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웅 시인>>
<<백상웅 시인의 양력>>
*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2008년 《창작과비평》신인상으로 등단.
*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2008년 창비신인시인상 수상.
* 시집 : 『거인을 보았다』.
<<백상웅 시인의 시>>
메이데이/백상웅
둘레를 잃는다면 속이 터지겠지. 식은 만두처럼.
여기는 섬이야.
무인도에 표류하기를 꿈꿨지. 집 짓고 연장과 무기를 만들어 밭을 갈고 적을 경계하면서.
섬 중심까지 탐험을 하고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놀면서.
다소 외롭더라도 불을 피우고 구원을 기다리는 것조차
노동이 되지.
직장을 다닌 이후로 나는 잘 참고 투쟁은 없고 사랑은 불편 없고.
둘레를 아껴가며 잘 살지.
휴가를 얻어 섬에 가서 알게 되었지. 먼 바다를 응시하는 건 그저 불신과 불안 때문이라고.
이 섬에서의 탈출은 요행이야.
옆구리 터진 섬 같다.
살려줘.
검정/백상웅
검정은 자주 손이 간다.
스무살이면 필요하대서 검정 정장을 사 입고 미팅과 상갓집과 결혼식을 다녔다.
검정으로 데이트 하고 고개 숙이고 악수를 했다.
지금의 감정도 그때와 같다.
야근하고 집에 도착했을 때 방 안은 칠흑 같고, 불을 켜니 사랑하는 사람의 눈썹은 검정이다.
밤에 나뭇가지는 그림자로 흔들린다.
출생신고도 이력서도 부동산 계약서도 글자는 새까맣다.
죽는 것은 대체로 암흑이라고 알려졌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으나 급하면 막막하고 먹먹한 검정에도 손을 내민다.
어둠이 눈에 익을 때쯤 검정은 검정이 아닌 게 된다.
입 다물면 식도부터 항문까지 깜깜하다.
갱은 더 자라지 않는다.
나는 다 컸다.
각목/백상웅
광목으로 옷을 만들어 시집을 왔다는
어머니의 말, 각목으로 알아듣고는
나는 옹이가 빠져 구멍이 난 저고리를
생각했다, 그땐 각목이 귀했을지도 몰라
옆집 창고에서 빌려왔을지도 몰라
각목을 절구에 찧어서 질긴 실을 뽑아냈을지도
몰라, 생각하면서 나무 속을 기어다니는
딱딱하고 팍팍한 누에 한 마리를 떠올렸다
각목을 광목으로 바로 알게 된 후에도
나는 누에가 각목 속에 터널을 뚫는다고
믿었다, 다리 부러진 의자가 되면서도
젖은 밭이랑에 박혀 서서히 삭아가면서도
때리는 놈의 손아귀에 붙잡혀서도
널따란 천을 짜고 싶어할 각목을 떠올렸다
어머니 같으면서도 때론 아버지 같은
각목에 녹슨 못을 박아 바지랑대를 만든다
물레를 돌리다가 두꺼운 주름을 쿵쿵 접을
누에, 각목을 길게 뻗어 빨랫줄을 치켜올렸다
지금 각목은 광목처럼 펄럭이고 싶은 것일까
말라서 주름진, 이제 쉽게 부러질 것 같은
각목, 나는 각목으로 광목같이 펼쳐진
눈 내린 들판을 후려칠 수 있을까
백년 동안의 소풍/백상웅
백년 전엔 없던 물렁한 언덕이었어
나무들이 천막을 치니 꽃그늘이 통째로 빨래하러 가는 거야
눈곱 떼던 복숭아 꽃망울도 저수지 쪽으로 기어가던 참이야
벌떼가 꽃송아리를 하늘에 꽁꽁 꿰매어놓아도 꽃잎이 세상에 분홍주름을 자꾸 만드니까,
흑염소떼가 뿔을 세우고 쇳소리 내며 몰려왔어
백년 만에 봉봉세탁공장 천막이 세워졌어
안과 밖이 헷갈리는 투명한 벽을 드나드는 염소떼,
국적은 다르지만 얼굴이 닮은 그늘이야
돗자리 위에 앉아 까맣게 수런대고 있어
소풍 와서 수면을 다림질하고 있는 거야
붓 같은 수염들의 웃음은 볕에 잘 익은 청동빚깔,
삼겹살을 굽다가 서툰 젓가락질처럼 웃는 거야
물에 뜬 능선을 따라 자맥질하는 물오리같이 입을 벌리데
천막 아래선 복숭아나무와 여권 없는 어린 뿔이 알음알음 말을 놓는 거야
쨍쨍한 놋쇠근육들도 나무들과 말을 트고 맨발이 되는 거야
하늘의 얼룩을 불법으로 지우던 흑염소떼,
주름진 하늘의 귀퉁이를 펼쳐 언덕에 널어놓았어
펄럭이는 것은 때가 빠진 언덕이야
살갗 부딪치는 소리가 저수지에 물결을 일으키데
왜 거뭇거뭇한 사랑은 방울 흔들며 언덕을 넘지 못하지?
나무껍질 같은 얼굴에 꽃잎이 내려앉아 흑염소떼의 나라는 백년 동안 찾을 길이 없어
강철손이 보송보송 말라가는 하늘을 주무르고 있는 언덕이야
거인을 보았습니다/백상웅
방 한칸의 옆구리를 터서 또다른 방을 만든 집에 세를 들었습니다. 그해 겨울 저는 양철지붕을 밟고 다니는 수상한 거인이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도 발자국을 본 적 없지만, 그는 지붕에 엉덩이를 대고 한참 쉬었다 가면서 처마 끝 고드름을 뜯어가곤 하였으니까요. 해가 저물면 가로등마다 성냥불을 그어대던 놈도 거인이었습니다. 저는 소란스러운 불빛 때문에 귀가 불편해서 잠들지 못했습니다. 방은 외로운 기타 같았기에 저는 두칸의 방에서 하루씩 번갈아 묵었습니다. 방이 쓸쓸해지면 목소리가 금방 상할까 봐 걱정했던 까닭입니다. 멀리서 열차소리가 들리면 거인은 귀를 막고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휘파람소리는 제 심장 속에 서늘한 골짜기를 팠습니다. 거인은 분명 엉덩이가 매우 무거운 놈일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동네의 담벼락은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고, 대들보가 뽑혀갔으며, 지붕이 움푹 내려앉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거인은 하릴없이 태양을 잡아당겨 어둠을 길어지게 하고, 태양에 얼음을 용접해서 눈발을 자주 마을로 불러들였습니다. 눈송이가 날리면 팽팽한 전깃줄을 튕기며 배고픈 새떼를 쫓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거인은 구름을 뒤집어쓰고 어떤 날은 적막한 통장을 들여다보고는 창문에 성에를 가득 채워놓고 갔습니다. 아마도 하늘 가장자리에 묻어둔 쌀독이 텅 비어버린 날이었겠지요. 폭설이었습니다. 거인도 잠을 뒤척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뜨려 이를 쑤실 때, 이미 하늘은 텅 비고 먹구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거인은 천장을 두드리고 처마를 움켜잡고 지붕을 열어보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두려워서 함박눈처럼 울었습니다. 지붕과 지붕을 잘못 겹쳐 올렸는지, 날이 풀리기도 전에 천장에서 거인의 녹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검은 벌레들이 방구석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젖은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거인은 곰팡이 핀 벽에다 제 그림자를 걸어두고 또 어디에서 저의 낡은 기타소리를 뜯어먹고 있을까요?
매화민박의 평상/백상웅
네모난 짐승이 매화나무 그늘을 등에 업고 기어간다
부러진 한쪽 다리를 벽돌로 괴고도 절뚝이지 않는다
발바닥이 젖어 곰팡이가 피었는데 박박 긁지 않고
마당에 네 개의 발자국을 천천히 찍고 있다
나도 짐승의 널따란 등에 그늘보다 무겁게 엎드린다
짐승은 매화나무 그늘을 담벼락 쪽으로 밀어낸다
틀림없이 한곳에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지 못해
나처럼 숲속에서 도망쳐 매화민박에 묵었을 짐승,
평상이 되는 줄도 모르고 납작 엎드려 단잠에 들었다
등허리에 문신처럼 박힌 나이테가 성장을 멈춘 것은
놀러온, 도망친, 연애하는, 슬픈, 엉덩이 때문은 아니다
숲을 떠난 나무가 뿌리를 찾기 위해 남겨놓은 증거이다
네모난 짐승이 햇볕을 향해 남몰래 발자국을 뗀다
네모난 황소 같은 평상이, 평상이 될 것만 같은 나를
단단히 엎고 숲속으로 돌아갈 것 같은 매화민박이다
오동나무 아파트/백상웅
우리가 세든 이 아파트는 공교롭게도 계단이 없지만 옥상은 딱딱한 하늘과 이어져 있단다
이 동네에 정착한 주민들이 처음 한 일은 베란다 가득 꽃밭을 가꾸는 일
채송화가 자작자작 걸음을 뗐고 해바라기와 능소화가 한 줄기에서 피어났지
넝쿨이 치렁치렁 아래층 창문을 가리기도 하는 우리의 아파트는 한때 몇 그루의 오동나무였거든
우리가 건너 동에 걸린 얼굴만 넌지시 바라보는 건 서로를 보살필 수 있는 시간의 전부였기 때문
느닷없이 등을 돌려 떠나버리는 이들이 없었기에 주민들의 눈두덩은 젖을 일이 없지
나이테가 박혀 있는 단칸방에선 둥근 뼈가 항아리를 빚어 오동나무 숲에 걸어두었어
항아리가 식은 달처럼 둥둥 떠서 동강난 세상을 밝히면 우리는 꽃잎을 갉아먹다가 들킨 벌레 같았단다
오동나무 아파트가 층을 높여가자, 항아리의 배는 고치처럼 볼록하게 불러갔어
주민들은 뚜껑을 섣불리 열어보려 하지 않았거든
뼈가 익어가는 계절이 다가오면 아파트에 젖은 날개들이 기어다니고 꽃밭엔 더듬이가 앉아 있을 테니까
누구나 화로 속에 누워 꿈을 꾸다가 뜨거운 항아리를 안고 아파트에 올라와야 했단다
꽃 피는 철공소/백상웅
철공소 입구 자목련은 과연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망치질 소리가 앞마당에 울려퍼지면요
목련나무 우듬지에 남은 살얼음에 쨍 하고 금이 가요
내 친구 스물일곱 살은 강철을 얇게 파서 봄볕에 달구죠
한 잎 한 잎, 끝을 얌전하게 오므려 묶어서
한 송이 두 송이, 용접봉 푸른 불꽃으로 가지에 붙여요
내 친구 스물일곱 살의 팔뚝에도 꽃이 벙글거려요
팔목에 힘을 줄 때마다 자목련 꽃이 팽팽하게 열리죠
자색 화상 위에 푸른 실핏줄이 돋아나요
그걸 보고 여자들이 봄날처럼 떠나기만 했대요
용접봉을 손아귀에 쥔 내 친구 스물일곱 살
오늘은 철공소 마당에서 철목련을 매달아요
가지마다 목련꽃이 벌어져서 햇볕을 뿜어대죠
꽃 핀 철문은 허공에 경첩을 달고 식어가고 있고요
밤에는 하늘에다 꽃잎을 붙이느라 잠도 못 자요
지문의 세공/백상웅
지문 없는 세공사에게는 격동이 없다.
강도 높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같은 거,
그럭저럭 빛나는 돌 같은 거,
갈고 자르며 육면체가 태어나는 시간에
세공사의 지문이 사라진다.
우리가 다른 무늬를 가진 것은 세공사의 고요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직 세공사였던 나의 외삼촌 경우가 그렇다.
고요 때문에 외가의 무늬는 복잡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출생을 지우려고,
머리가 일찍부터 벗겨지기 시작한 외삼촌은 밤낮없이 보석을 깎았다고 본다.
지문이 다시 생겼다는 외삼촌,
요즘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나 만나보지 못했다.
내가 듣기를, 언젠가 보석은 종족을 다스리는 제사장의 신비로운 무기.
또 언젠가 보석은 굴러가는 돌 따위,
이제는 아름다운 우리들의 도구.
오늘도 세공사는 단단하게 빛나는 시간을 깎는다.
우리도 조용히 지문을 바꿔보려고 한다.
불변의 그것은 잠시 사라질 뿐이다.
우리가 문득 슬픔을 느끼며 길을 걷는 건
평생 변할 수 없다는 출생에 대한 각인 때문이다.
나의 외삼촌이 세공 일을 접고 육면체의 근육 속에 갇혔듯이
도계/백상웅
여기서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경계를 넘는다.
주소를 바꿔 도를 넘는 거다.
여기에 정류장이 하나 있어서, 여기에 쭈그려 앉은 사람들이 띄엄띄엄 있어서
색이 다른 두 버스는 마주보고 유턴을 한다.
방언은 여기에서 태어나고 여기에서 죽는다.
혀는 언덕을 오르고 커브를 돌고 터널을 통과하다가, 요금이 다른 버스를 갈아타고 소읍과 소읍을 전전하다가
여기, 지명조차 도계인 도계로 돌아온다.
그간 혀가 상속한 단어는 수천 단어, 수만 음절이랄까.
사랑에 속한 소리, 고독에 속한 소리.
약간의 아부와 약간의 투쟁.
미치거나 침묵하거나.
그래도 가끔은 제 안의 강세와 억양의 무늬를 고의로 잊으면서, 가끔은 자신도 모르게 지워지면서.
그래도 뜬금없이 생각나면 툭툭 내뱉으면서.
때때로 도를 넘는다.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에서 죽는다.
방언처럼 꽃잎이 흩어지고 빗물이 흘러가고 낙엽이 굴러가고 눈발이 날린다.
전향/백상웅
여수에서 전주로, 전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파주로
본의 아니게 종북이다.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나만 모르고 있었다.
추석날 집에 내려가 앨범 속에서 십여 년 전의 나를 본다.
통 넓은 교복바지를 입고 있던 잘 다린 그 바지를.
전라선을 타고 평야의 주름을 가로질러 올라와,
의자에 앉아 한 십 년 시를 썼다.
가끔은 선배 따라 집회 현장을 기웃거리다가,
그보다 자주 통장 잔고에 집착하다가.
언젠가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이별이나 포기도 해봤는데.
바지는 서른이 넘어서야 심야버스에 컴컴하게 앉아
고속도로를 달려 겨우 사무실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주머니 사정에 신경을 쓰면서.
바지는 그냥 바지처럼 정치도 사상도 잊고, 그냥 없어서 종북이다.
무릎은 튀어나오고 오금에 주름을 그어가며
늙어가는 그 바지를 나는 아무렇게나 벗어놓는다.
늙은 호박을 밟은 적 있다/백상웅
가끔 있다, 노력해도 이룰 수 있는 삶은 없다는 걸
인정하는 저녁이.
마흔이며 쉰 너머의 한계가 보이는
늙은 호박 같은 저녁이.
퇴근길에 고향 친구랑 한 십 년 만에 통화하다가,
스물 넘고서부터 패배한 날들을 알린다.
둘 다 부족해서 여자에게 한두 번씩은 차였다.
너는 공무원 시험, 나는 신춘문예에
수 해 죽만 쑤다가
다 때려치우고 가끔 마른 넝쿨처럼 울었다.
취업하고 첫 월급 받아보니 그 끝이 아찔하니
이미 그른 것 같았다.
미처 따지 못하고 늙어버린 저녁이었다.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계절 바뀌어 폭설에 파묻힌
얼어붙은 저녁이 와도,
내가 무능해서, 인생 내가 잘못 살았다고
자책하는 날이 왔다.
네 아버지 내 아버지도 그렇게 하는 수 없이
늙어갔을 텐데, 하며
수긍하는 저녁이 굴러왔다.
아비들의 그런 텅 비고 주름진 저녁에 바람은 좀 불었을까,
늙은 호박을 부러 밟은 적 있다.
늙은 세일즈맨/백상웅
우리는 영감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른다.
돗자리에 책을 펼쳐두고 묵은 찌개처럼 졸고 있는 영감, 세일즈맨이라고 부르기에 책들은 영
감의 낮잠보다 늙었다.
이제 책을 펼치면 우리는 주름처럼 밭을 갈아야 한다.
지난 시대의 문법과 진위를 가리기 힘든 그림 위에, 틀리지 않았지만 틀린 것들 위에, 옳고 그
름을 판단하기 위해.
파는 책처럼 보이지 않는 책, 팔고 싶지만 팔릴 책이 아닌 책,
헌책이 아닌 책을 파는 영감은 거만한 판매자다.
날마다 모서리가 무너지고 있는 책들, 우리는 때때로 영감이 펼쳐놓은 것들을 보며 고대도시
를 꿈꾸게 된다.
글자들이 흘러내리고 문법이 틀어진다.
손금이 지워지자 운명이 바뀐다.
이름을 새겨두고 지은이가 죽는다.
돌에 새겨진 이름도 곧 지워진다.
천장이 뚫리면 지하에서 곰팡이가 번진다.
도시의 뿌리에서는 벌레가 기어오른다.
그래도 수로에서는 여전히 물이 흐르고, 어김없이 구름은 능선에 걸리고, 푸른 잎사귀는 죽은
도시를 뒤덮고, 꽃은 핀다.
영감은 죽은 도시의 문리를 유일하게 판매하는 사람.
절판된 구름이나 나무, 사랑과 철학, 운명과 레시피… 사라진 책들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른다.
우리는 영원히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른다.
그리고 영감을 읽는다.
인력/백상웅
어깨 부딪쳐도 슬퍼할 수 없다는 거, 치미는 욕설조차 없다는 거.
축지법과 비행술을 가르치는 학원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차라리 피해서 다녀라, 땅을
접어 달리고 구름 사이를 날아라, 이것인데.
대도시에 갓 올라온 나는 가끔 혹한다.
축지법과 비행술에는 어떤 포즈가 어울릴까.
오랫동안 무직이었다.
오랫동안 인력이라는 단어를 연구했다.
인력사무소 간판에 담 걸린 근육처럼 박혀있는 인력과 싫다고 해도 자꾸 끌어당겨 가슴에
품고야 마는 인력.
달과 지구도 노동을 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누가 고용주인가?
면접 보고 돌아오는 길, 축지법과 비행술이라고 적힌 간판을 보며 생각한다.
저보다 기막힌 창업은 이제 있을 수 없구나.
저기와 여기의 땅을 확 끌어당겨 순식간에 걷고, 그마저도 귀찮으면 팔을 쭉 뻗어 날아가는
기술을 배워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날을 꼬박 새고 창문 밖을 본다, 어깨 부딪치며 출근하는 사람들.
인력이다, 그래서 나는 무력시위 중이다.
폭설의 기억 /백상웅
1
북받친 사람처럼 눈 쏟아졌다. 녹슨 용골 드러낸 어선은 급한 마음에 뱃머리를 항구로 돌리고 육지를 밀었다. 눈발은 그대 아픈 곳에 관심도 없어 척추 부러진 어선을 껴안았다. 뼈마디 뚫고 솟아오른 엔진이 늙고 비릿하였다. 눈덩이가 기름때 낀 심장을 철퍽 삼키며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파란 페인트칠 벗겨진 앙상한 배를 하얗게 씹으며, 눈발을 고장난 어선의 멱살을 잡던 쇠줄을 깨물어 끊었다.
2
백년 만의 폭설이라고 했다. 마을 바깥에 그리운 이 있었지만, 발신음은 산을 넘지 못하고 귓바퀴에 차가운 신호음만 뿌렸다. 귓밥을 파내면 짠한 이름만 묻어나왔다. 주먹 쥐면, 길은 튼 손등처럼 툭 끊어졌다. 그리움도 백년 만에 부러졌을까? 혼자 남을 때, 내 사랑의 방식은 바닥에 깔려 출항을 기다리는 그물이었다. 겨울볕에 누워, 얼고 젖기를 반복하며 어선의 등에 업히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것. 발자국은 방파제 끝까지 질질 끌려다녔다. 눈덩이가 바다로 떨어질 때 배의 후미는 출렁 가라앉았고, 폐선의 굽은 등에 꽂힌 깃발은 외로운 이의 발자국을 내놓으라는 듯, 하얀 쇠창살에 갇힌 수평선을 그만 놓아주라는 듯, 온몸으로 울며 눈송이의 귀싸대기를 올리고 있었다. 허공 속에 오롯이 찍혀 있는 눈송이의 발자국, 오래 서 있었기에 단단한 발자국이 먼 바다로 밀려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터널/백상웅
공주에서 천안 사이, 아버지가 뚫었다는 터널을 지나간다.
산의 늑골 속으로 고속도로를 집어넣던 아버지, 속도가 없는 터널 속에서 길은 늘 바위 속에서 똬리를 틀고 꼭꼭 숨어 있었다.
어느 겨울에는 뒤돌아보니 눈발이 둥근 출구를 쇠창살처럼 가리고 있었다고 한다. 감옥, 속에서 오히려 환한 아버지의 눈은 석달쯤 벽만 보고 살았다. 맞은편 쪽으로 나가기 위해 밤낮으로 허공에 백열등을 매달고 구멍을 뚫었는데, 터널이 마침내 뚫린 날, 감옥에서도 밀려난 아버지의 눈에 터널은 한마리 거대한 구렁이로 보였다고 한다.
속도는 금세 아버지를 잊었다. 늙은 두더지의 말린 가죽처럼 마루에 앉아 볕을 쬐는 아버지, 나는 창호지 구멍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방 안에서 훔쳐보고는 했다. 아버니는 저렇게 평생 갇히기 위해 전전긍긍 살았나?
터널을 통과하니 폭설이다. 아버지의 터널에서 나는 서서히 멀어져야 한다. 눈발을 파헤치며 버스가 두더지처럼 기어가기 시작한다.
코끼리 무덤/백상웅
이 노란 코끼리는 지축을 쿵쿵 울리며
걸어오지 않았다, 숲에서 숨을 거둔 뒤에야
대형트럭에 혼자 실려 왔다
늪으로 걸어가서 스스로 가라앉지 못한
기름진 심장은 마지막 두근거림까지 뜨거웠다
주인이 흥정을 끝내고 숲으로 돌아간 뒤
백제폐차장 앞마당, 코끼리는
딱딱한 땅에 코를 박고 깊은 잠이 들었다
코끼리가 여기까지 끌고 온 육중한 길이
땅에 내려놓은 코끝에서 마침내, 끝났다
아름드리나무의 옆구리를 때려 쓰러뜨리고
하늘 속의 번개를 끌어내리고
무허가 판잣집의 처마를 귀뺨 치듯 날려버리던
이 길쭉한 코는, 아파트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고
주름진 들판을 반듯하게 잡아 펴던
고독한 손이었다, 고독해서
아무지 잡아주지 않아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코끼리의 손,
그렇다고 진흙 위에 물렁한 발자국을 새겨
대지에 심장의 엔진소리를 들려줄 수도 없는
코끼리의 발은 이제, 녹슬고, 뻣뻣하고
거무튀튀하다, 이 노란 코끼리는 울고 싶을까
혈관을 잘라내고 뭉클했던 오장육부를 떼어내기 전에
크게 한번 울어 지평선을 자욱하게 물들이고 싶은 것일까
땅에 자신의 무덤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데
제 코를 한치도 들어올릴 수 없어
작고 까만 눈 감을 줄 모르는 이 노란 코끼리를
그렇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구동성
포클레인이라고 불렀다
반과 반/백상웅
거기를 지날 때마다 나는 반반을 고민한다.
간판에는 장의사라고 반듯하게 박혀있고
미닫이문에는 영어로 드럼렛슨이라 적힌,
거기는 낡았지만 웃긴 구석이 있다.
관을 짜는 사람과 드럼을 두드리는 사람이
한 건물에 다른 집기를 들여 놓고는
한 사람이 염을 할 때, 한 사람은 스틱을 닦을
거기, 나는 그들의 반반이 궁금하다.
다달이 나눠서 내야할 임대료문제와
죽음과 음악을 다툼없이 공유하는 법을
그들은 한 자리에서 해결하고 있을 테다.
후라이드 반 양념 반을 처음 시켜 먹었을 때의
느낌과 사뭇 다른 거기, 시체가 굳는 동안
록큰 롤의 비트가 펄쩍 뛰는 이 무엄한 광경,
그들이야말로 경계를 아는 자들이 아닐까.
책상에 그어진 금과 비슷한 그 경계.
여기까지가 하나의 가설이다. 거기 주인이
시체를 닦으며 드럼을 치는 사람이거나
장의사가 망한 자리에 드럼을 치는 사람이
싼 값에 들어 온 것일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이 가설들도 진실과 거짓 사이의 이야기,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반과 반을 고민 한다.
내 생의 반쪽과 사과 한 알의 반쪽,
적도의 위아래 그리고 건물주와 세입자
내가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일,손
쉬운 양분법도 거기를 지날 때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까지 거기의 문이 열린 모습을
본적이 없다. 분명 이 동네에 거기는 존재하지만
드럼소리와 곡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다.
마루 밑/백상웅
어느 대에서 잃어버렸을 신발 한 짝과 신발을 찾던 쪼개진 장대와 수년 전부터 이어받았을 거미줄과 자루 부러진 삽과 두어 삽 퍼내고 싶은 어둠과 어디서부터인지 시작되는지 모를 바람과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잎사귀가 있다. 옹이 빠진 구멍으로 쏟아지던 빛과 계절마다 색이 다른 먼지의 퇴적층과 그 위에 찍힌 개발자국과 마루 위에서 주저앉아 쏟아졌을 한숨이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를 가족이 초저녁에 막차를 기다리던 마을로 이주했을 때다. 마루 밑에서 들려오는 먹먹한 소리와 처마에 달린 알전구에서 들려오는 소리 사이에 눈이 날렸고 발목까지 쌓이고 나는 뜨거웠다. 그렇게 스물에 마루에 앉아 서른을 기다렸다.
못이 죽었다/백상웅
못에게도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벽 속에 있다
못은 합체를 원한다고 믿었다
나무와 나무, 마차와 바퀴, 벽과 액자, 빨랫줄의 이쪽과 저쪽,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구멍을 만드는 순간,
구멍을 채워버리는 못
상처를 만진적이 없는 못이야 말로
온전한 하나를 만드는 유용한 도구가 아닐까
옷을 거는 데 나는 못을 써왔다
못은 구부러졌다
내 옷만 걸어두는데 휘어버린 못
세우고 세워봐도 옷과 벽의 균형은 금세 무너져내렸다
흘리는 옷을 다시 거는 동안 생각했다
못은 합체를 원하지 않으며,
못의 목적은 쉽게 녹슬지 않는다
나는 못과 못 사이를 건너고 있다
관통하지 못해 한없이 구부러진다
못이 죽었다
이름을 잃은 합체는 슬프다
휴가/백상웅
폭우는 마침표였다.
그저께부터 장마 전선은 섬에 머물렀다. 저녁에는 손바닥으로 장판위에 흩어진 모래를 쓸었다.
눅눅한 베개를 베고 누워 덩어리째 내려앉는 검은 구름을 떠올렸다....
지붕을 두드리다가 빗줄기는 부러졌다.
끝을 맺어도 소란스럽게 가슴을 그었다.
드러난 갯벌에 장대비가 송곳처럼 박혔다. 섬의 모든 길에는 빗물이 흘러 내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방파제 끝으로 등대는 걸어갔다.
더는 삶의 변화가 없을 거였다.
더는 이별을 하기는 싫었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망칠까봐 입을 닫았다.
지겹도록 적막한 인간이 정박했다.
그러나 장마는 북상 중이었다.
냄새의 감정/백상웅
정거장에 서서 방금 스쳐간 냄새를 떠올린다.
잠 못 이룰 때가 있었다.
어느 창문 밑을 지나며 맡은 냄새가
약간 탄 계란찜 냄새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까지
엄마가 가졌던 부엌들
옛 애인의 목도리
나무 밑동을 뒤덮은 이끼
밥 짓는 골목의 구조
장맛비에 방에서 말리는 빨래……
불변의 화학원소가 콧속의 감각 깨우는 이 순간.
이게 누구…… 냄새였더라?
나는 나의 과거 어느 순간,
짙은 농도로 가슴 속에 지문을 찍어놓았을 사랑이라든지
벼락치기 직전 얼룩진 하늘
찌릿찌릿한 나무
우산을 막 삼키는 바람
슬픈 사람처럼 땅을 움켜쥔 뿌리……
버스를 기다리는 이 시간,
평생을 걸쳐 나를 따라오는 물질을 떠올린다.
폐/백상웅
석양에 그림자를 늘리는 건 얼굴 잘려나간 석불이 아니다.
그는 돌부리에서 흩어진 말들을 줍는 사람이다.
죽을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지만 죽는 방도는 아는 사람.
숨 쉴 때마다 폐 속에서 돌밭을 걷는 사람.
자의반타의반으로 멈춘 사람.
나, 나는 그 사람이다. 아니다, 그저 얼굴을 지운 석상이다.
아니다, 버티다가 길게 엎드린 사람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허파 안에서 전등의 스위치를 내린 사람.
바람으로 내뱉은 단어들을 없는 눈동자로 찾는 사람.
어떻게 살았나보다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는 사람.
그건 버티는 게 아니다, 버티는 건 이미 죽은 별빛.
식어가는 어깨를 만진다.
많이 굳었구나.
그는 석불이 아니다, 아직도 긴 숨을 내뱉거나 들이켜고 있는 사람.
언젠가 무거운 폐 한 덩이로만 남을 거다.
무너져 내린 사원은 침묵이 아니다.
폐허는 한 숨으로 차지 않는다.
직선/백상웅
나는 직선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각이 있지 않고 마지막이 있고
끝이 막막해도 계산이 선다.
장대비가, 전봇대가, 자유로가
지난 사랑과
아홉시와 여섯시까지의 시간 같은 게 여기에 속한다.
그것은 커브가 아니고 말줄임표가 아니고 슬픔이 아니다.
생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단칼에 자른 마음이다.
그것은 직진이고 편을 가를 때 쓰고 파울라인이다.
한 번 돌아선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이별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지리멸렬하다가
선을 긋고 화가 나고 차갑고 밤새 생각을 잇는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끝이 있고
고개 숙여 등골 휘는 삶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