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世 直提學公(諱賜)派 文峯公(諱惟一)后 諱思命의 壻
김종걸(金宗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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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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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국경(國卿)
호(號) 황파(黃坡)
생년 1628(인조 6)
졸년 1708(숙종 34)
시대 조선중기
본관 예안(禮安)
활동분야 학자 > 유생
[상세내용]
김종걸(金宗傑)
1628년(인조 6)∼1708년(숙종 34). 조선 중기 유학자‧효자. 자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황파(黃坡)이다. 본관은 예안(禮安)이고, 거주지는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봉화읍(奉化邑)이다.
조부는 김흠(金欽)이고, 부친 통덕랑(通德郞) 김해윤(金海潤)과 모친 금성현(琴聲賢)의 딸 봉화금씨(奉化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여 12세에 사서(四書)를 읽었으며, 하늘이 내린 효자로, 부친이 자리에 눕자 소태산(小太山)에 제단을 쌓고 7일 낮밤을 금식하며 기도를 올려 꿈속에서 신령이 가르쳐준 약으로 부친의 병을 낫게 하였다. 이 일로 정려를 하사받았다.
1650년(효종 1)에는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봉화읍(奉化邑) 황전촌(黄田村)에 정자 도암정(陶巖亭)을 지었으며, 후진 양성을 위해서 봉산서당(鳳山書堂)도 지었다. 1708년(숙종 34) 은일로 천거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君)에 제수되었으며, 사후에는 안동 사림들의 천거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묘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에 있으며, 1793년(정조 17) 봉산리사(鳳山里社)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황파집(黃坡集)』이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 작품으로는 주자처럼 물욕에 얽매이지 않고 산수간에 머물러 사는 즐거움을 읊은 「탁영암경차주부자탁족간수운(濯纓巖敬次朱夫子濯足澗水韻)」, 압구정의 경치를 즐기면서 퇴계 이황을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서술한 「압구정경차퇴도선생운(狎鷗亭敬次退陶先生韻)」, 제사를 받드는 일과 손님 접대에 대한 것 및 자신의 몸을 수양하는 바탕이 되는 요체를 기록한 「제가사잠(齊家四箴)」 등이 있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경이
김종걸(金宗傑1628-1708)
頤齋先生文集卷之十五 / 行狀
龍驤衛副護軍黃坡金公行狀 b130_566b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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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宗傑字國卿。其先新羅王子錫受封義城。四世有太子詹事龍庇。有大功德享鎭民祠。至孫椿樞密院副使。始分貫爲禮安人。歷左司議玉,大司諫玄柱,校贊乙邦見麗季運訖。隱居縣北遁煩里。至孫參奉諱永權贅居于永嘉益谷里。時李訥齋弘準居是縣。倡設鄕約。公與之同契。是爲公五世祖。高祖諱鸞。曾祖諱夢卿。祖諱欽武科訓局院奉事。始卜居黃田村。考諱海潤通德郞。妣奉化琴氏聲賢女。公以仁廟戊辰生。幼有異質。先b130_566c公敎導甚嚴。八歲通孝經。文詞早就。性至孝。親病不解帶。供養之方毉藥之具。雖遠方難致。必極力求之。嘗百里問藥。一夜往還竟得效。十五丁外憂。哀毁甚。送終式禮。見者以至行稱之。每念親意以學業勤勉。饋奠之暇。不廢誦讀。專以敦本務實爲事。而母夫人勉以門戶計。兼治擧業。累擧不中。遂謝絶塲屋。母夫人嬰病轉㞃。築壇于家後。祈天凡七夜疾獲已。其後以天年終。廬墓以終制。益無意於世。以山水書史娛意。時李訥隱先生卜隣而居。朝夕相歡。有講習之益。所居洞府幽邃。有耕鑿之樂。宅前奇巖截立。累石築臺。邀縣中諸碩老傳觴命b130_566d韻。風流篤厚。人擬以香山故事。有松亭會飮錄及詩帖。其後素巖金公鎭東序而志之曰斯會在肅廟甲申乙酉。而吾縣碩德如荷,雪,龜,訥及吾曾考八吾府君及吾祖進士公兄弟皆會焉。數君子生幷一縣。互資麗澤。而以暇日佩酒遊咏。皆前輩勝事。小山權公正宅詩曰前輩留名蹟。玆遊出俗情。斯可謂川城舊蹟也。晩年結屋巖畔。命之曰陶巖亭。蓮沼柳堤。隱暎有佳趣。日與人士棲息講討。每讀史至忠孝烈異行。輒擊節三復焉。一室蕭然。惟蓄一張琴一架書而已。家居必晨起拜廟。忌日前期齊宿以致敬。以養生事亡之不得盡情爲含慟。b130_567a子弟或設晬酌輒不樂。有詩曰老去不忘劬勞感。分付兒孫莫設盃。常以終鮮爲恨。與從弟宗說,宗燁有深愛。同案共被。至老不衰。有齊家箴修身箴。而以謹言語謹出處謹飮食爲要符。終以貨色汚身爲戒。其存心可知也。以耋授副護軍。肅廟戊子四月一日考終。壽八十一。臨終手書忠孝烈三字以授子漹曰老夫平生無能有一於此。汝輩謹守勿忘也。以其年六月日。葬于家後向明原。配東萊鄭氏思命女。文峯惟一之後。有二男漹,澈。別室子一大。漹四男相光,相夏,相堯,相殷。一女適鄭時泰。澈二男相滿,相胤。一女適邊久大。以下不盡錄。璉b130_567b夏以同縣晩出。每登公之亭而徘徊於松臺之上。愛公卜築之甚愜幽賞。而俛仰諸先輩盤桓之躅。日其後孫鎔,載瑾,峻鎬等。以其族君道源所敍遺事。請撰次其行治。今距公之世已百有年矣。遺蹟零散。不可尋逐。而按而攷之。亦可槪其一二矣。遂略敍終始。爲後人徵信之資云爾。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11
響山文集卷之十二 / 墓誌銘
僉知中樞府事贈吏曹參判金公墓誌銘 幷序 b144_414b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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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嘉府川城縣之南。有陶岩亭。山縈水抱。曲㙜層欄。窅奧奇崛。余嘗登覽而問其主人。指亭北若斧者而言曰。古有黃坡金公宗傑。生於斯樂於斯而埋沒塵土。於今二百年矣。余竊不勝難作之恨。日其胄孫鎔。使族人載輪,峻鎬。袖公逸稿及頤齋權公所撰行狀。來囑隧誌。謹按公字國卿。金之先出自新羅王子義城君錫。至樞密院副使椿。分貫爲禮安人。其孫玄柱文科同正。俱見宣城誌。至參奉永權贅居川城。與李訥齋弘準刱設鄕約。於公爲五世。高祖鸞通政。曾祖夢卿初名彭齡。俱載鄕錄。祖訓鍊奉事欽。考通b144_414c德郞海潤。妣奉化琴氏。聲賢女。公八歲通孝經。文詞夙就。人以遠大期之。性至孝。父病百里尋毉。一夜往還。時尙童年。又築壇以禱。母疾得效。其他廬墓三年。生日不宴。卽踈節也。孤露後更無當世之意。我家家裏自有泉石之美池㙜之景。而琴書詩酒。固足以適吾情而悅吾心焉。時則訥隱李公居同里。荷塘,蒼雪,龜厓,八吾軒諸公皆芳隣名流。相與從遊唱和。傳爲一代勝事。觀於金素岩鎭東松㙜詩帖序可知也。齊家修身。各有揭箴。又書忠孝廉三字以戒後昆。其大如此。細可畧也。生仁祖戊辰。歿肅宗戊子。壽八十一。嘗以應資授通政。今上丁亥。用多士請贈b144_414d吏曹參判。配東萊鄭氏。思命女。文峯先生之後。其賢有德。盖亦家風也。後公二年歿。墓祔公。後從贈貞夫人。二男漹,澈。餘男一大。漹男相光,相夏,相堯,相殷。女鄭時泰。澈男相滿,相胤。女邊久大。一大男甲先,甲奉。相光男興禹,興周。相夏男興文同樞。相堯無子。以興周嗣。相殷男興兌僉樞。女安聖思,孫慶大。曾玄以下繁衍略之。載輪興文來孫。峻鎬興禹昆孫也。銘曰。
北辰感歟。德星聚歟。影響池㙜。烟月孚應。泉壤華誥。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12
첨지중추부사 증 이조 참판 김공 묘지명 병서 〔僉知中樞府事贈吏曹參判金公墓誌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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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부(永嘉府 안동(安東)) 천성현(川城縣)의 남쪽에 도암정(陶巖亭)이 있는데, 산이 감돌아들고 물이 싸안으며 구부러진 누대(樓臺)와 층층의 난간이 아득히 깊으며 기이하게 우뚝 솟았다. 내가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더니, 정자 북쪽의 도끼처럼 생긴 무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옛날에 황파(黃坡) 김종걸(金宗傑) 공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태어나 여기에서 즐겁게 살다가 이 땅에 묻힌 지 200년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나는 한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슬픔을 이길 수가 없었다.
하루는 그의 주손 용(鎔)이 집안사람인 재륜(載輪)과 준호(峻鎬)를 시켜서 소매 속에 공의 일고(逸稿)와 이재(頤齋) 권공(權公)이 찬술하신 행장을 넣어 와서는 나에게 묘지문을 부탁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공의 자는 국경(國卿)이고, 김씨의 선대는 신라의 왕자인 의성군(義城君) 석(錫)에게서 나왔다.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춘(椿)에 이르러 관적(貫籍)이 나뉘어 예안(禮安) 사람이 되었고, 그의 손자인 현주(玄柱)는 문과(文科)에 올라서 동정(同正)이 되었으니, 모두 《선성지(宣城誌)》에 보인다. 참봉 영권(永權)에 이르러 천성(川城)에 췌거(贅居)하여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과 함께 향약을 창설하였으니, 공에게는 5세조가 된다. 고조 란(鸞)은 통정대부였고, 증조 몽경(夢卿)의 처음 이름은 팽령(彭齡)이었으니 모두 《향록(鄕錄)》에 실려 있다. 조부는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흠(欽)이고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해윤(海潤)이다. 어머니는 봉화 금씨(奉化琴氏)이니 성현(聲賢)의 따님이다.
공은 여덟 살에 《효경(孝經)》을 깨우쳤고 문장을 일찍 성취하니 사람들이 장래에 큰 인물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부친이 병이 들었을 때 100리 밖의 의원을 찾아서 하룻밤에 왕래하였다. 그때가 아직도 어린 나이였다. 또한 단(壇)을 쌓고 기도를 하니 어머니의 질병이 나았다. 그 밖에 3년 시묘살이를 한 것이라든지 생일에 잔치를 하지 않은 것 등은 곧 공의 고고(孤高)한 절개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다시는 세상에 나아갈 뜻이 없어서 집 안에 아름다운 자연과 경치 좋은 연못이나 누각이 있다고 하여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를 짓고 술을 마셨으니, 진실로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에 족하였다. 이때에 눌은(訥隱) 이공(李公)과는 같은 동리에서 살았고,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ㆍ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ㆍ귀애(龜厓 이완(李琓))ㆍ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같은 분들이 모두 좋은 이웃으로서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그들과 더불어 종유(從遊)하면서 시를 지어 주고받은 것은 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로 전해지거니와 소암(素巖) 김진동(金鎭東)의 〈송대시첩 서(松臺詩帖序)〉를 보면 알 수 있다. 가정을 다스리고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는 각기 잠사(箴辭)을 지어 걸어 두었고, 또 ‘충(忠)ㆍ효(孝)ㆍ염(廉)’ 석 자를 써서 후손들을 경계하셨다. 그 큰 것이 이와 같으니 세세한 것은 생략하겠다.
인조 무진년(1628, 인조6)에 태어나서 숙종 무자년(1708, 숙종34)에 돌아가셨다. 나이는 여든하나였다. 일찍이 임금의 자문(資問)에 응대하여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금상 정해년(1887, 고종24)에 많은 선비들의 요청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사명(思命)의 따님이며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 선생의 후손이다. 현숙한 부덕(婦德)이 있었으니 대개 그것도 가풍(家風)이었다. 공이 돌아가신 2년 뒤에 돌아가셨다. 묘소는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으며, 그 후 공이 추증됨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2남을 두었으니 언(漹)과 철(澈)이다. 서자는 일대(一大)이다.
언의 아들은 상광(相光), 상하(相夏), 상요(相堯), 상은(相殷)이며 딸은 정시태(鄭時泰)에게 출가하였다. 철의 아들은 상만(相滿), 상윤(相胤)이며 딸은 변구대(邊久大)에게 출가하였다. 일대의 아들은 갑선(甲先), 갑봉(甲奉)이다.
상광의 아들은 흥우(興禹), 흥주(興周)이다. 상하의 아들은 흥문(興文)인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상요는 자식이 없어서 흥주로 뒤를 이었다. 상은의 아들은 흥태(興兌)인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딸은 안성사(安聖思), 손경대(孫慶大)에게 출가하였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너무 많아서 생략한다. 재륜(載輪)은 흥문의 내손(來孫)이고, 준호(峻鎬)는 흥우의 곤손(昆孫)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북극성(北極星)이 감응하였는가 / 北辰感歟
덕성이 모였는가 / 德星聚歟
연못에 그림자 어리고 누각에 소리 울리니 / 影響池臺
안개와 달이 부응하더니 / 烟月孚應
저승에서 추증의 고신(告身)을 받으셨네 / 泉壤華誥
ⓒ 한국고전번역원 | 김용환 (역) | 2010
註;13세賜-14세蘭元-15세光佑-16세穆蕃-17세惟一18세思命
첫댓글 文峯公(諱惟一)后 諱思命의 壻 金宗傑公의 관련 정보 잘 봤습니다.
군태님의 좋은정보글 잘공유하고 흔적 남겨봅니다
文峯公(諱惟一)后는 18世에는 처음이네요. 귀한자료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