2020년 6월에는 과테말라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이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 코로나 팬데믹이 있었고, 교구사제모임은 취소되었습니다.
2021년에는 아직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지 않아서 교구사제모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22년에는 댈러스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있던 신부님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신부님만이 저보다 먼저 미국으로 왔습니다.
2023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2019년, 제가 미국에 왔을 때 있던 신부님들은 모두 한국으로 복귀했고,
저와 같이 2019년에 미국에 왔던 신부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2024년에는 워싱턴 DC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뉴욕의 신문사 일을 마치고,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옮겼기 때문에
저보다 먼저 온 신부님도, 저와 같이 왔던 신부님도 모두 한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이제 제가 제일 오래되었고, 제일 연장자가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시간의 무상함도 느껴집니다.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으면 부대도 찢어지고, 새 술도 쏟아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술과 새 부대’의 의미는 무엇일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낡은 부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처럼 미국에 온 지 오래된 사제가 낡은 부대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이제 막 미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사제가 새 부대라는 의미도 아닐 겁니다.
저처럼 33년 된 사제가 오래된 술은 아닐 겁니다.
이제 막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이 새 술은 아닐 겁니다.
그렇습니다. 새 술과 새 부대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 술과 새 부대는 ‘생각’의 문제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낸다면 언제나 새 술과 새 부대입니다.
반대로 현실에 안주하고,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언제나 오래된 술과 낡은 부대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와 복음’이라는 새 술을 준비하였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비록 많은 지식이 있고, 율법을 잘 지켰을지라도 낡은 부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받아들였던 어부들은 새 부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술’의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쫓아가는 사람은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썩어버린 사람도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멍에를 남에게 씌우고 편한 길만 가는 사람도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도 새 술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새 술이 될까요?
그렇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새 술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가 새 술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닭이 울자 통회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가 새 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새 술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가 새 술입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던 착한 이웃이 새 술입니다.
겸손한 사람,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은 새 술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능력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직책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가 새 술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감사 할 수 있다면
저도 새 술과 새 부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병들었던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깨끗하게 되었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로 인해서 매일 새로운 세포들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우리들의 신앙생활로 거듭나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밭에는 농부가 원하지 않는 잡초가 함께 자라나듯이
우리의 마음에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악한 것들이 자리 잡곤 합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악한 세력들입니다.
‘탐욕, 분노, 질투, 게으름, 미색, 교만, 과식’입니다.
이것들은 암세포와 같아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면 좀처럼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없애는 것은 새로운 것들을 우리의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기도, 희생, 봉사, 나눔,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
우리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유다인들에게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자주 단식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별로 단식하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4절) 묻는다.
예수께서는 결혼식을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
그들의 결혼은 집에 있으면서 일주일 동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기쁨의 축제를 지냈다.
이때에는 모든 율법의 의무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즐길 수 있었다.
그때에는 단식의 의무에서도 해방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신랑에, 제자들은 신랑의 친한 친구들로 비유하신다.
그러한 잔치에서 슬퍼하며 단식할 수 없다. 그때는 단식할 때가 아니고 즐기는 때이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을 빼앗기고 슬퍼하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기고 난 후 단식을 하게 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시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시고 나서 제자들은 단식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잔치이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 슬픔과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
주님을 모시고 항상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 내 잘못으로 주님을 모시지 못했을 때는
우리는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을 베풂으로써, 주님을 다시 모셔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16-17절).
수축이 강한 새 천을 찢어서 헌 옷을 깁는 사람도 없지만,
새 포도주도 발효가 심하므로 수축 작용이 거의 없는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의 고정화된 나 자신의 틀인, 헌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를 버려야 한다.
내 마음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모두 복음을 새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여기서 새 포도주는 무엇일까요?
새로운 사조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새 부대는 무엇일까요? 새로운 사고방식인가요?
그렇습니다.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려면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고루한 사고방식으로는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며칠 전 한 형제가 요즘의 놀라운 흐름을 들려주었습니다.
15분짜리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팝콘을 다 먹기 전에 영화가 끝난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도 단편 영화는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인가 했는데 그것과는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긴 것은 지루해서 보지 못하고
짧아야지만 보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은 이런 사조나 흐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제 생각에 이것은 새롭기는 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또 많은 것이 새롭기는 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몰려드는 새로운 것을 가운데서
어떤 것이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것인지 늘 식별해야 합니다.
사실 요즘은 새로운 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이고
나이 든 사람에게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또 새로운 것이 나와 문제이고
그래서 새로운 것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늘 식별해야 하고 잘 식별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로운 것이니까? 물론 이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로운 것이 해롭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로운 것도 또 식별해야 하는데 많은 해로운 문명과 문물이 대개 이러합니다.
요즘 인공지능의 문명과 문물이 이러합니다.
제 생각에 식별의 완전한 기준은 사랑입니다.
문명이건 문물이건 제도이건 주의이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에 이바지하면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 포도주이고
그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새 부대이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단식의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십니다.
사랑 곧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단식이요, 사랑을 위한 단식은 우리가 해야 할 단식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 굳이 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강박 관념을 가질 필요도 남에게 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단식이라 음식을 끊는 것인데 우리가 끊어야 할 것은 음식이 아니라 욕심이지요.
우리가 끊어야 할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애욕입니다.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양승국 스티파노 신부
한 아이의 출생이 과거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었는데,
저출산 시대인 요즘은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을 주민 전체가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다들 아이 얼굴 구경하러 가고,
마을 입구에는 축하 플래카드까지 내걸립니다.
사실 이게 정상인데, 그동안 우리는 비정상이 정상이 시대를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수 많은 청춘 남녀들이 결혼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시대를 살다 보니,
결혼식이 거행되고, 주님 안에 한 커플이 탄생하는 것이 엄청난 일로 여겨집니다.
요즘 우리 모두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결혼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혼인이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고, 두 가문이 만나고, 두 가치관과 두 세상이 만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살아왔는데, 이제는 함께 걸어줄 동반자가 생긴 것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할 평생 동지가 생겼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쁨인지 모릅니다.
이토록 기쁨 충만한 혼인 잔칫날에 어두운 표정으로 인상 쓰고 있다면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일 것입니다.
잘 차려진 축하연에 단식한다며 숟가락조차 들지 않고 우울하게 앉아 있다면
그것보다 더 꼴불견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가장 기본적인 분위기는 축제입니다.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며 축제를 즐기고 만끽하는 것은
혼인 당사자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딱 마음에 드는 짝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우리를 위해,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세상 멋진 신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그분과 이 세상, 그분과 그분의 신부인 교회,
그분과 우리 죄인의 혼인을 의미하는, 대 사건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매일 새롭게 결합되고 한 몸이 됩니다.
매일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우리 사이의 혼인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세례 성사를 통해 주님과 혼인한 우리는 매일의 성찬례를 통해 그 혼인을 갱신한다니,
이보다 더 큰 은총과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하루는 매일이 기쁨 충만한 축제여야 마땅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이 지상 순례 여정이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매일 주님과 혼인하고, 그 혼인을 갱신하는 우리들이니,
얼굴을 활짝 펴고,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단식이란 회개의 표징이며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지난 복음에서 침상의 중풍병자와 세리 마태오와 관련한 주님의 모습에서 보듯이,
질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관계를 깨어버리고, 죄인까지도 불러 제자로 삼으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공동체를 이루신 예수께서는
분명 이 땅위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죄의 용서는 갈라지고 깨어진 관계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공동체에로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위에서 예수 외에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철칙을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한낱 하느님을 사칭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자로만 인식되겠지만,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오늘 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단식에 관한 문제로 시비를 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단식’은 일정 기간 동안 종교적 수행이나 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입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인데,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는데,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습니다.(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 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시대으;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 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루카 18,12; 마르 1,6; 마태 11,19)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단식은 율법이 명하는 공식적인 행사로서가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수행으로서의 단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 잔치에서의 신랑, 새 천 조각, 그리고 새 부대와 새 포도주에 비유하시는데,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입니다.
이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6;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입니다.
단식이란 회개의 표징으로서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이며,
구약성서와 유다교에서 단식은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미 도래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ipso facto) 모순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온통 메시아 도래의 기쁨에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합니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새 옷 – 낡은 곳, 새 포도주 – 묵은 포도주, 새 부대 – 헌 부대”를 소재로 한
이중 비유는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층 더 또렷하게 밝혀줍니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도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말하는데,
이제 헌 것은 가고, 새것이 도래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도래했습니다.
새로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헌 것을 가지고 맞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준비는 마음의 “어느 한 조각”으론 불가능하기에,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과 태도의 전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