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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시 깊이 읽기(25)
류양선(柳陽善)
1. 「지옥(地獄)에서 극락(極樂)을 구하라」
지난 번 『만해 한용운 시 깊이 읽기(24)』에서는, 시 「이별」과 「이별은 미(美)의 창조(創造)」를 다시 읽으면서, 시세계에서 나와 현실 세계로 돌아올 때, 이 두 편의 시에 나타나는 ‘이별의 눈물’이란 다름 아니라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어서 「낙원(樂園)은 가시덤불에서」를 읽으면서, 이 시의 시적 자아가 자연의 거울에 인생을 비추어 보는 깊은 불교적 사유를 통해, 누구나 스스로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선택할 때 그 고난과 시련과 역경이 곧 행복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이런 인생관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만해가 당시의 청년들에게 주는 산문 「조선청년(朝鮮靑年)에게」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 당시의 청년들은 주위의 환경이 역경인 까닭에 그 역경을 이겨내고 낙원을 건설할 만한 좋은 기회를 만난 ‘시대적 행운아’라고 말하는, 실로 만해가 아니면 지니기 어려운 삶의 철학을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또 「기학생(寄學生)」이라는 제목의 한시에서는, 탁하고 성긴 기왓장으로 사는 것은 치욕이니, 맑고 고운 옥으로 부서져 죽는 것이 정녕 아름답다고 충고하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만해의 이러한 인생관 내지 삶의 철학은 언제 어디서 얻어진 것일까요? 그것은 3⸱1운동으로 체포된 이후의 옥중경험에서 배태되어 무르익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만해에게 이러한 삶의 철학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3⸱1운동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자신에 대한 더욱 깊은 성찰과 진리에 대한 더욱 깊은 통찰을 통해 더욱 성숙한 삶의 철학으로 담금질되어 나온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만해가 출옥한 이후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고, 옥중에서 달을 소재로 쓴 시 두 편을 읽으면서, 만해의 이러한 삶의 철학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은 만해가 41세 되던 해였습니다. 만해는 천도교 측의 최린과 상의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남선이 쓴 「조선독립선언서」 말미에 다음과 같은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추가하였습니다.
1.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正義) 인도(人道) 생존(生存) 존영(尊榮)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1. 최후의 일인(一人)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快)히 발표하라.
1.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오인(吾人)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이 ‘공약삼장’은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가 마음에 차지 않아서 만해가 더 써 넣은 것인데, 이로써 「독립선언서」 전체가 참된 진리에 근거하여 적극적 결의를 표명한 것으로 일층 강화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만해의 제자인 김관호는 이 ‘공약삼장’에는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의 정신이 그대로 들어 있다는 말을 만해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합니다.1) 이로 미루어 보면, 만해가 3⸱1운동에 참여한 또 하나의 동기는 역시 불교적 진리를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기실, 만해에게 있어서 불교의 대중화와 민족의 독립운동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거사 당일인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종로의 명월관 지점(태화관)에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 만해는 간단한 식사(式辭)를 하고 ‘대한독립만세’을 외치는 만세삼창을 선창(先唱)하였습니다. 만해는 거사 직후 일경에 체포되어 마포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됩니다. 이런 정황에 대해 김광식 교수는 “마땅히 가야 할 곳이었다. 3⸱1운동 민족대표로서의 자부심으로 그는 형무소의 중심에 정좌하고 앉았다. 이제 그곳이 만해의 또 다른 수행의 자리였다.”2) 하고 말합니다.
만해는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2월 2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습니다. 출옥한 다음 날, 『동아일보』에는 「지옥(地獄)에서 극락(極樂)을 구하라 - 한용운씨 옥중감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출옥회견기(出獄會見記)가 실렸습니다.
이십이 일 오후에 경성 감옥에서 가출옥한 조선 불교계에 명성이 높은 한용운(韓龍雲)씨를 가회동(嘉會洞)으로 방문한즉 씨는 수척한 얼굴에 침착한 빛을 띄우고 말하되, “내가 옥중에서 느낀 것은 고통 속에서 쾌락을 얻고 지옥 속에서 천당을 구하라는 말이올시다. 내가 경전으로는 여러 번 그러한 말을 보았으나 실상 몸으로 당하기는 처음인데 다른 사람은 어떠하였는지 모르나 나는 그 속에서도 쾌락으로 지냈습니다. 세상 사람은 고통을 무서워하여 구차로이 피하고자 하기 때문에 비루한 데 떨어지고 불미한 이름을 듣게 되나니 한 번 엄숙한 인생관 아래에 고통의 칼날을 밟는 곳에 쾌락이 거기 있고 지옥을 향하여 들어간 후에는 그곳을 천당으로 알 수 있으니 우리의 생각은 더욱 위대하고 더욱 고상하게 가져야 하겠다”고 씨는 일류의 철학적 인생관을 말하여 흐르는 물과 같으므로 다시 말머리를 돌리어 장래는 어찌 하려느냐 물은즉 “역시 조선 불교를 위하여 일할 터이나 자세한 생각은 말할 수 없다”고 하더라3)
“지옥 속에서 천당을 구하라!” 참으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철학입니다. 만해는 이런 말을 경전으로는 여러 번 보았으나 “실상 몸으로 당하기는 처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의 참뜻을 깊이 터득한 것은 경전 읽기가 아닌 옥중 체험을 통해서였다는 것이지요. 위에서 김광식 교수가 말한 바, 형무소의 감방이 곧 ‘수행의 자리’였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입니다. 한 번 이렇게 ‘엄숙한 인생관’을 갖게 되면, “고통의 칼날을 밟는 곳에 쾌락이 거기 있고 지옥을 향하여 들어간 후에는 그곳을 천당으로 알 수 있”다고 만해 스스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은 문득 만해의 「오도송(悟道頌)」을 연상시키는 바 있습니다. 언젠가 이미 언급했듯이, 만해는 1917년 12월 3일 밤 10시 경 오세암에서 좌선 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물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심하던 마음이 깨끗이 풀려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 사나이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인 걸 /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 나그네 설움에 잠긴 이 얼마나 많은가 / 일성할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 한 소리 크게 질러 온 우주를 깨뜨리니 / 설리도화편편비(雪裏桃花片片飛) - 눈보라 속 복사꽃이 조각조각 날리네” 하는 저 유명한 오도송(悟道頌)을 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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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광식, 『우리가 만난 한용운』(참글세상, 2010), pp.200~201.
2) 김광식, 『한용운 평전』(장승, 2007), p.113.
3) 「지옥(地獄)에서 극락(極樂)을 구하라 - 한용운씨 옥중감상」, 『동아일보』, 192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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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미 깨달음을 얻기는 했었지만, 가는 곳 어디나 고향임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눈보라 속에서 복사꽃을 보는 경지를 실제로 겪어 보기는 3년에 걸친 옥중 생활에서였다고 만해는 위의 출옥회견기에서 말하는 듯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떠하였는지 모르나 나는 그 속에서도 쾌락으로 지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한 번 엄숙한 인생관 아래에 고통의 칼날을 밟는 곳에 쾌락이 거기 있고 지옥을 향하여 들어간 후에는 그곳을 천당으로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가히, 철창 속의 체험을 통해 앞서의 깨달음을 온몸으로 터득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할 것입니다. 만해의 인생관 내지 삶의 철학은 이렇듯이 옥중의 체험을 통해 더욱 굳건히 형성되어 갔던 것입니다.
2. ‘철창철학(鐵窓哲學)’
만해는 이러한 삶의 철학을 스스로 ‘철창철학(鐵窓哲學)’이라고 불렀습니다. ‘철창철학(鐵窓哲學)’이라니! 다름 아니라 바로 철창(鐵窓) 안에 갇힌 채로 감옥에서 얻어낸 삶의 철학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면 이제, 만해가 출옥한 이후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고, 이어서 옥중에서 쓴 시를 읽으면서 만해의 ‘철창철학(鐵窓哲學)’이 어떤 내용의 것인지, 또 그러한 삶의 철학이 어떻게 무르익어 갔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만해는 출옥 뒤에, 위의 출옥회견기에서 말한 대로 불교의 유신을 위한 개혁운동을 시작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만해의 불교개혁운동은 곧바로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과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불교개혁운동과 조국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만해는 전국 각지를 순방하면서 강연 활동을 벌이는 바, 그 강연들 중에 ‘철창철학(鐵窓哲學)’이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었으니, 이는 위의 출옥회견기와 관련하여 크게 주목되는 대목입니다. 만해의 제자인 최범술은 만해의 이 강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기미년 독립선언서 발표 후에 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옥고를 겪고 나온 약 1개월을 전후하여, 조선불교청년회의 주최로 Y.M.C.A. 회관에서 출감 최초의 강연회가 열렸던 것인데, 이에 대한 연사는 만해 선생 한 분이었던 것이다. 그때의 연제로서는 ‘철창철학(鐵窓哲學)’이었던 것이며, 청중은 회장(會場)에 초만원일 뿐만 아니라 장외에도 인해를 이루었던 성황이었다. 일제 경관의 임검으로 온 자는 유명한 삼륜이라는 자였다. 이때의 연설에 있어, 그자들의 인상에 소위 그네들이 불온한 사상적인 말이라면 해산 명령은 물론이요, 현장에서 연사의 포박까지 하여 가는 실로 삼엄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선생은 종횡무진으로 전 청중을 감명케 하였으며, 약 2시간 동안의 연설을 하였다. 이 유명한 연설의 맨 마지막의 말로써 기억되는 얘기는,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이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 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의 흐르는 물이 촉석루 먼지는 씻어 가도 의암(義岩)에 서리어 있는 논개의 이름은 못 씻는다는 말로써 마쳤을 때 온 장내가 떠나갈 듯이 박수 소리는 계속되었고,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일경까지도 박수를 하였던 것이다.
이 ‘철창철학’의 강연이 있은 수개월 후에 천도교 기념관에서, 전 조선학생 대회 주최로 종교 강연이 개최되었던 것인데, 그때의 연사로서는 천도교 측의 최린 씨, 기독교 측의 김필수 목사였던 것이며, 불교 측에서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었던 것이다. 제일 먼저 최린 씨가 연설한 후에 만해 선생이 ‘육바라밀’이라는 제목으로 장광설을 하였던 바, 청중의 열광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측의 김필수 목사는 연설을 사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만해 선생이 이 연설을 마치고 단에서 물러나올 무렵에 손으로 원을 그리고, 주먹으로 그가 공중에다 그린 원에 한 점을 찍으며 하단하였던 것인데 이 신륜(身輪)으로부터 받은 대중의 인상은 자못 놀라운 것이었다.4)
최범술의 이 회고를 읽어보면, 만해의 통쾌한 연설 광경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합니다. 감옥에서 나온 약 한 달 뒤에, 조선불교청년회의 주최로 Y.M.C.A. 회관에서 만해 혼자 ‘철창철학(鐵窓哲學)’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고 하는데, 이 연설의 제목만 들어도 참으로 깊은 인상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이 연설은 앞에서 본대로 만해가 출옥회견기에서 말한 바, ‘위대하고 고상한’ 철학적 인생관을 그대로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 조선불교청년회 주최의 이 강연회의 연사가 만해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그리고 앞에서 읽어본 만해의 출옥회견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철창철학’이라는 강연의 제목은 만해 자신이 그렇게 정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또, 연설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연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선죽교의 피’와 ‘논개의 이름’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 그 연설의 성격을 능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이 선죽교에 어린 포은(圃隱)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이 의암에 서린 논개(論介)의 이름은 씻어갈 수 없다는 말은 곧 포은과 논개의 의로운 정신이 민족의 역사 속에 언제까지나 살아 있다는 뜻이겠지요.
이것은 또한, 당시 일제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얼은 영원무궁하리라는 것, 그런 까닭에 언젠가는 반드시 자주독립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회장(會場)에 초만원일 뿐만 아니라 장외에도 인해를 이루었던” 청중은 누구나 이렇게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만해가 말했듯 일제 치하에서는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5)이지만, 그 감옥에서 오히려 희망을 잃지 않고 분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고통 속에서 쾌락을 얻고 지옥 속에서 천당을 구하”는 ‘철창철학’인 것입니다.
다음, 이 강연이 있은 뒤 다시 수개월 뒤에 천도교 기념관에서 개최된 종교 강연에서는 천도교 측의 최린의 연설에 뒤이어 불교 측에서는 만해가 ‘육바라밀’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고 최범술을 전합니다. 만해의 장광설에 청중의 열광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측에서는 아예 연설을 사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종교 강연에서 만해는 불교적 진리로 나아가는 길을 열정적으로 토로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 즉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가 바로 그 진리로 나아가는 여섯 가지 수행의 길이 아닙니까?
최범술은 또, 만해가 연설을 마치면서 “손으로 원을 그리고, 주먹으로 그가 공중에다 그린 원에 한 점을 찍으며 하단하였”다고 전합니다. 만해의 이런 몸짓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편찬 해설한 『선가귀감(禪家龜鑑)』에는,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 종본이래(從本以來) 소소영영(昭昭靈靈) 부증생(不曾生) 부증멸(不曾滅) 명부득(名不得) 상부득(狀不得) -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서, 일찍이 나지도 죽지도 않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라는 원문에 대한 해의(解義)에서, “일물자하물(一物者何物)〇고인송운(古人頌云)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 응연일원상(凝然一圓相) 석가유미회(釋迦猶未會) 가섭기능전(迦葉豈能傳) -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〇옛 사람이 게송으로 말하되, 옛 부처님 나기 전에 / 뚜렷이 밝은 둥근 모습 / 석가도 오히려 몰랐거니 / 가섭이 어찌 전할쏘냐?”6)라고 쓰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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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범술, 「철창철학(鐵窓哲學) - 만해 선생으로부터 듣고 본 것 중에서」, 『나라사랑』 제2집(1971. 4), pp.88~89.
5) 김관호 편, 「만해가 남긴 일화」, 『증보 한용운전집 6』(신구문화사, 1980), p.379.
6) 서산대사 저, 서재하 역, 『선가귀감(禪家龜鑑)』(보련각, 1978), p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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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서산대사는 “일물자하물(一物者何物) -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다음에, 위에서 보다시피 동그라미(〇) 하나를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이 동그라미는 자성(自性)이라 해도 좋고 본성(本性)이라 해도 좋은 우리네 마음 바탕,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텅 빈 마음자리, 삼라만상을 아무런 편견도 선입견도 없이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그 마음자리를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게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 그림(동그라미)도 정확이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도 없기에, 하는 수 없이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 넣은 것일 테지요.
또, 전등록 제8권에는 경조(京兆) 초당(草堂) 화상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해창(海昌) 화상이 초당 화상에게 묻기를 “어디서 왔는가?” 하니, 초당이 “도량(道場)에서 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해창이 다시 “그곳이 어디인가?” 하고 물으니, 초당은 “도적은 가난한 집을 털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해창이 또 다시 “한 법이 아직 있지 않을 때 이 몸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물으니, 초당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다 신(身)자를 썼다는7) 것입니다. 대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당초에 초당의 몸이 ‘가난한 집’에서, 즉 텅 비었으면서도 소소영영한 그 자리에서 나왔다는 그런 뜻이겠지요. 나아가, 한 법이 아직 있지 않을 때, 동그라미 자체가 즉 소소영영한 그것이 바로 이 몸이라는 그런 뜻일 것입니다.
만해가 ‘육바라밀’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마치면서 손으로 원을 그린 것은 아마도 본래부터 밝고 신령스러운 한 물건을 표현한 것일 테지요. 그러면 그렇게 원을 그리고, “주먹으로 그가 공중에다 그린 원에 한 점을 찍”은 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마음 바탕에 점을 찍은 것, 바로 진리를 꿰뚫어 터득하는 그 순간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겠지요. 반야심경의 표현을 빌리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 오온(五蘊) 즉 색(色) 수(收) 상(想) 행(行) 식(識)이 모두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보고,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 모든 고액을 건너뛰는” 바로 그 순간의 표현일 것입니다. 연설 제목인 ‘육바라밀’이 바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을 위한 수행이니까요.
만해가 공중에다 손으로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주먹으로 한 점을 찍은 것은 또한, 초당이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다 신(身)자를 쓴 것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즉 소소영영한 그 무엇이 바로 ‘진아(眞我 - 참나)’라는 것, 만해의 말을 빌리면 시간을 초월한 무한아(無限我)요 공간을 초월한 절대아(絶對我)라는8) 그런 뜻이겠지요. 그 ‘참나’를 찾음으로써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집합체인 가아(假我)를 두고 ‘나’라고 하는 그런 아집(我執)에서 벗어나는 것이겠지요. 아니 ‘나’ 자신 즉 자아(自我) 그 자체를 흔적도 없이 산산이 부수어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것일 테지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나’를 부수어 버려야만 소소영영한 한 물건이 되어 아무 걸림도 두려움도 없이 무슨 일이든 당당하게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해가 큰 동그라미 안에 주먹으로 점을 찍은 것은 바로 지금 여기서 가아(假我 - 거짓의 나)가 아닌 진아(眞我 - 참나)가 되어 아무 거칠 것 없이 무슨 일이든 의로운 일을 시작하라는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만해의 이러한 연설은 청중들에게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은근하면서도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범술은 만해의 이런 몸짓을 ‘신륜(身輪)’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신륜(身輪)은 부처님이 중생 제도를 위해 몸을 불가사의하게 변화시키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만해의 이런 신륜(身輪) 즉 몸짓으로 보이는 법륜(法輪) 굴리기, 그러니까 온몸으로 하는 설법(說法)을 청중들은 어떻게 알아들었을까요? 아마도 만해는 그 특유의 웅변으로 매우 설득력 있는 설법을 했을 것입니다. 최범술도 만해의 연설을 ‘장광설(長廣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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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월운 옮김, 『전등록(傳燈錄) 1』(동국역경원, 2016), pp.531~532.
8) 「선(禪)과 자아(自我)」, 『증보 한용운전집 2』(신구문화사, 1980),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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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광설에는 당연히 불교적 진리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당시의 민족현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만해의 ‘철창철학’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만해는 틀림없이, 낙원은 가시덤불에서 온다고, 지옥에서 극락을 구하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니, 청중들이 만해의 설법을 온전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만해의 웅변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무언가 모르게 깊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해의 연설 끝에, 그러니까 청중들의 감동 끝에 만해가 신륜을 굴리자, “이 신륜(身輪)으로부터 받은 대중의 인상은 자못 놀라운 것이었다.”라고 최범술은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해는 1930년대 중반 이후에, 다시금 ‘철창철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 일이 있습니다. 1937년 무렵에 통도사를 방문하여 학인(學人)들에게 강연한 것인데, 당시 통도사 학인이었던 화산(華山)의 증언을 취재한 신문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스님은 뜻밖에 통도사에서 만해 스님을 만난 ‘단 며칠’간의 인연이 평생을 스님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했다. 만해 스님이 옥고를 치르고 난 뒤 통도사를 방문했다. 화산 스님은 당시 통도사 강원을 다니는 학인이었다. 만해 스님은 통도사에서 강연했다. ‘기피 인물’ 만해 스님을 모시는 사찰이 거의 없을 때였다. 스님들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까지 만해 스님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만해 스님은 모인 청중을 향해 ‘철창철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화산 스님은 바로 엊그제같이 기억이 생생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중략---) 화산 스님은 “강연을 듣고 모두 떠날 줄 모르고 울었다.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모두 꿈으로 돌아갔다”고 회고했다. 화산 스님은 또 “일제에 의해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혀 볼 수 없었던 『님의 침묵』을 통도사 뒤란 탁자에서 베끼던 일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며칠간 통도사에서 머물던 만해 스님이 다시 길을 떠났다. 화산 스님은 강원 도반들과 함께 스님을 배웅했다. 가는 길에 큰 바위 위에 새긴 글을 보며 화산 스님이 말했다. “스님도 돌에다 이름을 새기시지요.” 그러자 만해 스님은 “저 돌 위에 새기면 오가는 사람들 입에나 오르내리지. 새기려면 뭐하러 바위에 새겨. 삼천만 국민들 가슴 속에 새겨야지.” 화산 스님은 그 짧은 인연이 평생의 가르침이 될지 몰랐다.9)
이 인용에서 보듯, 만해는 통도사에서도 ‘철창철학(鐵窓哲學)’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던 것입니다. 만해는 당시 전국의 사찰들이 일제의 탄압을 우려하여 강연을 해 달라고 초청할 수 없을 정도로 ‘기피 인물’이 되어 있을 때였지요. 그럼에도 통도사에서 강연을 하게 된 것은 당시에 경봉이 통도사 주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해가 일찍이 1913년 통도사 강원의 강사로 부임하였을 때, 강원에 재학 중이었던 경봉은 만해에게서 화엄경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런 시제간의 인연으로, 경봉이 통도사 주지가 되자 학인들의 정신교육을 위해 만해를 강사로 초청했던 것입니다.10)
그런데 화산은 “만해 스님이 옥고를 치르고 난 뒤 통도사를 방문했다.”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해가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당시 비밀리에 활동하던 ‘만당(卍黨)’을 지도하다가 일제에 검속되어 고생했던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당(卍黨)’은 만해를 따르던 불교 청년들이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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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불교신문』 2006. 12. 2. 김광식, 『만해 한용운의 기억과 계승』(인북스, 2022), p.139에서 재인용.
10) 위의 책, pp.137~13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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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가 작성한 「한용운 해적이(年譜)」를 보면, 1937년에 “자신을 따르던 후배 동지들이 조직한 불교 계통의 민족독립투쟁의 비밀 지하단체 ‘만당(卍黨)’이 왜경에 피검,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자 이 ‘만당(卍黨)’의 길잡이 역할을 하던 자신도 왜경의 시달림을 받다.”11)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만당(卍黨)’의 당원들은 모두 6차에 걸쳐 검거되었다고 합니다. 제1차 검거는 진주(晋州)에서, 제2차 검거는 사천(泗川)에서, 제3차 검거는 해인사(海印寺)에서, 제4차 검거는 해남(海南)에서, 제5차 검거는 서울에서, 제6차 검거는 통도사(通道寺)에서 있었다고 합니다.12) 이것만 보더라도,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만당(卍黨)’의 활동과 그에 대한 일제의 탄압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위의 화산의 증언을 보면, 만해의 강연은 청중에게 참으로 대단한 감동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스님들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까지 만해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고, 강연을 듣고는 모두 떠날 줄 모르고 울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화산은 또, “일제에 의해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혀 볼 수 없었던 『님의 침묵』을 통도사 뒤란 탁자에서 베끼던 일이 생생하다”고 기억합니다. 언젠가 전에 설산(雪山)이 건봉사에서 『님의 침묵』을 옮겨 적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거니와, 젊은이들에 대한 만해의 영향력은 이토록 컸던 것입니다. 만해가 통도사를 떠날 때 배웅하면서 화산이 들은 바, 이름을 “새기려면 뭐하러 바위에 새겨. 삼천만 국민들 가슴 속에 새겨야지.” 하는 만해의 말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지금까지 만해가 강연을 통해 자신의 ‘철창철학’을 풀어냈던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비단 강연뿐이겠습니까? 만해의 시와 산문 그리고 만해의 모든 활동은 다름 아니라 그의 ‘철창철학’을 동포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해 자신이 바로 그 ‘철창철학’을 철저하게 실천해 나아간, 그런 올곧은 삶으로 일관하는 한 평생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해가 화산에게 말했던 것처럼, 만해의 이름은 오늘날 우리의 가슴 속에까지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3. 「무궁화(無窮花) 심으과저」
지금까지 만해의 강연을 통해 만해가 옥중에서 터득한 ‘철창철학’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만해의 ‘철창철학’이 근원적으로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하고 있는 시 「무궁화(無窮花) 심으과저」와, 그러한 ‘철창철학’을 배태하는 순간을 포착한 한시 「옥중감회(獄中感懷)」를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3⸱1운동으로 투옥된 만해는 옥중에서 참고서적 한 권 없이 저 유명한 「조선독립(朝鮮獨立)의 서(書)」를 집필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를 썼습니다. 출옥 이후, 『개벽』 27호(1922. 9)에 발표한 시 「무궁화(無窮花) 심으과저」에는 ‘옥중시(獄中詩)’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독립(朝鮮獨立)의 서(書)」가 당시 만해의 민족정신과 평등사상을 보여준 글이라면, 「무궁화(無窮花) 심으과저」는 그 정신과 사상이 깃든 깊은 마음자리를 드러낸 작품이라 하겠지요. 즉 이 시야말로 만해의 ‘철창철학’이 그윽하게 담겨 있는 작품인 것입니다. 이 시는 언젠가 잠깐 읽어본 일이 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상세히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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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종해 작성 최범술 감수, 「한용운 해적이(年譜)」, 『나라사랑』(1971. 4)), p.21.
12) 인권환 박노준, 『한용운 연구』(통문관, 1960), pp.375~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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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 달아 밝은 달아 옛나라에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마음 비춘 달아 계수(桂樹)나무 베어내고 무궁화(無窮花)를 심으과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님의 거울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품에 안긴 달아 이지러짐 있을 때에 사랑으로 도우과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가이없이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넋을 쏘는 달아 구름재(嶺)를 넘어가서 너의 빛을 따르과저13)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달’의 상징적 의미와 그 ‘달’이 비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달은 진리의 상징으로, 달이 비추는 것은 진리의 현현(顯現)으로 자주 설명되어 왔습니다.
1459년 세조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의 합본인 『월인석보(月印釋譜)』를 편찬합니다. 그 『월인석보(月印釋譜)』의 본문 초두를 보면, 「월인천강지곡 제일(月印千江之曲第一)」이라는 제목 아래 “부톄 백억세계(百億世界)예 화신(化身)ᄒᆞ야 교화(敎化)ᄒᆞ샤미 ᄃᆞ리 즈믄 ᄀᆞᄅᆞ매 비취요미 ᄀᆞᆮᄒᆞ니라.” 즉 “부처께서 백억세계에 화신으로 나투시어 교화하심이 달이 천 강에 비치는 것과 같으십니다.”14)라고 쓰여 있는 바, 이는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이 무수한 세계에 화신(化身)으로 나타남을 말한 것이면서, 또한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님의 모습을 달이 천강(千江)에 비추는 것으로 비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근대에 이르러 불경의 한글 번역으로 유명한 탄허(呑虛)는 삼신불(三身佛)을 달에 비유하여 천상의 달은 하나지만 무수한 물그릇에 무수한 달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물그릇에 비친 달의 영상이 화신(化身)이라면 우주에 가득 찬 달의 광명은 보신(報身)이요, 천상에 본래 있는 달은 법신(法身)”15)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듯,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신(法身 - 천상의 달)이 이 세상에 화신(化身)으로 나투어 온 것이면서, 동시에 싯다르타가 달빛을 받아 안아서 화신(化身)이 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중생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을 터인데,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이런 마음으로 광명(光明 - 달빛)을 받고 있는 ‘나’에 대해, 그것도 영어(囹圄)의 몸으로 달빛을 받아 안은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만해의 옥중시(獄中詩) 「무궁화(無窮花) 심으과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궁화(無窮花) 심으과저’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이 시는 일단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는 그런 의미와 함께, 또한 그것을 넘어서는 만만치 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만해가 이 시를 옥중에서 쇠창 사이로 보이는 달을 소재로 하여 썼다는 점과 관련됩니다. 그러기에 이 시가 품고 있는 깊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달’의 상징적 의미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앞에서 언급했듯, 이 시에서 하늘에 떠 있는 ‘달’은 불멸의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디든 닿지 않는 곳이 없이 삼라만상을 두루 비추는 ‘달빛’은 광명 그 자체 즉 보신(報身)을 상징하는 것이 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달빛은 감옥의 쇠창까지 넘어 들어와 영어의 몸이 된 시인의 마음을 비추고 시인의 품에 안기고 시인의 넋을 쏘기까지 합니다. 시인이라는 물그릇에 담긴 달의 영상에 시인은 자신을 일치시켜 화신(化身)이 되고자 하는 염원을 갖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시인은 진리와 하나 되어 어디까지나 진리의 길을 올곧게 걷고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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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개벽』, 27호(1922. 9), p.12.
14) 정진원,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조계종출판사, 2019), pp.95~96.
15) 탄허(呑虛), 『부처님이 계신다면』(교림, 2005), p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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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이러한 달의 상징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제1연부터 차례로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옛나라에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마음 비춘 달아 계수(桂樹)나무 베어내고 무궁화(無窮花)를 심으과저
옥중에서 쇠창 사이로 보이는 달은 시인의 옛 나라를 비추던 달입니다. 지금 그 옛 나라는 망하고 없지만, 달은 여전히 맑게 떠 있습니다. 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여여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옛 나라 대신 그 옛 나라를 비추던 달(진리, 민족의 얼)이 시인을 찾아와서 시인의 마음을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달은 곧 시인의 마음이 되고, 시인의 마음은 곧 달이 됩니다. 또 이렇게 해서 시인은 달빛을 타고 달이 비추던 조국(‘옛 나라’)으로 달려갑니다.
이제, 시인은 달 속의 계수(桂樹)나무를 베어 내고 무궁화(無窮花)를 심고자 합니다. 무궁화가 달 속에 있다면 조국은 언제나 진리의 품에 안겨 있을 것이고, 그렇게 진리의 품에 안겨 있는 이상 언젠가는 틀림없이 독립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시인이 이처럼 달 속에 무궁화를 심고자 하는 것은 조국 독립의 씨앗을 심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씨앗을 심은 이상 그것을 잘 가꾸어 내기만 한다면, 무궁화가 활짝 피는 것은 다만 시간문제일 따름이지요. 그렇다면 진리의 실현으로서의 조국의 독립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님의 거울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품에 안긴 달아 이지러짐 있을 때에 사랑으로 도우과저
삼라만상을 두루 비추는 달은 ‘님’의 거울을 비춘 달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달빛에는 님의 모습이 어려 있습니다. 그 달빛이 감옥의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품에 안겼으니, ‘님’은 지금 ‘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님’은 일제의 압박에 신음하는 동포들을 뜻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시인은 지금 ‘님’의 거울을 비춘 달을 안고 있기에, 진리 안에서 동포들을 껴안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이제, 달에게 이지러짐이 있을 때 사랑으로 돕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달의 이지러짐이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의 피폐하고 타락한 현실 속에서 진리가 왜곡되고 상실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시인은 진리의 온전한 모습을 다시 세우기 위해 일편단심으로 정성껏 노력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동포들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사랑으로 그들을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달아 달아 밝은 달아 가이없이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넋을 쏘는 달아 구름재(嶺)를 넘어가서 너의 빛을 따르과저
무한한 공간을 끝없이 비추는 달은 쇠창을 넘어와서 마침내 시인의 넋을 쏩니다. 먼저, “쇠창을 넘어와서”라는 구절이 제1연에서 제3연까지 세 번이나 거듭하여 반복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반복은 제아무리 폭력적인 일제 권력이라 할지라도 진리 그 자체를 가두어 둘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일제가 시인을 세상과 격리시켜 옥중에 가두어 놓았지만, 시인을 진리의 빛에서 차단시킬 수는 없다는 점을 달빛을 빌려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앞에서 만해가 출옥 이후에 ‘철창철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것에 대해 살펴보았거니와, 바로 그 ‘철창철학’의 연원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인은 이제, 이처럼 쇠창을 넘어온 달빛이 자신의 ‘넋’을 쏜다고 말합니다. 이는 시인의 앞으로의 행로와 관련하여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의 넋을 쏘는 달아” 하는 놀라운 구절은 만해의 대표시라 할 수 있는 시 「님의 침묵(沈黙)」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첫 키쓰”라는 결정적인 표현을 연상시킵니다. 달빛 즉 진리의 빛에 ‘넋’을 쏘였으니, 달리 말해 님(진리)과 날카로운 ‘첫 키쓰’를 하였으니, 시인은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진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진리와 함께하는 것은 이제, 시인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높은 고개 넘어 저쪽으로 달이 기울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시인 역시 그 험난한 구름 고개를 넘어가서 기어이 진리의 빛을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만해의 옥중시 「무궁화(無窮花) 심으과저」를 제1연에서 제3연까지 차례로 읽어보았거니와, 이렇게 읽고 보니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 시가 아주 치밀한 구조로 짜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는 단순히 쇠창을 넘어오는 달빛을 통해 진리 그 자체와의 만남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옥중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시는 영어의 몸이 된 시인과 감옥 밖의 세계 즉 이 세상과의 만남을 그 기본 뼈대로 하고 있는 작품인 것입니다. 시인은 홀로 격리되어 있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쇠창 사이로 넘어온 달빛을 매개로 하여 시인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대상들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은 제1연에서는 ‘옛 나라’라는 시어를 통해, 제2연에서는 ‘님의 거울’이라는 시어를 통해, 제3연에서는 ‘가이없이’라는 시어를 통해 암시됩니다. 제1연에서는 조국(‘옛 나라’)과 시인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때의 시인의 마음이란 조국 독립의 씨앗을 뿌리려는 마음입니다. 제2연에서는 동포들(‘님의 거울’)과 시인의 품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때의 시인의 품이란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는 동포들을 껴안아 주려는 사랑의 품입니다. 그리고 제3연에서는 온 누리(‘가이없이’)와 시인의 넋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때의 시인의 넋이란 진리를 따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넋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시는 민족의 어두운 현실을 불교적 사유로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 불교적 사유 속에 민족의 현실을 녹여내면서 새 희망을 찾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민족의 현실은 어둠 속에 잠겨 있으나, 그 어둠 속에는 이미 밝은 달빛이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달빛을 보고 그 달빛을 안고 그 달빛에 쏘여서 그 달빛을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인은 진리(달)와 하나가 되었기에, 옥중에 갇혀 있는 것이 아무런 걸림도 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무애자재(無碍自在)하여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것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특히, “구름재(嶺)를 넘어가서 너의 빛을 따르과저” 하는 이 시의 마지막 문장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구름재’란 시대적 어둠이 짙게 덮인 고갯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1운동을 일으킨 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니, 시인은 그가 「독립선언서」에 추가한 ‘공약삼장’의 말대로 “최후의 일각까지” 그 어둠을 헤치면서 험난한 고갯길을 넘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만해는 1944년 6월 열반에 들기까지 시대적 어둠에 굴복하거나 거기서 도피하지 않고 새 시대의 광명을 향해 올곧게 나아갔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 ‘구름재’는 시인 자신의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온갖 근심 걱정과 헛된 알음알이로 인한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뜻하는 것이지요. 진리에의 접근을 방해하는 이러한 내면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오직 달빛을 따라 광명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니, 이렇게 말하는 순간 시인은 이미 대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서 언급한 출옥회견기에서 만해가 옥중에서도 쾌락으로 지냈다고 하는 것은 그저 공연한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시인에게 다가오는 진리의 모습이 “나의 마음 비춘 달”에서 “나의 품에 안길 달”로, 그리고 다시 “나의 넋을 쏘는 달”로 변주되어 간 것이 바로 이 점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옥중시(獄中詩) 「무궁화(無窮花) 심으과저」를 읽으면서, 만해의 ‘철창철학’이 어떻게 형성되기 시작했는지 그 원천을 살펴본 셈입니다. 글이 길어진 탓에, 달을 소재로 한 또 하나의 옥중시인 「옥중감회(獄中感懷)」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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