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넷째 주일)
지혜를 찾는 삶
미6:6~8/ 고전1:18~31/ 마5:1~12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생애의 첫 일성으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닷가에서 그물을 던지던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회개하라”는 공생애 첫 말씀과 “나를 따라오라”는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 모두 세례 받은 우리 자신들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디까지 초대하십니까? 그리스도로 변형하는데까지! 에베소서4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까지” 우리를 초대하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가 어디까지인지는 잘 몰라도, 지금 우리의 잘못된 지도를 바꾸어, 우리의 잘못된 행복의 방향을 바꾸어, 더 행복한 길로, 지혜의 길로 나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의 그 깊은 의미를 아직은 다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라고 했던, 자기를 비워 죽기까지 순종했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여정에서 앎이란, 우리의 머리로 다 알아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믿음은 알지 못하는 길을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나가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 길을 나섰지요.
오늘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진복팔단)을 읽었고, 제2독서에서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째 편지인 고린도전서의 도입부를 읽었습니다. 오늘 이 두 본문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지혜”의 말씀 혹은 “지혜”에 관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소위 “지혜 문서”라는 거지요.
여러분이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지만, 고린도전서의 본문에는 “지혜”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지만, “팔복” 말씀에는 “지혜”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이 끝나는 7장 마지막 단락에서 설교를 마치시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라고 하시고, 또 “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 사람과 같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지혜의 말씀”을 대변하는 말씀입니다. 지혜자로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여러분, 지혜가 뭘까요?
우리에게 지혜는 보통 나이 많은 노인들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인의 이미지는 보통 노인의 이미지이지요. 사회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이 우리 인간의 전 생애를 8단계로 나누면서,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에 자신의 삶을 절망할 것인가 통합할 것인가 라는 위기와 과제를 이야기했을 때, 이때 통합성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덕목이 바로 지혜였지요. 그래서 노인과 지혜는 잘 어울립니다.
에릭슨은 통합성이라는 말을 이렇게 설명하지요. “통합성은 내 인생을 다르게 살았더라면 하고 바라지도 않고, 자신의 고유한 인생과 그 안에서 중요한 사람들과 함께 한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평생을 걸쳐 자신의 삶 안에서 빛과 어둠, 선과 악, 고통과 기쁨, 믿음과 의심, 강인함과 연약함, 내면과 외면, 고요와 소란, 이런 모든 대극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지만, 그것들이 각각의 경험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안에서 통합되어 재조직되고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납니다. 여기서 지혜가 생기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다양한 것들을 이질감, 차별, 구별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안에서 조화와 일치를 보겠지요.
그러니까 지식과 지혜가 많이 달라요. 지식은 단지 드러난 객관적인 그러나 단편적인 사실들이라면, 지혜는 그 모든 사실들을, 비록 서로 상반되는 것까지도, 받아들여 통합한 것입니다. 이때 부조화와 이질감은 그대로 남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합하여 지혜가 됩니다. 이때 이 지혜는 지식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의식이 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전통에서 지혜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 그 이치들 이면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통일시키시고 조화시키시고 일치시키는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보는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활동이 우리가 보고 싶다고 다 보이나요? 그렇지 않지요.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그저 자신이 보는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우리의 보는 것이 얼마나 한계가 많은가요?) 많은 것을 “신비”로 “여백”으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을 우리가 판단하지 않고 “신비”로 “여백”으로 남겨놓는 중에 우리는 참된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서두인사를 마치자마자,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바로 들어갑니다.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 안에 분파가 있었다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가장 큰 동기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앞부분을 보면, 고린도교회는 여러 파당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까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따르는 지도자들의 이름을 앞세워 파당을 만들고 자신들끼리 뭉친 겁니다. 이런 일들은 사실 우리 인간사에서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라고 말하며 매우 가슴 아파합니다. 그러면서 이 문제를 3장까지 길게 다루는데, 지혜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유명한 항구도시였던 고린도는 그리스 철학(헬라 철학)과 수사학이 아주 발달된 지적인 도시였습니다. 소위 세상 지식의 최첨단을 걷는 도시였습니다. 이 최첨단의 지식에 비하면, 바울이 전한 기독교의 진리는 좀 무모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한 “십자가”는 그리스 사람들이 보기에 말도 안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18절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로고스, 道)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시킵니다.
세상에 지혜가 있습니다. (지식이라고 해야 좋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 지식으로는 하나님은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합니다. 오히려 세상의 지혜자, 다시 말해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추고,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 즉 약하고 비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사람(헬라)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기적을 보여줘야 믿으려고 했지요. 예수님에게도 늘 기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으로만 알았으니까요. 또한 헬라인들은 세상의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어서, 십자가는 말도 안되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그렇지요. 한편에서는 기적을 원하고 한편에서는 지식을 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기적으로 보면 실패한 것이고, 세상지식으로 보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를 기뻐하신다”(21절)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23절)라고 합니다.
십자가 형틀에 달린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다? 그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논리적으로 무장된 그리스 철학에서 볼 때는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지요. 그러니까 지금 바울의 얘기는, 당시 최첨단의 지식을 자랑하는 그리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지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확신하건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시키지만, 바울도 사실은 세상의 지혜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명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헬라 철학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의 글 솜씨는 수사학적 훈련을 충분히 받은 사람의 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 모든 것을 분토처럼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것들이 쓸데없다는 말이기 보다는, 그의 예수 그리스도 경험이 너무나 깊어서 그것에 비하면 내가 알았던 지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세상의 지혜보다 더 깊은 지혜를 찾았던 것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넘어서서(세상의 지혜를 넘어서서) 그 이치의 근원을 만났던 것입니다.
교회가 각자의 생각대로, 각자의 경험대로, 각자의 신념대로, 각자의 지식대로, 나뉘어져서 분파를 이루는 상황을 보면서, 그 모든 것은 파도의 표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울은 안 것입니다. 그것들은 조화되고 포용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근원을 분명히 알면, 사실은 사람들이 사는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 근원에는 소위 지혜 있다는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백지로 만드는 원점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 자랑스러운 것, 강한 것, 소위 세상에서 먹히는 모든 것, 세상의 지혜가 원점이 되는 자리가 십자가였습니다. 모든 것을 비운, 한없는 여백(케노시스)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진정한 아멘(승복)이 있고, 진정한 자유가 있고, 깊은 유연성이 있으며, 따라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세상의 화려한 지혜로 보면, 이 비움과 여백은 어리석어 보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불안하고 초조할 수도 있습니다. 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고, 더 소유해야 할 것 같고, 더 붙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비움을 경험한 사람, 그 원점과 여백, 그 자유를 경험한 사람은 십자가, 이 비움과 여백이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1:25)
오늘 마태복음 산상수훈을 세상의 지혜로 보면, 지혜가 아니지요. 오히려 어리석기 그지없지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 심지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 세상에 이런 복을 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팔복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세상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복을 받는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할 것이다, 만사형통할 것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 것이다,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나님이 위로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라 부르실 것이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말씀하십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말씀이나 배부를 것이라는 것도, 우리가 말하는, 더 많은 것을 가질 것이라는 말과는 다른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이것을 온전히 알아차려가는 과정, 이것이 참된 지혜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미가서에서 지혜는 일상의 삶을 건강하고 지혜롭게 사는 일로 나타납니다. 오늘 미가서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많은 번제물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수천수만의 기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자식을 바치는 투신의 행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공의를 실천하는 것, 다시 말해, 편견과 판단 없이, 사심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지요. 특별히 사람들을 편견과 판단 없이 만나고 사심 없이 만나는 거지요.
인자를 사랑하는 것―헤세드를 사랑하는 것, 헤세드는 변함없는 신실한 마음입니다. 변함없는 신실한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들을 대하는 거지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조심스럽게<하쯔네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 비움과 여백의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고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씩 그분과 함께 걷는 것!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입니다.