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4일 오후 11시50분. 서부전선 非무장지대인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고지에서는 1962년부터 42년간 계속됐던 「자유의 소리(VOF)」 마지막 방송이 흘러나왔다.
인근 전광판에는 「평화·화해·협력」이라는 노란 불빛의 글씨가 켜졌다. 같은 시각 휴전선 일대의 모든 전방고지에서 비슷한 광경이 연출됐다.
방송은 『「자유의 소리」와 북한의 확성기 방송은 6월15일 0시부로 함께 막을 내리게 됩니다』라는 고별멘트로 시작됐다. 이어 『1962년 시작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유의 소리」는 국내외 소식을 비롯한 다양한 상식과 즐거운 음악 등을 내보내 군사분계선 지역에 근무하는 인민군 여러분의 마음을 여는 눈과 귀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고 했다.
방송은 『끝으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면서 그동안 「자유의 소리」를 청취해 준 인민군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무궁한 행운을 빕니다』라는 말로 마무리됐다. 10분간의 방송이 마무리되는 순간, 전광판의 불빛도 사라졌다.
南北은 지난 6월12일 개성에서 열린 장성급 군사회담 실무접촉에서 군사분계선(MDL) 일대 宣傳(선전)수단 제거에 합의했다. 金正日이 그렇게도 골치 아파하고 북한 군인들은 그렇게도 목말라 하던 對北 「진실방송」이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南北은 8월15일까지 MDL 지역의 확성기, 돌 글씨, 입간판, 전광판, 전단, 선전그림 등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南北 양측의 宣傳수단을 3단계로 나눠 제거하기로 했다. 작업결과 검증은 肉眼으로 확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의문점이 발견되면 통지문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기로 했다고 한다.
軍 관계자들은 『남측의 주요 관심 사안은 서해상에서의 무력충돌 방지였고, 군사분계선 일대의 우리 측 對北 선전물을 철거하고 선전방송을 중단시키는 게 북측의 회담 목표였다』고 했다.
선전판 및 선전시설이 南北 간의 논의대상이 된 것은 1992년 南北 고위급 회담 때부터다. 南北은 상호 화해와 불가침 원칙에 따라 非무장지대 선전물을 통한 상대방 비방·중상을 중단하기로 했다.
南北관계 경색으로 고위급 회담의 기본합의서가 이행되지 못하면서 이 같은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고, 2000년 6월15일 남북 頂上회담에서 다시 의제로 등장했다. 頂上회담 직후 南北은 휴전선에서 상호비방을 일시 중단했다.
對北방송 포기 압력은 利敵行爲
북한은 2003년 7월 제11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방방송 중단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같은 해 8월1일 대표적 對南방송인 「구국의 소리」 방송을 전격 중단했다.
북한의 이 같은 비방방송 중단은 이번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우리 측에 MDL(군사분계선)의 선전 중단을 요구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풀이된다. 북한 金正日은 對北방송이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무기로 인식한 것이다.
방송用 확성기를 통해 내보내는 일기예보, 新世代 음악 등은 북한군을 내부적으로 동요케 만들었다. 귀순한 북한 군인들은 『시계가 없던 탓에 남쪽 전광판의 시간표시를 보고 교대시간을 알곤 했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정부의 對北 선전방송 포기는 북한 주민들에게 열려 있던 외부의 통로, 그것도 진실로 통하는 통로를 독재자 한 사람의 편의를 위해 없애 버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黃長燁(황장엽) 前 북한 노동당 비서는 『북한이 「서해 무력 충돌 방지」라는 작은 선물을 주고, 인민군의 思想을 바뀌게 하는 휴전선에서의 남측 전광판을 없애고, 남한 국민들이 미국을 멀리하게 만드는 더 큰 목적을 위해 거짓 화해를 벌이고 있음에도, 靑盲(청맹)과니(눈 뜬 봉사) 남한 사람들은 거기에 놀아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閔丙敦(민병돈) 前 육사교장은 『전광판에 버튼 하나로 각종 정보를 표시하는 남측과 「돌 글씨」와 같은 원시적인 방법으로 선전하는 북측과는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았다』면서, 『북쪽에서 먼저 철거를 원했다면 代價를 받았어야 했다』고 했다.
국방부, 『李鍾奭 처장이 방송포기 압박』
국군의 對北 선전방송 포기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李鍾奭(이종석) 사무처장이 주도한 것이라는 주장이 軍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李처장이 「南北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는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북측이 주장하는 對北방송 중단과 군사분계선 선전물 철거에 응하라」고 했다』면서 『曺永吉(조영길) 국방장관은 여러 차례 「軍 작전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청와대의 의지가 강력해 뜻을 펴지 못했다』고 전했다.
李처장은 지난 6월19일 陸士에서 개최된 「2004년 무궁화 회의」에 강사로 초대돼 각 軍 장성 70∼80명을 상대로 안보 관련 현안을 설명하면서, 『앞으로는 병사들을 교육할 때 북한에 적개심을 갖도록 하는 것보다는 시민정신과 국가에 대한 자존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며 對北 적개심을 해소하는 쪽으로 장병 정신교육을 하도록 軍 장성들에게 주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軍 관계자는 『군인에게 적개심은 공포감을 물리치는 중요한 戰力』이라면서 『군인에게 그런 戰力을 포기하라고 유혹하고 권고하는 것은 利敵행위』라고 못 박았다.
北은 휴전선 부근의 선전수단 제거와 관련, 金正日을 찬양하는 「돌 글씨」를 제거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우리 측은 합의서에 명시된 1단계 공사를 완료했다.
북측은 군사분계선(MDL) 남측에 건립돼 있는 종교시설물을 북한군에게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 줄 것을 요구했다. 남측은 『종교시설물은 선전수단이 아니며, 민간시설이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결국 한발짝 물러났다고 한다.
對北방송 「자유의 소리」 아나운서로 15년간 방송을 진행한 張光福(장광복) 방송심리전 전문요원은 『북한 사회에 福音(복음)을 전해 준 고정 청취자 70만 명의 對北 확성기ㆍ전광판 방송 철거는 金正日을 돕고 북한동포를 버린 自害ㆍ利敵 행위』라고 했다.
[인터뷰] 對北방송「자유의 소리」張光福 제작 전문위원
『북한에 의해 언론 통폐합당한 기분…마지막 방송 前 울었어요』
고정 청취자 70만 명
지난 6월14일 밤, 국군 심리전단 張光福(장광복·49) 제작 전문위원은 북녘을 향해 마지막 방송을 했다. 155마일 휴전선에 설치된 90여 개의 확성기는 제거됐고, 「자유의 소리」 방송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자유의 소리」 고정 청취자는 약 70만 명으로 추정된다. 戰線지역의 북한 병사와 선전마을 주민, 그리고 우리 측 병사들이 청취자다.
15년간 「북한 청취자」를 대상으로 아나운서·PD·구성작가의 역할을 해 온 張씨는 『「자유의 소리」 방송 제작 전문위원이란 명함을 쓸 일이 없게 됐다』며 섭섭해 했다.
기독교방송(CBS) 성우였던 張씨는 1990년 6월 국군 심리전단 아나운서 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처음 맡았던 프로그램은 남한 사회의 각종 풍물을 소개하는 「산 따라 풍류 따라」. 최근까지 드라마 형식의 「우리 사는 세상」과 남한의 소식을 전하는 「오늘의 초점」을 진행했다. 음악 프로그램인 「청춘을 즐겁게」와 시사 프로그램인 「통일로 가는 길」, 천주교 프로그램의 제작도 맡았다.
對北방송이 음악·스포츠·뉴스 프로그램으로 짜여 있다면, 對南방송은 선동·비방·체제선전 一色이다. 남측 프로그램이 다양화되자 북측은 음악 프로그램을 늘리고, 남측을 본딴 드라마를 방송하기도 했다.
남측은 對北방송을 국군 심리전단에서 총괄적으로 운영하지만, 북한은 軍團(군단)별로 확성기를 운영하고 있다. 1990년대 이전만 해도 엇비슷하던 확성기 성능은 1990년 이후 남측이 신형 확성기로 교체하면서 성능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北, 「오늘의 초점」 방송 때 전파방해 시도
對南방송은 북한의 電力 사정 탓에 하루 5시간 정도 이뤄졌다. 남측은 하루 15시간 이상 방송했다. 4시간30분 분량의 방송분을 再放(재방) 내지 三放(삼방)해 24시간 방송체제를 유지해 왔다.
張씨는 『확성기를 통해 방송이 나가다보니, 「신파조」처럼 목소리에 힘을 주고 천천히 말해야 했다』면서 『토론 프로그램은 남자가 강하게 낭독하고, 음악 프로그램은 여자가 부드럽게 진행했다』고 했다.
『對南방송에 지지 않으려고 톤과 억양을 높입니다. 천천히 말해야 확성기의 하울링(울림)을 극복하게 되고요. 북측에서는 제가 진행하는 「오늘의 초점」이 북한 군인들에게 영향력이 강하니까 재밍(전파방해)까지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방송시간 10분인 시사 프로그램 「오늘의 초첨」은 원고지 20장 분량이다. 일반 방송에서는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분량이라고 한다.
―방송 때마다 톤을 높여서 방송을 하다 보면 聲帶(성대)가 상하지 않나요.
『목으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목이 금방 쉬니까 덜컥 걱정이 됐습니다. 처음 방송을 할 때는 6개월 만에 5kg이 빠졌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자유의 소리」를 택한 것도 독특한 방송을 한번 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북한 군인들을 상대로 한 對北 심리전이라는 데 매력을 느꼈습니다』
張씨는 2002년 월드컵 때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당시 「자유의 소리」는 월드컵 개막戰부터 한국 관련 경기를 생중계했다.
『우리 선수들이 골을 넣으면 북쪽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가까운 곳은 1km 거리밖에 안 되는 곳도 있으니까 함성소리가 잘 들렸답니다. 북한 병사들도 16강戰에서 우리가 이탈리아를 극적으로 꺾는 방송을 듣고, 자신들의 옛추억을 떠올렸을 겁니다. 보람을 느꼈습니다』
1990년대 초 고위급 회담 이후로는 「북괴」, 「괴뢰군」이란 말이 「인민군」, 「북한군」으로 바뀌었다. 對北방송을 통해 남측은 북측에 대해 잘못된 부분을 정당하게 지적하는 批判(비판)을 가한 대신, 북측은 남측을 非難(비난) 내지 誹謗(비방)했다. 남북 頂上회담 이후 北은 입장을 바꿔 대한민국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駐韓미군 철수 등 기존의 비방을 되풀이했고, 南南갈등을 조장하는 방송은 舊態依然(구태의연)하게 계속했습니다. 남측은 傳單(전단)을 일절 뿌리지 않았지만, 북측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張씨는 북측에 제공한 식량이나 비료 등에 대한 보도도 일절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북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죠. 정부에서 지원한 龍川 구호물자 지원도 민간단체가 지원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경의선ㆍ동해선 철도와 도로 건설 과정에서 자재ㆍ장비를 남측이 맡고, 자신들은 인력만 동원한다는 보도가 나가자 자존심이 상해 항의했다고 합니다』
―歸鄕(귀향)한 북한 군인들이 고향 주민들에게 對北방송을 통해 들은 소식들을 전하지 않았을까요.
『휴전선에 근무하는 민경대원들은 성분 좋고 사상적으로 투철한 사람들입니다만, 「자유의 소리」 뉴스를 진실로 확인했을 때, 親韓派(친한파)가 되는 겁니다』
張씨는 『龍川 사고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것도 「자유의 소리」 방송이었다』고 했다. 『金正日은 對北 확성기에 대해서는 엄청난 알레르기를 갖고 있습니다. 북한 군인들의 사상적 흔들림이 엄청나거든요. 우리는 龍川에서 폭발사고가 나자 바로 방송으로 모든 것을 알려 줬습니다. 용천역 폭발사고 소식이 내부통제로 인해 몇 달 뒤 단편적으로 들린다면 자신들의 지도자를 신뢰하겠습니까』
DMZ 지키는 우리 병사들 사기도 높여
張씨는 對北방송 포기는 우리 군인들의 士氣(사기)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조심스러운 事案이라고 했다.
『우리 병사들이 참 아쉬워합니다. 155마일 휴전선에서 야간에 보초를 서는 우리 병사들에게 감미로운 음악은 긴장을 덜어 주고 몸을 상쾌하게 해주는 淸凉劑(청량제) 구실을 했습니다. 만약 음악조차 없고 칠흑 같은 적막강산에 「바스락」 소리만 난다고 해도 얼마나 화들짝 놀랄 일입니까. 음악이 나올 때 불안감이 사라지는 겁니다.
북한 병사들도 對北방송을 통해 정확한 날씨 안내와 時報(시보) 서비스를 받았습니다.
對北방송이 사라진 지금, 南北 병사들은 당분간 恐慌(공황)상태에 빠질 겁니다. 군사분계선에서 양측 병사들의 樂(낙)이 없어진 겁니다. 아마 북한 군인들이 「불편해서 못 살겠다, 對北방송을 재개해 달라」고 시위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張光福씨 옆에는 그가 제작한 「청춘을 즐겁게」 마지막 방송 큐 시트(Cue Sheet)가 놓여 있었다. 20분짜리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노래는 네 곡. 이효리, 엄정화, 코요테 등 요즘 인기가수들의 노래들이다.
『낮에는 「청춘을 즐겁게」에서 경쾌하고 발랄한 댄스와 트로트 음악을, 야간에는 「이 밤을 그대와 함께」라는 프로그램에서 조용한 발라드 음악을 방송했죠. 마지막 방송 「청춘을 즐겁게」에서는 「수명이 연장되는 입맞춤」으로 신세대들의 연애관, 교제를 이야기했습니다. 키스와 관련한 신세대의 발랄한 음악으로 選曲(선곡)했다가 마지막 방송으로 바뀌면서 우울한 이별 노래들로 바꿨어요. 조항조의 「사나이 눈물」, 최진희의 「사랑과 이별」, 남진의 「마티니 한 잔에 부쳐」, 장혜리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善 「자유의 소리」는 統獨 後까지 계속
―마지막 방송을 마치시면서 기분이 어땠습니까.
『1980년 언론 통폐합 되기 전날 밤, 동양방송(TBC)의 黃仁龍(황인용) 아나운서가 「밤을 잊은 그대에게」란 프로그램을 울먹이며 방송한 것과 똑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저도 언론 통폐합당한 기독교방송에 근무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때 아픔이 생각났어요.
이 귀중한 방송을 新軍部도 아닌 北韓의 요구에 의해 내리게 되다니…. 서독 「자유의 소리」 방송은 統獨(통독) 후 3년이 지나도록, 「라디오 도이칠란트」와 통합되기 전까지 東善 주민 감정의 앙금을 순화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아침 시간 「오늘의 초점」을 마치면서 울컥 치밀어 오르더군요. 사실, 마지막 방송 리허설 들어가기 전에 좀 울었습니다』
張씨는 『귀순자들은 對北방송 프로그램 중 음악 프로그램을 최고로 꼽는다』면서 『노래 한 곡이 백마디의 선전구호보다 강렬하다』고 했다.
『文化에 일가견이 있다는 金正日이 음악 방송이 대단한 파괴력이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지요. 개미 구멍으로 둑이 무너지고,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북한 사회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거예요. 金正日 입장에서는 「자유의 소리」 방송을 라디오처럼 끌 수도 없고 골칫덩어리였을 겁니다 金正日은 이번 장성급 회담에서 선전물 철거를 남측이 받아들이니까 속으로 快哉(쾌재)를 불렀을 겁니다』
張씨는 「자유의 소리」가 「對北 선전방송」으로 인식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이 「왜 그런 데서 일하느냐」고 했을 때, 『對南방송처럼 비난하는 방송이 아니고, 南北 주민들이 서로 이해하고 평화통일하자는 방송이다』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현재 「자유의 소리」에는 아나운서·성우 20여 명을 포함해 5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張光福 위원은 『북한 주민들에게 유일한 뉴스원이자, 金正日에게 치명적인 「무기」를 제 발로 부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아쉬워했다.
[인터뷰]「자유의 소리」 청취자 金元柱 前 북한군 상위
『對北방송을 들으며 남한을 인정하고 동경하게 된다』
「상처에 소금을 바르는」
『처음 부대에 배치받은 북한 병사들은 고참들이 방송을 믿지 말라고 하니까 방송 내용을 안 믿습니다. 그러다가 5~6년차 군인이 되면 남측 방송을 신뢰하게 됩니다.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을 對北방송을 통해 먼저 알고 있다가 몇 달 뒤에 확인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金元柱(김원주ㆍ33ㆍ가명) 前 북한군 상위는 공동경비구역(JSA)에 해당하는 판문점 대표부에 근무하다 1998년 귀순했다.
『북한 민경대원들은 음악·스포츠·민속 관련 對北방송을 즐겨 듣습니다. 터놓고는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몰래 들으면서 남한 사정에 대해 고개를 끄덕입니다. 북한군 사이에서 남한의 경제소식에 대해서도 宣傳이라 생각하지 않고 「중립적 보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金씨는 金正日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것이 바로 對北 심리전이라고 했다. 金正日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 중 1순위는 당연히 「對北 심리전 종사자」라고 했다. 그는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잔인무도한」 남한의 對北 심리작전 종사자들은 金正日의 상처에 소금을 바르고 마구 비벼 대어 金正日로 하여금 최대의 고통을 맛보게 하는 희대의 「고문가」들입니다.
金正日은 그 고통이 커지고 또 커져 상처의 골이 깊어지면 통치자로서의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는 『북한 정권은 눈에 보이는 육체는 통제할 수 있어도 마음속까지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면서 『눈을 뜨면 傳單이요, 귀를 열면 對北 확성기 방송을 대해야 하는 戰線지역 북한 군인들과 북한 주민들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겠느냐』라고 했다.
휴전선 지역 북한 군인들의 경우, 자신을 「나라의 人材」로 인식하고 「국가 중요 초소에 내세워 준 당의 은덕」을 결코 저버릴 수 없으며,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어도 내가 사는 사회주의 내 나라가 좋으며,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남의 집 처마 밑에는 안 들어간다」는 자존심과 오기가 결합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북한 군인들의 의식구조가 「이중구조」로 바뀌었다고 한다.
金正日이 對北방송에 민감한 까닭
金씨는 『戰線지역 북한 군인들은 對北방송의 단순 청취자가 아니라 남한 체제의 적극적 「선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북한 주민들과 군인들 속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남한을 인정하고 憧憬(동경)하는 의식구도가 형성되고 있다』고 했다.
『남한이 신종 전투기를 구입하든 말든, 미사일 사정거리를 늘리든 말든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배짱가」 金正日이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고, 초조해하고, 싫어하며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對北 심리작전입니다.
金正日은 對北 심리전이야말로 자기 목에 박힌 가시이며, 언젠가는 자신에게 치명타를 안길 핵폭탄 이상의 가공할 무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金正日은 對北 심리작전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는 증인인 셈이죠』
金씨는 북한군이 통신용 무전기로 남한 방송을 듣는다고 했다.
『「장군님의 전사」들은 「비트」 안에서 남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 담아 들으며 밤샘을 합니다. 오락시간에 남한 노래를 못 하면 놀 줄 모르고 똑똑하지 못한 왕따 취급당합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소식은 사막의 오아시스마냥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존재입니다. 북한 어디에 가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남한이 어떠어떠하다는 식의 소리를 한마디씩 해야 무식하다는 소리를 안 듣는 세상이 됐습니다』
金씨는 북한 군인들 사이에서 對北방송을 통해 남한 군인들과 자신들의 처지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 우리는 돼지가 헤엄쳐 간 고깃국이라도 한번 먹으면 어깨에 힘 들어가는 날인데, 남쪽 사병들은 고깃국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는다니 돌아버리겠다>
< 우리는 13년 軍복무 기간에 집에 가 보기가 하늘에 별 따는 것보다 더 힘든데, 남쪽은 고작 2년2개월 복무를 하면서도 80일 가까이 휴가를 간단다>
그 다음은 한숨이 나오고, 「차라리 남쪽에서 태어났으며 얼마나 좋았을가」, 공상도 해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쪽을 憧憬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