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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신알랜주교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1데살 1:3).”
알랙산더 대왕(BC 356-323)이 태어난 곳이 마케도니아 국가의 데살로니카입니다. 데살로니카의 이름은 알랙산더 대왕의 이복누이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BC315). 그리스의 아테네 다음으로 큰 도시이고 아리스토텔레스대학이 있고, 코로나 백신을 만든 화이자 회사의 엘버트 불라(1961년생)회장이 이 대학교의 수의학과 출신입니다. 사도 바우로가 고위층과 부자들과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에 참여시킨 선교에서 성공한 도시가 데살로니카입니다. 바우로의 두 개의 편지의 핵심은 윤리적 고결성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설 사람들인데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라는 라틴어인 코람 데오 Coram Deo가 있습니다. 이 라틴어를 보면 떠오르는 분이 신알랜주교와 문클라라사모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면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고 자신이 숨겨둔 죄들이 쏟아질까 봐 두려운데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신알랜주교부부는 하느님이 선택해 주신 분으로 예쁘게 바라보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카의 신도들이 “많은 환난 중에서도 성령이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받아들이고 주님까지 본받았습니다(1데살 1:6).” 하느님 앞에서 코람 데오Coram Deo 에 있을 때 하느님이 기쁘시게 바라보는 우리 성공회 신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실천적인 믿음으로 살았는지가 드러날 것이고, 하느님 앞에서 열심히 수고를 해서 만든 사랑으로 살았는지가 드러날 것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단단히 하며 살았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실천하고, 열과 성을 다해 사랑하고, 예수에게서 희망을 찾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 코람 데오에 예쁘게 설 신도가 우리이길 바랍니다. 신알랜주교는 대한성공회가 하느님을 잘 믿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를 바라셨습니다. 성공회 신도들로부터 말씀이 퍼지길 기대하셨고, 하느님의 화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실 예수가 다시오길 기대하는 대한성공회 신앙이기를 간절히 바라신 신알랜주교이십니다. 대전주교좌성당과 대전 나눔의집과 나는봄과 광혜원성당과 김제나눔의집과 제주 서귀포를 다니시면서 제게 주신 말씀들이십니다. 뉴욕교구가 펼치는 나눔의집 같은 청소년선교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주셨고 람베스회의시기에 대한성공회 세 주교들을 돌봐주시고 람베스회의를 마치고 일부러 런던에 계시면서 두려움이 반쯤 찬 제게 서덕교구에서의 새로운 선교에 대해 영적으로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며 사시는 신알랜주교이시기에 제가 자연스럽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속으로 제 할 일을 계획해도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시는 분은 야훼시다(잠언 16:9).” 사람이 계획을 세울지라도 하느님이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신다는 뜻입니다. 머리로 계획을 세우지만 걸음걸이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앞길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으니 신심이 깊고 영성이 깊은 영적 안내자를 만나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갈 수 있습니다. 영적안내자 역시 하느님이 보내 주십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에돔 왕이 연합하여 세 부대의 군사들이 모압왕 메사 군대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군인들이 7일간 길을 헤매었는데 그 때 광야에서 마실 물이 떨어졌습니다(1열왕 3:9). 모압군대의 밥이 되겠다는 절망하는 여호람 이스라엘 왕에 비해 ‘여기 야훼의 예언자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유다 왕 여호사밧입니다. 엘리야의 시중을 들던 엘리사가 여기에 있다고 이스라엘 왕의 신하가 답을 합니다. 수금 뜯는 사람이 연주하는 동안 사무엘예언자는 하느님의 힘에 사로잡혀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이 골짜기에 군데군데에 웅덩이를 파라(1사무 3:16). 바람불고 비오는 것을 보지 못하겠지만,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 차서 너희와 너희 군인들과 짐승들이 마실 수 있게 될 것이다(1사무 3:17).” 다음 날 아침기도 시간에 에돔쪽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그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병거를 먼저 찾은 여호람 이스라엘 왕과는 다르게 여호사밧의 유다 왕은 하느님의 예언자를 먼저 찾는 것을 봅니다. 여호사밧의 청으로 엘리사예언자가 움직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재난이 와야 하느님을 찾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재난이 오든 안 오든간에 늘 하느님을 찾는 기도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실한 예언자 엘리사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짐승들까지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그 신실한 한 사람인 예언자를 보내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늘 하느님을 찾는 성공회이어야 물이 없어 죽지 않게 될 것입니다. 늘 하느님을 찾는 신알랜주교의 신앙의 모습이 제게 눈을 크게 뜨게 한 이유입니다.
주교의 지팡이를 크로이져 Crozier라고 부릅니다. 라틴어로는 바쿨러스 파스토랄리스 Baculus Pastoralis로 ‘목자의 지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회에서는 Holy Baculus 거룩한 지팡이로 ‘聖杖성장’이라 부릅니다. 성장을 주교의 지팡이라 하는데 성장의 위가 구부러져 갈고리 crook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양떼를 돌보라”는 주교단의 말씀과 함께 주교 지팡이를 건네받습니다. 주교가 사목을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신도들과 늘 관계 깊은 영적인 주교이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주교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구부러진 곳이 미사집전 시에는 신도를 향하고 주교 스스로를 위한 감사성찬례 때에는 구부러진 곳이 주교 자신을 향하게 합니다. 오늘은 교회의 신도를 위한 것이니 성장 위의 구부러진 곳이 신도를 향하는 것입니다. 주교 지팡이인 크로이져를 보좌내지 복사가 잡을 때에 어깨에 걸친 두손이 들어가는 비단 베일천을 뷤파 Vimpa에 손을 넣고 성장을 잡습니다. 깊은 신심으로 성장을 잡는 것이라 맨손으로 성장을 잡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물건을 항상 거룩하게 모시기 때문에 그냥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뵘파의 가장자리에 손이 들어가 손이 보이지 않게 하여 크로이져를 받드는 것입니다. 뉴욕교구의 신알랜주교가 사목했던 성당에서는 지금도 빔파 vimpa를 사용합니다. 성장인 크로이져를 평소에는 수다리음 Sudarium이라는 포로 천덥개식으로 덮어둡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거룩하게 모시는 마음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거룩성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닮은 사람이라 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聖徒성도라 부르는 것이고 하느님의 본성인 거룩성이 공동체를 싸고 있기에 우리 교회를 거룩한 공교회로 聖公會라 부르고 주교의 지팡이를 성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알랜주교는 저를 뉴욕교구에 초청을 하여 전통적인 성공회의 전례에 참여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미국 뉴욕의 가장 번화한 한복판에 있는 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전례를 수행하는 이 교회에서 사목하셨다는 신알랜주교의 품 안에 보수의 가치와 진보의 가치가 다 들어있음을 보았습니다. 극단을 치닫는 지구 안의 나라들을 보면서 새로운 인류가 아갈 바를 신알랜주교가 삶으로 제시하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팡이의 머리가 구부러진 성장인 크로이져의 맨끝은 한 점을 상징합니다. 저는 이를 우주의 시원이 한 점에서 시작하였다는 빅뱅의 이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한점이 시작되는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상이 서 계십니다. 137억년 전에 한 점이 폭발하여 그것이 지속적으로 팽창하는 가운데 우주가 이뤄어졌다는 빅뱅이론은 벨기에 조지 르네뜨르신부님이 1927년에 만든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하여 우주가 팽창하는 이 이론은 라듸오의 주파수를 마추기 전에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빅뱅의 메아리라는 것입니다. 무수히 많은 밀도와 중량을 지닌 것들이 우주의 시간의 곡선을 그리면서 무수한 작은 공간 안에 거대한 덩어리가 포함된 한 차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이론의 한 지점서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것과 양떼를 돌보라는 전통적인 교회의 생각을 결합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리적인 법칙들을 우리가 다 알 수 없고 그것들을 다 작동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하느님의 크심에 엎드릴 수밖에 없음을 알고 겸손히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산에서 자란 한 나무가 지팡이가 되었는데 이것을 알고부터는 주교의 지팡이 크로이져가 우아하고 기품있는 신앙의 길을 열어 주는 구부러진 원호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큰 우주 앞에 인간은 아주 작디작은 존재일 뿐인데 크신 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니, 복받은 존재가 인간임을 알게 해주는 것이 주교지팡이 크로이져입니다.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 늘 겸손히 자신의 자세를 낮춘 신알랜 주교는 조금 아는 것을 과시하는 제 모습과는 참으로 많이 다르고 저는 그 다름을 배우고자 매달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신주교는 그것을 싫어하지 않으시고 더 깊은 대화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사울에게 내릴 때마다 다윗은 수금을 뜯었다. 그러면 악령이 떠나고 사울은 회복되어 숨을 돌릴 수 있었다(1사무 16:23).” 악한 영을 하느님이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저를 제대로 세우기 위한 훈련용으로 악한 영을 제게 보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제 마음이 두려움에 쌓여서 앞길이 보이지 않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야훼께서 내리신 악령이 사울을 공포에 몰아넣자(1사무 16:14)” 다윗의 수금연주로 사울은 보다 나은 기분이 들었고 원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다윗의 수금연주로 마음에 평정을 지니게 된 사울왕입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시점에 영적인 말씀으로 저를 이끌어 주셔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여 주신 신알랜주교와 문클라라사모이십니다. 신알랜주교는 영국신사이시고 지적인 언어에 행동이 바르시고 입이 무거우시며 유머까지 겸비하셔서 시골출신인 저와는 매우 다른 세계에서 사신 분으로 느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셔서 그런지 배운티까지 드러내지 않으시고 거친 제 목소가 부드러운 신알랜주교의 목소리 덕분에 거친 제 목소리가 숨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깊은 사랑이 배어있는 동행자로 문클라라 사모의 삶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팔아 유익을 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회는 자신을 팔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팔지도 않고 사랑으로 살뿐입니다. 그렇게 마음속의 진실로 살고자 하시는 신알랜주교의 자기이해를 깊게 하는 큰 덕목을 가까이 보는 것만 해도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저는 탐구없이 낙관적인 성격에다가 공공선을 향한 무작정 달려 나가는 방식인데 비하여 신알랜주교는 자기 속을 깊이 보는 시간을 가지고 나서 천천히 힘있게 움직이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제게 없는 절제된 희망을 가지고 선으로 연대를 만드시는 알랜주교가 그렇게 좋은 것이 저도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자신의 권력보다도 선의 연대를 세우는 삶이 관용적인 사회를 먼저 세운다는 사실을 다시금 새기게 해 주신 주교이십니다. 주교는 관용적이고 신도는 하느님 마음에 열림으로 일치해야 한다는 선포는 제게 주요하게 다가왔습니다. “분별은 올바른 목표에 대해 불확실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르기 위한 최선의 수단을 찾는데 도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엘렌 제이콥스의 ”생각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에서).” 분별은 적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지 않아도 우군을 만드는 것입니다. 극단으로 치솟는 우리사회에 분별이 매우 필요합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는 방법이 탁월해서인지는 몰라도 신앙랜주교의 분별력이 우리 사회에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에 자주 한국에 오셔서 귀한 말씀을 들려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이제 한국사회에도 인종차별은 주저하는 모양새를 가진 듯합니다. 그러나 사상의 차이는 주저함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창을 들고 나서는 상태입니다. 사상의 차이까지 차별을 하지 않는다면 극단으로 아방타방을 나뉘는 맹종적인 패거리 문화에서 숨쉬기가 어려운 데서 벗어날 것입니다. 어제 처음 동성애자녀를 둔 부모모임이 처음 대전에서 저녁에 있다는 동성애 딸을 둔 어머니의 전화를 오후 3시경에 받았습니다. 이 모임이 열리는 것이 너무 좋아서 꼭 주교에게 알리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고 한 동성애 딸의 어머니였습니다. 서른 네살이 되기까지 딸이 엄청나게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살아왔다며 딸의 삶에 사랑으로 동의한다는 그 어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하느님, 이들을 도우소서.”라는 기도로 마치면서 전화를 마쳤습니다. 뉴욕교구에서의 동성애자들을 위한 선교사를 양성하는데 온 신경을 쓰시는 신알랜주교의 움직임을 본 저에게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주교가 되었습니다. 극단의 사회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의 힘이 너무 강해서 도덕적인 판단력과 현실적인 판단력을 모두 무너트리게 합니다. 그동안 어렵게 쌓아놓은 지적토대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 요즈음의 한국사회입니다.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사람의 탁월한 의견을 경청하는데서 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의 규칙을 이행하려는 마음에서 극단이 무너지게 해야 후손들이 평화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잇는 신알랜 주교가 계시기에 대한성공회는 복있는 성공회입니다.
신알랜주교의 보고서에는 그이 신심이 묻어납니다. "뉴욕교구의 집단적 영적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세상에 대해 은총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에게 삶이 변화한다는 보상을 받습니다."는 말씀이 제게 오래 머물렀습니다. 미국성공회 의장주교이신 대주교가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의 성령의 삶을’ 주장하시듯이 신알랜주교는 ‘경청의 삶으로 관대함이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살게 하는 방식’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특별한 양식이 보편화하는 데 성공회가 적절하게 앞장서 가 인류의 새로운 지평을 여시는 신알랜주교이십니다. 자녀와 헤어진 이주민 여성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알랜주교의 마음이 제게 들어옵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집입니다. “나는 성장하는 내 교회이기를 원합니다.”는 표어로 차이를 넘어 공동체로 사는 삶의 방식을 제안하십니다. 극도의 증오심과 비합리적인 공포, 차가운 살인이 멈춰야 사랑받는 공동체 교회가 건설된다는 신알랜주교의 외침이 인류에게 퍼지고 있습니다. 악에 저항하여 죄에 빠졌을 때마다 주님을 향하려면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는 기도의 고백이 제 가슴 안에 들어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는 성공회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신알랜주교을 알게 되면서 더 깊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주신 신알랜주교와 문클라라사모께 하느님이 퍼부어주시는 복이 머물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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