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라는 곳이 어디 있어요?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무척 궁금한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아름다운 곳입니다. 거기도 역시 비가 내리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사계절이 있고, 누워서 푸른 하늘과 얘기도 하고, 나무도 많고, 작은 호숫가에 앉아서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밤하늘엔 별들이 반짝이는 곳이지요.”
그녀가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렇게 표현을 하시니 더 궁금하고 재미있는 곳이라 생각이 듭니다. 누구 사랑하는 사람 없어요? 여자 친구도 없어요? 사람은 어느 곳에 있던 항상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며 살겠지만 이런 곳에 있으면 그런 감정이 더 진하게 다가올 텐데요.”
“그런 감정이라? 조금은 있겠지요. 저는 아직 애인이 없어요. 여자 친구도 없어요. 애인이 없더라도 미래의 대상을 향해서 마음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가족들이 가장 보고 싶어요.” 그녀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성당은 언제부터 나가셨어요?”
그녀가 물었다.
“유아세례를 받았어요.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어머니께서 부산 동래 성당으로 포대기를 싼 채로 데려가 유아세례를 받게 하셨어요. 부산에서는 서면 성당에 다녔었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종로 성당과 명동 성당, 응암동 성당, 지금은 화곡동 성당에 나가고 있지요. 저는 교육 때문에 잠시 여기 나와 있어요. 말하자면 여기가 수색대대 본부라고 할 수 있어요. 며칠 후 교육이 끝나면 다시 비무장지대로 돌아가 수색과 정찰을 해야 하고 야간에는 매복도 나가야 합니다.”
“그래요. 힘을 내세요. 무사히 제대하시기를 바라겠어요. 기도하겠습니다.”
“힘이 생길 것 같습니다. 비무장지대에 있더라도 기도를 생각하면 용기가 생기겠지요.”
“손을 내밀어 보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머뭇거리면서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드리겠습니다.”하면서 손을 잡았다.
“건강하시고 무사히 제대 하시기를...”
그녀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전해짐을 느끼면서 힘이 생겼다. 또다시 거친 벌판과 계곡으로 다시 나가야 하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참으로 편안한 그녀의 눈이었다. 그녀는 이제 제 3땅굴을 비롯한 여러 곳을 가보겠지.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성당 안이 가득하도록 소프라노 목소리로 합창단과 함께 노래를 부를 것 같은 여인,
성당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앞에서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 같은 여인,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성모 마리아 앞에서 묵주기도를 할 것 같은 여인.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던 그녀.
불과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녀는 마음이라는 아름다운 선물을 주고 갔다. 논현동 성당이 정확하게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한강 이남에 있는 동네 이름의 하나이니까 논현동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 해본다. 논현동도 한강 이남의 어디쯤에 있는지도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다. 이곳의 생활이 끝나면 예전처럼 열심히 성당을 다닐지는 모르겠다. 어머니 때문에 다니기는 하겠지만 때로는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로부터 상당히 벗어나는 과정도 가끔 있지 않을까? 신앙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그랬겠지만 사회에 나가서도 타인들과의 수없이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 관계들을 잘 이루어 나가기도 하겠지만 타인들의 힘에 의해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로 변해 가는 경우도 있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상업적으로 거래하는 관계에서도 그렇고, 심지어는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상태로 변할 것이며 더 심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 않을까?
성당에서 부르는 ‘하느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여야 하나? 마음속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올까? 간절히 기도하면 가야할 길에서 멀리 벗어나는 일은 없을까? 여태껏 생활 한 공간을 차지했던 성당을 떠 올렸다. 부산의 동래 성당과 서면 성당, 서울의 명동 성당, 종로4가 성당, 응암동 성당, 혜화동 성당, 화곡동 성당, 지금 교육대 안에서 교회 건물과 같이 사용하면서 예배가 끝나면 미사를 보는 성당, 휴가를 나가다가, 그리고 귀대 전 들렸던 법원리 성당. 앞으로는 어떤 성당에 나가게 될지, 또는 전보다도 게을러질지는 모르겠지만.
논현동 성당 신자들의 위문공연을 수색대대 본부 식당에서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신부님은 외국인이었다. 논현동이니 한적한 시골에 있는 조용한 성당의 모습과는 조금은 차이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대도시의 빌딩 속에 있던, 언덕 위의 지평선이 보이는 시골에 있던, 성당 안에 들어가면 영혼은 조금이나마 변화하겠지.
다시 매복 작전을 나가고 비무장지대에서 작전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자주 두렵기만 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실제로 두려움의 상황에 직면할 때도 있겠지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데 자주 두려워하는 것일까? 이곳에서 가고자 하는 방향은 쉬운 쪽으로의 방향이 아니다. 언제나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하는 방향이다. 걸어가면서 마음을 어떤 권능하신 분에 맡기면 마음이 조금은 안정이 될까? 논현동 성당의 위문공연 모습이 떠올랐다. 그 속에서 얼마만큼의 힘을 얻었고 얼마만큼의 신앙적인 것을 생각했는지, 약한 마음이 얼마만큼 강해졌고, 얼마만큼 힘이 생겼는지.
오늘의 일을 잘 수행해 나가자.
2차 대전의 한 전투를 다룬 영화 <머나먼 다리>가 있다. 원제가 <A Bridge Too Far>였고 네덜란드의 ‘아른헴’에서 벌어졌던 영국의 공정사단과 독일군과의 약 4일간의 전투를 그린 내용이다. 1944년 9월 17일에서 9월 25일 사이에 연합군의 ‘마켓가든’작전에서 벌어진 전투. 호화 배역진으로 구성되었는데 생각나는 배우는 <더크 보가드>, <숀 코너리>, <에드워드 폭스>, <진 헤이크만>, <안소니 홉킨스>, <라이안 오닐>, <로렌스 올리비에>, <로버트 레드포드>, <막시밀리안 쉘>, <리브 울만> 등이다.
‘아른헴’ 대교를 점령하기 위해 독일군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영국 공정사단 제1낙하산여단 제2대대와 3대대 일부 병력 750여명이 ‘아른헴 대교’에서 전원 전멸한다는 내용이다. ‘전멸은 하겠지만 항복은 없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영국 군인들이 부르는 노래 <Abide With Me(나와 함께 하소서)>를 불러 보았다.
"해 지고 어둠이 깊어갈 때 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도움이 없고, 위로가 없을 때 오 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기쁨은 사라지고 인생은 덧없는 것. 그 영광 모두 빛을 잃을지니,
세상이 바뀌고 썩어도 오 영원한 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하루가 시작되면서, 또는 하루를 마치면서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해 보자. 아름다운 마음은 거친 벌판이라도 금방 꽃이 자라게 한다. 우리 각자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루를 충실히 살아갈 때 우리나라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