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도발적인 제목으로 시작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이 글은 이영도님의 '드래곤 라자'에 대한 치졸한 감상문임을 밝힌다.)
드래곤 라자에 대한 감상글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아니, 나 혼자 즐거워서 썼던 패러디 조차도 영도님이 볼 수 있는 게시판에는 올리지 않겠다고도 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감상글을 써서 그 감상이 구체화 될 경우 그 교조적으로 빠질 내 글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그렇게 된 글을 감상이랍시고 작가가 볼 수 있는 게시판에 올리는 것은 팬으로서 할 짓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패러디도 마찬가지였다. 나 혼자 공상하고 나 혼자 글을 쓰고. 그리고 나서 프린트를 해서 읽으며 즐거워 했을 뿐. 이 감상글 역시 언제까지나 내 감상문 폴더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드래곤 라자를 한번 더 읽은 지금 이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기에 에디터를 열었다.
인간을 이야기 할때 우리는 어떤 소재를 잡는가?
- 가슴속 프로토스에게 EMP Shock Wave를 날려라.
작가는 글을 쓸때 잡담에서 잠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있었다고 기억한다. 글을 쓰는 이는 철저히 사실과 전개만을 묘사하고, 나머지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는 것이라고. 뭐 작가의 그 말을 방패로 삼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보잘것 없고 높은 톤으로 이야기 하는 감상글은 결국 필자 혼자의 생각으로 시작해서 그렇게 끝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그점을 양지해 주시기 바란다.
드래곤 라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고찰되었고, 또한 이야기 된 것이다. 나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물론 많은 부분 다른 사람들과 그 의미를 달리하기는 한다.) 드래곤 라자는 그 가벼운 문체와 유쾌한 대화체에 '인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드래곤 라자를 이야기하면서 나와야 하는 첫번째 것은 그것이 환타지이며, 혹은 가장 뛰어난 환타지이며. 혹은 설정이 녹아있는 환타지이며. 혹은 뛰어난 해학을 갖춘 환타지이며. 그런것들 보다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한 '글'로서의 위치이다.
드래곤 라자의 많은 독자들이 드래곤 라자라는 글을 쓰면서 매 챕터마다 다른 주제를 들고 나왔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나 역시 그들의 논리에 완전히 반하는 것은 아니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드래곤 라자의 테마는 결국 하나이며, 나머지는 그 테마를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적 도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드래곤 라자에서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린 부분은 오직 두군데 뿐이라고, 그래서 그 부분이 모든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유명한 대사,
"엘프가 숲을 걸으면 그는 나무가 된다. 그러나 인간이 숲을 걸으면 그곳엔오솔길이 생긴다. 엘프가 밤 하늘을 바라보면 그는 별빛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밤 하늘을 바라보면 거기엔 별자리가 생긴다."
"드디어 인간은 신의 권능까지 인간의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군."
이 두마디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인간, 특히 소유적이고 투쟁적이며,모든 것을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인간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일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는 드래곤 라자에서 이미 라자의 핏줄을 잃어 버렸으면서도 영원히 그 핏줄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할슈타일을 그렸고, '완전한 세상'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핸드레이크를 등장시켰다. 루트에리노의 여덟별 역시 소유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조금 비약이겠지만, 오르크와 '괴물초장이'의 관계도 그런 느낌이 없지는 않다.
그렇다면 원론적인 이야기로 돌아가서, 드래곤 라자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드래곤 라자에서 드래곤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권능, 무한한 지혜. 영원한 생명. 그리고 공포까지(바이서스의 재앙 크라드메서를 생각해 보라) 갖춘 드래곤은, 여타의 환타지에 등장했던 최강의 몬스터이거나 최강의 우방의 이미지가 아니다. 드래곤은 신, 혹은 절대적인 그 무엇에 비유되어 있다. 드래곤 라자는 상징일뿐이라고 작가는 누누히 작품 속에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드래곤 라자와 드래곤 사이의 관계를 소유와 종속의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챕터 1의 첫장면, 돌로메네의 글에 잘 나타나있다.) 결국 소유의 한계를 넘어서서 도저히 소유할 수 없는 것까지 갈망하는 인간, 자이펀의 셰이크리드 랜드는 그 소유욕에 의해 나타나는 크라드메서의 비극을 복선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인간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비극의 원천이자 소유의 궁극인 라자는 사라지지 않으며, 소유의 고리 끝에 매달려 있는 크라드메서는 자살의 길을 택한다. 결국 드래곤 라자는 독자에게 "인간은 어떤가?" 라는 질문만을 던지고 결론은 이야기 해 주지 않은 것에서 끝을 맺고 있다. 하지만 독자는 그의 결론이 결코 비관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12권 후치의 회상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야말로 "인간을 이야기 했을 뿐" 작가는 독자의 생각에 개입하지 않은 것이다.
드래곤 라자를 읽은 후, 독자는 잠시 책을 덮고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과연 작가는 환타지를 쓰기로 하고 드래곤 라자를 구상한 것일까?"
그것이 아니면
"드래곤 라자를 쓰기 위해서 작가는 환타지를 선택했던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다른 길도 있었겠지만, 작가는 드래곤 라자라는 소설을 훌륭히 환타지로 맺었고, 또한 질서정연하게 자신의 의문점을 그 안에 피력해 넣었다. 작가가 드래곤 라자 이전에 어떤 글을 썼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작가가 드래곤 라자라는 이야기를 환타지로 쓴 것은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고, (솔직히 나는 이 부분에서 작가가 당연히 고심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엘프와 드워프, 드래곤이라는 이종족을 등장시킴으로 해서 인간의 이미지가 부각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글'과 '환타지'로서의 양쪽 모두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 냈다고 생각한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는 테란의 마법사 유닛으로 사이언스 베슬이라는 유닛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EMP Shock Wave라는 기능을 그 사이언스 베슬에 추가해 넣었다. "아콘을 상대하기 위해서 사이언스 베슬을 활용하라"라는 메시지가 그 안에 있다. (스타크래프트를 해보지 못한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무시했으면 한다. 말도 안되는 비유니까.)
비록 결론을 내리지 않았지만, 드래곤 라자는 환타지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뽑아 내어 결론을 위한 소재로 활용하였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면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환타지라는 프로토스는 이영도에 의해 EMP Shock Wave를 맞은 것이다. (사족: 정말 치졸한 비유로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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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저렇게 도발적인 제목으로 감상글을 시작했던 것은 별것 아닌 이유이다. 천재는 시도되지 않은 일을 하며, 노력가는 천재가 닦은 길을 넓힌다. 노력가의 뼈를 깎는 노고와 열성, 그 끊임없는 정진에는 찬사를 보낼 수 있지만, 천재의 새로운 시도에는 감탄을 보낼 뿐이다.
나는 그래서 영도님을 존경하지 않는다. 존경이라는 것은 '나도 노력하면 닿을 수 있는 경지에 있을때' 가능한 것이기에. 난 그래서 그의 팬으로 남을 것이고, 혹 누가 내 글을 영도님 작품의 아류라고 한다면 기쁘게 감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