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연중 제14주일
제1독서 : 에제 2,2-5
제2독서 : 2코린 12,7ㄴ-10
복 음 : 마르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 삶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곤 합니다.
그런데 그 구분을 대부분 은퇴라고 생각합니다.
은퇴 시점을 기해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처드 로어의 ‘위쪽으로 떨어지다’라는 책에서는 조금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전반부는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시기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일, 관계, 삶에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후반부를 맞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누군가는 정체성에 들어갈 내용을 담아가면서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바로 이 모습을 위쪽으로 떨어진다고 리처드 로어는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 위쪽으로 떨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전반부 삶의 태도와 접근 방식이 그대로 지속되면서 어떤 변화도 없을 때 그렇게 됩니다.
여기에 신체적 노화까지 오면서 점차 아래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시점은 언제였을까요? 바로 공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삶을 마치고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님 삶의 후반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반부의 삶에 충실하면서 공생활을 준비하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살면서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줄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 사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삶이 아닌
위쪽으로 떨어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당신이 먼저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과거의 모습만을 생각합니다.
놀라운 말씀과 많은 기적에도 예수님의 후반기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재를 사는 예수님이 아닌, 과거에 살았던 예수님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는 모습에서
믿음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믿음 없는 곳에서 하느님의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에만 연연하는 사람은 지금을 사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위쪽으로 떨어지는 변화도 없습니다.
세상에만 집착하고 세상의 눈으로만 바라보니 계속 아래쪽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변화된 많은 성인 성녀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철저하게 변화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변화를 지향하고 있나요?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하면 보입니다. 선한 것이 보이고, 부족한 허물을 보완할 방법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보입니다. 꼬투리 잡을 허물이 보입니다. 문제만이 보입니다.
편견과 불신이 있으면 볼 것을 보지 못합니다.
믿는 이들은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모든 것 안에서 선한 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능력을 얻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 판단력과 방향 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성체조배를 통해서 나의 삶을 비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식인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직업이 대수롭지 않은 목수라는 것,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자랐다는 것,
즉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것,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자기들보다 별로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못마땅하였습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
마음이 비딱하면 밖으로 나오는 것도 비딱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고향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시기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잘못된 선입관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은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어진 결과물에 매이지 않고 은총을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입견에 얽매여 사람을 잘못 판단하거나 겉모습에 집중하여
진리의 소리를 무시하며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내 소리가 너무 크면 다른 사람의 소리뿐 아니라 하느님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지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이 걸어야 할 걸음이다.', '이것이 길이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점을 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했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꾸지 않는 것, 내 마음대로,
닫힌 내 마음으로 내가 들은 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고집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 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사람의 아들이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들에게 보내진'(에제 2,4) 사실을 전해줍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배경 구실을 합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의 완고함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힘은 오히려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고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혹 우리도 더러는 사회적으로는 존경받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이들, 곁에 있는 이들, 곧 내 남편, 내 아내, 내 형제,
내 자식으로부터는 존경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리고 이를 바꾸어서 이렇게 질문해 봅니다.
나는 왜 내 곁에 있는 이들, 곧 내 부모 형제들, 내 동료들을 존경하지 못할까요?
너무도 잘 알아서 그럴까?
그런데 나는 진정 그를 제대로 아는 걸까요?
혹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오늘 복음에서도 그 이유가 고향 사람들에게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우리 곁에 있는 내 동료, 내 형제를 존경하지 못한 이유를
내 형제에게서 찾기에 앞서, 먼저 나 자신에게서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지혜와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놀라워하였다.’는 이야기는 보고 알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그분의 신적 권위와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는 알아보고 놀라워하였지만,
동시에 그분이 목수이고 마리아의 아들이고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안다’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왜일까요?
왜 우리는 가까운 이나 함께 살고 있는 이를 존경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기까지 할까요?
그것은 내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에 빠진 결과가 아닐까요?
곧 ‘있는 그대로의 그’가 아닌 ‘내가 아는 그’라는 선입감을 믿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것은 그에 대한 하나의 편견이요, 고정관념이요, 고착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 그것을 섬기고 따르고 마는 하나의 우상숭배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생각에 가려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무지와 곡해와 왜곡과 몰이해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거기에는 질투와 시기, 비교와 경쟁, 이해타산의 이해관계와 계산이 있고,
신뢰가 아닌 의혹이 있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안다’는 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무지의 지)입니다.
사실 자신이 ‘안다’는 생각, 그 우상을 벗어나야 진정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자신의 앎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앎으로부터 해방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제거해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하느님, 주님이신 주님이요,
비록 자신이 아는 그러한 주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이 변형되는 일,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앎을 비워내고 자신의 앎을 넘어서는
그분을 믿고 받아들임에 달려있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마르 6,6)
마치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고
수술을 거부하는 환자 앞에 선 것처럼, 당혹해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의사는 치유의 능력이 있건만 환자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오늘 우리의 불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혹해하시지 않으시도록
믿음으로 그분 앞에 나서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구사제모임에서 중요한 것은 사제들과의 친교입니다.
한국에서는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오히려 미국에 있으면서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각자가 사는 곳에는 교구 사제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신학교에서 자주 불렀던 성가가 떠올랐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알라스카에서 온 신부님은 비행기를 3번 갈아탔다고 합니다.
콜롬비아에서 온 신부님은 선교센터가 있으니 언제든지 오라고 초대합니다.
시카고에서 온 신부님은 모금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워싱턴과 댈러스의 신부님에게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멕시코에서 온 신부님은 담낭에 생긴 담석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를 합니다.
유학생 신부님들은 언어 배우면서 힘들었지만, 이제는 지낼 만하다고 웃습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신부님은 제대를 기다리는 군인의 심정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뉴욕의 신문사에 있다가, 댈러스의 한인 성당에 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일 막내 신부님과 저는 31년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3박 4일이 언제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지나갔습니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면 내년에 다시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교구사제모임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주교님과의 면담입니다.
저는 주교님과 명동 교구청에서 5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동안 변한 것이 있다면 주교님은 보좌 주교님에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이 되셨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주교님은 여전히 겸손하시고, 사제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셨습니다.
주교님은 저와 면담하면서 잠깐 놀라셨습니다.
명동에 있을 때 저는 염색해서 머리카락이 검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저는 염색하지 않았고, 지금은 머리카락이 하얗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셨지만 은색의 하얀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덕담해 주었습니다.
제가 변한 것이 있다면 머리카락의 색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저는 여전히 서울대교구의 사제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한국에 돌아가도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면담을 마친 후에 교구장님은 교구의 현황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3년 후에 있을 세계 청년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청년대회가 일회성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청년대회를 통해서 교회가 새롭게 변화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협력 사제, 미사 도우미 사제, 공소 사목 사제, 기도 전담 사제를 임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20년 가까이 보좌 신부로 지내야 하는 신부님들이
10년 안에 본당 사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전에는 율법과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사이였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잡으러 다녔고,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전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전에는 로마의 시민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전에는 가말리엘 밑에서 율법을 배웠다고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체험한 이후에는 많은 것이 변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믿음과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긴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변화된 바오로를 공동체에 받아들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예수님의 본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편견이라는 안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선입견이라는 안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희망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사랑의 안경을 써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는커녕 어기기만 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만을 고집하여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계속 사랑하셨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제 2,5).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이다.
그 예언자가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최고의 값진 선물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의 완고함과 거부감이 최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매우 역설적이지 않은가?
오늘 복음에서 역시 예수께서 당신 고향에서 복음 선포에 실패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불투명하고 무장되어 있지 않을 때는
예수와의 진정한 만남이 어렵다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2절).
예수께서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지혜와 그 기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분을 거부하는 반응은 왜 나타났을까?
그것은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시기가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여러 가지 표징은 믿음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데,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3절).
이는 믿음의 단절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출생 상태나 성장배경 가족 상황을 모두 아는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예수로부터 그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해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의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일상의 평범한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서 드러내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유다의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품위를 보존한답시고 예수님을 단죄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 그분을 오르게 하는 것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예언자의 길이며 예수께서 가셔야 할 길이다.
이렇게 볼 때, 기적은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의 표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적이 있으려면 적어도 어떤 신앙의 발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을 통해서, 권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약성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나자렛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기적은
단순한 목수에 지나지 않은 비천한 마리아의 아들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특별한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는
그분의 권능에 더 집착하려는 신앙에 맞서는 것이다.
특별한 징표를 추구하다가 자칫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실망하고,
더구나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주님을 거부하는 잘못도 범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2,9).
일상적인 평범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고통과 가난의 “징표”를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외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여,
성성의 커다란 표지가 되지 못한다고 꺼리는 교회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더 성실히 우리의 일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끌어내는 교훈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을 가지고
하느님께 우리의 신앙을 강요하면서 진정 참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의 모든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하자.
모든 일은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가 있으며,
그 하나하나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며,
일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
모든 삶의 순간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그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눈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겸손되이 청하도록 하여야 한다.
함부로 누군가를 안다고 단언하면 안 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인정받지 못하십니다.
그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안 변한 사람이 몇 달 만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어떤 판사는 여자 친구를 총으로 쏘려다가
미수에 그친 남자를 가벼운 벌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 날 바로 여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세상엔 수없이 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죄인으로 심판받아 죽고
수많은 죄인이 뻔뻔하게도 의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판사들은 같은 판례를 가지고도 아침과 오후가 판단이 달랐다고 합니다.
판결이 과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 판사들의 기분에 좌지우지되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려 목숨까지 바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이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무조건 계속 물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살인죄로 신고하려는 이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이 ‘경건’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당신이 쓰는 단어인 경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신들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만약 내가 사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에요!’라고 대답하는 게 옳으냐?”라고 되묻습니다.
그건 사과의 본질에 대해 말한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함이라는 뜻이 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의미를 알고 쓰지 못했음을 알게 되고 겸손해집니다.
이런 일로 겸손해지면 좋겠지만, 화를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를 주름잡던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당하는 것이 굴욕스러웠고
자신들은 엄청난 액수의 수업료를 받는데
소크라테스는 무료로 교육하는 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무리 중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는 상대적이다,
고르기아스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이 진리의 주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신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니체가 받아들여 신은 죽었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신처럼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하였듯이, 소크라테스도 죽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초인이 될 수 있는 인간이 신이 아니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소크라테스를 신을 모독한 자요,
젊은이를 올바르지 못한 길로 빠뜨리는 사람으로 모함하여 사형에 이르게 합니다.
사실 그들이 믿는 신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진화론이 그렇습니다.
진화론자들은 타인을 심판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새로운 창조자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자신들이 아는 판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러한 판단을 받으신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실제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창조자는 자기 자신들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면 내가 그것을 창조하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만들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어야 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비행기를 아느냐고 물으면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만들어보라거나 고쳐보라거나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 무지한 것이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은 부모를 만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성령을 받으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받으실 때 성령으로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녀로 인정받으십니다.
미국의 락 토마스라는 사람도 처음엔 루저였다가,
“나는 핸섬하고 터프한 사람이다.”란 말을 하루에 500번씩 하고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가 가능한 존재가 인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변하려고 하는 이들만이 성령과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런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반면 겸손한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창조자의 진리를 찾을 뿐입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 고향 나자렛에서 복음 선포를 하지 못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목수이고, 그분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압니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분이 병자에게 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그분을 새롭게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선입견에 머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 가진 선입견에 머물지 않고, 이웃 안에 새로움을 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웃이 밉게 보였을 때, 그것을 선입견으로 삼지 말고,
그 사람의 새로운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도 형제에 대한 한순간의 선입견에 머물지 말고,
형제 안에 새로운 모습을 보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죄를 용서하신 것도,
그들이 과거의 선입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과거로부터 전해진 우리의 신앙 언어로 말미암아서도 우리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말을 하느님은 하늘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지엄한 분이시고,
예수님은 그 지엄하신 분의 막강한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왕이신 하느님의 후계자, 곧 世子와 같은 분으로 보입니다.
그런 선입견에 우리가 머물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至高하고 至嚴하신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높고 엄한 사람에 준해서 생긴 말입니다.
그 선입견은 하느님이 우리를 무섭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 선입견은 하느님이 자비하시다, 사랑하신다는 말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경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허울 좋은 빈말에 불과하고,
신앙생활은 신앙인이 선행을 많이 하여 공로를 쌓는 데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商品 할인권을 모아서 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하듯이,
신앙생활도 全大赦와 限大赦를 부지런히 얻어 모아서,
지엄하신 하느님의 엄한 벌을 면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因果應報 원리를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으로 삼으면,
하느님은 은혜로운 아버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득한 처세의 원리를 선입견으로 하느님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과 다른 하느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分配正義를 선입견으로 삼으면,
정의로우신 하느님이라는 말은 자비와 사랑을 모르는 하느님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사람들은 많이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을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으로 삼으면,
하느님은 많이 바치는 사람을 돌보아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왜곡됩니다.
옛날 소설 「심청전」에서 효녀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하기 위해
자기 몸을 인당수에 던져 마련한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쳐야 했습니다.
代價를 치러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것입니다.
심청의 효심에 우리는 감동하면서 공양미를 바치게 하여 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준,
그 龍王의 처사를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관행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당신을 그렇게 부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지만,
그 시대 모든 유대인은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었었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던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회상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나타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입니다.
제자들이 회상한 예수님은, 당신이 가르친 하느님의 생명을 그대로 살고, 실천하신 분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이어받아서 산다고 생각하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신앙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는다고 믿습니다.
과거의 인류 역사나 종교들이 상상하던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새롭게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하느님을 우리가 새롭게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유대교에서 얻은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 그들이 알아들은 하느님의 새로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비롭고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된 사람은 자비롭고 사랑하는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이웃에게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바를 선입견으로 삼은 나머지,
그분 안에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움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병고와 실패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벌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이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으셨다는 「복음서들」의 말은,
병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뜻입니다.
벌주는 일은 자비롭고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이 하실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보아야 하는 새로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불행을 겪은 것은,
우리의 실패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벌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는 일이었습니다.
옳은 일이 옳은 일로만 통하지 않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예수님이 실패자로 생을 마감한 것은,
이 세상은 義人을 의인으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만이 인간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재물과 부귀영화를 인생 성공의 尺度로 생각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최종 척도는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우리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고,
하느님이 자비하신 분이라, 우리도 자비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알아듣는 새로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실패가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에서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선입견을 택하고 예수님의 새로움을 버렸습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불행해도,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의 선입견을 버리고,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우리도 불행한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으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방인들의 목자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정과 신앙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감동적이고도 눈물겹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많은 일을 해냈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나름 일인다역을 하고 있고, 몸 사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뛰어다닌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오늘만 해도 제 삶을 돌아보니, 제가 생각해도 웃겼습니다.
주방에서 열심히 감자를 깎다가, 부랴부랴 올라가서 강의하고,
초 스피드로 내려와서 매운탕 펄펄 끓이고, 또 올라와서 미사 준비하고, 촛불 켜고, 입장하고...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와 비교하니 저는 포크레인 앞의 삽 한자리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살아생전 따라다니던 애칭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백 개의 팔을 지닌 사나이’였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전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랴,
틈틈이 여러 교회지도자들과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랴, 여기저기 공동체 건설하랴, 지도자 양성하랴...
바오로 사도는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해
개인적인 삶, 안락한 삶, 편안한 삶과는 영영 작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펄펄 끓는 열정과 넘치는 에너지로 활활 타오르던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업무 추진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는 건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불림 받지 않았더라면
잘 나가던 검투사를 했어도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말 못 할 평생 지병이 하나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많은 학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고질병을 지칭하는 ‘가시’가 과연 무엇인가,
오랜 세월 두고두고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그 병명을 밝히지 않은 이상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추측만 할 수 밖에요.
어떤 학자들은 그 가시를 안질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 사도는 이미 눈에 큰 충격을 입어
사흘간이나 실명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그 후유증이 상당하리라는 추측입니다.
다양한 가설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봤을 때 질병이라기보다 성격적 결함이 아니었을까, 추측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불같은 성격, 순식간이 끓어오르는 분노,
그래서 이웃들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인내하지 못하고 폭발시키는
그런 실수를 말하는 것을 아닐까요?
그도 아니라면 나와 맞지 않는, 끊임없이 나를 곤경으로 몰고 가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약점이랄까 취약점, 감추고 싶은 상처를
용감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바오로 사도의 용기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밝히는 것을 넘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을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초대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참된 사도요 스승이었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어떡하면 자신의 약점이나 취부, 부끄러운 과거를 한사코 감추려고 기를 씁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쟁력, 수상 경력, 업적만을 과대포장해서 자랑스럽게 내놓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솔직하게 밝힙니다.
자신이 저질렀던 지난 과오들, 자신의 약점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부끄러운 과거들조차 아낌없이 다 밝힙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랑할 약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힘이 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할 가시는 무엇입니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