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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전투기 보내달라” 6월26일 새벽 3시, 잠든 맥아더를 깨웠다
⑧ 6·25 전쟁과 초기 대응
조선일보
복거일 소설가
입력 2023.10.04. 03:00업데이트 2023.10.04. 07:16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10/04/27F564PNPFE25DRZF3375N5V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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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에게 훈장 수여하는 이승만 - 6·25 전쟁 당시인 1950년 9월 29일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약 2주일 지난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탈환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군이 누린 우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시작되기도 전에 결판이 난 전쟁이라고 북한 지도자들은 믿었다. 김일성은 미국의 개입을 걱정하는 스탈린에게 “미군이 조선반도에 상륙하기 전에 남조선을 다 점령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전면 침공 보고를 받은 것은 6월 25일 10시였다. 이후 엇갈리는 보고들이 올라오는 상황에서도 그는 두루 살피고 멀리 내다보면서 과감하게 대응했다.
먼저, 그는 존 무초 미국 대사와 상황에 대한 의견을 공유했다. 무초는 11시 35분에 경무대로 들어왔다. 이 대통령은 당장 필요한 무기들과 탄약들을 요청했다. 절실한 무기들은 105밀리 곡사포 90문, 박격포 700문, 그리고 소총 4만 정이었다. 경무대에서 나오자, 무초는 곧바로 맥아더 원수에게 필요한 무기들과 탄약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北 공습에 속수무책, 경무대까지 위험
무초와의 협의가 끝나자, 이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그 사이에 그는 주미 대사관에 전화해서 활동 지침을 주었다. 장면(張勉) 주미 대사는 곧바로 국무부를 찾아 지원을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당장 필요한 무기가 전투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군의 침공은 육해공군이 동원된 입체적 작전이었다. 러시아군의 최신형 전차를 앞세운 육군의 공격은 아군을 압도했지만, 진출에 시간이 걸렸다. 해군의 상륙 작전은 아군의 분전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공군의 공습엔 아군이 대항할 길이 없었다. 후방인 서울 일대가, 심지어 경무대까지도, 북한의 공습에 노출되었다. 북한군의 공습은 미군의 파병을 막기 위해서 김포 비행장의 파괴에 집중되었다.
26일 이른 새벽에 이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관은 원수가 자고 있어서 받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새벽 세 시에 전화가 걸려왔으니, 그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 다급하고 남한의 방위에 관심이 없었던 미국 정부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던 터라, 이 대통령은 그 대답에 폭발했다. “좋소.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들이 하나씩 죽어갈 터이니, 원수가 잘 주무시도록 하시오.” 이 말은 ‘미국 시민들을 하나씩 처형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일기에서 “나는 너무나 놀라 수화기를 가로막았다”고 쓴 것을 보면, 그녀도 그렇게 들은 듯하다.
그의 노성(怒聲)에 놀란 부관이 맥아더를 깨우자, 그는 맥아더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맥아더는 곧 전투기들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오전 미군 극동군 사령부의 참모가 수원 기지를 찾아서 상황을 점검했다. 그는 김정렬 공군 참모총장에게 물었다. “한국군 조종사들 가운데 F-51(머스탱) 전투기를 별다른 훈련 없이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잠시 생각한 뒤, 김 총장은 “열 명은 됩니다”고 답했다. 그 참모는 “그러면 10대를 지원할 터이니, 그 조종사들이 수원 기지에서 대기하도록 해주십시오. 내일 수송기를 보내겠습니다.”
전황 브리핑 받는 이승만과 정부 요인들 - 6·25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정부가 옮겨간 피란지 부산에서 전황 브리핑을 받고 있는 정부 요인들. 앞줄 왼쪽부터 이승만 대통령, 신익희 국회의장, 장면 주미 대사, 무초 주한 미국 대사.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그렇게 해서, 이근석 대령을 비롯한 10명의 경험 많은 조종사들이 일본에 파견되어 훈련을 받았다. 7월 2일 이들이 조종하는 전투기 10대가 수원 기지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바로 북한군과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대통령은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부 장관에게 “군사 지식을 갖춘 유능한 사람들 몇 명에게 자문을 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자문 회의에서 김홍일 소장이 한강에 방어선을 칠 것을 제안했다. 결국 이 방안이 채택되어 북한군의 남하를 막아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
이 대통령은 상황이 위급해질 때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일을 처리했다. 자칫하면 경무대가 피습될 수 있다는 보좌진의 판단을 따라, 그는 27일 새벽 3시에 경무대를 나왔다. 북한군 전차 부대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고 경찰이 보고한 시각이었다. 차량과 기관사를 수배하느라 시간이 걸려서, 경무대 요원들이 탄 기차는 4시에야 서울역을 떠났다. 그리고 대전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대통령이 하지 않은 일들을 살펴야 한다. 부족하고 혼란스러운 정보들에 의존해서 중대한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선 어떤 인물이 고르지 않은 선택들도 그의 됨됨이와 판단력에 대해 말해준다. 무초 대사와 처음 만나 상의했을 때, 이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그러나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다. 미군이 참전한 7월 8일에야 비로소 선포했다. 그렇게 늦춘 이유는, 계엄령을 선포하면, 북한군과의 싸움에 모든 자원을 투입한 국군에 계엄 업무가 추가된다는 사정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이 하지 않은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에 항복하지 않은 것이었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난 6월 25일 늦은 밤이 그에겐 고뇌의 시간이었다. 침공한 북한군과 싸워야 하는데, 우리는 싸울 힘이 없었다.
정치 지도자로서 그는 항복을 고려해야 했다. 어차피 지는 전쟁이라면, 빨리 항복해서 피해를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가 조기 항복을 고려 대상에서 처음부터 제외하지 않았음은, 그래서 깊은 고뇌의 시간을 가졌음은, 그의 전기에 생생하게 기술되었다.
전기에 기록된 25일 밤 이승만의 고뇌
서울의 무초 대사도 도쿄의 맥아더 장군도 이 대통령에게 미국의 지원에 관해 확언을 해줄 수 없었으니, 그런 결정은 24시간가량 지난 뒤에야 비로소 워싱턴에서 나왔다. 반면에, 이 대통령은 체코슬로바키아 내전 사례 그리고 중국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에 항복했을 때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관대한 대우를 받았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남한에 진정한 군대가 없고 외국으로부터 실질적 도움을 받을 정당한 희망도 없었으므로, 침공해 온 적군을 패배시킬 가능성은 너무 작아서 절망적이었다. 그래도 이 대통령은 항복이 아니라 저항을 명령했다.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 신화 뒤의 사람’)
위에서 살핀 것처럼, 북한의 전면적 침공에 대한 이 대통령의 초기 대응은 훌륭했다. 정보가 부족하고 그나마 엇갈리는 상황에서도, 그는 할 일을 하고 안 할 일은 안 했다. 군대를 지휘해본 적이 없는 그가 이처럼 뛰어난 위기 관리 능력을 보인 것은 그의 지도력의 모습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다.
[이승만 행적에 대한 오해]
‘서울 안전하니 생업 종사하라’ 방송 뒤 피신?… 학자들 “근거없는 가짜 뉴스”
軍의 “서울 고수” 방송 내용이 李의 연설과 뒤섞여 소문 퍼져
이처럼 이 대통령의 초기 대응은 감탄할 만큼 침착하고 적절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의 그의 행적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높지 않다. 그가 라디오 방송으로 ‘서울은 안전하니 생업에 종사하라’고 시민들에게 당부하고서 혼자 서울을 탈출한 다음 한강 다리를 끊었다는 얘기가 널리 퍼졌고 지금도 그 얘기가 사실로 여겨진다.
이 문제를 조사한 연구자들은 모두 그런 얘기가 근거가 없다고 언명한다. 이 대통령은 그런 방송을 한 적이 없다. 한강교 폭파도 전적으로 군사적 판단에 의한 국군 지휘부의 결정이었고 그는 관여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그가 대전에서 한 방송 연설과 국군의 선무 방송이 비슷한 시기에 나오면서, 두 방송의 내용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뒤섞인 것으로 추론한다.
서울을 떠난 이 대통령은 대구까지 내려갔다. 사흘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다급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지친 터라(그는 이제 75세였다), 그는 대구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깼다. 대구까지 내려온 것을 깨닫자, 그는 곧바로 기차를 돌려서 대전으로 향했다.
그때 그는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미국이 유엔의 결의에 따라 참전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전한 드럼라이트 참사관은 그에게 “이것은 당신들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입니다”라고 언명했다. 한껏 고무된 이 대통령은 이 기쁜 소식을 온 국민들과 방송을 통해 나누었다.
공교롭게도, 이 대통령의 방송 연설에 앞서 국방부가 “국방군이 현 전선(서울)을 고수할 것”이라는 내용의 선무 방송을 했다. 선무 방송은 으레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상황을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두 방송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뒤섞이면서,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이 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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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거짓 소문들은 모두 자연발생적이어서, 사람들이 쉽게 믿고 널리 퍼진다. 이제 이 대통령이 혼자 도망쳤다는 소문은 정설로 굳어져서, 그의 업적과 명성에 큰 흠집을 낸다.
이 거짓 소문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을 했다’는 주장은 증거를 하나라도 내놓으면, 증명이 된다. 반면에, ‘무엇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증명하기는 무척 어렵고 흔히 불가능하다. ‘부재의 증거(evidence of absence)’라 불리는 이 문제는 철학적, 법적 및 과학적으로 어려운 논점이다. 연구자들이 그 소문이 근거가 없다고 주장해도,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은 이런 사정에서 나온다.
딱한 일이다. 따라서 그 소문의 내용이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평소 행태와 평생의 행적과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하는 편이 그래도 효과가 있다. 그런 지적은 그 소문의 논리적 근거가 아주 약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북한군의 침공 소식을 들은 뒤부터 서울을 떠나기까지 이 대통령이 보인 행태는 하나하나가 그 점을 부각시킨다. 더욱 강력한 논거는 그가 서울을 떠난 직후 보인 행태다. 만민공동회를 이끌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이 맞은 위험에 움츠러든 적이 없는 이 위대한 혁명가의 모습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생하게 만난다.
전쟁 닷새째인 6월 29일, 이 대통령과 무초 대사는 수원에서 맥아더 원수를 만나기 위해 경관측기 두 대로 임시 수도가 된 대전을 떠났다. 그들이 가는 도중에, (북한군의) 야크 전투기 한 대가 그들을 공격하려 시도했고, 조종사들이 골짜기 전후에서 나무 높이로 항공기들을 기동함으로써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라이프’지의 사진기자 데이비드 덩컨은 항공기들이 착륙했을 때 수원에 있었는데, 그는 그들의 도착 광경을 감동적으로 전한다. “이 대통령은 나이 많은 사람치고는 상당히 정력적인 사람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막 견뎌낸 일을 알게 되자, 그의 삶에서 그렇게 노출된 순간에도 평정한 마음을 지닌 데 대해 깊은 감탄을 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보다 더하게, 우리가 비행장 옆 들판에 서 있을 때 우리의 군화 신은 발들을 그가 내려다본 모습을 나는 늘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연민의 낯빛으로 땅에서 올려다보면서, 그는 말했다. ‘그런데 저 콩 싹들. 우리 발길이 저 싹들을 으깨고 있어요.’”
한국에선 많은 것들이 으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견디고 있었다.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 신화 뒤의 사람’)
2023.10.04 06:18:11
지금은 우리가 원자탄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북한을 압도하는 무력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더러운 평화가 전쟁보다 좋은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자들이 국민 40%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에 6.25남침을 싸워격퇴한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공적을 잊으면ㅈ안 된다.
답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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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6:21:55
한강 다리 폭파 명령하고 도망갔다는 거짓말의 진실이 드러나는구나. 변명 한 마디 없이 타국으로 축출되어 생을 마친 그 분을 진심으로 추모한다.
답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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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6:14:47
자유우파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방심은 안된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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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6:27:34
진정한 우리의 국부, 정말 존경합니다. 이분이 안계셨으면 이영애씨말대로 대한민국은 없고 김일성생지옥만 있을뻔했읍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우리 국부 이승만박사의 애국정신을 모두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정신을 갖고 흔들리지말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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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6:13:26
역사 조작은 공산당의 특기. 대한민국이 얼마나 간첩들의 놀이터인지를 보여주는 거지. 북한과 중국의 간첩들이 활개치는 놀이터. 싹다 잡아서 황해로 추방했으면 좋겠다.
답글작성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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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6:54:06
이 나라에 가짜뉴스가 많은 이유는 그 뒤에 북괴와 추종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답글작성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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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6:31:02
위대한 건국 이승만 대통령님! 의 결단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답글작성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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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6:58:51
그런 이승만을 역적취급하는 빨간 것들이다. 반드시 바로 잡아 벌줘야 한다. 이제나마 제대로 조명되고 있어 다행이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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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7:33:58
애국가의 가사 "하느님이 보우하사 ~ "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때 나라를 구한 인물은 ? 임진왜란때 이순신 , 6 25 남침때 이를 막은 이승만이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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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7:28:42
급박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게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던 신앙심 때문이었다! 그는 신이 내린 사람이었기에 자유대한민국을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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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7:34:03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글 너무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이런 연재 글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건국 대통령이신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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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7:51:27
소련군은 점령지에서 양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했다. 참다못한 신의주의 청년학생들이 1945.11 소련군 물러가라! 일어섰다. 이에 대한 소련의 대응은 탱크와 기총소사를 앞세운 무자비 진압이었다. 소련군 전투기는 이미 북에 들어와 있었다. 비무장한 민간인 시위대가 700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2000여명이 체포되어 시베리아 마가단 수용소로 끌려갔다. 미군은 그런 만행을 저지른 일이 없다. 이 사실,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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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7:43:35
1945.8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올 때부터 T-34 탱크를 갖고왔다. 미군은 1945.9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올 때 기갑장비가 없었다. 1949년 미소양군이 철군했을 때 소련군은 탱크를 고스란히 물려주고 나갔다. 탱크를 운용하는 병력과 전술까지 모두 양성한 상태로. 일본군 무장해제를 이유로 진주한 미국과 소련의 전략은 그리도 달랐다. 미군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빠졌지만 점령지에 위성국 정권을 세우는 게 목적인 스탈린은 치밀하게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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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7:38:46
배우 이영애가 말하는 것도 이 같은 대목이 아니겠나.. 625전쟁에서 공산 침략 막아낸 공로.. 이승만 없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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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7:52:04
가짜뉴스가 이 나라를 좀 먹고 있다. 특히 김의겸의 말장난이 그에 특유 전법이다. 선배들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 받아 건군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잊어사는 않되고 6.25를 잊어서도 않된다. 길이 자유대한민국을 지키려면 강력한 국방력으로 필히 핵을 보유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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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7:12:07
본적지 강화읍 산 위에 태어난 집. 개성 송악산 넘은 인민군이 들이닥치니 부친은 터널로 피신. 집 안채 주변을 인민군 경계 근무 서고 마차로 들어오는 식량으로 밥하는 일을 하신 모친. 민심에 신경쓰는 인민군 장교가 직접 인사. 일사후퇴로 죽이고 떠나는 전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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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8:00:19
이승만의 노력이 없었으면 자유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죽어가는 고령이지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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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7:47:40
댓글 다는 분들에게 복 있으라! 이승만이 정말 능력있고 혜안이 있었다면6월 25일 창덕궁 비원에서 낚시질 하고 있을게 아니라 그전에 국방부 정보국에서 계속 올린 박정희 문관의 남침보고를 신중하게 분석하고 대응 했어야지 이승만은 지금의 젤렌스키와 다를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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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8:37:39
1948.8.15 이후 역사는 우익이 건설한 나라를 좌익이 파훼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좌익은 이를 민주화라 자화자찬한다. 민주화는 경제 발전 및 교육의 보급과 함께 점차적으로 실현된 것이지, 좌익이 독점할 수 있는 공훈이 아니다. 한국 민주화의 뿌리는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을 도입한 이승만에게 있다. 처음부터 공산당과 김일성의 통치였다면 지금 이 땅에 개인의 자유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뭐 이승만이 사람을 죽였다고? 좌익이 살해한 무고한 생명은 우익에 의한 희생의 최소 100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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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8:10:21
金九가 1948.4.22 평양에 방문해 인민군의 무장상황을 목격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중국대사 유어만에게 미군만 나가면 압도적 전투력을 지닌 북에 의해 적화통일될 것이라고 실토했고 유어만은 이를 영문으로 타이베이에 타전했다. 그 기밀문건이 나중에 입수되었다. 김구는 유어만 회담 며칠 후 국내언론에 양군 철수 후 내전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韓國人不殺韓國人이라 사기 쳤다. 김대중이 북은 핵개발 절대 안 한다, 김정일이 핵개발하면 내가 책임진다 구라치던 수법이 50년 후 반복되었다. 김구는 김일성에게 적화통일 되면 고향에 과수원이나 하나 마련해달라고 아양 떨었다. 수령님이란 호칭을 김구가 썼다고 평양방송은 전한다. 김씨왕조와 평화타령 하는 자는 늘 흑심을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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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8:19:56
나는 <백범일지>에 보이는 발작적 민족주의에 경악한다. 신채호의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과정'이라는 청맹과니 사관과 동심원을 이루는 외눈박이 세계관! 그 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만동묘 세워 멸망한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지낸 데서 정체성을 구한 조선의 척사위정에 닿는다. 실력 없어 상대의 주먹에 KO당한 주제에 나의 안면근육으로 적을 물리쳤다는 아Q식 정신승리의 원조는 조선이었다. 그 앞에 붙은 게 이씨건 김씨건, 조선의 본질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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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8:18:10
역대 대통령 12명에 대한 호불호는 저마다 다르지만, 발전은 꾸준히 돼왔으니 12명 모두 실수한 사람은 없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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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7:50:38
복거일의 이야기를 듣자니 안타깝다 일찌기 우리나라 한반도 남쪽은 면적도 너무 적고 사방이 막혀 있으니 미군이 주둔할게 아니라 이땅이 미국의 일부 주로 편입되도록 미국 대통령 허락 받자고 외친 복거일 인데 지금도 그주장은 변함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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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 07:39:07
아~~그랬구나!!!그래도 이승만은 독재자에 양민학살에 부정선거로 ?겨나서 미국으로 도망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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