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제3장 형식주의 비평(1) 이상진 교수
형식주의 비평은 교재 97쪽부터 123쪽까지의 내용이다. 먼저 교과서 97쪽에 있는 핵심용어에 대해서 잘 정리를 해 두면 형식주의 비평의 주요 특징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두 교재에 있는 내용이므로 여러분들이 책을 읽으면서 직접 정리를 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형식주의 비평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참고문헌을 내 홈페이지의 자료실에 오려 놓았으니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구해서 읽는다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형식주의(formalism)라고 하면 말 그대로 형식을 중시하는 것이다. 형식의 실체는 작품에 있다. 여러분이 이전에 배웠던 역사전기적 비평방법이나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방법은 사실 작품 바깥에 있는 요소를 바탕으로 작품을 해석, 평가하는 연구방법이다. 그러니까 작품을 쓴 작가라든가 작품이 쓰여진 시대배경 혹은 그 작품이 대상으로 했을 법한 세계, 그리고 그 작품이 독자들과 어떤 영향관계에 있는가 하는 등등 작품의 외적인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비평을 신비평가인 르네 웰렉은 외재적 비평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시간에 다룰 형식주의 비평은 그런 비평들하고는 근본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 형식주의 비평은 작품의 외적인 조건, 곧 작품의 외부에 있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작품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관점의 비평이다. 그러니까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할 모든 자료는 작품 밖이 아니라 바로 작품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평 방법을 웰렉은 내재적 비평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형식주의 비평을 요약하자면 역사주의적 비평과는 달리 내재적인 요소에 중심을 둔 비평, 텍스트 자체가 고유한 자율적인 존재를 가진 객관적인 의미구조라고 파악하는 비평방법을 말한다. 교재 97쪽 중간을 보면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 작품에 다루어진 사회상, 혹은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 등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역사주의 비평과는 달리, 작품 자체의 형식적 요건, 그리고 작품 각 부분들의 배열관계 및 전체와의 관계 등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 비평이 바로 형식주의 비평“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러면 이런 형식주의 비평방법이 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어디에 토대를 두고 있는지 살펴보자. 교재 97쪽 아래부터 자세히 보기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설명되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시학>에서 문학작품에 있어서 부분들의 구조적인 통일성, 형식, 스타일, 심리적 영향 등을 강조했다. 거기에서 그가 가장 위대한 장르로 든 것이 비극이었다. 이 비극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였다. “플롯이 비극의 영혼”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면서 플롯, 언어 표현 등이 작품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문학작품을 이루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해서 강조한다. 사실 이 점은 작품의 윤리성이라든가 사회성을 강조한 플라톤과는 아주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형식주의 비평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올라가는데, 그 다음에 18세기 말엽의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도 역시 형식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칸트의 유명한 3대 비판서 중 마지막이 <판단력 비판>이다. 여기에서 그는 ‘심리적 판단력’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예술이라는 것은 특별한 종류의 인식을 자극한다. 그런데 그것은 논리적인 추리에만 의존하는 인식 못지않게 아주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곧 심리적인 판단력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외에도 칸트는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래서 ‘무목적의 목적성’을 강조했다. 이런 것들은 작품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것을 심리적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 작품의 미적 구조를 인식해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에 역시 형식주의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 19세기 영문학자인 콜리지를 들 수 있다. 콜리지는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콜리지가 말하는 상상력이란 얼핏 보아서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을 연관시키는 힘이다. 즉 서로 관련이 없고 외관상 어울릴 수 없는 소재를 융합해서 시가 될 수 있는 힘, 그것을 바로 상상력이라고 한다. 콜리지는 이러한 문학론을 전개해서 문학적인 진실이라는 것은 과학적 진실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말했다, 곧 문학과 그 문학작품을 생산하는 상상력을 강조해서 작품의 부분과 전체의 관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셈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콜리지 등의 미학이론에 바탕을 두어 나타난 것이 바로 형식주의이다. 그런데 보통 형식주의라고 하면 특별한 시기에 일정한 그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것을 통틀어서 지칭하는데, 1910년대에 러시아를 중심으로 나타났던 러시아형식주의, 그리고 조금 시간을 두고 1930년대에서 1050년대까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역사주의에 반발하여 나타난 신비평(New Criticism)을 아우르는 말이다. 따라서 형식주의라고 하면 근본적으로 작품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작품의 내적요소를 중심으로 비평하는 방법을 말하고는 있지만 실제 그 구체적인 분석 방법은 이론가에 따라서 상당히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마 여러분이 공부할 때 다소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앞부분에 나오는 핵심용어를 정리하면서 각 비평방법의 특징을 공부하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교재 98쪽 중간부터 설명되어 있는 러시아 형식주의를 보겠다. 러시아 형식주의는 1910년대 중반에
형성되었고 192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서 사실상 각자 흩어지게 되었다. 러시아 형식주의는 보리스 아이헨바움, 로만 야콥슨, 빅토르 쉬클로프스키, 보리스 토마체프스키, 유리 티냐노프 같은 사람들에 의해 이론적인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 중에서 중요한 사람이 쉬클로프스키, 토마체프스키, 그리고 나중에 구조주의에서도 다룰 야콥슨 같은 사람이다. 교재 98쪽 아래를 보면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빅토르 쉬클로프스키가 최초로 형식주의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소개되어 있다. 쉬클로프스키는 “새로운 예술형식의 창조만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치유할 수 있고 사물을 되살릴 수 있으며 비관론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문학이란 바로 그것에 사용된 모든 스타일상의 기교의 총화이다.”라고 말해서 그가 문학에 있어서 내용보다는 기법이 중요하다고 마치 선언하듯이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이른바 형식주의에 대한 언급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99쪽 위에 보면 쉬클로프스키는 심지어 “시어라는 것은 일상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라고까지 말을 했다. 그렇다면 일상어와 시어 곧 문학어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셈인데, 여기서 잠시 문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소개하겠다.
내가 예전에 읽었던 콩트 이야기이다. 옛날에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말을 했는데 말이다. 여자는 남자가 혹시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 말을 안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왜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 않느냐고 자꾸 캐물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여자가 결심을 했다. 오늘도 이 사람이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헤어지겠다고 생각을 하고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곳이 마침 식당이었다. “오늘도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난 당신과 헤어지겠어요.” 하고 여자가 말하자 남자는 상당히 당황하면서 테이블 위의 이쑤시개 통에서 이쑤시개 하나를 꺼내더니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을 이쑤시개라고 부른다면, 난 정말 널 이쑤시개해”라고 말했다. 결국 남녀는 헤어졌다.
왜 남자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이쑤시개해”라고 했던 것일까? 여자는 이 땅의 말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남자가 무슨 생각에서 이쑤시개해라고 했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언어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상적인 소통을 위해서 쓰는 언어는 의미가 분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실 비극이 있다. 모두 다 언어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세상에는 전달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특히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생각 같은 것은 일상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랑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고 해서 정말 사랑하는 것으로 믿느냐 하면, 또 똑같은 말을 해도 의심을 하게 되고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울 때 때로 시 한 편을 써 보낸다든가 음악 한 곡을 선물해서 자기 마음을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건 왜일까? 사실 시나 음악이 언어보다 더 객관적이고 분명한 매체는 아니다. 그런데 사실 훨씬 더 추상적인데 그런데도 그것이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을 오히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정리를 하자면 모든 예술이라는 것은 인간이 언어로 분명히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서 또 다른 수단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의 언어라는 것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쓰는 그 언어가 아니다. 문학의 언어는 그 언어하고는 전혀 다른 예술적인 매개체이다. 따라서 일상어와 문학어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다시 쉬클로프스키의 명제로 돌아가자. 그는 “시어라는 것은 일상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라고 말을 했는데 이것은 바로 일상어와 시어 곧 문학언어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런 조직적인 폭력이 바로 일상어가 전달하지 못하는 추상적이고 애매한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이 끝났다.”라고 말을 하는 대신에 “사랑이 정전처럼 끊겼다”고 표현하든가 기형도의 <빈 집>이라는 시에서처럼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것을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들이 이런 조직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왜 중시하는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자.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인생과 예술을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문학연구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철저히 탐색을 했다. 초기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그 이전의 문학관, 이를테면 교훈주의, 상징주의, 심리주의, 사회학적 관점 등을 공격했다. 그리고 문학적 사실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문학적 사실이라는 것은 문학작품의 언어적인 사실이고 그것은 내용보다는 언어를 조직하는 특수한 장치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문학의 형식적인 요소 일반에 대한 논의로 시야를 넓히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시 뿐만 아니라 산문에 대한 이론적인 고찰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문학성에 대해서도 일정한 논의를 했는데, “문학성이라는 것은 작품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그 문학성은 어떤 표현이 작품의 전면에 부각되어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하였다. 역시 형식적인 면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성립시키는 것이 무엇인가 알기 위해서 문학과 다른 세계는 어떤 차이점을 지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물론 문학, 예술이 인생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히 인지를 했었고, 문학을 문학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다른 세계와의 차이점에 의해서 분명해진다고 생각했다. 앞서 문학언어를 “일상언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라고 했듯이 일단 문학언어와 일상적인 언어를 나누었고, 예술이라는 것은 이미 습관화되었거나 자동적인 것을 낯선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쉬클로프스키가 주장한 “낯설게 하기”이다. 교과서 99쪽 중간에 아주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이전에 <문학의이해> 시간에도 배우셨을 것이다. “낯설게 하기”라는 것은 문학에서 사용하는 일체의 테크닉이 인간의 사고과정에 필요한 에너지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정신의 습관적 태도에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술은 일상의 낯익음의 벽을 깨고 그것을 낯설게 해서 지각의 신선함을 깨는 행위라고 말을 한다. 여러분들이 무언가를 인지한다고 할 때는 처음에는 알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게 된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기 위해서 이름, 나이도 물어보고 관찰도 하고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난 다음 그 사람을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똑같이 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알았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했던 일을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경제적인 인지를 한다.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좀 냉정하게 얘기하면, 잘 아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자신은 아직도 상대방에 대한 관심의 에너지가 남아있는데 상대방은 이미 자기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인간이란 낯선 것에 대해서 에너지를 들여서 인지하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주변의 세계를 낯설게 하고 지각작용이 자동화하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라고 한다. 매체의 광고를 보면 이런 ‘낯설게 하기’가 얼마나 잘 쓰이는지를 알 수 있다. 몇 년 전이기는 한데, 나의 시어머님이 “요새는 무슨 토마토도 광고를 하냐?”고 하셨다. 핸드폰 회사 광고였는데 토마토를 던지는 장면이 나왔다. 토마토하고 핸드폰하고는 사실 관계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낯설어 하면서 그게 뭔가 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그럼으로써 결국 그 핸드폰 광고에 넘어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해서 에너지를 써서 그것을 인지하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지적한 것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낯설게 하기’이다. 쉬클로프스키는 이와 함께 ‘난해하게 하는 것’도 역시 낯설게 하기와 통하는 것이고, 그 뿐만 아니라 제때에 얘기할 것을 얘기하지 않고 지연시키면 사람들이 계속 호기심이 증가된다. 이렇게 하는 것도 역시 낯설게 하기의 방법과 비슷한 것으로 제시를 했다.
여기에서 잠깐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러시아 형식주의자 중 하나인 보리스 토마체프스키의 주제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다. 사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 거의가 시를 대상으로 해서 문학이론을 전개했는데, 이 사람은 산문에 대한 문학이론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주제론이다. 토마체프스키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주제’라는 말과는 조금 다른 뜻으로 ‘주제’라는 말을 썼는데, ‘주제’라는 것은 ‘한 작품의 각 문장들이 합해서 하나의 구조를 이루도록 통일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요즘 아주 흔히 사용하는 ‘모티프’라는 말을 사용했다. 작품의 각 부분들도 자체의 주제가 있는데 이 부분들을 최소 단위까지 분석해 가면 이제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최소 단위의 주제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렇게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최소 단위의 주제를 그는 ‘모티프’라고 불렀다. 그래서 스토리라는 것은 논리적이고 인과적이면서 시간적인 순서로 배열된 모티프의 집합이고, 플롯은 원래의 작품이 가진 배열순서와 관계있는 동일한 모티프들의 집합체라고 보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모티프를 가지고서 서사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알릴 수 있는 것을 마련했다. 그는 모티프를 한정모티프와 자유모티프, 그리고 정적모티프와 동적모티프로 나누었다. 한정모티프는 이야기를 전개할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생략할 수 없는 모티프를 말한다. 자유모티프는 빼놓아도 내용 전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을 말한다. 또 정적모티프는 정황을 나타내는 모티프이고, 동적모티프는 정황의 변화를 나타내는 모티프이다. 그러니까 한정모티프가 많고 자유모티프가 적은 작품은 이야기의 전개가 상당히 빠르다. 할 말만 딱딱 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반면에 자유모티프가 많으면 이야기가 상당히 지루하게 전개될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는 흔히 최명희의 <혼불>하고 많이 비교가 되는데, <토지>는 이야기 전개가 참 빠르다. 그래서 이 작품은 한정모피프가 중심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혼불>에서는 스토리 전개버다는 묘사가 참 많다. 어찌 보면 빼 놓아도 될 것 같은 부분들이 많은데, 그런 점에서 <혼불>은 자연모티프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동적모티프가 중심이 된 것은 작품이 행동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고, 정적모티프가 중심을 이루는 작품들은 정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심리묘사 등을 중시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꼭 그렇게 구분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상하게도 여류작가들이 쓴 작품들의 경우 정적모티프가 상당히 많다. 정적모티프가 많아서 작품을 읽으면 좀 기분이 쳐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동적모티프가 강한 작품을 여류작가가 쓰면 참 남성적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어쨌든 이런 것은 편견이다. 토마체프스키는 이렇게 모티프라는 말을 사용해서 스토리를 분석하고 있다.
이외에도 형식주의자들은 티냐노프를 중심으로 한 시운율론 같은 것도 얘기를 했다. 이 운율론에서 티냐노프는 기본적인 개념, 시적 언어의 유기적인 통일성과 주도자 개념 같은 것을 얘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요한 사람인데, 바흐찐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최근에 얘기가 되는 볼로쉬노프는 말에는 내용, 상대자, 화자의 태도에 따라서 일정한 말투가 생긴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전달되는 말과 전달하는 말의 이중구조를 연구했다. 또 이 문제를 가지고 대화적인 성격으로 접근해서 언어가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서 언어의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이 바흐찐의 이론은 러시아 형식주의 한계를 극복한 훌륭한 이론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바흐찐의 이론의 영향을 받아서 직접 작품을 분석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이론은 영미 신비평 이론가들과 비교한다면 신비평 이론가들이 아주 절대적인 기준을 설정하려고 한 데 비해서, 이 사람들은 상대적인 기준을 적용했다든가 또 상당히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는 차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형식주의자들은 작품 및 문학일반을 하나의 체계로 보고 있고, 또 그 역사를 체계 속에서 설명하려고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자면 실증주의적인 문학을 거부하고 문학으로서의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든가 문학텍스트를 별도의 독립적인 것으로 취급했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1910년대 오포야스('시어연구회'를 뜻하는 러시아어의 앞 글자들을 딴 말), 그리고 모스크바 언어학회로 시작도니 러시아 형식주의는 결국 1930년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러시아에서는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 다음에 로만 야콥슨 같은 망명자들을 통해서 동구권으로 옮겨 간다. 특히 야콥슨은 체코에 프라하 언어학파를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옮겨져서 형식주의와 구조주의 문학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20세기 형식주의 비평을 대표하는 신비평 확립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5강. 제3장 형식주의 비평(2) 이상진 교수
교재 100쪽이다. 신비평에 대해서 보겠는데, 신비평은 193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후반까지 주로 미국에서 왕성했던 문학이론, 문학비평 방법론을 말한다. New Criticism이라는 용어는 1941년에 존 크로우 랜섬(John Crowe Ransom)이라는 사람이 쓴 글의 제목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신비평 이론은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지만 그 외에도 T. S. 엘리엇, I. A. 리쳐즈 같은 사람에 의해서 하나의 비평이론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교과서 100~103쪽에서는 이 두 비평가의 비평이론이 소개되어 있다. 엘리엇이나 리쳐즈가 어떻게 신비평에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먼저 T. S. 엘리엇이다. 엘리엇은 비역사적 비평의 선구자로 불린다. 왜냐하면 교과서에 나오듯이 그는 모든 문학은 하나의 불변하는 영겁의 상 아래에 두고 보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는 시대나 사회의 변화를 막론하고 문학작품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문학적인 질서나 형태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찾아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역사의식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생성, 발전, 소멸하는 과정이 아니라 과거의 것이 축적된 공시적인 것이지 과정을 나타내는 말은 아니다. 또 그가 말하는 전통의식이라는 것도 교재 101쪽 인용문을 보면 나오는데 거기 보면 전통의식은 질서의 문제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질서의식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이고 진정한 예술가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무의식적인 공통성이라고 보고 있다. 그의 글인 <전통과 개인적 재능>을 보면 이런 형식주의의 기본이 되는 개념이 세 가지로 정리되어 있다. 교재 102쪽 상단에 나온다. (1) 문예전통과 문학사는 현재에 의해서 언제든지 수정되고 재정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예술가의 체험은 모두 작품 속에 최종적으로 응집되어 있다고 보았다. (3) 예술가의 정서와 개성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 속에 융합되어 있을 때 중요해진다. 예술가의 정서와 개성이 중요하다고 낭만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는데, 엘리엇은 그것에 반대하여, 잡다하고 이질적인 경험의 파편을 융합해서 개인의 감정과 개성으로부터 분리된 객관적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전통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개성이 그대로 무질서하게 노출되는 문학은 불완전하고 비전통적인 문학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엘리엇이 형식주의 비평방법에 상당히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I. A. 리쳐즈도 신비평의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재 102쪽 중간에 그의 비평방법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가 1925년에 낸 <문예비평의 원리>라든가 1929년에 낸 <실제비평>과 같은 책에서 “문학은 가장 완벽한 양식의 발언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문학작품은 그 외의 어떤 도움도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이라는 말이다. 또한 그는 “작품의 해석과 판단의 근거는 텍스트 외적인 것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의 분석에 의지해야 한다.”고 했으며 특히 “언어적인 측면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바로 신비평의 이론적인 특징과 일치하고 있다. 결국 이들 두 사람의 영향으로 신비평은 확고한 이론으로 자리잡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신비평은 단일한 문학이론과 방법으로 보기 어렵고 그저 동질적인 경향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여러 이론의 복합체이다. 그래서 이 영역 안에 드는 비평가들마다 성향이 조금씩 다른데 이런 이론가들이 한 가지 아주 근본적인 면에서는 일치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반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문학의 자율성 이론에 근거해서 작품 자체의 우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형식주의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신비평가들이 강조하고 있는 몇 가지 원칙들이 교재 104쪽 중간에 나와 있다. (1) 작품은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 (2) 신비평가들이 사용하는 비평방법은 (어찌 생각하면 굉장히 애매하긴 한데) “자세히 읽기” 즉 작품을 아주 꼼꼼하게 읽고 분석을 하는 것이다. (3) 문학은 특수한 종류의 언어이다. 그래서 그 언어를 분석하기 위해서 형식적인 요소들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 이 세 가지가 신비평가들이 강조하고 있는 원칙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형식주의자들은 역사주의라든가 사회문화적 비평방법으로는 도저히 찾아내기 어려운 작푸의 형식적인 아름다움, 미학적 구조 등을 밝히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를 보이는데, 교재 105쪽에 소개되어 있다. 첫째, 형식주의는 서정시와 같이 길이가 짧은 작품을 분석하는 데는 아주 유용하다. 그러나 소설 등 길이가 긴 작품을 다루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하다. 이 신비평, 형식주의 비평이론을 보면 대부분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 시이다. 이처럼 짧은 작품에 유용하다는 것이다. 둘째, 몇몇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는 데 아주 탁월한 면을 보이기는 했으나 다양한 작품, 다양한 작가의 작품에 두루 통하는 분석방법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르네 웰렉도 동의를 했다. 르네 웰렉은 신비평이나 러시아 형식주의가 유럽문학만을 한정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하였다. 셋째, 분석을 하는 데 실제 언어, 이미저리, 서술방법 같은 특정한 문제만을 다루고 있을 뿐 그밖의 다른 부분은 도외시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형식주의는 편협성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르네 웰렉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인정을 했다. 르네 웰렉도 자기 스스로 형식주의가 지니는 문제점을 몇 가지로 지적을 하고 있는데, 교재 105쪽 중간에 나오니까 각자 보기 바란다. 다섯째, 신비평은 작가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그러니까 작품을 작품 그대로 놓고 평가하지 작가의 사회적, 전기적 조건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형식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공격한 말이다. 자크 바르장이라는 사람이 이 부분을 비판하면서 이것을 ‘본체론적 오류’라고 불렀다. ‘본체론적 오류’라는 것은 작품이 그 자체로 자족적이면 사실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할 텐데, 형식주의자들은 독자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작품들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그렇다면 그런 설명에는 뭔가 작품 밖에서부터 오는 어떤 것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형식주의자들이 ‘본체론적인 비평방법’이라고 하나 그 본체론적인 것 자체가 사실은 오류라고 지적했다. 여섯째, 순수한 형식주의적인 방법만으로는 실제 비평에 있어서 적절한 가치 해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최초로 형식주의적인 비평을 한 사람이라고 부를 김동인의 글을 보면 확인할 수가 있다. 교재 106쪽을 보면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김동인은 우리나라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실천비평을 지속적으로 했고 그것을 연재했는데, 그것은 <조선근대소설고>에 묶여 있다. 여러분이 직접 찾아보면 될 텐데, 어쨌든 김동인이 글을 연재하면서 초반에는 형식주의적인 비평방식으로 작품을 분석했지만 연재가 계속되면서는 점차 작가의식을 이야기한다든가 역사주의적 비평방법을 원용하면서 작품의 공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실제 비평에서 가치평가를 하려면 결국은 형식주의적 비평방법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바로 형식주의적 비평방법의 한계이다.
형식주의적인 비평의 특성을 드러내는 개념어라든가 구체적인 분석용어들에 대해 공부하겠다. 107쪽에 이론의 방법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런 분석용어를 잘 공부해 두면 형식주의 비평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 이런 분석 도구들은 어떤 비평방법을 사용하든지 사실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글을 이해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고 작품을 분석할 때에도 유용한 틀이 될 테니까 잘 정리를 해 두면 좋겠다. 물론 신비평가들이 말한 용어들은 상당히 많이 있는데, 교과서에서는 우선 본체론적 비평, 의도의 오류, 감동의 오류, 아이러니, 패러독스, 그리고 모호성 등이 소개되어 있다.
먼저 본체론적 비평 혹은 맥락적 비평이라는 말을 보자. 원래 신비평에는 존재론적이라든가 문맥적, 유기적, 본질적이라든가 이런 수식어들이 자주 붙는다. 이 말은 이미 아주 많이 반복했듯이 신비평이 문학작품을 하나의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나 사회, 독자와 작품의 인과관계를 떠나서 작품의 의미는 작품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을 뜻하기 위해서 쓴 말이다. 그런데 앞서 소개했다시피 이런 형식주의자들의 비평방식을 비판할 때 자크 바르장은 바로 이 용어를 역설적으로 사용했다. 형식주의가 본체론적 비평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본체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108쪽에 나오는 '의도의 오류'를 보겠다. 이 말은 윔샛(Wimsatt, W.K.)과 비어즐리(Beardsley, M.C.)가 1946년에 [의도의 오류]라는 유명한 논문을 같이 써서 발표를 했는데, 그 발표부터 크게 문제가 되었던 아주 유명한 말이다. 두 사람은 이 글에서 “시는 비평가나 작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작품은 그것이 탄생하는 순간에 곧 바로 작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세계 속에 떠나가 버린다. 시는 공중(公衆)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보통 작품은 창작을 하는 순간 작가로부터 소외된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라든가 의미 부여는 작품의 해석과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작가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작품을 썼는지 궁금해지기는 하다.
여기서 잠깐 영화 얘기를 해 보겠다. 혹시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아는가? 그 영상도 참 아름답고 음악이 정말 좋아서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았다. 이 영화는 시인 네루다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잠시 지중해의 한 아름다운 섬에 머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네루다에게 전 세계로부터 편지가 날아오는데,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 마리오라는 청년을 개인 우편배달부로 고용한다. 그런데 이 마리오라는 사람과 네루다가 친해지면서 나중에 정말 친한 친구가 되는데, 대화를 나누면서 마리오는 점차 시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나중에는 시를 쓰고 시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에서 마리오가 자기가 사랑하게 된 여인을 유혹하려고 네루다의 시를 읊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마리오에게 홀딱 빠지게 된다. 그 시 중에는 아주 성적인 표현도 나오는데, 마을사람들은 그것이 은유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그 여인을 데리고 사는 아주머니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네루다를 찾아와서 그 성적 표현을 두고 질타를 한다. 이 때 네루다는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마리오한테 되려 따진다. 왜 자기 시를 함부로 연애하는 데 쓰느냐고 묻는다. 이 때 마리오는 “당신이 썼다고 당신 시인가? 그것은 그 시를 읽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하자 네루다는 이 말에 꼼짝을 못한다.
다시 교재로 돌아가자. 이 얘기를 한 이유는 윔샛과 비어즐리가 여기서 한 말이 바로 작가의 의도 때문에 작가를 그렇게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1920년대까지를 지배한 역사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비판하기 위해서 쓴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문학작품을 창작한 작가의 전기나 시대배경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의도의 오류는 작품 창작에 임하는 작가의 창작 의도가 곧 그 작품의 의미와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고는 볼 수 없다. 110쪽으로 가 보자.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물론 옳은 태도는 아니지만 작가의 의도나 역사적인 배경은 비평가가 참고할 필요는 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작가가 의도한 대로 작품이 쓰여지는 것도 아니고, 또 작가가 의도했다고 해서 작품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교재 110쪽 중간에 보면 그런 예로 이인직의 소설 <귀의 성>이 소개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인직은 근대적인 주제를 보여주려고 의도를 했는데 사실 작품의 인물의 행동에서는 오히려 전근대저인 요소가 훨씬 많이 나타나 결국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작가의 의도를 살려서 <귀의 성>을 근대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의도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교재 112쪽에 소개되어 있는 것은 감동의 오류에 대한 것이다. 감동의 오류라는 것은 문예작품의 가치를 작가가 아니라 독자에게 주는 영향이나 효과에 두는 것이 잘못임을 지적한 것이다. 즉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준 결과와 작품을 혼동하는 것이다. 만일 시를 읽고서 그것이 주는 심리적인 효과를 중시하고 그것을 가지고 작품을 해석한다면 그것은 독자의 인상을 중시하는 것이지만 인상주의적, 상대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물론 글을 쓰는 사람의 미감이나 미적 기준이 상당한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인상주의도 그대로 훌륭한 비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 생각을 작품의 의미와 바로 연결을 한다는 것은 사실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평가와 판단의 근거가 작품과는 무관한 개인, 또는 시대와 지역에 제약된 평가자의 주관이 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근거를 가지고 인정을 받으려면 이런 심리적 효과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지 작품을 분석해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교재를 보면 1930년대까지도 유통되었던 딱지본 고소설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그것이 당시의 대중적인 흥미에 부합했다고 하더라도 문학사적으로 평가를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심리를 탐구하고 표현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13쪽에 엠프슨(William Empson)이 말한 ‘모호성(ambiguity)’ 혹은 ‘애매성’이 나온다. 엠프슨은 <애매성의 7가지 형태>라는 책을 썼다. 국내에도 번역이 되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는데,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구입해서 보면 이해가 잘 될 것이다. 작품에 쓰인 하나의 어휘가 둘 이상의 거리가 서로 먼 내용을 함께 의미할 때, 또는 서로 다른 태도나 감정을 나타내게 될 때 ‘모호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이 모호성이라는 말은 원래 영어로는 “두 길로 몰고 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모호성이라는 말을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을 텐데, 시에서는 이런 모호성을 가지는 시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호하면 모호할 수록 시는 좋은 시이라는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시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굉장히 짧은 시라서 들으면 금세 외울 수 있을 것이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 작품이 상당히 유명해서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영화도 만들어지고 소설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작품이 유명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도 이 ‘섬’이 도대체 뭔지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 벽이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유종호라는 유명한 비평가는 “이 섬이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까 그 섬에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즉 그 섬은 무인도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을 떠나서 무인도에 가고 싶다.”고 해석했다. 어쨌든 이 섬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자기가 해석하면 그마니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상당히 모호한 작품이다. 이 신비평가들은 문학작품에서는 언어의 의미가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해석의 폭이 넓어지므로 좋다고 말한다. 모호성이라는 말은 요즘은 ‘다의미성’이라는 말로 사용하는데, ‘모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복합적이고 풍부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재 113쪽에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가지고 설명이 되어 있으니까 각자 참고하기 바란다.
‘아이러니’는 겉으로 나타난 말과 실제로 의도한 내용이 차이가 나는 것을 말한다. 희랍어 에이로네이아(eironeia)에서 나온 말인데, 이 말은 '사람들을 속이는 매끄럽고 비열한 방법'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뜻하고자 하는 것의 반대의 말을 해서 여러 가지 복잡한 뜻을 지니게 만드는 기법’을 말한다. 신비평에서는 이런 아이러니가 담긴 작품을 훌륭한 작품이라고 보는데, 아이러니가 인생의 체험을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양면성, 복잡성을 모두 인식할 때 나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전영택의 <화수분> 등을 쉽게 예로 들 수 있다.
역설(paradox)이라는 것은 두 말을 하는데 그 말이 표면상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님은 갔습니다.”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두 말은 서로 모순이 된다. 왜 모순이 되는가를 생각함으로써 시인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주장한 사람이 클리언스 브룩스(Cleanth Brooks)인데 그의 <잘 빚어진 항아리>라는 책이 있다. 이것도 번역이 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브룩스는 “아이러니와 역설은 시의 본질이다.”라고 말한다. 시인이 표현하는 진실이라는 것은 이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에 의해서만 접근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시인의 언어라는 것은 유추의 언어인데 그러므로 은유를 쓸 수밖에 없고 거기에는 의미의 중복, 모순, 애매함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과서 116쪽부터는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에 대한 형식주의적인 분석이 나오는데, 이것을 통해서 형식주의 비평방식을 작품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여러분이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