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소해(小海)와 대해(大海)
중국의 많은 사서들은 백제의 위치를 설명하는 기록에서 분명하게도 백제는 소해의 남쪽,대해의 북쪽에
있으며, 고구려도 바다를 건너야 갈수있다고 하고 있다.
같은 한반도 안에 삼국이 같이 있었다면 이러한 기록들이 당치않는 얘기이기 때문에
《삼국사기》는 이 대목을 삭탈하고 변조하여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밝혀야 할 전문학자들은 직분을 망각하고 오히려 역사왜곡의 하수인이 되어 침략자들의
명분을 도와주고 있으니 명색이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국의 책임도 크다 하겠다.
오늘날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는 목적이 나라의 부패를 감시하고 방지하는것이라면 사실이
왜곡되어 피해를 입고있는 우리의 고대사를 하루속히 바로 세우는 운동이 절실하다고 생각되어 다음과
같이 사학계의 책임을 고발한다. 도대체 국사편찬위원회는 뭘하는 단체인가.
*《구당서 본문》百濟國,本亦扶餘之別種,嘗為馬韓故地,在京師東六千二百里,處大海之北,小海之南.
東北至新羅,西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北渡海至高麗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마한의 옛 땅이었다.경사(낙양)의 동쪽으로 6200리의 거리다.
대해의 북쪽이고 소해의 남쪽이다.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른다.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이게 한반도의 백제를 설명한다고 볼 수 있는가.
그런데 백제국에 대해서 《삼국사기》<백제본기>는 다음과 같이 통설과 일치하지 않는 기록을 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초기 삼한의 장산군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서진군국도의 낙랑과 대방군의 위치> 대방의 동쪽에도 낙랑군이 있었음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때의 초기백제 위치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평양을 낙랑군이라 주장하고 말갈을 압록강 북쪽이라고 주장하는
통설로는 이 기록을 해석할 수 없기에《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삼한의 위치를 장산군도로 본다면 이 문제는 해결이 된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11)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定疆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北史 列傳 (북사 열전) 百濟
(백제)기사
其國東極<新羅>, 北接<高句麗>,諸本脫[北接高]三字, 據《周書》卷四九《百濟傳》補.《隋書》
作[北拒高麗].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其外更有五方: 中方曰<古沙城>, 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 王姓<餘氏>, 號[於羅瑕], 百姓呼爲[ 吉之], <夏>言 王也. -하략-
《周書》[統]上有[方]字. 城之內外人庶及餘小城, 咸分 焉./$諸本脫[人]字,《周書》有[民]字,
《通志》卷一九四《百濟傳》有[人]字. 今據《通志》補.
그 나라의 동쪽은 '신라'이고 북쪽은 '고구려'에 접하고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에 경계하니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서로 사백오십리이고 남북이 구백여리이다.
그 도읍을 '거발성'이라 하는데 또한 '고마성'이라고 한다.
그 밖으로는 오방이 있는데, 중방을 '고사성' 동방을 '득안성' 남방을 '구지하성' 서방을 '도선성' 북방을
'웅진성'이라 한다.
왕의 성은 '여씨'이고 '어라하'라 부르는데 백성들은 '건길지'라 부른다. '하'나라 말로 왕과 같은 것이다.
-하략-
이 두개의 기사를 살펴보면 온조왕의 기사에는 백제의 남쪽이 웅천이라고 하였는데, 北史 列傳 (북사 열전)
百濟 (백제)기사에는 북쪽이 웅진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의 초기 백제기록에는북쪽에 패하가 있다고 하고, 남쪽으로는 웅천을 경계로 하였다고 하였다.
《북사》의 백제기록은 소해의 남쪽이라는 기록이 끼어 있다.
당시 백제는 북쪽에 소해(小海)라는 바다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것이다.
이것이 백제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단서가 되는것이다.
공주와 부여의 백제설은 6세기 이후의 이야기다.
위의 지도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강제로 점령한 요동반도의 남부 조차지다.
보란점 이남을 완전히 점령하고 와방점지역을 중립지대로 하고,장산군도를 조차지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이곳을 일본의 관동주라고 한것이다.
이 지도를 통하여 백제를 중심한 소해와 대해가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지도를 올려본
것이다.
지도에는 소해와 대해를 색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대해는 막힘이 없는 바다로 표현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지리지>에서 백제의 강역을 왜곡하고 있다.
《통전》. 《구당서》와 《신당서》의 백제강역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강역을 원서와
다르게 왜곡한 것이다.
당시를 기록한 중국의 사서들은 장산군도의 강역을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는 원문을 변조하면서도
한마디의 설명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도 명색이 전문가라는 사학자들은 눈뜬 장님노릇을 하며 역사를
더럽히고 있다.그 진상을 알아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백제/백제 강역의 경계
백제(百濟)
《후한서(後漢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의 왜곡된 기록》『삼한(三韓)은 무릇 78국이었는데, 백제(百濟)는 그 중의 한
나라였다.』
《북사(北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의 동쪽 끝은 신라이고, 서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를 한계로
하였으며, 북쪽은 한강(漢江)에
닿았다. 그 서울[都]은 거발성(居拔城)이라 하고,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도 하며, 그 밖에 다시 5방성
(五方城)이 있었다.』
《통전(通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에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高麗]와
떨어져 있으며, 서쪽은 큰 바다를 한계로
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부여의 별종(別種)으로서,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倭)에 이르며, 북쪽은 고구려[高麗]였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는 동·서의 두 성이
있었다.』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
있으며, 북쪽은 고구려[高麗]였다.』
百濟
後漢書云 『三韓凡七十八國
百濟是其一國焉』
《삼국사기의 왜곡된 기록》
北史云 『百濟東極新羅 西南俱限大海
北際漢江 其都曰居拔城 又云固麻城 其外更有五方城』
《삼국사기의 왜곡된
기록》通典云 『百濟南接新羅 北距高麗 西限大海』
*아래에 제시된 통전의 원문을 비교하면 많은 사실을 누락시키고 특히 고구려가 북쪽으로 천리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누락시키고 있다.
*《통전의
원 기록》/選自【古籍十八種】/通典/邊防典凡十六卷/卷一百八十五 邊防一/東夷上/百濟
自晉以後,吞并諸國,據有馬韓故地.其國東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羅,北拒高麗千餘里,西限大海,
處小海之南.國西南海中有三島,出黃漆樹,似小榎樹而大.六月取汁,漆器物若黃金,其光奪目.
《삼국사기의 신.구당서에 대한 변조된 기록》
舊唐書云 『百濟 扶餘之別種 東北新羅 西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高麗 其王所居
有東西兩城』
《구당서》의 기록중 대해의 북쪽과 소해의 남쪽 부분을 누락시키고,
북으로 바다를 건너야 고구려에 이른다를 삭제시켰다.
*《구당서 본문》百濟國,本亦扶餘之別種,嘗為馬韓故地,在京師東六千二百里,處大海之北,小海之南.
東北至新羅,西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北渡海至高麗.
《삼국사기》新唐書云 『百濟西界越州 南倭 皆踰海 北高麗』
《신당서》의 원문중 빈해(濱海)의 양(陽)이라는 바다를 상징하는 대목을 누락시키고, 皆逾海 앞에
올려야
될 北高麗를 뒤로 돌려 고구려도 바다를 건너야 이를수 있다는 대목을 왜곡시켰다.
<원문>***百濟,扶餘別種也。直京師東六千里而贏,濱海之陽,西界越州,南倭,北高
麗,皆逾海乃至,其東,新羅也。王居東、西二城,
《삼국사기》의 변조된 기록
< 北史云 『百濟東極新羅 西南俱限大海 北際漢江 其都曰居拔城 又云固麻城
其外更有五方城』>
*《삼국사기》는 북사에는 없는 '북제한강'이라는 대목을 삽입시켰다.
그리고 소해의 남쪽에 있다는것과 강역의 크기를 삭제하고 오방성의 이름들을 누락시켰다.
기타 아래에 소개되는 사항들은 전부가 누락되었거나 생략된것으로 간주된다.
*其國東極新羅, 北接高句麗, [二一]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東西四百五十裏, 南北九百餘裏.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 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아래의 지도에는 바다의 수심을 기록한
보기가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다.백제가 위치한 장자도의
북쪽과 남쪽을 보시면 사서의 기록에서 소해(小海)라고 표시한 위치에는 수심이 3~5미터 정도
이고,대해(大海)라고 표시된 위치에는 35미터정도로 깊어짐을 알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해라는 바다에는 막히는 나라가 없이 바로 큰바다로 이어지고 있으나 소해라는
바다는 물색이 짙은 코발트색이고 주변이 막혀있다.
위나라의 사신으로 평양에 들려 칙서를 전달한 이오가 중요한 지역의 위치를 설명한 대목입니다.
역시 출발기준을 요동(요양)에 두고 보았을때 평양성은 남쪽으로 1천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책성(봉황성),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작은 바다(小海)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작은 바다가 백제의 북쪽에 있다는 '小海'입니다. 정확하게는 평양성은 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이어야
합니다.
<이오가 고구려 왕이 있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러 그 나라의 여러 가지 사정을 탐방하고는 말하기를,
“요동에서 남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책성(柵城)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작은
바다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옛 부여(夫餘)에 이른다.
백성들의 호구 수는 전위(前魏) 때에 비해 3배에 이르며, 지역이 동서는 2천 리이고, 남북은 1천여 리이다.”
하였다.
그 뒤로는 공물을
바치는 사신이 서로 잇달아 해마다 황금 2백 근, 백은(白銀) 4백 근을 바쳤다. 《후위서》
世祖時,釗曾孫璉始遣便者安東奉表貢方物,並請國諱,世祖嘉其誠款,詔下帝系外名諱於其國,遣員外散
騎侍郎李敖拜璉為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敖至其所居平
壤城,訪其方事,云:遼東南一千餘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夫余,民戶參倍於前魏時。<<후위서>>
<삼국사기> 왜곡 주장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씨정권차원에서 변조한
것이다.
동사(東史:이종휘-18세기 학자, 동사본기 세가열전)에 보면 " 김부식은 천신(天神) 신시(神市) 천부삼인
(天符三印) 단군연세(檀君年歲)를 전하였다.
그런데 유자(儒者)들은 대부분 믿지 않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볼때, 분명히 김부식(고려 문종-인종때 사람-12세기)은 우리의 1만년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천신이라는 것은 한인한국을 말하며 신시는 신시배달국을 말한다. 또한 단군연세는 단군조선을 말한다.
고려시대 쓰여진것으로 알려진 '제왕운기'에서도 이와 관련된 기록들이 나온다.
즉 단군조선이 당당하게 나온다.
그런데 현재 전해오는 삼국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전혀
없다.
더구나 현재 삼국사기는 이조개국당시 명나라의 사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삼봉 전도전의 지휘하에 진의귀
김거두 등 사학자 8명이 참가하여 고려시대까지의 황제국의 역사를 왕조의 역사로 사대모화주의 사상에
맞게 삭제 추가등 개작을 하였고, 한단의 고사서는 모두 불태워버렸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원본도 이때 모두 불태워졌고,
정도전 지휘하에서 새로펴낸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경우, 중종7년,1512년에 이계복을 통하여 두번째로
개작되었다.(김정권 한국전통사상연구소장)
김부식은 단군조선을 인정하고 단군조선과 밀접하게 관련된 국가적 큰 행사인 제천행사로 알려진'팔관회'를
국가적 차원에서 고려황제가 주관한 고려시대 사람이다. 더구나 원제국이 생겨나기전의 사람이다.
이러한 고려시대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해지는 삼국사기와 같은 중국사대주의, 소중화 사상이 물씬
풍기는 사서를 집필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김부식의 원 사료를 이조정권이 조작변조개작하여 내놓으면서 고려시대사람 김부식이 �다고 한 것
으로 봐야 할것이다.
이조시대는 "(소중화)" 가 국가기본시책이었다.
그렇기에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에게 겉으로 군신의 예를
표했지만 여전히 조상부모는 중국명나라였고 그렇기에 병자호란 이후 청황제가 이조왕에게 하사는 시호
(청황실에서는 인조부터 왕이름을 지어내려줌)를 이조실록에도 기록하지 않고 꼭 꼭 숨겨왔었던 것이다.
더구나 청나라가 쇄하기 시작한 19세기 말에 들어서자 멸망한 명나라대신 이조가 황제국이 되겠다고 하며,
빈껍데기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것이다.
참고로 이종휘의 동사의 단군본기에서도 단군세기(한단고기)에 나오는
용어가 그대로 나온다.
바로 편발개수(編髮蓋首) 라는 말이다.
즉 한민족은 아득한 옛날 부터 이미 머리를 땋아서 생활하였고 머리에 모자같은 것을 쓰고 다니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단군영정도 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에 두른 형상을 하고 있다.
흔히 이조시대에 나오는 딴머리를 보고 이것이 이조시대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될것이다.
딴 머리를 기준으로 볼때 여진족 청나라와 몽골 원나라도 우리 한민족역사에 들어간다고 봐야 할것이다.
결국 제도권 강단사학자들이 위서라고 주장하는 한단고기가 여기에서도 실사(實史)라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겠다. (편발개수의 장점에 대하여는 참역사동아리 다음까페 삼태극-한겨레참역사방 참조)
[실증]신라와 발해의 국경선은 개주(蓋州)의 대통강(大通江)이다
지도설명:大明輿地圖 1536~1566 제작:명(明) 이 묵 (미 의회도서관 소장) 출처: 향고도
*이 강은 이름이 많다. 그만큼 소유주가 많이 바뀌었다는 얘기다.
이 강의 발원지만 설명하는데도 너무 복잡하여 그 지명들만 머릿속에 정리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릴것이다.
한 나라때 부터 등장하는 패수가 이 강으로 부터 시작하는데 발원지인 루방현(鏤方縣)이 개주와 요양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서쪽이 바다로 접하기 전에는 북쪽으로 향하는 긴 강이 있어 장구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
는데 이 물이 북쪽으로 흐르다 요양에서 흘러오는 소요수와 만나고,
또 서남쪽으로 흐르다 대요수와 만나고, 발해의 서쪽을 흐르면서 육주하와 만나 난하의 근처에서 바다로
합류하는 복잡한 경로를 거쳤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경로를 따라 흐르며 패수로 부르던 대요수는 볼수가 없다.
그 강들은 모두 500리 벌판이 요동만으로 윤몰되면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할수있는 자료들은 많다.
지도설명:요해총서 개평현지(遼海叢書 蓋平縣志) 출처:푸른바다
개평현 성 남쪽을 흐르는 일명 대통강이다.
《명일통지》는 여기가 대통강이라고 하면서 평양 대동강은 패강이 아니라는 설명까지 겻드리고 있으니
속지 말라는 경고까지 하고 있는 셈 이다.
그런데도 전문학자님들께서는 이러한 기록을 외면하고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것이다.
이곳이 국경인 패강이라는 주장은 단재 신채호선생을 위시하여 많은기록이 있다.
우선 강 이름만 소개드리면, 고 니하(古泥河) 패하(浿河) 청하(淸河)포하(蒲河)마자수. 압록수.헌우락.
신개하(新開河). 대통강(大通江)등...
다시 남쪽으로 웅악하(熊岳河)라는 강이 흐르는데 이 강을 일명 오골강(烏骨江)이라고 불렀다.
이 강을 따라 동쪽으로 계속 가면 현재 봉황성인 오골성 방향이 되기 때문인 모양이다.
가탐도리기에 이 강이 등장 하는데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압록강으로 믿고 있던 강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의외로 웅악성의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흐르던 강이었다.
이 강을 따라 올라가면 발해의 영지까지 물길로 통한다고 되어 있다.
라.당 연합군의 합동작전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정벌이 끝나자 당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백제의 구 영토까지
당나라로 합병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에 반기를 든 신라는 패전국의 부흥군을 합류시켜 약속을 지키라고 항거하며 무려 7년이란 장기전을
당나라를 상대로 벌렸다.
결과 신라가 요동반도의 길림과 철령 남쪽에서 시작하여 백제의 구토를 모두 접수하고 신라구주를 설치
하였다는 기록이《만주원류고》의 내용을 통하여 밝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기 732년 발해가 장문휴 장군을 앞세워 등주를 공격하여 주변지역을 초토화 시키자,
당황한 당 현종은 신라의 성덕대왕에게 계림주대도독과 영해군사라는 직책을 추증하여 발해군을 방어하게
한다.
그리고 이때까지 인정하지 않던 요동반도의 남쪽 영토를 신라의 영토로 승인하며 신라가 전쟁에 참여하는
댓가로 생색을 낸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삼국사기》는 이 사건을 제대로 기록하여 소개하지못하고 엉뚱한 평양 대동강을
패강으로 둔갑시켜 국경을 축소함으로서 순진한 백성들을 기만한것이다.
이것은 분명 명나라의 음모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 수년간 공작을 벌린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의 죄악이
크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나라의 힘이 약하여 바보 노릇을 했던 세월은 이미 지나갔다.
이제 부터라도 거짓된 역사를 바로잡고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할 때다.
서기675년 당시 길림과 철령, 그리고 광령땅까지 점령하였던 통일신라의 넓은 영토는 거란과 발해의 확장
으로 점점 좁아져 개주의 남쪽을 흐르는 패강(일명 대통강)을 경계선으로 국경이 확정되었던것이다.
①沙河出東南山西北流, 徑蓋州入於海. 有蒲河;淸河;浿水, 亦曰泥河, 又曰蓒芋濼(한우락),
水多蓒芋之草.[遼史卷三十八 志第八地理志二 東京道 東京遼陽府]
②古泥河. 新唐書渤海大氐本粟末靺鞨, 附高麗國. 高麗滅, 保東牟.
直營州東二千里, 以泥河爲境. 萬歲通天
中契丹反, 東渡遼水保大白山之東, 北阻奧婁河, 自固. 按元一統志引契丹地理志云, 浿水即古泥河也.
自東逆流數百里, 至遼陽瀦蓄不流. 有蓒芋草生於泊中故名蓒芋泊.
明一統志從之. 又以朝鮮大通江爲泪(浿)水. 古泥河在海城縣西南六十五里益(蓋?)平縣北五十里. 源出聖水山
流至述眞山散漫爲遼時之蓒芋泊, 今爲蓒芋濼. 水多蓒芋之草, 與朝鮮境內之浿江不同
又按太白即長白, 奥娄當爲阿로嚕河, 源出吉林安巴和託峯, 一西南流入哈達河, 一流至開原東南入淸河.
[盛京通志卷二十七 山川三 吉林各屬]
* 1번을 다시 살펴보면 《요사》지리지에서는 니하를 사하로 부르고 있는데 그 경로를 동남산 서북으로
흐른다고 하였고, 개주를 거쳐 바다로 들어가는데 포하, 청하, 패수, 니하, 헌우락, 등의 수명과 합류하거나
다른 이름을
갖는다고 하였다.
2번의 설명은 조금 복잡해진다. 고니하(古泥河)는 《신당서》에서 말하길 발해대씨(대조영)가 고구려와
더불어 살던 근본지인 속말말갈 이고, 고구려가 망하자 동모산에 의지하였다고 하였다.
이 동모산은 영주(난하의 동쪽)에서 곧장 동쪽으로 2천리밖에 있었고, 니하로서 경계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만세통천 [당 중종13](696)년 거란이 반란을 이르켜 역시 동쪽으로 요수를 건너 태백산에 의지하였다
하였으므로 이때 대조영의 세력과 합류된듯하다.
또 거란 지리지를 인용한 원 일통지는 패수를 니하라고 하였으며, 이 니하는 동쪽에서
수 백리를 역류하여
요양에 이르러 물이 모여서 흐르지 않았으며 이 물이 고인데는 한우초라는 수초가 자라는데 하여 옛
이름을 '한우박'이라고 불렀다는것이다.
《명 일통지》에 의하면 또 이 조선 대통강을 일명 '뉘수'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명일통지》에 따르면 고니하(古泥河)는 해성현의 서남쪽 65리에 있다.
개평현의 북쪽50리다. 원 발원지 성수산에서 흘러 술진산에 이르러 여러갈래로 흩어지는데 요나라때는
'한우박'으로 불렀다.
당시는 한우초가 많은 물을 '한우락'으로 불렀다.
따라서 조선의 경내(평양의 대동강을 이름)에 있던 패강은 다른강이다. ..
*위의 2번항에서 패수의(浿)자와 [益(蓋?)平縣北五十里]익평현은 개평의 오자로 인식되어 가로안에 蓋자
를 추가하였다. 필자
《해동역사》속 권 7에는 신라와 발해의 국경이 735년 이후 개주의 니하로 확정이 되어 있었는데도 뒤에
잘못된 주석을 달아 국경을 왜곡시킨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맹점을 구분하지 못하여 무려 일천여리의 영토를 축소시킨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동북쪽 경계는 덕원군(德源郡),
서북쪽 경계는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러서 발해(渤海)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명일통지에는 대동강을 대통강(大通江)으로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니하는 발해와 접한다고 하여 개주의 패강임을 강조하고 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
24년(736)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칙서를 내려 패강(浿江) 남쪽 지역을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謝恩)하였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삼았다.
《문원영화(文苑英華)》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당현종칙신라왕서(唐玄宗勅新羅王書)에 이르기를, “경(卿)이 패강에 방수(防戍)를 설치하고자 하는데,
이곳은 발해의 요충지에 해당되는바, 참으로 좋은 계책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칙서는 바로 개원 26년(738)에 내린 칙서이다.
그렇다면 요동에 있던 고구려의 영토를 언제쯤이나 신라가 점유했던것일까.
1차로는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 죽령에서 철령에 이르는 동옥저에 해당되는 고구려의 영토를
점유한바 있다. 나당연합군의 합동작전이었다.
이후 길림지역과 패전국 백제국의
영토를 합방한 기록을 《만주원류고》를 통하여 보시겠다.
朝鮮之慶尙江原二道 西北直至今吉林烏拉 又西近開原鐵嶺 唐顯慶(656-660년)以後又得百濟故地及
* 高麗南境 於是東西增九百里南北增千餘里
開元(713년) 以後渤海盛强 其西北諸境盡爲所倂 新羅所有
* 僅鴨淥江以南 唐末高麗復起割其南境曁 渤海爲契丹所侵 於是新羅西與契丹
以海州巖淵縣爲界 西北
*與契丹以鴨淥江東八里黃土嶺爲界矣 雞林州之名始於 唐龍朔三年以其國爲雞林州大都督府 國王世襲都督
[실증]넓혀만 놓고 지키지못한 땅,(幽.燕.齊.魯.吳.越)
최치원전에 따르면 백제와 고구려는 100만의 강군으로 중국의 유,연,제,노,오,월을 침략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러다 백제는 자중지란이 일어나 점유지를 모두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남한으로 쫓겨갔다.
이 사실을 《양서》<백제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梁書》 <백제전>에는 "尋為高句驪所破 衰弱者累年 遷居南韓地 普通二年,王余隆始復遣使奉表稱累破句驪
今始與通好 而百濟更為強國
(백제는) 고구려에게 연파당하여 쇠약해지더니 수년만에 남한으로 옮겨갔다.
보통 2년(521)에 백제왕 여융(무령)은 다시 사절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려 이르기를 누차 고구려를
깨뜨리고 이제 비로소 우호를 통하게 되었으니,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백제 해외 22개 담로국의 분치 추정도
불어로 된 이 지도는 한반도와 발해내역과 양자강 좌우를 비롯한 주산군도, 그리고 일본의 구주등이 같은
색으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동성대왕때 오.월로 진출하여 남제군과 동맹하여 북위와 고구려 연합군을 깨트리고 영지를 더욱
확장함으로서 세력이 구주에 담로국을 둘 정도였다.
백제는 AD487년 대마도로 진출하여 구주등을 평정함으로서 왜병들을 차출하여 자체군을 보강하고 중국의
동해안 지방에 투입함으로서 세력이 강화되는가 하였는데, 서기 501년 왜국 출신 무령왕계의 반란으로
동성대왕이 살해되자 서로의 반목이 심화되어 세력이 약화되고 요서지방의 담로들이 고구려로 투항함으
로서 백제는 중국대륙에 있던 영지 모두를 고구려에게 넘겨주고 남한으로 물러나게 된다.
영토를 넓히는것만이 능사가 아니었고 자국의 국민으로서 점유한 땅을 지키는것만이 현명한 통치었다는
철학을 터득한것은 이미 백제를 거쳐 고구려로 진행하고 있었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驪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 ....
<양직공도에 밝혀진 백제가 요서로 진출하여 진평현을 두었다는 기록이다.
이렇게 백제 세력은 요동에서 요서로 진출하게 된것이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었는데 고구려가 요동의 낙랑을 치고 들어갈때 백제는 요서의 진평현을 치고 들어갔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백제가 중국대륙에서 탄생하였느니, 요서에 교역의 거점으로 진출을 하였느니, 심지어는 낙랑이
요서로 진출을 하였느니 하는 아전인수 적인 낭설들을 쏟아내고 있다.
송(420~478)나라 역사서인 『송서(宋書)』, 양(501~557)나라 역사서인 『양서(梁書)』, 송(宋)ㆍ
남제(南齊:478∼501)ㆍ양(梁:501~557)ㆍ진(陳:557~589) 등의 남조 4국의 역사서인 『남사(南史)』
에도 있고, 또 남제(479~503)의 역사서인 『남제서(南齊書)』에는 서기 490년 북위(386~534)의
기마군 수십만명이 공격하였고, 백제의 기습공격에 북위의 군사는 대패하여 패주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북위와 백제가 중국 동부지역의 영토를 두고 쟁탈전을 벌리던 때는 서기 304년부터 439년까지 었다.
북중국에서는 16개의 나라들이 흥기했다가 망하고, 서로 물고 물리고 물어뜯는 니전투구(泥田鬪狗)의 대혼란
이 계속되었는데, 마침내 이 혼란기를 마감하고 북중국을 통일한 강력한 왕조가 세워졌으니, 즉 그것은 선비
족의 탁발씨(拓跋氏)부족이 386년에 세운 북위(北魏 386~534)다.
북위는 439년까지 북쪽에 있던 여러 국가들을 차례차례 평정하여 북중국을 통일하였고, 또 이때 동쪽과 남쪽
에는 백제와 남제(南齊 479~502년)가 있었으니, 이러한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우리는 북위가 왜 백제를 침범
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439년 마침내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는 자신들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던 백제가 무척 눈에 거슬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488년 북위는 결국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때 백제의 동성대왕은 젊은 군왕답게 이를 과감히 맞아 싸워서 격퇴시킨다.
당시 백제군은 남제군(南齊軍)과 연합전선을 이루고 있었다.
《자치통감》 권136 영명(永明) 6년(488년)조의 기록을 보면,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
으나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여기서 요서, 진평 2군의 백제 땅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북위가 공격해온 곳이 바로 하북성내 백제 강역
이었음을 명백히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城王十年, 魏兵來伐, 爲我所敗] 고 기록하고 있다.
《위서》 권7하 고조기(高祖紀)에
“ 太和十二年, 簫賾將軍陳顯達等寇過, 甲寅詔豫州刺史元斤, 率衆禦之]라는 기록이 있고, “태화 13년(489년) 정월 ”[太和十三年春正月, 簫賾遣衆寇邊. 淮陽太守王僧儁擊走之]고 기록되어 있다.
동성대왕 10년 (488년)의 백제/남제 연합군과 북위군의 전쟁은 대규모였으며, 이 전쟁이 끝난 후 동성
대왕은 다음과 같은 인사 조치를 행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하였다.
이 기록은 백제가 남제에게 보낸 외교문서로서 《남제서》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남제서》권58
동남이전(東南夷傳) 백제국조(百濟國條)>
건위장군 광양(廣陽)태수 겸 장사인 고달을 용양(龍驤)장군 “대방(帶方)태수”로,
건위장군 조선(朝鮮)태수 겸 사마인
양무를 건위장군 “광릉(廣陵)태수”로,
선위장군 겸 참군인 회매를 광무(廣武)장군 청하(淸河)태수로 명하다.
대방(帶方)태수가 임명된 대방군은 요동반도의 남쪽 광록도에서 장창에 의해
요서로 옮겨진 대방군.
광릉(廣陵)군은 양자강의 하류입구 북안(北岸) 부근.
광양(廣陽)군은 북경 동북부에 위치한 상곡(上谷)지방.
청하(淸河)군은 지금의 산동반도 임치, 창읍 지방.
이와같이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장군들의 계급을 승진시키고,
그 논공행상으로 백제영토의 태수(太守)로 임명한 것이다.
양직공도 원문
百濟舊來夷馬韓之屬晉末駒驪旣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自晋已來常修蕃貢 義熙中其王餘腆 宋元嘉中其
王餘毗齊永明中其王餘太皆受中國官爵梁初以太 除征東將軍尋爲高句驪所破普通二年 其王餘隆遣使奉表云
累破高麗 所治城曰固麻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新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等附之 言語衣服略同高麗 行不張拱拜不申足 以帽爲冠 襦曰複袗 袴曰褌 其
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
백제는 옛
래이로, 마한의 무리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일찍이 요동낙랑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경략하였다.
진나라 이래로 항시 번병의 조공의 예를 닦았다.
의희 연간(405-418)에 그 왕 여전(전지왕), 송 원가 연간(424-453)에는 그 왕 여비(비유왕), 제 영평
연간(483-493)에 여태(동성왕)이 모두 중국으로 관작을 받았다.
양 나라 초에 여태(동성왕)이 정동장군에 제수 받았다. 얼마 뒤 고구려에게 격파되었다.
보통 2년(521년)에 그 왕 여융(무녕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여러 번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했다.
백제는 도성을 고마 라고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나, 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거의 같지만,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를 관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복삼, 바지를 곤이라 한다.
그 나라 말에는 중국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 또한 진한의 습속이 남은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양직공도의 기록을 해석하는데 있어 많은 착오를 이르키고 있는 대목은 요서의 진평땅을 약유한
주인공 문제입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주인공을 낙랑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그것은 백제라는 주어를 혼동한데서 온것입니다.
실재 양직공도의 원문에는 방점이 없는데도 임의로 방점을 놓아 실수를 범한것이지요.
<양서><백제전>에서 그 해답을 보시겠습니다.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即其一也. 後漸強大 兼諸小國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既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
二郡地矣. 自置百濟郡 晉太元中 王須 義熙中 王余映 宋元嘉中 王余毘 並遣獻生口>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既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다음은 <<자치통감>>의 진말 고구려와 백제의 요동과 요서경략 기록입니다.
〔자치통감] 395년 6월
六月,高句麗寇遼東,佐遣司馬郝景將兵救之,為高句麗所敗,高句麗遂陷遼東、玄菟。
6월에 고국양왕이 요동 현토를 빼았고,
자치통감 7월.
燕建節將軍餘巖叛,自武邑北趣幽州。燕王垂馳使敕幽州將平規曰:「固守勿戰, 俟吾破丁零自討之。」
規出戰,為巖所敗。巖入薊,掠千餘戶而去,遂據令支。
여암이 백제인으로 보이는데, 385년에 갑자기 나타나서 모용수의 독립운동, 후연건국을 돕다가 무읍에서
반란하고(백제 진평군 추정), 북경을 쳐부수고 그리고 영지에 물러났는데 여기가 (백제 요서군)이고...
자치통감 8월,,
燕主垂以魯王和為南中郎將,鎮鄴。遣慕容農出蠮螉塞,歷凡城,趣龍城,會兵討 餘巖,慕容麟、
慕容隆自信都徇勃海、清河。麟擊勃海太守封懿,執之,因屯歷口。懿,放之子也。
8월에 업성에서 후연왕 모용수가 모용농을 용성으로 보내는데 가는 길에 발해군 청하군을 취하고...
이 발해군에 장무현이 있는 것이고...발해태수 봉의는 전진 부견이 세운 태수이고...
여암에게 항복했는지는 알 수 없음
11월
慕容農至龍城,休士馬十餘日。諸將皆曰:「殿下之來,取道甚速,今至此。久留
不進,何也?」農曰:
「吾來速者,恐餘巖過山鈔盜,侵擾良民耳。巖才不逾人,誑誘 饑兒,烏集為群,非有綱紀。吾已扼其喉,
久將離散,無能為也。今此田善熟,未收而 行,徒自耗損;當俟收畢,往則梟之,亦不出旬日耳。」頃之,
農將步騎三萬至令支, 巖眾震駭,稍稍逾城歸農。巖計窮出降,農斬之。進擊高句麗,復遼東、玄菟二郡。
還 至龍城上,上疏請繕修陵廟。燕王垂以農為使持節、都督幽、平二州、北狄諸軍事、幽 州牧,鎮龍城。
徙平州刺史帶方王佐鎮平郭。農於是創立法制,事從寬簡,清刑獄,省 賦役,勸課農桑,居民富贍,四方
流民前後至者數萬口。先是幽、冀流民多入高句麗, 農以驃騎司馬范陽龐淵為遼東太守,招撫之。
11월에 모용농이 영지에서 여암을 참하고 이어서 고구려를 쳐서 요동현도를 수복하고 요동군 평곽성에
평주자사 모용좌로하여금 지키게 하고, 방연을 요동태수로 임명했다.
그리고 모용농 자신은 유주목사로서 용성에 자리했다.
여러 책에 진말에 고구려가 요동을, 백제가 요서를 침략했다고 나오는데 바로 이 때임....
단, 고구려가 용성을 침략한 기록은 없으며. 모용농은 북경에서 백랑을 지나 용성을 먼저 가고...
(후연 수도였음) 서남의 영지성 백제 여암과 동쪽의 요동 고구려를 친 것으로 추정됨.
최근의 연구로는 백제가 멀리 필리핀 군도까지 지배하고 동남아시아와 교역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필리핀 군도는 흑치국(黑齒國)으로 일컬었던 곳으로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백제 장군 흑치상지
(黑齒常之)의 묘지석(墓誌石)이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그 가문은 부여씨 왕족에서 나왔지만 ?흑치국에 분봉(分封)된 관계로 그 지명을 따서 성씨를
삼았다고 합니다.
이로서 왕족을 지방의 거점에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제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백제는 부남국(扶南國: 캄보디아), 태국과도 교역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역로를 따라 승려 겸익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갖고 왔다고 합니다.
*문정창 저<백제사> 에서*
『백제 동성왕이 그 21년(499) 과거 십여 년간 10만~20만의 규모의 병력으로써 대결해 오던 북위의
문제를 결정타하여 회수 유역과 산동반도를 점령한 후부터는, 남지나(남중국)는 완전히 백제인의 천지가
되었다.
그 전투에서 백제 세력을 등에 업게 된 도이(島夷:
동이의 일족) 숙연이 남제 화제로부터 찬위하여 양을
건립하였음은 위에서 밝혔다.
양대는 백제국이 남지나에 진출한 지 200여
년이요, 또한 남지나가 완전히 백제인의 천지로 된지 60년이다.
그간 백제문화와 백제인의 생활 양식이 남지나에 작용하고 침투하여, 남지나의 생산품, 음식, 일상생활,
혼례, 그리고 심지어는 언어까지 이토록 백제화 하기에 이른 것이다. 』
* 동성대왕 시 백제의 강역은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를 거의 차지했었습니다.
북위는 산속에서 내려와 동부 평야지대를 차지하려고 5차례나 백제와 전쟁을 벌렸으나 모두 패하고 말았
다는 기록입니다.
<백제-남제의 연합군에 패전한 북위는, 490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하북성 지구의 백제를 공격해 왔다.
그 당시의 상황을 남제서(南齊書) 권 58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왕 ‘모다’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였다.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위나라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
이 490년(경오)의 전쟁 상황은 백제가 남제에 보낸 495년의 외교문서 속에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지난 경오년 북위가 개전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 신이 사법명등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어 맞받아치고, 밤에 기습으로 번개같이 치니, 흉도가 당황하고 무너져 총퇴각하는지라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 가면서 마구 무찌르니,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적의 예기가 꺽이고 그 사나운 흉행을 거두게 되어 이제 역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다.“
[去庚午年, 獫狁(북위 지칭)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屍丹野(강시단야). 由是嶊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490년 경오년 전쟁에서 패한 위魏의
문제는 백제의 세력에 눌려 수도를 평성(平城 북경부근)에서 백제로
부터 멀리 떨어진 낙양으로 옮깁니다(493년).
이 후 전열을 정비한 북위는 다시 494년 12월 대군을 발하여 양양(襄陽), 의양(義陽), 종리(終離), 남정(南鄭)
으로 쳐들어가 백제와 남제를 공격하였습니다.
남제군은 영주(寧州)자사 동만(董巒)을 비롯하여 3천여 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기세가 오른 북위군은 개전 2달 만에 위 효문제(孝文帝)가 직접 전투지인 ‘종리’에 까지 나타났으나,
백제-남제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위군은 문제를 옹위하여 종리에서 쫓겨 달아나고,
북위의 장군 풍탄이 전사하는 등 결국 북위군은 총퇴각을 하게 됩니다.
그 뒤에도 태화 21년(497년, 동성대왕
19년) 6월 또 다시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남제 연합군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498년 4월에도 또 전쟁을 걸었으나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참패당합니다.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동안 무려 5회에 걸쳐 큰 전쟁을 치룬 북위는 국고가 탕진되어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결국 “태화 22년 7월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또 근위대의 1/3을 축소
했다고 하였습니다..
[魏書 卷7 高祖紀下 太和22年紀 ‘后之私府 便可損半 六宮嬪御 五服男女 常恤恒供 亦令減半 在戎之親
三分省一’]”
백제의 강역이었던 하북성, 산동성은 해발 1미터 미만 평지 옥토였고, 북위의 주 무대인 산서성은 해발
2천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이며, 태행산맥은 성을 쌓을 수도 없는 해발 2500미터 이상 고산지대입니다.
이 태행산맥을 중심에 두고 북위가 동쪽의 평야지대를 얻고자 하였으나 백제의 동성대왕에게 한번도 이겨
보지 못하였다는 기록입니다.
과거에 이곳은 내이와 예맥조선의 영지였고, 후에 선우,중산국등의 영지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제가 선조들의 고토를 수복한것이지요.
전략.. 이렇게 유지되던 백제의 영토를 다시 고구려가 계승하게된 연유를 안시성 전투 얘기부터 시작합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디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이들을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을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
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502)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503)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긋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술로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
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춰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출전:<한단고기 고구려국 본기>
초기 고구려 국내성과 소요수의 위치도
지리도(墜理圖)거란지리도 소요수와 압록수부분
대청광여도 일 강호시대 (1603~1867) 초기 국내성과 소요수
산해관은 북위 40도 위치에 있다.그 동쪽으로 바다(요동만)가 있어야 할 위치에 내륙(광령)이 존재하는
지도다.지도의 우측으로 흐르는 소요수는 압록수(청하.개주하)가 합류되어 국내성의 서남쪽으로 흘러
서 안평성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던 물길이다.
이러한 수계(水界)는 모두 바다로 윤몰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연.진시대에 빼았겼던 진번조선(광령땅)은
그 후 고구려에게 수복되어 서쪽 국경선은 난하의 입해구인 여성현(麗城縣)까지였다.바로 낙랑군 수성현
이다.갈석산이 있다가 바다로 윤몰되었던 주변이다.이 대요수(패수)는 수.당의 침략시까지도 유지되었다.
연나라가세웠던 양평성이 있던 자리이고 후에 이 양평성은 고구려의 요동성으로 바뀌었다.
수나라가 대요수를 건너느라 고전하던곳이다.
동경120 ˚ 동경121˚
지도: 산서.산동.호남.남경도. 1675년 제작 제작자:젠손 쎈코 소장 :암스텔담
「碣石有三處 騶虞如燕 昭王築碣石宮 身親往師之 此碣石特宮名耳 在幽州薊縣西三十里 寧台之東 非山也,
秦築長城 起自碣石此碣石在高麗界中當名為左碣石其在平州南三十餘里者 即古大河入海處為禹貢之碣石亦
曰右碣石.」 通鑑地理通釋
*지도의 산해관 우측으로 흐르는 강이 대요하(大遼河) 즉 古大河이지 난하가 고대하가 아님.
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按漢質桓之閒句驪王伯固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掠得樂浪太守妻子即此<<후한서>><동이전>
분홍색 바탕부분이 요동만으로 윤몰되기전의 요동 광령땅 모습이다다.
오른쪽 하단에 보이는 소요수는 서안평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여기에 소수를 의지해서 사는 소수맥(고구려 별종)이 있고, 전 패수.비류수,졸본천,개사수,소요수등이 있다.
백제도 이곳 졸본부여에서 갈라져 나갔다.
요양에서 서남쪽 200리되는 곳에 고구려의 건국지 환주의 중도성이 있었다.
지도 우측 하단에 염전지대로 보이는 위치가 서안평이기가 쉽다.
왼쪽으로 보이는 하단에 대요수의 열구가 있다. 열구의 왼쪽이 낙정(낙선정)이다.
갈석산은 이미 윤몰이 되었다. 양평 평원이 바다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모습을 생생이 표현한 지도다.
고구려는 소요수 즉 비류수의 근처에서 건국하여 서쪽으로 후 패수(산해관) 경계까지(전 진번조선 강역)
수복하였다.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